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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7월 21일, 이집트 아스완 댐 완공

11년간의 건설 끝에 이집트의 나일 강을 가로지르는 아스완 하이 댐은 1970년 7월에 완공되었습니다. 2마일 이상 길이의 댐을 건설하기 위해 대략 10억 달러를 투자했습니다. 아스완은 예로부터 이집트와 나일강 상류의 아프리카 민족인 누비아와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었습니다. 1902년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500마일 떨어진 아스완에 댐이 건설되었습니다. 최초의 아스완 댐은 가뭄 동안 귀중한 관개를 제공했지만 거대한 나일 강의 연례 범람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1950년대에 이집트 지도자 나세르는 범람을 막고, 이집트 전역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을 만큼 큰 새 댐을 건설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미국과 영국의 재정적 지원을 받았지만 1956년 7월 양국은 소련과 이집트의 비밀 무기 협정을 알게 된 후 제안을 취소했습니다. 이에 나세르는 영국과 프랑스 소유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여 통행료를 받아 댐 건설비용에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이는 수에즈 운하 위기를 촉발시켰습니다.이스라엘, 영국, 프랑스가 합동 군사 작전에서 이집트를 공격하여, 수에즈 운하는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소련, 미국, UN은 이스라엘, 영국, 프랑스를 강제로 철수시켰습니다. 수에즈 운하는 1957년 이집트의 손에 맡겨졌고, 드디어 아스완 댐이 완공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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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년 7월 18일, 로마 불에 타다.

로마의 대화재는 64년 7월 18일에 시작되어 도시의 많은 부분을 파괴하고 파괴합니다. 잘 알려진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로마 황제 네로가 화재를 일으켰거나 불을 피우는 동안 바이올린을 연주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정치적 의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재난을 이용했습니다. 화재는 전설적인 팔라티노 언덕 남쪽 지역의 빈민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지역의 집들은 매우 빠르게 불에 탔고 불은 강풍에 힘입어 북쪽으로 퍼졌습니다. 화재가 난무하는 동안 심한 약탈에 대한 보고가 있었습니다. 화재는 거의 3일 동안 걷잡을 수 없이 번졌습니다. 로마의 14개 지구 중 3개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엄청난 화재에 영향을받지 않은 사람은 4 명뿐이었습니다. 수백 명이 화재로 사망했고 수천 명이 집을 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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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의 ‘내 아버지의 꿈’

1995년 7월 18일, 잘 알려지지 않은 법대 교수인 버락 오바마의 회고록인  [내 아버지의 꿈: 인종과 상속에 관한 이야기]가 출판됩니다. 오바마는 정계에 입문하기 전에 책을 썼고, 책이 출간된 지 13년 만에 오바마는 미국의 44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

오바마는 1961년 하와이에서 캔자스 출신의 백인 어머니와 케냐 출신의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오바마 가족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 오바마가 서문에서 썼듯이 “아버지를 찾는 소년의 탐색, 그리고 그것을 통해 흑인 미국인으로서 그의 삶에 실행 가능한 의미를 탐색하는 것”입니다. 오바마는 하와이에서 백인 조부모 밑에서 자란 자신의 청소년기를 이야기합니다. 대학 졸업 후 시카고 에서 커뮤니티 조직가로 일했습니다 . 1982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아프리카 친척들을 만나기 위해 젊은 시절 케냐를 방문했는데, 그는 2살 때 부모의 이혼 후 단 한 번만 만났습니다.

로스쿨 2학년 때인 1990년에 영향력 있는 하버드 리뷰에 그의 글이 게재되었습니다. 첫 번째 흑인 회장으로 선출된 후 오바마는 출란 에이전트로부터 연락을 받았고 , 책을 출간 하기 위해 4만달러의 선급금을 받았습니다. 1995년에 이 책이 출판되었을 때 오바마는 시카고 대학의 법학 교수였으며 아직 전국적인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책이 출간된 후 그의 인생이야기는 주목을 끌었습니다. 양장본은 대략 9천부가 팔렸고, 몇 년 안에 절판되었습니다.

책이 출판된 이듬해, 오바마는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어 정계에 입문합니다. 2004년 3월, 그는 일리노이주에서 열린 상원 민주당의 상원 예비선거 에서 승리함으로써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의 책은   2004년 여름에 다시 출판됩니다. 오바마는 미국 상원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 이듬해  [Dreams from My Father] 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2006년 10월 당시 미국 상원의원이었던 오바마는 그의 두 번째 책인 [The Audacity of Hope: Thoughts on Reclaiming America]를 출판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책과 마찬가지로 두번째 책도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2007년 2월 오바마는 드디어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발표합니다. 2008년 선거 유세 중 , 그는 회고록을 썼을 때 대통령출마는 생각조차하지 않았다고 뉴욕 타임즈에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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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7월 19일김일성 주석 장례식

김일성은 7월7일 묘향산의 별장에서 쓰러졌고, 다음날인 8일 오전 2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7월 19일 김일성 장례식이 거행했다 발인은 금수산의사당에서 진행됐고 이어 김일성의 시신을 실은 운구행렬이 이어졌다. 금수산의사당을 떠나 옥류거리,금성거리,영웅네거리 등을 거쳐 김일성광장으로 향했다. 영결식에는 북한주민 2백만명이 참석한 것으로 보도되었다.김일성의 장례식은 전쟁과 분단으로 이어진 그의 시대에 종언을 고하는 것이었다. 권력은 자연스럽게 김정일에게로 승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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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7월 17일, 디즈니랜드 오픈

월트 디즈니의 꿈인인 디즈니랜드가 1955년 7월 17일에 개장했습니다. 1,700만 달러 규모의 테마파크는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에 있는 이전 오렌지 과수원 부지에 지어졌습니다. 한때디즈니랜드는 연간 1,80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을 맞이하며, 이들의 지출액은 약 30억 달러에 이릅니다.

1901년 시카고에서 태어난 디즈니는 1923년 만화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에 작은 스튜디오를 마련했습니다. 1928년 미키마우스가 주연을 맡은 < 증기선 윌리 >는 전국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사운드를 사용한 최초의 애니메이션 영화였습니다. 이후 디즈니는 예술적이고 기술적인 품질을 지속적으로 향상시키려는 고집 때문에 회사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의 첫 장편 만화인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1938)는 완성하는 데 3년이 걸렸고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백설공주에 이어 피노키오 (1940), 덤보 (1941), 밤비 (1942) 등 어린이를 위한 다른 장편 고전이 뒤따랐습니다. 그 이후에도 디즈니는 새롭고 실험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50년 보물섬을 시작으로 디즈니는 실사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디즈니는 또한 텔레비전용으로 직접 영화를 제작한 최초의 영화 스튜디오 중 하나였습니다.

1954년, 디즈니는 로스앤젤레스 애너하임에 놀이공원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디즈니랜드가 오락적 가치뿐만 아니라 교육적 가치도 있고 성인과 아이들 함께 즐길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1955년 여름, 7월 17일 디즈니랜드 개장을 위한 특별 초대장이 발송되었습니다. 그런데 개장일에 수천 명이 가짜 초청권으로 입장한 사람들로 북적였으며, 디즈니랜드 주변의 도로는 극심한 교통 체증을 빚었습니다. 섭씨 38도에 이르는 뜨거운 날에 음식과 음료는 바닥나고, 너무 많은 승객으로 인해 거의 전복될 뻔했습니다.디즈니랜드는 곧바로 정비하고, 특별 행사와 새로운 최첨단 관광 명소를 지속적으로 건설했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방문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1965년 플로리다주 올랜도 근처에 더 큰 디즈니 테마파크와 리조트에서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1983년에는 도쿄 디즈니랜드가 일본에, 1992년에는 파리 디즈니랜드(또는 “유로 디즈니”)가 문을 열었습니다. 홍콩의 디즈니랜드는 2005년 9월 문을 열었습니다.

2023년 창사 100주년을 맞은 디즈니는 실적 부진합니다. 디즈니가 지난 1년간 발표한 8개 작품의 연이은 흥행 실패로 약 9억달러(1조2000억원) 손해를 입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정치적 올바름에 치우친 작품은 대중의 공감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디즈니의 현금 창출원 역할을 했던 디즈니월드도 방문객이 줄어들어 매출이 감소하고 있다고 합니다. 디즈니는 연간 이용객들의 혜택을 줄이고, 전반적인 요금을 평균 9% 인상했습니다. 새로움 없이 돈을 더 많이 쓰게 하는 전략은 역효과를 낳을 수 밖에 없습니다. 월트 디즈니는 그가 처음지닌 목적만큼은 잊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동심입니다.

실적 부진 등으로 위기를 겪고 있는 월트디즈니를 구하기 위해, 로버트 밥 아이거 최고경영자(CEO)가 다시 등장했습니다. 그가 월트 디즈니를 동심을 다시 살려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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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7월 15일,잠실 종합 운동장 완공

이 야구장은 중앙 125m, 좌우 100m의 규모로, 3만 개의 좌석을 갖추고 있었다. 서울의 중심부에서 남쪽으로 약 13km떨어진 송파구 잠실동에 위치한 서울(잠실)종합운동장은 1976년부터 착공하여 1984년 9월 완공되었다. 운동장을 중심으로 남쪽길 건너편으로 아시아 선수촌아파트와 공원이, 동쪽으로는 잠실아파트 대단지가, 북쪽으로 한강과 탄천을 인접하고 있다. 또한 동남쪽3.5km지점에는 올림픽 공원이 자리잡고 있다. 총부지 402,816㎡에 올림픽주경기장, 야구장, 제1수영장, 제2수영장, 실내체육관 등 대형경기장과 그 외육상보조경기장을 비롯한 생활체육운영과, 서울시교육청에서 관리,운영하고 있는 학생실내체육관이 있으며, 야외예식을 할 수 있는 넓은 체육공원 등 다양한 경기장 시설이 있다. 특히 올림픽주경기장은 제10회 아시아 경기대회와 제24회 서울 올림픽대회의 개,폐회식과 육상,축구등을 치룬바 있어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최근에는 국제적인 축구경기는 물론, 각종콘서트를 비롯한 대형경기 및 행사가 개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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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9년 07월 14일, 예루살렘 함락

기독교도와 이슬람 세력의 충돌은 11세기 말부터 시작하여 1492년 서구의 ‘레콩키스타’(이베리아 반도 재정복)까지 400년이나 이어졌습니다. 셀주크 투르크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까지 위협하합니다. 그러자 동로마황제와 교황은 이교도의 야만적 침탈과 싸움을 선포합니다. 1095년 1차 십자군은 7주간의 포위 공격 끝에 예루살렘을 점령 합니다. 곧바로 도시의 무슬림과 유대인 인구를 학살하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 전기’를 쓴 역사가 사이몬 몬티피오리는 학살의 잔인함을 기록했습니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 제국 쇠망사’에 ‘광신에 따른 야만 행위’라고 기록했습니다. 수만명을 죽인 대학살은 1주일이 지나서야 겨우 수그러들었다. 부패가 빠른 한여름 예루살렘에 퍼진 시체 썩는 냄새는 몇 달이 지나도록 빠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점령이후, 시리아에서부터 팔레스타인에 걸쳐 이르는 중동 지역에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몇 개의 십자군 국가가 세워졌습니다. 88년 뒤 쿠르드족 출신 술탄 살라딘은 예루살렘을을 다시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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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7월 13일 첫번째 월드컵 경기

사상 첫 제1회 월드컵은 1930년 7월13일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열렸습니다. 올림픽의 한 종목에 불과하던 축구는 1920년 FIFA가 독자적인 국제축구대회 개최 계획을 발표하면서 월드컵으로 탄생했습니다. 첫 월드컵 참가국은 단 13개국. 이 참가국들도 월드컵 산파역할을 한 줄 리메 전 FIFA 회장의 노력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당시는 세계대전 전후 복구사업에다 대공황 와중이라 각국의 관심이 적었습니다. 더구나 아메리카 대륙의 9개국, 유럽 4개국이 참가한 월드컵은 경기규칙의 적용이 심판마다 달랐고, 공인구도 없어 갖가지 마찰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최초의 월드컵 축구 경기에서 프랑스는 멕시코를 4-1로, 미국은 벨기에를 3-0으로 이겼습니다. 월드컵 결승전에서 93,000명의 관중이 결승전을 보았습니다. 월드컵은 이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시청되는 스포츠 이벤트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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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12일,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1953년 6월 휴전 회담 최대의 난제였던 포로 교환 문제에 대한 양 측의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정전 협정이 가시화되고 있는 데 반해,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 문제가 더디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승만은 2만 7천여 명에 이르는 연합군 감시하의 ‘반공 포로’들을 직권으로 석방해버렸습니다.이는 정전 협정 자체를 무산시킬 수도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길을 바랬던 미국은 이승만의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1953년 7월 12일 한·미 상호 방위 조약에 합의하는 한미 공동 성명이 발표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전 협정 체결 후인 8월 8일,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미 국무장관 사이에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가조인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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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지애나 매입과 하이파이낸스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1803년 루이지애나를 1500만 달러에 사들인 것이다. 미시시피에서 로키 산맥까지 뻗어 있는, 당시 미국영토의 두 배 크기인 루이지애나를 1 제곱킬로 미터 당 5달러에 구매했다. 이 거래로 현재 미국 15개 주의 대부분이 탄생했다.

18세기 중반 프랑스는 뉴올리언스에서 오대호까지, 다른 어떤 유럽 국가보다 미국을 더 많이 지배하고 있었다. 프랑스가 만약 뉴올리언스의 점령하고 미국의 통행을 막는다면 미국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제퍼슨은 항구 도시인 뉴올리언스를 확보하기 위해 프랑스에 최대 1000만 달러를 제안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루이지애나 영토 전체의 매입을 요청했다. 아이티의 노예혁명을 진압하지 못했고, 영국 해군의 봉쇄로 프랑스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무엇보다 현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팔고자 했다.

프랑스와 미국 사이의 중개자 역할은 런던 베어링스 은행(Barings Bank of London)과 호프스 오브 암스테르담(Hopes of Amsterdam)이 맡았다. 두 은행은 프랑스 정부를 설득하여 해당 영토에 대한 요구 가격을 1억 프랑스 프랑에서 8000만 프랑스 프랑으로 낮추었다. 또한 거래 자금 조달은 미국정부의 대규모 채권 발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제안했다. 곧 미국정부가 부채를 떠맡고 보증하는 채권이다.

협상은 신속하게 진행되어 루이지애나 영토를 1,500만 달러에 구매하기로 했다. 프랑스에 발행된 채권은 국제시장에 상장된 최초의 미국 채권이다. 채권은 6% 이 이자를 지급하며, 만기는 발행일로부터 15년에서 20년 사이에 상환되는 조건이다. 현금이 필요했던 나폴레옹은 채권을 액면가의 약 86.5%에 두 은행에 양도하고 바로 현금 일시불로 받아 전쟁을 준비한다. 한편 두 은행은 채권을 유통시장에 광고하여 런던, 암스테르담 등 일반 투자자들에게도 판매한다. 두 은행은 미국과 프랑스의 딜을 중개하여 당시 국제 금융의 중심에 서게 된다.

루이지애나 매입은 그 자체로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 미국 땅의 두 배를 넓혔고, 미국 주권에 대한 유럽의 위협은 전쟁 없이 해결되었다. 미국 연방정부 채권의 이자 지급이 흠잡을 데 없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암스테르담에서 런던, 필라델피아에 이르기까지 일반 투자자는 미국의 부채 상환 보증을 신뢰했다. 미국 채권 보유자들은 1812년 대영제국과 전쟁을 시작했을 때에도 정부가 빚을 갚을 수 있다는 새로운 수준의 믿음을 얻었다.

500만 달러는 당시 미 연방정부 연간 세수보다 40%나 더 많은 돈이었다. 어떻게 미국은 매입 비용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최종 이자 지급액은 총액 2천 700만달러이고, 매년 이자만으로 67만5000달러를 지불해야 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주로 수입관세에 의존하는 제한된 부채 상환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매년 이자를 제대로 지불하는 것은 도전적인 과제였다. 당시 미국은 정해진 예산도 조세제도도 없는 신생 국가였다. 1803년 미 연방정부가 최초로 국제무대서 채권발행한 것은 그 자체가 사건이었다. 이제 현대 미국 하이파이낸스가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방정부는 매해 이자를 지불하기 위해 토지를 매각하고 항구에서 관세 수입을 징수했다. 1804년 1차 이자 지급이 만기가 되었을 때 미국은 적은 예산으로 운영되었지만 점점 더 복잡해지는 국제금융 세계에서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다. 알버트 갤러틴 재무장관의 현명한 예산 관리로 채권 상환을 위해 시민들에게 추가 세금을 부과할 필요는 없었다. 미국은 채권 보유자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고, 국가 신용에 신뢰감을 주었다.

채권의 세계에서는 ‘완전한 믿음과 신용’이 특히 중요하다. 미국 정부는 무조건적인 보증을 이행하고, 적시에 이자와 원금을 지불하기 때문에 미국국채는 ‘무위험’ 채권으로 간주되었다. 이후 210년 이상 동안 투자자들은 미국 정부가 제공하는 완전한 믿음과 신용 보증에 익숙해졌다. 보증은 불황, 공황, 내전, 두 차례의 세계 대전, 헌법 및 정치 지형의 수많은 변경을 견뎌냈다.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과 재무장관 갤러틴이 루이지애나 매입을 위해 연방정부 채권을 발행한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다. 그들은 농업사회를 신봉했고, 연방주의, 은행이나 부채에 적대적이었다. 경제발전을 위해 더 강력한 연방정부와 은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해밀턴과 끊임없이 갈등했다. ‘국가부채란 너무 많지만 않다면 국가적인 은총이다’고 말한 알렉산더 해밀턴을 비판했고, ‘국가부채는 국가의 저주’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들이 루이지애나 매입을 위해 상당한 규모의 국가부채를 받아들였다. 또한 공화주의자의 정적이었지만 대부분의 연방주의자와 달리 알렉산더 해밀턴은 루이지애나 매입을 찬성했다. 다만 해밀턴은 이를 ‘계획된 조치’가 아니라 ‘우연한 행운’이라 말한다.

연방주의자와 공화주의자는 미국의 미래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끊임없이 경쟁했다. 경제적 발전에 다양한 의견들은 서로 경쟁하면서 또한 서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루이지애나 매입 그리고 국제 금융의 성공적 등장은 그 누구보다도 알렉산더 해밀턴이 꿈꾸던 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