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안내 _현대와 전통의 공간, 정동 3번지
광화문은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공간이다. 이순신 장군을 기준으로 세종 대로의 양쪽에는 높이 뻗은 마천루가 늘어서 있다. 성공회 서울대성당에 이르는 길은 두 갈래다. 광화문 네거리중심을 기점으로 세종대로 남쪽 방면 도로의 오른편에 있는 코리아나호텔과 서울시의회를 지나 발길을 옮기면 덕수궁 돌담길이 나온다.
그 사이로 난 좁은 길목 10미터 앞에는 성공회 서울대성당이 자리해있다. 먼저 덕수궁와 남대문세무서 건물 사이 골목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2층 짜리 콘크리트 건물이 먼저 보이고, 그 건물 가까이 다가서면 서울대성당 전면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또 다른 접근로는 세무서 건물과 서울시의회 사이 일방통행로이다. 이 길로 들어서 10미터 가량 위로 올라가면 왼편에서 붉은 벽돌과 화강암을 소재로 한 성당의 전면부와 측면부가 눈에 들어온다.
건물 안팎모습
서울성공회성당은 정식 명칭이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주교좌성당’이다. 현직 주교가 앉는 의자가 있기에 주교좌성당이라고 부른다. 성공회성당은 지하1층, 지상3층 높이에 총 면적 275평. 규모로 따지자면 명동성당의 3분의 2 정도의 규모다.
성당은 중앙 전면부를 중심으로 좌우로 날개를 펼치고 있는 듯한 형상이다. 수직 상공에서 성당을 내려다보면 십자가 모양인데, 성당 진입로에서 접하는 성당 전면부는 십자가의 가로모양의 윗 부분에 해당되며, 날개처럼 중앙부에서 양쪽으로 갈래친 부분은 십자가의 가로 부분 형상을 띠고 있다.
하늘에서 성공회성당을 내려다 본 모습. 출처 V월드 (왼쪽) 설계도면 (오른쪽 위·아래) 출처 김원
성당의 십자가 모양에서 가로 구조물은 둥근 아치로 구성돼 있다. 즉, 벽돌과 화강암으로 아치모양을 쌓아 긴 터널처럼 만든 것이다. 아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벽은 두껍게 발달했다. 건물 외벽은 회백색의 화강암과 붉은 벽돌을 소재로 삼고 있고, 외벽에 덧낸 창은 한국의 전통 창틀 모습을 띠고 있다. 또 성당의 지붕에는 한국의 전통 기와가 앉혀져 있다.
성공회성당의 외양은 로마네스크 양식이지만 건물의 평면과 공간 구성은 바실리카 양식을 따랐다. 바실리카 양식은 그리스 관공서로 쓰였던 바실리케에서 유래했다. 라틴어로 바실리카 (basilica)라고 한다. 물론 아테네와 로마는 나라의 제도나 풍습이 다르므로 명칭은 같아도 실질적으로는 다른 것이 되었다.
로마 영내 각지의 도시에서 만들어진 바실리카는 처음에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一자형이었지만, 로마인은 그 양 날개를 접어서 ㄷ 자 모양으로 만들었다. 폼페이의 바실리카는 ㄷ 자형인 채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다음에 로마인은 ㄷ 자형 안뜰에 지붕을 덮었다. 보통 지붕으로는 안이 어두워지므로 높직한 지붕을 얹고 창문을 냈다. 이것으로 로마형의 바실리카 양식은 완벽한 것이 되었다. 그후 수백년 동안 바실리카 양식은 유럽의 공공건축 특히 교회건축의 기본형으로 존속했다
성공회성당을 위에서 보면 십자가를 눕혀 놓은 듯한 모양이다. 장십자형(latin cross) 기본 골격으로 하여 중앙의 넓은 공간을 신랑, 팔처럼 튀어나온 부분을 수랑이라고 부른다.대성당의 내부 창문은 한국의 문창살 문양을 본따 만들었다. 지붕은 진회색의 한식기와와 S자로 구부러진 붉은 서양식 기와가 조화를 이룬다. 지붕 끝 부분 마저 한국 가옥의 처마처럼 섬세하게 처리했다.
성당은 건물 전체의 높낮이를 다르게 해 율동감을 준다. 건물 중앙의 큰 종탑과 그 옆에 달린 2개의 종탑, 모서리에 소탑 8개가 생동감있게 연결 돼 있다. 지상 1층의 마리아-니콜라 성전에 들어서면 열두 기둥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본래 6개 기둥에 불과했으나 증축 공사 때 비로소 12 사도를 뜻하는 12개의 기둥이 완성됐다. 아치를 받치는 기둥은 허리 부분이 가장 볼록하고 천장과 밑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배흘림 기둥을 적용했다.
천장은 삼각 모양의 목재로, 트러스트 공법으로 만들어졌다. 대들보가 그대로 노출된 형태로 한옥 특유의 안락함을 준다. 교회나 성당 건축에서 목재는 불에 쉽게 탈 수 있고 불경스럽게 여겨지기도 해, 자재로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자재다. 그러나 원설계자 아더 딕슨은 한국의 대들보와 서까래에 영감을 받아 대들보를 본따 천장을 설계했다.
|열 두개의 사도를 상징하는 열두 기둥(오른쪽) , 모자이크 성화(왼쪽)
입구의 정면에는 비잔틴 양식의 색유리 모자이크 성화를 볼 수 있다. 반돔형의 성화의 맨 윗부분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는 세상의 빛이다(판토크라토르)’라고 적힌 책을 펼쳐 보이고 있다. 그 아래로 중앙에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 왼쪽에는 순교자 스테판 이사야, 오른쪽에는 요한과 성 니콜라 주교가 모자이크로 새겨졌다.
| 파이프 오르간의 파이프 개수는 총 1450개로 1450개의 음을 낸다(왼쪽), 3대 주교 마크 트롤로프의 황동판(왼쪽)
성당 뒤쪽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은 1450개의 음을 내며, 외관에서부터 웅장한 위엄이 느껴진다. 파이프 오르간은 영국의 해리슨&해리슨사가 2년 10개월간 제작해 1985년 설치됐다. 성당 바닥은 원래 목조 마루였지만 증축 때 화강석을 깔았다. 성당의 가운데 바닥은 붉은 색으로, 성공회에서는 예수님의 성체(聖體)로 여겨 밟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고 한다.
지하의 요한 성전에는 성당을 건립한 마크 트롤로프 주교의 황동판이 있다. 황동판 아래에는 트롤로프 주교가 영구 안치됐다. 당시 서울 사대문 안에 왕이 아닌 다른 이의 시신을 안치하는 것이 금지돼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의 개방된 시대적 상황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건축전문가들은 성공회 서울대성당의 이런 건축양식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분류한다. 로마적的’이라는 뜻의 로마네스크 양식은 서양에서 12세기에 유행했던 건축양식으로서 건물을 벽돌이나 돌을 아치모양으로 쌓아 만들기 때문에 대체로 층고가 낮고 둥글궁글한 이미지를 담는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로마의 문화와 동양 문화가 융합한 비잔틴 양식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런데, 성공회대성당은 전통 로마네스크 양식에 한국적 요소를 융합해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독특한 양식을 구현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용재 건축평론가는 “성공회 서울대성당은 수직이 아닌 수평과 곡선의 힘이다. 기독교 계열 건물임에도 한국적인 미가 느껴진다. 예를 들어 성공회성당은 아치와 곡선이 특징인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로 지붕에는 기와를 얹었다. ‘로마적的’이라는 뜻의 로마네스크(romanesque)의 서양 건축과 한국 전통의 기와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건물 외벽에 회백색의 화강암과 붉은 벽돌은 마치 한국의 단청을 보는 듯하다”고 말했다.
성공회서울대성당은 경복궁, 덕수궁 등 유명한 유적지가 집적한 광화문에서 결코 화려한 명소가 아니다. 서울 명동에 자리를 잡은 명동성당처럼 성탄절이면 모든 사람들이 입에 올리면서 기억하는 종교적 상징도 아니다.
하지만, 일년내내 성공회 대성당을 찾는 국내외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또 1984년 경향신문사가 ‘한국의 명건물’특집 시리즈에서 첫번째 명물로써 선정될 정도로 건축사에서 한 획을 긋는 유명 건축물이다.
경향신문 1984년 10월 6일자 기사는 “가까운 덕수궁과 어울려 고도의 정취가 듬뿍 느낄 수 있다”고 소개됐다. 이후에도 성공회 성당은 1988년 건축가 100명이 선정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선정됐다. 주남철 교수(고려대)는 “개항 이후에 세워진 건축물 가운데 왕궁과 가까이 있으면서 고도(古都)의 맛을 돋워주는 유일한 건축”이라고 평가했다.
성공회서울대성당이 이같은 매력은 겉으로 드러난 매력에 불과하다. 이 건축의 탄생에서부터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 까지 스토리를 추적해가면 숨은 매력을 만날 수 있다.
건축의 역사 _70년만에 완성되다
성공회 대성당 중앙 전면부 앞에는 이 건물의 역사를 기술한 관광안내문이 자리잡고 있다.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이 건물의 역사를 짧게 기술한다.
“영국왕립 건축협회 소속 아더 딕슨이 설계하여 1927년 미완성형태로 건립됐다. 1998년에 다시 재건축됐다……”
아더 딕슨은 누구이며, 70년만에 완성된 사연은 또 무엇일까? 이 안내물에 따르면 성공회서울대성당의 주소는 서울시 중구 정동 3번지다.
1889년 11월 1일, 영국의 켄터베리 대주교 벤슨이 영국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존 코프(C.G.Corfe 한국이름:고요한)를 주한 주교(主敎)로 임명하였다. 코프 주교는 두 명의 영국 의사와 옥스퍼드 대학 출신인 트롤로프, 워너 두 신부(神父), 인쇄기술자 등으로 구성된 선교단을 이끌고, 1890년 9월 29일 인천에 도착했다.
이들은 서울과 인천,강화등 기호지방에서 선교 사업을 본격적으로 벌였다. 존 코오프(C. John Corfe)주교는 영국공사관(정동 4번지)이 자리를 잡고 있는 정동의 서학현의 수학원에 위치한 30여평짜리 한옥을 구해서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서학현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교육기관인 4부학당중 서쪽에 위치한 교육기관에서 유래했다. 고종황제 시절 1906년 왕족과 귀족의 자제를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던 근대적 교육기관을 서학현에 설치했다.
코프주교가 정동에 세운 교회는 장림성당(The Church of Advent)이라고 불렀으며, 1892년에 교회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장림이라는 이름은 기독교에서 예수의 탄생에서 유래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형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일컫는 말. 곧 하느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로 하여금 처녀인 채로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케 하여 태어난 성육신(成肉身)의 사건을 말한다. 장림절 또는 강림절은 그리스도 교회력의 전례 계절의 하나이다. 크리스마스(12월 25일) 전의 제4일요일을 대림절 제1주일로 하고, 크리스마스까지의 준비기간을 말한다.
1909년 부지를 구입하여 교회 부지를 확장하고 1912년부터 교회 건립을 위한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 성당건립은 서울대성당 제3대 마크 트롤로프(M.N. Trollope, 1862-1930, 한국이름 조마가) 주교가 주도했다. 트롤로프는 1911년 3대 주교에 오른 뒤, 상징적인 성당을 건립할 계획을 세우고 모금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2대 주교는 1905년~1911년 사이 주교를 맡았던 단아덕(A.B.터너) 신부였다.
토롤로프 주교는 어느 정도 자금을 모은 뒤, 버밍햄지역의 유명 건축가인 아더 딕슨(Arthur Dixon)에게 설계를 의뢰했다. 딕슨은 코프, 토롤로프와 같은 옥스포드대학 출신 건축가였다. 아더 딕슨은 1917년 로마네스크 양식의 라틴(十, 십자가)자형 3층 건물로 설계했으며 공사는 1922년에 시작됐다.
그러나 결국 원래 설계도인 ‘큰 십자형’을 완성하지 못하고 양쪽 날깨와 아래쪽 일부를 뺀 ‘작은 일자형’으로 공사가 끝났다. 미완성인 상태로 1926년 헌당된다.
대한성공회가 미완의 건물을 사용한 세월이 70년이다.
1998년, 원설계대로 복원되다
그러다가 대한성공회는 1991년 성공회 성당 창립 100주년을 앞두고 대성당을 본래의 모습대로 완성하는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 성공회 자료실에 원설계도가 보관돼 있지 않은 점을 발견하고 원 설계대로 증축하는 일이 출발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 방한한 영국 관광객이 그가 근무하는 영국 렉싱턴 지역 도서관에 아더 딕슨의 원 설계도가 보관돼 있다고 성공회측에 전했던 말을 누군가 기억하고 이를 김원씨에게 전했다.
김원 광장 건축대표는 이 단서를 바탕으로 1993년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 건축가에게 부탁해 영국 렉싱턴 도서관에서 원 설계도를 찾는데 성공했다. 김원 대표는 영국으로 바로 날라가 복사비만 지불하고 원설계도를 복사해서 국내로 가져왔다.
김원 광장 건축 대표는 100년 전 선배 건축가와 교감하며 원 설계를 최대한 반영해 실시 설계를 했다. 시공은 대우건설이 맡았다.
대한성공회는 1994년 한국 교회 창립 100주년 기념으로 증축 공사를 시작했고 1996년 현재의 모습으로 공사를 마치게 된다.
그런데 1996년 증축공사가 마무리될 시점에, 한국의 언론들은 김원대표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췄지만 아더 딕슨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만 언론기사와 성공회가 작성한 안내문에 ‘영국왕립건축협회 회원’이라는 타이틀이 아더 딕슨을 수식했을 뿐이다.
건축설계가 스토리_성공회서울대성당은 19세기 영국 문명과 연결통로
아더 딕슨은 1856년에 태어나 1927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19세기 영국에서 공예운동의 주창자인 윌리엄 모리스, 필립 웹 등 옥스포드대학에서 함께 공부한 인연을 계기로 공예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을 이끌면서 영국뿐만 아니라 서양 문화예술사에 커다른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아더 딕슨은 버밍햄에서 명망가인 조지 딕슨의 아들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에서 버밍햄 길드 조직을 이끌었다. 그는 은세공 및 구리가공기술을 익혔으며 버밍햄의 그레이트 찰스 거리의 주요 빌딩을 설계했다.
공예운동은 18세기 말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빅토리아시대에 와서는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인간의 생활을 완전히 변화시킬 만큼 발전하였고, 공업생산과 기계생산에 의한 제품들이 대량 생산되었다.
윌리엄 모리스는 이러한 기계만능주의가 결국은 생활 속의 미를 파괴할 것이라는 우려에서 가구 ·집기 ·옷감 디자인 ·제본 ·인쇄 등 응용미술의 여러 분야에서 ‘수공업’이 지니는 아름다움을 회복시키려고 중세적 직인제도(職人制度)의 원리에 따른 공예개혁을 기도하였다.
모리스의 이러한 혁신운동은 1860년대부터 시작하여 건축가와 공예가들의 큰 호응을 받았으며, 1880년대에는 직인기술의 향상을 위한 몇 개의 조직도 결성되었는데, 1882년의 ‘센추리 길드’, 1884년의 ‘아트위키즈 길드’와 ‘아츠 앤드 크렙츠 전람협회’ 등이 그것이다.
이들 직인적 공예운동은 기계능력의 가능성을 무시하였다는 점에서 시대를 역행한 듯하나, 예리한 문제점 제기와 세련된 미의식은 그 후의 공예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모리스와 필립 웹과 절친했던 아더 딕슨은 버밍햄 지역에서 길드조직을 부활시키고, 다양한 공예 작업을 했으며, 버밍햄시의 그레이트 찰스가 주요 건물을 설계하는 등 공예운동의 중심 인물로서 활동했다.
아더 딕슨이 건축가로서 설계를 주도했던 건물들은 다음과 같다.
세인트바실 데리턴드 성당(St Basil’s church, Deritend)
세인트 앤드류 반트그린 성당(St Andrew’s church at Barnt Green),
터널 그랑쥐(Tennal Grange at Harborne)
버밍행시 그레이트 찰스 45번가( 45 Great Charles Street for the Birmingham Guild of Handicraft)
이중 세인트 바실 데리턴드성당은 성공회서울대성당처럼 로마네스크 양식을 채택하고 있다.
버밍햄시가 보존하고 있는 그레이트 찰스 스트리트에서는 아더 딕슨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데, 특히 수작업을 중시했던 공예운동의 흔적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또 그레이트 찰스 거리에서 성공회대성당이 풍기는 실용적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아더 딕슨과 로마네스크 양식
앞서 서술했듯이 성공회서울대성당은 건축양식측면에서 보면 로마네스크 양식을 기본 축으로 삼고 있으면서 한국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런데, 성공회측 기록물과 증축을 담당했던 김원대표,건축전문가 등 여러 관련자들의 발언들은 성공회서울대성당의 건축양식 탄생을 조금씩 다르게 보고 있다.
먼저, 트롤로프 주교가 로마네스크 양식과 한국양식의 융합을 적극적으로 추구했다는 설이다.
트롤로프 주교는 1920년 작성한 건축 제안서에서 “새로 짓는 성당은 한국 고유의 건물 재료와 기후 조건에 가장 쉽게 어울리는 양식이어야 한다”고 밝혔다.
네 가지 설계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한국교회의 활동을 고무할 수 있도록 전국 신자들에게 전도의 열의를 불어넣는 중심체가 되야 한다.
2. 어떤 민족이건 교회를 통하여 하나의 가족임을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3. 전국교회가 하나의 규범으로써 절차에 맞는 예전적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4. 미래 교회 건축의 하나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
딕슨은 대성당 건축에 관심을 갖고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해, 바실리카풍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로 설계했다. 로마네스크 양식이 고딕보다는 덕수궁 터의 스카이 라인에 어울리고, 경비가 적게 들기 때문에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천주교가 보편된 교회를 강조하며 정통성을 강조하는 반면, 개신교라고 할 수 있는 성공회는 특유의 토착화 선교 정책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종교건축전문가들은 성공회대성당을 그 규모와 외양에서 천주교 명동성당과 비교하기도 한다. 명동성당은 순수한 고딕식 구조로, 첨탑으로 상징되는 수직의 힘이 강하게 느껴진다. 명동성당이 생길 당시에는 모양새 덕분에 ‘뾰족집’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장안의 명물이었다고 한다.
|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공회대성당(왼쪽) 고딕식 건물인 명동성당(오른쪽)
이에 따라 종교건축전문가중 일부는 “성공회대성당은 둥근 원형의 아치가 건물 전체에 너울지면서 사람을 평안하게 품으면서 낮은 곳으로 향하려는 그리스도 정신을 담고 있다”고 평가한다.
반면, 성공회 교회가 영국성공회의 상징적 건물이기를 원했던 트롤로프 주교를 아더 딕슨이 설득했다는 설도 있다.
아서 딕슨은 옥스퍼드 출신의 건축 전문가로 “고딕보다는 덕수궁 터의 스카이라인에 잘 어울리고 서양 초대교회의 순수하고 단순함을 담지한 로마네스크 양식이 적합하다.”고 주장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더 딕슨은 1927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건축잡지(조선의 건축)와 인터뷰를 갖고, 로마네스크 양식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교회당은 조선성공회의 대성당으로 ‘센트 메어리 앤드 니콜라스’ 성당이라고 일컫는다. 완성 후에는 전체 계획 평면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의 콰이어(choir)와 7개의 베이(bay(를 가진 네이브(nave)와 2개의 트란셉트(transept)로 이루어질 것이나, 현재 단지 네이브는 3개의 베이뿐, 트란셉트는 극히 일부분만 완성된 데 지나지 않는다.”
콰이어는 성가대석. 베이Bay는 건축용어로 흔히 쓰이는데, 기둥과 기둥 사이의 한 구획을 뜻한다. 트란셉트는 십자형 교회의 팔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신랑에 직각으로 위치하며 보통 성단소(聖壇所)와 애프스와 구분된다.
네이브는 교회 한가운데의 중심 공간. 신랑(身廊)이라고도 함. 나르텍스(현관)부터 트랜셉트(transept:십자형 교회의 경우 성소 앞에서 네이브를 가로지르는 복도)까지 이르는 부분을 말한다.
그런데, 영국 성공회의 본고장인 영국에서 1800년대 후반 교구 교회들이 로마네스크 양식을 채택하는 운동이 전개됐었다. 당시 일부 성공회 신부들이 마을 공동체 가운데 소박한 교회를 짓고 신자들 속으로 들어가자는 운동을 펼쳤었다.
성공회 교회사에 따르면, 이 시기에 아더 딕슨은 성공회 성당 건물 설계에 참여했었다. 이 시기에 딕슨이 설계했던 성당으로 현재 남아 있는 건물로서 센이트 바실, 세인트앤드류 등이다. 이들 건물 양식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분류된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한국 성공회가 상징적 교회건물을 기획하면서 성공회의 카톨릭전통수용 운동와 연결됐던 아더 딕슨을 선택했던 것은 자연스럽게 보인다.
즉, 영국성공회의 당시 철학과 문화를 한국에 가져와서 뿌리를 내리게 하고 싶었던 의도를 가장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 건축가가 바로 아더 딕슨이었다.
성공회성당, 근현대사의 현장
성공회성당은 일제강점기부터 6월 항쟁까지 격동의 시기를 관통한 역사의 현장이다.
3·1운동 당시 만세 함성은 성공회대성당에서도 울려 퍼졌다. 성공회대성당은 그리스도계 학생들의 만세 운동의 거점이었다. 그러나 성당은 일제강점기 전쟁으로 인한 물자 동원령으로 성당 건립이 중단되는 불운을 겪었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급기야 주교가 영국으로 추방되면서 해방 때까지 성당이 일본인에게 맡겨졌다.
한국전쟁 중에는 주교를 비롯한 수녀, 사제들의 희생이 잇따랐다. 전쟁 와중에도 신앙 활동을 멈추지 않았던 제4대 주교였던 구세실 주교는 간첩 혐의로 체포 돼 포로 수용소를 전전하는 고초를 겪었으며 함께 포로로 끌려간 신부와 수녀가 극심한 추위와 기아로 목숨을 잃었다.
| 아랫줄 가운데 구세실 주교 (왼쪽), 순교자비 (오른쪽)
성당 안쪽 뜰에는 이들을 위한 순교자비가 마련 돼 있다. 수난의 역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성당 동쪽 제대 외벽에는 총탄 자국이 남아있는데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기관총을 난사해 생긴 것이다.
1970년대 군사 정권 시기에는 사제들이 잇따라 연행되었으며 감시를 당했고 예배까지 방해 받았다. 그러나 성공회성당은 1987년 6월 10일, 역사적 순간을 맞이한다.
“6월 10일 오후 6시 대한성공회 성당에서 광복 42년을 상징하는 42번의 종소리가 울리자 시청 앞을 지나는 수백대의 차량이 일제히 경적을 울렸다. 전국 곳곳에서는 시민과 학생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를 불렀다.”
서중석의 『한국 현대사 60년』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주교관 앞에는 6월 항쟁의 진원지를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석에는 “유월 민주항쟁이 이 자리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민주화의 새 역사를 열다.” 문구가 새겨졌다. 주교관은 군사정권의 탄압을 피해 재야 운동가와 지식인·정치인 등이 모여 결의를 다졌던 곳이다.
| 6월 민주항쟁 기념비석 (왼쪽), 주교관 전경 (오른쪽)
주변 건물 스토리
서울 중구 정동 3번지에 위치한 서울대성당 주변에는 대한성공회 성가수도회, 덕수궁, 서울특별시청, 서울신문 본사, 조선일보 본사, 주한 영국대사관, 서울특별시의회, 주한 미국대사관 등이 위치해있다.
성공회서울대성당 안에는 달개비라는 한정식 전문 음식점이 있다. 본래 달개비라는 것은 꽃 이름으로, 극한 가뭄이 오면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려 물을 땅 위로 공급하여 땅을 살려준다 한다. 달개비가 음식을 통하여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는 공간이 되기를 바라며 지은 이름이라 한다.
이 음식점은 서울시 선정 자랑스러운 음식점에도 이름은 올린바 있다.
달개비는 서울 삼청동에 위치한 한정식 전문 음식점이었다. 2009년 6월 서울 정동 성공회 부속건물, 옛 세실 레스토랑 자리로 옮겼다.
달개비는 예전 치과 자리였던 1층은 방 6개가 있는 호텔로 탈바꿈했다.
함재연 대표는 달개비에 대해 “작은 회의를 할 수 있는 곳이 별로 없다. 그래서 작은 회의가 열리고, 회의를 하러 외국에서 온 손님들은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만들었다”고 밝힌바 있다. 이 공간을 먼저 제안한 것은 성공회 측이었다. 외국에서 오는 성직자들이 잠을 자고, 회의를 할 만한 공간을 찾기 쉽지 않다는 어려움 때문이었다. 그리고 과거 연세대 내의 상남경영원 호텔 부문을 운영했던 함 대표에게 이곳을 운영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대성당 바로 옆에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에 대한성공회가 매입하여 덕수궁에서 옮겨진 경운궁 양이재가 위치하고 있다. 양이재는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267호로 문화재로 등록돼 있다.
방문가이드및 문화행사
성공회서울대성당은 시민문화 공간으로 거듭나려 한다. 2년 전부터 매주 수요일 ’주먹밥 콘서트’를 주선해 왔으며 당 앞쪽 국세청 별관과 성당 사무실을 헐어 시민문화공간으로 조성하는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다.
서울대성당 보좌사제인 정길섭(48)신부는 “한국 성공회는 신앙과 일반생활을 구분하지 않는 나눔운동과 사회선교에 치중해 왔으며 그 본당인 서울대성당은 닫힌 종교영역에 머물지 않고 지역인들과 공존하는 대표적인 공간”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