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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선 자본주의

‘홀로선 자본주의'(브랑코 밀라노비치)는 자본주의 승리 이후 자본주의를 다루고 있습니다. 즉, 밀라노비치는 세계 자본주의를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국가주도 중국형 자본주의간 대결로 보고 있습니다. 아울러 노동 엘리트들이 부를 독점하는 소득불균형 현상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를 화두도 깊게 다룹니다.


170년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꿰뚫은 자본주의 속성과, 250년전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예측했던 아시아 지역의 발흥은 모두 맞아떨어졌습니다.

부르주아는 자신들이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도입하도록 강요합니다. 부르주아처럼 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 자신의 이미지대로 세상을 창조합니다.(공산당 선언)

유럽인들은 그처럼 먼 나라들에서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갖가지 부당한 행위를 저지를 수 있었습니다. 훗날 아마도 그 나라의 원주민들은 지금보다 더 강해질 것이입니. 유럽인들은 점차 약해질 수 있습니다.(국부론)

산업혁명이후 처음으로 북미, 유럽, 아시아 세 대륙의 소득 수준이 근접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유일 지배와 아시아의 경제력 르네상스는 괄목할 만한 장면입니다. 이들은 서로 관련이 있습니다. 현재 전 세계는 동일일한 경제원리에 따라 작동합니다.100년전만 해도 사냥과 수집, 노예, 장인, 자본주의 등 모든 생산 양식이 공존했습니다. 심지어 자본주의와 경쟁했던 공산주의도 사라졌습니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세계화로 이어졌습니다. 외국에서 거둔 이윤이 국내 이익보다 높을 때, 물자, 상품, 노동, 자본의 이동을 쉽게 만들수 있었습니다. 세계화가 자본주의의 완전한 승리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습니다.자본주의 이데올로기 관점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돈벌이는 존경받고, 삶의 중요한 목표입니다. 세계 각지와 모든 계층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동기부여의 방식입니다.

자본주의는 개인과 체제의 목표를 일치시킵니다.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 본연의 욕망이라고 하지만 사회와 동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욕망도 자본주의의 규칙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자본주의는 세계를 정복하는데 두가지 형태로 진행되었습니다. 자유 성과주의적 자본주의(Liberal Meritocratic Capitalism)와 국가주도 또는 권위주의적 자본주의(Political Capitalism)으로 나누어집니다.

인류역사에서는 하나의 정치 체제나 종교가 만들어지고 승리한 이후에는 일종의 분열이 뒤따랐습니다. 기독교의 경우 로마 카톨릭과 동방정교로 분열됐고, 이슬람 역시 수니파와 시아파로 분열됐습니다. 자본주의는 공산주의 경쟁하다가 전세계적으로 승리를 거뒀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자본주의의 두가지 모델(미국형과 중국형)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두개의 자본주의간 경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한 체제가 세계를 지배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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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5월 29일,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름

1953년 5월 29일 오전 11시 30분, 영국 원정대의 멤버인 에드먼드 힐러리와 셰르파 텐징 노르가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최초로 도달했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 날인 6월 2일, 이 소식이 전 세계에 퍼졌습니다.

티베트 사람들은 “땅의 어머니 여신”이라고 불렀고, 19세기 영국의 측량사 에베레스트 경의 이름을 따서 이 산을 명명했습니다. 에베레스트 정상은 산소가 의박하고, 극도로 춥고 날씨는 예측할 수 없어 매우 위험했습니다.

기록된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반은 1921년 역시 영국 탐험대였습니다. 그들은 산기슭까지 트레킹했지만, 폭풍 때문에 등반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등반대원이었던 말로리는 한 기자가 왜 에베레스트를 오르고 싶느냐는 질문에 “그것이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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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26일 한·중·일 3국 공동 역사 교과서 출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맞서 ‘한중일 3국공동역사편찬위원회’가 함께 집필한 역사교재 ‘미래를 여는 역사’가 출간했습니다. 이 책은 19세기 중엽 이후 침략과 전쟁으로 얼룩졌던 과거의 역사를 깊이 반성하고 평화와 인권, 민주주의가 보장되는 동아시아의 미래를 지향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편협한 국수주의 시각에서 벗어나, 20세기 침략과 저항의 역사에 대한 동아시아 공동의 인식을 만들어내고자 했습니다. 특히 1930년대에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일으킨 전쟁을 다루는 장의 제목을 ‘일본 민중의 가해와 피해’, ‘일본의 침략 전쟁 패배’ 등으로 표기했습니다. 각국의 과거사 청산 문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와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현재 경제적, 지정학적 이슈로 한중일 모두 민족주의가 강화되는 시점에서, 10년전 동아시아의 미래를 위한 한중일의 함께 만든 교과서는 더욱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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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5월 26일, 포드 모델 T의 마지막

다른 어떤 차량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효율적인 Model T는 20세기의 1/4분기 동안 미국 사회에 자동차 도입을 가속화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1908년 10월에 소개된 Model T는 20마력, 4기통 엔진을 장착한 무게가 약 1,200파운드였습니다. 휘발유 1갤런당 약 13~21마일을 주행할 수 있었고 최대 시속 45마일까지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모델 T는 처음에 약 $850(오늘날 달러로 약 $20,000)에 팔렸지만 나중에 추가 비용이 없는 기본 모델의 경우 $260(오늘날 약 $6,000)에 팔렸습니다.

Model T의 놀라운 인기로 인해 미국 정부는 1920년까지 새로운 도로 건설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경쟁차가 등장하면서 모델 T는 시장에서 점점 구식이 되었습니다.  1927년 5월 25일, 헨리 포드는 Model T를 단종을 발표하여 전 세계의 헤드라인을 장식했습니다. 포드의 모델 T는 스태미너와 힘이 있는 작품이었지만, 그것은 달릴 수 있는 좋은 도로가 있기 전에 달리던 차였습니다. 모델 T는 땅덩이가 큰 미국에서 거리의 장벽을 허물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모일 수 있게 되었고, 아이들은 학교도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산이 공식적으로 종료된 뒤 포드 공장은 6월 초 문을 닫았고, 6만여 명의 근로자가 해고되었습니다. 포드자동차는 1927년에 5십만대 미만의 자동차를 판매했지만, 이는 쉐보래 판매량의 절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해 12월 일부 도시에서 시작된 모델 A의 출시는 포드의 독특한 능력을 과시하며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그 어떤 자동차도 실제와 신화 모두에서 Model T만큼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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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5월 25일 주민등록 실시

주민등록제도는 같은 해 1월 21일 북한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한 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휴전선을 넘어 서울 잠입에 성공하지만 자하문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렸습니다. 이 사건 후 정부는 전 국민에게 단일 형태의 신분증을 발급하는 「주민등록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13자리의 숫자를 부여받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처음으로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은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였다. 1968년에 발급받은 주민등록번호는 지금보다 한 자리 적은 12자리로 박정희 대통령의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는 ‘100001’, 육영수 여사는 ‘200001’이었습니다. 1968년 말까지 발급대상자 1,500만 여 명에게 주민등록증이 발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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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속 몽골제국

몽골제국의 부상은 유라시아 역사에 있어서 대대적인 사건입니다. 징키스칸은 몽골 고원을 통일하고, 기마 궁수 부대는 한반도에서 유럽의 폴란드 왕국과 헝가리 왕국까지 정복합니다. 드디어 유라시아를 관통하는 교역로인 실크로드가 만들어집니다.

몽골군대가 모든 저항을 진압한 후, 많은 정복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세금을 징수해야했습니다. 그를 위해 이제 상업을 되살리고 산업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몽골 제국은 그 어떤 제국보다 관대했고 현명했습니다. 모든 문명을 받아들이고, 모든 사람이 노력을 기울일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이를 위해 몽골인들은 제국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숙련된 장인과 상인을 모집합니다. 그들은 필요가 있으면 수천 마일을 이동했습니다. 다양한 인종, 다양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사람들 번역가, 외교관, 상인, 장인이 자발적으로 몽골 제국에 합류했습니다. 몽골의 지도자들은 학자를 중요한 자산으로 여겼고, 징기스칸의 손자이자 몽골군 사령관 훌레구는 마라가(현재 이란 아제르바이잔 지방에)에 유라시아 전역의 사상가들을 위한 연구 센터를 설립했습니다. 그결과 눈부신 과학의 발전이 있었습니다. 삼각법 분야에서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발전을 위한 길을 열었습니다. 또한 페르시아의 천문학자는 당시 최고의 천문대인 마라가 천문대를 만듭니다.

몽골제국은 무엇보다새로운 발명품의 거래와 확장을 가속화했습니다. 그들은 국제우편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자유 무역을 장려했고 한 나라에서 물건을 가져와 다른 나라에 소개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시장을 열었고 경제는 번성했습니다. 몽골의 중국 정복은 이전에는 더 넓은 세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기술이 이제 몽골 제국에 걸친 방대한 네트워크에 걸러질 수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국제 우편 시스템이 시기에 화약이 지중해에 도달했고 거기에서 비잔틴 제국, 서방 기독교계 및 더 넓은 세계의 많은 지역으로 퍼졌습니다. 그 밖에 다양한 무기 기술을 전파합니다. 1270년대에 근동의 몽골 통치자들은 송 왕조의 몽골족 최종 전복을 돕기 위해 첨단 공성 투석기를 만들 수 있는 무슬림 기술자들을 중국으로 보냈습니다.


몽골인들은 원래 중국에서 만든지폐도 실험적으로 사용해봤습니다. 마르코 폴로의 글 에 기록된 바와 그들은이 새로운 종이노트를 주요 무역 백화점에 배치하고 사용하도록 했습니다신뢰를 받지 못한 새로운 종이노트는 실패했지만, 정복한 신민의 사상과 관습을 실험하고자 하는 몽골인의 욕망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몽골 제국은 주요 왕조가 광대한 영토를 통제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면서 서로 다른 전쟁 영토로 분열되었습니다. 지역마다 자신의 나라를 세운 통치자는 그 지역의 문화와 신념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정책은 제국 내부의 균열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몽골 제국의 분열은 실크로드의 쇠퇴로 이어집니다. 사상, 종교, 질병이 대륙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빠르게 이동했던 시대는 이제는 닫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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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7월 20일, 달에 발을 딛다.

1969년 7월닐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발을 내디딘 장면은 텔레비비전으로 전세계에 생중계되었습니다. 대략 5억명이 시청했습니다. 암스트롱은 너무도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것은 한개인에게는 사소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거대한 도약입니다’ 20분뒤 도착한 착륙선 이글의 조정사 버즈 올드린은 ‘아름답습니다. 아름답고 장엄한 페허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착륙 직후 닉슨대통령과 통화했고, ‘백악관에서 건 가장 역사적인 전화’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달에 갔으나 달을 밟지도 못한 한사람이 있습니다. 사령선인 콜롬비아의 조정사 마이클 콜린스 입니다. 그는 달궤도를 돌며 지구로 무사히 돌아올수 있도록 시스템을 점검하고 관제센터와 연락했습니다. 그가 본것은 달의 뒷면이었고, 그 경험을 메모로 남겼습니다. ‘이것을 아는 존재는 오직 신과 나뿐이다. 온전히 홀로 있는 이순간이 두렵지도 외롭지도 않다’ 고 말합니다. 우주 비행사들은 7월 24일 지구로 돌아왔습니다. 지구로 귀환하는 본선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달착륙선 ‘이글’을 달 궤도에 떼어놓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여겨진 달착륙선이 한 연구에 의하며 지금까지도 아직도 달 궤도를 돌고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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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5월 24일, 팔당댐 수력발전소 준공

한국전력주식회사에서 팔당댐을 1966년 착공해서 저수량 2억4천4백만 톤, 연간 전력생산 규모 2억5천6백kW의 팔당 수력발전소를 완공했습니다. 공사비는193억여 원입니다.

팔당댐은 전력생산을 위주로 하는 발전용 댐입니다. 그리고 수도권 전역에 상수도 공급을 담당하고 있어, 팔당댐 상류 지역은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돼있습니다. 팔당댐과 잠실수중보까지 수도권 지역의 수도를 담당할 취수원이 대규모로 분포해 있습니다.

댐의 높이가 29m에 불과한 팔당댐은 홍수조절을 위해 만든것은 아니지만, 수도권 홍수 방어의 최후 보루 역할은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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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도시 베를린

손관승 작가의 ‘베를린에서 나를 찾았다’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MBC 독일 특파원을 시작으로 베를린에 대한 사랑과 역사를 키워왔습니다. 독일 베를린은 2000년대 중반이후 지구촌에서 가장 뜨거운 곳이었습니다. 특히 구 동독지역이었던 동베를린은 음악, 패션, 가구, 건축,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젊은 예술가와 자유를 꿈꾸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또 유럽에서 주목받는 스타트업의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베를린 스토리는 타헬레스(Tacheles)의 1990년 스쾃운동(Squat:예술가들의 건물 무단 점거 운동)에서 시작합니다. 예술공동체인 타헬레스는 베를린의 중심부인 미테지역 시너고그 유대인 성전 건너편에 있던 옛 백화점 건물을 점거하면서 뉴 베를린 건설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젊고 자유분방한 예술가들은 그 건물에서 공동체를 만들어 세상 어디에서도 같은 것을 찾을 수 없는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기성의 질서와 가치를 부정하고 자신만의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데 동베를린은 최적의 공간이었습니다.  그 공간은 사회주의가 무너진 상태에서 자본주의가 미처 뿌리를 못 내린, 일종의 진공상태였습니다. 그러면서 서유럽과 동유럽 문명의 교차로이기도 했습니다. 타헬레스는 이런 특수한 공간에서 무제한 자유를 누리며 그들만의 작품, 그들만의 라이프 스타일을 창조했습니다.

손작가는 그라운드 제로로 변한 베를린이 무서운 속도로 세계 예술 시장을 잠식하는 저력에 주목합니다. 그는 스쾃운동의 발상지 근처 ‘How long is Now?’라는 문구를 벽면에 그린 빌딩앞에서 걸음을 멈췄습니다. ‘이건 뭐지?’ 뉴욕 타임스퀘어식 대형 광고에 익숙한 여행자에게 철학적 질문은 낯설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문구를 다시 곰곰히 씹어보면서 베를린의 진짜 매력을 뽑아냅니다.  

베를린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던지며 질문하는 거대한 공간입니다. 조각, 벽화, 스트리트 퍼니처 등 베를린 곳곳에서 만나는 작은 베를린은 각각 고유의 메시지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도시, 서울은 어떤가요?!.

수년전부터 매주 토요일 서울 성곽길을 순환도로 삼아 서울 곳곳을 걸었습니다. 그러면서 북촌, 서촌, 익선동, 창신동, 해방촌 등 성곽 안팎 마을의 변화를 생생하게 지켜봤습니다. 일제 시대에 지은 개량한옥과 콘크리트 단독 주택이 다닥 다닥 붙은 구 도심 마을이 변신하는 메카니즘은 베를린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독립 예술가들이 작업 스튜디오, 공방을 이 곳에 만들고 개성이 강한 카페, 갤러리,식당이 속속 들어섰습니다.  

베를린의 재생이 꼭 서울의 재생과 같지는 않습니다.   베를린과 서울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베를린을 가보지 않고 두 도시를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손작가의 책을 통해 어렴풋이 차이점을 짐작해봅니다. 서울의 도시재생은 빠른 속도로 타올랐다가 차갑게 식는 장작같습니다. 한 동네 재생 메카니즘은 그대로 다른 곳에 복제되기에, 겉이 조금 다를 뿐 속은 거의 같습니다. 그래도 ‘섹시한 도시’ 베를린의 재탄생 스토리에서 희망을 봅니다. 언제가 평양이라는 공간이 열리는 것을 꿈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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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5월 23일, 독일연방공화국 성립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은 공식적으로 분리된 독립 국가로 설립되었습니다. 이 조치는 동독과 서독 재결합에 대한 모든 논의를 사실상 종식시켰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은 4개의 점령지로 나뉘었고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이 각각 한 지역을 통제했습니다. 베를린 시도 비슷한 방식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이 합의는 일시적인 조치였습니다. 냉전이 시작하면서 서독과 동독이 분할은 점점 더 분명해졌습니다. 1946년 5월 미국은 서독에서 소련에 대한 배상금 지급을 중단했습니다. 12월에 미국과 영국은 점령 지역을 지역으로 통합했고,  프랑스도 동의하면서, 1949년 5월에 세 지역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5월 23일, 서독 의회 의회는 독일 연방 공화국의 설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차기 서독 대통령이 된 콘라트 아데나워는 “오늘 새로운 독일이 온다”고 자랑스럽게 선언했습니다. 허나 독일 통일의 희망은 사라졌갔습니다.

소련은 서독의 행동에 신속하게 대응했습니다. 1949년 10월,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었습니다. 1949년의 이러한 행동은 통일된 독일에 대한 모든 이야기의 끝을 의미했습니다. 그 후 41년 동안 동독과 서독은 분단된 세계와 소련과 미국 사이의 냉전 적대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1990년 소련의 힘이 쇠퇴하고 동독의 공산당이 점차 권력을 잃으면서 동독과 서독은 마침내 하나의 국가로 재통일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