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싱글몰트 위스키 ‘카바란’이 명성을 얻기 전까지 대만을 방문하면 꼭 챙기는 술은 금문고량주입니다. 개인적으로 한중수교 이전 대만대사관 관계자가 저녁 회식에 금문고량주를 몇병 들고 와서 작은 비이커에 따라 손가락만한 작은 잔에 따라주던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금문고량주는 중화권에서 마오타이와 함께 명품으로 인정받는 고급술입니다. 천연 샘물로 만들어 빛깔이 맑고 향긋한 냄새가 납니다. 첫 맛은 상큼하면서 부드럽고, 뒷맛은 달콤하고 섬세합니다. 특히 알코올 도수가 58도나 되지만 금문고량주를 마신 다음 날 머리가 맑은 점이 좋습니다.
금문고량주의 역사는 생각보다 짧습니다. 금문고량주는 1958년에 중국(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 사이에서 벌어진 국지전인 ‘진먼 포격전’ 당시 진먼 섬(이후 진먼다오)의 사업가였던 예화청이라는 사람이 만든 술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금문고량주는 전선을 지키는 군인에게 배급된 군납품이라는 점입니다. 일반 백주보다 훨씬 도수가 높은 술을 만든 배경에는 바로 전쟁의 공포를 술로써 잊으려는 인간의 약한 심리가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1.양안 갈등
흔히 중국과 대만의 관계를 ‘양안(兩岸) 관계’라고 표현한다. 이는 자연적인 군사분계선 역할을 하게 된 대만 해협을 두고 서안(중국)과 동안(대만)이 마주 보는 관계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중국은 ‘하나의 중국’을 내세우며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지만, 대만은 자신들도 엄연한 국가라고 주장한다. 오늘날에는 중국의 힘이 워낙 커서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는 나라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1.1국공내전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공산당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병력과 더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은 이리저리 달아나며 버텼고, 두 번째로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연전연패하며 불과 4년 만에 중국 대륙을 모두 잃었다.
1949년 12월, 결국 국민당은 대만 지역으로 달아났는데 이것을 ‘국부천대(國府遷臺)’라 표현한다.
2.진먼 포격전
국가의 긴장 관계는 1958년 8월부터 12월까지 이어진 진먼 포격전에서 폭발한다. 진먼다오는 중국 남부에 위치한 섬으로, 대만의 영토에 속했기에 대만군의 벙커와 포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중국은 진먼다오의 군사 시설에 약 10만 발의 포탄을 쏟아부었다. 대만군도 포격으로 응수했지만, 그 횟수가 중국군의 10분의 1에 불과하여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3.대만군 병사들의 유일한 안식처
중국군의 집중 포격에 시달리던 대만군 병사들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바로 금문고량주였다. 도수가 높은 술에 취해 잠시나마 전쟁의 공포와 불안을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4.금문고량주의 탄생 배경
금문고량주를 만든 예화청은 중국 표준어는 물론이고 영어와 말레이어까지 여덟 개의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했던 영리한 인물이었다.
그는 중일 전쟁 때 일본군의 공격으로 상하이에 차린 사업체가 파괴된 후 아버지가 진먼다오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예화청은 그를 기리기 위해 곧장 진먼다오로 이주했다.
당시 진먼다오에는 술을 만드는 양조장이 많았다. 이를 본 예화청은 오랜 사업 경력을 바탕으로 자신도 양조장을 차려 주류 사업에 뛰어들기로 마음먹는다.
4.1 인맥을 활용해서 만든 기회
그가 술을 빚기 위해 수입한 누룩은 바다를 건너는 과정에서 물에 젖어 발효되지 못했다. 하지만 예화청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매달렸다. 그는 진먼다오에 주둔하던 대만군 내부 인사들과 친구가 되었고, 그들에게 술을 어떻게 만들면 좋을지 조언을 구했다.
또한, 밤마다 자신이 직접 빚은 누룩을 실험하고 관찰했다. 이러한 노력과 집념 덕분에 예화청은 고량주를 만드는 방법을 알아내는 데 성공한다.
5.수수로 빚은 고량주
술을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고량주를 빚는 재료와 방식이었다. 진먼다오는 섬이기 때문에 쌀보다는 소금기에 강한 수수가 고량주를 만들기에 더 적합한 재료였다. 게다가 수수로 빚은 고량주는 쌀보다 더 부드럽고 향기가 진했다.
6.금성주창(金城酒廠) 양조장
예화청은 1950년에는 자신이 직접 설계한 금성주창(金城酒廠)이라는 이름의 양조장을 만들었고, 그동안 쌓은 모든 인맥을 동원하여 대만 육군 복지회 19군에 자신이 만든 고량주를 소개했다.
술을 맛본 장병 모두가 맛과 향이 아주 풍부하다며 칭찬했다. 또한, 19군의 사령관인 후리안 장군에게도 이 술을 선물했다.
7.대만군에 대량 납품
선물 받은 고량주의 맛에 반한 후리안 장군은 예화청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진먼다오의 주민들이 수수를 재배해 수확물을 금성주창에 보내고, 그 수수로 만든 고량주를 대만군에 대량 납품하는 일이었다. 진먼다오의 주민과 예화청은 그 제안에 바로 응했고, 그때부터 금성주창은 술의 원료인 수수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게 되었다.
8.금문고량주 탄생
1951년 말에는 진먼다오의 천연 샘물을 사용해 본격적으로 ‘금문고량주’라는 상표명이 붙은 술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3년 후 예화청이 대만 정부의 공공 판매국에 진먼고량주를 납품하는 계약을 체결하면서, 비로소 그가 오랫동안 품었던 주류 사업가로서의 꿈이 달성되었다.
9.금문고량주로 공포의 밤을 견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금문고량주는 대만군 병사들에게 전쟁 속에서 공포와 불안을 견딜 힘을 준 선물 같은 술이었다. 그들은 중국군이 쏜 포탄의 굉음과 충격을 도수 높은 금문고량주를 마시며 잊어버리려 했던 것이다. 그런 방법이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 대만군은 진먼다오를 지켜내는 데 성공한다.
10.중국본토 진출 1990년대에 중국과 대만이 과거의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우호 관계를 맺으면서, 금문고량주를 만드는 진먼주류소(금성주창에서 이름 변경)는 2004년 중국 본토에 정식으로 진출한다.
‘진먼주류소 무역유한공사’를 설립해 오늘날에도 중국에 금문고량주를 수출하고 있다. 한때 대만군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며 마셨던 금문고량주가 이제는 평화적으로 중국에 진출하고 있는 것이다.
11.금문고량주의 불안한 미래 무력을 동원한 강경책을 주장하는 세력이 중국이나 대만에 집권한다면, 머지않아 대만의 병사들이 금문고량주로 마음을 달래야 할 날이 다시 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