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여행을 가면 미술관과 도서관을 꼭 찾습니다. 역시 첫번째 방문코스는 미술관입니다. 올 5월 노르웨이 오슬로를 찾았을 때 에드바르 뭉크 작품을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에서 실컷 감상했습니다. 오슬로는 뭉크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뭉크의 발자취가 도시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술관을 찾는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봅니다. 미술언어는 굳이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소통할 수 있는 만국공통언어입니다. 따라서 누구나 미술작품과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뭉크관에서 중간에 배치된 벤치에 앉아 한참동안 ‘절규’와 대화를 나눴습니다. 가장 먼저 가슴속에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성이 떠올랐습니다. 마치 명상을 하듯이 호흡이 안정되면서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아마도 제가 뭉크의 작품을 보면서 절망, 애증,번민, 갈증, 열망 등 뭉크의 삶에 깊게 배인 감성과 대화를 나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명작이라고 부르는 예술품은 언제나 우리에게 깊은 울림과 위안을 줍니다. 무엇보다 상처받고 고통받는 마음을 치유해주는 마법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추명희 작가의 ‘상처받은 사람을 위한 미술관’은 위대한 예술가의 삶과 작품이 어떻게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한 편 한 편 읽다보면 예술가의 그들의 작품이 액자에서 뛰쳐나와 각자의 가슴속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이 책에서 ‘카미유 클로델’편을 찾아 읽었습니다. 로댕의 연인이자 여성조각가 카미유 클로델는 영화의 테마가 되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정작 그녀의 정신적 여정은 가려져 있습니다.
1.더 많이 사랑할수록더많이 고통받는다.
빈센트 반 고흐가 남긴 말이다. 하지만 영혼을 바쳐사랑한 죄로 지옥에 떨어져 버린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에게 더 들어 맞는 얘기다.
카미유는 근대 조각의 위대한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제자이자 모델, 그리고 연인이었다.
2.로댕과의 만남
로댕의 대표작 ‘생각하는 사람’의 고뇌의 무엇일까, 저마다 사유와 번뇌가 있을테지만 로댕에게 있어 그것은 아마도 카미유 바로 그녀였으리라.
1883년 마흔세살 로댕은 열아홉의 조각가 지망생 카미유를 본 순간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카미유에 매혹된 로댕은 대형 조각작품 ‘지옥의 문’을 제작하면서 카미유를 작업실에 합류해달라고 요청했다.
3.가질 수 없는 사랑
카미유는 아버지의 무한한 후원과 어머니의 냉대를 받으면서 자랐다. 카미유는 예쁜 얼굴과는 달리 폭퐁우같은 기질을 가졌고 내면에 어두운 심연을 간직하고 있었다.
로댕은 두 형제와 누이를 일찍 잃고 아버지마저 정신병으로 세상을 떠났다.카미유는 로댕의 쓸쓸한 눈빛에서 영혼의 결핍을 읽었고 그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싶은 모성애를 느꼈다.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는 순간 두사람의 사랑은 운명의 불길처럼 타오르기 시작했고 지옥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가질 수 없는 사랑으로 몸부림치는 삶, 그것은 바로 지옥일 것이다.
4.지옥으로 가는 문
1885년 카미유는 로댕의 지옥의 문팀에 합류했고, 가장 중요한 부분인 손과 발 작업을 맡았다. 로댕은 카미유를 누구보다 석고를 잘 다루줄 안다면서 칭송함으로써, 카미유가 주변 사람으로부터 질투를 받기 시작했다.
로댕은 로즈 뵈레를 정부로 곁에 두고 있으면서도 카미유를 잃을까봐 불안해하면서 서약서 초안을 쓰기도 했다. 두 사람은 파리 외곽의 로댕의 저택에서 함께 작업을 하면서 사랑을 나눴다.
5.로댕에 가려진 카미유
로댕이 조각가로서 점점 명성이 높아질 수록 그의 연인 카미유의 조각가로서 존재감은 점차 희미해졌다. 그녀는 로댕의 뮤즈이지만, 로댕의 조수와 모델 정도로 인식되었다.
지옥의 문에 등장하는 다나이드는 카미유가 모델이다.
6.이별
로댕의 정부 로즈 뵈레가 어느날 카미유를 찾아와 로댕의 흉상을 집어던지고 난동을 부렸다. 이에 맞서 카미유가 로즈를 내동이치는 순간 로댕이 이를 목격하고 로즈를 부축하고 카미유를 떠났다.
카미유는 이 소동의 영향으로 배속의 아이까지 잃고 지옥 구덩이 깊은 곳으로 굴러떨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7.카미유와 드뷔시
로댕을 떠나보낸 카미유는 동생 폴의 소개로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를 만나 교제하였다. 둘은 함께 일본 우키요에 판화를 감상하면서 영감을 나눴었다. 그때 받았던 영감을 ‘파도’라는 제목으로 드뷔시는 교향곡에, 카미유는 조각(파도)에 담았다.
드뷔시는 카미유를 사랑했지만 그녀는 끝내 그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로댕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던 탓이다.
8.영원히 안녕
1898년까지 로댕와 카미유는 만남을 이어가다 1899년 카미유가 ‘성숙의 시대’라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파국을 맞았다. 이 작품은 노파에게 이끌려가는 늙은 남자의 손끝을 무릎꿇고 애절하고 붙잡고 있는 모습을 닮고 있다. 누가봐도 로댕과 로즈, 그리고 카미유의 모습이었다.
로댕은 분노에 휩싸여 완전한 결별을 선언하였다. 자신의 말을 거역한 인간에게 신이 형벌을 내리듯이. 어쩌면 로댕은 카미유가 자신보다 더 뛰어난 조각가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는지도 모른다.
9.카미유의 분노
카미유는 로댕이 자신의 영감까지 훔쳐갔다며 분노에 휩싸인 채 거리를 돌아다녔다. 심지어 로댕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혔다. 로댕의 뮤즈는는 점점 미치광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카미유의 생활은 비참했다. 사람들은 로댕의 연인으로 인식하고 독자적인 예술가로 보지 않았다. 좌절과 절망끝에 1905년 정신착란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13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동생 폴은 그녀를 정신병원에 보내버렸다. 카미유는 폴에게 살기가 너무 힘들고 시끄럽다 이곳을 나가 다시 조각을 하고 싶다고 애원했지만 폴은 외면했다.
10.로댕에게 카미유는?
로댕은 1916년 뇌졸증으로 쓰러지고 난 후 비로소 로즈와 결혼식을 올렸다. 2주후에 로즈는 세상을 떠났고 로댕도 1917년 겨울 일흔일곱의 삶을 마감하였다.
로댕은 죽기전 반수불수상태에서 로즈에게 “내 아내는 어디에 있지라”, “내 아내는 파리에 있어 돈이나 충분히 있는지”라고 말했다. 맥락에 따라 로즈를 보면서 추억속 카미유를 애타게 찾은 것으로 보인다.
11. 지옥에서 보낸 30년
카미유는 1943년 10월 병동의 차가운 쇠침대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장례식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고 무연고자로 공동매장되었다. 폴이 나중에 카미유 묘지를 찾았지만 공공개발지가 되면서 무덤이 사라져 버렸다.
카미유는 30년동안 사람의 기억에서 잊혀지면서 정신적으로 서서히 죽어갔다. 어쩌면 사람의 마음속에서 잔혹하게 살해당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 지도 모르겠다.
12.추명희 작가의 카미유를 위한 묘비명
사랑에 영혼을 바친 죄로 지옥에 감금된 불쌍한 카미유. 마음속에 그녀의 묘비명을 새겨본다.(카미유의 애칭 깜)
깜, 나를 부수지 말아줘
당신의 어깨가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싶어
나의 얘기를 듣는 당신의 눈 당신의 그늘진 손가락을
사랑하는 깜, 이제 로댕은 돌아오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