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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9년 07월 14일, 예루살렘 함락

기독교도와 이슬람 세력의 충돌은 11세기 말부터 시작하여 1492년 서구의 ‘레콩키스타’(이베리아 반도 재정복)까지 400년이나 이어졌습니다. 셀주크 투르크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까지 위협하합니다. 그러자 동로마황제와 교황은 이교도의 야만적 침탈과 싸움을 선포합니다. 1095년 1차 십자군은 7주간의 포위 공격 끝에 예루살렘을 점령 합니다. 곧바로 도시의 무슬림과 유대인 인구를 학살하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 전기’를 쓴 역사가 사이몬 몬티피오리는 학살의 잔인함을 기록했습니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 제국 쇠망사’에 ‘광신에 따른 야만 행위’라고 기록했습니다. 수만명을 죽인 대학살은 1주일이 지나서야 겨우 수그러들었다. 부패가 빠른 한여름 예루살렘에 퍼진 시체 썩는 냄새는 몇 달이 지나도록 빠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점령이후, 시리아에서부터 팔레스타인에 걸쳐 이르는 중동 지역에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몇 개의 십자군 국가가 세워졌습니다. 88년 뒤 쿠르드족 출신 술탄 살라딘은 예루살렘을을 다시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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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7월 13일 첫번째 월드컵 경기

사상 첫 제1회 월드컵은 1930년 7월13일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열렸습니다. 올림픽의 한 종목에 불과하던 축구는 1920년 FIFA가 독자적인 국제축구대회 개최 계획을 발표하면서 월드컵으로 탄생했습니다. 첫 월드컵 참가국은 단 13개국. 이 참가국들도 월드컵 산파역할을 한 줄 리메 전 FIFA 회장의 노력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당시는 세계대전 전후 복구사업에다 대공황 와중이라 각국의 관심이 적었습니다. 더구나 아메리카 대륙의 9개국, 유럽 4개국이 참가한 월드컵은 경기규칙의 적용이 심판마다 달랐고, 공인구도 없어 갖가지 마찰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최초의 월드컵 축구 경기에서 프랑스는 멕시코를 4-1로, 미국은 벨기에를 3-0으로 이겼습니다. 월드컵 결승전에서 93,000명의 관중이 결승전을 보았습니다. 월드컵은 이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시청되는 스포츠 이벤트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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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12일,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1953년 6월 휴전 회담 최대의 난제였던 포로 교환 문제에 대한 양 측의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정전 협정이 가시화되고 있는 데 반해,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 문제가 더디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승만은 2만 7천여 명에 이르는 연합군 감시하의 ‘반공 포로’들을 직권으로 석방해버렸습니다.이는 정전 협정 자체를 무산시킬 수도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길을 바랬던 미국은 이승만의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1953년 7월 12일 한·미 상호 방위 조약에 합의하는 한미 공동 성명이 발표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전 협정 체결 후인 8월 8일,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미 국무장관 사이에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가조인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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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지애나 매입과 하이파이낸스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1803년 루이지애나를 1500만 달러에 사들인 것이다. 미시시피에서 로키 산맥까지 뻗어 있는, 당시 미국영토의 두 배 크기인 루이지애나를 1 제곱킬로 미터 당 5달러에 구매했다. 이 거래로 현재 미국 15개 주의 대부분이 탄생했다.

18세기 중반 프랑스는 뉴올리언스에서 오대호까지, 다른 어떤 유럽 국가보다 미국을 더 많이 지배하고 있었다. 프랑스가 만약 뉴올리언스의 점령하고 미국의 통행을 막는다면 미국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제퍼슨은 항구 도시인 뉴올리언스를 확보하기 위해 프랑스에 최대 1000만 달러를 제안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루이지애나 영토 전체의 매입을 요청했다. 아이티의 노예혁명을 진압하지 못했고, 영국 해군의 봉쇄로 프랑스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무엇보다 현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팔고자 했다.

프랑스와 미국 사이의 중개자 역할은 런던 베어링스 은행(Barings Bank of London)과 호프스 오브 암스테르담(Hopes of Amsterdam)이 맡았다. 두 은행은 프랑스 정부를 설득하여 해당 영토에 대한 요구 가격을 1억 프랑스 프랑에서 8000만 프랑스 프랑으로 낮추었다. 또한 거래 자금 조달은 미국정부의 대규모 채권 발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제안했다. 곧 미국정부가 부채를 떠맡고 보증하는 채권이다.

협상은 신속하게 진행되어 루이지애나 영토를 1,500만 달러에 구매하기로 했다. 프랑스에 발행된 채권은 국제시장에 상장된 최초의 미국 채권이다. 채권은 6% 이 이자를 지급하며, 만기는 발행일로부터 15년에서 20년 사이에 상환되는 조건이다. 현금이 필요했던 나폴레옹은 채권을 액면가의 약 86.5%에 두 은행에 양도하고 바로 현금 일시불로 받아 전쟁을 준비한다. 한편 두 은행은 채권을 유통시장에 광고하여 런던, 암스테르담 등 일반 투자자들에게도 판매한다. 두 은행은 미국과 프랑스의 딜을 중개하여 당시 국제 금융의 중심에 서게 된다.

루이지애나 매입은 그 자체로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 미국 땅의 두 배를 넓혔고, 미국 주권에 대한 유럽의 위협은 전쟁 없이 해결되었다. 미국 연방정부 채권의 이자 지급이 흠잡을 데 없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암스테르담에서 런던, 필라델피아에 이르기까지 일반 투자자는 미국의 부채 상환 보증을 신뢰했다. 미국 채권 보유자들은 1812년 대영제국과 전쟁을 시작했을 때에도 정부가 빚을 갚을 수 있다는 새로운 수준의 믿음을 얻었다.

500만 달러는 당시 미 연방정부 연간 세수보다 40%나 더 많은 돈이었다. 어떻게 미국은 매입 비용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최종 이자 지급액은 총액 2천 700만달러이고, 매년 이자만으로 67만5000달러를 지불해야 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주로 수입관세에 의존하는 제한된 부채 상환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매년 이자를 제대로 지불하는 것은 도전적인 과제였다. 당시 미국은 정해진 예산도 조세제도도 없는 신생 국가였다. 1803년 미 연방정부가 최초로 국제무대서 채권발행한 것은 그 자체가 사건이었다. 이제 현대 미국 하이파이낸스가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방정부는 매해 이자를 지불하기 위해 토지를 매각하고 항구에서 관세 수입을 징수했다. 1804년 1차 이자 지급이 만기가 되었을 때 미국은 적은 예산으로 운영되었지만 점점 더 복잡해지는 국제금융 세계에서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다. 알버트 갤러틴 재무장관의 현명한 예산 관리로 채권 상환을 위해 시민들에게 추가 세금을 부과할 필요는 없었다. 미국은 채권 보유자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고, 국가 신용에 신뢰감을 주었다.

채권의 세계에서는 ‘완전한 믿음과 신용’이 특히 중요하다. 미국 정부는 무조건적인 보증을 이행하고, 적시에 이자와 원금을 지불하기 때문에 미국국채는 ‘무위험’ 채권으로 간주되었다. 이후 210년 이상 동안 투자자들은 미국 정부가 제공하는 완전한 믿음과 신용 보증에 익숙해졌다. 보증은 불황, 공황, 내전, 두 차례의 세계 대전, 헌법 및 정치 지형의 수많은 변경을 견뎌냈다.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과 재무장관 갤러틴이 루이지애나 매입을 위해 연방정부 채권을 발행한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다. 그들은 농업사회를 신봉했고, 연방주의, 은행이나 부채에 적대적이었다. 경제발전을 위해 더 강력한 연방정부와 은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해밀턴과 끊임없이 갈등했다. ‘국가부채란 너무 많지만 않다면 국가적인 은총이다’고 말한 알렉산더 해밀턴을 비판했고, ‘국가부채는 국가의 저주’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들이 루이지애나 매입을 위해 상당한 규모의 국가부채를 받아들였다. 또한 공화주의자의 정적이었지만 대부분의 연방주의자와 달리 알렉산더 해밀턴은 루이지애나 매입을 찬성했다. 다만 해밀턴은 이를 ‘계획된 조치’가 아니라 ‘우연한 행운’이라 말한다.

연방주의자와 공화주의자는 미국의 미래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끊임없이 경쟁했다. 경제적 발전에 다양한 의견들은 서로 경쟁하면서 또한 서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루이지애나 매입 그리고 국제 금융의 성공적 등장은 그 누구보다도 알렉산더 해밀턴이 꿈꾸던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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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대통령의 은행전쟁

은행(전쟁)은 전쟁에서 태어난다. 트라팔가 해전(1805년)에서 패배 후,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를 단행한다. 나폴레옹에 대적하여 영국은 해상을 봉쇄한다. 미국은 중립을 선언하며 모든 국가와 자유로운 교역을 요구한다. 그러나 영국은 미국상선을 나포까지 하면서 프랑스와 교역을 차단한다. 수입관세에 의존하던 미국 연방정부의 세수는 급감하고, 독립전쟁 당시 영국에 대한 적대감이 다시 달아오른다.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은 1812년 6월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드디어 캐나다를 침공한다.

언제나 전쟁비용이 이슈였다. 재무장관 갤러틴은 국채발행을 추진했으나, 1811년 제1차 중앙은행을 해산했기 때문에 채권 매각이 막막했다. 제1차 중앙은행을 인수한 스티븐 지라드가 채권을 매입해주어 한 숨 돌렸지만, 개인에 의존한 조달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다. 영미전쟁(1812~1815)을 치르면서 미국은 중앙은행의 필요성을 다시 절감한다.

전쟁으로 인한 부채를 상환하고, 지폐가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무엇보다 중앙은행이 필요했다. 자신의 임기 중에 1차 중앙은행을 해산했던 매디슨 대통령은 마침내 두 번째 중앙은행을 승인한다. 그렇지만 초창기 제2차 중앙은행은 역할을 하지 못했다. 1823년 니콜라스 비들이 총재로 부임한 이후, 중앙은행은 비로서 안정적인 신용과 통화시스템을 운용할 수 있었다. 그 기반 위에 10년 동안 견실한 경제 성장이 이루어졌다.

이 무렵 강력한 중앙은행 반대자가 정치권에 뛰어들었다. 그는 바로 앤드류 잭슨이다. 노스캐롤라이나 출신 잭슨은 독학으로 변호사가 된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그는 부동산사업을 하면서 채권자의 사기에 휘말려 고생한 경험이 있다. 은행에 대한 강한 혐오감은 이때 형성되었다. 이후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승리하여 영미전쟁의 영웅이 된 잭슨은 1828년 대선에서 압도적인 표를 얻어 백악관에 입성한다. 잭슨은 동부 지역이 아닌 서부 지역 출신의 첫 대통령이다. 그는 대중을 상대로 직접 유세를 벌여 당선된 최초의 대통령이다. 새로 편입된 서부의 주들은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백인남성에게도 투표권을 주었다. 그의 당선은 토크밀이 목격한 바로 그 ‘대중 민주주의’의 승리였다.

잭슨은 자신의 인생 경험을 진리로 믿었고, 은행에 대한 그의 반감은 대통령이 되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그는 금과 은 같은 정화만이 돈이며, 지폐와 신용장, 어음, 수표 등은 일종의 사기라고 믿었다. 그의 눈에는 은행은 이런 사기꾼들의 집합이며, 중앙은행은 부자와 은행가들의 대변자였다. 그를 지지하는 서민들은 은행이 금융시장을 조작하고 인플레를 조장한다고 믿었다. 결국 땅값을 급증시켜 대지주들만 이익을 본다고 생각했다. 잭슨은 이들의 지지를 업고 중앙은행에 독점권을 주지 않기로 했다. 잭슨은 직설적이며 자신의 신념에 투철한 인물이다. 그는 집권 후 은행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며, 중앙은행과 전면전을 벌인다.

1832년 미국 대선은 중앙은행 허가 연장이 최대이슈로 부상했다. 미국 역사에서 이를 은행전쟁(Bank War)이라 부른다. 비들 총재는 잭슨에게 투표 한 사람이었고, 대선을 앞두고 잭슨과 합리적 해결방안을 찾고자 했다. 그렇지만 잭슨은 중앙은행 허가 연장안에 끝까지 이의를 제기했다. 이에 비들 총재는 의회를 압박하여 중앙은행 허가를 15년 연장하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잭슨 대통령은 이제 거부권으로 맞선다. 잭슨은 워싱턴에서 봉기를 일으킬 것이라는 보고를 받고 “시위대들이 워싱턴에 입성하면 즉시 교수형에 처할 것”이라고 했다. 의회는 대통령의 거부권을 결국 뒤집지 못했다.

그해 11월 선거에서 잭슨은 압승을 거뒀다. 중앙은행은 4년이나 기한이 남았지만 사실상 식물은행이 되어 버렸다. 잭슨은 재선 직후 중앙은행에 복수를 한다. 잭슨은 1834년 중앙은행에 예치한 연방예산을 빼내, 일반은행에 예치한다. 1836년 제2차 중앙은행은 펜실베이니아 주법에 따라 일반은행으로 전환된다. 잭슨은 퇴임 후 자신이 대통령으로 이룬 업적가운데 가장 큰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중앙은행을 죽여버린 것”이라 말한다. 그는 말하자면 신념에 따라 경제 민주주의를 실험한 것이다.

잭슨 실험의 후유증은 매우 심각했다. 제2차 중앙은행이 해산된 이듬해인 1837년 봄, 거품이 터졌다. 1837년 5월10일 뉴욕의 은행들은 지폐를 은이나 금으로 상환하는 것을 중단한다. 은행 파산으로 이어져 미국의 850개 은행 중 약 40%가 문을 닫았다. 심각한 경제난이 시작되어, 1838년1월에는 50만명의 미국인이 실업자였다. 부동산 가치는 폭락하고 수입도 급감했다.

물론 공황자체가 온전히 잭슨 대통령의 잘못은 아니다. 1837년 공황은 표면적으로는 미국 면화가격 폭락 사태에서 시작됐다. 면화 가격 폭락은 수천㎞ 떨어진 중국 청나라가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아편을 금지했고, 이어 대중 무역수지에 빨간 불이 켜진 영국이 면화수입을 줄였기 때문이다. 얽히고 설킨 세계경제가 공황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경제는 정치와 같이 옳고 그름의 싸움이 아니다. 잭슨의 잘못은 정치처럼 경제를 다룬 것이다. 만약 제2차 중앙은행이 존재했다면, 당시 사람들의 삶은 그래도 덜 고단했을 수 있다.

미국은 중앙은행 없이 70여년간 지내다가, 1907년 금융위기를 겪은 후 중앙은행의 필요성에 합의한다. 1913년에 연방준비법을 제정해 마침내 중앙은행을 설립한다. 이 은행이 진화와 발전을 거듭해 오늘날 연방준비제도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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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해밀턴, 아메리칸 시스템의 설계자

미국 건국 공신 알렉산더 해밀턴(1757~1804)이 21세기 브로드웨이 무대 위로 등장했다. 2015년 뮤지컬 ‘해밀턴’은 하나의 신드롬이었다. 미국 초대 재무장관 해밀턴은 그렇게 혁명적이며 역사적이다. 그로부터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가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가 없었다면, 19세기에 미국이 경제적으로 성취된 모든 일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연준의장을 네 번 연임한 앨런 그린스펀은 해밀턴을 ‘타고난 천재’라 평한다. 해밀턴은 신생 국가 미국이 농업이 아니라 상(공)업공화국이 되길 바랬다. 그의 아메리칸드림은 제조업, 무역, 도시가 발전한 나라 미국이다. ‘공동체에 다양한 산업이 형성되면 각각의 개인은 적절한 능력을 찾아 적성에 맞게 열심히 일할 수 있다’고 했다. 해밀턴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정교한 계획을 세우고 시스템을 만들어 나갔다.

그의 삶 자체가 그 누구보다 미국적이다. 건국 공신 중 해밀턴은 유일한 이민자였고, 바닥부터 올라간 사람이다. 해밀턴은 서인도 작은 섬에서 태어나, 사생아이자 고아로 자랐다. 그는 10대에 점원으로 취직하여 회계, 재고관리, 어음발행 등 상거래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익혔다. 17살에 신문에 실린 한 편의 글 때문에 뉴욕에 있는 현재의 콜롬비아대학에 갈 수 있었다.그리고 미국에서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전쟁에서의 영광’을 꿈꾸던 스무 살 젊은이는 독립전쟁에 참여해 조지 워싱턴 장군의 최측근 참모로 일한다. 워싱턴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1789) 초대 재무장관으로 해밀턴을 임명한다.

재무장관 해밀턴이 마주한 현실은 파산 위기에 빠진 조국이었다. 미국의 신용은 ‘총 맞은’ 상태였다. 독립전쟁으로 발생한, 이자에 이자가 붙은 7600만 달러의 부채를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갚아야 했다. 그는 ‘부채를 자유를 위한 대가’로 보고 ‘공적신용’ 곧 민간 투자자들이 매매할 수 있는 정부채권의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한다. 우선 주정부의 전쟁 부채를 연방정부가 떠안는 결정을 한다. 13개 주들의 부채는 전쟁수행과 독립수호라는 공통의 목적으로 발행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결정하지 않았다면 전쟁에서의 역할과 비용을 두고 13개 주는 끊임없이 논쟁했을 것이다.큰 틀에서 상환방식은 ‘액면가대로, 새로 빌려서 갚는다’였다. 외국 채권자와는 신규 채무협상을 진행했고. 모든 종류의 국내 채권은 만기 없는 연방 채권을 새로 발행해서 갚았다. 그리고 기존 채권이자 6%를 4% 평균 이자로 낮췄다.

새 정부가 간절히 필요했던 것은 예산을 확보하는 일이다. 그런데 당시 연방정부는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오직 주정부만이 세금을 거둘 수 있었다. 독립전쟁이 시작된 후 14년 만에 드디어 수입 물품에 매겨지는 관세가 개별 주정부가 아니라 연방정부에 귀속된다. 1913년 연방소득세가 법제되기까지 수입관세는 연방정부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당면한 긴급문제를 해결한 해밀턴은 거의 백지상태에서 미국의 미래를 구상한다. 13개 연방들을 확고한 단일연방을 구성하고 하나의 아메리칸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했다. 오늘날 거시경제학적 정책을 집행하는 기관과 제도의 원형이 이때 만들어졌다. 연방 차원의 조세부과, 채권발행, 통화체제 등 현재와 같은 시스템이 차례로 만들어진다.

해밀턴이 재무부 장관으로 취임한 1789년 미국 내에서 최소한 50개가 넘는 온갖 종류의 통화가 유통되고 있었다. 스페인 달러와, 영국 파운드화 등 외국화폐뿐만 아니라 각주마다 다양한 화폐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각각의 화폐가 실제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졌는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심지어 화폐 위조 행위도 빈번했다. 해밀턴은 미국 주화를 규제하는 법령과 함께 외국 화폐를 제거할 목적으로 조폐국을 만든다. 1센트 같은 작은 단위의 동전을 만들어 소액으로 물건을 살 수 있게 했다. 마침내 난마와 같던 미국 내 화폐단위가 정리되고, 물물 거래의 농업사회에서 해방하기 시작했다.

한편 그는 산업발전을 위해 중앙은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됐을 때, 미국에는 산업화에 자금을 댈만한 규모의 금융시장이 없었다. 해밀턴은 영국에서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 알았고, 미국에서도 똑같이 진행될 수 있다고 믿었다. 공공의 신뢰와 권위를 민간과 결합하는 영란은행(영국중앙은행)의 모델을 참고했다. 그가 생각한 중앙은행은 연방정부의 세금을 관리하는 금고지기, 국채를 발행해 연방정부와 주법은행에 돈을 빌려주는 역할, 시중에 유통되는 통화를 조절하는 기능 등이다.1791년 각주에 지점을 설립할 수 있는 미합중국 제1은행(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이 20년의 면허로 설립된다. 그의 희망대로 자본금이 1000만 달러로, 200만 달러는 정부가 출자했다. 나머지 800만 달러에 해당하는 주식은 신청자가 넘쳐 단 한 시간만에 모두 팔려나갔다.이 현상은 미국에서 일어난 최초의 투기 현상이다. 이후 새로 발행된 연방 채권 소유자들 사이의 거래로 미국 최초의 증권시장(나중에 뉴욕 증권거래소)이 만들어진다. 산업을 발전시키려면, 금융시장이 필요하다. 금융시장을 만들려면 부산물인 투기까지도 받아들여야 한다.

해밀턴은 자기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 자기가 가진 모든 천재성과 설득력 그리고 받을 수 있는 모든 도움을 다 동원했다. 원대한 설계의 큰 틀을 깨지 않는다면 양보하고 타협할 수 있었다. 그는 ‘수도를 양보하는 조건으로’ 제퍼슨의 협조를 얻어 재정난 해결을 위한 법률을 통과시킨다. 해밀턴이 1789년 1회기에 새 연방정부를 출범시키지 못했다면, 단일한 나라 미합중국은 없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의 승리는 빛났고, 그의 고통은 운명이 된다.

해밀턴은 1795년 1월 초대 재무장관직을 그만둔다. 9년 후 그는 정적이었던 부통령 애런버와 대립하다 결투 끝에 숨졌다. 결투 전 해밀턴은 ‘나는 내 첫번째 총알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고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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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은 채권전쟁

링컨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자마자 남북전쟁(1861~1864)이 시작됐다. 전쟁은 곧 돈이다. 그런데 1860년 12월 의회가 열렸을 때 국가 재정은 파산 상태였고, 모든 것이 부족했다. 재정고갈 상태에서 터진 전쟁은 돈을 하마처럼 삼켰다. 더구나 잭슨 정부가 두 번째 국립은행을 폐쇄한 후, 미국의 은행시스템은 분열되고 혼란스러웠다. 당시 연방정부는 기본적인 재정과 금융시스템조차 갖추지 못했다. 전쟁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링컨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링컨은 그 막대한 전쟁자금을 감당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 미국 재정과 금융시스템의 모태를 만들었다. 그 금융시스템 덕분에 북부는 전쟁 수행 능력을 확보하고 마침내 승리했다. 그랜트식 소모전은 아메리칸 시스템의 성공을 예고한다.

링컨에게 전쟁은 오히려 기회였다. 그의 꿈인 미국 산업 발전을 위한 은행시스템을 갖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정치의 시작부터 ‘뱅킹’을 외쳤던 링컨은 구세주 같은 인물이다. 1832년, 23세의 링컨은 일리노이주 의원에 도전한다. 첫 연설에서 그는 말한다. “국립은행을, 내부(운송)시스템 구축을, 높은 보호 관세를 찬성합니다. 이것이 나의 생각이며 정치적 원칙입니다.”

링컨은 대통령이 되기 오래전부터 국가 경제를 어떻게 운영할지를 고심했다. 그는 이전 대통령들에 의해 만들어진 불황과 경제적 혼란을 겪으며 화폐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잭슨 대통령은 정부 소유의 땅을 팔 때 금이나 은만 받도록 했다. 그의 후계자 밴뷰런은 인플레이션을 방지하기 위해 정부의 모든 돈을 경화인 금 또는 은의 형태로 보관하고, 화폐 발행을 제한했다. 링컨은 1839년 연설에서 금과 은에 연동된 화폐 발행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그는 경화(금·은)가 재무부 금고에 고이 모셔져 있다면, 철제 상자 속에서 그냥 녹슬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링컨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전쟁의 승리를 위해, 산업의 발전을 위해 지금도 유효한 재정과 금융제도를 정비해 나갔다.

1863년과 1864년에 제정된 국립은행법은 미국 은행 역사의 중요한 순간이다. 링컨의 소신은 1790년대 국립은행을 산업발전의 기반으로 주장한 해밀턴과 같았다. 곧 은행 통화의 진정한 의미는 ‘과거 저축’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기대’라는 것이다. 따라서 은행은 기업을 위해 돈을 ‘신용’으로 바꾸는 국부의 보육원이 돼야 했다. 결국 특허를 가진 기업가이자, 철도 변호사 링컨은 국가의 부를 늘리기 위한 계획의 일부로 국립은행을 설립한다.

링컨은 또한 재정 시스템의 골격을 만들었다. 당시 연방 세금은 전체 수입의 92%를 수입 관세에 의존했다. 링컨은 가장 기본적인 세금 징수의 절차조차 갖추지 못한 정부를 어떻게든 개선해야 했다. 세금 징수는 전쟁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그리고 정부의 채권상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링컨은 관세율과 재산세율 인상, 소득세 도입을 골자로 하는 세제 개혁을 밀고 나갔다. 법이 발효된 날은 1861년 8월5일. 남북전쟁 발발 105일 만이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연방 소득세를 과감하게 부과했다. 당시 소득세를 납부할 수 있는 계층은 전체의 3%였다고 한다. 재정부담이 커지면서 소득세는 고정 세율에서 최초의 누진세로 변경된다. 새로운 소득세법은 세금 납부를 집행하기 위해 연방 징세관제도를 도입했다. 오늘날 미국 국세청의 모태가 만들어졌다. 남북전쟁은 링컨이 원하는 재정적 통합을 달성할 기회였다.

가장 큰 혁명은 1862년 그린백이라 불리는 달러를 법정통화로 선언한 것이다. 그린백은 미국 정부가 발행한 최초의 지폐다. 뒷면이 녹색 잉크로 인쇄돼 그린백으로 알려지게 됐다. 당시 흑백으로만 사진을 찍을 수 있었기 때문에 위조 방지 조치였다. 그린백은 동전과 똑같이 유효한 통화 형태다. 그것은 링컨이 주장했듯이 연방 전체가 이용할 수 있는 표준적 통화다. 처음에 뉴욕의 은행과 영국계 은행은 그린백을 신뢰하지 않고, 경제의 파멸을 예측 또는 기원했다. 의회조차도 금융시스템의 붕괴를 우려했다. 그러나 종이 지폐에 불과한 그린백은 예상보다 훨씬 잘 작동했다. 그린백은 세금을 내고 채권을 구매할 때 사용할 수 있었다. 채권자들은 액면가로 그린백을 받아들여야 했다. 정부는 유통되는 화폐를 늘림으로써 북부 상업의 수레바퀴에 기름칠했다. 주립은행이 발행한 지폐에 2%에서 10%의 세금을 부과했기에, 전쟁이 끝날 무렵 이전에 유통되던 무수한 형태의 화폐가 사라졌다. 이제 모든 사람은 법정통화 ‘그린백’으로 주 경계를 넘어 자유롭게 사업을 할 수 있었다. 링컨은 또한 새로운 법정 화폐로 1억5000만달러를 발행해 전쟁자금을 조달했다.

전쟁은 혁명을 이끌었다. 전쟁 전 연방정부는 우편물 배달과 외교에 국한돼 있었다. 실질적 권력은 ‘주’와 ‘지역’이 행사했다. 그런데 전쟁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남북전쟁은 국가권력, 경제력, 군사력을 크게 성장시켰다. 연방정부는 유례없는 재정적 금융적 능력을 갖추게 됐다. 돈은 금고 속에서 잠자지 않고, 신용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풀렸다. 철도의 시대가 도래하고, 급속한 경제 발전이 이뤄졌다. 뉴욕의 월스트리트는 남북전쟁 동안 빠르게 성장했다. 연방정부의 채권이 월스트리트에서 거래되면서, 뉴욕은 런던에 이어 세계 제2의 금융시장으로 성장했다. 전쟁은 19세기 후반 미국의 거대 산업의 토대를 마련했다. 새롭게 권한을 부여받은 국가가 드디어 탄생했다. 20세기까지 지속될 연방은행시스템의 일반적인 틀과 구조가 만들어졌다. 링컨은 연방 권력의 행사를 이전에 행해졌던 그 어떤 것 이상으로 추진했으며 주와 연방정부 사이의 관계를 영원히 바꿔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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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벨트가 ‘주가조작 달인 케네디를 쓰는 법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는 주가조작 등으로 돈을 번 야비한 벼락부자로 알려졌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럼에도 그를 1934년 증권거래위원회(SEC) 초대 의장으로 임명한다. 케네디 임명이 반대에 부딪히자 루스벨트는 ‘주식에 관한 한 케네디가 모르는 수법은 없다. 도둑 잡는 일에는 도둑이 제격’이라고 말하며 임명을 강행한다. 조지프 케네디가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루스벨트는 그를 적임자로 선택했을까.

전통적인 명문가 태생인 루스벨트와 달리 그는 보스턴 술집 주인의 아들이자 감자 기근으로 고향을 떠난, 무시당하는 아일랜드 이민자의 손자였다. 케네디는 달리 보면 그 시대 민족적, 계급적 출신의 편견을 뛰어 넘고자 평생 애쓴 사람이기도 하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그야말로 출세에 매진한다. 케네디는 JP 모건을 롤모델로 삼아 금융업에 종사할 것을 결심한다. 먼저 JP 모건이 어떻게 재산을 모았는지를 철저히 공부한다. 첫 직장으로 국영 은행 조사관으로 일한다. 급여는 보잘것없었지만 그곳에서 금융 업계 실무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1913년 그의 아버지가 주주였던 컬럼비아 신탁은행을 인수하려는 라이벌 세력이 등장하자,케네디는 그 은행을 사기로 결심한다. 그는 가족과 부유한 하버드대 졸업생 친구들로부터 4만5000달러를 빌려 회사 주식을 인수한다. 은행을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25세의 케네디는 자칭 ‘미국에서 가장 어린 은행 총재’가 됐다. 그렇게 경력을 쌓은 케네디는 1914년 보스턴 시장의 딸 로즈 피츠제럴드와 결혼한다. 케네디는 모건스탠리 등 주식투자회사에 취직하기를 원했지만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를 세우고 주식투자를 시작했다. 케네디는 좌충우돌 부딪치면서 주식투자로 대략 5억달러를 모았다. 그는 먼저 자신의 이름을 딴 증권 회사를 만든다.

그는 주가조작과 공매도의 달인이었다. 매우 비상한 능력으로 주가를 조작하고 법으로 금지하기 전에 빠르게 치고 빠졌다. 그는 직업적 윤리 따위에 연연하지 않았다. 케네디는 의뢰받은 택시회사의 주가조작으로 수수료를 받는다. 너무나 그 기업의 형편을 잘 알기에 그 자신이 다시 공매도를 쳐서 크게 돈을 벌고, 그 회사는 곤경에 빠지게 된다. 이는 지금까지도 회자하는 이야기가 됐다. 케네디의 가장 큰 성공 비결은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하기 전에 대부분의 주식을 매각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진다. 증권거래소의 구두닦이가 케네디에게 주식 투자하는 방법을 묻자, 이를 주식이 지나치게 과대 평가됐다는 신호로 여겼다고 한다. 케네디는 주식시장이 곧 붕괴될 것임을 예상하고 즉시 모든 주식을 매각한다. 시장 하락에 베팅하면서 숏(매도) 포지션을 취했다. 그해 10월 주가가 끝없이 하락했을 때 그는 엄청난 돈을 벌었다. 그의 동료 거물 투자자들이 주식시장에 돈을 퍼붓는 동안 케네디는 가격하락에 베팅하여 주식을 공매도하기 시작했다. 검은 화요일에 다른 모든 사람이 좌절하고 있을 때 케네디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부유하게 월스트리트를 떠났다.

그가 새로이 향한 곳은 할리우드였다. 1926년에서 1930년 사이에 케네디는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투자자로 활동했다. 영화 산업에 대한 케네디의 관심은 오로지 돈이었다. 실패한 스튜디오를 인수한 후 저예산 영화를 대량 생산하는 영화 회사를 통합해 효율성을 높인다. 그다음 다시 매각해 투자금을 넘치게 회수했다. 1931년 할리우드를 떠날 때까지 케네디는 약 500만달러를 벌었다.

금주법의 종식을 예상하면서 케네디는 합법적인 주류수입상을 시작한다. 드라이 진, 스카치 등의 독점 미국 대리점이 됐다. 케네디는 주류상을 통해 번 돈을 시카고나 플로리다의 부동산에 투자했다. 그가 불법 주류를 유통하는 ‘밀매업자’라는 소문은 그저 소문일 뿐이다. 케네디의 전기 작가는 “케네디에게서 온갖 더러운 것을 발견했지만 밀매업자는 아니다”고 말한다. 대통령의 아버지가 밀주업자 시절 지하 세계에서 적을 만들었고, 그래서 마피아가 JFK를 암살했다는 이야기는 1970년대까지 없었다. 이런 소문은 주로 리처드 닉슨이 1960년 JFK에 대항해 출마했을 때 공화당에 고용된 팀들이 퍼뜨린 소문이다.

1932년 대통령이 된 루스벨트는 수십 년 동안 만연한 주식시장 조작을 방지하기 위해 감독기관인 SEC를 설립했다. 초대 의장에 시장 조작의 대가인 케네디를 임명했으니 소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그래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주식시장의 모든 일을 알고 있는, 도둑질을 해본 케네디를 영입했다고 받아친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주가를 조작해본 사람보다 더 SEC를 더 잘 이끌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케네디는 자신과 가족의 이름을 알리고자 임명을 수락했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SEC의 임무를 믿었다는 것이다. 케네디는 그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현실주의자인 케네디는 위원회에 한계가 있고 현실적으로 법원처럼 검사와 재판관 역할을 할 수 없음을 알았다. 본능적으로 공개 규제의 가치를 이해했다. 케네디의 비전은 간단한 목표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이전에 시장 조작자였던 케네디는 자신이 재산을 모으기 위해 사용했던 많은 방법을 효과적으로 단속했다. 케네디는 위원장일 뿐만 아니라 존경받는 투자자로서 “다시는 월스트리트에 의해 이용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증했다. SEC가 설립될 때만 해도 주식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으로 이미 침체된 시장을 마비시킬 것이라고 예상됐다. SEC는 여론의 법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케네디는 거래소 관계자, 회계사 및 중개인과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해 투자자가 만든 정부 기관이라는 것을 믿게 했다. 다사다난한 한 해를 보낸 후 케네디는 의장직을 사임했다. 케네디 인생에 가장 빛났던 시간은 아마도 SEC의 초대 의장으로 활약한 431일일 것이다. 그다음 공직은 영국 주재 미국 대사였다. 아일랜드 출신으로 핍박받던 그가 영국 대사로 임명된 것은 가문의 영광이었지만 곧 윈스턴 처칠과의 불화로 1940년 11월 해임됐다.

그의 아들 존 F. 케네디는 1961년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1963년 11월 암살됐다. 1969년 아버지 케네디가 사망했을 때 그의 재산은 4억달러였다. 그의 재산은 여러 면에서 이례적이었는데, 그중 하나는 당시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가족들과 달리 석유에 많이 투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은퇴 후 동산 투자로 1억 달러 이상을 벌었다. 또 다른 1억달러는 면세 증권에 있었다. 케네디가 돈이 묶인 유일한 기업은 가족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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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7월 12일, 보리스 엘친 공산당 사임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재선된 지 불과 이틀 만에, 보리스 옐친이 당에서 사임합니다. 1년이 지난 1991년 7월에 옐친은 러시아 역사상 첫 직선제 대통령으로 취임합니다.1989년 냉전 종식 선언을 한 고르바초프는 공산당 일당 독재이던 정치 체제를 사회민주주의로 바꾸었습니다. 이듬해 간접선거를 통해 소련의 서기장에서 대통령으로 직책을 바꿔습니다. 이에 옐친은 소련에서 벗어나 완전한 독립국가가 되겠다며 1991년 6월 12일 직선제 대통령 선거를 도입했고, 57% 득표율로 옐친이 초대 러시아 대통령으로 당선됐습니다.

취임 후 일어난 쿠데타는 옐친의 인기를 오히려 끌어올리게 됩니다. 1991년 8월 모스크바에서 탱크 위에 서서 고르바초프에 대한 쿠데타를 반대했을 때, 보리스 옐친은 정치적으로 최고의 순간을 만끽했습니다. 이후 소련은 힘을 잃어 1991년 12월 공식적으로 해체됐습니다. 소련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옐친의 재임 기간 러시아경제는 어려움에 빠집니다. 그가 주도한 서구식 시장경제가 실패로 돌아가며 러시아 경제 사정이 극도로 나빠졌습니다. 1998년 모라토리엄(채무지불유예)을 선언하는 등 위기를 겪었습니다. 이듬해 12월 잔여 임기를 6개월 앞둔 시점에 후계자 양성과 건강 문제를 이유로 전격 사임합니다. 이때 그가 후계자로 권력을 넘겨준 이가 블라디미르 푸틴 당시 총리입니다. 푸틴은 대통령 권한 대행에 이어 2000년 5월 대통령에 올라 2023년 현재까지 사실상 러시아의 지도자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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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11일, 신정아 박사학위 허위 확인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으로 선정된 신정아 동국대 교수가 박사학위를 위조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박사학위뿐만 아니라 학부학위 까지도 위조했습니다. 신정아씨는 이를 배경으로 성곡미술관 학예연구실장, 문화관광부 국립현대미술관 추천위원 등 각종 직책을 맡았습니다. 학력 위조 전모가 드러나면서 1년 6개월간 실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당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윤석열 검사는 서울서부지검의 ‘신정아 사건’ 수사에 투입됐습니다. 신씨는 1년 6개월의 징역을 확정받고 영등포 구치소에 수감됐습니다. 신씨는 수감 시절의 수인 번호 4001을 책 제목으로 자서전을 발표했습니다. 자서전에는 당시 윤석열검사에게 검찰 수사를 받던 상황을 세세히 기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