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은 한국인에게 여행 버킷리스트에서 상단에 오르는 나라입니다. 스페인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은 지인에게 스페인 여행을 추천하기 마련입니다.

음식이 한국인의 입맛에 잘 맞고 또 물가도 서유럽에 비해 쌉니다. 또 지중해 문명, 이슬람문명,카톨릭문명 등 다양한 요소가 곳곳에 섞여 있어 스토리가 풍부한 여행을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피카소, 가우디 등 걸출한 아티스트의 흔적을 만날 수 있기도 합니다.

여행 금언중 하나는 ‘아는 만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 가보는 나라를 여행할 때 흔히 여행가이드북을 구입해 여행전에나 여행하면서 틈틈이 읽습니다. 모바일시대는 스마트폰을 통해 다양한 여행정보를 이용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의 제 맛을 느끼려면 역시 그 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접하는 것입니다. 유튜브의 간략한 소개로 그런 깊이를 대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책의 원 제목은 ‘A Concise History of Spain’ 케임브리지대학 출판부의 약사 시리즈 중 스페인 편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책 저자는 영국이 아니라 미국 학자입니다.

윌리엄 D. 필립스 주니어는 미네소타대학에서 역사학 교수로 활동하며 2001년부터 2008년까지 근세역사센터를 맡아 운영했으며, 현재는 명예교수로 재직중입니다.

칼라 란 필립스도 미네소타대학 비교근세사학 석좌교수를 거쳐 현재 명예교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두 교수는 모두 스페인역사를 연구하면서 함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세계 The Worlds of Christopher Columbus’(1992)를 저술하여 스페인 정부가 주는 제2회 ‘미국 안의 스페인’ 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책은 전문 역사학자가 썼지만 일반 독자도 쉽게 스페인 역사의 전체를 굽어볼 수 있을 정도로 대중성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깊이도 함께 느끼게 하는 역사서입니다. 스페인 여행을 계획하거나 또는 한 두번쯤 다녀오신 분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1장 영토와 옛주민편을 골라서 발췌독서하였습니다. 여행가시기 전에 이 장만 읽어도 여행에서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1장 영토와 옛주민 편

언어

1.라틴어 파생 로망어 계열

이베리아는 늘 다민족, 다종교, 다문화 지역이었다는 점이 이러한 지역적 복잡성의 일부를 이룬다. 반도의 언어들은 대부분 라틴어에서 파생된 소위 로망어로, 수 세기에 걸친 로마의 히스파니아 점령과 통치가 남긴 유산이다.

2.스페인어의 뿌리, 카스티야어

오늘날 이베리아인과 전 세계 스페인어 화자들은 중세 카스티야에서 쓰이던 언어에서 유래한 카스티야어를 가장 많이 사용한다. 스페인인 외에는 대부분 이 언어를 스페인어라고 부른다. 이 언어가 아메리카와 필리핀제도의 스페인제국 지역으로 전해졌고 현재는 중국어와 영어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3.스페인어와 다양한 언어 공존

20세기 중반에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이 스페인어, 즉 카스티야어를 스페인의 유일한 언어로 만들려고 했지만, 언어의 정체성은 이에 굴하지 않았으며 그의 임기 동안 더 많은 인정과 자치를 원하는 지역주의 투쟁의 강력한 구성 요소가 되었다.

반도의 로망어들 가운데 포르투갈어는 포르투갈의 공용어이고, 가까운 사촌 격인 갈리시아어는 지역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국, 출판계에서 사용되며 스페인 서북부에서 부활하고 있다. 카탈루냐어는 수많은 카탈루냐 주민의 모국어로 교육과 대중매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4.카탈루냐어, 프랑스 프로방스어와 연결

카탈루냐어는 프랑스 남부의 중세어인 오크어, 즉 프로방스어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중세 카탈루냐인들은 발렌시아와 발레아레스제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언어를 이곳에 들여왔다. 오늘날 이 지역 언어들은 카탈루냐어와 다소 다르지만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5.바스크어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구어 가장 특이한 언어는 바스크어(에우스케라 Euskerra)다. 이 언어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구어이며, 기원은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무렵 언어가 쇠퇴하자 바스크 지식인들은 바스크어를 다시 사용하고 이전에 미흡했던 문어체를 발전시켰다. 그 후 에우스케라어의 사용은 바스크 민족주의로, 스페인 정부로부터 자치권을 얻기 위한 다양한 모색으로 연결되고 있다.

6.아랍어 영향

아랍어는 8세기에 이슬람 정복자들과 함께 이베리아반도로 유입되어 알안달루스 정치인들의 언어로 자리매김했으며 17세기까지 스페인 곳곳에서 통용되었다. 또한 카스티야어와 반도 내 다른 로망어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으며, 급기야 유럽 전역의 언어에서 ‘대수학algebra’부터 ‘천정zenith, 天頂’에 이르기까지 명사 변형을 가져오기도 했다.

7.히브리어 유산

히브리어는 중세 스페인에서 수백 년간 번영을 누렸던 유대인 공동체의 공용어로, 아랍어 및 로망어들과 영향을 주고받았다. 15세기 말 유대인 추방령이 내려지자 지하로 쫓겨나거나 소멸되다시피 했던 히브리어는 모로코 및 다른 북아프리카 지역과 중동 지역 유대인 공동체의 재건에 힘입어 20세기 중엽부터 스페인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지리

1.이베리아반도 지질학적 특성

북부 산악 고지대의 빙하에서부터 동남부 엘체 인근의 사막에 이르기까지, 반도의 모든 문화는 다양한 지역으로 구성된 지질학적 특성을 근간으로 한다. 이베리아의 산맥들은 수백만 년 전에 형성되었으며, 스페인의 여러 독특한 지역을 구분하고 경계 짓는다.

2.피레네와, 프랑스와 스페인 경계

동북부에서는 3350미터가 넘는 고봉들로 이루어진 피레네산맥이 스페인과 프랑스를 가른다.

3.칸타브리아 산맥, 갈리시아와 카스티야 경계

바스크 지역의 계곡과 낮은 산들은 피레네산맥과 칸타브리아산맥(코르디예라 칸타브리카Cordillera Cantábrica)을 연결하고, 정상의 높이가 해발 2590미터쯤 되는 칸타브리아산맥은 스페인 북부 지역 대부분을 가로질러 뻗어 반도의 내륙과 좁은 해안 지역을 가른다.

칸타브리아산맥 서쪽 끝에는 위압적인 해안 절벽과 산이 많은 내지로 이루어진 아스투리아스 지방이 있다. 스페인의 서북쪽 끝, 갈리시아 해안 지역의 산과 계곡은 아스투리아스의 지형과 비슷하다. 갈리시아의 해안선은 리아스식해안으로, 대서양이 손가락처럼 들쑥날쑥한 해안선을 따라 언덕들 사이의 내륙을 탐사하는 모양새가 생동감은 덜하지만 스칸디나비아의 피오르해안을 닮았다. 4.북메세타

칸타브리아산맥 서쪽 기슭에서 남쪽으로 뻗어 나온 레온산맥은 북北메세타라고 불리는 평균 해발고도 700~800미터의 드넓은 평원으로 이어진다. 평원의 동부는 2280미터에 달하는 고봉들로 이루어진 이베리아산맥(코르디예라 이베리카Cordillera Ibérica)과 접한다.

5.이베리아 산맥

이베리아 산맥 동쪽으로는 아라곤과 카탈루냐, 지중해 연안 발렌시아의 풍요로운 평원에 에브로 하곡河谷이 자리한다. 북메세타의 남쪽 경계는 센트랄산맥(코르디예라 센트랄Cordillera Central), 즉 마드리드 북부와 서쪽의 소모시에라, 과다라마, 그레도스를 아우르는 산맥과 접한다. 6.남메세타 남南메세타는 평균 고도가 610~700미터다. 이베리아반도 전체 면적의 약 36퍼센트를 차지하는 두 메세타 고원은 서로 떨어져 있다. 높고 광대한 이들 고원 때문에 스페인의 평균 해발고도는 670미터에 달하는데, 이는 유럽에서 스위스 다음으로 높고 유럽 평균보다는 두 배나 높은 수치다.

마드리드는 유럽의 수도 가운데 고도가 가장 높아서, 마드리드공항의 해발고도가 610미터쯤 된다. 7.베틱산맥

남메세타의 동쪽 경계는 (북메세타의 동쪽 경계이기도 한) 이베리아산맥과 훨씬 더 험준한 베틱산맥(코르디예라 베티카Cordillera Bética) 사이에 자리하며, 남메세타 및 동남부의 사막과 해안 평원지대를 가른다.

8.시에라모레나 산맥

남메세타의 남쪽 경계는 시에라모레나산맥이다. 시에라모레나산맥의 남쪽과 서쪽, 그러니까 과달키비르 하곡은 넓고 풍요로운 농경지대를 이루며 대서양을 향해 서남쪽으로 뻗어 내려간다. 거기서 더 동쪽으로 그라나다와 다른 남부 산맥들로 이루어진 시에라네바다 산악지대는 1년 내내 눈이 덮여 있어 안달루시아의 더운 평원지대나 해안 지역과는 놀라운 대조를 이룬다. 9.지질학적 특성과 산업

이렇게 험준한 지형 때문에 수백 년 이상 농업에 제약이 있었고, 장거리 수송도 제한되었으며, 항구도시들과 내륙의 도시 및 평야가 단절되어 상업 발달이 억제되었다. 그래서 철도가 출현하기 전까지는 쉽게 옮길 수 있는 상품에 높은 가치가 매겨졌고, 가축처럼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더 가치 있게 여겨졌다.

10.강의 경계 역할

스페인의 주요 강들은 유역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데 일조하며 중요한 역사 발전의 장을 장식했다. 심지어 어떤 역사학자는 주요 하곡들을 지배한 정치 세력의 변화를 좇다보면 중세 스페인사를 가장 잘 이해하게 될 거라고도 했다.

11.에브로강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는 강은 단 하나다. 에브로강은 칸타브리아 산악지대에서 발원해 아라곤의 계곡들을 지나 하류에 삼각주를 만들고 발원지에서 910킬로미터 떨어진 바다에 도달한다. 로마 시대에는 에브로강 유역 암포스타에 큰 항구도시가 있었다.

역사적으로 에브로강은 반도의 중앙부로 이어지는 일련의 경로들의 중추였다. 사라고사는 로마 개국 이래 에브로강을 건너는 내륙의 주요 거점이었으며, 덕분에 도시의 명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12.두에로강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큰 강들 중 최북단에 위치한 두에로강은 시에라데우르비온 산지에서 발원해 구舊카스티야와 포르투갈 북부의 곡물 및 와인 생산지를 지난다. 두에로강(포르투갈어명 도루강)과 계곡은 무슬림의 차지였던 반도의 통치권을 기독교 세력이 간신히 빼앗기 시작한 중세에 알안달루스와 기독교 왕국들 사이 경계가 되었다.

13.타호강 타호강(영어명 타구스강)은 시에라데알바라신 산지에서 발원해 톨레도의 경계가 되는 높은 언덕을 둘러싸고 흐른다. 톨레도는 로마인에 의해 건설된 이후 줄곧 군사 요충지였다. 1085년, 카스티야의 알폰소 6세는 무슬림에게서 톨레도를 탈환하면서 카스티야의 수도를 이베리아반도의 중앙으로 옮기는 중요한 전환기를 마련했다. 중세 왕들이 즐겨 지냈던 톨레도에는 주요 유대인 공동체가 자리잡았다.

14.과디아나강 과디아나강(아랍어명 와디아나강)은 쿠엥카에서 발원해 라만차와 남부 엑스트레마두라를 지나 흐른다. 역사적으로 인구 밀도가 낮은 이들 지역에는 스페인의 유명한 유목 가축인 메리노 양의 겨울 목초지가 있어 13세기 이래 방대한 규모로 최상품 양모를 생산해왔다.

고대와 중세에는 과디아나강의 항행 가능한 구간을 이용하는 선박 수가 상당했다. 강은 메리다 쪽으로 흐르다가 하류에서 포르투갈 풀루두로부에 있는 폭포까지 닿는다.

15.과달키비르강 스페인 최남단의 주요 강인 과달키비르강은 안달루시아 지방의 중앙부를 이루는 비옥한 농업지대를 지나 흐른다. 강과 농지 덕분에 풍요로워진 코르도바는 10세기부터 17세기까지 스페인 내 칼리프국의 수도 역할을 했다. 이슬람 사원을 비롯한 여러 건축물 덕분에 현재 코르도바는 스페인의 주요 문화 관광지가 되었다.

16.세비야 과달키비르강을 지나는 배들은 상류의 코르도바까지 운항할 수 있었다. 오늘날 외양선은 세비야까지만 운항이 가능하다. 세비야는 스페인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때마다 발생했던 곳이다. 헤라클레스가 발견했다는 전설이 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건설한 것으로 보이는 이 도시는 로마인들에게 히스팔리스Hispalis라 불렸으며 나중에 주요 이슬람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기독교 세력은 13세기 레콩키스타를 통해 과달키비르 하곡을 확실히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세비야는 16~17세기에 아메리카의 스페인제국으로 가는 모든 배가 취항하는 공식 항구였고, 그 이래로 지금껏 풍부한 건축 유산을 보유 중이다.

기후

이베리아반도는 기후가 뚜렷이 구분되는 두 지역, 즉 비가 많은 지역과 반 半 건조 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지리학자들이 강우지대라 부르는 습윤 지역은 리스본에서 갈리시아를 지나 북부 해안 대부분과 서부 해안의 북쪽 절반을 아우른다.

1.습윤 지역 이곳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는 온화하며 연중 비가 잦다. 푸른색 산비탈은 곡물을 재배하기 좋은 환경을 보장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갈리시아의 언덕과 계곡, 넘치는 강우량은 몇 세기 동안 곡물 생산에 방해가 되었고, 주민은 바다에 의존해 식량을 수입하고 노동력을 수출해야 했다.

2.반건조 시대

반도의 나머지 반건조지대는 이웃 지중해 지역과 같은 기후대라 해안 지역은 겨울이 온화한 반면 내륙 지역은 조금 더 춥다. 여름은 덥고 건조한 편이지만, 다른 계절은 강우량을 예측하기가 어렵다. 3.편서풍의 영향 편서풍이 북유럽으로 강하게 불면서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온난다습해지는 반면, 지중해 지역은 더 건조해지는 경향이 있다.

한편 북부 기압이 더 높고 아이슬란드 기압대와 아조레스 기압대가 서로 가까워지면, 북풍과 동북풍이 불어 서북 유럽은 추운 날씨가, 지중해 지역은 바람이 강하고 다습한 날씨가 된다.

이주민의 역사

이베리아반도에 인간이 거주한 역사는 환경과 극한의 지형 및 기후 조건이라는 제약을 배경으로 펼쳐졌다. 두 대륙 사이에 자리하며 동시에 두 대양을 가르는 위치는 인간의 접근이 비교적 쉬웠음을 의미한다. 수천 년 이상 이어진 이베리아반도로의 인구 이동은 선사시대와 역사시대 형성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1.초기 유럽인 화석 스페인 북부 시에라데아타푸에르카 산지의 부르고스 동쪽에서는 초기 유럽인의 화석이 아직까지 발견된다. 이들 화석은 최소 78만 년 전의 것으로, (사람속homo에 속하는) 인류의 조상이 어쩌면 100만 년 동안 이베리아반도에 거주했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무척 오래된 인류 화석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꽤나 최근 것에 해당된다. 아프리카 지역에 남아 있는 인류 화석 중 일부는 700만 년도 더 된 것들도 있다. 초기 인류는 아프리카 대륙 동북쪽을 통해 그곳을 떠나기 시작했고 이 물결을 타고 아시아까지 진출했다.

얼마 뒤에는 몇몇 무리가 서유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약 170만 년 전쯤 캅카스 산악지대에 살았던 것이 확실시되며, 약 100만 년 전에는 유럽에 거주했다.

시에라데아타푸에르카 산지 모처의 지반을 깊이 깎아내자 고대 퇴적층들이 드러났다. 결국 광산 채굴은 중단되었고 철로는 1920년대에 폐선되었으며, 동물과 인간만이 그곳에 남았다.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발견은 1976년 그란돌리나Gran Dolina라고 불리는 석회암 동굴에서 발굴된 인간의 턱뼈였다.

이후 고고학 발굴이 급격히 활발해졌고, 1995년에 과학자들은 열한 살 소년의 두개골 일부와 아래턱뼈, 척추뼈를 발견했다.

2.전기 구석기 시대 인류 그란돌리나 근처에서 소위 뼈 구덩이Sima de los Huesos라는 것을 조사했는데, 그곳에서 짐승 뼈와 함께 세계 최대 규모의 고인류 뼈 무더기가 발견되었다. 잘 보존된 도끼머리 한 점과 서른 명 정도 되는 사람의 뼈였다. 이 인골들의 주인은 더 늦은 시기의 인류이며, 아마 그란돌리나의 인골과는 무관할 것이다. 이들은 전기 구석기시대(50만 년에서 10만 년 전)인 약 40만 년 전에 같은 지역에서 활동한 호모하이델베르겐시스Homo heidelbergensis(하이델베르크인)로 확인되었다.

3.네안데르탈인 네안데르탈인은 약 20만 년 전에 도착해 반도 전역에 흩어져 정착했다. 사실 네안데르탈인은 1848년 지브롤터에서 처음으로 뼈가 발견되었지만, 1856년 독일 네안데르탈에서 다른 화석 자료가 발견되면서 나중에야 독립적인 종으로 분류되었다.

과학자들은 한때 네안데르탈인이 3만5000년 전 자취를 감추었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이베리아반도에서 훨씬 더 오랫동안 생존했을지도 모른다. 지브롤터에서 가장 최근에 발견된 네안데르탈인 뼈는 2만4500년 전 것으로 추정된다

4.오리냐크–솔뤼트레인–마들렌

이베리아 최초의 현생 인류는 약 3만5000년 전에 나타나 유럽 전역으로 퍼진 오리냐크 문화의 구성원이었다. 특히 그들은 이주하면서 골각기骨角器나 사슴뿔 도구, 부싯돌 같은 좀더 발달된 기술을 전했다. 가죽과 모피를 꿰매어 옷을 지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이는데, 고고학자들이 유적에서 그런 용도의 바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베리아의 오리냐크인은 약 2만 년 전에 사냥용 활을 가지고 북아프리카에서 온 솔뤼트레인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이어서 약 1만7000년 전 순록을 사냥했던 북유럽의 마들렌 문화가 솔뤼트레 문화를 대체했다. 마지막으로 약 1만 년 전에 마들렌 문화 다음으로 후기 구석기 문화가 자리잡았다.

5.구석기 문화_알타미라 벽화

구석기시대 문화의 고고학 발굴 현장은 수많은 동굴벽화를 포함해 이베리아반도 전역 곳곳에 포진해 있다. 스페인 북부 칸타브리아 해안지대 중심부, 낮은 해안평야의 동굴에서 발견된 알타미라 벽화가 가장 유명할 것이다.

알타미라 동굴의 후기 구석기시대 벽화는 지금까지 발견된 벽화를 통틀어 최고의 전형이며, 그려진 시기는 1만8500~1만4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근처에서 얻은 안료에 동물 지방을 섞어 그린 벽화는 그들이 잡아먹은 동물들(특히 말, 들소, 붉은사슴, 순록)을 여러 자세로 묘사하고 있고, 그중 몇몇은 부상을 입은 모습이다.

사람들이 거주하던 동굴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안쪽에 그려진 것으로 보아 장식용 그림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어쩌면 사냥을 시작하는 젊은이들을 위한 의식과 관련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부족과 사냥감을 정신적·물질적으로 연결하려던 시도를 나타내는지도 모른다. 틀림없이 알타미라 벽화는 인류사를 통틀어 최고最古이자 최초의 사실주의 회화다.

6.신석기 문화

약 8000년 전 신석기인들이 반도로 유입되면서 좀더 발달한 석기(신석기인이라 불린 이유다)를 들여왔지만, 더 중요한 건 이들이 농업과 목축 기술을 전했다는 점이다. 이들이 반도에 발을 들이며 새 무리가 오래된 무리를 몰아냈으며 인구 증가가 가속되었다.

수렵과 채집뿐 아니라 농업이 뒷받침되면서 신석기인들은 더 큰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고, 더욱 안정된 정착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7.청동기 시대

약 3400년 전에는 이베리아반도에 구리 도구가 등장했고, 더불어 구리 채굴과 제련의 증거가 나타났다. 이 시기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고고학 발굴 현장은 스페인 동남부 알메리아 근처의 로스미야레스다. 대부분의 동기시대銅器時代, Copper Age 유적지에는 방어 시설과 공들여 지은 돌무덤들이 있다. 약 2200년 전에는 청동기인이 이베리아에 등장했다. 반도에는 강모래 속 금광상을 비롯해 남부의 구리와 서부의 은 등 광상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8.이베리아인과 켈트

이베리아인은 (아마도 동방에서 기원하여) 북아프리카를 통해 스페인으로 유입되어 지중해 연안을 따라 퍼져 나갔다. 그들은 농업 지식과 채굴 지식, 청동 등 금속을 제련하는 지식을 들여왔다. 대형 석재는 건축에 사용하고 돌덩어리들은 깎아서 석상을 만드는 등 석물을 만들기도 했다.

그중 가장 뛰어난 것은 소위 엘체 부인Dama de Elche이라 불리는 석상이다. 그들은 지중해의 상인들에게서 글쓰기와 동전 주조법을 배우고 그리스어와 페니키아어에서 파생한 알파벳을 이용해 문자를 개발했다. 이베리아어 기록은 현재 돌이나 동전에 새겨진 것 외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8.1 켈트족의 이주

켈트 문화는 여러 차례에 걸쳐 유입되었으며 기원전 9세기~기원전 7세기가 그 정점이었다. 북부에서 온 켈트족은 피레네산맥 서쪽을 거쳐 이베리아반도에 들어온 다음 대서양 연안을 따라 확산되었고, 주로 목축생활을 했다. 청동기시대 말기가 가까워지면서 제철 지식이 켈트족의 정주지 전체로 확산되었다.

8.2히스파니

켈트 문화와 이베리아 문화가 나중에 선주민과 섞여들어, 적어도 반도의 중심부에서는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기록에 남은 복합적인 문화가 만들어졌다. 로마인들은 이 지역 사람들을 히스파니Hispani라고 불렀다. 사회 상류층은 무인 귀족이었고, 그 아래는 자유로운 노동자 계층이었다.

그보다 밑에는 노예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전쟁 포로이거나 지역 지배층의 보호를 받는 대가로 스스로 자유를 포기한 이들이었다.

9.타르테소스

타르테소스는 교역도시로 묘사되지만, 과디아나강과 과달키비르강의 하류를 따라 조성된 지역과 그곳에 정착해 터전을 개발한 정주민을 부르는 이름으로 보는 게 더 적절하다. 타르테소스는 고대 무역의 중심지로 유명해지면서 결국 페니키아의 침입을 받게 되었고, 종국에는 그들에게 정복당했다.

10.페니키아

기원전 800년경, 페니키아인을 시작으로 지중해 상인들이 스페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페니키아인들, 그리고 이후의 그리스인과 카르타고인은 그리스어로 클레루키아clerukia라 불리던 교역소를 연이어 설립했다.

정착지당 1000명가량으로 인구가 비교적 많았던 이 상인들은 지역 공급자들과 교역한 상품을 자기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그들은 주로 은, 구리, 납 등 이베리아에 풍부한 귀금속, 그리고 해산물에 관심이 있었다.

10.1 카디스

통상적으로 페니키아인들은 기원전 1100년에 카디스를 건설해 그곳에서 3000년 넘게 역사를 일구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도시는 그보다 더 나중인 기원전 800년 이후에 건설된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 그렇더라도 카디스는 서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다. 도시의 건설자들은 그곳을 가디르Gadir라 불렀고, 로마인들은 이를 가데스Gades라고 바꿔 불렀다.

10.2 말라카와 오누바

페니키아인은 카디스 외에도 남부 해안의 말라카(말라가)와 오누바(우엘바)를 비롯해 이베리아반도 남쪽에 다른 무역 거점을 세우고 이비사섬에 거류지를 건설했다.

페니키아의 도시들(주로 티레와 비블로스)을 근거지로 둔 중개상들은 이런 거점들에 상주하면서 금과 보석, 그리스 도자기 같은 물건을 거래했다.

이베리아의 페니키아인 거주지는 기원전 6세기 고향 도시가 바빌로니아인에게 정복당하는 동안에도 살아남았다. 그들은 이베리아에서 활동을 이어갔으며 페니키아 출신 카르타고인이 조직한 새로운 무역체계에도 관여했다.

11.그리스인

그리스인은 본토로부터 아주 먼 곳에 식민지를 건설했다(이 과정을 ‘싹틔우기’라 부르기도 했다). 인구 과잉인 그리스 도시국가 주민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해 자녀 도시를 건설했고 그곳에서 본국의 풍습을 공유하고 유지했다.

11.1 그리스 식민지

이 풍습에 따라 아나톨리아의 해안선 전체와 흑해 주변 지역(특히 남부 해안),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남부, 프랑스 남부, 마지막으로 이베리아반도 동부에 걸쳐 그리스 식민지가 세워졌다. 이베리아반도 동부는 특히 주요 거주지에 해당했다. 지중해 서부의 그리스 식민지 대부분은 마살리아(지금의 마르세유)의 큰 정착지로부터 뻗어나왔다.

11.2 엠포리온(카타로니아)

기원전 6세기경 이베리아에 최초의 진정한 그리스 도시를 건설하고 이곳을 엠포리온Emporion이라 불렀다.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뜻의 영단어 엠포리엄emporium이 이 지명과 관련 있는데, 이는 엠포리온이 주로 교역지로서 기능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엠포리온은 이베리아 동부의 그리스 도시국가 중 가장 중요한 곳이 되었다. 로마인들은 이곳을 엠포리아이Emporiae라고 불렀다. 현대 스페인 사람들은 이 지역의 주요 도시를 암푸리아스Ampurias라고 부르며 카탈루냐인은 엠푸리에스Empuries라 부른다.

11.3 포도와 올리브 유입

그리스인과 페니키아인은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 등 수많은 주요 재배식물을 이베리아반도에 들여왔다. 그 이래로 지금까지 이 재배식물들이 이곳에 잘 적응한 덕분에 스페인은 포도주와 올리브유의 주요 산지가 되었다.

11.4 올리브의 나라

올리브나무는 비교적 고온건조한 지역에서 잘 자라는데, 스페인 국토의 3분의 2가 이런 지역에 해당한다. 올리브나무가 잘 자라려면 당연히 비도 약간 와야 하지만 무엇보다 일조량이 풍부하고 겨울에 온화해야 한다.

그래서 여름이 충분히 뜨겁지 않고 연 강우량도 너무 많은 북부와 서북부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다. 오늘날 스페인에서는 기후만 맞으면 거의 전역에서 올리브나무를 기르지만 주요 재배지는 반도의 남부 4분의 1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그곳에 가면 올리브나무만 사방 가득 광대하게 펼쳐진 광경을 볼 수 있다.

11.5 문자의 유입

그리스인과 페니키아인이 이베리아반도에 들여온 것이 또 있다. 바로 문자다. 아마 이베리아인은 페니키아인에게서 알파벳을 배워 자기들 말을 글로 썼을 것이다. 그리스인은 동전 주조법도 들여와(주로 은화를 주조했다) 이베리아인에게 전했다.

12.페키니아 계열 카르타고

카르타고인과 로마인은 갖은 이유로 경쟁했지만, 특히 고대에 크게 번영했던 풍요의 섬 시칠리아의 소유권을 두고 다투었다. 시칠리아는 각지에 밀을 수출하는 지중해 중앙부의 곡창지대였다. 12.1하밀카르 바르카

하밀카르 바르카는 스페인이 카르타고와 로마의 관계에 있어 훌륭한 균형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지배층을 설득했다.

그는 기원전 236년에 사실상 독립적인 군사 지휘권을 가지고 카르타고 군대를 꾸려 스페인에 입성했는데, 아마 스페인 전역을 정복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몇몇 지역의 수장과 일부 도시국가가 바르카의 군에 협력했다.

나머지 지역에서까지 협력을 이끌어내진 못했지만, 그는 군을 통솔하며 얼마간의 성공을 거두었고 주목할 만한 정복지를 연이어 획득했다.

12.2 카르타헤나 건설

하밀카르 바르카는 스페인에 수많은 요새를 세웠고 그중 몇 곳은 도시로 성장했다. 이베리아반도 동남부 끄트머리에 있는 한 소도시가 가장 성공적인 사례였다. 로마인들에게 누에바카르타고Nueva Cartago(새로운 카르타고)라 불렸던 이곳은 오늘날 스페인 사람들에게 카르타헤나라고 불린다.

12.3카르타고와 로마의 갈등

바르카가 스페인으로 들어갔을 당시 그곳에는 통합된 정치 세력이 없었다. 대신 지중해 연안의 여러 그리스 도시 및 교역소와 더불어 다양한 도시국가와 부족 집단이 사실상 서로 단절된 채 반도 전역에 퍼져 살고 있었다.

스페인에 있는 그리스인의 정주지는 고향 도시들뿐 아니라 로마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각각 독립체로 기능했다. 그리스인 정주지의 지도자들은 로마인들과 독자적인 조약을 체결했는데, 기본적으로 공격당할 시 로마군의 보호를 받기로 하고 대가를 지불한다는 내용이었다.

로마는 또 기원전 226년에 카르타고와 조약을 체결하고 에브로강을 경계로 설정하여 강 이북은 로마, 이남은 카르타고의 영향력 아래 두었다.

13.로마

카르타고인이 스페인에서 활동하면서 로마인도 점차 스페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기원전 209년에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 한니발이 에브로강 이남의 도시 사군툼을 공격한 후 상황은 임계점에 이르렀다. 엄밀히 말해 사군툼은 카르타고의 관할이었음에도 도시 지도자들은 로마에 도움을 호소했다.

13.1 한니발의 공격

하지만 한니발이 도시를 포위해버리는 바람에 로마의 손길은 미치지 못했다. 사군툼 사람들은 마지막 한 명까지 자력으로 맞서 싸웠고, 그들의 분투는 역경을 견디고 국가를 위해 희생한 이야기로 스페인 역사에 길이 남았다. 포위가 풀리자마자 로마는 카르타고를 상대로 전면전을 준비했다.

로마가 전쟁 준비를 마칠 무렵 한니발은 스페인에서 이탈리아로 침략을 개시했다. 군대와 코끼리를 이끌고 갈리아로 진입해 겨울의 알프스산맥을 넘은 그는 로마군과의 교전에서 몇 번의 승리를 거두었지만, 결국 승리한 것은 로마였다.

13.2 로마군의 최후 승리

기원전 206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지휘하에 로마군은 카르타고인을 스페인에서 몰아냈다. 그리고 4년 뒤 스키피오의 군대는 카르타고와 인접한 북아프리카 자마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제2차 포에니전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때 거둔 승리로 그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제 로마인들은 카르타고인에게서 빼앗은 스페인 땅을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Newsletter

1주1책 뉴스레터

* indicates required

댓글을 남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