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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10월 27일 뉴욕 지하철이 첫운행하다.

1888년 뉴욕 대폭설을 계기로 지하철 건설 계획이 승인되어 1904년 뉴욕에 지하철 노선이 최초로 개통되었다. 그날 저녁 7시에 지하철이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어,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각각 1센트씩을 내고 처음으로 탔다. 

세계 최초는 1863년 개통된 런던의 지하철이고, 미국에서는 1897년 건설된 보스톤 지하철이 첫번째이다. 허나 뉴욕시 지하철은 곧 미국에서 가장 큰 지하철노선이 되었다.

매일 약 450만 명의 승객이 뉴욕에서 지하철을 이용한다. 뉴욕의 지하철은 하루 24시간 연중무휴로 운행된다. 아무리 붐비거나 더러워도 지하철은 뉴욕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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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킴의 세계사완전정복

썬킴의 이름은 워낙 유명하니 당연히 알고 있었다. 만나보니 실제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걸 깨닫게 되었다. 그의 북토크는 남달랐다. 그야말로 남녀노소가 다~참여했다. 2층까지 앉을 자리가 없어 서서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어린이, 엄마와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가 골고루 오기는 처음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PPT를 보여주며 설명하는 그런 북토크가 아니었다. 심지어 그날의 책이었던 “썬킴의 세계사완전정복”을 한마디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썬킴은 즉흥적으로 짜장면, 짬봉, 고량주 등 재미난 음식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두서없다고도 할 수 있었는데, 이야기가 흥미로워 모두 귀를 쫑긋하며 듣게 만들었다. 더구나 너무도 많은 사건과 년도를 다~기억하고 있었다. 분명 많은 것을 연결시키는 그의 노하우가 있을 것이다.

남녀노소를 모두 사롯잡는 썬킴은 진정 이야기 꾼이었다. 대중적인 것을 넘어 엔터테이너였다. 썬킴의 오디오클립의 광팬인 아이의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썬킴때문에 육아의 어려움을 덜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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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충돌 결정적 순간들, 훙호펑

홍콩에서 태어났으며,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5년부터 인디애나대학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11년 존스홉킨스대학 사회학과로 자리를 옮겼고, 현재 Henry M. and Elizabeth P. Wiesenfeld 교수로 재직 중이다.

중국의 경제적 부상의 동학 및 한계, 중국의 부상이 지구적 자본주의에 미치는 영향, 18세기 이후 중국의 국가 형성과 대중 저항의 궤적 등을 주제로 활발한 연구 및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차이나 붐: 왜 중국은 세계를 지배할 수 없는가』를 비롯해 『중국 특색의 항의: 청조 중기의 시위, 폭동, 청원Protest with Chinese Characteristics: Demonstrations, Riots, and Petitions in the Mid-Qing Dynasty』(2011), 『위태로운 도시: 중국 통치하의 홍콩City on the Edge: Hong Kong Under Chinese Rule』(2022) 등이 있다

저서 소개_제국의 충돌

중국 정치경제 분야의 선도적인 전문가 훙호펑

모든 사안에서 ‘신냉전’으로 치닫고 있는 미중 관계 분석

원인은 결코 이데올로기 차이가 아니다

자본 간 경쟁은 어떻게 지정학적 충돌을 부추기는가

중국 정치경제 분야의 선도적 전문가인 훙호펑 존스홉킨스대 교수가 미중 관계의 역학을 분석하는 새로운 책을 펴냈다.

저자에 따르면, 모든 사안에서 미국과 중국이 ‘신냉전’으로 치닫고 있는 현 상황의 원인은 이데올로기 대립에 있지 않다. 이는 명확히 자본 간 경쟁에서 비롯됐고, 그것이 지정학적 충돌을 부추기고 있다.

저자는 이전에도 미중 관계는 오바마 정부를 기점으로 밀월관계에서 좀더 경쟁적인 관계로 변해왔다고 분석했다. 『제국의 충돌』에서는 미국과 중국 기업들 사이의 변화가 두 나라의 정치적 관계 변화의 기저에 있다는 것을 논증한다.

세간에 나오는 다수의 설명이 미중 관계 악화를 민주주의 체제-권위주의 체제의 대립으로 설명하는 것과는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저자는 마르크스주의-베버주의적 관점으로 미국과 중국에서 어떤 행위자들이 각각 더 중요한지 다면적으로 분석한다.

특히 미국은 세계 권력과 국제적 위신을 유지하려는 베버주의적 강박에 따라 외교 정책 엘리트들이 중국을 지정학적 경쟁자로 여기는 반면, 재무부·국가경제위원회·의회 등은 거대 기업의 영향력에 대해 더 개방적인 편이라고 바라본다.

하지만 2010년에 들어 미국에서 국가와 기업의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일치하면서 중국에 공동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저자는 향후 가능한 시나리오들을 그리기 위해 역사적 맥락 속에서 힘의 변화를 파악하며 제국 충돌의 최악을 피할 방법을 전망한다.

미국 기업들, 중국 정부의 대리 로비스트가 되다

미중 관계를 살펴보는 데 있어 이 책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의 주요 분기점에 따라 두 행위자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분석한다.

중국은 1989년 톈안먼 사건 이후 개방 정책을 취했고, 미국은 1993년 10년 만에 빌 클린턴의 당선으로 민주당이 집권당이 됐다.

따라서 미국 외교가에서는 인권 이상주의자들이 영향력을 발휘하게 됐는데, 이들은 중국이 인권 문제를 개선해야만 자신들과의 무역에서 최혜국대우MFN를 갱신해주겠다는 단서를 달았다(여기엔 노동조합을 의식해 보호무역을 펼치려는 미국의 감춰진 속내도 있었다).

이러한 단서 조항은 민주당의 주요 대선 공약이기도 했지만, 상황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MFN 지위를 갱신해주지 않는다면 중국에 진출한 미국 기업들이 보복당할 우려가 컸고, 다른 한편 중국 정부도 1992~1994년 경제위기를 맞아 수출 지향 성장을 택해 두 국가 모두 상대와의 자유무역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중국 정부가 미국 기업들을 대리 로비스트로 활용하면서 난국을 타개해나갔다. 가령 디트로이트 자동차 회사들은 미중 무역 자유화로부터 입을 혜택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컸다.

중국 정부는 이들 기업을 회유했고, 이로써 미국 기업들은 중국을 대신해 미국 의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다만 의외의 지점이 있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듯 중국에서 제조업을 하고 있는 미국의 신발, 의류 업체들이 대리 로비스트가 된 것이 아니라, AT&T 같은 통신 회사, 휴스 일렉트로닉스 같은 인공위성 제조 회사, 엑슨모빌 같은 에너지 회사, 보잉 같은 항공기 제조업체 등 중국 무역과 아무 관련이 없고 관세 혜택을 직접 받지 않는 기업들이 로비활동에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저자가 자료를 분석해보니, 이 시기 중국 정부는 미국 내 목소리가 큰 기업들로 하여금 백악관과 상하원 의원들에게 ‘중국의 인권 조항과 무역 자유화를 연관시키지 마라’며 전화나 개별 서한을 보내도록 종용했다. 더욱이 이들 기업 중 다수는 대통령과 의회 의원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선거운동 자금 기부자였다.

이를테면 AT&T는 1992년 선거 때 단체 기부자 중 가장 큰 기업 기부자로 200만 달러 이상을 냈다. 휴스 일렉트로닉스도 클린턴의 적극적인 기부자로, CEO가 클린턴 대통령에게 두 통의 직설적인 편지를 보낸 바 있다.

이는 자신들이 선거운동 때 재정 지원을 했으니 MFN 문제를 비롯해 중국에 대한 제재를 재고하라는 요청이었다.

1994년 5월 26일 클린턴은 중국의 인권 개선과 상관없이 MFN 지위를 갱신할 것이라 발표했는데, 이러한 대중국 무역 정책 역전은 노동조합, 인권 옹호자, 인권 개선을 목표로 했던 외교 정책 엘리트, 미국의 노동집약적 산업체의 연합에 대한 비즈니스 연합의 승리였다.

저자에 따르면 중국 국가는 미국 기업들을 대리 로비스트로 적극적으로 모집하고 조정했다. 미국 쪽 자료로는 이 당시 중국이 백악관과 의회에 로비하도록 미국 기업들을 끌어들인 구체적인 단서를 찾기 어렵다.

하지만 몇몇 보고서를 보면 중국 관료들이 어떻게 강압적 수단으로 지시해 미국 기업이 중국을 대신하여 워싱턴에 로비하도록 요구했는지 알 수 있다.

예컨대 중국 관료들은 보잉이 중국에 유리한 정책을 펴도록 로비하는 노력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중국 국영 항공사들이 항공기 주문을 중단하겠노라고 경고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중국 국가와 미국의 정치·경제 엘리트 간의 계속된 상호작용 속에서 중국을 지정학적 경쟁 상대로 보는 미국의 충동은 억제되었다.

2010년 이후 무엇이 미중 관계를 바꾸었나

하지만 미중 무역 자유화의 시대는 저물어갔다. 2008년 경제 대침체 이후 과잉축적의 위기를 맞은 중국 공산당과 국유 기업들은 미국 시장에서 미국을 비롯한 외국 기업들을 공격적으로 압박해 수익성을 회복하려 했다.

세계무대에서 이러한 자본 간 경쟁은 중국 국가로 하여금 아시아와 그 외 지역에서 그 세력권을 개척하도록 유도해 미국과 중국 사이의 지정학적 경쟁을 심화시켰다.

이러한 대립에 직면하자 우호적인 미중 관계를 보장하는 데 앞섰던 미국 기업들은 뒤로 한발 물러섰고, 미중 외교 정책 엘리트들 간의 갈등이 벌어져도 특별히 손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 기업들은 중국 기업들과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도움을 달라며 오히려 정부에 요청하기 시작했다. 중국에 대한 미국 기업들의 이 같은 성향 변화는 2010년경 이후 거의 모든 문제에 걸쳐 미국과 중국 사이에 적대감이 고조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오바마 정부 2기 때 워싱턴의 대중국 정책은 눈에 띄게 방향을 바꿨다. 이때 아시아로의 회귀 정책이 두드러졌고, 중국이 인접국에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에 대응하기 위해 미군은 남중국해에 항공모함과 해군부대를 배치했다.

동시에 오바마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에 박차를 가했다. 오바마 정부는 정중하고 부드러운 레토릭을 사용했으나 미국의 동맹 국가들을 줄 세울 의지를 레토릭 속에 뚜렷이 숨기고 있었다. 두 제국의 충돌은 유럽과 일본의 여타 기업들 간의 자본 간 경쟁도 격화시켰다.

세계 1, 2위 경제 대국으로서 두 나라의 비중을 합치면 GDP에서는 세계 전체의 거의 40퍼센트, 국방비에서는 50퍼센트 이상을 차지해 향후 세계 정치에서 가장 중대한 변화를 야기할 것이며, 21세기에 미래의 세계질서 또는 혼돈을 결정짓게 된다.

하지만 저자는 세계 경제에서 중국이 미국을 추월할 수 있다고 전망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통계 자료들을 근거로 하건대, 중국이 성공적인 경제체인 것은 맞으나 많은 영역에서 미국에 한참 뒤떨어져 있다. 물론 시진핑 체제에 들어서서 중국 공산당의 자신감은 크게 올랐는데, 가령 미국 지도자들을 직접 모욕하도록 외교관들을 풀어준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현재 문제는 좀더 구조적인 것으로,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많은 국유 기업에서 발생한 과잉생산 및 부채 문제가 되풀이되고 있다.

이를 위해 시진핑 정부는 외국 기업과의 더 공격적인 경쟁을 개시했지만, 이는 사실 중국의 불안감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18세기부터의 중국 경제사를 훑으면서 국가의 통제와 불안을 읽어낸다.

미국과 중국 두 나라의 자본 간 경쟁은 늘어날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 앞으로 몇 년간 지정학적 경쟁은 불가피하게 심해질 것이다. 다만 저자는 낙관론을 잃지 않을 근거도 있다고 본다.

비교하건대 지금 두 제국의 대립은 20세기 초 영국과 독일의 경쟁관계와 굉장히 유사한데, 다행인 점은 중국이 점점 군사화되고 공격적으로 변하고 있다 해도 당시의 독일보다는 훨씬 덜 군국주의적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미중 간의 관계는 악화될 게 분명하지만, 직접적인 군사 충돌보다는 WHO, WTO, UN과 같은 글로벌 통치 기구에서의 경쟁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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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만 쓴다, 불륜도, 아니 에르노

자신의 삶을 솔직히 풀어내 많은 독자들의 진심 어린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프랑스 문학의 거장이다.

아니 에르노는 1940년 9월 1일, 노동자에서 소상인이 된 부모를 둔 소박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과 청소년기를 노르망디의 소읍 이브토에서 보냈고 루앙 대학교를 졸업, 초등학교 교사로 시작해 정식 교원과 문학 교수 자격을 획득했다.

자전적인 소설 『빈 장롱Les Armoires vides』(1974)으로 등단했으며, 아버지의 삶과 죽음을 다룬 『남자의 자리La place』(1984)로 르노도상을 수상했다.

2008년에 전후부터 오늘날까지의 현대사를 대형 프레스코화로 완성한 『세월들Les Annees』로 마르그리트 뒤라스상, 프랑수아 모리아크상, 프랑스어상, 텔레그람 독자상을 수상했다.

2011년에 자신이 태어나기 전, 여섯 살의 나이에 죽은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 『다른 딸L’autre fille』을 선보였다.

같은 해에 12개의 자전 소설과 사진, 미발표 일기 등을 수록한 선집 『삶을 쓰다Ecrire la vie』를 갈리마르 총서로 출간하며 생존하는 작가로는 처음으로 이 총서에 편입되었다.

2003년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아니 에르노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202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에르노는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선언으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규정한다.

저서 소개_탐닉

중독과도 같은 사랑 그리고 기다림,

그 시간을 날것으로 담아낸 내면의 기록

『탐닉』은 아니 에르노가 1991년 발표한 소설 『단순한 열정』의 모티프가 된 일기를 모은 책이다.

르노도상을 수상한 유명 작가이자 대학교수였던 아니 에르노가 연하의 외국인 유부남과 나눈 불륜 체험을 적나라하게 기록한 『단순한 열정』을 발표했을 때, 프랑스 평단과 독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책은 그해 최고의 베스트셀러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국내에도 소개되어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라는 소설의 첫 문장이 널리 회자되는 등 오랫동안 사랑받아왔다.

그리고 십 년 뒤인 2001년, 에르노는 『단순한 열정』에서 이야기한 사랑과 기다림의 시간을 날것 상태로 생생히 기록한 일기문을 『탐닉』(원제: Se perdre, 길을 잃다라는 뜻)이라는 책으로 묶어 발표했다.

이 책에는 강렬한 열정과 그것에 유착된 순수함, 아름다움 같은 초월적 가치가 담겨 있으며, 그녀가 기록한 사랑의 자잘한 디테일들은 평범한 일상을 문학의 자리로 승화시킨다.

한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탐닉』은 직접 체험한 것만을 글로 쓸 것이라는 작가의 선언에 충실한 작품이다.

이 소설(?)에 허구는 없다. 그

녀는 S와 만나서 헤어지기까지의 기간인 1988년 9월부터 1990년 4월까지의 일기를 공개한다.

“S…… 이 모든 아름다움”으로 시작되어 “내가 가지고 있는, 위험한 어떤 것을 쓰고자 하는 욕구.

마치 무슨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꼭 들어가야만 하는 지하실의 열린 문 같은”으로 끝나는 그녀의 일기는 S와 그녀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그녀가 살고 싶어하는 동화 같은 이야기에 대한 기록이다.

이 일기를 쓸 당시 에르노는 마흔여덟 살의 이름난 작가였으며, S는 서른다섯 살의 파리 주재 소련 대사관 직원이었다.

그녀는 작가들의 소련 여행을 수행하던 그와 레닌그라드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파리로 돌아와서도 그가 소련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내연의 관계를 이어나간다.

그녀와 사랑을 나눈 S는 근사한 외모밖에는 가진 것이 없는 출세지향적인 나르시시스트이다.

그는 에르노의 작가적 명성에 열광하고, 그녀 또한 명예욕에 가득찬 애인을 위해 대통령과의 만찬과 같은 행사에 기꺼이 참석한다.

그녀는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몸치장에 돈을 아끼지 않으며, 러시아어를 배우고, 소련 대사관에서 주최하는 영화 시사에도 빠짐없이 참석해 애인의 아내와 나란히 앉아 있기도 한다.

에르노는 애인의 아내와 자신이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주부와 창녀”라고 묘사하는데, 이는 일상적 공간에서 그를 사랑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연민의 표현이기도 하고(그와의 만남은 언제나 일방적이다.

그녀는 그에게서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릴 뿐 먼저 걸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동화처럼 살고 싶”은 그녀의 환상이 반영된 표현이기도 하다.

그와 함께하는 매 순간을 열정으로 살고 싶은 그녀의 노력은 자잘한 것들에까지 미친다.

그녀는 “신으로 군림하는 그”를 위해 옷, 음식, 인테리어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성과 열의를 다한다.

그럼에도 열정의 시간은 점점 사그라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자신의 열정이 식어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연하의 애인이 바람을 피울까 조바심을 내고, 그를 소유하고 있는 그의 아내에게 불같은 질투심을 느낀다.

사랑, 그 절절한 고통과 뜨거운 열정

에르노의 일기는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껴보았을 절절한 고통과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하다.

그녀는 글을 씀으로써 그와의 시간이 아로새겨진 몸의 기억을 박제하고, 그럼으로써 “삶을, 혹은 삶에 가까운 무엇을 허무에서 구”해내고, 자기 자신을 지탱하고 구원한다.

그녀가 사랑을 위해 바친 열정에 대한 기록은 일상을 문학의 자리로 승화시킨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걸작품으로 만들고 싶어했으며, 그것을 위해 순간순간을 열정을 다해 살았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에서 아니 에르노는 『단순한 열정』을 발표하고 십 년이 지난 후 일기장을 공개했을까?

단지 『단순한 열정』의 논픽션 판이라면 『탐닉』이 가지는 의미는 그녀의 노출벽이나 만용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이 페이지들 속에 『단순한 열정』에 들어 있지 않은 다른 진실이 내포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정제되지 않고 암울한,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어떤 제물 같은 무엇이. (……) 순간순간 종이 위에 나열해놓은 단어들은 나에게 시간만큼이나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다. 한마디로 그 단어들은 시간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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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10월 18일, 미국 알래스카를 매입하다.

러시아 표트르 대제는 1725년부터 베링을 파견해 알래스카 해안을 탐험한다. 해달, 여우 등이 풍부한 알래스카로 러시아 모피 사냥꾼들이 몰려들었다. 그래도 러시아 정착민은 400명을 넘지 못했다. 해달 인구가 감소하면서 알래스카의 수익성도 사라지자, 크림 전쟁의 패배로 재정이 부족해진 알렉산드르 2세는 미국에 매각을 제안한다.

19세기 중반 미국은 태평양으로 확장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 믿는 ‘명백한 운명’의 시대였다. 알래스카 매입을 주도앴던 국무장관 슈어드(Seward)도 “태평양 연안에서 동양 문명을 만날 운명”을 주장했다. 슈어드는 남북전쟁이 끝난 후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에 매입한다. 

구입 후 30년 동안 알래스카는 주목을 받지 못했다. 유콘에서 대규모 금이 발견된 1896년 이후 골드 러시가 촉발되고, 알래스카는 클론다이크 금광의 관문이 된다. 알래스카의 전략적 중요성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마침내 인식되었다. 알래스카는 1959년 1월 3일에 49번째 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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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폭군과 명군사이’

저자 김순남은 조선왕조실록에 충실함을 매우 강조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강연은 한편의 퍼포먼스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 질문과 대답이 이어지며 흥미로운 강연이 되었다.

세조는 영화 관상에서 슬로우 모션으로 등장하는 수양대군의 강렬한 인상으로 기억된다. 배우 이정재의 멋짐은 그동안 수양대군의 이미지에도 변화를 주었다. 영화 한편이 그럴 수 있다면, 어린시절 읽었던 책은 어떤 이미지를 만들었을까? 조카를 죽인 수양대군은 악몽에 시달리며 잠을 못자는 것으로 그려졌다. 저자 김순남은 수양대군이 인간적으로 괴로워해야만 한다고 여긴 것이라 한다. 그리고 세조 이유가 컴플렉스가 있는 인물인가라는 질문에는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저자는 정치가로 세조를 ‘초월적 절대군주의 꿈’을 가진 목표지향적 혹은 의지적인물로 본다.

그렇다면 쿠데타를 일으킨 태종과 세조의 차이는 무엇일까? 태종이 정치시스템을 만들고자 했다면, 세조는 공적인 시스템 대신 이른바 ‘핵관’정치를 했다. 수차례 반복된 정치적 부침을 겪으면서 세조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권력을 분담할 수 밖에 없었다. 조정에 ‘공신세력’이 득세하면서 태종 때처럼 왕권이 오롯이 서지 못했다. 무엇보다 세종이란 아들을 가진 태종의 행운이 없었다. 의경세자도 예종도 모두 단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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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러]한국인의 인종편견 분석, 정회옥

현재 명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혐오와 차별의 정치학’, ‘소수자 정치론’ 등을 강의하며 청년들과 함께 우리 사회의 인권, 차별, 통합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관련한 주제로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를 비롯해 다수의 책과 논문을 썼다.

또한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 위원, 경실련 정치개혁위원회 위원, 한국정당학회 이사, 한국의회발전연구회 연구편집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그 외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자문위원, 서울특별시 자치구의회의원 선거구획정위원회 위원, KBS 공약검증 자문단, 한국정치학회 이사,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연구기관 평가위원 등을 역임했다.

최근작 : <한 번은 불러보았다>,<아시아인이라는 이유>,<이슈를 통해 본 미국정치>

저서 소개_한번은 불러보았다

‘흑형’은 친근함의 표현일까?

어째서 백인 혼혈은 예능에, 동남아시아인 혼혈은 다큐에 나올까?

한국은 왜 ‘차이나타운이 없는 국가’로 불릴까?

‘K-콘텐츠’에 외국인의 리액션을 기대하는 심리는 무엇일까?

환대를 미덕으로 여기고 정이 많다고 자부하는 우리에게 실은 ‘인종주의자’의 모습이 있다고 밝히는 책. ‘소수자 정치론’을 연구해온 저자 정회옥(명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은 개화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기, 경제성장기, 세계화 시대, K의 시대 등 근현대사의 주요 분기를 거치며 한국만의 ‘특별한’ 인종주의가 만들어져 왔음을 밝힌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인종주의는 없다. 그렇다면 ‘인종주의 청정국’이라는 말일까. 실상은 그 반대다. 우리나라는 차별금지법 등 인종주의에 대한 법적 정의, 행위별 처벌 규정 등이 존재하지 않고, 당연히 관련된 공식 통계도 없다.

가령 누군가를 인종을 근거로 차별해도 ‘인종차별’이 아닌 단순한 ‘모욕’으로 인정될 뿐이다.

‘인종차별 없는 대한민국’이라는 집단 최면을 깨뜨리기 위해, 저자는 그 뿌리 깊은 역사를 파헤친다.

《독립신문》 같은 근대 초기의 신문부터 박정희, 김영삼 등의 대통령 훈화 말씀 그리고 최근의 유튜브 국뽕 채널까지 다양한 문헌과 매체, 인터뷰와 통계를 분석해, ‘한국식 인종주의’의 형성 과정을 추적한 것.

이 땅에서 인종주의는 식민주의, 민족주의, 순혈주의, 반공주의, 발전주의, 우월주의 등 시대별 지배 담론과 얽히고설키며 끈질기게 생명을 연장해 왔다.

‘흑형’, ‘짱깨’, ‘튀기’, ‘똥남아’, ‘개슬람’ 등 우리 모두가 한 번은 불러보았을, 또 들어보았을 수많은 멸칭이 탄생한 배경이다.

과거의 일만도 아니고, 소수의 일탈만도 아닌

바로 지금, 우리 곁의 인종주의 문제를 마주하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200만여 명의 외국인이 산다. 사실상 외국인으로 취급되는 결혼 이주자, 다문화 가족의 자녀 등을 더하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빠른 인구 감소, 노동자의 국제적 이동 등으로 우리는 그들과 더 자주, 더 깊이 만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다양성’은 거부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이고, 인종주의는 넘어야 할 벽이다.

벽을 넘으려면 우선 똑바로 마주 보아야 한다. 한국식 인종주의의 연원을 파헤친 이 책은 그 첫걸음이 될 것이다.

숨겨진 역사,

배제된 존재들

한국 근현대사는 대개 온갖 역경을 헤쳐나온 과정으로 설명된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달성한 산업화’, ‘피로써 쟁취한 민주화’ 등은 그 자체로 우리의 자랑스러운 이력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이력 뒤에 ‘배제의 논리’가 숨어 있다고 설명한다.

한민족이 똘똘 뭉치기 위해서는 강철을 제련하듯 ‘불순물’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개화기에 발행된 《한성순보》 《독립신문》 등 최초의 근대적 매체들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흑형’_개화기에 수입된 반흑인성

“흑인들은 … 동양인보다도 미련하고 흰 인종보다는 매우 천한지라.” 1897년 6월 24일 자 《독립신문》 사설은 흑인을 이렇게 묘사했다(38쪽). 반(反)흑인성이 노골적인데, 당대의 엘리트인 윤치호는 미국 사회의 흑인 차별을 정당한 일이라고까지 주장했다(41쪽).

여기에는 하루빨리 문명화해야 한다는 절박함, 그러려면 나태함이나 미련함 같은 흑인성이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경계심이 깔려 있었다.

수천 년간 다른 인종을 접한 경험 자체가 없던 한국인이 개화기 들어 몇 년 만에 인종주의자가 된 것은, 미국을 근대화의 선생으로 여겼기 때문이다(28~29쪽).

미국이 왜 ‘아름다운 나라[美國]’인지 설명하는 1884년 2월 17일 자 《한성순보》 사설은 숭미주의적 시각을 잘 보여준다(25~26쪽). ‘미제’라는 이유만으로, 인종주의조차 비판 없이 수용했던 것.

이후 근현대사 내내 미국의 대중문화가 대거 유입되며 반흑인성은 인종의 문제에서 피부색의 문제로 확장되었다(127~128쪽). 2019년에는 수단 출신의 이주노동자가 세탁 업체에 채용되었다가 며칠 만에 해고당했다. 해당 업체의 고객사인 어느 호텔에서 피부색이 어두운 사람이 세탁 업무를 맡는 게 싫다고 항의했기 때문이다(125쪽).

‘흑형’이라는, 얼핏 친절하게 느껴지는 호칭 뒤에는 이러한 반흑인성이 숨어 있다. ‘흑인은 예체능에 강하다’는 편견에 기반하는 데다가, (‘황형’, ‘백형’이 없다는 데서) 유독 흑인만을 ‘구분’ 짓는 표현이기도 하다.

실제로 국가인권위원회는 흑형을 ‘모욕형 혐오 표현’으로 규정한다(130쪽). 흑형에 스며든 반흑인성의 오랜 역사를 알게 된 후에도, 이 멸칭을 농담처럼 쓸 수 있을까.

[‘짱깨’_지배당하는 자의 열등감이 촉발한 중국인 혐오]

“조선인은 야만 인종.” “허언함은 조선인의 민족성.” “무능한 망국민.” 일제강점기에 한국인은 ‘야만 인종론’, ‘민족성론’, ‘망국민론’을 교육받으며, 식민주의를 내면화했다(50~54쪽).

한국인의 민족주의는 이에 대한 ‘저항 심리’이자, (일본처럼) 누군가를 지배하고 싶다는 ‘모방 심리’로서 탄생했는데(143쪽), 그 대상으로 눈에 띈 것이 중국인이었다.

계기는 1931년 만주에서 한국인과 중국인 소작농들이 충돌한 ‘완바오산 사건’이었다. 이것이 ‘중국인이 한국인을 핍박한다’는 식으로 와전되어 전해지자, 곧 “갓난아이부터 노인까지 당시 조선에 살던 많은 중국인이 무차별적으로 살해당하는 유례없는 제노사이드(집단 학살)가 벌어졌다.” 그 결과 200여 명의 중국인이 목숨을 잃었다(148~149쪽).

이후 ‘차이나타운이 없는 유일한 나라’로 불릴 정도로, 한국은 법과 제도를 동원해 체계적으로 중국인을 차별해 왔다.

특히 1948년의 ‘외국인에 대한 출입 규제와 외환 규제 조치’, 1950년의 ‘외국인의 창고 폐쇄령’ 등으로 무역업에 종사하는 화교의 경제력을 뺏는 데 집중했다.

1973년에는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 음식점에 중과세를 적용하거나, 쌀밥을 팔지 못하게 하는 등 촘촘한 규제를 가하기도 했다(150~153쪽).

최근의 조선족 혐오 또한 그들이 한국인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논리를 동원한다(154~155쪽).

그러한 역사 속에서 탄생한 멸칭이 ‘짱깨’로, 이는 ‘국민음식’임을 자부하는 짜장면의 별칭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와 수천 년간 관계 맺은 이웃 민족(중국인)이자, 심지어 동포(조선족)인데도 차별하는 이중성을 잘 반영한다.

인종적으로 차이가 없고 역사를 공유하지만, 민족적·문화적 차이와 상충하는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그들을 혐오하는 것. 이는 ‘인종 없는 인종주의’라는 한국식 인종주의의 또 다른 특징이다.

[‘튀기’_한국판 피 한 방울 법칙]

“우리 핏속에 잠복하여 있는 불순한 혼혈을 뽑아내자.” 혼혈인은 1949년 2월 12일 자 《경향신문》 기사처럼 매우 박한 취급을 받았다.

그들은 전혀 환영받지 못할뿐더러, ‘열등한 유전자’라거나 ‘부도덕한 문화의 결과’라는 등 온갖 비난에 시달렸다(160~163쪽).

역사적으로 한반도에 혼혈인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다만 1950년대를 전후로 등장한 혼혈인은 (주로 주한미군인) 흑인이나 백인을 아버지로 두었기에 피부색이나 외모에서 확연히 차이가 났다.

그리고 이는 ‘피’에 대한 한국인의 열등감을 자극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인종마다 피의 성분이 다르고, 이것으로 진화 정도를 알 수 있다는 ‘인종계수 연구’에 천착했다(54~56쪽).

비슷한 시기에 미국은 ‘피 한 방울 법칙’이라 하여, 조상 중에 유색인종이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면 백인이 아니라는 법을 명문화했다(178~180쪽).

이를 근거로 한 흑백 분리는 주한미군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이를 직접 경험하거나, 가까이서 본 한국인은 자연스레 ‘피가 섞이면 안 된다’는 순혈주의를 품게 되었다.

게다가 한국전쟁 탓에 한국인은 반공주의, 즉 ‘내부의 적’을 솎아내는 일에 숙련되었다.

이는 생존의 문제였으니, 실제로 이승만 정권은 강박에 가까운 태도로 혼혈인의 해외 입양을 추진했고, 이후에는 전세기를 동원해 대거 ‘수출’하기까지 했다(163~164쪽).

‘종이 다른 두 동물 사이에서 난 새끼’라는 뜻의 ‘튀기’에는 이처럼 극단적 배제의 역사가 녹아 있다.

해외로 입양된 혼혈인이 잘 살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들을 보면, 당시 한국인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듯싶다(165~167쪽).

그런데도 혼혈인 혐오가 오늘날 다문화 가족 혐오, 결혼 이주자 혐오 등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피 한 방울의 다름조차 인정하지 않는 한국식 인종주의의 특징이 엿보인다.

[‘똥남아’_경제력으로 가른 인종의 귀천]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인다.” 경제성장기인 1968년 반포된 〈국민교육헌장〉의 일부다. ‘민족중흥’, ‘국가 건설’ 등의 표현이 암시하듯, 당시 발전주의는 단 한 명도 빠짐 없이 투입되어야 할 국시(國是)였다(89~91쪽).

뒤이어 세계화 시대의 막을 연 1993년의 대통령 취임사는 “도약하지 않으면 낙오할 것”이라며, 경제성장을 민족 간 경쟁의 차원에서 바라보았다. 이로써 타민족은 무조건 밟고 올라설 대상이 되었다(96~98쪽).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가장 멸시당한 존재가 바로 동남아시아인이다.

한국에서 그들은 가난한 나라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대당하고, 또 ‘외노자(외국인 노동자)’로 불린다. 이 멸칭에는 “가난하면 문화적으로도 미개하고, 인지적으로도 열등할 것”이라고 판단하는, 즉 경제력을 혐오의 근거로 삼는 한국식 인종주의의 특징이 녹아 있다.

가령 한국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백인 교수는 외노자라 하지 않지만(186쪽), 반대로 인도인 교수는 어색해하는 식이다(138쪽).

2019년에는 한국에서 9년째 유학 중인 미얀마인이 동남아시아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불법 체류자 추방하라”라는 막말을 들어야 했다(189~190쪽).

비슷한 멸칭으로 ‘똥남아’가 있다. 가난한 동남아시아인은 더럽기까지 하다는 뜻으로, 차별의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베트남 현지에서 유행하는 한국어 교재 내용을 보면 “함부로 때리면 안 돼요” 등의 표현이 담겨 있다. 경제력으로 인종의 귀천을 가르는 한국식 인종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한, 비슷한 내용의 한국어 교재가 더욱 많아질 것이다(198~199쪽).

[‘개슬람’_이유 없는 혐오]

“모든 테러 분자는 이슬람이다.” 대구에서는 2020년부터 모스크 건축을 둘러싸고 지역 무슬림과 주민 간에 갈등이 벌어지고 있는데, 공사장 근처에 내걸린 현수막 속 문구다.

이처럼 우리는 “이슬람은 곧 사악하고 폭력적인 종교를, 무슬림은 곧 테러리스트를 자동적으로 떠올리는 연상 작용”에 익숙하다(208~210쪽).

사실 무슬림은 우리에게 낯선 존재다. 경제적이든 종교적이든, 충돌이든 협력이든 역사상 교류한 일 자체가 많지 않다.

그런데도 막연한 혐오를 품는 데는 “미국 대중매체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1994년 작 〈트루 라이즈〉부터 2016년 작 〈런던 해즈 폴른〉까지, 저자는 기독교의 이분법적 관점에서 무슬림을 테러리스트로 묘사한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를 살피며, 우리의 무슬림 혐오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추적한다(204~205쪽).

개화기에 서구 열강에서 무비판적으로 인종주의를 받아들였듯이, 오늘날 우리는 무슬림 혐오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 맹목적 혐오는 정치적 탄압을 피해 한국에 온 난민조차 예외로 두지 않는다. 2018년 조국 예멘의 내전을 피해 500여 명의 난민이 제주도를 찾았다.

곧 수많은 언론 매체가 “1인당 138만 원을 가져간다”, “난민으로 위장한 테러리스트다” 같은 확인되지 않은 소식을 보도하기 시작했고, 이는 대중의 ‘이슬라모포비아’를 한껏 자극했다. 물론 이는 이후 대부분 가짜 뉴스로 밝혀졌다(211쪽).

그러한 혐오와 차별을 뿜어내는 멸칭으로 ‘개슬람’이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은 “조선인 머리는 개와 다르지 않다”라며 한국인을 멸시했다.

그때 당한 차별과 모욕을 반세기가 지나 무슬림에게 그대로 퍼붓고 있는 것이다(53쪽). 모르면 알고자 하는 대신 두려워하고 혐오하는 것. 이것이 가장 최신의 한국식 인종주의다.

K의 시대,

그 이후를 그리다

바야흐로 ‘K’의 시대다.

〈오징어 게임〉부터 BTS까지, 한국(Korea)에서 만든 것, 또는 한국인이 국제 무대에서 활약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마치 라벨을 붙이듯 온갖 것에 ‘K’를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made in Korea’가 경쟁력인 시대가 된 셈이다(105~106쪽).

일제강점기 이후 지배당한 수모를 떨쳐내기 위해 한국인은 경제성장에 집착했다.

이 역사적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인은 똘똘 뭉쳐야 했고, 그 과정에서 다른 생각, 다른 존재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그렇다면 경제 규모 세계 10위에 오른 오늘날, 과연 우리는 다양성을 추구하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한국은 오히려 우월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이때 핵심은 “다양한 문화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내 것을 자랑하기에 바쁘다.

유튜브를 가득 채운 ‘국뽕’ 콘텐츠가 대표적인 예다(107쪽).

한국식 인종주의는 피부색과 민족, 경제력과 신앙 등 다양한 차별 기재를 능숙하게, 또 섬세하게 다룬다. 지난 150년의 근현대사를 지나며 이는 ‘마음의 습관’이라 할 정도로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143~144쪽).

저자는 이를 ‘혐오의 회로판’이라고 설명하는데, 어떤 상황에서든 그에 ‘알맞은’ 인종주의가 자동적으로 튀어나오기 때문이다(66, 209쪽).

이처럼 뿌리 깊은 한국식 인종주의의 역사를 뛰어넘기 위해 저자는 ‘시민적 민족주의’를 제시한다. 혈통이나 문화적 유사성, 경제력 등을 기준으로 ‘순수한’ 한국인을 골라낸다면, 과연 몇 명이나 해당될까.

그보다는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살며 역사와 경험을 공유하는 일 자체에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 즉 “정말로 우리는 모두 다 사람”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명제에서 인종주의 논의는 시작되어야 한다.

저자의 육성

다양성이 화두가 된 시대라지만,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를 지나며 수많은 ‘이유’와 ‘맥락’에서 소수자가 만들어지고 낙인찍히는 과정이 되풀이되었다.

이러한 차별과 혐오는 왜 뿌리 뽑히지 않는지 의문을 떨칠 수 없었고, 소수자의 정치 참여를 연구하며 그것이 오랜 역사의 산물임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나에게도 차별과 혐오의 소사(小史)가 있다. 어린 시절 짓궂은 친구들에게 ‘깜순이’, ‘시커먼스’ 등의 별명으로 불렸던 일이다.

그럴 때면 부모님께 나를 왜 이리 까맣게 낳았냐고 대들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렸을 적의 나와 내 친구들은 우리 사회의 ‘친백인성’과 ‘반흑인성’을 그 조그마한 머리와 마음에 이미 체화했던 듯싶다. 이 책이 누구나 언젠가 한 번은 불러보았을, 아무 생각 없이 내뱉었을 그 멸칭들의 행간을 깊이 들여다볼 기회가 되길 바란다.

화석처럼 굳어진 차별과 혐오의 역사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것을 바로 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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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의 날, 1492년 10월 12일 신대륙에 도착하다.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는 스페인에서 3척의 소형 배로 출항했다 1492년 10월 12일 콜럼버스의 함대는 아시아라고 믿었던 바하마제도에 상륙했다.콜롬버스는 그들과의 해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들은 소유한 모든 것을 기꺼이 교환했다 … 그들은 좋은 몸을 가지고 있었다…그들은 훌륭한 종이 될 것이다. … 50명으로 우리는 그들을 모두 정복하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할 수 있다.”

신대륙을 “발견”한지 500여년이 지난 후 매년 10월 두 번째 월요일이 ‘콜럼버스의 날’로 명명되어 미국 연방 공휴일로 지정됩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콜럼버스의 날’ 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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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슬옹, 한글의 기원

곧 한글 창제 576돌을 맞는다. 왜 굳이 세종은 한글을 만들었을까? 목적 또는 의도를 가지고 문자를 창제한 것은 유일한 사례인듯 하다. 도대체 그를 움직인 꿈은 무엇이었을까?

김슬옹원장은 ‘누구나 평등하게 지식과 정보를 나누라는 것’ 한다. 과학적 원리 뿐만 아니라 이런 철학도 한글의 큰 의미이다. 브라질출신 카를로스 고리토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문자는 글을 만들고, 글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나라를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한글은 많은 한국인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지도자가 공동선(common good)추구했기에, 한국인들은 더 포용적이고 현명한 나라를 만들수 있었습니다. [세계인을 위한 한글이야기]에서 인용.

김슬옹은 그런 세종 그리고, 주시경과 최현배 선생의 삶을 잇고 싶었다. 그는 77년 고1 때 한글운동 뛰어들었다. 그가 한글 운동에 직접 나선 계기는 신문의 한글 홀대였다. 70년대만 해도 조사와 순우리말 빼곤 신문이 온통 한자였다. 한글로 만들어진 신문은 누구나 읽을 수 있었고, 정보와 지식는 널리 공유되었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요체가 아닐까?

그의 가장 큰 소망은 대학에서 해례본을 처음부터 끝까지 가르치는 것이다. 해례본을 현대문으로 옮기고 해제까지 썼다. 이제 해례본 역주서를 낼 계획이라고 한다. 역주는 번역에 대한 책임이라고 한다. 지치고 힘들 때도 분명 있었겠지만, 그래도 그는 긍정적이다. 북토크에서도 마치 연극배우 처럼 한글을 공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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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영국 파운드화 위기

1973년, 오일쇼크가 시작된다. 혼란한 중동전쟁 중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석유의 무기화’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단지 판매가격을 올려버렸을 뿐만 아니라 원유 생산량도 감산했다. 이에 석유관련 제품의 가격은 올라가고, 제품생산은 축소되는 공급쇼크가 온다.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가 동시에 일어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 시대가 시작한다.

스태그플레이션의 난감함은 정책의 딜레마때문이다. 물가를 잡기 위해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리고 돈줄을 조이면, 경기침체가 온다. 반대로 경기회복을 위해 중앙은행이 돈줄을 풀면 인플레이션을 유발한다. 최악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최선이 아니라 차선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한편 브레튼우즈 국제통화체제도 1973년에 종료한다. 1944년에 44개국이 합의한 브레튼우즈체제는 필요에 따라 ‘조정가능한 고정환율제’를 채택한다. 미국과 영국은 금과 자국통화의 교환비율을 정하고, 다른 나라는 미국의 달러 또는 영국의 파운드화를 기준으로 환율을 정한다. 곧 간접적 형태의 금태환제도가 도입된다. 그러나 브레튼우즈 체제의 종료로 이제 각나라의 통화가 금이나 달러에 고정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곧 각나라의 화폐에가격이 매겨져, 거래하는 시장이 만들어진다. 이제 시장의 판단에 따라 가격은 변동성은 확대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시장상황에서도 1974년 집권한 영국 노동당 정부는 공약을 지키기 위해 공공지출을 확대한다.  팽창적인 재정·금융 정책의 시행으로 재정적자와 정부부채가 쌓여간다. 연이어 인플레이션이 심화되고, 다시 인플레이션으로 파운드화의 평가절하가 시작된다. 이에 영국 정부는 무모하게도 파운드화 가치를 방어하기 위해 외환시장에 개입한다. 허나 영국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가 거의 바닥나 실패했다.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명목상으로라도 기축통화의 지위에 있었던 영국은 이제 출렁이는 외환시장의 희생자가 되었다.

1976년 노동당출신의 총리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다. IMF는 스탠바이 차관의 댓가로 공공지출의 대폭적인 삭감을 요구한다. 금리인상과 함께 신용대출을 억제하는 등 통화량을 엄격히 관리한다. 이러한 조처는 새삼스러운 정책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껄그러운 정책을 대신 해주었다고 할 수도 있다.

이는 고통스러운 과정일 수 밖에 없었고, 이른바 불만의 겨울이 시작된다. 1978년 포드 자동차의 파업을 시작으로, 1979년 봄 150만명 참가하는 최대의 총파업이 발생한다. 1979년 총선에서 개혁의 기치를 내건 대처의 보수당이 압승하여 정권을 차지한다.

만약 스스로 IMF 같은 정책을 채택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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