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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 뿌리 탐구, 권오영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 고고부 소속 학예연구사, 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를 거쳐 한신대학교 한국사학과에서 교수로 근무했으며 부속박물관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부속박물관장을 맡고 있다. 주 연구 분야는 한국 고대의 국가 형성과 사회구조, 무덤과 취락, 유라시아 교류 등에 걸쳐 있다.

백제 왕성인 서울 풍납토성의 발굴 조사를 주도하였으며, 2009년 이후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러시아 연방 내 투바공화국, 베트남 등지의 해외유적 조사를 추진하고 있다. 접기

최근작 : <미래를 여는 한국 고대사>,<토기와 도자기>,<백제를 왜 문화 강국이라고 하나요?> 등

저서 소개_미래를 여는 한국 고대사

국가와 학문의 경계를 넘어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한국 고대사 연구

우리나라의 고대사는 때때로 냉철한 학술적 토론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민족의 우열에 입각한 차별의 논리가 난무하는 장이 되고는 한다.

이 책은 새로운 고대사 연구를 제안하기 위하여 공고한 경계선을 뛰어넘는다. 지리적인 경계를 넘어 고대 한반도가 주변 국가·지역과 끊임없이 접촉하여 긴밀한 관계를 맺었음을 밝히고, 학문적인 경계를 뛰어넘어 고고학과 자연과학을 이용한 역사학 연구의 새 지평을 보인다.

이로써 한국 사회가 타자를 존중하는 통합의 길로 가야 함을, 그리고 역사학 연구가 인접 학문 분야를 적극 활용하는 통섭의 길로 가야 함을 말한다.

저서 소개_삼국 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

대한민국 최고의 명품 강의를 책으로 만난다! 현직 서울대 교수진의 강의를 엄선한 ‘서가명강(서울대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 시리즈의 열두 번째 책이 출간됐다.

역사, 철학, 과학, 의학, 예술 등 각 분야 최고의 서울대 교수진들의 명강의를 책으로 옮긴 서가명강 시리즈는 독자들에게 지식의 확장과 배움의 기쁨을 선사하고 있다.

<삼국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의 저자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권오영 교수는 무수한 발굴 현장을 직접 발로 뛴 한국사 권위자로, JTBC [차이나는 클라스]에 출연해 고대사의 가치와 매력을 대중에게 알리면서 주목받았다. 저자는 유물과 유적을 통해 하남 위례성, 임나일본부설 등 기존의 통설이 뒤집히는 극적인 순간들을 소개하면서 다이나믹한 한국 고대사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 책에서는 한국 고대사의 전반적인 흐름을 통해 역사적 진실을 복원할 뿐만 아니라, 발굴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도 흥미진진하게 펼쳐놓는다.

유물과 유적, 고분과 인골을 통해 반전이 거듭되는 역사의 순간들과 세계로 뻗어 나가는 한국사의 역동적인 여정은 ‘제대로 된 역사’를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 값진 감동을 선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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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훈 ‘지도와 아틀라스한국사’

역사을 좋아한다면 지도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매긴다. 강창훈은 역사에서 지도의 의미를, 지도만들기의 어려움과 미묘함을 이야기했다. 편집자에게 직접 지도이야기를 듣다보니, 지도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고종의 아관파천은 널리 알려졌다. 고종의 경로는, 무엇을 타고 갔고, 얼마나 걸렸을까? 네이버 지도는 말한다. 영추문에서 러시아공사관까지 도보로 약 26분 걸렸다고…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는 이 디테일이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역사를 질문하게 한다. 이런 지적 자극이 역사의 재미이다.

역사적 사건을 지도에 그리다보면, 한반도에 국한 되지 않은 보다 큰 동아시아의 영역과 역사를 바라보게 한다. 청일전쟁의 지도를 보다가, 단지 한반도의 침략이라는 교과서적 해석의 한계를 깨닫는다. 임진왜란이 그랬던 것처럼, 이른바 청일전쟁도 동아시아 전쟁이라른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북토크날 재미있는 질문이 있었다. 한성은 조선 우리의 명칭, 경성은 일제의 강요한 명칭으로 생각하는 타당한가라는 질문이다. 조선실록에도 자주 출몰하는 명칭이 경성인데….

의미있는 제안도 있었다. “아틀라스 한국근현대사”의 출간이라는…. 한국근대사를 풍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도와 사진으로 가득한 아틀라스가 필요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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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독일 통일

분단된 후 45년이 지나고, 1961년 건설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장벽이 무너진 후 통일을 위한 논의가 시작했습니다. 통일 2개월 후 독일 전체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헬무트 콜이 통일 독일의 초대 수상이 되었습니다. 독일의 통일은 냉전의 종식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독일은 통일은 아직 미완이라고 합니다. 국내외 독일 전문가들의 펴낸 <미완의 독일통일 – 독일통일 30년을 돌아보며>는 베를린 장벽 철거 30주년 기념식으로부터 독일 통일의 현재 모습을 되새김질 합니다. 

베를린을 감싸고 있던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은 무너졌지만, 새로운 장벽 곧 ‘머릿속의 장벽’이 세워졌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동서독을 갈라놓고 있는 침묵과 소외의 장벽들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독일의 통일 과정은 서독의 입장에서는 ‘흡수’였고, 동독의 입장에서는 ‘과거의 청산’이었기 때문입니다.

통일로 동독인들은 정치적 기본권을 보장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동독인들은 사회·경제적 기반이 상실된다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동독인들이 서독의 민주주의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동독인들의 이같은 경험은 극우세력인 ‘독일 대안당’에 대한 지지로 표출되고 있습니다. 

동독의 과거 청산은 나치 과거 청산보다도 훨씬 철저하게 수행됐습니다. 100만 명에 달하는 구 동독 공직자들이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일반인에게 슈타지(Stati, 동독 비밀경찰) 문서 열람을 허용했습니다. 그러자 서로를 감시하고 밀고한 과거사가 그대로 노출됐습니다. 그 결과 가족, 친구, 직장 동료들이 서로 의심하고, 갈등하고, 반목하게 됩니다. 동독의 역사를 ‘불법국가’의 역사로 규정함으로써 과거 동독에서 살았던 동독 주민들의 삶 전체가 불법국가 안에서의 불법적인 삶으로 부정당하는 결과를 나타냈습니다

서독이 주도한 통일 독일의 ‘동독 청산’은 특히 경제적 부문에서 강력하게 진행됐고, 이것이 동독인들의 삶을 뿌리부터 흔들었습니다. 종업원 5000명 이상의 대규모 사업장 150개 중 145개가 공중분해 됐습니다. 사회적 교류를 위한 아지트가 문을 닫고, 기차는 종종 지나쳐 갔으며, 버스의 배차 간격은 길어졌고, 동독은 그저 지방도시이며 서독에 의존하고 있다는 감정이 만연하게 되었습니다다.

통일 이후 몇 년 안에 동독은 개인의 삶에 한층 가혹하게 손을 뻗치는 거친 자본주의의 실험 무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처럼 광범위한 경제적 피해와 사회적 배척은 동독인의 경험을 만들었고, 수십만의 사람이 민주주의에 대해 의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서독 마르크를 표준으로 한 화폐통합은 동독 기업의 줄도산과 실업자 양산으로 이어졌습니다. 동독지역의 경제가 한순간에 붕괴하는 파멸적 결과를 낳았습니다. 동독 국유자산의 95%가 서독 자본가들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동독 주민들 사이에는 “이것은 통일이 아니라 점령”이라거나 “통합이 아니라 식민화”라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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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카테니라 대제

위대한 표트르 대제가 1725년 서거합니다. 그가 없는 러시아는 혼돈에 빠져들었고, 왕위는 불안했습니다. 그렇게 흔들리던 러시아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인물이 독일에서 넘어온 ‘이방인’ 예카테리나 2세입니다.

프로이센에서 소피아로 불리던 그녀(1729~1796)는 표트르 3세의 배우자로 지목됩니다. 러시아 황실의 먼친척이었던 어머니의 인연 때문입니다. 1744년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러시아로 향합니다. 황후로 신분이 바뀐 소피아는 러시아정교 세례명 ‘예카테리나’를 이름으로 사용합니다. 1761년 황제로 즉위한 표트르 3세는 허약하고 무능했습니다. 1762년 여름, 예카테리나는 황실 근위대의 도움을 얻어 남편 표트르 3세를 폐위시킵니다. 측천무후처럼 스스로 제위에 올라 예카테리나 2세라고 선포합니다.

179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34년 동안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의 외교와 내치를 이끌었습니다. 표트르 대제 이후 러시아는 여전히 유럽의 변방으로 멈추어 있었습니다. 이에 예카테리나는 모든 정치체계와 행정조직을 개혁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 국가재정은 거의 부도 직전이었습니다. 국가의 모든 부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강한 추진력으로 성직자와 교회의 재산 상당 부분을 국가로 이전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국고는 풍족해졌고, 비로소 큰일을 도모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러시아를 지배하던 교회가 세력을 급격히 상실하여, 예카테니라의 권력이 자연스럽게 강화되었습니다.

예카테리나는 통치 기간 동안 무려 12개 이상의 봉기를 진압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1773년에 푸가초프의 반입니다. 전직 육군 장교인 푸가초프는 그녀의 통치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러시아 군대의 위력에 직면한 푸가초프의 지지자들은 결국 그를 버렸고, 그는 1775년 1월에 체포되어 공개적으로 처형되었습니다.

예카테리나 2세 재위시대인 18세기 유럽에서는 계몽사상과 공화주의에 대한 사상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유행하던 계몽주의에 심취해, 볼테르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교류했습니다. 그녀는  ‘계몽군주’를 꿈꾸었으나 성공적이지는 않았습니다. 1767년 농노와 성직자를 제외한 각계각층 56대표로 구성된 회의체를 도입하나, 2년 후 해산시키게 됩니다. 그녀는 자유농민 제도를 주장하기도 했으나, 결국 농노제를 확대하는 정치적 선언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러시아는 아직 유럽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번영의 군주로 예카테리나는 성공적이었습니다. 18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러시아는 폭발적으로 성장합니다. 러시아 곳곳에 신도시가 개발되고, 29개 주의 지방제도 정비됩니다. 군의 현대화가 진행되고, 국가의 행정 및 법률제도도 안착됩니다. 러시아의 모든 곳에서 ‘새로운 개혁과 건설’의 바람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했습니다. 때로는 러시아의 광대한 관료주의에 발목을 잡히기도 했지만…

오스만트루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마침내 크림반도를 차지하고 흑해 항로를 확보합니다.  예카테리나 치하에서 러시아의 국경은 서쪽과 남쪽으로 확장되어 크리미아와 폴란드 대부분을 지배하게 됩니다. 이제 러시아는 유럽의 강자가 되었습니다. 표트르 대제가 제국 러시아의 초석을 놓았다면, 예카테리나 대제는 제국으로서의 러시아를 완성했습니다.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인을 독일인으로 만들고 싶어했지만, 독일인 예카테리나 대제는 러시아인을 ‘위대한’ 러시아인으로 만들었다.

1796년, 예카테리나 2세는 68세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사망합니다. 그녀의 적들은 추악한 결말을 바랬지만, 예카테리나는 여전히 ‘러시아의 자긍심’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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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잡은 패션이다

히잡은 무슬림 여성이 머리카락, 목, 어깨 등의 신체 부위를 가리기 위해 착용하는 복장이다. 영어권에서는 흔히 베일이라고 하는데,《코란》에도 등장하듯이 여성의 몸을 외부와 분리한다는 의미를 가졌다. 대다수 외부 관찰자는 히잡이 남성 중심적 교리를 강제하는 수단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인도네시아 무슬림 여성에게 히잡은 패션이다. 인도네시아를 오랫동안 관찰한 김형준 교수는 처음에는 히잡(hijab) 쓴 여성을 볼 때마다 엄청나게 더울 텐데?’ 라고 느꼈다고 한다. 가까이 무슬림 여성을 지켜본 후, 그는 희잡이 무슬림 여성의 ‘미’라는 걸 깨닫게 된다. 2000년대 들어 연예인 사이에서 히잡이 유행하면서, 히잡은 유행을 따르는 패션이 된다. 히잡과 일상복의 결합이 확대되면서 이를 지칭하는 ‘히잡 가울’ 즉 ‘젊은 여성이 친구와 함께 외출할 때 착용하는 복장’이라는 의미의 신조어도 등장했다. 어느 사이 인도네시아 무슬림 여성은 히잡을 패션으로 만들어 버렸다.

히잡은 이슬람 사회의 변화와 함께 한다. 전통사회에서 히잡은 그저 일상일 뿐이었다. 전통사회가 무너지면서, 히잡은 여성의 진보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선고되기도 했다. 터키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는 여성참정권을 부여하고, 공공장소에서 히잡 착용금지 정책도 시행했다. 서구 제국주의에 의한 ‘히잡 벗기기’가 시작되자, 히잡은 이슬람의 핵심 상징으로 부상한다. 이렇게 히잡은 기존 질서에 대한 굴복이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이슬람을 하나의 모습을 가진 종교로, 무슬림 사회를 전근대적인, 동일한 특성을 가진 사회로 바라보려는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히잡 쓰기와 벗기에는 무슬림 여성이 직면한 다양한 현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응과 타협의 과정이 있다.

역사적 맥락에서 인도네시아 무슬림 여성에게 히잡패션과 이슬람의 공존은 자연스럽다. 이들은 자신의 상황과 성향에 맞게 종교와 아름다움을 추구핟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히잡 쓰든, 안쓰든 자유이다” 그저 히잡은 패션이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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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윤경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심윤경작가의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는 그녀 작품세계의 한단계의 획을 긋는 것이다.

그녀의 소설 곳곳에 할머니가 있었고, 북토크에서 그녀 이야기를 듣다보면 할머니를 더욱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두가지 서로 다른 사랑을 받았다. 폭풍우 같은 변사또의 사랑이 있었다. 반면 할머니에게서 받은 사랑은 ‘사람이 주는 평화’ 였다고 말한다

할머니가 평생 한 말들의 대부분은 ‘그려, 안뒤야, 뒤얐어, 몰러, 워쩌’ 라는 다섯 마디 뿐이었다. 그런데 그걸로 충분했다. 아래 사진 속 할머니는 오은영 박사보다 더 강력한 듯 하다. 우리 모두 할머니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지 묻고 답하는 것이 이날의 분위기였다.

옥인동 높은 곳에 자리잡은 집에서 출발해서 역사책방 앞길을 따라 경복궁까지 갔던 길이 할머니와 손녀의 산책코스였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책방에서의 북토크는 좀 더 특별했다고..

글을 쓴지 이제 20년이 된 그녀는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이후 새로운 작품활동을 한다고 한다고 한다. 그녀가 겪었던 난독증에 관한 것이라고….살짝 힌트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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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9월 20일 무굴제국 멸망하다.

1526년 세워진 무굴제국은 20대 332년이 지난 1858년 9월 8일, 바하두르 샤 2세를 마지막으로 멸망했다.

티무르의 5대 손인 바부르(1483~1530)는 1526년 파니파트 싸움에서 승리하여 무굴 왕국을 세운다. 그의 손주인 악바르 대제(1556~1605)는 이슬람 왕조를 타도하고, 벵골까지 지배하면서 무굴”제국”을 완성한다. 비이슬람교도를 껴안게 된 악바르는 이슬람법상 이교도에게 부과하던 지즈야(인두세)를 폐지하는 등 제국의 중앙집권체제를 정비한다. 이후 약 100여 년 동안 무굴제국은 전성기를 보내고, 17세기 말 쇠퇴하기 시작한다.

마지막 황제 바하두르 샤 2세(1775~1862)는 1857년 세포이 항쟁을 지원했다가 권좌에서 쫓겨났다. 영국의 지배에 대해 항거한 지도자로 인도나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에서 여전히 추앙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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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러]좋은 불평등 작가,최병천

오랜 기간 진보정당에서 활동했다. 민주당에서는 정책 관련 일들을 해왔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마지막 정책보좌관, 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 부원장,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부소장을 했다.

현재는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 《복지국가를 부탁해》 《2020 한국의 논점》 《2022 한국의 논점》(이상 공저) 등이 있다.

최근작 : <좋은 불평등>,<2020 한국의 논점>

저서 소개_좋은 불평등

110개 데이터를 통해,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던 ‘불평등 상식’을 전복하다!

민주당의 대표적인 정책통인 최병천의《좋은 불평등》은 책 제목도 파격적이지만, 내용은 더욱 파격적이다. 책은 초반부터 후반까지 온통 불평등에 관해 우리가 그간 알고 있던 통념과 상식을 뒤집는다.

단, 110개의 데이터에 근거하여 치밀하고 꼼꼼하게.

문재인 대통령은 탄핵 촛불의 열망을 안고 2017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불평등’을 줄이면 ‘경제성장’에도 도움이 된다는 포부를 담아 추진한 정책이 소득주도성장론이었다.

그러나 최저임금 1만 원으로 대표되는 소득주도성장론은 2018~2019년 격렬한 논쟁에 휘말렸고, 각종 부작용을 일으키며 결국은 후퇴했다.

어느 순간부터 소득주도성장론도, 불평등 이야기도 문재인 정부에서 사라졌다.

《좋은 불평등》은 서문에서 ‘문재인 정부의 숨겨진 업적’이 3가지 있다고 지적한다.

첫째, 문재인 정부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진보세력이 주장하는 정책 대부분을 실천한 ‘25년짜리 진보정책’을 실천한 ‘25년짜리 진보정부’라는 점이다.

둘째, 성적표가 제출됐다.

셋째, 성적표를 잘 분석하면, ‘역사의 다음페이지’로 넘어갈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고 평가한다.

최저임금 1만 원 정책도, 소득주도성장 정책도 단지 대통령 개인, 경제참모 몇 명의 아이디어, 민주당만의 정책이 아니라 ‘한국 진보세력의 합의사항’을 이행했다는 것이다.

즉, 소득주도성장론의 정책 실패는 한국 진보의 ‘집단지성이 집단오류를’ 일으킨 경우였다고 지적한다.

한국 진보세력이 불평등 문제에서 집단적 오류를 일으킨 근본 이유는 한국 진보세력이 공유하고 있던 ‘불평등에 관한 통념’ 자체가 틀렸기 때문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불평등에 관한 5가지 통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불평등 확대는 1997년 외환위기부터 시작됐다.[시점]

둘째, 불평등 확대는 재벌, 신자유주의, 비정규직 확대 때문이다.[원인, 3대 적폐론]

셋째, 불평등 확대는 민주정부 10년, 보수정부 10년의 잘못 때문이다.[정치권 책임론]

넷째, 불평등은 경제성장에 해롭다.[불평등과 경제성장의 관계]

다섯째, 불평등은 국내적 요인에 의해 작동한다.[일국적 분석].

‘좋은 불평등’은 풍부한 데이터와 단단한 논증을 통해 이러한 5가지 통념이 ‘모두’ 사실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5가지 통념은 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인가?

그럼, 한국경제 불평등은 어떻게 작동했다는 것인가? ‘좋은 불평등’은 ‘제대로 된 분석’을 보여주기 위해, 1980년부터 최근까지 불평등의 시계열 추이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한국경제 불평등은 ‘3대 변곡점’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1980년부터 최근까지 동일한 방법으로 조사가 진행된 ‘고용형태별 근로실태조사’ 추이를 보면, 한국경제 불평등은 1994년에 최저점을 찍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5년간 등락을 보이다가 2015년을 최정점으로 최근까지 하락하는 중이다.

1994년 최저점, 2008년 중간고점, 2015년 최고점이 한국경제 불평등의 3대 변곡점이다.

‘좋은 불평등’은 3대 변곡점 각각의 작동 원인을 데이터에 근거하여, 역사적 사건과 연결하여 추적한다.

한국경제 불평등은 ‘중국발 불평등’…

불평등 시작은 1997년 외환위기 아닌 1992년 한‧중 수교 이후부터

일단, 많은 경제학자들의 오해와 달리 한국경제 불평등은 ‘1997년 외환위기부터’ 증가한 것이 아니다. 1994년부터 증가했다.

다시 말해, 외환위기 이전에 이미 증가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1994년 즈음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좋은 불평등》은 그 원인을 ‘1992년 한‧중 수교’에서 찾는다. 저자 최병천의 말을 들어보자.

“한국경제 불평등의 시작점은 1997년 외환위기가 아니다. 1994년부터 시작됐다. 이는 한국경제 불평등이 1997년 외환위기가 아닌 다른 요인에 의해 시작됐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해, 국내적 사건과 국제적 사건 3가지가 맞물려서 작동했다. 3가지 사건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1992년 1~2월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 1992년 8월 한·중 수교다.”

—4장 <1994년 불평등 미스터리, 그 해답을 찾아>, 59쪽

이를 입증하기 위해, 《좋은 불평등》은 8개의 데이터를 보여준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전후한 노사분규 추이,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제조업 임금 및 노동 생산성에 미친 영향, 노태우 정부 시절 공산권 국가의 수교 현황, 1980년부터 최근까지 한국의 해외직접투자(FDI) 추이, OECD 국가들의 저기술·제조업 고용 비중 추이, 산업별 취업자수 변화 추이, 신발산업과 의류산업에서 한국과 중국 수출액 추이 자료다.

이런 방식으로 1994년 변곡점, 2008년 변곡점, 2015년 변곡점을 모두 설명한다.

3대 변곡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한국경제사의 주요 사건들, 세계경제사의 주요 사건들, 중국경제사에서 주요한 정책 변화가 한국 불평등 30년의 역사에 각각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수출이 대박 나면 불평등이 증가하고, 수출이 작살나면 불평등은 줄어든다.

상층 소득이 오른 경우는 ‘좋은 불평등’, 상층 소득이 작살난 경우는 ‘나쁜 평등’

예컨대, 노무현 정부는 당시 민주노동당 등의 진보세력으로부터 불평등을 확대한 신자유주의 정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좋은 불평등》은 이에 대해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노무현 정부 때 불평등이 확대된 것 자체는 맞지만, 그 원인은 ‘신자유주의적’ 정책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이 WTO(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한 것은 2001년 12월이었는데, 이후 중국경제는 급성장한다. 경제성장률은 약 12%, 중국의 수출 증가율은 약 25%, 한국의 대중국 수출증가율은 약 30%에 달했다. ‘중국에 대한 수출 대박’으로 인해, 한국 대기업 노동자들의 성과급(상여금)이 급증한다. 요컨대, 노무현 정부 때 불평등이 증가했던 진짜 이유는 ‘수출 대박과 연동된 불평등’이었다.

내용적으로 볼 때, ‘좋은 불평등’이었다고 진단한다.

불평등 개념을 ‘하층소득 대비 상층소득의 격차’로 정리하면 불평등의 변동요인을 세분화할 수 있다.

불평등이 증가하는 경우는 3가지다.

① 상층이 오르는 경우, ② 하층이 떨어지는 경우, ③ 중간층이 얇아지는 경우다.

불평등이 줄어드는 경우도 3가지다. ④ 상층이 가라앉는 경우, ⑤ 하층이 오르는 경우, ⑥ 중간층이 두터워지는 경우다.

중국의 2001년 WTO 가입 이후, 한국경제 불평등의 증가는 대중 수출의 급증이 한국 대기업 노동자의 성과급 상승으로 연결된 경우다.

즉, ① 상층소득이 오른 경우였다. 물론, 중국에 대한 수출 대박 덕분에 수출, 투자, 고용도 모두 증가했다. ‘좋은 불평등’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다.

반대로, 좋은 불평등이 있으면, 나쁜 평등도 있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다. 그 해 2008년 9월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다.

금융위기 이후 한국경제 불평등은 오히려 줄어든다. 경제위기가 터졌는데, 왜 불평등이 줄었을까?

그 이유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선진국발 경제위기’였기에 세계 교역량 축소로 연결됐기 때문이다.

세계 교역량이 축소되자 한국 수출이 줄어든다. 이 경우, ④ 상층이 가라앉은 경우다. 2008년~2011년의 기간 동안 한국경제 불평등은 오히려 축소된다.

즉, 수출이 대박이 나면 한국경제 불평등은 증가한다.

수출이 작살나면 한국경제 불평등은 축소된다.

2015년을 최정점으로 불평등이 최근까지 줄어드는 것도 같은 이유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14년 시진핑에 의해 ‘신창타이(新常態)’가 선언된다.

신창타이는 ‘중국판 뉴노멀’이었다. 신창타이 이후, 중국은 산업구조 고도화, 중간재의 국산화, 무역의존도 축소 정책을 추진한다.

이후 한국의 대중 수출액이 급감한다. 동시에 부산-울산-경남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 제조업의 위기가 발생하고, 동시에 불평등이 줄어든다.

즉, 대중국 수출 급감 → 한국의 제조업 위기 → 한국의 불평등 축소는 같은 원인의 다른 현상이었다. 이 경우 역시도 ‘나쁜 평등’에 해당한다.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제무역이 축소되고 수출이 줄어들면 한국경제 불평등도 줄어든다. 국제무역이 개선되고 수출이 증가하면 한국경제 불평등도 증가한다. 2008~2010년 기간 동안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한국경제 불평등이 줄었던 이유다.”

―6장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불평등은 왜 축소됐는가>, 112쪽

2018년 소득주소성장 정책,

30년치 연평균 취업자 증가의 1/4 수준 쇼크

《좋은 불평등》은 총 6부로 구성되어 있다.

1~3부의 전반부는 1994년 변곡점, 2008년 변곡점, 2015년 변곡점을 중심으로 한국경제, 세계경제, 중국경제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서 작동했는지 설명한다.

책의 후반부인 4~5부는 문재인 정부가 추진했던 소득주도성장론의 문제점을 집중 분석한다. 특히 최저임금 1만 원을 중심으로 취지, 집행, 결과를 데이터에 근거해서 다룬다.

2018년 최저임금 인상의 문제점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1990~2020년의 30년치 취업자 증감 수치를 보여준다.

경제위기가 있던 4개년도를 제외하면 취업자 증가 규모는 연평균 40만 명이었다.

그런데 최저임금을 16.4% 인상했던 2018년에는 취업자가 9.7만 명 증가했다.

즉, 30년간 연평균 증가 규모와 비교하면, 4분의 1로 쪼그라든 것이다. 30년치 취업자 증감 수치를 보면, 2018년에 9.7만 명의 취업자 증가는 ‘경제위기 수준의’ 고용 쇼크임을 알게 된다.

《좋은 불평등》의 특징은 데이터에 근거해서 실제 결과를 보여주되 한 걸음 더 들어간다는 점이다.

저자 최병천은 정책 실패의 ‘원인의 원인’을 추적한다.

2018년 최저임금의 급진적 인상이 불평등 확대로 귀결됐다.

최저임금의 급진적 인상은 왜 불평등 확대로 귀결됐을까? 3가지 원인을 지적한다. 첫째, 임금 불평등과 소득 불평등이 서로 상충관계일 수 있음을 몰랐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으로 저임금노동자가 노동시장에서 퇴출되면 저임금노동자는 ‘노동자 집계’에서도 퇴출되고, 임금 불평등 집계에서도 퇴출된다.

그래서 임금 불평등도 줄어들고, 저임금노동자 비율도 줄어든다. 하지만 퇴출된 저임금노동자는 가구소득에서는 집계된다.

가구소득 불평등은 오히려 커지는 이유다. 둘째, 누가 ‘진짜 하층’인지 몰랐다.

진짜 하층은 ‘65세 이상 노인’이다. 셋째, 저임금노동자의 실체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저임금노동자는 소규모-저부가가치 사업장 종사자다. 저임금이어서 저부가가치 사업장인 것이 아니라, 저부가가치 사업장이어서 저임금인 것이다.

《좋은 불평등》은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들어간다.

‘불평등과 계급의 관계’를 재구성한다. 4개의 불평등, 4개의 계급, 4개의 관점을 연동하여 제시한다.

4개의 불평등이란 ① 자본-노동 불평등, ② 자본-자본 불평등, ③ 노동-노동 불평등, ④ 노동-비노동 불평등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비노동 불평등이다. 비노동이야말로 ‘노동자조차도 되지 못하는’ 하층의 진짜 실체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누구인가? 65세 이상 노인들이다.

좋은 불평등, 좋은 평등, 나쁜 불평등, 나쁜 평등

고용-성장과의 관계에서 입체적 사고 필요

《좋은 불평등》은 “경제성장 좋은 놈, 불평등 나쁜 놈, 무찌르자 불평등” 등의 1차 방정식적 사고를 통렬히 깨부순다.

책 전체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불평등에 관한 그간의 통념이 ‘진영론’에 갇혀 있던 사고임을 폭로한다.

실제 한국경제 현실에서는 좋은 불평등, 좋은 평등, 나쁜 불평등, 나쁜 평등의 4가지 경우 모두가 작동하고 있음을 데이터와 사례를 통해 풍부하게 보여준다.

《좋은 불평등》의 논리를 쭉 따라가면, ‘불평등 담론’ 자체가 해체되는 것을 알게 된다. 불평등 축소가 절대선이 아니고, 불평등 확대가 절대악이 아님을 알게 된다.

불평등은 그 자체로 절대적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과 경제성장의 관계, 불평등과 고용의 관계, 약자의 처우개선 여부에 의해서 ‘좋은 불평등’과 ‘나쁜 불평등’이 갈라질 수 있다.

불평등에 대한 선악 이분법적 접근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불평등, 경제성장, 고용, 투자, 수출 등의 경제지표를 종합적이고, 균형 있게 사고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좋은 불평등》이 강조하는 대안의 방향은 ‘환경변화’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재적응’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글로벌 자본주의의 지난 70년을 돌아보고 향후 30년을 전망한다. 이러한 전망 속에 3가지 정책 방향을 제시한다. ① 경쟁력 강화, ② 계층 사다리, ③ 하층을 끌어올리는 불평등 완화다. 이 중에서 하층을 끌어올리는 불평등 완화의 핵심은 ‘초고령화 대책’이다.

《좋은 불평등》은 여기서도 초고령화 정책을 수립함에 있어서 한국적 특수성 3가지를 강조한다.

① 세계에서 가장 빠른 초고령화 속도, ② 소득 보장과 생존의 4가지 결합 방식, ③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의 균형이다. 이 중에서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의 균형은 윤석열 정부의 주요 현안과도 연결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에 기초연금을 현행 30만 원에서 40만 원으로 인상한다고 공약했다.

문제는 현재 국민연금 수급자의 평균 급여액 분포 비율이다.

20만 원 미만(18.9%), 20~40만 원(44.3%), 40~60만 원(17.8%), 60~80만 원(7.9%), 80~100만 원(4.6%), 100~130만 원(4.1%), 130만 원 이상(2.3%) 순이다.

현재 국민연금은 40만 원 미만 수급자가 총 63.2%이고, 40만 원 이상 수급자는 총 36.9%다.

내 돈으로 보험료를 내는 국민연금 급여액도 40만 원 미만자가 대부분인데,

내가 직접적으로 보험료를 내지 않는 기초연금도 40만 원을 받게 된다.

국민연금 가입자 입장에서 불만을 품게 되거나 국민연금 가입에 소극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크다.

현행 기초연금은 ‘하위 70%’에게 지급된다.

문제는 하위 70%의 소득 수준이 상당히 높다는 점이다.

2022년 현재 65세 이상 부부 가구 기준금액은 288만 원이다.

《좋은 불평등》은 현행 ‘하위 70%’ 지급방식을 ‘정액제’로 변경할 것을 제안한다. 즉, 지급대상 기준을 현행 부부가구 288만 원으로 동결하고, 나머지는 물가 인상분만큼만 반영한다.

이 경우, 최대 장점은 재정 절감 및 후세대에게 급진적 증세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다.

복지는 하방 경직성이 강한 분야이기 때문에 한번 올리면 나중에 내리기가 쉽지 않다.

이렇게 생긴 재원 절감분을 75세 이상의 하층 노인에게 ‘보충연금’으로 지급하자고 제안한다.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의 균형도 달성하고, 빈곤율도 줄이고, 불평등도 완화하고, 후세대의 과도한 증세 부담도 완화하는 대책이다.

팩트와 정책의 힘으로,

‘진영론’에 갇힌 불평등 통념을 과감하게 전복하다

민주당의 대표적인 정책통인 최병천이 쓴《좋은 불평등》은 정책과 데이터를 중심으로 진영론에 갇히지 않고, 진영과 진영을 자유자재로 뛰어넘는다.

북방외교와 어르신 빈곤 정책에서는 노태우 정부와 박근혜 정부를 칭찬한다.

최저임금 1만 원의 부정적 결과에 대해서는 문재인 정부에 비판적 평가를 한다.

1992년 이후 대구 섬유산업과 부산 신발산업이 사라진 것에 대해서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책임이 아니었다고 해명한다.

2003년 취임한 노무현 정부 시절의 불평등 증가는 ‘대기업의 수출 대박’ 때문에 발생한 좋은 불평등이었기에, 당시 민주노동당 등 진보세력의 비판이 잘못된 비판이었다고 재반박한다.

대학 교수와 지식인들조차 진영론에 줄 서며, 오히려 ‘내로남불’이 표준이 된 시대, 110개의 데이터로 무장한《좋은 불평등》은 이중 삼중으로 우리의 통념을 뒤집는다.

불평등에 관한 그간의 통념을 통째로 뒤집고, 진영론적 사고에 갇혀 있던 정치적 통념 역시 뒤집어버린다. 팩트와 정책의 힘으로.<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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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줄 서평]제프 크로커의 ‘기본소득과 주권화폐’

기본소득론과 주권화폐론을 결합한 ‘기본소득과 주권화폐'(제프 크로커)을 소개합니다.

저자 제프 크로커는 기본소득포럼(Basic Income Forum)의 편집자입니다. 그는 경제학을 전공하고 기술전략 컨설팅 부문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는 기술이 어떻게 경제의 근본적 변화를 불러왔는가를, 특히 총 유효수요 위축의 측면에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다수의 기본소득론자가 기업과 부자에 대한 증세나 로봇세 등 새로운 과세를 주장합니다. 이에 비해 크로커는 주권화폐(Sovereign Money)를 기본소득 재원으로 삼자고 주장합니다.

10줄 요약

1.세계 경제는 일자리 및 근로소득 감소, 긴축정책, 과도한 부채, 빈곤, 불평등, 환경적 폐해 등 온갖 악재를 한꺼번에 맞이했다.

일자리 감소와 심극한 양극화의 늪에 빠진 현 경제 체제를 대체할 진정한 대안을 요구한다.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고와 경제 시스템의 재설계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2.2007년 금융위기를 은행의 사악함이나 규제 불완전때문이라는 진단은 틀렸다. 세계 금융위기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채에 의해 시작되었다. 즉, 반복적으로 가계 부채 및 정부 부채를 발생시켜서 은행 파산과 경제 위기를 야기했다. 그 결과 정부에 긴축 정책을 강요하여 사회의 저소득층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줄였다.

3.근로 소득자 대부분은 소비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벌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근로 소득을 비근로 소득으로 보충해야 한다. 실제 비근로 소득은 연금, 복지 혜택, 배당금, 가계 대출의 형태로 크게 늘어났다.

가계 대출의 일부를 기본소득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가계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부채를 질 필요가 없다.

4.기본소득을 뒷받침하는 재원은 주권화폐 발행을 통해 조달해야 한다. 주권화폐란 즉 기본소득과 중앙 정부 및 지방 정부의 지출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국가가 직접 발행한 화폐다. 따라서 ‘적자’로 기록되지도 않고 부채를 불러오지도 않는 화폐다.

5.기본소득과 주권화폐는 그동안 각각 분리된 운동으로서 제기되어 왔다.

기본소득은 소득, 나이, 직업 등과 상관없이 국민 모두에게 균등액을 배당하는 것이다. 2007년 세계 금융위기이후 극심한 양극화현상, 정보화로 인한 일자리 급감 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서 인기가 급상승했다.

6.주권화폐는 기본소득과 관련없이 현대통화이론(Modern Monetary Theory)진영에서 논의되어왔다. 현대통화이론은 균형재정론을 배격하고 정부가 적극적으로 적자재정을 통해 실업문제 등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화폐에 주권(Sovereign)이라는 말을 붙인 까닭은 중앙정부가 민간은행이 갖고 있는 신용 화폐 발행 기능을 회수하여 중앙정부만이 행사한다는 의미에서다.

현재 금융시스템은 중앙은행이 본원통화를 발행하면 민간 은행이 지준금을 바탕으로 신용화폐를 발행하여 유통시키는 방식이다.

7.기본소득은 재원 마련의 문제에서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일반적으로 기본소득의 주창자들은 그 재원을 세금 인상으로 충당할 것을 주장한다.

제프 크로커는 세금을 재원으로 했을 경우에는 기술 혁신에서 기인하는 근로 소득의 상대적 위축과 유효수요 부족을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

8.크로커는 주권화폐를 유효수요 타개의 측면에서 주장한다. 이 점은 기존의 주권화폐론과 다르다.

본래 주권화폐론은 주로 현재의 상업은행에 의한 신용화폐의 창조가 갖는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차원에서 제기되었다. 상업은행의 신용 창조가 빈번하게 부채 누적과 경제 거품을 야기해왔다는 문제 의식이 주권화폐 발행의 주된 근거였다.

9.크로커는 케인스주의 전통을 잇고 있다. 기본소득과 주권화폐의 제도적 결합론을 통해 유효수요 부족의 타개에 정책초점을 맞추고 있기때문이다. 또 정부 적자는 다른 부문의 잉여에 의해서 상쇄된다는 현대화폐론자의 주장을 수용한다.

10.민간 소비 지출이든 정부 지출이든 모든 지출에 대해 남아 있는 제약은 완전 잠재 산출 GDP다. 따라서 크로커는 주권화폐가 한 나라 경제의 잠재 산출 능력을 초과해 발행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 생산할 수 있는 정도만 소비한다는 것이 확실한 진실이다.’(아담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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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누구보다 오래 버텼고, 시대의 변화에 적응했다.

엘리자베스 2세는 격동의 시대를 보냈다. 그녀는 1952년부터 2022년까지 영국과 영연방(53개의 주권 국가)의 수장이었다. 그녀는 그 어느 영국 군주보다 더 오래 통치한 여왕이고, 윈스턴 처칠에서 보리스 존슨까지 14명의 총리와 함께 했다. 그녀가 왕위에 올랐을 때, 영국 군주제의 미래는 예측할 수 없었다. 여왕은 군주제의 필요를 새롭게 정립하면서, 세계, 국가, 가족에 마주한 위기와 변화를 견뎌냈다.

엘리자베스가 즉위할 당시 윈스턴 처칠 , 요제프 스탈린 ,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등 강력한 정치지도자들이 세계를 이끌고 있었다. 70년 동안 왕좌를 지키면서 엘리자베스는 그들보다 오래 버텼고, 20세기 역사의 상징이 되었다. 2002년 50주년이 되는 해, 그녀는 “변화는 피할 수 없다. 그 변화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우리의 미래를 정해진다”고 말한다.

대중 미디어 시대, 여왕과 대중의 경계를 허물다.

1953년 6월 2일, 웨스트민터에서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이 진행되었다. 엘리자베스는 TV로 생중계되는 것을 처음엔 거부했지만, ‘클로즈업이 없는’조건으로 받아들였다. 약 2천 5백만명의 영국인들이 TV를 시청했고, TV가 대중매체로 자리잡게 된다. 대관식이후 언론에 대한 여왕의 태도는 달라졌다. 대관식이후 여왕은 TV 시청자가 되었고, 1960년 버킹엄 궁전에만 50개의 TV세트가 있었다. 1969년에는 왕실을 인간적으로 표현한 다큐멘터리가 제작됩니다. 왕실의 일상을 보여주기 위한 아이디어였다. 

대중매체를 통해 왕실을 홍보하는 방법은 1981년 7월 29일, 찰스와 다이애나의 이른바 ‘세기의 결혼식’에서 절정을 이룬다. 결혼식을 보기 위해 6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 50개국에 생중계로 결혼식이 중계돼 8억명에 달하는 사람이 이를 지켜봤다. 인터넷 시대가 되자 홍보전문가를 채용하여 스마트 폰과 소셜 미디어를 위한 대중적 이미지를 만든다.대중매체와 가까워진 왕실은 대중의 관심을 얻었지만, 타블로이드와 파파라치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

영연방을 만들어 제국의 체면을 유지하다.

대영제국의 전성기에는 4명 중 1명이 영국인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즉위했을때 영국은 해외에 70개 이상의 영토를 차지했다. 그렇지만 그녀가 물려받은 것은 위기에 처한 제국이다. 이미 대영제국은 몰락했고, 그 어려운 상황에서 엘리자베스는 영연방으로 재편하기 위해 노력한다. 여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인, 1947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평생 영연방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발표했다. 1952년 즉위 후 각국을 방문하며 연방의 유지를 위해 노력해 왔다. 그녀는 1953년에 “영연방은 우정, 충성, 자유와 평화에 대한 열망 위에 세워진 완전히 새로운 개념입니다. 국가와 인종의 평등한 동반자 관계라는 새로운 개념에 나는 내 삶의 날마다 마음과 영혼을 바칠 것입니다.”고 맹세했다.

그녀는 영연방의 상징이자 그 자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강력한 구심력을 행사해 왔다. 영연방은 영국과 영국의 식민지였던 독립국 56개국으로 구성된 느슨한 형태의 연합체로, 영국 국왕이 국가 수장을 맡는 나라는 영국을 포함해 15개국에 달한다. 엘리자베스 2세가 서거하면서 과거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은 국가들의 연합체인 영연방은 다시 위기를 맞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이후?

영연방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로 거대한 전환의 시기에 마주했다. 식민국 클럽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영연방은 이제 위태롭다. 여왕이라는 구심점이 사라진 후, 영연방을 떠나는 나라들이 나타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여왕의 서거로 지금의 군주제가 끝을 향할 수도 있다. 영국 왕실 권위를 축소해 북유럽 왕실처럼 바꾸자는 여론이 등장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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