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종린 교수는 한국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일찌감치 미국 유학길에 올라 코넬대학과 스탠퍼드를 졸업한 국제파 학자입니다. 그의 주 무대 역시 영어로 강의하는 연세대 국제대학원입니다.

그런데 모교수는 어느날 백팩을 메고 한국의 골목길 탐험을 시작합니다. 이 탐험을 계기로 ‘골목길 자본론’을 발간하면서 자신을 ‘골목길 경제학자’로 변신시킵니다.

산업혁명이후 도시화란 낡은 동네를 싹 허물고, 그 자리에 고층 빌딩과 규격화된 주거시설, 쇼핑시설을 세우는 것을 뜻합니다. 꼬불꼬불한 골목길과 쓰러질 듯 낡은 낮은 건물은 혁신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먹고 살만해진 사람들은 사라진 옛 동네를 그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테면 광화문과 종로사이 길고 좁은 골목 양쪽에 늘어서 있던 피마골이 종로 재개발로 인해 사라지자, 생선구이 냄새 가득했던 골목길 풍경을 그리워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렸습니다.

모교수는 서울 시내에 남아 있는 골목길부터 시작해 전국 방방곡곡 골목을 찾아 다니며, 골목길에 숨어 있는 재미와 혁신성을 찾아냅니다. 그는 한 발 나아가 골목이 단순한 레트로 상품이 아니라, 로컬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혁신 플랫폼이라고 주장합니다.

모교수는 새 책 ‘크리에이터 소사이어티’에서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크리에이터가 만들어내는 삶의 풍요로움과 역동성을 소개합니다. 블로그에서 출발해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다양한 디지털 플랫폼을 무대로 삼아 화수분처럼 등장하는 크리에이터가 기존 경제를 어떻게 바꾸는가를 분석합니다.

그는 대기업과 같은 조직에서 독립하여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콘텐츠화하여 먹고사는 크리에이터의 사상적 뿌리를 영국 19세기 사상가인 윌리엄 모리스에서 찾습니다.

모리스는 영국의 산업화 흐름을 비판하면서 손과 노동을 통해 인간성을 찾자는 미술공예(Art and Craft)운동을 창시하였습니다.(서울에도 영국의 모리스와 미술공예운동과 연결된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이 스토리를 다른 글을 통해 소개하겠습니다.)

모교수의 새 책에서 윌리엄 모리스편을 골라서 읽고 10줄로 요약하였습니다.

윌리엄 모리스와 크리에이터주의의 기원 편

1.크리에이터 경제의 본질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고 흔히 말한다. 크리에이터 경제도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크리에이터 경제의 지향점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크리에이터 경제의 본질은 아름다움을 만드는 일이다.

크리에이터에게 “왜 이 직업을 선택했나요?”라고 물으면 다양한 대답이 나온다.

키워드가 많지만 이를 몇 단어로 정리하면 ‘아름다움, 의미, 재미의 창조와 융합’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줄여야 한다면 ‘개인의 창조와 느슨한 연대’, 또는 ‘아름다움을 만드는 일’로 압축할 수 있다.

2.19세기 미술공예(Art and Craft) 운동

윌리엄 모리스는 존 러스킨과 함께 19세기 미술공예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문학, 평론, 공예, 디자인,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르네상스맨이지만, 한국에서는 현대 디자인의 아버지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19세기 자본주의와 기계문명에 비판적이었던 모리스는 예술을 “인간이 노동하며 느끼는 즐거움의 표현”이라고 정의하며 예술적 노동으로 인간성과 아름다운 삶이 복원되기를 원했다.

예술적 노동을 실천하기 위해 그가 설립한 디자인 기업과 출판사가 현대 디자인 산업, 더 나아가 크리에이터 경제의 시작이다.

모리스가 부활시키기 위해 노력한 중세 수공예의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노동은 1970년대 이후 물질적 풍요가 가져온 탈물질주의와 기술의 발전으로 다시금 현실 세계에서 가능해졌다.

3.현대 크리에이터는 윌리엄 모리스의 후예

현대의 크리에이터는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창조적인 일을 하고 느슨한 연대를 통해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중세 수공예와 다른 점은 다양하고 개성 있는 콘텐츠를 찾는 소비자가 늘어났고 크리에이터와 소비자, 크리에이터와 크리에이터를 연결하는 플랫폼 기술이 발전해 많은 사람이 크리에이터 경제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여러모로 현대 크리에이터는 윌리엄 모리스의 후예다.

4.바우하우스의 철학

윌리엄 모리스에서 시작된 현대 크리에이터주의는 20세기 초 독일 건축 학교 바우하우스의 모던 디자인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학교에서 배운 학생들은 미니멀리즘과 기능주의 및 현대 디자인의 원칙을 적용해 건축·제품 디자인 분야에서 혁신적 작품을 창작했다.

바우하우스의 철학은 예술과 공예, 기술과 예술을 결합해 실용적이고 아름다운 디자인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 전통은 현대건축을 넘어 산업디자인에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애플의 디자인 철학을 주도한 조너선 아이브는 산업디자이너 디터 람스와 그가 이끌었던 브라운BRAUN 가전회사, 그리고 바우하우스 운동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여러 차례 고백했다.

람스의 ‘최소한의 디자인’ 철학, 브라운 제품의 기능적 명료성, 바우하우스의 기능과 예술의 조화가 아이브의 애플 제품과 애플 환경 디자인에 근본적 영감을 제공한 것이다. 기능적 우수성과 미적 아름다움의 조화를 추구한 아이브의 작업은 기술과 예술을 효과적으로 통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5.현대 크리에이터주의 흐름

현대 크리에이터주의는 1960~1970년대 반문화 운동과 DIY 문화, 1980~1990년대 메이커 운동의 확산 등을 거치며 개인 창작자의 역량을 강화했다. 20세기 초 주택 개조 트렌드로 시작한 DIY 문화는 반문화 운동과 결합해 지속 가능한 건축, 메이커 활동, 라이프스타일의 상징으로 부상했다.

1968년 자연 공동체에 거주하는 히피들을 위한 생활 지침서로 출간한 잡지 〈전 지구 카탈로그The Whole Earth Catalog〉가 DIY 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6.제인 제이콥스 영향

크리에이터 친화적 도시에 대한 논의의 출발점에는 제인 제이콥스가 있다. 제이콥스는 20세기 중반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이라는 저서를 통해 당시 대두되던 모더니즘 도시계획을 비판하고 인간 중심의 도시를 옹호했다. 그는 가로수길의 활력, 복합 용도의 중요성, 오래된 건물의 가치 등 도시 다양성의 의의를 역설했다.

6.1 뉴 어바니즘 운동

창의적 개인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교류와 영감의 기회가 풍부한 도시 환경이 필수적임을 시사한 것이다. 제이콥스의 논의는 이후 뉴 어바니즘 운동으로 이어졌다. 뉴 어버니즘은 전통적 근린생활권의 부활, 보행친화적 설계, 공공 공간 활성화 등을 목표로 했다. 이는 휴먼 스케일을 척도로 하는 도시 공간이 창의적 삶과 커뮤니티 형성에 유리한 토양이 된다는 인식에서 비롯됐다.

6.2 대도시의 힙스터 문화와 결합

1990년대의 뉴 어바니즘, 도시재생, 대안 문화는 2000년대 중반 대도시의 힙스터 문화와 결합해 현대 도시의 창업 문화 그리고 오프라인 크리에이터 문화의 모태가 됐다. 서울도 마찬가지지만 뉴욕, 도쿄, 런던 등 세계적 대도시에는 공간 창업에 도전하는 많은 힙스터들이 모여든다.

특정 장소가 갑자기 인기를 끄는 ‘핫 플레이스 현상’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미국 도시에서 시작된 원·구도심 회귀 현상이 도시 문화에 대한 수요를 키운 것이다. 6.3 오프라인 크리에이터의 장벽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오프라인 크리에이터는 건축 디자인·커뮤니티·문화 콘텐츠 기술을 바탕으로 개인 수요와 기호에 맞는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고 큐레이팅한다.

오프라인에서 크리에이터가 부딪치는 장벽은 부동산 가격과 임대료다. 도심 지역의 인기가 오르자 오프라인 크리에이터가 접근할 수 있는 도심 공간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7.온라인 크리에이터주의

1990년대 인터넷 기술의 발달로 크리에이터주의는 온라인에서 꽃피기 시작했다. 케빈 켈리가 제시한 ‘1,000명의 진정한 팬’ 이론은 개별 창작자가 소수의 열성 팬을 기반으로도 생계를 꾸릴 수 있음을 시사했다.

이는 크리스 앤더슨이 설파한 롱테일 시장(매출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상위 20% 제품을 제외한, 매출 순위에서 긴 꼬리에 해당하는 하위 80%의 시장)의 지형과 맞물려 크리에이터 경제의 비전을 제시했다.

2000년대 초반 소셜 미디어의 등장은 크리에이터의 부상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일반인도 콘텐츠를 손쉽게 제작·유통할 수 있게 되면서 1인 창작 시대가 열린 것이다. 특히 2005년 유튜브의 등장은 크리에이터 문화에 혁명을 일으켰다.

8.벤처 투자자 리 진 Li Jin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이 벤처 투자자 리 진이다. 그는 기존의 고용 중심 경제에서 개인의 재능과 창의성에 기반한 크리에이터 경제로의 전환을 예견했다.

리 진에 따르면, 크리에이터 경제에서는 개인이 자신만의 브랜드를 구축하고, 팬들과 직접 소통하며, 다양한 플랫폼을 오가면서 부가가치를 창출하게 된다.

이는 기업에 고용되어 일하는 전통적 노동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리 진의 통찰은 크리에이터 중심 경제의 미래상을 제시하며 크리에이터주의 담론을 한층 풍성하게 만들었다.

탈산업화의 물결은 창의성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문화적, 기술적, 방법론적 기반을 형성함으로써 크리에이터주의 발전의 토양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크리에이터주의는 탈산업 시대의 정신을 반영하며, 동시에 그 시대를 이끄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9.소수의 슈퍼스타 편중 현상

콘텐츠 크리에이터의 수와 콘텐츠의 양이 급증함에 따라 관객들이 소수의 슈퍼스타에게만 관심을 보인다는 비판도 있다. 플랫폼 기술이 여전히 일부 인기 크리에이터가 지배하는 불평등한 문화산업 구조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개인 크리에이터를 중심으로 한 플랫폼 경제 혁신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9.1 정부기업이 필요할 수도

콘텐츠 산업 내부에서도 플랫폼 간 경쟁이 격화함에 따라 크리에이터에게 더 많은 수익을 배분하는 플랫폼이 나오기 시작했다. 구독자가 지불하는 가입비의 90%를 크리에이터에게 지불하는 뉴스레터 플랫폼 서브스택을 필두로 게이머 플랫폼 트위치, 문화 콘텐츠 플랫폼 패트리온도 크리에이터 수익 배분율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시장에서의 경쟁을 통해 수익 구조를 크리에이터에게 더 유리하게 바꿀 수 있을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시장 원리를 넘어선 기술 개발과 정부 개입이 필요할지 모른다.

9.2 크리에이터 경제의 민주화

리 진은 탈중앙화와 비영리 플랫폼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블록체인 기술과 플랫폼 크리에이터 콘텐츠의 다양성을 증진시키는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리 진의 주장은 크리에이터 경제의 민주화와 ‘중산층middle class’ 크리에이터 육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는 크리에이터 경제를 보다 포괄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플랫폼 기업이 취해야 할 10가지 구체적인 전략을 제시한다.

9.3 중산층 크리에이터의 육성

오프라인과 온라인 통합을 통한 중산층 크리에이터의 육성을 시도해볼 수 있다. 크리에이터주의의 역사를 보면, 새로운 크리에이터 경제의 시대정신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통합임을 알 수 있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오프라인의 창의 산업과 온라인 플랫폼의 연계를 가속화했다.

예컨대 공예품이나 예술작품을 온라인에서 홍보하고 판매하는 일이 일상화됐다. 현재 크리에이터 문화는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경계가 무너지는 통합 국면을 맞고 있다. 메타버스와 같이 가상과 현실을 잇는 플랫폼이 크리에이터들의 활동 무대로 주목받고 있다.

10.온라인·오프라인·도시 플랫폼을 유기적으로 통합

크리에이터 경제의 온·오프라인 통합 추세는 3대 축 전략으로 요약될 수 있다. 온라인·오프라인·도시 플랫폼을 유기적으로 통합해 콘텐츠의 다양성과 크리에이터의 독립성을 극대화하는 전략이다.

현대 크리에이터 경제를 이끌어온 일련의 지적 전통과 역사적 맥락은 현대 크리에이터주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각을 제공한다.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발달한 온라인과 오프라인 크리에이터주의는 크리에이터 경제의 지적 기반을 마련했고, 기술 사회를 인간 중심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향후 크리에이터주의는 디지털 유토피아주의까지 계속 확장될 것이다. 디지털과 물리적 공간의 통합이 이러한 확장의 새로운 프런티어이며, 이를 위해 온라인·오프라인·도시 플랫폼의 3대 축 통합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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