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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5월2일, 최초의 운동회

관립외국어학교 영어과 학생들이 소풍과 운동을 겸한 야외놀이 행사였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운동회라고 할 수있는 화류회입니다. 독립신문은 1896년 최초의 운동회인 화류회 모습을 다음과같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영어학교 교사와 학도들이 이달 이튿날 동소문 밖(지금의 성북구 삼선교 부근)으로 화류회를 갔다. 오래 학교 속에서 공부하다가 좋은 일기에 경치 좋은데 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고 장부에 운동을 하는 것은 진실로 마땅한 일이나 다만 마음과 지각만 배양할 게 아니라 조선 사람들이 몸 배양하는 것도 매우 소중한 일이니 몸 배양하는 데는 맑은 공기에 운동하는 게 제일이요, 목욕을 자주하야 몸을 정하게 하는 것이 제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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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롱의 모델, 드골

샤롤 드골(1890~1970) 은 1968년  5월 혁명 직후, 1969년 실시한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자 대통령직을 사임합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완전히 은퇴하고 회고록을 쓰기로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듬해 심장 마비로 사망하고 맙니다.

죽음이후 드골은 오히려 더 그리움의 대상이 됩니다. 프랑스에 그의 이름을 딴 도로를 3천 6백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는 여전히 자주 정치에 소환되고 있습니다. 드골은 ‘위대한 국가’라는 비전을 평생 탐구하고, 현실로 만들어갔습니다. 마크롱은 바로 드골 비전의 현대 옹호자입니다. 드골을 알아야 현대 프랑스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1940년 5월, 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 육군은 6주만에 항복합니다. 군사적 패배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 붕괴였습니다. 헨리 페댕 등 프랑스 장군들은 1940년 6월 나치 독일과 휴전 협정을 맺습니다. 그러자, 드골은 런던으로 피신하여 자유 프랑스군을 조직합니다. 드골은 BBC에서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며, 프랑스 저항운동의 연락병이자 구심점을 만듭니다.

“프랑스의 병사들이여, 당신들이 어디에 있건 일어나십시오!” 패배주의에 휩싸여 흩어져 있던 프랑스인들이 드골의 연설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유 프랑스’는 사실상 망명 정부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습니다. 드골은 프랑스 식민지를 연합군에 편입시키고, 식민지출신 군대는 북아프리카에서 성공적으로 싸웠습니다.

이제 ‘자유 프랑스’는 연합국의 일원이 되어 반독일 전쟁에 참여한 것으로 인정받습니다. 1944년 6월에 그는 프랑스 망명 정부의 수장이 됩니다. 8월 26일, 연합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드골은 의기양양하게 파리에 입성했습니다. 3개월 후, 드골은 만장일치로 프랑스의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연합국의 일원으로 싸운 전력이 있기에, 프랑스는 유엔 안보리 5대 상임 이사국의 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1946년 1월에 통치권이 부족하다고 주장하며 대통력직을 사임합니다. 1947년 반공 단체인 프랑스 국민 연합을 조직하여, 1951년 제1당으로 성장시킵니다. 그런데 또 다시, 드골은 1953년 당을 해체하고, 정계에서 은퇴합니다. 그런데 5년 후 알제리에서 반란이 일어나 프랑스는 다시 정치적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드골도 다시 정치에 등장합니다. 새로운 헌법이 통과되고, 드골은 1962년 제 5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대통령 중심제 개헌으로 집권한 드골은 ‘위대한 프랑스’를 만드는데 매진합니다. 드골은 이제 프랑스를 강대국 중 하나로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그 어떤 국가도 프랑스를 좌지우지해서는 안된다고 스스로 결정합니다. 그 후 10년 동안그는 알제리를 독립시키고, 프랑스를 핵 보유국으로 만들고, 나토동맹에서 철수합니다. 소련을 방문하고, 중국을 최초로 인정하는 등 독립적인 외교노선을 따랐습니다. 미국 패권에 맞서며, 달러화 공방과 금본위제도를 둘러싼 논쟁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마크롱은 드골 대통령론을 말하자면 이론화합니다. 그가 올랑드 대통령의 고문으로 일하는 동안 그는 ‘주피터’대통령’론을 합니다. 마크롱은 왕의 상실과 혁명 이후의 공포가 프랑스 공화국의 중심에 “감정적이고 상상적인 집단적 공백”을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로 인해 프랑스인들은 불안감을 느꼈고, 아우라와 신비로움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했습니다. 독일의 정치적 리더십이 법의 적용에 의해 정의된다면, 역사적으로 가톨릭 교회와 군주제를 중심으로 구조화된 프랑스 사회는 명확한 수직적 권위와 권력을 구현하는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마크롱은 주장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드골은 프랑스의 대통령이어야만 했습니다. 개인적 성품이나 스타일만이 아닙니다. 드골은 제왕적 대통령제와 직접선거를 고안하고 도입했습니다. 드골이 집권했던 1960년대만 해도 프랑스 국민은 “유럽이 거대한 프랑스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드골 사후 독일에 경제적으로 추월당하고, 유럽의 균형자역할을 했던 프랑스의 외교적 파워는 점점 더 영향력을 잃고 있습니다. 냉전이 끝나고, 중국이 부상하면서, 미국의 유럽전략도 변화하고, 프랑스의 외교적 역할과 지위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 하나의 사례가 호주의 잠수함 계약철회입니다. 2016년 호주는 프랑스로부터 잠수함 12척을 2030년부터 공급받기로 계약합니다. 그런데, 3국간 군사협의체인 오커스(AUKUS) 차원에서 호주에 핵잠수함을 공급하기로 합니다. 이에 호주는 프랑스와의 계약을 철회하고, 프랑스 방산업체인 나발그룹에 약 7,500억 원 위약금을 지불하며 마무리됩니다.

탈냉전 이후에도 미국의 외교목표는 여전히 러시아견제였습니다. 그래서 나토의 확대를 꾸준히 시도합니다. 이제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전략적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중립을 지켰던 스웨덴과 핀란드가 나토에 합류하고, 유럽 국가들은 국비를 증강하면서, 미국에 더욱 안보를 의존합니다. 2022년 2월,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마크롱은 바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푸틴을 5시간동안 만나기만 했습니다.

마크롱은 2023년 4월, 시진핑을 만나고, 환대를 받습니다. 그는 ‘전략적 자율성’을 주장하며, 중국에 신호를 보냅니다. 그런데 비즈니스 기회는 대가없이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마크롱과 무엇을 주고 받을 수 있는가입니다.

마크롱은 EU 의 다른 어떤 회원국도 소유하지 못한 하드 파워의 지렛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핵무기로 무장하고, 유엔 상임이사국인 프랑스는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규모 군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군사 기지와 해외 영토는 카리브해에서 태평양까지 뻗어 있습니다. 프랑스는 264개의 대사관과 공관을 두고 중국(275개)과 미국(267개)에 이어 세계 3위의 외교 네트워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사적인 전환점이라고 해도, 아직 독일조차도 미국의 보호 없이는 큰 결정을 내리는 것을 꺼려했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미국 무기 구매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전환은 매우 느리게 올 수도 있습니다. 지나치게 가볍고 빠른 발검음 때문에 넘어질 수도 있는 국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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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골의 명언

드골의 정치名言

  샤를 드골의 문장은 군더더기가 없고 짧다. 정치, 전쟁, 국민의 속성을 꿰뚫어 본 명언들을 모았다.

  *원자폭탄을 갖지 않은 나라는 진정으로 독립하였다고 할 수 없다.

  *‌위기만이 프랑스를 단결시킬 수 있다. 265가지나 되는 치즈를 가진 나라를 갑자기 단합시킬 순 없다.

  *내가 사람들을 더 많이 알게 될수록 개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침묵은 권력의 최종 병기이다.

  *‌용감한 사람은 난관(難關)에 특별한 매력을 느낀다. 곤경에 직면하였을 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옳을 때 화를 내는데 처칠은 잘못할 때 화를 낸다. 우리는 서로 화를 낼 때가 많다.

  *‌애국심은 동족(同族)을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이고, 민족주의란 이민족(異民族)을 미워하는 것이 먼저이다.

  *정치인은 주인이 되기 위하여 머슴 행세를 한다.

  *나는 누구한테도 속하지 않지만 모두에게 속하는 사람이다.

  *정치인들은 자신이 말한 것도 믿지 않기에 다른 사람들이 그를 믿으면 놀란다.

  *‌침묵만큼 권위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은 없다. 침묵은 강자(强者)의 광휘(光輝)이고 약자(弱者)의 피난처이다.

  *신비함이 없으면 명성(名聲)도 없는 것은, 친숙함이 경멸을 부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심사숙고(深思熟考)하지만 행동하는 이는 혼자이다.   *‌‌정치에선 조국이나 유권자들을 배신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그럴 경우) 유권자들을 배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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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vs. 중국

2023년 4월 안나레나 배어복 독일 외무장관이 처음으로 방문한 곳은 어디일까요? 중국 톈진에서 풍력 터빈용 부품을 만드는 독일의 중소기업 플렌더(Flender)의 중국 생산 현장입니다. 외무장관이 공장을 견학하는 것은 이례적이지만 독일과 중국 간 비즈니스 관계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중국은 독일의 가장 큰 무역 파트너이자 투자처입니다. 그렇지만 독일의 고민은 계속적으로 교역액이 증가하면서 무역적자는 더 커져간다는 점입니다.

이미 독일은 중국 공급업체에 크게 의존하고 있습니다.중국은 독일에 설치된 태양광 전지의 95%, 노트북의 80%, 기타 전자 제품의 대부분을 공급합니다. 독일은 또한 반도체와 리튬 이온 배터리를 만드는 데 필요한 희토류 금속과 항생제 및 기타 중요한 의약품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독일을 대표하는 주요한 산업도 중국에 진출하고 있습니다. 자동차 관련 기업, 화학기업 등이 중국의 새로운 생산 시설에 상당한 규모로 투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독일 기업들은 점점 더 중국을 위해, 중국에서 생산하고 있습니다. 외부장관이 방문한 플랜더 공장은 중국에만 공급하고 있습니다. 독일 기업들이 현지생산과 연구개발에 점점 더 많이 지출함에 따라 현지 수익의 대부분이 이제 중국에 재투자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보면, 독일의 일자리와 중국으로의 수출 모두에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지금 독일은 새로운 중국 전략을 만들고 있습니다. 독일산업을 부양하면서,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뽀쪽한 방법은 없는 듯 합니다. 그럼에도 새로운 형태의 인센티브 정책을 만들지 않는 한 독일기업은 계속해서 중국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반도체 강국인 대만마저 흔들리면, 선택조차 없는 외통수만 남을 수 있습니다. 6월 20일 독일 수상과 와 중국 총리와 회담이 예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독일의 전략은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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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라 피츠제럴드

재즈의 전설 엘라 피츠제럴드는 1917년 4월에  버지니아 주 뉴포트 뉴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노래의 퍼스트레이디”라고 불렸는데, 그 의미는 작곡가 거쉬윈이 그녀에게 준 칭찬이 담겨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와는 별개로, 그 뒤에는 우울한 노래조차도 낙관주의로 기울어지게 만드는 따뜻함과 지성이 있습니다.빌리 홀리데이나 프랭크 시나트라는 센티멘탈한 노래의 깊은 우울함을 표현합니다. 반면에 피츠제럴드는 어떤 노래도 순수한 기쁨으로, 산소같은 청량한 멜로디로 부릅니다. 그것은 영원할 것같은 젊은소리입니다.

하지만 엘라 자신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엘라가 태어난 직후 뉴욕 북쪽으로 이주했습니다. 엘라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댄서가 되고싶어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어머니가 갑자기 1932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5세 된 엘라는 대공황이 발생한 바로 그 때에 고아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끼니때우기도 힘들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엘라는 매음굴에서 파수꾼으로 일합니다. 그녀는 곧 유색인종 고아 수용소에 수용되고, 다시 그 시설에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훈련학교라 불리는 소년원으로 보내졌습니다.

1934년 11월 21일 저녁, 엘라는 아마추어 나이트에 참여하기 위해 할렘의 아폴로 극장 무대로 올라갔습니다. 모자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온 후 순전히 우연의 결과로 무대에 오른 엘라는 그순간 댄서대신 가수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엘라는 아마추어 밤에서 우승을 해버립니다. 라이브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받은 엘라 피츠제럴드의 전설이 시작됩니다.

1950년대 중반, 프로듀서 노먼 그란츠와 레코딩 계약을 체결하고 미국의 위대한 작곡가들이 만든 ‘콘셉트 앨범’ 시리즈를 녹음했습니다. 1960년대 초반까지 콜 포터, 듀크 엘린턴, 거슈인 등의 작품들을 차례로 녹음하며 그녀의 실력과 재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녀는 가장 테크닉이 좋고 리드미컬하며 스캣에 능한 가수입니다. 이후 스포트라이트는 엘라를 떠나지 않았고, 그의 명성은 점차 전 세계적으로 퍼져 재즈계를 넘어 대중의 큰 호응을 얻어습니다.

1917년 이날 태어난 엘라 피츠제럴드는 1996년 캘리포니아 베벌리힐스에서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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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4월 28일, 무솔리니 처형

1945년 4월 28일, 베니토 무솔리니와 그의 정부인 클라라 페타치는 스위스로 도망치려다 이탈리아 유격대에게 총을 맞았습니다.

61세의 무솔리니는 독재자는 독일 점령 기간 동안, 이탈리아의  꼭두각시 정부의 수장역할을 했습니다. 연합군이 이탈리아 반도까지 올라오면서 패배가 거의 확실해지자 무솔리니는 중립국으로 탈출을 시도합니다.

무솔리니와 그의 연인은 빨치산에 의해 발각되어 총에 맞았습니다. 그들의 시신은 트럭으로 밀라노로 옮겨져 거꾸로 매달려 공개적으로 전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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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4월28일, 왕세자 이은 결혼

영친왕이라불리는이은(1897~1970)은 고종의 7번째 아들이자 순종의 이복동생입니다. 생모인 엄상궁은 이은을 낳은뒤, 순헌황귀비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은은 10살 때인 1907년 순종의 뒤를 이을 황태자로 책봉되자, 곧바로 일본유학을 떠납니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으로 조선이 망하자, 다시 왕세자로 격하됩니다. 그는 귀족학교 가쿠슈인 중등과를 거쳐 육사에 입학하게됩니다.

황세자 이은 일본왕족이던 마사코(이방자)와 정략결혼을 합니다. 1920년 4월, 도쿄 롯폰기에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거행된 결혼식은 삼엄한 경계 속에서 거행됩니다. 1926년 4월 순종이 승하하자 이은은 이왕 작위를 계승하지만 계속 일본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주로 군인의 신분으로 지냈고, 마지막으로는 육군 제1항공군 사령관까지 올랐습니다.

 1963년 12월 고혈압과 뇌일혈로 혼수상태에 빠진 영친왕과 이방자 부부가 서울로 귀국합니다. 새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초청으로 1963년, 가족과 함께 귀국하여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창덕궁 낙선재에 기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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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문 ‘젊음의 즐거움’

이백의 시 ‘소년행을 이인문(1745~1821)이 그려습니다.

오릉의 소년들 금시 동쪽을 지날 때
은안장 백마 타고 봄바람을 가르네
떨어진 꽃 짓밟고서 어디로 놀러가나
웃으면서 들어가니 호희의 술집이네

그림은 온통 봄색입니다. 복사꽃과 버드나무가 강줄기를 따라 끝없이 심어져 있다. 봄 기운에 말을 달리며 다리를 건너고 있는 젊은이는 어디로 가는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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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4월 27일, 남아공 다인종 선거 실시

1984년 8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흑인들을 제외하고 유색인종과 백인들만 참여하는 국민투표가 실시됩니다. 곧 흑인에게 투표권을 줄 것인지를 묻는 투표입니다.

투표가 진행되는 가운데 백인정부의 인종차별 정책에 항의하는 흑인들의 반정부 시위가 벌어집니다. 흑인들은 황인종 등 다른 유색 인종의 투표거부를 선동하고 동맹파업을 벌입니다. 남아공 정부는 경찰을 동원해 흑인들의 평화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합니다.

이날로부터 10년 뒤인 1994년 4월 마침내 남아공 최초의 다인종 자유선거가 실시되면서 이 나라의 흑인들이 최초로 투표권을 행사하게 됩니다.

2,200만 명 이상의 남아공인들이 국내 최초의 다인종 의회 선거에서 투표에 참여했습니다. 압도적 다수는 반아파르트헤이트 지도자 넬슨 만델라를 그의 아프리카 민족회의와 다른 야당을 포함하는 새로운 연정을 이끌도록 선택했습니다. 5월에 만델라는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남아공 최초의 흑인 국가 수반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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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4월 27일, 7대 대통령 선거

 

당시 법은 대통령의 중임을 1차로 제한했기에, 이미 연임중이던 박정희전 대통령은 본래 1971년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체의 민주공화당이 3선개헌을 벌의하고, 국민투표를 거쳐 3선개헌 개정이 확정됩니다. 박정희 후보는 혼란없는 안정속에 중단없는 정진을 내세웁니다. 그의 공약의 핵심은 8.5%이상의 경제성장이었습니다. 자력경제 기반, 국토종합개발계획, 노동자 복지정책 강화 등을 또한 내걸었습니다.

40대기수론을 내세운 신민당 경선에서 김영삼를 제치고, 김대중후보가 대선후보로 선출됐니다. 김대중은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 교류 실시’, ‘미국·일본·중국·소련 4대국의 한반도 평화 보장’, ‘자립경제와 빈부격차 완화를 위한 대중경제론 실시’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습니다.

1971년 대선은 90만표 차이로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박정희 후보의 득표수는 634만표, 김대중 후보의 총득표수는 약 540만표로 94만표 차이가 났니다. ‘번영의 70년대’를 약속한 박정희 대통령이 김대중 후보를 94만여 표차로 승리했습니다. 다만 제6대 대통령선거에 비해 서울·부산 등에서 지지율이 하락하며 정권의 지지 기반은 불안정해지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