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in오늘의역사

1961년 8월 13일, 베를린 분할

제2차 세계대전 후 패배한 독일은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 점령지로 분할되었습니다. 베를린 시도 분할되어 소련군이 도시의 동쪽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그 후 12년 동안 서독과 단절되었습니다. 1961년까지 동독의 숙련 노동자, 전문가, 지식인을 포함하여 천여명의 동독인이 매일 떠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동독과 소련은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사이의 모든 접근을 봉쇄합니다. 국경선에 6피트 높이, 96마일 길이의 콘크리트 블록 벽, 이른바 베를린 장벽을 설치합니다. 하루 아침에 베를린은 분단되었습니다.

베를린 장벽은 냉전 의 가장 강력하고 상징적인 상징 중 하나였습니다 . 1963년 6월, 케네디 는 베를린 장벽 앞에서 그 유명한 “Ich bin ein Berliner”(“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 연설을 하여, 베를린을 폭정과 억압에 저항하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만듭니다. 마침내 1980년대 후반 소련의 쇠퇴에 힘입어 동독은 여러 자유주의 개혁을 시행합니다. 1989년 11월 9일, 동독인과 서독인 모두가 베를린 장벽에 모여 장벽을 넘어 허물기 시작했습니다. 이 냉전 억압의 상징이 파괴되면서 동독과 서독은 다시 하나의 국가가 되었고 1990년 10월 3일 공식적인 통일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Posted in오늘의역사

1945년 8월 15일, 일본 항복

히로히토 천황 의 재촉을 받은 일본 전쟁위원회는 이미 8월 10일 대사를 통해 연합국에 항복 선언서(종전선언)를 제출했지만, 만주에서는 일본과 소련, 남쪽에서는 일본과 미국 사이에 전투가 계속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천명 이상의 일본군이 항복문서가 연합국에 전달되는 것을 막기 위해 황궁을 습격했기 하기도 했습니다.여전히 히로히토 천황에게 충성하는 병사들이 반군을 격퇴했습니다. 그날 저녁, 항복에 가장 단호하게 반대하는 전쟁 평의회 의원인 아나미 장군이 자살했습니다. 일본군의 패배를 속죄하고 천황이 항복의 말을 하는 것을 듣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미 대통령 트루먼은 이 소식을 미국인들에게 전달하자, 워싱턴 DC와 전국적으로 축하 행사가 열렸습니다.

Posted in오늘의역사

1974년 8월 10일, 잠실 개발계획 발표

서울 잠실은 본래 한강의 섬이었습니다. 섬마을이었던 신천동과 잠실동이 서울로 편입되기 전에는 한강 북쪽의 경기도 양주군에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누에를 치던 ‘동잠실’에서 잠실’이라는 이름이 붙어지게 됩니다. 비만 오면 잠기던 잠실은 1970년대 들어서는 부동산 뉴스로 등장하게 됩니다. 1971년부터는 잠실섬 물막이 공사가 시작되어, 잠실은 섬이 아니라 뭍으로 변모합니다. 이후 육지가 된 잠실은 구획정리와 택지조성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1974년부터 잠실시영아파트와 잠실주공아파트가 차례대로 들어서게 됩니다. 

Posted in오늘의역사

1919년 8월 11일 바이마르 헌법선포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에게 패배를 인정하기 전부터 국내 전선에는 불만과 무질서가 지배했습니다. 공장 노동자와 군대 내 반란이 있었고, 1916년부터 독일은 기본적으로 최고군사령부라는 군사독재 하에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18년 10월 말 패배가 임박하자 힌덴부르크는 동맹국과 휴전 협상을 하기 위해, 카이저 빌헬름 2세와 독일 정부에 시민 정부를 세울 것을 주장했습니다.

공화국의 헌법을 제정한 장소가 바이마르였기에 헌법과 국가가 바이마르로 불리게 됩니다. 1919년 제정된 ‘바이마르 헌법’ 제1조는 “독일국은 공화국이다. 국가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 국민주권 원칙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렇지만, 바이마르 공화국 14년 동안 21개의 내각이 들어서며 혼란에 빠졌습니다. 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의 지나친 전쟁 배상금 요구하고, 대공황이 겹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은 무너지고 맙니다. 이후 독일은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이 이끄는 전체주의 체제가 성립되었습니다.

Posted in오늘의역사

1971년 8월 7일, 제1회 봉황대기 쟁탈 전국 고교 야구 대회 개최

1971년 창설한 봉황대기는 기존의 언론사 주최 대회와 달리, 지역 예선 없이 전국의 모든 교교팀이 아무런 제한 없이 출전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일보 사주였던 장기영이 봉황대기 창설을 주도했습니다. 봉황대기는 42년간 일선 고교와 야구팬들의 사랑을 받아 왔고, 한국 야구 발전의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봉황대기 고교야구대회에는 재일동포 야구팀도 출전했는데, 1972년 2회 대회부터 참가해 1997년까지 한국을 찾았습니다. 봉황대기 등 고교야구는 한국 프로야구 탄생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Posted in오늘의역사

1975년 8월 8일, 지구온난화 용어 등장

“지구 온난화”라는 용어는 1975년 8월 8일브로커의 의 논문 “Climatic Change: Are We on the Brink of a Pronounced Global Warming?”이 과학저널에 발표하면서 등장했습니다.

브로커는 빙하기의 급격한 변동이 “열염분 순환”(적도에서 북쪽으로 극지방으로 열을 이동시키고 차가운 물을 운반하는 해류와 바람 시스템)의 변화로 인해 발생했다고 가정했습니다. 브로커는 이 컨베이어 벨트가 변경되면, 급격한 기후 변화가 발생한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화석 연료 배출로 인해 대기 중 이산화탄소 함량이 계속 증가하면, 곧 지구가 따뜻해지기 시작하여 해양의 표층수를 데우게 됩니다. 그러면 얼음이 녹으면서,  해류를 변경하며 컨베이어 벨트를 효과적으로 차단합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지구 온도의 예측할 수 없는 “켜짐과 꺼짐 깜박임”에서 올 것입니다. 브로커가 1998년에 말했듯이 “기후 시스템은 화난 짐승 이며 우리는 막대기로 그것을 찌르고 있습니다. 브로커는 2019년에 사망했습니다. 2023년 여름 지구는 진짜 화가 난듯 합니다.

Posted in오늘의역사

1944년 8월4일, 안네프랭크 체포

제보에 의해 암스테르담에서 가족과 함께 안네와 체포되어, 나치의 수용소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렇지만 안네는 그녀의 일기를 세상에 남겼습니다. 1942년 13번째 생일에 안네는 매일의 경험, 주변 세계에 대한 관찰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2년 동안 안네는 비밀별관이라 불리는 은신처 생활에 대한 일기를 작성했습니다. 비밀 별관의 입구는 경첩이 달린 책장으로 가려져 있었고, 아버지 오토의 친구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조달한 음식과 물품을 그들에게 전달했습니다. 1944년 8월 1일, 안네는 일기에 마지막으로 글을 남겼습니다. 3일 후, 25개월간의 은둔 생활은 나치 게슈타포의 도착으로 끝났습니다. 강제수용소로 이송된 두자매는 발진티푸스에 걸려 1945년 2월에 사망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아버지 오토는 러시아를 거쳐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와 같이 일했던 직원과 재회했습니다. 그녀는 “여기 당신 딸 안네의 유산이 있습니다.” 라고 말하며 오토에게 안네의 일기를 건넸습니다. 1947년에 안네의 일기는 오토에 의해 네덜란드어로 출판되었습니다. 즉각적인 베스트 셀러이자 결국 7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된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홀로코스트 에서 침묵을 지킨 안네 자신을 포함하여 거의 600만 명의 유대인들에게 문학적 증거 역할을 했습니다.암스테르담의 은신처는 1960년에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Posted in인물탐구

오펜하이머와 스트라우스

월가의 금융가 루이스 스트라우스는 냉전 기간 동안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원자력 고문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원자폭탄의 수석 개발자인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극적인 몰락에 기여한 것으로 유명해졌습니다.

1896년 말과 마차가 있는 세상에서 태어난스트라우스는 어린시절 부터 물리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때 방사선과 파동 역학에 관한 책을 탐독했고 졸업 후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하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꿈은 아버지의 신발 사업이 어려워지면서현실에 굴복했습니다. 그는 미국 곳곳을 다니면서 신발 세일즈맨으로 시작했습니다. 스트라우스는 후버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1919년에 뉴욕 투자 은행 회사에 합류하기 전에 미래 대통령의 개인 비서가 되었습니다. 그는연간 100만 달러 이상을 버는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부모가 모두 암으로 사망한 후 스트라우스는 라듐을 치료제로 사용할 자금을 조달하는 기금을 마련했습니다. 그는 자선 활동을 하면서 물리학자들과 어울리기 시작합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 해군에서 행정 업무를 수행한 스트라우스는 미국 냉전 핵 프로그램 의 최전선에 등장했습니다. 1946년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스트라우스를 새로 설립된 원자력 위원회(AEC)의 첫 5명의 위원 중 한 명으로 임명 했습니다 . 미국 최초의 원자폭탄을 만든 곳입니다. 스트라우스는 1949년 8월 소련 의 첫 번째 원자폭탄 실험 을 성공적으로 탐지한 대기 모니터링 시스템을 구축할 것을 펜타곤에 촉구했습니다 .

미국이 더 이상 세계 유일의 핵 초강대국이 아닌 상황에서 스트라우스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 폭탄보다 1,000배 더 강력한 열핵 “슈퍼 폭탄”을 개발하는 대규모 프로그램을 강력하게 지원 했습니다. “이제 우리 계획에서 비약적인 도약을 할 때가 왔습니다.”라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필요하다면 최초의 원자 무기를 생산한 것과 비교할 만한 재능과 돈에 대한 헌신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앞서가는 길입니다.”

스트라우스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끌던 오펜하이머가 끈질기게 반대하는 수소 폭탄을 지지했습니다 . 수소폭탄이 위험한 냉전 군비 경쟁을 가속화할 뿐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오펜하이머는 또한 미국 핵무기의 규모와 능력에 대해 더 많은 공개를 주장했는데, 스트라우스는 이것이 소련에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스트라우스는 트루만을 설득해, 1950년 1월 31일 수소폭탄 개발을 공개적으로 발표하게 합니다.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미국은 세계 최초의 수소 폭탄을 터뜨렸지만, 10개월 후에 소련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1950년 AEC를 떠난 후 스트라우스는 1953년 2월 새로 선출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그를 원자력 고문으로 임명했습니다. 몇 달 후, 아이젠하워는 스트라우스에게 AEC 의장에 임명합니다. 스트라우스는 한 가지 조건을 내걸며 의장직을 맡습니다. 오펜하이머가 더 이상 위원회의 컨설턴트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Posted in오늘의역사

1999년 8월 3일태풍 ‘올가’ 한반도 강타

러시아이름인 올가는 상상을 초월한 폭풍우를 몰고 한반도를 강타했습니다. 7월 말부터 계속 집중호우가 내려 전국이 이미 물난리를 겪고 있던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태풍은 한반도를 할퀴고 지나갔습니다. 태풍으로 곳곳에서 가로수가 뽑히고 유리창이 깨졌습니다. 대형 광고탑이 무너져 상가를 덮쳤고, 제방들이 무너졌습니다. 67명이 죽거나 실종됐고 2만5327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재산 피해는 약 1조1500억 원. 태풍 피해액이 1조 원을 넘어선 것은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올가 이후 2002년 ‘루사’(246명, 5조1000억 원)와 2003년 ‘매미’(129명, 약 4조2000억 원)’ 등 한국에 큰 피해를 준 태풍은 주로 8, 9월에 지나갔다고 합니다. 1923년 올해는 더 큰 피해가 없었으면 합니다.

Posted in오늘의역사

1990년 8월 2일, 이라크 쿠웨이트 침공

1990년 8월 2일 현지 이라크군이 석유가 풍부한 이웃인 쿠웨이트를 침공합니다. 쿠웨이트의 방위군은 빠르게 압도당했고 파괴되지 않은 군대는 사우디아라비아로 후퇴했습니다. 쿠웨이트의 지도자들은 사우디 아라비아로 도망쳤고 몇 시간 안에 쿠웨이트 시는 점령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라크인들은 지방 정부를 세웠습니다. 쿠웨이트를 합병함으로써 이라크는 세계 석유 매장량의 20%를 장악하게 되었고 처음으로 페르시아만의 상당한 해안선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미국 주도의 34개국 다국적 연합군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및 병합에 반대합니다. 1990년 8월 부터 1991년 1월까지 이른바 사막의 폭풍 작전을 수행합니다. 연합군 지상 공세가 시작되자, 이라크의 낡고 보급이 부족한 군대는 빠르게 압도당했습니다.  4일도 채 되지 않아 쿠웨이트는 해방되었고 이라크 군대의 대다수는 항복하거나 이라크로 후퇴하다가 전멸했습니다. 2월 28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휴전을 선언했습니다. 미국 CNN이 미국전투기의 폭격 이미지를 실시간으로 보고하면서 비디오 게임 전쟁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