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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1책]카카오와 네이버는 어떻게 은행이 되었나

핀테크 서비스가 다양한 분야와 접목되면서 금융 생태계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네이버와 카카오는 여신, 보험 금융상품 판매 및 증권 등을 모두 서비스하는 ‘종합 금융 서비스 기업’으로 빠르게 진화 중입니다.

저자 김강원은 ‘카카오와 네이버는 어떻게 은행이 되었나’(미래의창)에서 전세계 핀테크 산업의 최신 판도 변화를 분석합니다.

금융 기업으로 변모 중인 온라인 유통 기업 아마존, 동남아의 승차 공유 기업 그랩, 일본 최대 쇼핑몰 기업 라쿠텐 등 기업들의 비즈니스 확대 과정을 생생히 전달합니다.  

또 디지털 전환에 성공한 싱가포르 최대 은행 DBS, 미국 투자은행 골드만삭스 등을 통해 핀테크 혁명에도 전통금융이 앞서나갈 수 있었던 혁신 비법을 들려줍니다.

김강원 작가는 “핀테크 산업은 경계를 불문하고 다양한 비즈니스에 접목되면서 유례 없는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금융 서비스를 어떻게 결합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할 수 있을 지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하고자 했다”고 말했습니다.

1부 핀테크 혁명에도 잘나가는 금융사의 비결 10줄 요약

1.싱가포르 최대 은행.DBS가 디지털 혁신을 위해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업무 방식부터 의사결정, 그리고 기업문화까지 모두 디지털 중심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DBS는 전체 IT시스템의 80%이상을 클라우드로 전환하고 직원들이 직접 진행하던 업무의 상당 부분을 디지털화했다. 통상 금융기관에서는 IT시스템을 외주에 맡겨 개발하는 경우가 많지만, DBS는 85% 이상의 업무를 내부직원들이 직접 관리할 수 있도록 인력을 충원했다.

2.DBS는 고객이 은행 서비스를 이용하는 목적에 맞춰 다양한 디지털 서비스를 출시했다.

DBS는 모바일 뱅킹 디지뱅크, 결제 서비스 페이라, 자산관리 서비스 아이웰스를 선보였고 부동산 중개, 자동차 판매, 여행예약, 전력 구입 서비스를 금융 서비스와 연계해 제공했다.

법인 고객 대상으로는 자금 관리 서비스를 출시했고 이로써 DBS는 IT기업이라해도 손색없을 만큼 방대한 금융 서비스 포트폴리오를 갖추게 됐다. 새로운 서비스는 고객이 다른 핀테크 서비스로 이탈하지 않도록 고객과 접점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3.DBS는 인도와 인도네시아의 고객까지 확보해 수익원을 확장했다. 또 중고차 서비스와 부동산 서비스도 출시했는데 특히 부동산 서비스는 출시 1년 동안 2600억원(3억 싱가포르 달러)의 주택담보 대출 발생으로 선순환됐다.  

4.DBS는 자사의 은행 서비스를 개방해 다른 소프트웨어 개발 기업들이 DBS와 연동해 다양한 기능을 제공할 수 있도록 오픈 API를 제공했다. DBS의 오픈 API를 활용한 서비스는 꾸준히 증가해 DBS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오픈API는 외부 서비스에서 특정 시스템이 제공하는 기능을 활용해 다양한 서비스를 구현할 수 있도록 공개된 프로그래밍 규칙 모음이다. 예를 들어 DBS에서 제공한 ‘이체’ 오픈 API를 활용하면 다른 핀테크 기업은 자신들의 서비스에서 DSB의 계좌를 통한 ‘이체’ 기능을 개발해 자신들의 고객에게 이 기능을 제공할 수 있다.

5.전세계 최고라 불리는 미국 금융사 골드만삭스는 원래 부유층과 대기업을 중심으로 사업을 영위해왔으나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일반 고객 대상으로 비즈니스의 폭을 넓혔다.

6.골드만삭스는 “우리는 은행이 아닌 테크 기업이다”라고 선언하며 전사적으로 IT기업으로의 변신을 꾀했다.

7.골드만삭스의 트레이딩 업무는 기존에 500명 직원이 수행했지만 이제는 3명이 전부다. 대신 엔지니어 규모는 웬만한 테크기업을 능가한다.

2015년 페이스북 전체 직원이 9200명인 데 반해, 골드만삭스는 엔지니어만 9000명 수준으로 더 많은 개발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8.골드만삭스의 디지털 전략은 핀테크 기업과의 협력이 핵심이다. 매년 10-20여개의 핀테크 기업에 투자할 정도로 이들과 전략적 파트너 관계를 맺고자 했다.

골드만삭스는 2014년 실시간 AI분석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기업 켄쇼에 투자했다. 켄쇼는 금융 시장에 필요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분석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다. 예를 들어 “아마존의 5년치 현금 흐름을 알려줘” “미세먼지가 역사적으로 시장 가격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찾아봐줘”라고 요청하면 이 서비스는 데이터 기반의 머신러닝 기술을 통해 결과를 도출한다. 원래 이 일은 투자사의 주니어급 애널리스트가 하던 업무였지만 이제는 굳이 사람에게 맡길 필요가 없다.

9.전통 금융사 중에는 핀테크 기업을 단순한 경쟁상대로만 바라보는 곳도 있지만 이는 시대 변화의 역행하고 고객과 서비스 경쟁력을 잃게 만드는 일차원적 사고다.

10.골드만삭스는 핀테크 기업과 싸우고 경쟁할 것이 아니라 그들과 직접 협업해 자신들이 보유하지 못한 기술이나 비즈니스 모델을 흡수하며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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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지정학

러시아는 왜?’ 우크라이나 전쟁 후 푸틴의 러시아는 중요한 주제가 되었습니다. 러시아가 처한 지정학적 환경때문에 푸틴의 러시아의 선택, 그로인해 달라질 세계질서를 가늠해보아야 합니다.

신뢰의 이름 《르몽드》의 전문가들과 인포그래픽 팀이 만든 지정학 지도와 인포그래픽을 통해 러시아의 과거, 현재, 미래를 날카롭게 해부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천연 자원, 나토와 러시아의 대치, 푸틴의 전쟁들, 우크라이나 전쟁 등의 조건을 이해해야 현재 어지럽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푸틴의 러시아는 더 이상 옛 소련의 그림자가 아닙니다. 지리적으로 축소되고 인구 위기와 경제 위기로 러시아는 쇠약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강력한 화력과 식량, 석유라는 무기를 들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국가이자 막대한 천연자원을 보유한 자원 대국, 세계 제2의 핵무기 보유국이 러시아입니다. 1991년 12월 25일 소비에트 연방의 공식 사망 선고가 내려졌고, 중앙아시아라는 공간에서 연방을 조직했던 15개 공화국이 독립했습니다. 이러한 지정학적 변화는 여러 곳에서 긴장과 분쟁을 낳았고, 그 여파가 오늘날까지도 미치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21년 뒤인 2022년 2월 말, 푸틴은 유럽인들에게 전쟁이 어떤 것이었는지 상기시켰습니다. 대규모 공습에 대한 전문가들의 해석은 서로 충돌했고, 무엇보다 러시아가 이러한 파괴적인 계획을 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를 돌이켜보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과 러시아 관계는 이 전쟁의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근본적인 원인이며, 우크라이나는 그 희생양입니다. 양국 관계는 상호 몰이해가 어떻게 원한과 적대감을 키웠는지, 푸틴이 5명의 미국 대통령을 상대하면서 어떻게 국제무대에서 배척당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미국에 대한 불신은 2003년 3월 이라크 전쟁이 터지면서 더 심해졌습니다. 조지 부시 대통령과 신보수 세력이 잘못된 정보에 기초해 전쟁이라는 모험을 감행했기 때문입니다. 사담 후세인이 대량 살상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미국의 신뢰도를 깎아 먹었을 뿐만 아니라, 강자가 진실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낸다는 확신을 러시아에 심어주었습니다. 그러나 푸틴은 아직 이러한 깨달음을 모두 행동에 옮김 것은 아닙니다. 아직 국내 기반을 다질 때였기 때문입니다.

석유와 천연가스는 푸틴의 힘입니다. 에너지와 안보 분야에서 벨라루스의 러시아 의존성이 강하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는 벨라루스에 계속해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 대가로 벨라루스는 석유 수입에 대한 특혜 관세 혜택을 받았고, 그 일부를 유럽으로 수출할 수 있었습니다. 황금알을 낳는 석유 덕분에 벨라루스 정부는 경제 개혁에 신경쓰지 않아도 사회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2022년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터졌을 때, 벨라루스는 전략적 줄서기를 선택했습니다. 우크라이나로 진군하는 러시아 군대에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한편 2022년 2월 26일 벨라루스는 국민투표를 통해 핵무기 배치가 가능해졌고, 이에 유럽연합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국민투표는 대통령의 권한도 강화하여, 푸틴처럼 루카셴코도 2035년까지 집권이 가능해졌으며 평생 면책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내륙 지역인 중앙아시아를 노리는 이유는 천연자원, 특히 에너지 자원 때문이다. 석유와 천연가스는 소련 시절부터 가스관과 송유관 망을 통해서 수출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높은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는 중국이 카자흐스탄을 중심으로 석유와 천연가스 개발, 그리고 이 에너지 자원을 국경 지역인 신장위구르 자치구까지 운송하기 위한 운송망 시설 건설에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와 중국의 경쟁 관계를 완화하려는 카자흐스탄 대통령(1991~2019년 재임)은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면서도 상대국들과 균형 있는 협력을 추구하는 ‘멀티벡터리즘(multivectorism)’ 외교 정책을 펼쳤습니다

쿠릴 열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영유권 분쟁은 1945년 이후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열도의 남쪽에 있는 4개 섬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어서 두 국가 간 강화 조약을 맺지 못하고 있으며, 이 문제는 무역 관계에도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나토와 미국의 허를 찌르며 손쉽게 크림반도를 합병했습니다. 흐루쇼프가 집권했던 1954년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양도한 크림반도의 주민은 대부분 러시아인입니다. 1만 5000명의 병사가 크림반도에 진입했지만, 우크라이나 군대와 실제 충돌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러시아는 국제법을 침해한 것이며, 부다페스트 안전보장각서(1994년)로 우크라이나에 약속했던 사항도 위반한 것입니다. 각서 체결 당시 우크라이나는 안전 보장을 대가로 핵무기를 포기했습니다. 러시아 군대 진입 이후 주민 투표가 서둘러 이루어졌고 크림반도는 러시아에 합병되었습니다. 푸틴은 “고향 항구에 돌아간” 것을 기뻐했습니다. 일종의 행복감과 애국심의 도취가 관영 매체들을 통해 전해지며 러시아 국민 대부분을 사로잡았습니다. 잃어버렸던 자존심이 회복된 사건입니다.  유럽이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많이 수입하자 러시아는 신뢰하기 어려운 우크라이나를 우회하기 위해 해저 가스관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우크라이나에 통행료를 내지 않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스관을 하나 더 짓는다는 것은 불필요한 시설을 추가하는 것이며 지역 갈등 및 국제사회의 갈등만 불러일으켰습니다.

사실 흑해는 ‘러시아의 호수’가 아니라 ‘나토의 호수’입니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이 오히려 흑해 주변 나토회원국들의 안보전략을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2016년 이지스와 같은 탄도미사일 방어 체계를 루마니아의 군사기지에 배치합니다. 조지아와 우크라이나가 자국의 안정과 주권을 지키기 위해 나토 가입을 원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에 낀 칼리닌그라드주는 나토 한가운데 놓인 러시아 영토입니다. 이 지역은 독일의 주였던 동프로이센의 북부로 통하는 전략 지역입니다. 푸틴이 북방 함대를 키우려고 했을때, 2022년 2월 전투기를 보낸 곳은 발트 함대가 있는 칼리닌그라드였다. 이로 인해 푸틴은 나토 진영 한가운데에 자국의 무기를 확충할 수 있었습니다. 2월 24일 우크라이나 침공이 있기 2주일 전이었다. 칼리닌그라드는 2014년 크림반도 합병 이후 러시아의 핵 심 요새로 탈바꿈합니다.  

2022년 2월 24일 새벽에 개시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러시아를 세계 지도의 중심에 다시 서게 합니다. 지난 30년간 세계는 1991년 소련 붕괴의 여파 속에서 살고 있으며, 그 충격의 파도는 지금도 세계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푸틴의 러시아는 더 이상 옛 소련의 그림자가 아닙니다. 지리적으로 축소되고, 인구와 경제 위기로 쇠약해진 러시아이지만, 강력한 화력과 식량, 석유라는 무기를 들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건 없습니다. 그것은 2022년 2월 24일 푸틴이 이웃 국가를 굴종시키려는 ‘특별 군사 작전’일 뿐입니다. 전쟁이란 상대국이 독립 국가라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머리 속에선 전쟁이 아닙니다. 우크라이나의 저항은 적어도 전쟁 첫 단계에서 러시아의 계획을 망쳐 놓았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전쟁’이라는 말만 해도 15년 형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러시아 독립 언론 매체조차 자진 폐업했습니다.

끝까지 전쟁을 할 것인가? 잠깐의 마비 상태가 지나고, 시리아에서 그랬듯이 정보를 장악하려는 움직임이 우크라이나에서도 보입니다. 매일같이 러시아 군대의 대변인들은 적군이 입은 피해에 관한 (확인 불가능한) 통계를 말합니다. 목격자가 넘치는 러시아군의 수탈에 관해서도 부인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교사들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평화 회복 작전’으로 가르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교사들에게 전달된 자료에는 2월 24일 푸틴의 대국민 연설 요약본도 들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우크라이나는 20세기까지 존재하지 않던 나라였다, 2014년에 우크라이나에서 쿠데타가 터졌다, 크림반도는 러시아 땅이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학생들이 할 질문에 미리 정해둔 답변까지 전달되었습니다. “왜 군사 행동이 진행 중인가요?” “러시아 국경으로 나토가 점점 밀고 들어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위험하기 때문이에요.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를 보면 알 수 있어요. 게다가 우크라이나는 핵무기도 만들 수 있어요.” 

역사적으로 전쟁을 많이 했던(오스만 제국과 제정 러시아는 14번 전쟁을 치렀다) 러시아와 튀르키예의 관계는 그만큼 복잡합니다. 러시아가 바라보는 튀르키예는 나토와 서방의 동맹국 하나를 빼앗아 오는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러시아가 시리아 문제와 관련한 협상을 진행할 때 제네바에서 튀르키예, 이란과 협력했던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러시아를 바라보는 튀르키예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리아 문제로 서방 국가들을 제치고 ‘트로이카’를 만들면서 튀르키예는 북부에 개입할 운신의 폭이 넓어졌고, 쿠르디스탄 노동자당(PKK)이 후진 기지를 만드는 것을 차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튀르키예 대통령은 계속 양다리 전략을 쓰면서 러시아가 반대하는 사안에 대해 나토 회원국들과 공동 전선을 펼치고 있습니다.

유럽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자 단 2주 만에 지정학적 노선이 남아메리카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 파급효과는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못지않습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모두 러시아가 유럽을 ‘새로운 시대’로 몰아넣었다고 평합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면서 1991년 소련 붕괴로 시작된 30년 동안의 포스트 냉전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는 어떤 모습일까요? 20세기에 일어난 분쟁은 ‘2대 강국’이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려 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나름의 규칙과 소통 채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번 위기가 서방에도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핵 강대국이자 유엔의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무력 침공으로 국경을 위협하자 ‘잠자는 공주’ 유럽도 흔들거립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례가 없던 일입니다. 영국의 보리스 존슨 당시 총리는 가을에 의회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고 합니다. “유럽 땅에 탱크전이라니, 다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다.” 그런데 러시아 탱크가 우크라이나에 진격했습니다. 이제 갑작스럽게 세계가 변하고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질서이후 세계는 어떻게 요동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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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3월 29일 미군 베트남에서 철수하다.

1973년 3월 29일 베트남 평화 협정이 체결된 지 두 달 후, 하노이정부가 미국 전쟁 포로들을 석방합니다. 8년동안 직접 개입한 미국의 베트남전쟁이 끝나고, 마지막 남은 미군도 남베트남을 떠납니다.  약 7,000명 미 국방부의 직원만이 전후처리를 위해 사이공에 남습니다.

1961년부터 20여년 동안 미국은 베트남에 군사원조를 제공하고, 또 직접 전쟁에 개입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처음으로 대규모 미군 병력을 파견했습니다. 남베트남 정부가 무너지면서  존슨 대통령은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명령했고, 미국의 개입을 확대합니다.

베트남 전쟁이 계속되면서, 미군 사상자는 늘어가고, 미군에 의한 민간인 대량 학살도 일어납니다. 미국에서도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여론이 우세해집니다.  1968년 북베트남의 구정 공세로 미국의 승리는 요원해집니다.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가 거세지면서, 존슨 대통령은 평화회담의 시작을 승인합니다.

1969년 취임한 닉슨대통령은  아시아 문제는 아시아인이 해결하라는 ‘닉스독트린’을 선포합니다. 이제 남베트남군은 전력을 강화시켜 스스로 영토를 방어해야합니다. ‘베트남화‘라고 불린 전쟁에서 결국 북베트남이 승리합니다. 1973년 미국이 드디어 철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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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의 시간

케이팝 하면 생각나는 장면들이 있다. 90년대 초반 보스턴의 대학의 캠퍼스 를 걷다가 들려오는 한국노래…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에 대한 기억이다. 처음 듣는 결이 다른 한국어 노래를 한국 밖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이 그저 신기했다.

그리고 이십년도 더 지나 책방에서 만난 남미에서 온 모녀에게서 배운 깨달음이었다. 당시 BTS의 인기는 하늘을 찔러 혹시나 해서, BTS관련 책을 준비해 놓았다. 한국어 책인데도 기쁘게 구매하는 그 엄마에게 BTS가 왜 그리 좋은지 물었다. 그녀는 BTS가 딸에게 선한 영향력을 준다고 말했다. BTS는 가수 이상이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케이팝은 ‘인터넷’ 인프라를 가장 잘 사용하는 새로운 세대가 만들어낸 성공입니다. 방시혁 대표는 CRM 데이타 전문가들을 만나 어떻게 전세계에 콘텐츠를 배포해야하는지 조언을 받았다고 합니다. 삼성전자 같은 전통적 기업만이 아니라 ‘기획사’로 불리는 새로운 기업도 경경영의 관점에서 분석할 수있습니다.

케이팝에 관한 책이 적지 않지만, ‘케이팝의 시간’은 특별합니다. 저자가 케이팝의 역사 속에서 ‘시스템주의’, ‘뮤지션주의’, ‘커뮤니티주의 등등 사조를 명명했기 때문입니다. 구분의 관점에서 시작했지만, 서로 다른 기업의 서비스와 사업전략이라는 관점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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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3월 28일 일본,폐도령을 선포하다.

도쿠가와 시대 일본은 인구의 5%가 상시 무장을 하고 있던 국가였다. 막부는 사무라이들에게 충성을 대가로 특권을 부여했고, 대표적인 특권이 바로 칼을 찰 수 있는 권리였다. 그런데 메이지정부가 칼을 찰 수 있는 사무라이의 특권을 폐지한 것이다.

이에 반발한 사무라이들은 크고 작은 반란을 일으키지만 모두 진압당했다. 큐슈 섬의 구마모토에서의 대규모 반란을 마지막으로 사무라이들의 저항도 끝이난다. 사무라이 제도가 철폐되고 신분이 평등해지며 징병령이 행해진다.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체제가 완성되고, 일본은 본격적인 근대사회로 발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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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유산, 아베의 죽음

2022년 7월, 길거리에서 아베가 총격으로 사망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죽음에 아베라는 인물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렇지만 아베라는 인물을 편견 또는 폄하없이 바라보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렇게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그도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그 땅에 태어났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습니다. 서로 다른 역사였지만, ‘민족주의적 사명감’은 비슷할 듯 합니다.

아베의 책에는 미일 안보협정이 통과되기 전날인 1960년 6월 18일을 기억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시위대가 의회 건물을 에워싸고, 그의 외할아버지 기시는 총리 관저 안에 갇혔습니다. 철없는 다섯살 어린 아베는 시위대의 구호였던 ‘안보반대’를 따라 외쳤고, 할아버지 기시 앞에서 가족은 난감해합니다. 그만큼 아베는 태어나면서부터 정치현장 그 자체에 노출되었습니다. 아베는 할아버지 기시의 정치적 일상을 자연스럽게 보면서 자랐습니다. 기시 노부스케는 아베에게 지속적으로 의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론적인 조건입니다.

정치가란 직업도 세습되는 일본이기에, 아베는 아버지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합니다. 1993년 드디어 아베는 그가 존경하는 요시다 쇼인의 고향 조슈변(야마구치현)의 중의원에 당선됩니다. 아베는 “나는 아베 가(家)의 아들이지만, 기시 가문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고 말합니다. 아베는 국회에 첫 등원하면서,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국회의원이 된 것은, 일본국 헌법을 개정하기 위해서 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미국에 의해 강요된 헌법이 아닌 일본의 자주헌법을 제정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할아버지 기시가 물려준 유산입니다. 그 유산이 아베를 만든 정치아젠다이자 동시에 무거운 짐이기도 합니다.

일본정치에서 아베의 특별함은 그가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는 것입니다. 아베가 스타 반열에 오른 것은 2000년대 초반입니다.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는 운동에 앞장서면서 대중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아베는 말합니다. ‘ 국민의 생명과 재산, 어린이의 생명을 지킬 수 없는 정치가는 정치가로서의 자격이 없다’고….이제 ‘납치의 아베’는 영웅이 됩니다. 그의 장점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요령이 있다는 점입니다. 아베는 일반 대중과 대화하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아베의 연설은 짧고도 분명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미스터 납치, 프린스로 불리는 아베 신조의 인기는 마치 케네디를 향한 것과 유사합니다. 아베의 인기가 올라가자 고이즈미 총리는 그를 전격 발탁합니다. 2006년 9월 아베는 고이즈미 총리의 뒤를 이어 52세 최연소 일본 총리로 등극합니다. 그렇지만, 약 5000만 건에 이르는 대규모 연금납부 기록을 누락 등 잇달아 사건이 터지면서 아베는 궤양성 대장암을 이유로 1년이 안되어 총리직에서 사임합니다.

2012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후쿠시마 재난으로 휘청거리는 상황에서 아베가 다시 등장합니다. 이후 2020년 건강상 이유로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역대 최장수 일본 총리를 역임합니다. 그는 아베노믹스 를 주장합니다. 당시 미국 연준의장인 버냉키의 조언에 따라 ‘헬리콥터로 돈을 뿌리는’ 과감한 통화정책을 실행합니다. 아베노믹스를 실시한 이후 첫 임기엔 경제가 성장했으나, 점차 경제성장은 둔화해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디플레이션 침체에서 벗어나고 주식 시장을 부양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상징이 된 ‘아메노믹스’는성공적인 정치브랜드였습니다. 정치가로써 아베는 본능적으로 자기자신을 브랜드화 할 줄 알았습니다.

아베는 일본의 미래를 위해 지정학적 비전과을 제시합니다. 2015년은 한일 수교 50주년이자, 패전 70주년, 중의원 선거를 앞둔 해였습니다. 아베는 양면적으로 느낄 수 밖에 없는 미국이라는 지배적 존재와 마주해, 일본 재무장을 밀어붙입니다. 미국과 패권을 다투는 중국이 등장했기 때문에, 오히려 기회가 만들어졌습니다. 아베는 미일동맹을 넘어 개방된 인도태평양이란 대항마를 만들어냅니다. 미국의 싱크탱크와 함께 만들어낸 전략이지만, 역시 아베는 ‘외교의 아베’ 라는 자기 상표를 보유하게 됩니다. 그 무엇보다 2015년 일본은 집단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됩니다. 자국이 공격받고 있을 때는 물론 이웃 국가가 공격받을 때도 무력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권리를 갖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일본은 해외에 군대를 동원할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 기시의 정치적 목표를 거의 다 이루어냈습니다.

이 모든 업적과 명성에도 불구하고 아베는 부패한 정치인입니다. 아베가 선거에서 승리했음에도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모리토모, 가케 학원 스캔들, 사쿠라를 보는 모임, 국유지 매각 관련 공문서 위조, ‘아베노마스크 등 부정부패의 스캔들이 연속됩니다. 무엇보다 아베의 죽음이후, 선거를 둘러싼 정치와 종교의 은밀한 거래가 만천하에 드러납니다.

그것은 1950년대 공산주의에 맞서기 위한 기시 노부스케의 유산이었습니다. 1960년대 문선명 교주와 기시 노부스케가 의기투합하며, 자민당과 통일교가 인연이 시작됩니다. 자민당과 교회의 관계는 공산주의의 위협이 사라진 후에도 중단 없이 이어진 이익공동체였습니다. 기시 같은 우익 정치인들 덕분에 통일교는 일본에 무사히 안착할 수 있었고, 우파 정치인은 선거자금과 선거운동을 후원받았습니다. 문선명은 그의 어록에서 아베가 선거할 때, 13명밖에 안되었던 의석수를 88명까지 키워주었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할아버지 기시는 아베에게 비극의 유산을 물려주었습니다. 아베의 정치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제 자랑스런 역사로 기억 될 수는 없습니다. 야마가미 데쓰야의 개인적 분노는 일본에 역사적 질문을 던집니다. 민주주의의 기본인 투명한 정치시스템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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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3월 24일, 아르헨티나 쿠데타 일어나다.

아르헨티나에서 3월 24일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한 ‘진실과 정의를 기억하는 날(Day of Remebrance for Truth and Justice)’이다. 1976년 3월 24일 육군 사령관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는 쿠데타를 일으켜 이사벨 페론 대통령 정부를 끌어내렸다. 군사 평의회을 구성해 의회를 해산하고, 사법부·정당·노동조합의 활동을 중지시켰다. 군사 평의회는 집권하는 동안 이른바 ‘더러운 전쟁’을 전개해 페론주의자, 노동운동가, 인권운동가 등 정치적 반대파를 잔혹하게 탄압했다. 더러운 전쟁 동안 적게는 수천 명에서 최대 3만명이 납치, 고문, 살인 등으로 사망했거나 행방불명 되었다. 비델라는 지난  2013년 18일 복역 중이던 부에노스아이레스 의 감옥 독방에서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016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아르헨티나를 방문했다. 그를 계기로 오바마는 미국이 방조·묵인해온 ‘더러운 전쟁’ 관련 비밀문서들을 공개하기로 한다.  미국의 모든 기밀이 해제되면서, 1976년 키신저 미 국무부 장관이 이 전쟁을 묵인했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졌다. 그는 인권문제가 심각하겠지만, 쿠데타가 빠르게 마무리되길 원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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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3월 23일 리덩후이가 총통에 당선되다.

1996년 3월 23일 리덩후이가 처음 실시된 직접 선거에서 총통으로 당선됩니다

리덩후이는 일제강점기였던 1923년 타이베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고위 공직을 맡을 때마다 ‘본성인(대만 태생) 출신 최초’란 수식이 따라다녔습니다. 1988년에 총통 장징궈(장제스의 아들)가 사망하면서 권력을 승계합니다. 그는 대만이 국민당 독재 시기를 거쳐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다당제와 직선제 도입하여 민주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초석을 쌓았습니다. 1996년 실된 총통 직선제 선거에서 총통으로 취임합니다. 현 총통인 차이잉원도 리덩후이가 발탁한 ‘대만인’ 정치인입니다. 리덩후이는 2020년 7월 30일 세상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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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5년 3월 22일, 영국정부가 식민지에 아메리카에 인지세법을 통과시키다.

 영국 정부는 1765년 3월 22일 인지세법을 통과 시켰습니다. 식민지에서 상업적이고 합법적인 용도로 인쇄된 모든 자료에 대한 직접세를 부과하는 것입니다. 신문과 팜플 렛뿐만 아니라카드 놀이와 주사위에 이르기까지 …

이미 식민지에 부과된 세금도 만만히 않았습니다. 지폐의 가치를 대폭 하락시킨 통화법(1764), 영국군에게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도록 요구하는 쿼터링 법(1765) 등입니다.

인지세법이 통과되면서 식민지 주민들의 불평이 폭발합니다. 그들은 대표 없는 과세 문제를 제기했고, 식민지를 착취하려는 영국 정부에 대항하게 됩니다. 그해 10월 13개 식민지 중 9개 식민지는 인지법 회의에 대표를 보내고, “권리와 고충 선언”의 초안을 작성했습니다.

인지세법을 폐지하는 것보다 실제로 시행하는 데 더 많은 비용이 든다는 사실을 깨달은 영국 정부는 이듬해 세금을 폐지합니다.하지만 인지세 거부운동은 영국 정부에 대항하며,독립 투쟁을 위한 씨앗을 심었습니다.  10년 후 독립을 위한 투쟁으로 발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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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2001년 3월 21일사망하다.

혹시 알고 계십니까?!

2008년 테슬라가 첫 순수 전기차 로드스터를 출시했다는 것을…

그리고 훨씬 전 인 1991년에 순수 전기차인 소나타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전기차 개발은 정주영회장의 특명이었습니다. 이차전지 분야에서 선두를 달렸던 미국 오보닉사와 협력해 마침내 전기차 개발에 성공하여, 1991년 현대차 최초의 전기차 쏘나타 Y2 EV가 탄생했습니다.

정주영 회장을 다시 생각합니다.

“모험이 없으면 큰 발전도 없다. 세상일에는 공짜로 얻어지는 성과란 절대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