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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의 날, 1492년 10월 12일 신대륙에 도착하다.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는 스페인에서 3척의 소형 배로 출항했다 1492년 10월 12일 콜럼버스의 함대는 아시아라고 믿었던 바하마제도에 상륙했다.콜롬버스는 그들과의 해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들은 소유한 모든 것을 기꺼이 교환했다 … 그들은 좋은 몸을 가지고 있었다…그들은 훌륭한 종이 될 것이다. … 50명으로 우리는 그들을 모두 정복하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할 수 있다.”

신대륙을 “발견”한지 500여년이 지난 후 매년 10월 두 번째 월요일이 ‘콜럼버스의 날’로 명명되어 미국 연방 공휴일로 지정됩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콜럼버스의 날’ 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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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슬옹, 한글의 기원

곧 한글 창제 576돌을 맞는다. 왜 굳이 세종은 한글을 만들었을까? 목적 또는 의도를 가지고 문자를 창제한 것은 유일한 사례인듯 하다. 도대체 그를 움직인 꿈은 무엇이었을까?

김슬옹원장은 ‘누구나 평등하게 지식과 정보를 나누라는 것’ 한다. 과학적 원리 뿐만 아니라 이런 철학도 한글의 큰 의미이다. 브라질출신 카를로스 고리토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문자는 글을 만들고, 글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나라를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한글은 많은 한국인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지도자가 공동선(common good)추구했기에, 한국인들은 더 포용적이고 현명한 나라를 만들수 있었습니다. [세계인을 위한 한글이야기]에서 인용.

김슬옹은 그런 세종 그리고, 주시경과 최현배 선생의 삶을 잇고 싶었다. 그는 77년 고1 때 한글운동 뛰어들었다. 그가 한글 운동에 직접 나선 계기는 신문의 한글 홀대였다. 70년대만 해도 조사와 순우리말 빼곤 신문이 온통 한자였다. 한글로 만들어진 신문은 누구나 읽을 수 있었고, 정보와 지식는 널리 공유되었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요체가 아닐까?

그의 가장 큰 소망은 대학에서 해례본을 처음부터 끝까지 가르치는 것이다. 해례본을 현대문으로 옮기고 해제까지 썼다. 이제 해례본 역주서를 낼 계획이라고 한다. 역주는 번역에 대한 책임이라고 한다. 지치고 힘들 때도 분명 있었겠지만, 그래도 그는 긍정적이다. 북토크에서도 마치 연극배우 처럼 한글을 공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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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영국 파운드화 위기

1973년, 오일쇼크가 시작된다. 혼란한 중동전쟁 중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석유의 무기화’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단지 판매가격을 올려버렸을 뿐만 아니라 원유 생산량도 감산했다. 이에 석유관련 제품의 가격은 올라가고, 제품생산은 축소되는 공급쇼크가 온다.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가 동시에 일어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 시대가 시작한다.

스태그플레이션의 난감함은 정책의 딜레마때문이다. 물가를 잡기 위해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리고 돈줄을 조이면, 경기침체가 온다. 반대로 경기회복을 위해 중앙은행이 돈줄을 풀면 인플레이션을 유발한다. 최악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최선이 아니라 차선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한편 브레튼우즈 국제통화체제도 1973년에 종료한다. 1944년에 44개국이 합의한 브레튼우즈체제는 필요에 따라 ‘조정가능한 고정환율제’를 채택한다. 미국과 영국은 금과 자국통화의 교환비율을 정하고, 다른 나라는 미국의 달러 또는 영국의 파운드화를 기준으로 환율을 정한다. 곧 간접적 형태의 금태환제도가 도입된다. 그러나 브레튼우즈 체제의 종료로 이제 각나라의 통화가 금이나 달러에 고정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곧 각나라의 화폐에가격이 매겨져, 거래하는 시장이 만들어진다. 이제 시장의 판단에 따라 가격은 변동성은 확대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시장상황에서도 1974년 집권한 영국 노동당 정부는 공약을 지키기 위해 공공지출을 확대한다.  팽창적인 재정·금융 정책의 시행으로 재정적자와 정부부채가 쌓여간다. 연이어 인플레이션이 심화되고, 다시 인플레이션으로 파운드화의 평가절하가 시작된다. 이에 영국 정부는 무모하게도 파운드화 가치를 방어하기 위해 외환시장에 개입한다. 허나 영국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가 거의 바닥나 실패했다.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명목상으로라도 기축통화의 지위에 있었던 영국은 이제 출렁이는 외환시장의 희생자가 되었다.

1976년 노동당출신의 총리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다. IMF는 스탠바이 차관의 댓가로 공공지출의 대폭적인 삭감을 요구한다. 금리인상과 함께 신용대출을 억제하는 등 통화량을 엄격히 관리한다. 이러한 조처는 새삼스러운 정책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껄그러운 정책을 대신 해주었다고 할 수도 있다.

이는 고통스러운 과정일 수 밖에 없었고, 이른바 불만의 겨울이 시작된다. 1978년 포드 자동차의 파업을 시작으로, 1979년 봄 150만명 참가하는 최대의 총파업이 발생한다. 1979년 총선에서 개혁의 기치를 내건 대처의 보수당이 압승하여 정권을 차지한다.

만약 스스로 IMF 같은 정책을 채택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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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 뿌리 탐구, 권오영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 고고부 소속 학예연구사, 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를 거쳐 한신대학교 한국사학과에서 교수로 근무했으며 부속박물관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부속박물관장을 맡고 있다. 주 연구 분야는 한국 고대의 국가 형성과 사회구조, 무덤과 취락, 유라시아 교류 등에 걸쳐 있다.

백제 왕성인 서울 풍납토성의 발굴 조사를 주도하였으며, 2009년 이후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러시아 연방 내 투바공화국, 베트남 등지의 해외유적 조사를 추진하고 있다. 접기

최근작 : <미래를 여는 한국 고대사>,<토기와 도자기>,<백제를 왜 문화 강국이라고 하나요?> 등

저서 소개_미래를 여는 한국 고대사

국가와 학문의 경계를 넘어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한국 고대사 연구

우리나라의 고대사는 때때로 냉철한 학술적 토론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민족의 우열에 입각한 차별의 논리가 난무하는 장이 되고는 한다.

이 책은 새로운 고대사 연구를 제안하기 위하여 공고한 경계선을 뛰어넘는다. 지리적인 경계를 넘어 고대 한반도가 주변 국가·지역과 끊임없이 접촉하여 긴밀한 관계를 맺었음을 밝히고, 학문적인 경계를 뛰어넘어 고고학과 자연과학을 이용한 역사학 연구의 새 지평을 보인다.

이로써 한국 사회가 타자를 존중하는 통합의 길로 가야 함을, 그리고 역사학 연구가 인접 학문 분야를 적극 활용하는 통섭의 길로 가야 함을 말한다.

저서 소개_삼국 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

대한민국 최고의 명품 강의를 책으로 만난다! 현직 서울대 교수진의 강의를 엄선한 ‘서가명강(서울대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 시리즈의 열두 번째 책이 출간됐다.

역사, 철학, 과학, 의학, 예술 등 각 분야 최고의 서울대 교수진들의 명강의를 책으로 옮긴 서가명강 시리즈는 독자들에게 지식의 확장과 배움의 기쁨을 선사하고 있다.

<삼국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의 저자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권오영 교수는 무수한 발굴 현장을 직접 발로 뛴 한국사 권위자로, JTBC [차이나는 클라스]에 출연해 고대사의 가치와 매력을 대중에게 알리면서 주목받았다. 저자는 유물과 유적을 통해 하남 위례성, 임나일본부설 등 기존의 통설이 뒤집히는 극적인 순간들을 소개하면서 다이나믹한 한국 고대사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 책에서는 한국 고대사의 전반적인 흐름을 통해 역사적 진실을 복원할 뿐만 아니라, 발굴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도 흥미진진하게 펼쳐놓는다.

유물과 유적, 고분과 인골을 통해 반전이 거듭되는 역사의 순간들과 세계로 뻗어 나가는 한국사의 역동적인 여정은 ‘제대로 된 역사’를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 값진 감동을 선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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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훈 ‘지도와 아틀라스한국사’

역사을 좋아한다면 지도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매긴다. 강창훈은 역사에서 지도의 의미를, 지도만들기의 어려움과 미묘함을 이야기했다. 편집자에게 직접 지도이야기를 듣다보니, 지도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고종의 아관파천은 널리 알려졌다. 고종의 경로는, 무엇을 타고 갔고, 얼마나 걸렸을까? 네이버 지도는 말한다. 영추문에서 러시아공사관까지 도보로 약 26분 걸렸다고…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는 이 디테일이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역사를 질문하게 한다. 이런 지적 자극이 역사의 재미이다.

역사적 사건을 지도에 그리다보면, 한반도에 국한 되지 않은 보다 큰 동아시아의 영역과 역사를 바라보게 한다. 청일전쟁의 지도를 보다가, 단지 한반도의 침략이라는 교과서적 해석의 한계를 깨닫는다. 임진왜란이 그랬던 것처럼, 이른바 청일전쟁도 동아시아 전쟁이라른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북토크날 재미있는 질문이 있었다. 한성은 조선 우리의 명칭, 경성은 일제의 강요한 명칭으로 생각하는 타당한가라는 질문이다. 조선실록에도 자주 출몰하는 명칭이 경성인데….

의미있는 제안도 있었다. “아틀라스 한국근현대사”의 출간이라는…. 한국근대사를 풍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도와 사진으로 가득한 아틀라스가 필요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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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독일 통일

분단된 후 45년이 지나고, 1961년 건설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장벽이 무너진 후 통일을 위한 논의가 시작했습니다. 통일 2개월 후 독일 전체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헬무트 콜이 통일 독일의 초대 수상이 되었습니다. 독일의 통일은 냉전의 종식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독일은 통일은 아직 미완이라고 합니다. 국내외 독일 전문가들의 펴낸 <미완의 독일통일 – 독일통일 30년을 돌아보며>는 베를린 장벽 철거 30주년 기념식으로부터 독일 통일의 현재 모습을 되새김질 합니다. 

베를린을 감싸고 있던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은 무너졌지만, 새로운 장벽 곧 ‘머릿속의 장벽’이 세워졌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동서독을 갈라놓고 있는 침묵과 소외의 장벽들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독일의 통일 과정은 서독의 입장에서는 ‘흡수’였고, 동독의 입장에서는 ‘과거의 청산’이었기 때문입니다.

통일로 동독인들은 정치적 기본권을 보장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동독인들은 사회·경제적 기반이 상실된다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동독인들이 서독의 민주주의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동독인들의 이같은 경험은 극우세력인 ‘독일 대안당’에 대한 지지로 표출되고 있습니다. 

동독의 과거 청산은 나치 과거 청산보다도 훨씬 철저하게 수행됐습니다. 100만 명에 달하는 구 동독 공직자들이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일반인에게 슈타지(Stati, 동독 비밀경찰) 문서 열람을 허용했습니다. 그러자 서로를 감시하고 밀고한 과거사가 그대로 노출됐습니다. 그 결과 가족, 친구, 직장 동료들이 서로 의심하고, 갈등하고, 반목하게 됩니다. 동독의 역사를 ‘불법국가’의 역사로 규정함으로써 과거 동독에서 살았던 동독 주민들의 삶 전체가 불법국가 안에서의 불법적인 삶으로 부정당하는 결과를 나타냈습니다

서독이 주도한 통일 독일의 ‘동독 청산’은 특히 경제적 부문에서 강력하게 진행됐고, 이것이 동독인들의 삶을 뿌리부터 흔들었습니다. 종업원 5000명 이상의 대규모 사업장 150개 중 145개가 공중분해 됐습니다. 사회적 교류를 위한 아지트가 문을 닫고, 기차는 종종 지나쳐 갔으며, 버스의 배차 간격은 길어졌고, 동독은 그저 지방도시이며 서독에 의존하고 있다는 감정이 만연하게 되었습니다다.

통일 이후 몇 년 안에 동독은 개인의 삶에 한층 가혹하게 손을 뻗치는 거친 자본주의의 실험 무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처럼 광범위한 경제적 피해와 사회적 배척은 동독인의 경험을 만들었고, 수십만의 사람이 민주주의에 대해 의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서독 마르크를 표준으로 한 화폐통합은 동독 기업의 줄도산과 실업자 양산으로 이어졌습니다. 동독지역의 경제가 한순간에 붕괴하는 파멸적 결과를 낳았습니다. 동독 국유자산의 95%가 서독 자본가들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동독 주민들 사이에는 “이것은 통일이 아니라 점령”이라거나 “통합이 아니라 식민화”라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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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카테니라 대제

위대한 표트르 대제가 1725년 서거합니다. 그가 없는 러시아는 혼돈에 빠져들었고, 왕위는 불안했습니다. 그렇게 흔들리던 러시아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인물이 독일에서 넘어온 ‘이방인’ 예카테리나 2세입니다.

프로이센에서 소피아로 불리던 그녀(1729~1796)는 표트르 3세의 배우자로 지목됩니다. 러시아 황실의 먼친척이었던 어머니의 인연 때문입니다. 1744년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러시아로 향합니다. 황후로 신분이 바뀐 소피아는 러시아정교 세례명 ‘예카테리나’를 이름으로 사용합니다. 1761년 황제로 즉위한 표트르 3세는 허약하고 무능했습니다. 1762년 여름, 예카테리나는 황실 근위대의 도움을 얻어 남편 표트르 3세를 폐위시킵니다. 측천무후처럼 스스로 제위에 올라 예카테리나 2세라고 선포합니다.

179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34년 동안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의 외교와 내치를 이끌었습니다. 표트르 대제 이후 러시아는 여전히 유럽의 변방으로 멈추어 있었습니다. 이에 예카테리나는 모든 정치체계와 행정조직을 개혁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 국가재정은 거의 부도 직전이었습니다. 국가의 모든 부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강한 추진력으로 성직자와 교회의 재산 상당 부분을 국가로 이전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국고는 풍족해졌고, 비로소 큰일을 도모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러시아를 지배하던 교회가 세력을 급격히 상실하여, 예카테니라의 권력이 자연스럽게 강화되었습니다.

예카테리나는 통치 기간 동안 무려 12개 이상의 봉기를 진압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1773년에 푸가초프의 반입니다. 전직 육군 장교인 푸가초프는 그녀의 통치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러시아 군대의 위력에 직면한 푸가초프의 지지자들은 결국 그를 버렸고, 그는 1775년 1월에 체포되어 공개적으로 처형되었습니다.

예카테리나 2세 재위시대인 18세기 유럽에서는 계몽사상과 공화주의에 대한 사상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유행하던 계몽주의에 심취해, 볼테르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교류했습니다. 그녀는  ‘계몽군주’를 꿈꾸었으나 성공적이지는 않았습니다. 1767년 농노와 성직자를 제외한 각계각층 56대표로 구성된 회의체를 도입하나, 2년 후 해산시키게 됩니다. 그녀는 자유농민 제도를 주장하기도 했으나, 결국 농노제를 확대하는 정치적 선언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러시아는 아직 유럽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번영의 군주로 예카테리나는 성공적이었습니다. 18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러시아는 폭발적으로 성장합니다. 러시아 곳곳에 신도시가 개발되고, 29개 주의 지방제도 정비됩니다. 군의 현대화가 진행되고, 국가의 행정 및 법률제도도 안착됩니다. 러시아의 모든 곳에서 ‘새로운 개혁과 건설’의 바람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했습니다. 때로는 러시아의 광대한 관료주의에 발목을 잡히기도 했지만…

오스만트루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마침내 크림반도를 차지하고 흑해 항로를 확보합니다.  예카테리나 치하에서 러시아의 국경은 서쪽과 남쪽으로 확장되어 크리미아와 폴란드 대부분을 지배하게 됩니다. 이제 러시아는 유럽의 강자가 되었습니다. 표트르 대제가 제국 러시아의 초석을 놓았다면, 예카테리나 대제는 제국으로서의 러시아를 완성했습니다.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인을 독일인으로 만들고 싶어했지만, 독일인 예카테리나 대제는 러시아인을 ‘위대한’ 러시아인으로 만들었다.

1796년, 예카테리나 2세는 68세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사망합니다. 그녀의 적들은 추악한 결말을 바랬지만, 예카테리나는 여전히 ‘러시아의 자긍심’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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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잡은 패션이다

히잡은 무슬림 여성이 머리카락, 목, 어깨 등의 신체 부위를 가리기 위해 착용하는 복장이다. 영어권에서는 흔히 베일이라고 하는데,《코란》에도 등장하듯이 여성의 몸을 외부와 분리한다는 의미를 가졌다. 대다수 외부 관찰자는 히잡이 남성 중심적 교리를 강제하는 수단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인도네시아 무슬림 여성에게 히잡은 패션이다. 인도네시아를 오랫동안 관찰한 김형준 교수는 처음에는 히잡(hijab) 쓴 여성을 볼 때마다 엄청나게 더울 텐데?’ 라고 느꼈다고 한다. 가까이 무슬림 여성을 지켜본 후, 그는 희잡이 무슬림 여성의 ‘미’라는 걸 깨닫게 된다. 2000년대 들어 연예인 사이에서 히잡이 유행하면서, 히잡은 유행을 따르는 패션이 된다. 히잡과 일상복의 결합이 확대되면서 이를 지칭하는 ‘히잡 가울’ 즉 ‘젊은 여성이 친구와 함께 외출할 때 착용하는 복장’이라는 의미의 신조어도 등장했다. 어느 사이 인도네시아 무슬림 여성은 히잡을 패션으로 만들어 버렸다.

히잡은 이슬람 사회의 변화와 함께 한다. 전통사회에서 히잡은 그저 일상일 뿐이었다. 전통사회가 무너지면서, 히잡은 여성의 진보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선고되기도 했다. 터키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는 여성참정권을 부여하고, 공공장소에서 히잡 착용금지 정책도 시행했다. 서구 제국주의에 의한 ‘히잡 벗기기’가 시작되자, 히잡은 이슬람의 핵심 상징으로 부상한다. 이렇게 히잡은 기존 질서에 대한 굴복이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이슬람을 하나의 모습을 가진 종교로, 무슬림 사회를 전근대적인, 동일한 특성을 가진 사회로 바라보려는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히잡 쓰기와 벗기에는 무슬림 여성이 직면한 다양한 현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응과 타협의 과정이 있다.

역사적 맥락에서 인도네시아 무슬림 여성에게 히잡패션과 이슬람의 공존은 자연스럽다. 이들은 자신의 상황과 성향에 맞게 종교와 아름다움을 추구핟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히잡 쓰든, 안쓰든 자유이다” 그저 히잡은 패션이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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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윤경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심윤경작가의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는 그녀 작품세계의 한단계의 획을 긋는 것이다.

그녀의 소설 곳곳에 할머니가 있었고, 북토크에서 그녀 이야기를 듣다보면 할머니를 더욱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두가지 서로 다른 사랑을 받았다. 폭풍우 같은 변사또의 사랑이 있었다. 반면 할머니에게서 받은 사랑은 ‘사람이 주는 평화’ 였다고 말한다

할머니가 평생 한 말들의 대부분은 ‘그려, 안뒤야, 뒤얐어, 몰러, 워쩌’ 라는 다섯 마디 뿐이었다. 그런데 그걸로 충분했다. 아래 사진 속 할머니는 오은영 박사보다 더 강력한 듯 하다. 우리 모두 할머니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지 묻고 답하는 것이 이날의 분위기였다.

옥인동 높은 곳에 자리잡은 집에서 출발해서 역사책방 앞길을 따라 경복궁까지 갔던 길이 할머니와 손녀의 산책코스였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책방에서의 북토크는 좀 더 특별했다고..

글을 쓴지 이제 20년이 된 그녀는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이후 새로운 작품활동을 한다고 한다고 한다. 그녀가 겪었던 난독증에 관한 것이라고….살짝 힌트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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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9월 20일 무굴제국 멸망하다.

1526년 세워진 무굴제국은 20대 332년이 지난 1858년 9월 8일, 바하두르 샤 2세를 마지막으로 멸망했다.

티무르의 5대 손인 바부르(1483~1530)는 1526년 파니파트 싸움에서 승리하여 무굴 왕국을 세운다. 그의 손주인 악바르 대제(1556~1605)는 이슬람 왕조를 타도하고, 벵골까지 지배하면서 무굴”제국”을 완성한다. 비이슬람교도를 껴안게 된 악바르는 이슬람법상 이교도에게 부과하던 지즈야(인두세)를 폐지하는 등 제국의 중앙집권체제를 정비한다. 이후 약 100여 년 동안 무굴제국은 전성기를 보내고, 17세기 말 쇠퇴하기 시작한다.

마지막 황제 바하두르 샤 2세(1775~1862)는 1857년 세포이 항쟁을 지원했다가 권좌에서 쫓겨났다. 영국의 지배에 대해 항거한 지도자로 인도나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에서 여전히 추앙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