벤자민 프랭클린효과
벤자민 프랭클린은 미국을 상징하는 인물이면서 많은 사람이 그의 삶에 대한 태도와 전략을 배우고 싶어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인쇄공으로 출발해 신문사를 경영하였고, 식민지 미국 사회 지도자로 성장하면서 마침내 미국 독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또 피뢰침을 발명하는 등 발명가로서 명성도 얻었습니다.
‘프랭클린 익스프레스’는 저널리스트 출신 저자(에릭 와이너)가 프랭클린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하면서 그의 삶을 다시 그려낸 책입니다. 협업스킬이라는 관점에서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통찰력은 이른바 ‘벤 프랭클린 효과(Ben Franklin Effect)’라고 불리는 협업스킬입니다.
프랭클린 효과란 ‘나를 도와준 사람은 내가 도와준 사람보다도 더 기꺼이 또 다른 도움을 베풀려 한다’는 심리를 뜻합니다. ‘도와줬다’는 우월감과 ‘투자했다’는 심리는 무의식적 호감과 믿음으로 이어져 동지를 만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 심리학에서 프랭클린 효과를 실험을 통해 증명하기도 하였습니다.
협업스킬의 핵심중 하나는 남의 시간을 기분좋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좀 과격하게 표현하면 기분좋게 남의 시간을 빼앗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다른 사람이 나를 도와줘서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감정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잘해줬다고 해서 그 도움을 받은 사람이 은혜를 갚을 것이라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내가 도움을 줬다는 우월감에 빠져 남 돕기만 하고 정작 본인은 도움을 받지 못하고 기분만 나빠질 확률이 높습니다.
‘프랭클린 익스프레스’중에서 <프랑프 프로젝트>편을 골라서 발췌독서하였습니다.
프랑스 프로젝트_10줄 요약
배경 요약
1.1776년 미국의 독립 전쟁당시 조지 워싱턴의 대륙군은 탄약과 보급품, 공병, 군함, 심지어 군복마저 궁한 상태였다. 이 모든 것을 마련하는 데는 돈이 필요했고 어린 미국에는 사실상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그렇다고 신용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프랑스는 미국을 도울 수도, 돕지 않을 수도 있었다.
미국은 프랑스의 도움 없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었다. 미국의 대의에 동참해달라고 프랑스를 설득하기란 쉽지 않았다. 프랑스는 지난 세기에 영국과 네 차례 식민지 전쟁을 치렀고 루이 16세는 다섯 번째 전쟁에 말려들기를 원치 않았다. 이 전쟁의 목표가 또 다른 군주를 몰아내는 것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미국은 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영국군은 조지 워싱턴의 오합지졸 군대를 롱아일랜드에서 뉴저지까지 완전히 밀어냈다. 전망이 좋지 않았다. 벤은 프랑스의 지원을 얻어내려면 전쟁 소식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2.벤자민 프랭클린은 1775년 영국에서 귀국하여 제2회 대륙회의의 펜실베이니아대표로 뽑혔고 76년 독립선언 기초위원에 임명되었다. 그해 프랑스로 건너가 아메리카-프랑스동맹을 성립시키고, 프랑스의 재정원조를 획득하는데 성공하였다. 1783년 파리조약에는 미국대표의 일원이 되었다.
3.프랭클린은 프랑스-아메리카 동맹을 1778년에 성사시켰고, 이어 1785년에 파리조약을 성사시킨뒤 1785년 미국으로 귀환하였다.
프랑스를 사로잡아 독립전쟁에서 승리할 결코 만만치 않은 일곱 단계
1. 가진 것을 활용하라.
벤은 직원이 없었으므로 윌리엄의 아들인 자신의 손자 템플을 개인 비서로 임명했다. 두 사람의 외모가 꼭 닮았고 둘이 늘 함께 다녔기 때문에 사람들은 템플을 “작은 프랭클린”이라고 불렀다. 벤은 템플이 “내 오른손”이라고 말했다. 벤은 다른 측면에서도 임기응변을 발휘했다.
미국은 아직 국기가 없었기 때문에 벤과 다른 위원들은 프랭클린의 개인 인장과 그가 채택한 문장紋章을 사용해 공문을 보냈다. 미 대사관에 인쇄기가 없었기 때문에 벤이 직접 하나를 설치해 미국 여권과 법률문서, 대사관 연회 초대장을 찍어냈다.
직접 쓴 바가텔을 인쇄해서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벤은 프랑스 과학계와 비밀조직 프리메이슨Freemason 같은 사회집단에 참여해 자신의 부족한 사회적 입지를 보완했다. 벤에게는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또 다른 수단이 있었다. 만질 수는 없지만 매우 강력한 그 수단은 바로 명성이었다.
프랑스인이 벤 프랭클린을 사랑했다는 말은 미국인이 푸짐한 양을 사랑한다는 말과 비슷하다. 즉 지나치게 절제된 표현이라는 뜻이다. 프랑스는 프랭클린을 열망하는 광팬들의 국가였다. 벤이 프랑스 의회에 참석하면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명성은 강력한 힘이다. 좋게도 나쁘게도 쓰일 수 있다. 프랭클린은 이 힘을 좋은 곳에 사용했다.
2. 공감하라.
아서 리를 비롯한 미국 위원들은 프랑스 정부를 거대한 현금 인출기로 여겼다. 프랭클린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들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았고 그들의 욕망과 두려움을 이해했다. 그는 미국이 편리한 시기에 돈을 부탁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예산 집행에 맞춰 지원을 부탁했다.
한 역사가는 프랭클린에게 “프랑스를 성가시게 하면 안 된다는 상식적 판단이 있었다”고 말했다. 벤의 공감력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의 성장 환경이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다른 건국의 아버지들과 달리 벤은 특권층이 아니었다. 그는 숙련공이었고 가죽 앞치마였다.
인쇄공이라는 직업이 공감 능력을 키웠다. 인쇄공은 다양한 관점을 드러내는 글들을 다뤄야 했다. 게다가 활자는 위아래와 좌우가 뒤집어진 상태로 배열해야 한다. 벤 같은 인쇄공들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 익숙했다.
3. 적을 무시하라.
조롱하면 더욱더 좋고. 프랭클린은 적을 굳이 찾아 나서지 않았지만 그들이 프랭클린을 찾아왔다. 조지 3세는 프랭클린을 “음흉한 인간”이라고 칭했다. 이런 날카로운 비난 앞에서 벤은 늘 무시하는 전략을 택했다. 증오에 증오로 맞서면서 원한의 불길을 부채질하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유머로 맞섰다. 주프랑스 영국 대사였던 스토몬트 경은 벤의 두툼한 엉덩이에 박힌 가시와도 같았다. 벤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을 절대 배척하지 않았다. 늘 문을 열어두었고 다리를 남겨두었다. 이런 태도가 큰 도움이 되었지만 때때로 벤은 사람을 너무 믿기도 했다.
에드워드 밴크로프트의 경우가 그랬다. 그는 벤의 다정한 친구이자 왕립학회의 동료 회원이었으며 비공식 미 대사관의 비공식 비서였다. 그리고 영국의 스파이기도 했다. 8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밴크로프트는 매주 화요일 오후 9시 30분에 파리 튀일리 정원에 남몰래 숨어들어 속이 빈 나무 안에 밀봉한 병을 집어넣었고 나중에 영국 첩자가 그 병을 회수해갔다.
4. 도량에 호소하라.
프랭클린은 다양한 방식으로 프랑스를 설득했는데, 그중 하나는 프랑스의 이익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그는 프랑스 관료들과 상인들에게 미국이 독립하면 거대한 시장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일러주었으며, 통상조약을 체결해 미국 항구를 프랑스 선박에 개방할 가능성을 내보였다(미 그 내용은 친구 새뮤얼 쿠퍼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우리의 대의가 곧 인류 전체의 대의이며, 우리가 자신의 자유를 옹호함으로써 인류 전체의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것이 이곳의 공통된 의견이라네.” 미국을 돕는 것은 돈만 밝히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건 숭고한 행위였다. 그건 “도덕적 아름다움”의 사례였고, 우리가 순수한 이타심을 목격할 때 경험하는 형언할 수 없는 고양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벤이 알았듯 그러한 느낌은 강력한 동기를 부여한다.
그건 오래전에 벤이 “미덕의 아름다움과 쓸모”를 극찬할 때 머릿속에 떠올린 것이기도 했다. 오늘날 아름다움과 쓸모는 드문 조합이지만 프랭클린의 철학과 삶을 정의한 것이 바로 이 둘의 조합이었다.
오늘날 벤 프랭클린 효과라고 불리는 인간 본성의 기이한 특성 역시 동력으로 작용했다. 벤은 펜실베이니아 의회에서 서기로 일하던 1736년에 이 효과를 우연히 발견했다. 당시 “재력과 학력을 겸비한 신사”였던 의회의 새 권력자가 프랭클린을 미워하며 계속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벤은 이 의원에게 굽실거리며 아첨으로 환심을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길을 택했다. 벤은 이 의원이 희귀하고 귀한 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의원에게 그 책을 며칠간 빌려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의원은 그러겠노라 했고 벤은 며칠 뒤 예의 바른 메모와 함께 책을 재깍 반납했다.
“다음에 의회에서 만났을 때 그 사람이 먼저 내게 말을 걸었고(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태도도 매우 정중했다.” 벤은 훗날 회상했다. 두 사람은 친한 친구가 되었다. 벤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었다. “내가 도운 사람보다는 내게 친절을 베푼 사람이 내게 또다시 친절을 베풀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 사람은 자신을 도운 사람을 도와주고 싶지 않나? 꼭 그런 건 아니다. 프랭클린이 발견하고 최근의 다른 연구들이 입증했듯이 오히려 그 반대다.16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이다. 왜일까? 인지부조화가 한 원인이다.
모순되는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품기란 어렵다. 그러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우리는 마음을 바꿈으로써 이러한 긴장감을 가라앉힌다. 나는 조가 싫지만 지금 조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으니 결국에는 조를 좋아하는 걸지도 몰라. 그러나 더 단순한 설명도 있다. 우리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더 나아가 우리에게 그럴 기회를 주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5. 에너지를 전략적으로 사용하라.
벤을 깎아내리는 사람들의 말과 달리 벤은 게으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하루에 열두 시간씩 일했고 휴가도 거의 떠나지 않았다. 그는 열심히 일했지만 영리하게 일하기도 했다. 70대였던 벤은 자신이 에너지를 아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은 절대 추진력을 낭비하지 않고 효율적으로 움직인다. 프랭클린은 언제 발차기를 하고 언제 미끄러지듯 나아가야 하는지, 언제 (미묘하게) 압력을 가하고 언제 힘을 풀어야 하는지를 감지했다.
벤은 영국과 프랑스를 서로 균형을 맞추는 두 개의 힘, 본인들이 알든 모르든 평형상태를 추구하는 양전하와 음전하로 보았다. 그리고 기꺼이 이 관계를 이용해 둘 사이에 긴장을 자아내려 했다. 프랑스로 떠나기 전에 벤은 식민지 미국과 영국 사이의 가짜 평화안을 만들었다.
그는 프랑스 측에서 이 평화안을 보면 불안해할 것이며, 이 안을 이용해 미국을 지지하도록 프랑스를 압박할 수 있으리란 것을 알았다. 그는 만약을 대비해 이 문서를 주머니에 넣어두었지만 결국 사용하지는 않았다.
6. 감사하라.
프랭클린의 동료인 미국 위원들은 프랑스의 도움에 감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감사를 나약함의 증거로 이해했다. 미합중국이라는 전도유망한 신생 국가에 일찍 투자할 기회를 얻었으니 오히려 프랑스가 미국에 감사해야 했다. 프랭클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프랑스에 감사를 표했다. 프랭클린의 이런 감사 철학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 프랑스의 지원을 받았던 어린 미국뿐만 아니라 벤에게도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프랭클린은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에서 크게 존경받는다. 다른 건국의 아버지들은, 글쎄, 애덤스 거리나 리 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만 해두자.
7. 넓은 시각을 유지하라.
벤은 프랑스에 머물던 시기에 “하루살이”라는 제목의 바가텔을 썼다. 수명이 겨우 하루뿐인 하루살이의 시각으로 쓴 글이다. 하루살이는 말한다. “나는 여러 세대가 태어나고 번성하다 세상을 떠나는 것을 지켜봤다네. 지금 나의 친구들은 젊은 시절 친구들의 자녀와 손주들이라네. 아아, 그 시절의 친구들은 이제 가고 없구나! 나도 곧 그들을 따라가야겠지.
지금 아무리 건강하다 한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내게 남은 시간은 7, 8분이 넘지 않을 테니.” 하루살이는 실의에 빠진다. 결실을 즐길 시간이 없다면 다른 하루살이들처럼 꿀을 모아봐야 무슨 소용인가? 친구들은 이 하루살이를 위로하며 후대에 이름이 남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하지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하루살이에게 명성이 무슨 의미가 있지?” 하루살이는 이렇게 벤의 생각을 대신 전한다. 나는 프랭클린이 이처럼 인생의 무상함을 예리하게 자각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라면 절대 견디지 못했을 폭풍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위험성이 극도로 큰 동시에 전혀 크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이 시기에 프랭클린의 나이가 무척 많았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가 더 어렸더라면 프랑스에서 이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젊은 프랭클린은 너무 풋풋하고 오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