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3년 리치몬드 빵폭동

남북전쟁이 한창인, 1863년 4월2일에 남부의 수도인 리치먼드에서 총과 돌을 든 여성노동자 수백 명이 거리로 나섰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식량을 살수가 없어서… 전쟁중에 인플레이션과 남부의 통화 약세로 인해 빵 가격은 5배나 뛰었습니다. 게다가 1863년 3월 남부군이 필요에 따라 식량과 기타 보급품을 압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인상법’을 통과시켜 상황을 악화시켰습니다. 

1863년 부활절 주간의 목요일인 4월 2일에 수백 명의 여성(및 일부 남성)이 리치몬드의 거리로 나왔습니다. 약간의 부상자가 보고되긴 했지만 폭동이라기보다는, 그야말로 배고파서 일어난 시위였습니다. 그들은 식품이 보관된 창고와 식료품점 등을 급습했습니다.폭동의 주동자라고 알려진 잭슨은 34세의 네 아이의 엄마이자 노천 시장에서 일하는 행상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리치몬드의 지도자들은 여성의 시위를 경시하고 ‘폭도’ ‘사회의쓰레기’로 비난하기 바빴습니다.

빵 폭동은 진정됐으나 여파는 계속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식량부족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비축한 식량자체가 부족해서, 군인도 민간인도 배고픔을 참아야 했습니다. 반면 북부의 군대와 주민들은 비교적 풍족한 식단을 누렸습니다.극심한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남부는 연속해 무리수를 두었습니다. 병력을 채운다며 징병 대상자를 늘렸고, 농사할 인력이 없는 상황에서, 식량부족을 더 악화시켰습니다. 남부의 패배는 무엇보다 식량부족이 아니었을까요?

이후 시위 참가자들은 재판에 회부되어 폭동죄로 기소되었지만, 100명 미만이 처벌을 받았다고합니다. 나이가 많고 가난한 많은 여성들이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더 젊고 옷을 잘 입는 여성들은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