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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생트의 역사


압생트의 기원은 의약 목적으로 쑥을 넣어 음료를 만든 고대 이집트인 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현대 압생트의 전신은 1792년 스위스에서 처음으로 증류 되었습니다. 처음 만든 압생트는 증류주에 쑥, 아니스, 회향 등 허브를 첨가해 다시 증류하는 방식으로 제조 되었습니다.

녹색을 띤 압생트는 ‘녹색 요정’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1840년대에 알제리에서 싸운 프랑스 군인들은 말라리아와 이질을 예방하기 위해 압생트를 투여 받았습니다. 실제 쑥은 가벼운 구충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19세기 후반 기생충이 프랑스의 포도밭을 황폐화시키면서 와인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그러자 압생트가 인기를 끌게 됩니다. 값이 저렴하고 알코올 함량이 높다는 특성 덕분이다. 알코올 도수가 45~74도로, 빨리 취할 수 있고 물에 희석해 여러 잔을 만들 수 있어 가성비가 좋았습니다.

다른 어떤 파리지앵보다 화가와 작가들이 녹색 요정이라 불리는 압생트를 즐겨 마셨습니다. 고흐의 경우, 압생트가 그의 정신 쇠약의 원인이었다고 여겨집니다. 그 밖에도 드가, 모네, 로트렉, 고갱 등 인상파 화가들도 압생트를 즐겨 마셨습니다. 시인 보들레르, 베를렌, 랭보도 압생트를 마시며 글을 썼다고 합니다. “압생트 한 잔은 세상 그 무엇보다 시적이다”라고 쓴 헤밍웨이와 마크 트웨인, 휘트먼 등 작가들도 19세기 중후반에 뉴올린언스의 술집에서 압생트를 즐겨 마셨습니다.

그런데, 압생트가 환각 작용이나 정신 착란을 유발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결국 1910년 스위스가 판매 금지 조치를 취합니다. 이어 프랑스, 미국 등에서 금지 조치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현대 연구에 따르면 쑥의 주요 활성 성분은 뇌의 인지 기능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압생트에서 발견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용량에서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판매 금지 조치는 2005년에 와서야 풀렸습니다. 스위스에서 제조가 다시 허용됐고, 미국 식품의약국 승인도 이뤄져 지금은 세계적으로 다시 생산과 판매가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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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아르노(1949~) 는?

2023년 프랑스명품그룹인 LVMH(이하 루이비통으로 칭함)의 시가총액은 5천억달러를 달성합니다. 시총기준 세계 10대 기업은 애플(1위), 마이크로소프트(2위), 알파벳(4위) 등 빅테크가 대부분입니다. 10위에 진입한 루이비통의 존재는 전통적인 기업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루이비통은 호황과 불황의 부침속에서도 성장세가 유지된다는 점에서 미국의 ‘빅테크’와 같은 존재라고 블룸버그는 평가합니다.

그동안 기업은 차별화된 기술력이나 가격경쟁력, 덧붙이자면 참신한 마케팅 등으로 평가되었습니다. 그런데 루이비통의 존재는 그것과는 뭔가 다른 흥미로운 존재입니다. 아르노회장의 캐릭터때문입니다. 그는 스티브 잡스에게 아이폰은 30년후에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1921년 첫 빈티지가 나온 돈 페리뇽은 세월과 상관없이 여전히 마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찌보면 흔한 소비재이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오래된 명품 브랜드가 진짜 유망사업이라고 아르노 회장은 애둘러 말합니다.

아르노가 처음부터 명품기업을 운영한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의 건설업을 물려받은 아르노는 1980년대 초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프랑스의 사회주의 싫어서 찾아간 뉴욕에서 아르노는 탐욕스러운 자본주의를 배웁니다. 그는 귀국하자 당시 월스트리트에서 익힌 기업합병의 방법을 시도합니다. 매수처의 자산을 담보로 빚을 내어 매수하는 레버리지드 바이아웃(Leveraged Buy-Out)입니다. 

그가 처음 인수한 기업은 디올입니다. 디올의 모기업 부삭 그룹이 어려움에 빠지자, 당시 사회당 로랑 파비위스 총리가 부삭그룹의 인수를 제안합니다. 창업 38년 된 “크리스천 디올”을 그렇게 패키지의 일부로 인수합니다. 부삭그룹의 이익이 나지 않는 부문을 매각해 정상화시킵니다.

아르노 회장은 명품이란 역사와 전통에 브랜드 가치가 있으므로, 새로 만드는 것보다는 인수합병이 훨씬 시너지 효과가 크다는 판단합니다. 1980년대 후반에는 모에헤네시와 루이뷔통이 합병할 때, 적대적 인수를 시도해 결국 성공합니다. 이후 아르노는 크리스챤 디올에서 벌어들인 수익으로, 수많은 명품 브랜드를 인수해 지금의 루이비통 그룹을 일구었습니다.

주로 가족기업이었던 명품기업은 아르노의 공격에 하나둘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오래된 유명 브랜드의 대차대조표를 교묘하게 이용해 인수하는 방법은 한결 같습니다. 그렇게 루이비통은 75개 이상의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쇼킹하지 않으면 창조적이지 않다” 고 아르노 회장은 말합니다. 루이비통은 꿈과 환상을 소비자에게 심어주어야 합니다. 그 브랜드의 정체성은 디자이너로부터 소비자에게 훼손되지 않고 전달되어야 합니다. 고급진 마케팅을 위해 경쟁사보다 더 많은 돈을 투입합니다. 다양한 분야의 유명인의 명성을 이용해 루이비통 브랜드를 떠들석하게 전파합니다. 루이비통은 늘 시대에 맞춰 새롭게 움직입니다.

아르노는 또한 명품기업에 기계와 같은 효율성을 추구합니다. 제조 공정을 현대화해 라이선스 계약을 사용하지 않고 자사 제품을 주로 직영 점포에서 판매합니다. 지난 30년 동안 수십차례의 인수합병을 걸쳐 전 세계 5600여개 매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류부터 가죽제품, 보석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품들을 판매하는 매장입니다. 매장을 욕망의 신전으로 바꾸는 방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아르노회장입니다. 루이비통 매장의 영업이익률은 50%에 가깝다고 합니다. 

견고한 제국 루이비통이지만 미래를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70세를 넘기면서, 4남 1녀의 경영권 승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루이비통 본사 앞에서 지금도 시위가 있습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노동자 은퇴 시점을 늦출 게 아니라 루이비통 같은 부자에 과세하라” 외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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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의 사람들

2022년에 시작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이 지속되고 있고, 그 여파는 전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모든 일의 중심에는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푸틴은 2000년에 처음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총리로, 또다시 대통령으로 연임을 거듭해 24년째 장기 집권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의 80퍼센트가 푸틴을 지지하고 있다. 이러한 푸틴의 권력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저널리스트로서 오랫동안 푸틴 정권을 밀접하게 취재해 온 이 책의 저자 캐서린 벨턴은 〈푸틴의 사람들〉에 주목했다. 벨턴은 푸틴이 권력을 집권하기 이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어난 주요 사건들을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다각도로 조명한다.

전략적 현금 흐름을 푸틴이 장악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단지 그 나라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것 이상의 것이었다. 푸틴 정권의 입장에서 부는 러시아 시민의 안녕보다는 오히려 권력의 투사, 즉 무대에서 그 나라의 지위를 재주장하는 것과 더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푸틴의 사람들이 만든 시스템은 혼종의 KGB 자본주의였으며, 서방 공직자들을 매수하고 부패시키기 위한 현금의 축적을 추구했다.

드레스덴 시절 푸틴이 한 일의 대부분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데, 그 부분적인 이유는 동독 붕괴 직전에 문서를 파괴하고 이전하는 일에서 슈타지보다 KGB가 훨씬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었다. 「러시아인들 때문에 우리로선 문제가 많습니다.」 드레스덴 슈타지 기록 보관소의 연구원 스벤 샤를의 말이다. 「그들이 거의 모든 것을 파괴했기 때문이죠.」 슈타지에서 회수한 서류철 가운데 푸틴의 활동에 관한 내용은 그저 파편적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러시아는 소비에트 이후 최초의 대통령 선거를 한 해 앞두고 있었고, 정부의 국고는 텅 비어 있었다. 임금과 연금 지급은 몇 달째 연기되고 있었으며, 옐친의 지지도는 6퍼센트로 끔찍하게 낮았다. 재벌들은 공산주의로의 회귀를 두려워했는데, 그렇게 된다면 재산을 모조리 빼앗기는 것은 물론이고, 여차하면 교도소에 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소비에트 산업의 왕관 보석에 해당하는 것에 오랫동안 눈독을 들여 왔다는 점이었다. 즉 국가 소유인 최대 규모의 산업체들을 노리고 있었다. 이들이 지금까지 획득한 것들조차도 국가의 통제를 받는 이 방대한 자원들에 비하자면 그저 소규모에 불과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석유 집하장을 통해 수출을 통제하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해지자, 팀첸코는 푸틴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1992년 1월에 팀첸코는 우랄스 무역 회사의 판니코프와 손잡고, 푸틴의 해외 관계 위원회와의 합작 사업체인 〈황금 문〉을 설립했다. 이들은 경쟁 관계인 범죄 조직들이 포위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르첸코의 통제하에 있었던 기존 석유 집하장의 우회를, 나아가 서방의 자금을 이용한 새롭고 개선된 석유 집하장의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푸가체프의 말에 따르면, 그는 막후에서 오래전부터 자기 나름의 후보자를 밀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야말로 가장 안전하고 가장 충성스러운 하수인이라고 믿었다. 즉 그는 푸틴을 밀고 있었다. 푸가체프는 그가 스쿠라토프의 테이프 사건을 매우 냉철하게 다루는 모습을 지켜보며, 처음으로 그를 잠재적인 후계자로 바라보게 되었다.

푸틴이 뭔가 다른 유형의 권력을 만들어 내고 싶어 한다는 신호는 처음부터 있었다. 처음에만 해도 낙관주의자들은 그가 자기 정권에 포진한 좀 더 자유주의적이고 좀 더 친서방적인 옐친 패밀리에 대응하여 균형을 맞추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 안보계 사람들을 데려와 긴장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기대했다. 하지만 KGB 사람들의 영향력이 점차 나머지 모두를 훨씬 압도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세계관은 냉전 논리로 기울어져 있었으며, 점차 그런 세계관이 푸틴을 규정하고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러시아의 힘을 회복시키려 추구하면서, 미국이 자국의 해체와 자국의 힘의 약화를 추구한다고 간주했다. 이들이 보기에 경제란 최우선적으로 러시아라는 국가의 힘을 회복하기 위한, 아울러 서방에 대항하기 위한 무기로써 이용되어야 마땅했다.

푸틴의 사람들이 보기에, 옐친 시대의 전형적인 올리가르히 중에서 가장 상징적인 인물은 바로 베레좁스키였다. 이들은 그를 비난하고 혐오하는 것만큼이나 두려워하기도 했다. 베레좁스키는 옐친 시대의 내부자 거래의 전형이었으니, 그 시절에 소수의 사업가들끼리 주요 자산과 정부 직위를 막후에서 거래했던 것이다. 특히 KGB 사람들은 체첸 공화국의 분리주의 지도자들과 유대를 맺었다는 이유로 이 올리가르흐를 불쾌하게 여겼으며, 체첸인과 관련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증오했던 파트루셰프가 특히나 그렇게 여겼다.

푸틴의 대통령 취임이 자국의 혼란스러운 시장으로의 이행의 합법화를, 즉 1990년대에 획득한 것의 공고화에 대한 신호를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이 신임 대통령이 그토록 폭넓은 지지를, 특히 중요하게도 옐친 패밀리로부터 지지를 얻은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비록 언론 재벌을 무자비하게 제거하기는 했지만, 푸틴은 다른 어느 분야에서도 국가 소유를 늘리기를 원한다는 암시를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올리가르히를 굴복시키겠다고 위협하는 소란을 상당히 많이 일으키기는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1990년대의 민영화를 번복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러시아가 자국의 통제를 벗어나 있는 전 세계 에너지 가격에 압도적으로 의존한다는 사실 때문에, 푸틴 정부에서도 더 자유주의적인 분파에서는 오래전부터 탈출구를 모색해 왔다. 옐친 시대에는 정부도 연이은 위기에서 벗어나느라 너무 바빴던 까닭에, 석유와 가스 세입에 대한 러시아의 의존도를 감소시키지 못했다. 세금을 징수하려 안간힘을 썼던 그 당시의 정부로서는 사용할 수 있는 세원이 모조리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석유 가격이 급등하고 있었으므로, 정부에서도 더 자유주의적인 분파에서는 마침내 더 안정적인 상황을 (아울러 갓 피어나는 세입을) 이용하여 경제를 재편하려던 것이다.

목표는 내부 붕괴와 외부 공격에 대항하여 푸틴 정권을 보강해 줄 정체성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백계 러시아인 망명자들의 직계 후손들을(그중 상당수는 이미 KGB와 긴밀히 연결된 상태였다) 푸틴의 이너 서클로 끌어들여, 러시아의 제국적 과거와의 가교 건설을 위한 노력을 주도하게 했다.

푸틴은 해외 투자자들을 위해 깜짝선물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역 주지사 선거 폐지를 발표한 바로 다음 날, 크렘린은 세계에서 가장 큰 에너지 대기업을 만들 계획이라고 시장에 알렸다. 즉 국가에서 통제하는 가스 대기업 가스프롬과 국가에서 소유한 마지막 석유 대기업 로스네프트를 합병함으로써,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매장량을 통제하고, 서방의 가장 가까운 상응 기업인 엑슨모빌보다 다섯 배나 큰 초거대 회사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 기업 아람코와 달리 이 새로운 회사는 서방 투자자들이 지분을 보유할 수 있도록 개방될 예정이었다.

소가스 매각은 이와 유사하게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이루어진 일련의 거래의 시작을 상징했으며, 이 일련의 거래를 통해 한때 가스프롬이 보유하던 금융, 산업, 언론 매체 자산 중에서 수백억 달러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절부터 푸틴의 동맹자였던 코발추크의 본거지인 방크 로시야로 빠져나가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푸틴의 전략적 (그리고 개인적) 필요에 따른 대규모 〈옵스차크〉, 즉 돈주머니 형성의 시작이었다. 아울러 이는 새로운 올리가르히 카스트의 대두를 세상에 알렸다. 이들은 하나같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절 푸틴의 KGB 관련자들이었으며, 그중에서도 방크 로시야의 대주주들은 대부분 푸틴의 오제로 별장 협동조합의 구성원이기도 했다.

팀첸코는 군보르와 푸틴 사이의 그 어떤 관계도 거듭해서 부정했으며, 자사를 향한 제재는 러시아 정권을 겨냥한 압박 시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제네바의 금융업자들로 이루어진 네트워크를 보면(그중 몇 명은 팀첸코와 일한 바 있다), 러시아 대통령과의 연계의 발자취가 드러난다. 이들은 또한 더 커다란 전략적 목표에 대한 암시도 제공한다. 그중에는 볼셰비키 혁명 이후 해외로 도피한 이래, 러시아 제국의 회복을 꿈꾸면서 오랫동안 KGB와 유대를 맺어 온 백계 러시아인 귀족의 후손들도 있다. 이들이야 당연히 러시아의 제국적 세력의 회복을 지지했으므로, 푸틴의 사람들이 경제를 장악하게 되자 모든 단계마다 지원해 주었다.

이때야말로 풍요와 안정의 시기였다. 이 모두를 추진한 석유 가격의 급상승은 푸틴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지만, 러시아를 구원한 차르로서 푸틴의 마치 신과 같은 지위가 확립되었다. 이것이야말로 러시아 국민이 자국 대통령과 맺은 것처럼 보이는 암묵적 협약의 일부였다. 사람들은 크고 작은 사업에 대한 FSB와 각종 법 집행 기관의 자의적 권력의 확장이며, 국가의 부패의 확대를 눈여겨보지 않기로 선택했다. 자기네 월급이 늘어나는 한, 마침내 안정이 있는 한, 언론 매체 탄압에 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메드베데프가 경제에 대한 국가 장악의 감소 필요성을 설교하고, 법 집행 기관을 향해 〈불유쾌한〉 업무를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와중에도, 푸틴과 세친은 정교하게 조준된 공격을 개시했다. 이것이야말로 푸틴의 국가 장악이 얼마나 정교해졌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였다. 조선소 매각을 통해 중앙은행에 대한 메즈프롬방크의 부채를 상환하기에 충분한 자금을 얻기는커녕, 푸가체프는 그 은행의 붕괴에 대한 책임이 있다며 비난만 받았다. 머지않아 그는 형사 사건 수사에도 직면하게 되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를 황폐화한 대리전에 계속해서 연료를 제공하면서, 서방 여러 정부도 소비에트 붕괴 이후에 자기네가 추구했던 희망적인 정책이 (즉 러시아의 서방 세계로의 합류는 불가피하리라는 생각이) 허상에 불과했다는 깨달음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들은 서방과의 대치 결과에 아랑곳없이 자국의 이익만을 공격적으로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정권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푸틴 정권은 오로지 자국의 전 세계적 위치를 회복시키는 것만을 최우선으로 놓고 있었다. 러시아는 서방이 지배하는 질서의 일부분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대신 자기네 나름의 규범을 세우고 싶어 했다.

러시아의 검은돈 수백억 달러를 서방으로 옮기게 될 몰도바 세탁소와 도이체 방크 거울 매매 같은 계책을 위한 길이 열린 셈이었다. 그 돈 가운데 일부는 호화판 아파트와 저택을 매입하는 데에 들어가거나 개인의 은행 계좌로 들어갔다. 또 일부는 재투자를 위해 러시아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자금 가운데 일부는 범죄 조직과 연계된 자금과 중개업체로 이루어진 그물망을 통해 미국 주식 시장에 투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훗날 영향력을 매수하는 데에 사용될 수도 있는 비자금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새로이 생겨난 종교적 열성은 사실 대부분 위장에 불과했다. 러시아 내부에서 정교회와 국가의 결합은 민주주의의 모든 잔재에 대한 부식에서 또 하나의 요소에 불과했다. 지배 엘리트는 정교회로 선회함으로써, 자기네 시스템 바깥에서 활동하는 사람 모두를 추가로 탄압할 수 있게 되었다. 「저는 그들을 정교회 탈레반이라고 부릅니다. 그거야말로 중세로의 귀환이지요. 그들은 종교를 이용해서 헌법을 잠식하고, 러시아 시민의 기본권을 잠식합니다.」 한때 푸틴의 멘토였던 솝차크의 아내 나루소바의 말이다.

트럼프는 대통령으로서 여전히 푸틴의 KGB 사람들의 여러 가지 꿈에 응답했다. 그는 한편으로 자신이 오래 견지한 미국 우선주의적 사고방식을 따라서, 또 한편으로 혼란스러운 의사 결정 방식을 따라서 움직였다. 하지만 트럼프는 곧바로 푸틴과 그의 서클에 대한 자신의 경의를 분명히 밝혔다. 대통령 임기 시작과 동시에, 전례가 없었던 대통령 집무실 회동에서 그는 러시아 외무 장관 세르게이 라브로프와 미국 주재 러시아 대사 세르게이 키슬랴크에게 자신은 러시아가 대통령 선거에 개입했다는 미국 첩보계의 주장을 우려하지 않는다고, 왜냐하면 미국도 다른 어디에서나 똑같이 행동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머지않아 트럼프는 서방의 질서를, 즉 냉전 종식 이후 지배적이었던 안정적인 동맹을 깨트리기 시작했다. 선거 유세 동안에 그는 나토를 퇴물이라고 주장했으며,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을 인정할 수도 있다고 암시했다.

푸틴과 그의 안보계 사람들이야말로 바로 이 시스템에 가장 단단히 매여 있는 장본인들이다. 자기네 권력을 지지하기 위해서 그 모든 일을 하고 나자, 그들로선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자기네 서클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푸틴은 모든 정적을 확고하게 제거하고 자기 손에 권력을 집중시킴으로써 자신을 상자에 가둔 셈이 되었으며,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 보니 사실상 빠져나갈 길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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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5월 15일, 소련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

친공산당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한 지 8년이 넘은 소련군이 철수를 시작합니다. 이 사건은 길고 피비린내 나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1979년 12월 소련군은 내부 반란의 위협을 받고 있는 공산주의 친소련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처음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입성했습니다. 단기간에 수천 명의 러시아군과 지원 물자가 아프가니스탄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그리하여 자국의 공산주의 정부와 이를 지원하는 소련군을 반대하는 아프간 무슬림 반군과의 군사적 충돌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8년 동안 양측은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기 위해 싸웠고 소련군도 반군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소련 의 경우 개입은 여러 가지 면에서 엄청난 비용이 들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15,000명의 러시아 군인이 사망하고, 전쟁 비용도 수십억 달러에 달했다고 추정합니다. 개입은 또한 소련과 미국 간의 관계도 악화시켰습니다. 지미 카터(Jimmy Carter) 대통령은 러시아와 군비 제한에 관한 회담에 응하지 않았고, 경제 제재를 가했다. 심지어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콧을 명령하기도 했습니다.

1988년 소련은 상황에서 벗어나기로 결정했습니다. 러시아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아프가니스탄의 개입이 소련 경제를 어렵게 마든다고 생각했습니다. 러시아 국민은 많은 서구인들이 “러시아의 베트남”이라고 부르는 전쟁에 지쳤습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소련의 철수가 전투의 종식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슬람 반군은 결국 1992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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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버블

1720년 영국에서 ‘남해회사 거품 사건’이 터졌습니다.17세기 프랑스, 스페인과의 전쟁 등으로 국채가 급속히 증가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재정 부담을 덜기 위해, 1711년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를 설립합니다. 1720년에 회사가 국가 부채를 인수하는 제안이 의회에서 통과하자, 회사가 국채를 매입하도록 하고, 그 댓가로 영국 정부가 남미 지역의 무역 독점권을 보장했습니다. 따라서 남미 지역과의 노예 무역으로 회사가 성장하고, 이익을 창출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이 남미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남해회사는 살기위해 찾은 방법은 주식투자(또는 주가조작)입니다. 당시 프랑스는 존로가 주도하여 미시시피 프로젝트의 지분을 매각하여 왕정의 부채를 상당 부분 탕감했습니다. 그러자 영국의 존 블런트로 같은 방법을 영국에 적용합니다. 블런트는 국채 보유자들에게 회사의 새 주식으로 교환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남해회사가 이룬 막대한 부에 대한 소문을 퍼뜨립니다. 그런 후 회사는 대중에게 몇 가지 새로운 주식 공모를 발행했습니다. 투자자들은 할부로도 주식을 지불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영국은 투기 광풍에 휩싸여, 남해회사 주가는 10배 이상 오릅니다. 회사는 광풍이 지나가자 두려움에 떠는 투자자들이 이제 남해 회사주식을 매도하면서 폭락합니다. 그결과 수천 명의 투자자들이 재정적 파탄에 빠졌습니다. 나중에 정부 조사에서 위기를 초래한 것과 관련된 뇌물 수수와 부패가 밝혀졌고 여러 정치인과 남해주식회사의 고위 간부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이 스캔들로 인해 일반적으로 영국 최초의 총리로 여겨지는 로버트 월폴이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는 스캔들에 책임이 있는 모든 사람들을 찾아내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국 정부 지도자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관련자들 중 일부만 희생시켰습니다. 남해기업자체는 1750년 스페인 정부에 대부분의 권리를 매각한 후 1853년까지 존속했습니다.

결국 영국 경제는 이후 100년 이상 주식회사를 현실적 제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남해회사 파산 충격으로 영국 경제의 성장과 산업혁명은 적어도 거품법이 폐지되는 1825년까지는 주식회사라는 근대적 기업제도가 활성화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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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5월 12일, 정주영 재벌해체 주장

정주영 현대 회장은 정치에 대한 실망 때문에,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합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필요한 경제 현안에 따라 정권과 기업이 주고받는 형식의 거래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5공과 6공은 상당히 일방적이고, 노골적인 후원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1992년 초에 정회장은 우선 통일국민당을 창당해서, 그해 3월 총선에서 31명의 국회의원을 당선시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합니다. 기존 대선공약에 더해 5월에는 “집권하면 1년 뒤에 재벌을 해체하겠다.”는 폭탄 공약을 내놓았습니다.

정 회장은 정주영, 388만 67표 받아 3위에 그쳤고, 김영삼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선거 후폭풍으로 현대는 대대적인 세무조사를 당했습니다. 당시 총자산 규모 1위 였던 현대는 거의 2년간 씨티은행 외에서는 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선거 패배 후, 현대그룹을 해체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정주영회장이 당선되었다면, 그는 현대그룹을 해체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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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년 5월 11일, 영국 퍼시발 총리 암살

1809년부터 영국의 수상이었던 퍼시발이 하원 로비에서 사업가 존 벨링햄이 그의 심장에 총을 쏴 죽였습니다. 러시아에서 발생한 전쟁 부채에 대한 정부 보상을 얻지 못해 격분한 상태였습니다.

퍼시벌은  법정 변호사로 일한 후 1796년 보수당원으로 하원에 입성했습니다. 1801년부터 그는 법무장관, 재무장관을 거쳐, 1809년 총리가 됩니다. 그 무렵 영국은 변화의 시대를 겪었습니다. 나폴레옹이 1806년 대륙 봉쇄를 시작하면서 영국은 무역과 재정은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윌리엄 윌버포스《노예 무역 폐지안》이 1807년 통과되었고, 러다이트 운동이 1811년에일어났다. 퍼시벌 총리를 죽인 암살자는 정신병자로 판명되어, 일주일 후에 처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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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 5월 10일, 미국 대륙횡단 철도 완성

1869년 5월 유니언 퍼시픽과 센트럴 퍼시픽 철도가 만나 대륙횡단철도가 완성되었습니다. 두 철도회사의 대표는 유타주에서 대륙횡단 철도를 연결하는 기념식을 진행했습니다. 드디어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륙 횡단 철도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서쪽으로 향하는 여행자들은 마차 열차를 타고 길고 위험한 여행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1832년 이후로 동부와 국경의 정치가들은 두 해안을 연결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1853년이 되어서야 의회는 대륙횡단철도를 위한 여러 경로를 조사하기 위한 자금을 책정했습니다. 그렇지만, 철도의 실제 건설은 남북간의 긴장때문에 늦어졌습니다.

남북 전쟁 1년 후 ,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는 태평양 철도법(1862)을 통과시킵니다. 대륙 횡단 노선인 유니언 퍼시픽과 센트럴 퍼시픽을 건설하기 위해 두 철도에 공공 토지 보조금과 대출을 보장했습니다. 이를 통해 1866년 오마하와 새크라멘토에서 철도 공사가 시작되어 전국을 가로지르는 북부 노선을 만들었습니다. 

혹독한 겨울, 엄청난 여름 더위, 서부 마을의 무법적인 상황때문에 철도건설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유니언 퍼시픽의 건설노동자들은 주로 아일랜드계의 남북전쟁 참전용사였습니다. 센트럴 퍼시픽의 건설노동자들은 주로 이주한 중국인이었습니다. 이들은 힘든 코스인시에라 네바다 산맥에 철로를 깔았습니다. 백인보다 낮은 임금을 받고 12시간 일을 했습니다. 눈사대타, 폭팔물 하고로 많은 사람이 사망했습니다.

그들이 겪은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유니온퍼시릭과 센트럴 퍼시픽 노동자들은 1869년 예정보다 앞당겨, 예산보다 적게 선로를 깔아 철도를 완성했습니다. 마차 열차로 몇 달이 걸리던 여행이 이제는 단 며칠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철도 건설 이후 몇 년은 미국의 급속한 성장과 확장의 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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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05월 09일, 증권시장재개

1962년 증권파동의 여파로 휴장했떤 증권시장이 73일 만에 드디어 재개했습니다. 영국의 ‘남해버블 사건 이후 최악’으로 말해지기도 합니다. 본질은 대통령 선거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주가조작 사건입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경제발전을 위해 자본시장 육성을 발표하고, 1962년 1월 ‘증권거래법’을 제정합니다. 대한증권거래소가 주식회사로 전환됨에 따라 주식투자가 가능해졌습니다. 이 법이 통과되기 직전인 1961년 12월 26일 대한증권거래소 주식(대증주)와 한전주가 폭등합니다.

중앙정보부와 당시 투자의 달인 윤응상을 중심으로, 급하게 만든 통일·일흥·동명 등 3개의 증권사가 대증주를 대량으로 매집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날 정부는 증권시장을 적극 육성하겠다고 발표합니다. 이에 주당 5전에 거래되던 대증주는 1962년 4월 18일에는 21환 10전까지 폭등하게 됩니다.

주가 폭등을 의심한 투자자들이 주식을 매도하기 시작하고, 주가는 급락합니다. 주가 유지를 위해 작전세력이 매수를 거듭해도, 매도 물량이 워낙 많아 급락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자금부족으로 투자자들에게 주식을 현금으로 바꾸어 줄 수 없는 ‘결제 불능 사태’에 직면합니다. 결제불이행 상태에 빠져 증권거래소는 6월 1일부터 휴장에 들어갔습니다.이 사건은 증권시장을 운영에 필요한 제도상의 미비점을 드러냈습니다. 주식시장의 발전에도 오랫동안 역효과를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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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마 운하의 파트너, 시어도어와모건

매킨리 대통령이 암살된후 시어도어 루즈벨트(1858-1919)가  42세의 나이로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미국의 26대 대통령 시어도어는 개혁적이며 제국주의적이었다. 그가 무엇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당시 대기업들과 금융가는 긴장했다. JP 모건(1837-1913)이 당연히 첫번째 타격이 된다.윌가를 대표하는 JP모건은 기업의 트러스트를 만들고 있었고, 대통령 시어도어는 기업의 독점화에 반대했다. 시어도어는 1901년에 모건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석탄 및 철도 거대기업 그룹인 노던 시큐러티(Northern Securities)를 기소했고, 1904년 연방대법원은 해체를 명령했다. 연이어 미국 산업을 독과점하던 43개 독점 기업을 제소했다.

그런 시어도어도 파나마운하 때문에 JP모건이 필요했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기 위해 파나마 지협을 가로지르는 운하를 만드는 꿈은 적어도 15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산악과 열대 지역을 가로지르는 운하를 실제로 만들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1800년대 내내 미국은 경제적, 군사적 이유로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운하를 원했다. 마침내 그 기회가 프랑스로 부터 왔다. 프랑스는 운하건설을 시도한 최초의 국가였다.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건설자인 드 레셉스가 이끄는 건설 팀은 1880년 해수면 운하를 건설하는 기공식을 가졌다.

그러나, 프랑스의 기념비적인 도전은 실패한다. 끊임없는 열대비는 계속 산사태를 일으켰다. 무엇보다 수천명의 건설노동자들이 황열병과 말라리아로 죽어나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열대의 전염병을 퇴치할 효과적인 수단은 없었다. 드 레셉스는 해수면 운하가 너무 어렵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갑문 운하를 위한 노력을 다시 시작했지만 때를 놓쳤다. 에펠탑을 만든 에펠도 참여해서 만든 운하건설을 회사는 1889년에 그만 파산한다. 당시 프랑스는 운하사업에 2억 6천만 달러 이상을 투자했고, 7천만 입방야드 이상의 흙을 굴착했다. 운하 벤처의 붕괴는 프랑스에서 큰 스캔들을 일으켰다. 그이후 에펠은 사업을 그만두고 과학 연구에 전념했다.

프랑스의 경험에서 예상되는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시어도어 대통령은 파나마운하를 개발하고 싶었다. 그는 한때 해군차관보였고, 역사에 미치는 해상력의 영향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다. 시어도어 대통령은 바다에서 패권을 가지려면, 상업뿐만 아니라 군사적 역량도 필수적이라 굳게 믿었다. 따라서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미국이 통제하는 운하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시어도어 대통령의 추진에 따라, 미국은 1902년에 운하 지역의 프랑스 자산을 4천만 달러에 매입했다. 운하건설을 위해서는 땅을 대여받아야 하는데, 콜롬비아가 거절한다. 그러자 미국은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1903년 11월 독립된 파나마 공화국을 인정한다. 그리고 파나마와 조약을 체결하여, 미국의 파나마 운하 지역의 독점적이고 영구적인 소유권을 보장받는다. 그 대가로 파나마는 1000만 달러와 25만 달러의 연금을 받았다. 

하나님조차도 만약 자금을 조달한다면 JP모건에게 의뢰할 수 밖에 없었다. 대통령 시어도어의 노력으로, 1902년 미국 의회가 드디어 프랑스 회사의 자산매입를 승인했다.이제 JP 모건의 시간이 왔다. 우선 운하건설을 시작하기 위해서 착수금이 당장 필요했다. 미국은 프랑스 자산을 매입하기 위해 4천만 달러가, 독립시킨 파나마의 영토를 사용하는 댓가로 천만 달러가 필요했다. 서로 다른 통화를 가진 국제적 돈거래는 말하자면 통화스왑을 해야했다. 이를 집행할 수 있는 사람은 국제 금융거래 네트워크안에서 다양한 거래를 하던 JP 모건밖에 없었다. 시어도어대통령은 그를 특별지급대리인으로임명한다.1904년에 J P 모건은 각 국가에 돈을 지불했고, 그 지불이 완결된 후 미국 재정부가 모건 앞으로 수표를 발행했다.

우여곡절 끝에 파나마 운하는 1904년 5월 건설을 시작하여, 1914년 8월에 완성된다. 건설 중이었던 1906년 11월 시어도어 대통령은 17일간의 파나마와 푸에르토리코 등 남미 순방을 시작한다. 그는 먼로주의를 넘어 미국 본토 밖에서 공식 외교 순방을 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운하 프로젝트가 실패할 것처럼 보이던 바로 그 순간, 재해와 질병 등으로 차질을 겪고 있는 파나마 운하의 진행 상황을 점검했다. 그는 더 나은 근무 조건을 또한 보장했다. 건설 현장을 방문한 시어도어 대통령은 직접 중장비를 조종하는 사진을 찍어, 그의 운하에 대한 진심을 미국에 보여주었다.

20세기 초 파나마 운하의 건설은 미국의 제국화 과정을 집약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파나마 운하는 미국이 가진 기술력의 우위와 생산력의 규모를 전세계에 보여주었다. 독보적인 공학적 성취인 동시에 라틴아메리카를 미국의 영향권에 두는 제국건설의 시작이었다. 파나마 운하로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의 가장 중요한 경제적ㆍ전략적 교차로에 제국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오늘날 파나마는역외금융의 중심지이다. 파나마 프로젝트에 자금을 투자한 JP모건이 아직도 그 역사뒤에 있다. 파나마가 역외금융 중심지로 발돋움하게 된 건 1927년 미국의 석유회사 스탠더드 오일이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세계가 대공황으로 고통받고 있을 때, 파나마는 또 다른 변신을 시도한다. 월스트리트의 도움과 안내를 받아 특히 선적 등록과 관련하여, 미로 같은 면세 법인 설립했다. 미국 은행들은 점차 파나마를 금융 중심지이자, 탈세 및 돈세탁의 안식처이자, 선적 통로로 바꾸는 데 앞장섰다.

JP 모건은 유럽에서 자본을 조달하고, 파산한 철도를 재편하고, 위기 상황에서 시장을 안정시키고,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는 많은 기업 및 재무 구조의 스탠다드를 만들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정치적 영리함과 포괄적인 비전을 결합해 제국주의를 향한 미국을 건설했다. 그 이후 30년 동안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세계 경찰력의 행사”라고 불렀던 이름으로, 미국은 카리브해 유역에서 30번 이상의 군사 개입을 감행한다. 시어도어 루즈벨트와 JP모건은 새로운 국가 파나마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둘 사이는 비록 애증의 관계였지만, 그래도 그 둘은 목표지향적 파트너였다.

191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파나마-태평양 국제박람회」의 공식 포스터는 한해 전 개통된 파나마 운하를 영웅 헤라클레스를 빚대어 표현했다. 이 포스터는 이 시대의 진짜 영웅은 미국이라고 말한다. 불가능 해보였던 인류의 숙원 사업을 완성시킨 것이 바로 미국의 힘, 미국의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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