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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4월 6일, 오스카 와일드 체포

오스카 와일드는 퀸즈베리 후작과 명예훼손 소송에서 패소한 후 체포됩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1891년부터 후작의 아들과 연인이었고, 후작이 그를 동성애자라고 비난하자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습니다. 그러나 동성애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제출되어 패소합니다. 동성애는 당시 영국에서 범죄로 여겨졌습니다. 와일드는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2년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습니다.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은 와일드는 영국 옥스포드에 입학하여 1878년에 우등으로 졸업했습니다. 재치와 현란한 스타일,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하여 주목을 받았습니다. 와일드는 결혼하여 두 자녀를 낳았고 1888년에 동화 행복한 왕자를 썼습니다. 1890년 그의 유일한 소설인 <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 연재되어 이듬해 책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1891년에 그의 첫 희곡인 파도바 공작부인을 썼고 체포되기 전에 5편을 더 썼습니다. 

와일드는 1897년에 감옥에서 풀려나 바로 파리로 도망가듯 정착합니다. 그는 감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수인번호 ‘C. 3. 3.’로 <레딩 감옥의 노래>를 발표합니다. 생의 쾌락을 찬미하던 오스카 와일드는 냉혹한 감옥에서 얻은 깨달음과 따뜻한 연민을 이야기하여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1900년 급성 뇌수막염으로 사망합니다.

사후 거의 백 년이 지난 1998년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오스카 와일드와의 대화’라는 제명의 동상이 세워집니다. 이제 동성애자들이 추앙하는 예술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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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밀라 팡,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과하지 말것

저자 카밀라 팡은 어린 나이에 자폐스펙트럼장애를 진단받고, 오랜시간 ADHD, 강박장애 등 온갖 장애와 함께 살아온 과학자입니다. 그녀는 주위의 세상을 이해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답답한 마음에 어머니에게 ‘인간을 위한 지침서’가 있는지 물어보기도 합니다.

일곱 살 때 그녀는 삼촌의 과학책들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어디에도 없던 정확하고 구체적인 정보들이 그 속에 가득하여, 마치 잠겨있던 압력 밸브가 풀린 것 같았습니다. 그녀를 가장 혼란에 빠뜨렸던 것, 즉 타인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무언가를 생애 처음으로 찾았습니다. 세상이 보여주기를 거부했던 확실성을 찾아 끝없이 헤매온 그녀에게, 과학은 충실한 조력자이자 가장 진실한 친구였습니다. 과학은 현재 그녀가 세상을 보는 렌즈를 마련해주었고, 인간들을 탐험하면서 부딪힌 가장 불가사의한 인간 행동들을 많은 부분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녀의 첫 저서인 ‘인간에 대한 설명서(Explaining Humans)’는 그녀가 지금까지 과학적 직업을 통해 배운 교훈을 인간세상을 탐색합니다. 예를 들어 어떻게 인간의 신체에 있는 각기 다른 단백질들이 사회 집단에서 다른 역할을 반영할 수 있는지, 어떻게 빛이 프리즘을 통해 굴절되는지 등을 통해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두려움을 극복합니다. 그리고 과학을 통해 공감, 이해, 신뢰와 같은 불가사의한 감정을 느낍니다. 그녀는 ‘내가 할 수 있다면 당신도 할 수 있다’며 누구나 자기 자신으로서 타인과 연결될 권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괴상한 칵테일처럼 뒤섞인 이른바 ‘신경다양성’이 축복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신경다양성은 빠르고 효율적으로 문제를 완벽하게 분석하는 정신적 도구가 되어 그녀를 무장시켜주었다고 합니다.

이제 그녀는 말합니다. 자폐스펙트럼장애를 가졌다는 것은 세상을 다르게, 편견 없이 본다는 뜻이었다고…. 불안과 ADHD는 그녀가 ‘스카이콩콩’을 타듯 지루함과 강력한 집중 상태를 넘나들면서 오히려 빠르게 정보를 처리하게 해주었다고… 또한 그녀가 처한 각각의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온갖 결과를 머릿속으로 그려보게 해주었다고…

그녀의 신경다양성은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와 관련된 질문을 수없이 만들어냈습니다. 동시에 그 질문들에 답할 능력도 주었다고 말합니다. 본래 야스퍼거 증후군을 가진 이는 공감을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녀가 공감을 경험하기 시작한 후, 공감은 거의 마약과도 같았다고 합니다. 그녀가 공감을 경험하는 방식은 물론 특별합니다. 마치 삼각함수를 푸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상대편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관찰하고, 익숙한 과학 개념으로 인간 문제 사이의 연결 고리도 풀어내려고 탐구합니다. 그러다 불현듯 느끼는 공감의 순간이 그녀를 살아가게 합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사과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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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시대 여자의 삶은?

1. 그들은 젊어서 죽지 않았다.

19세기 영국에서 사람들은 평균 연령이 40세에 불과했습니다. 다만그 숫유아와 어린이들은 오늘날보다 훨씬 더 높은 비율로 질병, 영양실조 및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소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는다면 50세, 60세, 70세 또는 그 이상의 노년까지 살 확률은 꽤 높습니다. 이러한 확률은 세기가 진행되고 위생, 영양 및 의료의 개선으로 빅토리아 시대의 수명이 연장됨에 따라 증가했습니다.

2. 그들은 젊은 나이에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18세기 말 초혼의 평균 연령은 남자 28세, 여자 26세였다. 19세기 동안 영국 여성의 평균 연령은 떨어졌지만 22세 미만으로 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패턴은 사회 및 경제 계층에 따라 달랐습니다. 물론 노동 계급 여성은 귀족보다 약간 나이가 많은 결혼 경향이 있었습니다. . 그러나 모든 영국 여성들은 십대를 떠나기 전에 결혼한다는 널리 퍼진 현대적인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3. 그들은 사촌과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1800년대 초반에는 사촌과 결혼하는 것이 완벽하게 허용되었으며 그 관행은 확실히 몇 가지 이점을 제공했습니다. 부와 재산이 같은 집안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더 높았고 젊은 여성이 가족 내에서 총각과 만나고 구애받기가 더 쉬웠습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에 사촌 간의 결혼이 덜 일반적이 되었습니다. 철도의 성장과 기타 광범위한 경제 발전으로 인한 이동성 증가는 젊은 여성의 장래 남편의 범위를 크게 넓혔습니다. 한편 빅토리아 시대에는 친척들 사이에서 생식과 관련된 선천적 결함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사촌 결혼은 상류층 사이에서 여전히 인기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왕자는 사촌이었습니다.

4. 그들은 꽉 끼는 코르셋을 입지 않았습니다.

하녀가 만들 수 있을 만큼 꽉 조이는 코르셋으로 몸을 묶는 젊은 여성의 대중적인 이미지는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고래뼈와 리본을 조심스럽게 적용해야만 얻을 수 있는 작은 허리를 강조하는 패션이 등장했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은 소파에 기절할 정도가 아닌 건강한 양의 적당한 양으로 매일 코르셋을 착용했습니다. 또한 그 당시 코르셋은 단순히 패션의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코르셋은 건강하고 좋은 자세를 장려하고 내부 장기를 적절한 정렬 상태로 유지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허리를 가늘게 하기 위해 갈비뼈를 제거하는 극단적인 관행은 빅토리아 시대에 번성했다는 소문이 돌지 않았을 뿐입니다.

5. 그들은 분홍색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성별에 따른 색상에 대한 오늘날의 접근 방식은 19세기의 색상을 혼동하고 아마도 즐겁게 할 것입니다. 흰색은 주로 흰색 옷과 기저귀가 표백될 수 있기 때문에 약 6~7세가 될 때까지 모든 성별의 아기와 어린이가 선호하는 색상이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아이들은 어른들이 입던 색보다 옅은 색으로 옷을 입었습니다. 빨간색은 강하고 남성적이며 남성적인 색조로 간주되었으며 파란색은 우아하고 섬세하며 여성스러운 색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소년들은 분홍색으로 더 자주 보였고 어린 소녀들은 옅은 파란색을 선호했습니다. 20세기 초, 아마도 194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분홍색이 여자아이에게, 파란색이 남자아이에게 보편적으로 할당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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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2년 4월 5일, 이스터섬 발견

네덜란드 해국제독이 신비로운 섬, 이스터를 발견한 이후 흥미로운 역사논쟁은 지금까지도 계속됩니다.

이스터섬에는 오직 동굴과 정착지의 고고학적 증거, 그리고 세대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는 희미한 기억만 있습니다. 그래도 카누를 만들기 위해 섬에서 나무가 체계적으로 베어졌다는 것, 농업이 무너지고 마을이 버려져 아마도 수천 명의 섬 주민들이 굶어 죽었다는 것은 사실에 가깝습니다. 1722년에 상륙한 네덜란드 선박 곧 유럽인과의 첫 접촉으로 새로운 질병에 감염되어 수천 명이 더 사망했을 수 있습니다.

50년 후 스페인이 1770년에 도착했을 때 섬의 오래된 문명은 거의 파괴된 상태였습니다.이스터섬을 유명하게 만든 모아이 석상은 이미 무너졌습니다. 1866년에 로마 카톨릭 사제들은 섬에 작은 선교부를 세웠고 몇몇 현지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습니다. 프랑스정부를 대리하는 사람이 한동안 섬을 통치 하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1888년에 이스터 섬은 칠레에 합병되어, 국유지 양목장으로, 현재는 관광상지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칠레로부터의 독립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고 있지만 그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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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T빅뱅과 인공지능 진화 전망

챗GPT와 인공지능 생태계

특히 GPT를 개발한 오픈에이아이의 비즈니스모델이 흥미롭습니다. 누구나 쉽게 또 저렴하게 자신이 원하는 서비스에 붙여 GPT의 막강한 알고리즘을 사용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GPT API를 활용한 다양한 서비스가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마치 PC통신 등장했을 때, 인터넷이 대중화되시 시작했을 때와 유사합니다.

IT기자클럽은 GPT 빅뱅을 맞아 인공지능 생태계의 진화 방향과 그 임팩트를 점검하는 포럼을 5월 10일 통의동 아이티클럽 서재에서 개최하였습니다.

참석자들은 챗GPT는 기존 인공지능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고 전 산업계에 확산될 것이라고 전망하였습니다.

언론계 입장에서 가장 우려하는 점은 역시 생성형 인공지능의 학습과정에서 언론사가 구축한 콘텐츠를 무단 활용하는 점이었습니다.

아울러 생성형 인공지능이 클라우드 컴퓨팅처럼 전 산업계에 스며들면 결국 모든 사용자가 록인되어 빅 테크에게 돈을 지불하며 떠날 수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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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3월 31일, 에펠탑 개장하다.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는 국제 박람회를 유치합니다. 파리 중심부의 샹 드 마르스에 세워질 기념물의 설계 공모도 발표합니다. 100개 이상의 디자인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공 구조물을 만들고자 한 에펠의 계획을 선택했습니다. 에펠은 2년만에 완공하여 1889년 5월 초 파리 만국 박람회에 서 타워는 관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에펠탑은 1909년 해체될 운명이었습니다. 에펠은 탑 건설 비용의 80%를 부담했고, 투자금 회수를 위해 에펠탑의 권리를 20년동안만 보장받았기 때문입니다. 에펠은 해체를 막기 위해, 에펠탑의 새로운 역할을 찾습니다. 에펠은 탑 꼭대기에 안테나를 세웠고, 무선 전신 실험에 자금도 지원했습니다. 오늘날 타워 빔 라디오 및 텔레비전에 있는 100개 이상의 안테나가 전 세계에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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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 부업을 허하라!

직업의 세상이 변하고 있습니다. 코로나의 대유행으로 ‘재택근무’라는 대실험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정해진 공간과 시간으로만 회사원을 모니터링하는 시스템은 변하고 있습니다.

본업이 소홀해질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종신고용이 당연시되던 일본에서도 부업과 겸업을 허용하는 대기업이 늘고 있습니다. 우수인력을 채용할 수 있고, 이직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이제 기업도 종신고용제가 버거운 제도입니다.

산업화 이전 사람들은 계절마다 생업이 바뀌었고 다양한 일을 조합하면서 생활을 꾸려갔습니다. 산업화 시대가 시작되면서, 생산은 분업화되고 노동은 전문화됩니다. 삶자체가 ‘전업화’ 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1920년대 3만 5천 종이나 있던 직업이 2012년경 2,167개로 그 수가 엄청나게 줄어듭니다. 직업 선택권이 넓지 않으니 대부분의 사람이 극심한 경쟁 속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본 직업을 가지고, 덤으로 일을 하나 더 하는 것은 아나로그 시대 부업 개념입니다. 이제 기업도 부업을 장려하고 나아가 부업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하는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우선,좋은 인재를 계속 붙들어 놓기 위해서 부업을 제도화해야 합니다. 더 이상 월급,복지,승진이라는 전통적인 인센티브로 인재를 내부에 붙들 수 없습니다. 이제 디지털 기술이 가져온 생산성 혁명으로 인해 예를 들면 하루 180분이면 회사가 필요한 일을 다 처리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시간은 모두 개인 일을 하거나 무료하게 인터넷만 뒤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물리적 공간(사무실)에 함께 모여서 52시간동안 얼굴 보고 일하는 시대는 더 이상 아닙니다.

부업을 인정해서 생업을 실천하는 사람, 곧 한 번이라도 자기 힘으로 일을 만들고 운영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회사에 필요한 인재입니다. 기껏 길러놓은 인재가 유출’될 수도 있지만, 회사업부와 부업사이에 새로운 인센티브 구조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새로운 업무의 방식을 만들어, 일의 여백을 만드는 기업이 앞으로는 성공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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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3월 30일, 레이건 대통령 총을 맞다.

레이건 대통령은 워싱턴 힐튼 호텔에서 연설을 마치고, 리무진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격범 힝클리가 대통령에게 여섯발을 발사했고, 한발이 그의 심장을 스쳐갔습니다. 대통령 위치와 앵글을 보면 경호원이 몇 분의 1초만 늦었더라도 대통령의 머리에 탄환이 명중했을 것라고 합니다.  

70세의 레이건은 1시간 넘게 총탄 제거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는 응급실에서도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농담을 합니다. 아내 낸시에게 “여보, 몸을 숙이는 걸 잊었다고”라고, 의사에게는 “제발 당신이 공화당원이라고 말해”고 합니다. 암살 시도 이후 레이건의 인기는 치솟았고, 4월 말에는 의회에서 영웅적인 환영을 받았습니다

저격범 힝클리의 변호사는 재판에서 힝클리가 자기애적 성격 장애를 앓고 있으며, 영화배우인 조디포스터에게 집착하는 정신병자라고 주장했습니다. 1982년 6월 정신이상을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고 정신병원에 입원합니다. 2022년 힝클리가 41년 만에 풀려납니다. 당시 67세인 힝클리는 “41년 2개월 15일, 마침내 자유다”라고 트윗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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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1책]카카오와 네이버는 어떻게 은행이 되었나

핀테크 서비스가 다양한 분야와 접목되면서 금융 생태계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네이버와 카카오는 여신, 보험 금융상품 판매 및 증권 등을 모두 서비스하는 ‘종합 금융 서비스 기업’으로 빠르게 진화 중입니다.

저자 김강원은 ‘카카오와 네이버는 어떻게 은행이 되었나’(미래의창)에서 전세계 핀테크 산업의 최신 판도 변화를 분석합니다.

금융 기업으로 변모 중인 온라인 유통 기업 아마존, 동남아의 승차 공유 기업 그랩, 일본 최대 쇼핑몰 기업 라쿠텐 등 기업들의 비즈니스 확대 과정을 생생히 전달합니다.  

또 디지털 전환에 성공한 싱가포르 최대 은행 DBS, 미국 투자은행 골드만삭스 등을 통해 핀테크 혁명에도 전통금융이 앞서나갈 수 있었던 혁신 비법을 들려줍니다.

김강원 작가는 “핀테크 산업은 경계를 불문하고 다양한 비즈니스에 접목되면서 유례 없는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금융 서비스를 어떻게 결합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할 수 있을 지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하고자 했다”고 말했습니다.

1부 핀테크 혁명에도 잘나가는 금융사의 비결 10줄 요약

1.싱가포르 최대 은행.DBS가 디지털 혁신을 위해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업무 방식부터 의사결정, 그리고 기업문화까지 모두 디지털 중심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DBS는 전체 IT시스템의 80%이상을 클라우드로 전환하고 직원들이 직접 진행하던 업무의 상당 부분을 디지털화했다. 통상 금융기관에서는 IT시스템을 외주에 맡겨 개발하는 경우가 많지만, DBS는 85% 이상의 업무를 내부직원들이 직접 관리할 수 있도록 인력을 충원했다.

2.DBS는 고객이 은행 서비스를 이용하는 목적에 맞춰 다양한 디지털 서비스를 출시했다.

DBS는 모바일 뱅킹 디지뱅크, 결제 서비스 페이라, 자산관리 서비스 아이웰스를 선보였고 부동산 중개, 자동차 판매, 여행예약, 전력 구입 서비스를 금융 서비스와 연계해 제공했다.

법인 고객 대상으로는 자금 관리 서비스를 출시했고 이로써 DBS는 IT기업이라해도 손색없을 만큼 방대한 금융 서비스 포트폴리오를 갖추게 됐다. 새로운 서비스는 고객이 다른 핀테크 서비스로 이탈하지 않도록 고객과 접점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3.DBS는 인도와 인도네시아의 고객까지 확보해 수익원을 확장했다. 또 중고차 서비스와 부동산 서비스도 출시했는데 특히 부동산 서비스는 출시 1년 동안 2600억원(3억 싱가포르 달러)의 주택담보 대출 발생으로 선순환됐다.  

4.DBS는 자사의 은행 서비스를 개방해 다른 소프트웨어 개발 기업들이 DBS와 연동해 다양한 기능을 제공할 수 있도록 오픈 API를 제공했다. DBS의 오픈 API를 활용한 서비스는 꾸준히 증가해 DBS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오픈API는 외부 서비스에서 특정 시스템이 제공하는 기능을 활용해 다양한 서비스를 구현할 수 있도록 공개된 프로그래밍 규칙 모음이다. 예를 들어 DBS에서 제공한 ‘이체’ 오픈 API를 활용하면 다른 핀테크 기업은 자신들의 서비스에서 DSB의 계좌를 통한 ‘이체’ 기능을 개발해 자신들의 고객에게 이 기능을 제공할 수 있다.

5.전세계 최고라 불리는 미국 금융사 골드만삭스는 원래 부유층과 대기업을 중심으로 사업을 영위해왔으나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일반 고객 대상으로 비즈니스의 폭을 넓혔다.

6.골드만삭스는 “우리는 은행이 아닌 테크 기업이다”라고 선언하며 전사적으로 IT기업으로의 변신을 꾀했다.

7.골드만삭스의 트레이딩 업무는 기존에 500명 직원이 수행했지만 이제는 3명이 전부다. 대신 엔지니어 규모는 웬만한 테크기업을 능가한다.

2015년 페이스북 전체 직원이 9200명인 데 반해, 골드만삭스는 엔지니어만 9000명 수준으로 더 많은 개발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8.골드만삭스의 디지털 전략은 핀테크 기업과의 협력이 핵심이다. 매년 10-20여개의 핀테크 기업에 투자할 정도로 이들과 전략적 파트너 관계를 맺고자 했다.

골드만삭스는 2014년 실시간 AI분석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기업 켄쇼에 투자했다. 켄쇼는 금융 시장에 필요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분석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다. 예를 들어 “아마존의 5년치 현금 흐름을 알려줘” “미세먼지가 역사적으로 시장 가격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찾아봐줘”라고 요청하면 이 서비스는 데이터 기반의 머신러닝 기술을 통해 결과를 도출한다. 원래 이 일은 투자사의 주니어급 애널리스트가 하던 업무였지만 이제는 굳이 사람에게 맡길 필요가 없다.

9.전통 금융사 중에는 핀테크 기업을 단순한 경쟁상대로만 바라보는 곳도 있지만 이는 시대 변화의 역행하고 고객과 서비스 경쟁력을 잃게 만드는 일차원적 사고다.

10.골드만삭스는 핀테크 기업과 싸우고 경쟁할 것이 아니라 그들과 직접 협업해 자신들이 보유하지 못한 기술이나 비즈니스 모델을 흡수하며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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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지정학

러시아는 왜?’ 우크라이나 전쟁 후 푸틴의 러시아는 중요한 주제가 되었습니다. 러시아가 처한 지정학적 환경때문에 푸틴의 러시아의 선택, 그로인해 달라질 세계질서를 가늠해보아야 합니다.

신뢰의 이름 《르몽드》의 전문가들과 인포그래픽 팀이 만든 지정학 지도와 인포그래픽을 통해 러시아의 과거, 현재, 미래를 날카롭게 해부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천연 자원, 나토와 러시아의 대치, 푸틴의 전쟁들, 우크라이나 전쟁 등의 조건을 이해해야 현재 어지럽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푸틴의 러시아는 더 이상 옛 소련의 그림자가 아닙니다. 지리적으로 축소되고 인구 위기와 경제 위기로 러시아는 쇠약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강력한 화력과 식량, 석유라는 무기를 들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국가이자 막대한 천연자원을 보유한 자원 대국, 세계 제2의 핵무기 보유국이 러시아입니다. 1991년 12월 25일 소비에트 연방의 공식 사망 선고가 내려졌고, 중앙아시아라는 공간에서 연방을 조직했던 15개 공화국이 독립했습니다. 이러한 지정학적 변화는 여러 곳에서 긴장과 분쟁을 낳았고, 그 여파가 오늘날까지도 미치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21년 뒤인 2022년 2월 말, 푸틴은 유럽인들에게 전쟁이 어떤 것이었는지 상기시켰습니다. 대규모 공습에 대한 전문가들의 해석은 서로 충돌했고, 무엇보다 러시아가 이러한 파괴적인 계획을 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를 돌이켜보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과 러시아 관계는 이 전쟁의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근본적인 원인이며, 우크라이나는 그 희생양입니다. 양국 관계는 상호 몰이해가 어떻게 원한과 적대감을 키웠는지, 푸틴이 5명의 미국 대통령을 상대하면서 어떻게 국제무대에서 배척당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미국에 대한 불신은 2003년 3월 이라크 전쟁이 터지면서 더 심해졌습니다. 조지 부시 대통령과 신보수 세력이 잘못된 정보에 기초해 전쟁이라는 모험을 감행했기 때문입니다. 사담 후세인이 대량 살상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미국의 신뢰도를 깎아 먹었을 뿐만 아니라, 강자가 진실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낸다는 확신을 러시아에 심어주었습니다. 그러나 푸틴은 아직 이러한 깨달음을 모두 행동에 옮김 것은 아닙니다. 아직 국내 기반을 다질 때였기 때문입니다.

석유와 천연가스는 푸틴의 힘입니다. 에너지와 안보 분야에서 벨라루스의 러시아 의존성이 강하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는 벨라루스에 계속해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 대가로 벨라루스는 석유 수입에 대한 특혜 관세 혜택을 받았고, 그 일부를 유럽으로 수출할 수 있었습니다. 황금알을 낳는 석유 덕분에 벨라루스 정부는 경제 개혁에 신경쓰지 않아도 사회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2022년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터졌을 때, 벨라루스는 전략적 줄서기를 선택했습니다. 우크라이나로 진군하는 러시아 군대에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한편 2022년 2월 26일 벨라루스는 국민투표를 통해 핵무기 배치가 가능해졌고, 이에 유럽연합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국민투표는 대통령의 권한도 강화하여, 푸틴처럼 루카셴코도 2035년까지 집권이 가능해졌으며 평생 면책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내륙 지역인 중앙아시아를 노리는 이유는 천연자원, 특히 에너지 자원 때문이다. 석유와 천연가스는 소련 시절부터 가스관과 송유관 망을 통해서 수출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높은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는 중국이 카자흐스탄을 중심으로 석유와 천연가스 개발, 그리고 이 에너지 자원을 국경 지역인 신장위구르 자치구까지 운송하기 위한 운송망 시설 건설에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와 중국의 경쟁 관계를 완화하려는 카자흐스탄 대통령(1991~2019년 재임)은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면서도 상대국들과 균형 있는 협력을 추구하는 ‘멀티벡터리즘(multivectorism)’ 외교 정책을 펼쳤습니다

쿠릴 열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영유권 분쟁은 1945년 이후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열도의 남쪽에 있는 4개 섬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어서 두 국가 간 강화 조약을 맺지 못하고 있으며, 이 문제는 무역 관계에도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나토와 미국의 허를 찌르며 손쉽게 크림반도를 합병했습니다. 흐루쇼프가 집권했던 1954년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양도한 크림반도의 주민은 대부분 러시아인입니다. 1만 5000명의 병사가 크림반도에 진입했지만, 우크라이나 군대와 실제 충돌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러시아는 국제법을 침해한 것이며, 부다페스트 안전보장각서(1994년)로 우크라이나에 약속했던 사항도 위반한 것입니다. 각서 체결 당시 우크라이나는 안전 보장을 대가로 핵무기를 포기했습니다. 러시아 군대 진입 이후 주민 투표가 서둘러 이루어졌고 크림반도는 러시아에 합병되었습니다. 푸틴은 “고향 항구에 돌아간” 것을 기뻐했습니다. 일종의 행복감과 애국심의 도취가 관영 매체들을 통해 전해지며 러시아 국민 대부분을 사로잡았습니다. 잃어버렸던 자존심이 회복된 사건입니다.  유럽이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많이 수입하자 러시아는 신뢰하기 어려운 우크라이나를 우회하기 위해 해저 가스관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우크라이나에 통행료를 내지 않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스관을 하나 더 짓는다는 것은 불필요한 시설을 추가하는 것이며 지역 갈등 및 국제사회의 갈등만 불러일으켰습니다.

사실 흑해는 ‘러시아의 호수’가 아니라 ‘나토의 호수’입니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이 오히려 흑해 주변 나토회원국들의 안보전략을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2016년 이지스와 같은 탄도미사일 방어 체계를 루마니아의 군사기지에 배치합니다. 조지아와 우크라이나가 자국의 안정과 주권을 지키기 위해 나토 가입을 원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에 낀 칼리닌그라드주는 나토 한가운데 놓인 러시아 영토입니다. 이 지역은 독일의 주였던 동프로이센의 북부로 통하는 전략 지역입니다. 푸틴이 북방 함대를 키우려고 했을때, 2022년 2월 전투기를 보낸 곳은 발트 함대가 있는 칼리닌그라드였다. 이로 인해 푸틴은 나토 진영 한가운데에 자국의 무기를 확충할 수 있었습니다. 2월 24일 우크라이나 침공이 있기 2주일 전이었다. 칼리닌그라드는 2014년 크림반도 합병 이후 러시아의 핵 심 요새로 탈바꿈합니다.  

2022년 2월 24일 새벽에 개시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러시아를 세계 지도의 중심에 다시 서게 합니다. 지난 30년간 세계는 1991년 소련 붕괴의 여파 속에서 살고 있으며, 그 충격의 파도는 지금도 세계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푸틴의 러시아는 더 이상 옛 소련의 그림자가 아닙니다. 지리적으로 축소되고, 인구와 경제 위기로 쇠약해진 러시아이지만, 강력한 화력과 식량, 석유라는 무기를 들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건 없습니다. 그것은 2022년 2월 24일 푸틴이 이웃 국가를 굴종시키려는 ‘특별 군사 작전’일 뿐입니다. 전쟁이란 상대국이 독립 국가라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머리 속에선 전쟁이 아닙니다. 우크라이나의 저항은 적어도 전쟁 첫 단계에서 러시아의 계획을 망쳐 놓았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전쟁’이라는 말만 해도 15년 형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러시아 독립 언론 매체조차 자진 폐업했습니다.

끝까지 전쟁을 할 것인가? 잠깐의 마비 상태가 지나고, 시리아에서 그랬듯이 정보를 장악하려는 움직임이 우크라이나에서도 보입니다. 매일같이 러시아 군대의 대변인들은 적군이 입은 피해에 관한 (확인 불가능한) 통계를 말합니다. 목격자가 넘치는 러시아군의 수탈에 관해서도 부인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교사들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평화 회복 작전’으로 가르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교사들에게 전달된 자료에는 2월 24일 푸틴의 대국민 연설 요약본도 들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우크라이나는 20세기까지 존재하지 않던 나라였다, 2014년에 우크라이나에서 쿠데타가 터졌다, 크림반도는 러시아 땅이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학생들이 할 질문에 미리 정해둔 답변까지 전달되었습니다. “왜 군사 행동이 진행 중인가요?” “러시아 국경으로 나토가 점점 밀고 들어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위험하기 때문이에요.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를 보면 알 수 있어요. 게다가 우크라이나는 핵무기도 만들 수 있어요.” 

역사적으로 전쟁을 많이 했던(오스만 제국과 제정 러시아는 14번 전쟁을 치렀다) 러시아와 튀르키예의 관계는 그만큼 복잡합니다. 러시아가 바라보는 튀르키예는 나토와 서방의 동맹국 하나를 빼앗아 오는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러시아가 시리아 문제와 관련한 협상을 진행할 때 제네바에서 튀르키예, 이란과 협력했던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러시아를 바라보는 튀르키예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리아 문제로 서방 국가들을 제치고 ‘트로이카’를 만들면서 튀르키예는 북부에 개입할 운신의 폭이 넓어졌고, 쿠르디스탄 노동자당(PKK)이 후진 기지를 만드는 것을 차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튀르키예 대통령은 계속 양다리 전략을 쓰면서 러시아가 반대하는 사안에 대해 나토 회원국들과 공동 전선을 펼치고 있습니다.

유럽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자 단 2주 만에 지정학적 노선이 남아메리카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 파급효과는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못지않습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모두 러시아가 유럽을 ‘새로운 시대’로 몰아넣었다고 평합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면서 1991년 소련 붕괴로 시작된 30년 동안의 포스트 냉전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는 어떤 모습일까요? 20세기에 일어난 분쟁은 ‘2대 강국’이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려 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나름의 규칙과 소통 채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번 위기가 서방에도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핵 강대국이자 유엔의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무력 침공으로 국경을 위협하자 ‘잠자는 공주’ 유럽도 흔들거립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례가 없던 일입니다. 영국의 보리스 존슨 당시 총리는 가을에 의회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고 합니다. “유럽 땅에 탱크전이라니, 다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다.” 그런데 러시아 탱크가 우크라이나에 진격했습니다. 이제 갑작스럽게 세계가 변하고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질서이후 세계는 어떻게 요동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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