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친구인 알라딘 조유식사장을 만나면 헤어지기 전에 꼭 책을 추천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저도 가끔 제가 읽은 책중에서 몇권을 조사장에게 권하기도 합니다. 친구의 책 추천은 인공지능보다 만족도가 훨씬 높습니다.
크래프톤웨이는 조사장의 추천으로 고른 책입니다. 저는 사실 게임을 잘 모르고, 게임산업에 대해 그리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아 게임산업계의 스타기업인 크래프톤 성공 스토리에 그리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현역 시절에 장병규 크래프톤웨이 의장을 두 차례 만난적이 있습니다. 검색회사 ‘첫 눈’ 시절에 인터뷰를 했었고, 4차 산업위원장 시절 점심을 한 번 했습니다. 신문과 책을 늘 가까이 하는 지력이 뛰어난 경영자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혁신가로서 매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런 면은 이해진, 이재웅, 김범수, 고 김정주 등 한국 IT산업계 리더에게서 공통으로 느끼는 점이기도 했습니다. 한국 IT업계 리더론은 다음 기회에 다루겠습니다.
크래프톤 웨이를 읽으면서 월터 아이작슨의 ‘스티브 잡스’와 ‘일론 머스크’가 연상되었습니다. 두 전기 모두 잡스와 머스크의 전적인 협조아래 집필되었습니다. 특히 명과 암을 모두 생생하게 기록한다는 전제아래 집필되었습니다.
크래프톤 웨이 역시 저널리스트인 저자(이기문)에게 창업자와 주요 경영자의 이메일을 모두 공유하는 등 회사의 모든 면을 적극적으로 제공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 책에서 크래프톤이 블로홀 스튜디오라는 사명으로 출발한지 1주일만에 엔씨소프트의 고발로 인해 경찰의 압수수색을 당하는 시점 스토리(압수수색과 워크숍 편)를 골라서 읽었습니다.
1.압수수색
2007년 4월, 회사 법인을 낸 지 일주일 만이었다. 출근길 김강석의 휴대전화에 장병규의 이름이 떴다. “경찰 압수수색이 시작되어서 사무실에 있는 모든 하드디스크를 가져갔어요.” 김강석이 웃었다. “장난하지 마시고요. 왜 아침부터 이런 장난을 하세요.” “김 대표님. 실제 상황입니다.”
1.1 하드디스크 총 108개가 경찰의 압수수색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개발자들이 쓰는 PC 하드디스크 전부가 없어진 셈이었다. 다음 날은 블루홀의 첫 워크숍이었다.
1.2 경찰은 박용현팀이 엔씨소프트에서 개발 중이던 자료를 무단으로 복제하거나 유출했다는 데 혐의를 뒀다. 장병규와 손을 잡기 전 일본 게임업체로부터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교감했던 사실을 문제 삼은 것이다.
경찰은 이들이 일본 업체로부터 투자를 받아 새로운 회사 설립을 타진하면서 엔씨소프트에서 제작하던 게임 L3의 개발 자료 일부를 넘겼다고 보고 있었다. 업무상 배임과 부정 경쟁 방지 및 영업 비밀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였다.
2.엔씨소프트의 공세
엔씨소프트는 사내에서 가장 공들여 준비하던 게임 후속작인 L3 개발진이 블루홀에 유출된 것에 분노했다.
1년 정도 진행한 프로젝트에 투입했던 인원은 대체 불가능한 회사 개발력의 정수였다. 회사가 보유한 핵심 개발자 대부분이 L3 프로젝트에 포진해 있었다. 엔씨소프트는 L3의 정보가 유출됐다며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고, 이와 별개로 블루홀에 대한 민사 소송도 검토하고 나섰다.
3.워크숍 강행
워크숍을 갈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장병규는 “압수수색을 당했으니 워크숍을 더욱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할 수 있는 컴퓨터도 없으니 워크숍 가는 게 더 좋네요. 워크숍 가는 주말에 하드디스크 주문해주시고요.”
블루홀 첫 워크숍은 경기도 가평에서 1박 2일 일정이었다. 장병규는 신이 난 듯 보였다. 진짜인지 그런 척을 하는 것인지 직원들은 알 수 없었다
4.장병규의 사주 社酒
장병규는 워크숍 직전 직원들에게 메일을 썼다.
“저는 술자리에서 술을 강권하거나 약게 빼는 것을 모두 싫어합니다. 또한 높은 사람만 죽어라 먹는 문화도, 낮은 사람만 죽어라 먹는 문화도 싫어합니다. 사주가 원칙과 행위에서 서로 간 신뢰를 바탕으로 팀워크에 도움이 된다고 믿고, 약간은 한국적인 문화이지만 사주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5.사주 마시는 원칙
소주 한 병을 맥주잔 세 잔에 따르고 사이다 서너 방울을 떨어뜨리는 게 제조 방법이다. 사이다를 이보다 많이 따르거나 적게 따르면 달거나(사이다 맛) 써서(소주 맛) 원샷에 마시기 부담스러워진다는 게 장병규의 지론이다. 마실 때는 2인 이상이 함께 마신다. 그리고 높은 직책의 사람부터 마신다.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을 제외하고 예외는 없다. 사주는 계속 마실 수 없으며, 기본적으로 한 잔이다. 한 잔 더 마시는 경우는 허용하지만, 세 잔 이상은 금지다.
6.장병규의 비전
장병규가 직원들 앞에서 ‘새로운 10년을 시작하며’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했다.
“오랫동안 잘나가는 기업은 비전과 핵심에 대해 집착에 가깝도록 집중합니다. 조직다운 조직에선 신뢰를 토대로 팀워크가 형성됩니다. 먼저 내 옆에 있는 상대를 신뢰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블루홀의 업業은 대규모 제작입니다. 신뢰와 팀워크가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어떤 사업이든 좋은 팀이 3년 정도 치열하게 일하면 소기의 성과를 성취한다고 믿습니다.”
7.MMORPG의 명가 블루홀이 내건 비전은 ‘MMORPG의 명가’였다. 장병규가 단어 하나하나를 뜯어 설명했다.
“‘MMORPG’는 장르에 포커스를 둔 것입니다. 퍼블리싱보단 온라인 게임 제작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지요.
온라인 게임은 제작사가 배급사보다 힘을 더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명가’는 세계적으로 통할 만한 수준의 제품을 내고, 또 세계에서 인정을 받겠다는 의미입니다. 시장에서 성공을 한다고 명가가 되는 것은 아니겠죠. 하지만 성공이 명가가 되는 필요조건은 됩니다.”
8.확실한 역할 분담 경영자 장병규와 제작자 박용현이 손을 잡고 만든 회사인 만큼, 회사의 큰 틀에 대한 역할과 책임Role & Responsibility도 분명히 알렸다. 제작은 박용현이, 경영은 장병규가 한다.
이 둘은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면서도 역할과 책임은 구분한다. 교감하고 조언하되, 의사결정 권한과 책임은 서로에게 명확하게 귀속하기로 약속한다.
제작 책임자로서 박용현의 역할은 정해진 시간에 최상의 게임 제작을 해내는 ‘온 타임 맥시멈 퀄리티 프로덕션On-time Maximum Quality Production’으로 요약됐다. 명가에 걸맞은 양질의 게임 산출물을, 약속한 시간과 자원으로 뽑아내기로 했다.
9. 신뢰는 먼저 주는 것
장병규는 “새로운 10년, 신뢰를 바탕으로 MMORPG의 명가로 태어나자”고 말했다. “신뢰란 먼저 주는 것입니다. 신뢰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이고, 또 책임지는 것입니다. 신뢰는 경청이며 이해하는 것입니다.”
10.블루홀이 블리자드를 삼키는 상상
발표 막바지에 이르러 장병규가 직원들에게 “눈을 감아보라”고 주문했다.
“바다의 거대한 블루홀을 떠올려봅시다. 이제 거센 눈보라를 떠올려보세요. 거센 눈보라가 블루홀 근처에 오지만, 블루홀은 이내 조용하면서도 과묵하게 눈보라를 쓰윽 삼켜버립니다. 그러고는 다시, 블루홀이 세상 그 자체인 양 고요하면서도 엄청난 스케일을 과시합니다. 이름 그대로 ‘그레이트 블루홀’인 거죠.”
10.1
저녁 식사와 함께 사주를 마실 차례가 왔다. 3명씩 앞으로 나와 함께 사주를 들이켰다. 돌아가며 마이크를 잡고 한마디씩 해야 했다.
손에 든 술잔을 모두 비워낸 불콰한 얼굴들이 저마다 외쳤다. “우리 꼭 성공하자” “좋은 게임 만들어서 세상에 보여주자” 직원 하나하나가 결의 넘치는 말을 쏘아 올리면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