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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의 미래]⑮ “놀러 오는 동네가 아니라, 살러 오는 동네가 돼야죠”

현재 서울의 주요 주거밀집지역은 대체로 사대문 밖에 자리하고 있지만, 원래는 도성 안에도 많은 사람이 살았다. 서촌을 비롯해 가회동, 익선동 등에 남아있는 한옥은 그 흔적이다. 서울이 변화를 겪으면서 이들 지역은 상업시설에 빠르게 잠식됐다. 서촌은 그나마 주거기능을 여전히 보전하고 있는 지역인데, ‘서촌의 미래’에 관해 다양하고 생생한 목소리를 내는 주민들이 그 증거다.

골목청소, 골목텃밭, 수성동 계곡 보존 등을 해온 서촌 주민들의 모임인 서촌주거공간연구회의 장민수 대표는 서촌의 주거기능 보전과 발전에 서촌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말한다. 서촌 주민들은 주차장을 찾아 늦은 밤 좁은 골목을 헤매며,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놀이터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는 서촌에는 사람이 살아야 하며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이 살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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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신 글로벌 전략] ⑧ – 디지털 공간 설계 기초 2

디지털 공간론의 3가지 원리를 제시한 지금까지의 논변(제3편, 제4편, 제6편)를 되새겨보면 ‘물리 공간과 인간으로부터의 독립’을 속성으로 하는 디지털 공간과 인간의 관계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언듯 모순적으로 다가온다.

여기서부터 디지털 공간을 이해하는 관점의 차이로 이해하기가 어려워질 수 있다. ‘디지털 공간 설계 기초 (1)’을 서술한 제7편의 글은, 예비적인 관점에서 데이터 공간론을 펼친 제5편의 글을 토대로, 인간 분석을 위해 DNA 또는 혈액을 다루듯, 디지털 공간에서의 데이터(data)를 다뤘는데, 데이터는 오직 디지털 공간의 존재 목적이고, 그 공간이 있어야만 물리 공간의 개별 목적이 보다 강력하고 지속 가능하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디지털 공간의 데이터의 흐름은 패킷(packet) 방식이라 이제는 개인간의 소통이라는 아날로그적 communication의 의미가 디지털 데이터를 교환하는 흐름으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은 인간으로부터 추출되는 데이터도 그냥 internet of things의 thing으로서의 데이터와 같다는 주장을 가능하게 한다.

AI가 장차 스스로 존재하고 지속 유지되며 확장 가능할 뿐더러 인간의 판단 능력을 넘어서고 윤리적 감정을 안고 ‘산다’는 주장처럼 기술 초월의 전망과 같은 의견이 있듯이, 디지털 공간이 그런 맥락의 존재물로 구성된 것으로, ‘순수’ 독립 공간으로 그려내는 것은 이 연재글의 목적과는 맞지 않다.

이번 제8편에서는 디지털 공간의 ’독립’이라는 이슈와 관련하여 물리적 공간의 정체(PID·physical ID)와 디지털 공간’물’의 정체(DID·digital ID)라는 2가지의 ‘주체’를 주제로 삼아 ‘디지털 공간 설계 기초 (2)’를 풀어갈 것이다.

주체(subject, 主體)라는 개념은 정체 또는 정체성과 혼용되는 개념인데 이를 디지털 공간에서 풀어내기 위해 나는 PID와 DID를 다시 설명하고, PID와 관련하여 자연적인 귀결로서 생체인증(biometrics)을 거론할 것이다. 지금까지 디지털 공간에서 PID와 DID는 설명 또는 작업 상황에 따라 구별되지 않고 혼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생체인증은 접속방법으로서 ID/password에 준하는 로그인 방법의 일종으로만 이해되었다.

“바이오메트릭스(biometrics)는 하나 이상의 고유한 신체적, 행동적 형질에 기반하여 사람을 인식하는 방식을 두루 가리킨다. 생체인증, 바이오인증, 생물측정학, 바이오인식, 생체인식, 생체측량 등 다양한 용어로 번역된다. 바이오메트릭스에 쓰이는 신체적 특성으로는 지문, 홍채, 얼굴, 정맥 등이 있으며 행동적 특성으로는 목소리, 서명 등이 있다.”

생체인증(biometrics)을 이렇게 설명하면서 세부 기술을 설명하는 것에 치중하기 마련이라 사람들은 엔지니어들의 일이라고 생각하여 듣기에 지루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나의 의도가 아니겠는가.

생체인증이 디지털 공간론에 물리 공간과 결부하여 어떤 관계적 의미를 부여하는지를 새롭게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생체인증이 점점 더 인간 스스로가 디지털화하는, 인간 스스로가 물화하는 작금의 변화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전편(제3편, 제6편)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디지털 공간에서의 목소리 전쟁, 즉 Google, Apple, Amazon 등 글로벌 메이저들이 주도하는 성문(聲紋)으로 디지털 성문(城門)을 장악하려는 전략은 그 의미가 감히 어마무시하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이 전쟁에서 어디에 서 있는가?

1. ≪물리 공간과 디지털 공간의 주체에 관한 문제≫

PID와 DID는 전부 주체에 관한 문제이다. 그런데 이를 디지털 공간에 적용하기 시작하면 물리 공간과는 다른 특징들에 부닥치게 된다.

원래 주체(subject, 主體)의 개념은 오로지 인간에 관한, 매우 어려운 철학적 개념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를 디지털 공간의 공간’물’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인가? 아쉽게도 아니 불행하게도 IT 시장에서는 또는 디지털 공간에서는 주체의 개념이 객체(object, 客體)의 개념과 함께 무지무지하게 사용된다. 아니 남용된다. 그러니 인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IT 엔지니어링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언어의 이질감은 근래에 들어 더욱 커지고 있다. 정치에 의한 일상의 언어 오염이 지구 오염보다도 더 큰 심각한 만큼, 인문학자와 IT 엔지니어들의 언어의 남용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지경까지 끌고 간다.

20여년전 Y2K 이슈를 기억할 것이다. 그때도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두고 전세계 인터넷 시스템과 IT 시스템이 마비될 것이라는 묵시론적 전망까지도 난무할 정도였다. 휴거 같은 종말론과 같은 맥락의 음모론이 취약한 인간의 두뇌를 파고 들기도 했다. 디지털 시스템이 성숙된 나라일 수록 난리법석이 났다. 당시 Y2K 이슈를 미리 해결하기 위하여 투입된 자금의 글로벌 규모는 3,000억 달러에 이른다고도 한다. 무사히 해결되었으니 이게 돈으로 해결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해결된 건지는 각자가 추억을 더듬어 살펴보기를 바란다.

작금의 글로벌 정치경제의 위기 상황이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미중 갈등,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인한 것인데, 이를 ‘세계화의 종말’,’ 냉전시대의 부활’, 또는 ‘탈중국화의 시대’ 등으로 언급하고 있으면서 이는 과거 인터넷의 광범위한 보급과 함께 토머스 프리드먼(Thomas L. Friedman)의 ≪The World Is Flat: A Brief History of the Twenty-First Century≫이 “평평한 지구”로 비유한 세계화(globalization)에 대한 역설적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특히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들까지 끌여들여 만든 세계화 체제에서 다변화된 세계적 공급망(global chain of supply)의 연결 고리가 작금의 사태에 따라 끊어지거나 약해지는 상황은 바로 그 역설을 증거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왜 Y2K 같은 일이 생겼는가? 글로벌 인터넷도 광범위하게 확장되고, 세계화까지 이룬 글로벌 정치경제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정작 인문사회과학도와 엔지니어와는 소통이 결핍되었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소통 도구는 무진장 많아졌는데 서로는 서로를 내외하는 상태가 낳은 비극이 아니었던가? 작금도 그 간극은 여전하고 이를 디지털 일리터러시(digital illiteracy)라는 말로 치부하지만, IT 세계의 언어와 non-IT 세계의 언어는 우주의 서로 다른 행성처럼 버티고 있지 않은가? non-IT 세계의 사람들은 그저 어떤 물건의 포장지만 보고 실체를 보았다고 하고 있는 형편이 아닌가?

물리 공간의 토대인 법과 규정도 또는 인간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디지털 공간의 규범적 토대인 표준과 기준과 SW와 알고리즘을 제대로 이해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며, 디지털 공간’물’을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 또한 어렵다. 이 지경이니 배우지도 않는데 공자가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고 해봐야 ‘백견(百見)이 불여일작(不如一作)’이라고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상상력이 뛰어난 인간은 보지 않고도 알아야 하는 법이라 그 상상력의 깊이에 따라 아이디어의 질은 천양지차가 아니겠는가.

다시 돌아와서 주체에 관해 서술하도록 한다. ≪IT용어사전≫에 따르면 “주체(subject, 主體)는 ‘사용자’, ‘사용자 그룹’, ‘IP 주소’ 등과 같이 정보 시스템의 객체에 접근을 시도하는 능동적인 실체를 말한다. 공개 키 기반구조(PKI·public key infrastructure)에서의 인증서의 주체 영역(subject field)에 해당되며, 이는 인증하고자 하는 대상을 지정하며, 사용자 종단 실체 또는 인증 기관(CA) 등의 실체가 지정될 수 있다.”

독자들도 “주체(subject, 主體)”라는 기술 용어에 대한 정의를 음미해 보기 바란다. 디지털 공간에서의 주체라는 개념으로 보고 이해를 해도 틀린 것은 아닐진대 PID와 DID의 구별이 전혀 없다.

같은 ≪IT용어사전≫에 따라 객체(object, 客體)의 정의도 살펴보자. “객체는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OOP·object-oriented programming)이나 설계에서, 데이터(실체)와 그 데이터에 관련되는 동작(절차, 방법, 기능)을 모두 포함한 개념이다. 예를 들어 기차역에서 승차권을 발매하는 경우, 실체인 ‘손님’과 동작인 ‘승차권 주문’은 하나의 객체이다. 실체인 ‘역무원’과 동작인 ‘승차권 발매’도 하나의 객체이다. 같은 성질(구조와 형태)을 가지는 객체는 등급으로 정의하고, 같은 등급에 속하는 객체는 그 등급의 인스턴스라고 한다.”

디지털 공간을 종속적인 것으로 보면 그 공간 내에 있는 모든 것들과 이벤트 또는 인스턴스는 인간이 바라보는 관점에서 전부 객체다. 그러면 주체라는 용어에서 사용자와 사용자그룹이라는 범주는 인간을 말하고 그들은 PID를 가진 사람들이다.

따라서 디지털 공간을 ‘독립’ 공간으로 보는 관점에서야만이 PID와 DID의 구분이 그 의미를 가질 수 있고, 그것이 앞의 여러 편의 글에서 언급한 DID만이 디지털 공간의 주체가 될 수가 있다는 의미이다. PID는 DID와 특수한 상황에서 연결되는 것이다. 인간을 제외한 나머지 things는 전부 디지털 공간에 연결된 상태로 그 자체가 DID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PID이고, 판도라의 아바타는 DID이지만 PID와 연관된 특별한 DID이고, 디지털 공간은 PID와 무관한 순수 DID의 수가 무한히 증가하고 있는 digital space of things의 공간으로 이제야 정의할 수 있게 된다. 이 특별한 DID를 두고 우리는 개인정보보호라는 어머무시한 연구와 법제도 분야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

디지털 공간에서 개인맞춤형 서비스를 한다고 하면서 개인정보보호(個人情報保護)를 극단적으로 한다는 모순적 행위를 그 개인 차원에서도 정부 차원에서도 스스럼 없이 주장하고 있고, 디지털 공간을 통해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디지털 산업의 기업들은 엄청난 비용을 들이고 있다. 또한 이를 물리 공간의 새로운 무역과 자본의 이동을 가로막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정리하면 물리 공간을 두고 디지털 공간을 바라보면 주체와 객체의 관계는 분명하다. 주체는 인간이고 객체는 그야 말로 사물과 사태이다. 그런데 그런 주체의 개념에 IP address가 포함되는 개념 정의는, 실제 지금도 사용 중인데, 디지털 공간론의 제원리의 하나인 ‘인간으로부터의 독립’을 전제로 하는 디지털 공간에서의 주체에 대한 재검토를 요한다.

관련하여, 객체의 의미를 다시 살펴보기 위하여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 (OOP·object-oriented programming)’의 정의를 살펴보자.

“프로그램 설계방법론이자 개념의 일종이다. 프로그램을 단순히 데이터와 처리 방법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을 수많은 ‘객체(object)’라는 기본 단위로 나누고 이들의 상호작용으로 서술하는 방식이다.

객체란 하나의 역할을 수행하는 ‘메소드와 변수(데이터)’의 묶음으로 봐야 한다.”라고 IT용어사전은 기술하고 있는데, ≪쉽게 배우는 소프트웨어 공학≫에서는 “객체 (object, 客體)는 실세계에 존재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을 객체(object)라고 한다. 흔히 볼 수 있는 책상, 의자, 전화기 같은 사물은 물론이고 강의, 수강 신청 같은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도 모두 객체이다. 다시 말해 사전에 나와 있는 명사뿐 아니라 동사의 명사형까지도 모두 객체인 것이다. 그리고 더 넓게 보면 인간이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객체이다.”

기존의 인터넷과 소프트웨어공학의 관점에서 나의 디지털 공간론이 던지는 의미는 우선은 혼란일 수 있다. 그러나 그 혼란은 상기 주체와 객체의 용어 정의에서부터 이미 겪고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를 초기에 달려들어 정리되지 못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Y2K가 소통 부족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듯이 가장 기초적인 개념인 주체와 객체에 대한 개념 정의도 실제로 충분한 소통 없이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정리하자면, 디지털 공간의 차원에서 주체와 객체의 개념 정의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며, 잠정적으로 나의 주장은, 앞으로 좀 더 논의가 필요하지만, 디지털 공간에서는 주체와 객체라는 개념보다는 오직 DID만 있다고 할 것이다.

참고로 철학에서 주체와 객체의 개념 정의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가 있을 것이다. 주체와 객체의 개념은 철학의 시작에서 끝까지 독자들을 괴롭히는 개념이다. 여기서는 이를 상술하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말하는 identity는 인간의 이성에 기반한 주체적인 인간을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체 또는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이란 인간 본디의 형체가 갖고 있는 성격을 말한다. ‘identity’란 단어가 ‘확인하다(identify)’란 말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정체성이 자기가 아닌 남에 의한 확인과 증명을 통해 형성되는 것임을 말해준다. 그런 identity라는 개념을 인터넷의 진화 과정에서 그냥 사용해 왔으니 디지털 공간론에서도 어쩔 수 없이 사용하지만 소위 PID와 DID의 관계를 진술하는 과정에서 보다 특화된 개념 정의가 필요하다.

사실 디지털 공간론과 IT공학에 사용되는 모든 개념들은 인간이 만든 것이라는 것 때문에 디지털 공간의 독립성을 전제로 하는 논리의 전개에는 늘 독자들의 의문을 야기한다.

다시 정리하면 디지털 공간에서 식별 가능한 모든 것들도 실제는 디지털 데이터로 인식되고 그것들을 전부 디지털 공간’물’로 본다는 것이 전편의 여러 글에서 전제된 것이다.

1997년 PC통신 시대에 개봉된 ≪접속≫이라는 영화에서 보듯이 연결망으로서의 디지털 공간에 인간은 접속하는 주체이지만, 디지털 공간의 구성요소인 ‘디지털 공간물’에게 주체라는 또는 identity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사실은 인간을 전제하는 용어의 사용법의 확장이다.

그러면서도 지금까지는 DID라고 말하는 것은 PID와는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인터넷에 사용되는 개인적 정체를 우아한 개념으로서 DID를 상정한 것이니, PID와의 뚜렷한 개념 구분도 없이, 그런 게으름은 Y2K를 야기한 원인인 게으름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DID를 제외한 모든 것은 객체라는 용어로 치부하는 셈이 아닌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는 디지털 공간의 무수한 ‘디지털 공간물’로 확대하여 이들 전부를 DID라고 하고 이를 PID와 구별할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을 편의적이든 방편적이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의 의미가 매우 크다라고 주장하며 설득하려는 것이다. 다만, 상기 기존 정의에 따르면 ‘객체’의 개념이 매우 넓기 때문에 DID에 해당하는 대상의 범위도 구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추상적인 것까지를 포괄하기에 매우 넓어진다는 점이다. 그런 확장도 디지털 공간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피터 싱어(Peter Singer)가 “모든 생명은 소중하며, 인간 이외의 동물도 고통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생명체”라고 하면서 인간과 동물의 격을 동일하게 두자고 주장한 것과 비교할 만하다. 다만, 이 논의는 좀 더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2. ≪PID와 DID의 의미와 구별에 관한 문제≫

이 정도로 정리하고 지금부터는 물리 공간의 PID를 디지털 공간의 DID와 어찌 구별하고 그 구별에 따라 PID가 디지털 공간과의 관련성에서는 무슨 의미를 가졌는지 찬찬히 살펴보도록 할 예정이다.

물리 공간에서 ‘나를 나’라고 증명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난민이 난민구호소에서 ‘나는 난민 누구누구이다’라고 주장해도 난민구호 직원으로 하여금 이를 믿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에서 동사무소에 가서 ‘내가 나이다’라고 증명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디지털 공간에서는 ‘나는 나이다’라는 증명방법으로 고안된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 무엇인가? 그 방법이 무엇이든 전부 PKI에 기반하여야 한다. 디지털 공간의 기초적 토대는 PKI(public key infrastructure) 공간이고, 디지털 공간의 실체적 토대는 데이터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는 전편의 여러 글에서 매우 빈번히 진술했던 것이다. 그동안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PKI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공인인증서 철폐를 주장하는 전문가가 횡행했던 것이다. 디지털 일리터러시(digital illiteracy)의 대표적 사례이다. 디지털 공간에의 접속과 연결은 바로 PKI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다. 대원칙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지금까지 계속 디지털 공간론에서 신뢰(trust)라는 요소를 일컫는 것이다. 정과 의리로 연결된 것이 신뢰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속성’이 아니라 ‘요소’이다. 다수의 글로벌 메이저들은 이런 신뢰(trust)에 대하여 각각 대체로 천여 페이지에 달하는 디지털 문서를 공개하고 있다. 왜 이들은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공개하는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이해가 ‘디지털 공간 설계의 기초’에 해당하는 이슈이고, 이를 토대로 국가와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좌우할 정도의 디지털 공간 인식과 설계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이 신뢰(trust)의 이슈는 ‘음성’이라는 가장 강력한 생체인증 이슈와 함께 다음 편에서 다룰 것이다.

어떤 공간에서건 내가 나라는 걸 증명하는 ‘자연적 정체’으로서의 PID는 무엇일까?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또는 여권일까?

여권에 대해 살펴보자. 올해 초의 보도된 내용이다. 국제교류전문업체 ≪헨리앤드파트너스≫가 발표한 올해 전 세계 ‘여권의 힘’ 순위에서 한국이 공동 2위를 차지했다. 공동 1위는 일본과 싱가포르로, 이들 나라 여권으로는 전 세계 192개 나라나 속령을 무비자나 간편 입국으로 여행할 수 있다. 공동 2위인 한국과 독일 여권으로는 190개 나라와 속령을 무비자와 간편 입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 북한은 104위로 하위에서 8번째였다. 한국은 2018년부터 2∼3위로 최상위권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위대하고 대단한 나라가 대한민국이 아닌가?

그런데 물리 공간에서의 여권의 위변조는 빈번히 발생한다. 그리고 각국마다 여권의 제작방법 또는 여권의 인정 방법 등에 대한 규정들은 제법 다르고 그 전체적 이해는 매우 복잡하다. 말하자면 물리 공간에서의 자기 인증의 제도와 방법이 국가마다 다르다는 것이고 그 복잡성도 매우 크다. 이렇게 물리 공간에서의 여권도 매우 복잡한 신원증명 방법이다.

어떤 유형의 신원증명서류를 가졌더라도 주민등록증, 사회보장번호카드, 운전면허증, 여권 등을 소지해야 일단 신원증명을 통과하지만 신원증명 서류 자체의 위조 여부도 늘 면밀한 조사 대상이 된다. 다시말하면 물리적 공간에서의 신원증명 방법은 늘 불완전하다는 전제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불완전성은 디지털 공간이 PKI를 따르지 않는 만큼 불완전성을 노정하는 것과도 맥락이 동일하다. 가장 흔한 ID/password의 추방을 직접적인 목적으로 등장한 것이 생체인증(biometrics)이다.

그런데 생체인증은 다른 인증방법과는 차원이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의미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잘 이해하여 포착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생체인증(biometrics)에 관한 무수한 설명과 논문들도 많지만, 나는 그것들을 범주적으로 포괄하는 생체인증의 의미, 즉 철학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디지털 공간은 ‘독립’된 공간이라고 내가 주장한 것을 감안하여 SNS에서의 ID를 이야기해보자. ‘독립’이라고 했는데 70억 인구 중에 인터넷 인구인 40억명은 DID에 연결되어 있을 것 아닌가? 매우 다양하고 매우 많은 SNS 플랫폼에는 프로필과 사진까지도 가짜가 많은 것처럼, 실제 진짜라는 프로필과 사진을 노출하면서 개인의 일상의 글이나 사진은 본인의 본연의 모습과 물리 공간에서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게 활동하는 자들이 많다. 게다가 동일 SNS 플랫폼에서 여러 개의 ID를 가지고 활동하는 자들도 제법 많다. ‘자’는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만, 디지털 공간 차원에서는, 내 주장대로 한다면, 이는 DID를 말한다.

3. ≪디지털 공간 설계 기초 관련 4가지 이슈≫

이러한 예비적 논변을 마무리하고 이제 ‘디지털 공간 설계 기초 (2)’의 핵심적인 4개의 이슈를 다루고 마무리 하기로 한다.

⓵ 우선 물리 공간에서의 PID를 설명하기로 한다.

인터넷이 대중에게 확산되어 나갈 때 부상한 것이 디지털경제(digital economy)였고, 정통 경제학자들은 이를 기존 경제학의 부수적인 것으로 인식한 반면, 일부 경제학자들은 디지털 경제를 기존의 경제와는 패러다임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래서 생산 추가 비용이 제로라거나 그래서 수확체증(收穫遞增)의 법칙이 거론되었고 급기야 the winner takes it all이라는 경제현상을 디지털경제의 속성으로 여겼다. 프로슈머(prosumer)라는 개념도 유행하였다.

디지털 공간에 접속하는 개인은 이제 데이터를 생산하는 주체이면서 데이터를 획득하는 주체로서의 이중적 지위를 가진다. data prosumer이다. 그런데 data prosumer의 지위는 인간만이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internet of things 의 thing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things 중에는 특이한 지위의 thing이 있다. things 중에 인간을 추려내면 인간은 디지털 공간에 연결되어 있지 않다. 접속할 뿐이다. 접속된 것은 인간이 아니다. 접속된 것은 thing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전편 7편에서 인간이 things의 일종이고 그래서 물화되고 있다는 표현을 사용했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인간은 연결되어 있지 않고 연결이 불가능하다. 인간은 전기에너지로 지탱되는 thing가 아니다. 접속을 통해서 끊임없이 물화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부터 혼란이 생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디지털 공간에는 PID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의 여러 편의 글에서 나는 디지털 공간에서 인간을 배제하자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단말바이스는 전부 DID일 뿐이다.

⓶ 따라서 PID와 DID의 관계 설정의 규칙이 필요해진다.

이 규칙은 ‘디지털 공간에는 PID가 없다’는 것이다. 다채로운 디지털 공간에는 디지털 공간 내에서조차 PID를 버젓이 드러내고 자랑하는 자들이 수많이 있다. 그 공간이 바로 SNS 플랫폼 공간을 말한다. 여기서의 social이라는 것은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들은 판도라에 침입한 자들이고 이를 아바타라고 부를 수 있다. 물론 그들 중에도 가짜도 많다. PID와 DID 관계규칙을 위배하는 자들이다. 디지털 공간을 식민지처럼 여기는 자들이다. 이런 정도의 의견은 아니더라도 마샬 맥루한이 미디어를 인간의 확장이라고 설파한≪Understanding : the extensions of man≫라는 저서의 관점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반하여 오히려 데이터라는 에너지의 확보를 위해 특히 디지털 공간은 인간(PID)에게 접속을 허용하여 양질의 데이터를 인간으로부터 빨아가려는 활동을 하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도 아바타의 지위를 가진 DID에 대해 인간은 개인정보보호라는 규제를 하고 있다. 게다가 기존의 디지털 공간에 쌓여있는 PID를 덜어내는 일은 누구에게나 막연하게 여겨질 것이다.

⓷ ‘생체정보로서의 PID는 네크워크를 타고 이동하지 않는다’라는 점을 디지털 규범으로 인식하여야 한다.

앞의 ‘규칙’에 관한 논변은 바로 이 문장에서 기인한다. 이 말은 바로 PID의 중앙집권적 수집, 보관, 분석, 운영, 관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오해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1984≫를 들이대며 소위 지금까지의 대한민국에서의 전자주민증 카드사업이 표류한 이유를 설명해준다.

물론 정부는 중앙집권적 지문 DB를 포기할 생각이 없으니 앞으로도 전자주민카드 사업은 쉽지 않을 것이다. PID는 물리 공간의 개별 인간이 보유하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PID는 단말디바이스로서 그 단말디바이스가 물리 공간의 ‘개인 자체의 소유로 인정’되는 단말디바이스에만 유일하게 저장되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만약이 그 단말디바이스가 personal 단말디바이스가 아니라고 판단된다면 원칙적으로 그 단말디바이스에는 PID가 저장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디지털 공간 규범 중의 핵심 규범이라고 할 만하다.

일상 생활에서 단말디바이스는 그래서 2가지의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순수 personal한 것과 또 하나는 단말디바이스이지만 여러 사람이 같이 사용하는 non-personal한 것이다. 따라서 후자의 경우는 새로운 personal 단말디바이스 기능만을 수행하는 PID를 담은, 정체증명수단이 필요하다. 따라서 디지털 공간에서 DID와 유일하게 연결되는 PID는 PID 정보 자체가 디지털 공간으로 흘러들어가지 않으면서 PID를 암호화한 새로운 데이터가 PID를 대신하여 DID와 접속되는 것이다. 즉 “인증 기법 (authentication method)과 그 인증 정보를 주고 받기 위한 인증 프로토콜 (authentication protocol)을 “분리”하는 것을 핵심 아이디어로 한다.”이다.

전문적인 엔지니어가 아닌 다음에야 여기서의 “분리”가 얼마나 강력한 함축을 가진 개념인지를 상상해 보지를 않는 것이 현실이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기술 용어의 간결한 표현이 일반인에게 쉽게 이해되는 일은 매우 드물지 않던가? 이 논변이 디지털 공간의 ‘독립’이라는 원리를 발굴하게된 직접적인 이유이다. 아직도 이 의미가 읽혀지지 않는가? 그런데 이는 나의 고집스럽고 이상한 의견이 아니라 FIDO1, FIDO2의 표준의 기본 구조라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FIDO 표준 그룹 (FIDO Alliance)은 참으로 제대로 된 ‘디지털 공간 설계의 기초’를 마련했는데, Y2K 이슈로 전세계를 공포로 몰아간 것과는 달리, FIDO 표준은 디지털 공간으로 보다 안심하게 인도하는 획기적 아이디어를 기술언어로 정리한 규범이 아니던가? 사실 FIDO는 이것만이 아니라 그동안의 접속 방법인 ID/Password 로그인이라는 디지털 공간 접속 방법의 취약점을 보완하는 표준까지 준비하였다. 말하자면 “FIDO Specification은 비밀번호 없이 인증을 하기 위한 UAF(Universal Authentication Framework) 프로토콜과 비밀번호를 보완해서 인증을 하기 위한 U2F(Universal 2nd Factor) 프로토콜로 구성된다.” 여기서 또한 기억하여야 하는 것은 FIDO도 PKI 기반으로 작동된다는 사실이다.

2021년 2월 3일 itworld에 게재된 Josh Fruhlinger의 글, ≪비밀번호 사용을 줄이기 위한 ‘FIDO’의 의미와 인증 프로세스≫ (https://www.itworld.co.kr/news/181859#csidx8b9bdf482ab67a4bbdb79dcfbc802ff https://www.itworld.co.kr/news/181859)가 참고가 된다.

이렇듯 어느 사이 물리 공간과 디지털 공간의 언어의 간극이 커졌다는 우울한 상황뿐만이 아니라 이제 디지털 공간의 안녕과 질서를 위한 기술규범이 매우 촘촘해졌고, 반면에 더욱 어려워졌다. 이것도 디지털 일리터러시(digital illiteracy)이고 이는 물리 공간과 디지털 공간 양쪽의 건강한 전개를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원인이 되고 있다.

⓸ 물리 공간에서와 마찬가지로 디지털 공간에서는 무엇보다도 DID의 도용 방지가 기본적인 ‘신뢰’ 개념의 구성조건이다.

디지털 공간의 관점에서 PID와 DID의 관계를 살펴보기 위해 “신뢰”(trust)에 관한 주장을 펼치지만, 이런 신뢰의 작동 토대는 바로 PKI이다. 인간이 디지털 공간에 들어가는 모습보다는 디지털 공간이 데이터라는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 인간을, 즉 PID를 선택한다고 보는 관점에서 살펴보자. 그러한 선택에서 PID를 확인하는 신뢰 구조는 바로 생체정보가 가장 탁월하고 거의 유일한 것이다.

그리고 이번 제8편의 글의 내용에 동의를 하든 하지 않든 그 함축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 앞으로 디지털 공간이든 메타버스이든 그 어떤 형태의 인터넷 시스템의 이해를 하기 어렵다. 기술표준과 기술규범을 이해하기는 너무도 어렵더라도 그것들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파악하는 것도 최소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다시 첨언하지만, FIDO는 주체(identity)로 인정하기 너무도 어려운 passwords를 추방하기 위해 등장했다. 그리고 passwords 추방 운동은 이제 글로벌 메이저인 Microsoft, Apple, Google 등이 동참하여 이행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디지털 공간의 신뢰 시스템으로서의 Passkey를 공동 제작하는 글로벌 동맹을 맺어 메타버스 시대에 대비한 그들의 디지털 공간을 거의 무한으로 확장하고 공고히 하고 있다.

그들의 공간에 비견되는 그 어떤 디지털 공간도 대한민국에서는 만들지 못하고 있다. 오호통재라!!! 글로벌 경제위기에서도 무역에 목 매달건 국가간의 전쟁이 벌어지건, 디지털 공간의 확장을 멈추지 않는 그들은 그들이 주도하는 공간에서 누구든지 추방할 수 있고, 추방되는 자는 추방되면 그 어떤 제품과 서비스도 물리 공간에서 출시하지 못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는, 그리하여 변방으로 밀려나는 대한민국이 될 수도 있다는 각성이 시급하다. 이렇게 ‘디지털 공간 설계 기초 (2)’를 마무리한다.

(2022년 7월 12일 화요일)

/디지털신뢰공간 아키텍트 황철증 디지털신뢰공간연구소 소장

서울대 법대(학사) 및 행정대학원(석사), 미국 콜럼비아 법대 (석사), 고려대 정경대학원(박사)을 졸업했습니다.

행정고시 29회로 1986년 중앙공무원교육원과 아시안게임조직위원회에서 단기 훈련을 거친 후 정보통신부에서 공직을 시작하였습니다.

BH, 국무총리실, 국정원(사이버안전센터), NIA 등에서도 근무를 한 바 있으나 주로 정보통신부에서 잔뼈가 굵었습니다. 방송통신위원회를 끝으로 26년간의 공직을 마친 후 사회의 한 구석에서 꼼지락 거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온갖 분야의 독서와 사색으로 삶을 붙들고 있으면서, 일찌기 담당한 인터넷 정책에 관한 주제에도 여전히 많은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소위 디지털(인터넷) 아키텍처와 디지털(인터넷) 철학자로 스스로를 부르며 현대의 기술문명 역사의 흐름을 조망하는 것을 즐깁니다.

한편으로 이병주 소설가, 박이문 철학자, 최제우 동학창시자, 리처드 도킨스 진화생물학자, 움베르토 에코 기호학자 등 훌륭한 학자와 문인에게 지적 의식을 의탁하고 사는 자입니다.

이번 연재글의 게재로 IT기자클럽의 디지털문명 칼럼니스트로 소박한 의무를 시작하는 셈입니다.

연락처는 newdhjj@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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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러]전전후 스토리텔러, 김호연

영화·만화·소설을 넘나들며 온갖 이야기를 써나가는 전천후 스토리텔러.

1974년 서울생. 고려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첫 직장인 영화사에서 공동 작업한 시나리오 「이중간첩」이 영화화되며 시나리오 작가가 되었다.

두 번째 직장인 출판사에서 만화 기획자로 일하며 쓴 「실험인간지대」가 제1회 부천만화스토리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만화 스토리 작가가 되었다.

같은 출판사 소설 편집자로 남의 소설을 만지다가 급기야 전업 작가로 나섰다. 이후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를 실천하던 중 장편소설 『망원동 브라더스』로 2013년 제9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하며 소설가가 되었다.

장편소설 『망원동 브라더스』(2013), 『연적』(2015), 『고스트라이터즈』(2017), 『파우스터』(2019)와 산문집 『매일 쓰고 다시 쓰고 끝까지 씁니다』(2020)를 펴냈다.

영화 「이중간첩」(2003), 「태양을 쏴라」(2015)의 시나리오와 「남한산성」(2017)의 기획에 참여했다.

2021년 『망원동 브라더스』에 이은 ‘동네 이야기’ 시즌 2 『불편한 편의점』을 출간했다.

저서소개_불편한 편의점

2021년 4월에 출간되어 전 연령층의 폭넓은 공감을 얻으며 소설 읽기 바람을 일으킨 『불편한 편의점』의 열기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입니다.

“읽는 내내 마음이 따뜻하고 먹먹했다” “눈가에 미소와 눈물이 떠나지 않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해서 읽었다”

“작은 친절과 소통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책” “힘든 시기를 버티게 해준 책” 등의 독자 리뷰 하나하나가 책이 가진 힘을 말해줍니다.

청파동 골목 모퉁이의 작은 가게, 서울역 노숙인이었던 정체불명의 야간 알바가 지키는 곳, 불편한데 자꾸 가고 싶은 봄날의 편의점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이번 벚꽃 에디션에는 알라딘 독자에게 전하는 김호연 작가의 친필 사인 메시지가 인쇄되어 있습니다.

불편한데 자꾸 가고 싶은 편의점이 있다!

힘들게 살아낸 오늘을 위로하는 편의점의 밤

정체불명의 알바로부터 시작된 웃음과 감동의 나비효과

『망원동 브라더스』 김호연의 ‘동네 이야기’ 시즌

원 플러스 원의 기쁨, 삼각김밥 모양의 슬픔, 만 원에 네 번의 폭소가 터지는 곳!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다가온 조금 특별한 편의점 이야기

2013년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망원동 브라더스』로 데뷔한 후 일상적 현실을 위트 있게 그린 경쾌한 작품과 인간의 내밀한 욕망을 기발한 상상력으로 풀어낸 스릴러 장르를 오가며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쌓아올린 작가 김호연.

그의 다섯 번째 장편소설 『불편한 편의점』이 나무옆의자에서 출간되었다.

『불편한 편의점』은 청파동 골목 모퉁이에 자리 잡은 작은 편의점을 무대로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의 삶의 속내와 희로애락을 따뜻하고 유머러스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망원동 브라더스』에서 망원동이라는 공간의 체험적 지리지를 잘 활용해 유쾌한 재미와 공감을 이끌어냈듯 이번에는 서울의 오래된 동네 청파동에 대한 공감각을 생생하게 포착해 또 하나의 흥미진진한 ‘동네 이야기’를 탄생시켰다.

서울역에서 노숙인 생활을 하던 독고라는 남자가 어느 날 70대 여성의 지갑을 찾아준 인연으로 그녀가 운영하는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덩치가 곰 같은 이 사내는 알코올성 치매로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데다 말도 어눌하고 행동도 굼떠 과연 손님을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갖게 하는데 웬걸, 의외로 그는 일을 꽤 잘해낼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묘하게 사로잡으면서 편의점의 밤을 지키는 든든한 일꾼이 되어간다.

현실감 넘치는 캐릭터와 그들 간의 상호작용을 점입가경으로 형상화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작가의 작품답게 이 소설에서도 독특한 개성과 사연을 지닌 인물들이 차례로 등장해 서로 티격태격하며 별난 관계를 형성해간다.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다 정년퇴임하여 매사에 교사 본능이 발동하는 편의점 사장 염 여사를 필두로 20대 취준생 알바 시현, 50대 생계형 알바 오 여사,

매일 밤 야외 테이블에서 참참참(참깨라면, 참치김밥, 참이슬) 세트로 혼술을 하며 하루의 스트레스를 푸는 회사원 경만,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청파동에 글을 쓰러 들어온 30대 희곡작가 인경,

호시탐탐 편의점을 팔아치울 기회를 엿보는 염 여사의 아들 민식, 민식의 의뢰를 받아 독고의 뒤를 캐는 사설탐정 곽이 그들이다.

제각기 녹록지 않은 인생의 무게와 현실적 문제를 안고 있는 이들은 각자의 시선으로 독고를 관찰하는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해와 대립, 충돌과 반전, 이해와 공감은 자주 폭소를 자아내고 어느 순간 울컥 눈시울이 붉어지게 한다.

그렇게 골목길의 작은 편의점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가 고단한 삶을 위로하고 웃음을 나누는 특별한 공간이 된다.

청파동 골목에 자리 잡은 작은 편의점 ALWAYS.

어느 날 서울역에서 살던 사내가 야간 알바로 들어오면서

편의점에 변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기피하고 편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인물의 변신과 반전, 아이러니한 상황 전개는 이 소설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다. 염 여사의 편의점은 직원들 입장에서는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으며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이지만 주변에 편의점이 하나둘 생기면서 경쟁에서 밀리자 장사가 잘 되지 않는 상황에 봉착한다.

그러다 보니 동네 사람들에게 ‘불편한 편의점’으로 인식되는데, 이런 와중에 얼마 전까지 노숙자였던 ‘미련 곰탱이’ 같은 사내에게 야간 시간대를 맡긴다니 기존 직원들로서는 불안할 수밖에.

그런데 걱정도 잠시, 그가 들어온 후 편의점에는 신선한 변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그는 물건을 슬쩍한 뒤 튀려는 불량학생이나 한밤중의 취객을 제법 잘 다루고, 일명 제이에스라 불리는 진상 손님까지 두 손 들고 나가 떨어지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편의점은 비싸다며 오지 않던 동네 노인들마저 독고의 싹싹한 태도에 마실 나오듯 편의점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하고, 그로 인해 오전 매출이 쑥 올라간다.

독고가 일으킨 변화의 바람은 동료들에게도 전해진다. 편의점 알바를 하며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시현은 신참 독고에게 매장 업무 교육을 해주다 그가 불쑥 건넨 말 한마디에 자신의 숨은 재능을 발견한다.

얼마 후 그녀는 다른 편의점에 스카우트된다. 아들과의 관계 단절로 속을 태우는 오 여사는 자신의 하소연을 귀담아 들어주고 아들과 소통할 방법을 넌지시 알려주는 독고에게 큰 감명을 받는다.

그런가 하면 어떤 손님은 독고의 눈빛과 접객 태도에서 영락없는 사장의 풍모를 추리해내기도 한다.

집과 회사 양쪽에서 점점 존재감을 잃어가는 세일즈맨 경만은 퇴근길 편의점에서 하는 혼술이 유일한 낙인데, 어느 날부터 편의점의 밤을 장악한 사내를 사장이라 지레짐작하여 못마땅한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그 역시 독고의 순수한 호의 앞에서 얼어붙은 마음이 스르르 풀어지고 만다.

독고 효과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염 여사로 하여금 독고를 쫓아내고 편의점을 팔게 하려던 민식은 그녀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엄마와 더욱 돈독한 사이가 되고, 민식의 사주로 독고의 뒷조사를 하던 곽 씨는 오히려 타깃인 독고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만다.

지친 상태로 대학로를 떠나와 마지막 글쓰기에 매달리는 희곡작가 인경은 서울역 홈리스였던 이상한 알바와 매일 밤 취재차 대화를 나누면서 글을 쓸 수 있다는 용기를 되찾는다.

어쩌면 이곳 편의점에서는 손님이든 직원이든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과 영감을 주는 존재들인지 모른다. 애초에 염 여사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을 때 독고가 이를 받아들인 것도 살기 위한 마지막 본능에 가까웠고, 염 여사 역시 덕분에 편의점의 밤을 맡길 든든한 인재를 얻었으니 그들은 서로를 지켜낸 셈이다.

삶은 관계이자 소통,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내 옆의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데 있다

소설은 일곱 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편의점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의 시선으로 독고의 모습을 비춘다. 그리고 마지막은 독고의 독백으로 마무리된다.

편의점 일에 숙달될수록 독고는 기억을 조금씩 되찾는다.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알코올로 굳어진 뇌가 활성화되면서 기억의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어쩌다가 모든 것을 잃고 술에 빠져 살다가 기억마저 잃어버리고 노숙인이 되었을까. 분명한 것은 그가 편의점에서 두 계절을 보내면서 다시 살아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가 기억을 거의 회복할 무렵 대구 지역에서 코로나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와 함께 독고에게도 결단의 시간이 찾아온다.

불편한데도 자꾸 끌리는 이상한 편의점 이야기는 코로나로 인해 여전히 불편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마침맞게 도착해 유쾌한 웃음과 다정한 위로를 건넨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 삶은 관계이자 소통이며, 행복은 내 옆의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데 있다는 한결같은 진리를 다시금 되새기게 될 것이다.

편의점이란 사람들이 수시로 오가는 곳이고 손님이나 점원이나 예외 없이 머물다 가는 공간이란 걸, 물건이든 돈이든 충전을 하고 떠나는 인간들의 주유소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주유소에서 나는 기름만 넣은 것이 아니라 아예 차를 고쳤다. 고쳤으면 떠나야지. 다시 길을 가야지. 그녀가 그렇게 내게 말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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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년 7월 9일, 예카테리나 권력을 잡다

러시아 황제 표트르 3세의 부인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군대를 동원하여 남편를 페위합니다. 그리고 러시아의 유일한 통치자인 예카테리나 2세를 스스로 선포합니다. 그녀는 34년 동안 왕위에 머물며 표트트대제와 함께 예카테리나 대제의 반열에 오릅니다.

예카테리나 대제는 표트르 대제와 마찬가지로 국가를 서구화하고 강한 러시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예카테리나 치하에서 러시아의 국경은 서쪽과 남쪽으로 확장되어 오스만제국의 영토, 크림, 폴란드 대부분을 포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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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신 글로벌 전략 ⑦ – 디지털 공간 설계 기초 1

필자는 그동안 6편의 연재글을 일주일 단위로 게재하였는데, 이는 50여년간의 다양한 디지털 변화를 ‘디지털 공간’이라는 핵심 단어로 살펴보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물리 공간이 보다 강하고 지속 가능한 공간이 되는 방안을 모색하는, 여하간 멈출 수 없는 작업이다.

사실 ‘디지털 공간’을 살펴보는 일보다도 먼저 ‘디지털’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일이 더 선행작업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디지털론”이라는 작업은 내가 틈틈이 다루기는 하겠지만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미시 세계에서의 ‘양자적’ 현상이 ‘디지털적’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거시 세계에서의 ‘디지털적’ 현상을 ‘양자적’ 현상으로 치환하여 세상의 이치와 변화를 설명할 수 있을까? 다른 누군가도 이런 궁금증을 계속 풀어주기를 희망한다.

삶과 사회와 세계와 우주를 늘 생각하는 인간의 사고 습성은 ⒜ 한편으로는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와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of Ephesus), ⒝ 다른 한편으로는 환원주의(Reductionism, 還元主義)와 전일주의(Holism, 全一主義)로 대비되는 양 극단의 가운데 어느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다. 물론 지금은 철학에서조차 논변의 가치가 희박해지고 있는 ⒞ 심신일원론(mindbody monism, 心身一元論)과 심신이원론(mindbody dualism, 心身二元論)도 인류의 사고 습성을 지배하던 것이었다.

나도 개인적인 사고습성으로서 이런 3가지의 대립적 논변이외에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theory of relativity, 相對性理論),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 不確定性原理) 그리고 쿠르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Gödel’s incompleteness theorem, 不完全性定理)를 나의 3위 일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3가지의 과학이론은 나의 물리 세계를 설명하는 근본적 지침이다.

나는 삶과 죽음 또는 신과 인간에 관한 논변도 이 3위 일체에 기대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이제 현대의 철학 논증도 사변적 논변 외에도 지금까지의 인간이 축적한 과학기술에 기초하지 않는 논증은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다.

철학의 기원이라는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은 다 알다시피 오늘날의 철학과 과학이 분리되기 전 하나의 학적 체계이었다. 동양의 사변은 처음부터 혼융, 융합, 태극이라는 개념으로 설파되고 전승되어 왔지만, 세상의 변혁을 가져오는 ‘과학’으로서의 학문의 축적은 약하지 않았던가.

상기의 사고 습성이 오랜 세월을 거쳐 전술한 인류의 위대한 과학이론을 낳았다. 3위 일체의 과학이론이다. 앞으로도 새로운 거대 과학이론을 계속 낳을 것인가? 아직도 미지의 것들을 파헤치는 인류의 작업은 어디에서 새로운 결실을 맺을까? 상기의 3가지의 사고 습성과 3위 일체의 과학이론은 디지털 공간에서는 어떤 의미를 낳을 것인가? 아니면 디지털 공간에 오직 적용되는, 기존과 다른 새로운 과학이론을 낳을 것인가?

관련하여 아래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소속 이순석 박사의 “디지털건축가의 소명” 145번째의 글인데 나의 글 4편까지의 글을 읽고 남긴 리뷰이다. 디지털 공간 설계의 기초를 논하는 작업에 참고가 되기를 바란다.

최근 IT기자클럽에 게재된 ‘디지털 신 글로벌 전략’이란 아티클을 발견한다. 처음 접한 이후로 머리 속에서 떠나 않아 새 글을 기다리며 수시로 IT기자클럽을 찾게 된다. 짧은 글이지만 결코 작은 글이 아니다. “디지털 공간론”이라는 거대담론이자 근미래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1편, 2편, 3편까지 우리나라의 디지털전략의 실효성에 문제제기를 쪽집게 같이 짚어내며, 기존 전략의 한계가 결국은 새로운 공간 창출이라는 판짜기의 부재에 있음을 깔끔하게 정리한 후, 4편에 이르러, 새로운 공간에 대한 정의를 시작한다.

우리가 흔히 전체를 정의할 때 사용하는 기본요소라는 개념을 탈피하여 기존의 물질세계와는 또다른 물질세계를 정의하기 위하여 보다 일반화된 용어를 차용한다. 이른바 원리다. 제1원리는 비트의 독립공간이다. 제2의 원리는 그 공간 속의 ‘나비’라는 존재다. 제3의 원리는 자율 운행이다. 새로운 물질세계인 디지털공간의 3요소의 정의인 셈이다. 비트 공간, 나비 존재, 자율 운행 등이다.

디지털공간에 대한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정의다. 멋지다. 이제 다음 편이 더욱 기다려진다. ‘디지털 공간’에 대한 대부분의 어설픈 접근은 ‘플랫폼’으로 통칭되지만, 그 플랫폼이 어떻게 생성되고 유지되고 성숙하고 퇴조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apple, amazon, alphabet을 필두로 하는 다수의 플랫폼 기업들을 열심히 흉내내기를 하지만 아무런 실효성이 없다. 공간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플랫폼전략은 돈만 버리는 결과가 예고된 재앙이나 다름없다.

디지털공간은 기존의 물질세계를 설명하는 물리법칙들이 더욱 일반화되어 적용되는 공간이다. 일반상대성이론을 일반화 할 수 있어야 하고, 불확정성의 원리를 더욱 일반화 할 수 있어야 하고, 불완전성의 원리를 또한 확장해야만 하는 공간이다. 그런 새로운 물리법칙을 토대로 새로운 세상을 설계하는 것은 디지털건축가들의 소명일수 밖에 없다. 그 전에 물리법칙에 대한 정확하고도 완전한 이해의 선결이 필요하다.

대전광역시에는 이 법칙들에 대해서 먼저 말해줘야 하겠다.

이순석 박사의 리뷰는 나의 글에 대한 과찬의 글이지만 그의 글은 디지털론과 디지털 공간론에 대한 나의 생각의 일단을 잘 정리한 글이고 나의 후속 글에 대해 더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든다. 이 인용 글은 그의 깊은 사색의 결과이기 때문에 그의 후속 글도 기대된다.

나는 이미 앞에서 디지털 공간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인 관점 전환을 요구하였던 바 그런 관점 전환과 관련한 그동안의 철학적 사유의 흔적을 좀 더 살펴본다.

“(언어학이란) 모든 언어에서 영원하고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힘을 찾아보며, 역사의 모든 독특한 현상을 포괄할 수 있는 일반법칙을 추출해 내는 것이다.” 소쉬르가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주장하였던 말이다. 소쉬르는 언어활동의 보편적 문제를 다루기 위해선 개별 언어 간의 비교 또는 역사적 변화 과정을 탐구하는 데 그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소쉬르에게 언어는 다른 학문의 연구대상과 다르게 이미 존재하고 있는 대상이 아니며 관점에 의해서 창조되는 실체라고 생각했다. (중략) 소쉬르의 언어학에 대한 인식론적 전환은 세계에 대해 기존과 전혀 다른 시각을 제시하는 ‘구조주의’로 발전했다.

소쉬르는 구조적 관점에서 개별 언어가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독립적이며 구체적인 대상의 본질을 추구하는 기존 경험주의나 실증주의의 태도를 거부하며 관계의 망 속에서 분절된 대상의 의미를 찾는 구조주의로 발전하게 됐다.

앞서 여러 편의 나의 글에서 언급한 디지털 공간론의 3가지 ‘원리’는 소쉬르의 말에 언급된 언어 공간의 ‘관점에 의해 창조되는 실체’로서의 언어에 공리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처럼 ‘공리’에 비유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소쉬르의 아이디어는 전통적인 사고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사상인데, 이는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의 철학사상과 맥락을 공유하는 점은 없는가? 또한 칸트가 제시한 인식대상과 인식주체와의 관계 전복을 통한 코페르니쿠스적인 인식 전환과 맥락이 닿아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이런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은 내가 앞에서 계속 말하는 ‘디지털 공간’에 대한 또 다른 코페르니쿠스적인 인식 전환을 토대로 물리적 공간에서도 자유로운 디지털 공간의 궁극적 실체는 무엇일까? 그 “것”에 대한 탐색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대학신문≫에서도 깊게 언급한 소쉬르의 아이디어를 디지털 공간론에서도 흡수하려는 것이다.

앞서 말한 디지털론에서 말하는 ‘양자적’ 디지털 현상과 디지털 공간에서 말하는 ‘인위적’ 디지털 현상은 아직은 그 맥락을 같이 하는 점을 찾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 글은 이순석 박사의 기대에는 아직 미치지 못한다. 그럼 인간은 ‘인공적 디지털론’으로 무엇을 얻으려는 것일까?

이 글에서는 논변의 도약을 어쩔 수 없이 저질러야 하겠다. ‘인공적 디지털’은 ‘데이터’라는 것이다. 생물로 하면 DNA라고 할 수도 있고, 혈액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상론은 나중으로 미룬다. 이렇게 설정하고 나면 ‘디지털 공간론’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디지털 공간론’을 ‘데이터 공간론’으로 좁혀볼 필요는 없다.

데이터 공간론에 관한 약간의 논변은 나의 제5편의 글에도 남아 있다. 나의 데이터 공간론을 포괄하는 디지털 공간론에는 그리하여 소쉬르에서 비롯된 ‘구조주의’뿐만이 아니라, ’기능주의’, ’자연주의’, ‘물리주의’라는 인문학적 접근방법이 교호적으로 적용될 여지가 제법 많다. 이런 학문 사조의 실제적 의미를 나중에 다시 상론할 기회를 가질 수도 있지만, 이들 사조의 앞에 공통적으로 수식 가능한 말은 바로 ‘방법론적’ 또는 ‘방편론적’이라는 단어인데 이 글의 실제적 목적 때문에 더욱 더 그런 입장이 요구된다.

‘디지털 정보’인 ‘데이터’는 왜 출현했을까? ‘아날로그’는 어떤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일까? 디지털 정보기술은 왜 출현했을까? 과연 인간은 왜 전통적인 아날로그, circuit 방식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기술에서 새로운 디지털, packet 방식으로 정보를 전송하는 기술로의 전환을 꾀하는가? 그냥 정보전송방식의 단순한 변화인가? 아니면 거기에 인간의 어떤 욕망이, 아니면 물리 공간에서의 어떤 한계를 극복하려는 욕망이 잠재되어 있는가?

대한민국에서는 1994년부터 인터넷이 민간에 개방되었다. 1990년 대 중반의 미국의 인터넷고속도로(information highway) 프로젝트가 국가적 과제로 부상할 때, 대한민국에서도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사업이 국가적 최우선 과제로 추진되었다.

국가의 영토는 좁지만 인터넷 공간은 무한한 것이니 사이버 영토(cyber territory)를 선점해야 한다는 프로파간다(propaganda)가 우렁찼고 기세가 드높았다. 1990년 대 말부터는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라는 구호도 등장했다. (동 구호의 제목에 부제목 ‘인터넷 코리아 시대의 개척자들’을 붙여 ‘한국IT기자클럽’은 2016년 책을 발간했다.)

2000년대 초에는 인터넷 버블(bubble)을 야기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네티즌(netizen)이 되었고 웹서핑(web surfing)으로 늘 여가를 즐겼다. 2010년대에 들어서기 직전에 애플의 아이폰(iPhone)이 등장하면서 인터넷 기술트렌드는 새로운 도약을 하였고 수많은 글로벌 자본은 모바일 비즈니스로 집중되었다.

PC 웹(pc web)을 날아오르는 모바일 앱(mobile app)의 시대가 10년 정도를 풍미했다. 모바일 버블(bubble)은 없었다. 이를 지탱한 인터넷 비즈니스 철학은 네트워크 중립성(network neutrality)였다. 모바일 비즈니스는 날개를 달았다. 그러는 과정에 수많은 인터넷 공간 프로젝트 – 포털, e커머스, SNS, 플랫폼, OS 등 – 출현으로 디지털 공간은 풍부해졌다.

이제는 그 공간이 블록체인 공간으로 오르다가 메타버스로 갈아타는 중이다. 또한 블록체인 토대 위에 메타버스 공간이어야 한다는 주장도 강하다.

대한민국에서 ‘인터넷에서의 무한영토확장 만큼은 앞장서자’라고 하면서 지나온 시간은 드디어 디지털 공간’성’을 획득하는 인터넷의 역사적 전개와 발전을 이루었다. 애플을 추격하던 삼성전자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우뚝섰다. 반도체와 스마트폰이 밀어올린 세계적 성취였다. 세계 100대 시총 기업 리스트에는 대한민국 기업으로는 오직 삼성전자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제4차 산업혁명의 질풍노도 한 가운데에서 일본은 침몰하고 있는가? 대한민국은 디지털 강국을 향한 보다 강력한 운행을 하고 있는가? 우리의 ‘디지털’ 공간 건설 도전은 그 웅대한 꿈은 이루지 못하고, 결국 한반도에 갇혀, 그것도 5,000만 인구를 가진 한반도의 남쪽에 갇혀 서로 오직 ‘물리’ 공간을 차지하려는 각축전을 벌였던 것은 아니었던가?

진실로 정보화는 앞섰고, 특히 국세행정과 민원행정과 복지행정의 정보화는 대단한 성과를 거양했고, 서울시의 정보화는 국제적으로 칭송받았다. 그렇다면 그 성과가 지식사회 또는 지식기반사회에 걸맞는 정보화였던가? 정저지와(井底之蛙)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되지 않는가? 작금의 화두인 디지털 플랫폼 정부는 과연 제대로 설계될 것인가?

전세계 인터넷 사용자가 40억명을 돌파하였지만 대한민국에서 창출한 디지털 공간 중에 세계적인 공간으로 우뚝 선 게 없지 않은가? 이것도 오호통재라! 이러한 문제 의식은 바로 내가 ‘디지털 공간 설계’의 능력 부족이라는 근본적 원인을 살펴보게 만든다.

왜 있는 그대로의 정보를 그대로 담아 전송하는 (아날로그) 방식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정보를 분절하고 다시 합하여 전송하는 (디지털) 방식으로 전환하는가? 왜 인간의 것들만 전송하는 communication이 인간의 것들을 넘어서는 무수한 사물들의 것들을 전송하는 communication으로 전환하는가? 이것은 제4차 산업혁명과 어떻게 결합하고 있는가?

제4차 산업혁명이란 무엇인가? AI, 플랫폼, 사물인터넷, 3D프린터, 드론, 자율주행차, 비행(자율)자동차, 자동화공장, 기계와 기계의 소통, 가상현실, 탈중앙화와 블록체인, 주문생산, 기계학습, 원격조종, 원격치료, 로봇, 양자컴퓨터, 나노산업, 신재료공학, 스마트시티와 신도시공학, 공유경제 등은 제4차 산업혁명의 다양한 응용과 적용의 모습을 보여준다.

도대체 제4차 산업혁명으로 통칭되는 변화에서 ‘디지털 공간’은 왜 새로운 산업혁명의 동인이자 결과물로 부각되고 있는가? 아래위로 좌우로 다채롭고 수많은 디지털 공간들을 추구하는 제4차 산업혁명의 과정에서 과연 인간의 의미는 어떻게 취급되고 모색되는가?

나는 종종 ‘디지털 기술’이 ‘바이오 기술’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는 생각을 한다. 공통의 개념은 바로 재현(representation)이다. 맥락에 따라서는 복원 또는 표상으로도 사용되는 개념이지만 재현은 철학적 인문학적으로 가장 다의적인 개념 중의 하나이고 기저에는 환원주의가 섞여있다. 재현은 기독교철학이 지배하는 중세 기간 내내 신의 구현을 대표하는 개념이었고, 근대의 인간 주체의 철학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모든 것을 재창조하는 의미를 지닌 개념이었다.

그럼 ‘디지털’이 횡행하는 현대에는 인간은 무엇을 재현하려는 욕망으로 가득찼는가? 특히 물리공간과 인간으로부터 독립된 디지털 공간은 무엇을 재현하려 하고, 그 재현의 가장 근본 요소는 무엇인가? 소위 메타버스는 어떤 유형의 디지털 공간인가? 《디지털 공간 설계의 기초 요소》를 이제야 본격적으로 거론할 수 있게 되었다. 통신의 역사이든 인터넷의 역사이든, 기술 중심의 설명이든 심리적 SF 공간적 설명이든 기존의 그 어떤 방식의 접근방법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논변들의 궤와는 다르게 나는 이렇게 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것이다.

전편까지의 6편의 연재글에서 자세히 설명한 디지털 공간론과 그 3가지 원리를 바탕에 놓고 이제 《디지털 공간 설계 기초》를 어찌 논하는 것이 좋을까? 바로 앞에서 던진 여러가지 질문들, 특히 디지털 공간에서의 인간의 의미 변화 또는 디지털 공간을 통한 재현의 추구 이유 등을 묻는 질문들에 대한 답변의 단서를 제시하는 일이기도 하다.

디지털 공간론의 관점에서 디지털 공간에 접속되는 모든 단말디바이스는, 그것이 스마트폰이든, 스마트워치든. 노트북이든, PC든 아니면 IoT 단말 디바이스든, 연결 자동차(connected vehicles)든, 원격의료기기든, 기상관측위성이든, 우주망원경이든 그리고 그 단말디바이스 내에 설치된 HW로서의 기기든 SW로서의 앱이든 전부 센서라는 선언을 할 수 있겠다.

따라서 모든 디지털 공간은 2015년 제4차 산업혁명의 선언과 함께, 5G 이동통신의 등장에 의해 유무선의 통신네트워크가 All-IP로 전환함과 함께 전통적인 인간 중심의 communication의 시대를 넘어 그야말로 모든 것의 communication의 시대로 전환하기 시작했다고 선언을 할 수 있겠다.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스마트폰에는 이미지 센서, 터치 센서, 마이크로폰, GPS, 모션 센서, 지자기(geomagnetic) 센서, 조도 센서, 지문 센서, 심박수 센서 등 약 20~30개 이상의 센서가 탑재되고 있다.

자동차에는 약 30여종 200여개의 센서가 사용되고 있다. 최근 자동차의 미래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는 CASE(Connected, Autonomous, Shared, Electric)와 같은 트렌드는 센서의 사용을 증대시키고 있다. 내연기관 자동차도 파워트레인에서부터 섀시, 안전, 편의장치, 배기장치, 텔레매틱스와 같은 다양한 곳에 센서를 폭넓게 사용하고 있다. 현재 자동차에 사용되고 있는 센서로는 위치 센서, 속도 센서, 압력 센서, 관성 센서, 산소 센서, 온도 센서, 질소산화물 센서, 이미지 센서 등이 주로 사용되고 있다.

무수한 센서의 사용은 다른 무수한 센서의 사용을 불가피하게 만들고 있다. 센서는 데이터가 들고나가는 장치다. 센서라는 장치에서도 HW에 불가결한 SW, 나아가 SW-defined HW 시대에는 HW와 SW의 디커플링(decoupling)도 기술경쟁력의 요소가 되고 있다는 것을 읽어내야 한다. 디지털 공간은 데이터를 존재의 근거이자 에너지로 삼는 센서 네트워크 나아가 센서 공간이라는 본질적인 속성을 가진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단말디바이스를 통해 데이터의 무한한 추출과 공급을 본질적 속성으로 하는 디지털 공간 시대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신 글로벌 전략’으로서의 ‘디지털 공간 설계’는 이 지점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어떤 제품과 서비스라 하더라도 가능한한 ‘디지털 공간’에 연결되어야 하고, 그 제품과 서비스에다가 ‘디지털 공간’이 동시에 제공되어야 하고, 데이터는 ‘디지털 공간’의 에너지로 취급되어야 하고, 데이터를 지배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앞의 글들에서 제시한 디지털 ‘신뢰’ 공간에 관한 여러가지의 과제들의 해법을 구체적으로 모색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도 센서의 타깃이 되고, 인간 자체가 센서가 되는 ‘데이터 생산물로서 인간’도 ‘디지털 공간’에서 이제 서서히 물화(Reification, 物化)되고 있는 시대로 돌입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IoT (Internet of Things)에서 인간도 예외가 아니었고 바로 thing이었구나! All-IP로 전환한 5G 네트워크도 인간의 communication을 위한 위한 것이 아니라 B2B 또는 thing-to-thing 교신을 위한 것이었구나! 제4차 산업혁명의 과정에서 피를 흘리는 일은 없어도 인간은 디지털화를 통해 스스로를 완전한 존재를 추구하면서도 스스로 물화(Reification, 物化)를 자초하는 모순을 야기하고 있는 것이구나! 아니면 번영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는 세계인과 세계의 것을 아우르는 디지털 공간도, IoT라는 이름으로 디지털 공간물을 연결하여 담는 디지털 공간도 제대로 만들어본 적이 있는가? OCF (Open Connectivity Foundation)이든 Matter (formerly Project Connected Home over IP – CHIP)이든 이들 표준화 포럼에서의 좌장 활동을 국내 대기업의 임원이 해본들 그 표준의 함의도 모르고, 그 표준에 의한 비즈니스 생태계 전략과 그것의 실행 계획도 제대로 세우지 않고, 이를 디지털 공간이라는 전략적 범주로 확장하지 않는 것을 어찌 지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MSF (Metaverse Standards Forum)에서는 어떤 지적을 받게 될 것인가? 이렇게 이 글 ≪디지털 공간 설계 기초 (1)≫을 마무리 한다.

(2022년 7월 5일)

/디지털신뢰공간 아키텍트 황철증 디지털신뢰공간연구소 소장

서울대 법대(학사) 및 행정대학원(석사), 미국 콜럼비아 법대 (석사), 고려대 정경대학원(박사)을 졸업했습니다.

행정고시 29회로 1986년 중앙공무원교육원과 아시안게임조직위원회에서 단기 훈련을 거친 후 정보통신부에서 공직을 시작하였습니다.

BH, 국무총리실, 국정원(사이버안전센터), NIA 등에서도 근무를 한 바 있으나 주로 정보통신부에서 잔뼈가 굵었습니다. 방송통신위원회를 끝으로 26년간의 공직을 마친 후 사회의 한 구석에서 꼼지락 거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온갖 분야의 독서와 사색으로 삶을 붙들고 있으면서, 일찌기 담당한 인터넷 정책에 관한 주제에도 여전히 많은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소위 디지털(인터넷) 아키텍처와 디지털(인터넷) 철학자로 스스로를 부르며 현대의 기술문명 역사의 흐름을 조망하는 것을 즐깁니다.

한편으로 이병주 소설가, 박이문 철학자, 최제우 동학창시자, 리처드 도킨스 진화생물학자, 움베르토 에코 기호학자 등 훌륭한 학자와 문인에게 지적 의식을 의탁하고 사는 자입니다.

이번 연재글의 게재로 IT기자클럽의 디지털문명 칼럼니스트로 소박한 의무를 시작하는 셈입니다.

연락처는 newdhjj@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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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러]마이너 필링스 저자, 캐시 박 홍

1976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미국의 이민 금지가 풀린 직후인 1965년 펜실베이니아주 이리(Erie) 외곽으로 이민했다가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나무 한 그루 없이 온통 공사장인 로스앤젤레스의 신개발 지역에서 유년을 보낸 그는, 집 안에서 한국어로 말했기 때문에 입학할 때까지 영어를 거의 몰랐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에 겪은 ‘이질적 언어 환경, 이중 언어’는 역설적으로 ‘영어를 두드리게’ 만들고, ‘갈등하는 의식에 가장 근접한’ 그만의 어휘소 목록을 쌓게 한 동력이 되었다.애초에는 미술 작업에 더 관심이 있었지만 진보적인 성향의 예술 대학으로 유명한 오벌린 대학교에 입학한 뒤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후 아이오와 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시작을 이어가면서 예술 비평 활동을 병행한다.

첫 시집 『몸을 번역하기』(Translating Mo’um, 2002)로 푸시카트상을 수상했고, 두 번째 시집 『댄스 댄스 레볼루션』(Dance Dance Revolution, 2008)이 에이드리언 리치의 심사로 바너드 여성 시인상을 수상했다. 이어 시집 『제국의 엔진』(Engine Empire, 2012)을 출간했다.

윈덤캠벨문학상, 구겐하임 펠로십, 국립예술기금 펠로십을 수상했고, 『뉴욕 타임스』, 『파리 리뷰』, 『맥스위니스』, 『보스턴 리뷰』 등 여러 매체에 시를 발표한다. 『뉴 리퍼블릭』에서 시 담당 편집자로 일하며, 럿거스 대학교 뉴어크캠퍼스 예술대학원 석사과정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20년 봄에 출간한 『마이너 필링스』 영어판은 『뉴욕 타임스』 논픽션 분야 베스트셀러뿐 아니라 각종 유력지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퓰리처상 파이널리스트, 앤드루 카네기상 우수상 후보에 올랐으며, 전미도서비평가협회(자서전 부문)을 수상했다

저서소개_마이너 필링스

“지금 가장 영향력 있는 한국계 미국 작가

캐시 박 홍의 자전적 에세이”

차별받는다고 느끼는 건 내 피해망상일까?

캐시 박 홍은 한국계 미국 이민자 2세대로, 미국에서 나고 자라 교육받고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캐시는 어느 순간 문학인으로서 자꾸만 좌절당하고 삭제당하는 현실이 ‘작품이 부족해서가 아닌 것 같다’는 의심을 품게 된다. 아시아인으로서 살아온 경험을 시로 쓰면 “또 인종 얘기”냐며 혹평받고, 자본주의, 세계화, 환경처럼 ‘진짜 중요한 얘기’를 다루면 그건 ‘비백인’에겐 어울리지 않는 소재라며 다시금 ‘인종 이야기’를 하라고 권유받는 모순적인 현실이 선명해진 것이다.

의심은 분석으로, 분석은 분노로, 분노는 제자리 찾기로 이어지는데, 이 책은 바로 그 첫 결과물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보이지 않는 차별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그는 ‘나는 누구일까?’라는 물음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이 작업이 간단치가 않다. 그는 자신의 평생뿐만 아니라 수백 년의 역사에 묻혀 있던 사건을 파고 들어야 한다.

“왜 이래야만 하지? 내가 속한 사회에 나를 설명하기 위해, 나는 왜 이토록 어려운 길을 택해야만 하지?”

나는 왜, 백인이 아니란 말인가

캐시는 이민 1세대가 미국에서 겪는 고통은 인종차별보단 고향을 떠나왔다는 뿌리 뽑힘에 있다고 생각한다. 애당초 자신을 한국인이라 여기기 때문에 한인 타운을 제2의 고향쯤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2세대는 다르다. 미국에서 나고 영어를 쓰며 자라 교육받고 일하는 미국인이지만, 어느 누구도 미국인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데에서 고통이 시작된다. 1세대는 차별의 이유가 ‘미국인이 아니어서’에 있다고 여겼다면, 2세대는 ‘백인이 아니어서’임을 너무나 뼈저리게 감각한 세대다. 이 책은 말하자면, 영화 「미나리」 속 이민 2세대, 바로 ‘데이비드’의 이야기이다.

나를 만들어온 ‘감정들’ 파헤치기

아시아인이어서, 여성이어서 당한 차별의 감정들을 결산하다

‘마이너 필링스’(minor feelings)는 직역하면 사소한 감정이겠지만, ‘마이너리티’의 사회적 맥락과 깊게 체결돼 있으니 ‘소수적 감정’으로 옮길 수 있다. 어쩌면 ‘소수자’로 분리되고 지목된 사람들이 안고 사는 불안과 짜증, 수치심과 우울감은, 음악용어를 빌리자면 단조(minor)의 감정이기도 하다. 캐시는 이 책을 일곱 개 장으로 쪼개고 글을 조각내 썼다. 통으로 쓰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주제 사라구마의 『눈 먼 자들의 도시』처럼 눈을 감아도 백색의 시선이 끈질기게 달라붙는 미국 사회에서 캐시가 아시아인 여성으로 살아온 시간은 일관되고 정연하게 서술될 수 없는 것이었다. 외면, 삭제, 침묵, 공허한 낙관이 뒤엉킨 인종차별은 한 개인의 삶 깊숙이 들어와 “놀랍도록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며, 삶의 모든 순간을 지배하는 ‘감정들’로 박혀 든다.

두려움, 슬픔, 수치심, 강박, 무기력, 짜증의 ‘마이너한 감정들’은 개인의 평정을 무너뜨리고 끝없이 좌절하게 한다. 그것이 마침내 외부로 표출되면 적대, 배은망덕, 시샘, 공격성으로 해석되어 급기야 백인들은 “도가 지나치다”며 캐시의 경험과 감정을 폄하한다.

내가 받은 상처뿐만 아니라

내가 남에게 준 상처에 관해서도 쓸 수 있을까?

백인은 아시아인이 ‘백인의 다음 차례’라면서, 성실하고 근면하며 권리를 내세우거나 욕심 부리지 않는다며 아시아인을 칭찬해왔다, 이민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물론 아시아인이 기업이나 정치, 문학계 최고 자리에 앉는 일은 거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아시아인은 어떤 정체성을 갖게 될까? 어떤 정체성을 인정받을까?

“너희들은 여기 있으면 안 돼, 빨리 나와! 이제는 저것들이 사방에 퍼졌구만.” 동네 공용 수영장에서 노는 아시안 아이들에게 한 백인이 다가와 소리치며 한 말이다. “난 절대 중국인한테는 문 안 잡아줘!” 백인 남성이 쇼핑몰 로비 문에서 황급히 손을 떼며 아이들에게 내뱉은 말이다.

저것 아니면 중국인이다. 코로나 이후엔 바이러스. 백인은 아시아계 개인을 고유하게 대해야 할 필요성을 아예 느끼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아시아인’은 어떤 의미일까? 아시아인들 사이에 퍼져 있는 흑인에 대한 혐오에 대해서는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캐시는 이 혼란을 인정하고 생각하길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일에 대해 내가 어떻게 쓸 수 있을까? 내가 받은 상처뿐만 아니라 내가 남에게 준 상처에 관해서도 쓸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을까? 죄책감은 상대에게 용서를 요구하고 따라서 이기적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내가 속한 사회가 나를 모른 척한다면,

내가 그 사회를 설명해주겠다

캐시는 마지막에 “보편성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다”고 일갈하며 “차단된 상태”에 처한 “비백인”을 호명한다. “과거에 식민 지배를 받았던 자, 조상이 이미 멸망을 겪은 아메리카 원주민 같은 생존자, 서구 제국이 초래한 기후 변화 때문에 악화된 가뭄과 홍수 또는 집단 폭력으로부터 피신한, 현재 멸망을 겪고 있는 이주자와 난민”이다.

무엇이 ‘아니라는’ 이유로 존재의 삭제 또는 축소를 경험하는 수많은 소수자들이 수없다.

“네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라는 질문 앞에 작아지는 여성들,

“하필 설 연휴에 지하철에서 시위를 해가지고”라는 부당한 비난을 당하는 장애 인권 운동가들,

“성소수자 축제를 안 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고민하겠다는 정치인들의 말에서 한순간 공공의 장소에서 추방당한 성소수자들.

그들, 아니 우리 안에서 ‘소수적 감정’이 자라고 있다.

얼마만한 크기일까? 어떤 모양일까? 『마이너 필링스』를 ‘이민자 2세대’의 자전적인 글로만 협소하게 본다면, 우리에게 던지는 이 질문을 놓치고 만다.

지금 이 시대의 변화와 퇴행 모두를 관통하는 개념인 정체성과 교차성, 그리고 감정이 개인과 역사, 개인과 정치, 개인과 문학 사이에서 어떻게 얽히고설키는지 이 책이 보여준다.

마티의 앳(at)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앳 시리즈는 정체성 탐구의 복판을 관통하는 질문 ‘이 세계에서 내 위치는 어디일까’에 답해가는 작업이자, 개인의 몸과 감정을 통해 지배 구조를 재인식하고 비평하는 ‘자기 이론’(AutoTheory)적 시도입니다.

여성/남성, 피억압자/억압자, 빈자/부자, 장애인/비장애인, 성소수자/이성애자 등의 대립항에 갇혀 있지 않으려는 몸부림, 교차하는 정체성의 스펙트럼 속에서 쉬지 않고 움직이는 역동, 그리고 자신의 지식과 경험이 부분적임을 알고 나와 타인의 위치와 연결될 때 종합적인 성찰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신념을 엮고자 합니다.

권력 바깥에 있는 사람들, 침묵의 자리를 거부하는 사람들, 기득권에서 기꺼이 탈주한 사람들과 책이라는 장소에서 함께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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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원 ‘세상에서가장짧은한국사’

저자 김재원은 한국에서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에서 시작했습니다.

2022년 현재 박사학위를 가진 많은 전문연구자가 실질적으로 실업상태입니다. 그렇다고 역사가 다른 인문학처럼 아예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분야는 아닙니다. TV에서는 역사예능이나 사극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저자는 한국인들은 언제나 지식에 대해 끝없이 갈망하는 존재, 책으로도 모자라 TV에서도 지식을 찾는다고 진단합니다. 이에 따라 교육자와 예능인이 단단히 결합한 TV라는 시장이 만들어집니다.

저자는 1년 넘게 쪽방에 틀어박혀 육개장 사발면과 김혜자 도시락만 사먹던대학원 석사과정 때를 떠 올립니다. TV만 틀면 예능 프로그램에 ‘역사’가 나오는 바깥세상만 역사학열풍이던 그 시절을….

저자 김재원은 그 현상을 ‘공허한 열광’, ‘허무한 비판이라고 느꼈다고 합니다. 이제 역사학이 진정으로 시장 속에서 ‘유통’되기 위한 방법을 찾고자 했습니다. 엘리트주의에 쩌든, 고고한 척 자존심만 내세우지 말자고 결심합니다. 가난한 비판자가 아니라 직접 생산자로서 역사을 유통하기로 결심합니다.

마침내 기존 역사해석과 결이 다른 [세상에서 가장 짧은 한국사]가 출간되었습니다.

자유로워진 역사, 앞으로 더 자유로워질 역사를 기대하며… 추천드립니다.

김재원 책의 꼭지들을 열렬히 논쟁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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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의 미래] ⑬ “실핏줄 골목길 주민이 살아야 동네가 산다”

소설 ‘영원한 유산’(문학동네)의 심윤경 작가는 서울 종로구 서촌에서만 사십 년을 산 토박이다. 10여 년간 삶이 흘러가는 대로 잠시 서촌을 떠났지만, 연어가 귀소하듯이 서촌으로 회귀했다. 어릴 적 온종일 헤매도 늘 새로운 길과 조우하게 되는 서촌의 촘촘한 골목길은 심 작가에게 마치 실핏줄과도 같은 설렘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유산’에서 심 작가는 과거 친일파 윤덕영의 별장이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한국통일부흥위원단의 청사로 쓰인 ‘벽수산장’을 중심으로 “이념의 밀물과 썰물 속에서 정직과 존엄을 지키려 애썼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등장인물은 허구지만 실제 역사적 배경과 장소를 담은 소설을 통해 서촌을 조명한 심 작가. 그런 그를 5월27일 서촌의 어느 카페에서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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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의 미래] ⑭ “경복궁 후원, 경무대, 청와대 변천의 역사 소개할 공간 조성해야”

서울 종로구 경복궁 인근의 서촌이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중인(中人)으로 붐볐던 지역에 관광객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유동 인구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길가에는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줄이 길게 늘어섰다. 옛 왕의 거처인 경복궁에 이어 최근 전직 대통령들이 머물던 청와대까지 민간에 개방되면서부터 시작된 변화다.

서촌은 1963년 박정희 정부 당시 여러 규제로 쇠퇴했다가 2010년 한옥밀집지구로 지정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던 경험이 있다. 그런 서촌이 청와대와 연계된 새로운 관광 코스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시대의 최고 권력자가 거주했던 경복궁과 청와대 그리고 둘을 잇는 서촌. 8일 아시아경제는 서촌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곳의 사연에 대해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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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선 ‘베트남과 그이웃중국’

유인선 교수의 강연은 우리와 유사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를 재조명했습니다.

베트남 역사의 특징은 북거(北拒)와 남진(南進) 입니다. 곧 북으로 중국의 침입에 저항하면서, 영토를 남쪽으로 확대하는 과정입니다. 베트남은 기원전 2세기 말 한나라에 의해 남월(南越)이 멸망한 후 1000년간 중국 지배를 받았습니다. 독립 후에도 송이 2번, 원이 3번, 명 1번, 청 1번의 침입이 있었습니다. 19세기 말 프랑스 식민지가 될 때까지, 베트남은 중국에 조공을 바치면서도 인도차이나반도의 맹주로 행세합니다.

베트남인은 중국에 대해 뿌리 깊은 대등의식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20세기 사회주의에 혁명를 이루는 과정에서도 중국과는 서로 다른 견해가 있었습니다. 혁명기 호찌민과 하노이 정부는 중국의 원조를 받으면서도 한편으로 서로 어긋나는 긴장의 시간도 제법 있었습니다. 프랑스·미국과의 전쟁 속에서도 두나라는 협력과 갈등을 거듭하며 관계를 지속해왔습니다.

베트남과 우리는 유사한 지정학적 정치적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와는 살짝 다른 베트남의 태도 혹은 외교의 차이가 무엇에서 연유될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또한 베트남에서 사업체를 가지고 계신 참석자는 경제적 혹은 정치적 이슈가 발생했을 때 중국 보다 베트남이 보다 합리적으로 처리한다는 경험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이러한 중국과 베트남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기후차가 아닐까 하는 가설, 프랑스 식민지였기 때문이라는 가설까지 제기되었습니다. 무척이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강연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