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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페미니스트, 카트리네 마르살

웁살라대학교를 졸업하고 스웨덴의 유력 일간지 《아프톤블라데트(Aftonbladet)》의 편집주간을 지냈다. 현재는 《다겐스 뉘헤테르(Dagens Nyheter)》에서 금융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국제 금융?정치와 페미니즘에 대한 기사를 주로 다룬다. 경제학과 가부장제의 관계를 논한 저서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는 2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으며, 마거릿 애트우드는 이 책을 “여성, 경제, 돈에 관한 영리하고 재미있고 읽기 쉬운 책”이라고 평했다.

《지구를 구할 여자들》은 기술 발전의 역사에서 여성과 여성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어떻게 수많은 아이디어를 배제하고, 결과적으로 미래를 향한 혁신을 방해하는지를 풍부한 사례와 재치 있는 언어로 증명한다

저서소개_지구를 구할 여자

진정한 남자는 가방을 굴리지 않는다?

인류의 유서 깊은 발명품인 바퀴를 여행 가방에 다는 데 무려 5000년이 걸렸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캐리어’라고 부르는 바퀴 달린 가방이 등장해 전 세계 여행 산업의 판도를 바꾼 것은 1970년대가 지나서다. 닐 암스트롱이 인류 최초로 달에 발자국을 찍고 지구로 귀환할 때까지도 손잡이로 짐가방을 들어 옮기는 것이 당연했다는 이야기이다.

고작 가방에 바퀴 다는 게 뭐 그리 대단한 발명이라고 그렇게 오랜 세월이 걸렸을까? 이 수수께끼에 매달린 로버트 쉴러나 나심 탈레브 같은 세계적인 경제학자들조차 놓친 답은 바로 ‘진정한 남자는 무거운 짐을 직접 든다’ ‘여자는 짐을 들어 줄 남자 없이 혼자 여행하지 않는다’라는 성별 고정관념에 있었다. 과거 서구 남성들에게 자신의 완력을 놔두고 바퀴로 가방을 굴린다는 건 모욕에 가까웠다. 그런 가방은 여자들이나 쓸 만한 것이지만, 어차피 여자 혼자 어딜 그렇게 가겠는가. 지금 들으면 유치하고 어처구니없는 이런 생각이 수천 년 동안이나 기술 혁신을 지연시켰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바퀴 달린 가방만이 아니었다. 약 100년 전에 휘발유차와 나란히 유행했던 전기차는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 나사(NASA)는 어쩌다 우주복 제작을 여성용 속옷 회사에 맡기게 되었을까? 인간만큼 집안일을 잘하는 로봇은 왜 아직 없을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 역시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뿌리 깊은 편견과 관련이 있다.

전작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에서 주류 경제학이 지워 버린 여성의 자리에 주목했던 카트리네 마르살은 신작 《지구를 구할 여자들》을 통해 이처럼 인류의 발목을 붙잡아 온 오랜 편견과 차별을 파헤치며 남성 중심의 과학기술사를 통쾌하게 뒤집는다. 과학기술여성연구그룹의 공동 설립자인 임소연(《신비롭지 않은 여자들》 저자)과 하미나《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저자)가 이 책을 읽고 나눈 대담에서 하미나가 말한 것처럼, 여성의 눈으로 과학기술을 본다는 것에는 다양한 층위가 있다.

이 책은 크게 세 가지 층위에서 접근한다. 첫째는 앞서 말한 바퀴 달린 가방(1장)처럼 성별 고정관념이 어떻게 기술 발전을 방해하거나 지연시키는가를 역사를 통해 증명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대표적인 사례가 전기 자동차(2장)다. 일론 머스크가 이 산업에 뛰어들기 한참 전인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전기차는 이미 유럽과 미국 대도시를 달리고 있었다. 시동 걸기 힘들고 시끄러운 휘발유차가 남성을 위한 스포츠라면, 편리하고 안전한 전기차는 여성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런데 이 ‘여성적’ 이미지가 잘나가던 전기차의 발목을 붙잡았다. 안락함을 원하는 건 여자들뿐이고, 남자들은 휘발유차의 크랭크를 돌리다 턱뼈가 나갈지언정(안타깝게도 캐딜락의 최고 경영자 헨리 릴런드의 친구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 여성스러운 전기차에는 눈길도 안 준다는 것이 당시 자동차 산업의 판단이었다. ‘여성적’인 가치는 인간 보편적 가치로 여겨지지 않았으며, 어떤 기술이나 상품이 ‘여성적’이라면 그건 ‘열등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결과 전기차는 휘발유차와의 경쟁에서 밀려나 사라졌고, 우리는 이 친환경적 이동 수단의 재발명을 100년 넘게 기다려야 했다.

이제 와서 옛날 사람들의 고리타분한 생각을 비웃기는 쉽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 우리는 비슷한 실수를 안 할까?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기는 오늘날에도 우리가 어린 시절 공상과학 만화에서 보았던, 집안일을 알아서 척척 해내는 AI 로봇은 등장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또 다시 젠더와 연관된다.

그간 AI 연구자들은 교육 수준이 높은 남성 과학자들이 어려워하는 문제를 푸는 능력을 곧 지능이라고 여겼다. 그 결과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여러 능력들을 간과했는데, 그중 하나가 신체적 지능이다. 신체는 인간이 병들고 노화하는 취약한 존재이며, 타인에게 의존한다는 불편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가부장제는 여기에 ‘여성적’이라는 딱지를 붙여 무시하고 외면했다. 남성 과학자들은 AI가 혜성과 미사일 궤도를 계산할 수 있다면 청소나 설거지처럼 몸 쓰는 하찮은 일쯤은 자동으로 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기술과 발명의 역사에서 로그아웃된 여자들

만약 더 많은 여성 과학자들이 AI 개발에 참여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성의 관점에서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두 번째 층위는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기술 발전에 참여해 왔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스물한 살에 소아마비에 걸려 15년간 목발에 의지해 살아온 아이나 비팔크는 자신이 경험한 신체적 한계에서 벗어나고자 직접 보조 보행기를 만들었다(5장). 그가 발명한 것은 단순한 신체 보조 기구가 아니라 자유라는 삶의 비전 그 자체였다. 이 책이 많은 뛰어난 여성 인물들 중에서도 특히 비팔크를 내세운 것은, 그의 사례가 ‘여자도 발명했어, 남자들이 한 것 우리도 했어’라고 말하는 것을 넘어, 여성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들이 기술과 발명에 참여할 때 어떤 새로운 가능성과 잠재력이 열릴 수 있는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하지 않는 세상에 사는 사람은 그 세상을 개선할 방법을 더 쉽게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른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서.” 문제는 비팔크에게 돈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장애가 있는 여성의 아이디어에 귀를 기울이고 투자해 줄 사람이 없었다. 결국 비팔크는 싼값에 자기 아이디어를 팔았다.

집단의 측면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돈과 경제적 기회가 더 적지 않은 국가는 지구상에 단 한 곳도 없다. 여성이 소유한 사업체의 약 80퍼센트가 필요한 신용 대출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벤처 캐피털의 97퍼센트 이상이 남성 창업자에게 흘러 들어간다. 오늘날의 금융 시스템이 여성을 조직적으로 배제하는 이와 같은 방식은 자연스럽게 여러 아이디어와 발명 중 어떤 것이 실현되거나 실현되지 못할지를 결정하는 데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비팔크의 이야기는 역사로라도 남았지만, 세상에 나오지도 못한 채 지워진 아이디어들은 얼마나 많을까. 그것은 분명 여성들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 손실이다.

인류 최초의 도구가 창이 아니라 뒤지개였다면?

여성과 과학기술의 관계를 다루는 세 번째 층위는 기술과 발명이 무엇인가 하는 정의 자체를 다시 생각하는 데 있다. 우리가 인류의 발달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유인원에서 진화한 수염이 텁수룩한 남성이 날카로운 나무 막대기를 창으로 만들어 주위에 겨누는 모습이다.

정말 그랬을까?

우리는 기술이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무기로부터 시작된다는 남성 중심적이고 폭력적인 서사를 너무 쉽게 믿었다. 이 서사는 현대에 와서, 전쟁과 군대로부터 온갖 과학기술이 발전한다는 스핀온/오프 이론으로 이어진다.최초의 인류가 든 막대는 창이 아니라, 땅에서 고구마 같은 식물을 캐내는 뒤지개였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그 도구를 든 인간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었을 확률이 높다. 창이 아닌 뒤지개가 먼저라면, 인류의 서사 전체가 달라진다. 기술과 발명이 언제나 지배하고 장악하고 착취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확실성을 잃는다. 요리와 바느질, 돌봄을 위한 기술이 핵무기나 우주 탐사선을 만드는 것만큼 인류에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류의 달 탐사는 우주복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 우주복은 나사가 기대한 군사 기술 전문가가 아니라 여성용 속옷을 만드는 재단사들의 손에서, 단단한 갑옷이 아니라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어졌다(3장).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이런 기술을 정식 기술로 취급하지 않는다. 여성에 속한,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많은 기술이 사소하고 당연한 것으로 취급되고, 그로 인해 정당한 경제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여성의 손에 묶인 밧줄을 끊을 때

우리가 무엇을 해낼 수 있을지 상상해 보라

이 책은 이처럼 여성과 여성성을 무시하고 배제해 온 역사적 사례들로부터 출발해 플랫폼 노동(7장), 인공지능(8장/9장), 기후 위기(10장) 등 현재와 미래의 이슈들로 논의를 확장해 간다. ‘미래’라는 키워드 아래 놓인 마지막 두 장은 지금까지의 우리 삶을 전면적으로 바꿀 것으로 예상되는 거대 위기와 그에 대한 해결책을 다룬다.

과연 ‘제2의 기계 시대’가 도래하면 로봇과 AI에게 일자리를 빼앗긴 수십억 명 인구가 유발 하라리가 말한 ‘쓸모없는 계층’으로 전락하게 될까? 산업혁명 초기, 기계의 힘이 남성의 근력을 대체하자 그 기계를 돌리기 위해 고용된 것은 여자들이었다. 공교롭게도 미래에 로봇과 AI가 인간을 따라잡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는 영역인 감정 지능, 관계 경제, 돌봄 노동 역시 우리가 여성적이라고 여겨 온 것들이다.

그렇다면 기술 디스토피아에 대한 대안은 ‘여성’과 ‘과학기술’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바꾸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기술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예측하기에 급급하다. 그러나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직접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했다. 어떤 기술을 발전시킬지를 결정하고 거기에 투자하는 것은 인간이다.

지금까지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과학기술이 열심히 달려 도착한 곳이 탄소사회이고 불타는 지구라면, 이제는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 여성과 남성,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을 구분해서 무엇을 배제하고 무엇을 우위에 놓을 것인지 따위에 낭비할 시간이 없다. 역사 내내 젠더 관념은 다양한 방식으로 인류의 혁신을 방해해 왔다.

이는 “우리가 한쪽 손이 묶인 채 세상을 발명해 왔다는 뜻이다. 그 밧줄을 끊었을 때 우리가 무엇을 해낼 수 있을지 상상해 보라.”임소연이 말한 것처럼 “지금껏 배제되었던 것, 그래서 새로운 것, 거기에서부터 혁신과 창의성이 나올”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껏 과학기술의 영역 바깥으로 몰아냈던 여성과 여성적인 것을 다시 불러들여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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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석 ‘건축생산역사’

저자 박인석은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항상 역사화하라!  Always historicize! 

건축학자인 그는 역사적 관점을 중요시 합니다. 서양 건축사도 유럽의 역사와 함께 이야기하니 흥미로워습니다. 그가 촛점을 두는 것은 ‘건축의 규범’입니다. 달리 말하면 건축가의 생각 또는 이데올로기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말합니다.

사실 고전주의는 역사자체라기 보다는 르네상스 이후 발견한, 의미를 부여한 역사입니다. 서로마 제국 이후 유럽 각지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농촌 중심의 로마네스크 건축 생산이 시작합니다. 점차 도시를 중심으로 상업과 수공업이 발전하면서, 교회·왕궁뿐 아니라 길드홀, 시청사 등이 등장합니다. 그에 따라 고딕이라는 새로운 형태가 시도됩니다. 이후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전하면서 이른바 모더니즘까지 변화해갑니다. 문득 모더니즘 이후는 무엇일까 궁금해집니다.

저자 박인석은 마지막으로 ‘한국 건축사’가 쓰여지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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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10월 27일 뉴욕 지하철이 첫운행하다.

1888년 뉴욕 대폭설을 계기로 지하철 건설 계획이 승인되어 1904년 뉴욕에 지하철 노선이 최초로 개통되었다. 그날 저녁 7시에 지하철이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어,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각각 1센트씩을 내고 처음으로 탔다. 

세계 최초는 1863년 개통된 런던의 지하철이고, 미국에서는 1897년 건설된 보스톤 지하철이 첫번째이다. 허나 뉴욕시 지하철은 곧 미국에서 가장 큰 지하철노선이 되었다.

매일 약 450만 명의 승객이 뉴욕에서 지하철을 이용한다. 뉴욕의 지하철은 하루 24시간 연중무휴로 운행된다. 아무리 붐비거나 더러워도 지하철은 뉴욕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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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킴의 세계사완전정복

썬킴의 이름은 워낙 유명하니 당연히 알고 있었다. 만나보니 실제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걸 깨닫게 되었다. 그의 북토크는 남달랐다. 그야말로 남녀노소가 다~참여했다. 2층까지 앉을 자리가 없어 서서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어린이, 엄마와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가 골고루 오기는 처음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PPT를 보여주며 설명하는 그런 북토크가 아니었다. 심지어 그날의 책이었던 “썬킴의 세계사완전정복”을 한마디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썬킴은 즉흥적으로 짜장면, 짬봉, 고량주 등 재미난 음식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두서없다고도 할 수 있었는데, 이야기가 흥미로워 모두 귀를 쫑긋하며 듣게 만들었다. 더구나 너무도 많은 사건과 년도를 다~기억하고 있었다. 분명 많은 것을 연결시키는 그의 노하우가 있을 것이다.

남녀노소를 모두 사롯잡는 썬킴은 진정 이야기 꾼이었다. 대중적인 것을 넘어 엔터테이너였다. 썬킴의 오디오클립의 광팬인 아이의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썬킴때문에 육아의 어려움을 덜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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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충돌 결정적 순간들, 훙호펑

홍콩에서 태어났으며,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5년부터 인디애나대학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11년 존스홉킨스대학 사회학과로 자리를 옮겼고, 현재 Henry M. and Elizabeth P. Wiesenfeld 교수로 재직 중이다.

중국의 경제적 부상의 동학 및 한계, 중국의 부상이 지구적 자본주의에 미치는 영향, 18세기 이후 중국의 국가 형성과 대중 저항의 궤적 등을 주제로 활발한 연구 및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차이나 붐: 왜 중국은 세계를 지배할 수 없는가』를 비롯해 『중국 특색의 항의: 청조 중기의 시위, 폭동, 청원Protest with Chinese Characteristics: Demonstrations, Riots, and Petitions in the Mid-Qing Dynasty』(2011), 『위태로운 도시: 중국 통치하의 홍콩City on the Edge: Hong Kong Under Chinese Rule』(2022) 등이 있다

저서 소개_제국의 충돌

중국 정치경제 분야의 선도적인 전문가 훙호펑

모든 사안에서 ‘신냉전’으로 치닫고 있는 미중 관계 분석

원인은 결코 이데올로기 차이가 아니다

자본 간 경쟁은 어떻게 지정학적 충돌을 부추기는가

중국 정치경제 분야의 선도적 전문가인 훙호펑 존스홉킨스대 교수가 미중 관계의 역학을 분석하는 새로운 책을 펴냈다.

저자에 따르면, 모든 사안에서 미국과 중국이 ‘신냉전’으로 치닫고 있는 현 상황의 원인은 이데올로기 대립에 있지 않다. 이는 명확히 자본 간 경쟁에서 비롯됐고, 그것이 지정학적 충돌을 부추기고 있다.

저자는 이전에도 미중 관계는 오바마 정부를 기점으로 밀월관계에서 좀더 경쟁적인 관계로 변해왔다고 분석했다. 『제국의 충돌』에서는 미국과 중국 기업들 사이의 변화가 두 나라의 정치적 관계 변화의 기저에 있다는 것을 논증한다.

세간에 나오는 다수의 설명이 미중 관계 악화를 민주주의 체제-권위주의 체제의 대립으로 설명하는 것과는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저자는 마르크스주의-베버주의적 관점으로 미국과 중국에서 어떤 행위자들이 각각 더 중요한지 다면적으로 분석한다.

특히 미국은 세계 권력과 국제적 위신을 유지하려는 베버주의적 강박에 따라 외교 정책 엘리트들이 중국을 지정학적 경쟁자로 여기는 반면, 재무부·국가경제위원회·의회 등은 거대 기업의 영향력에 대해 더 개방적인 편이라고 바라본다.

하지만 2010년에 들어 미국에서 국가와 기업의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일치하면서 중국에 공동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저자는 향후 가능한 시나리오들을 그리기 위해 역사적 맥락 속에서 힘의 변화를 파악하며 제국 충돌의 최악을 피할 방법을 전망한다.

미국 기업들, 중국 정부의 대리 로비스트가 되다

미중 관계를 살펴보는 데 있어 이 책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의 주요 분기점에 따라 두 행위자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분석한다.

중국은 1989년 톈안먼 사건 이후 개방 정책을 취했고, 미국은 1993년 10년 만에 빌 클린턴의 당선으로 민주당이 집권당이 됐다.

따라서 미국 외교가에서는 인권 이상주의자들이 영향력을 발휘하게 됐는데, 이들은 중국이 인권 문제를 개선해야만 자신들과의 무역에서 최혜국대우MFN를 갱신해주겠다는 단서를 달았다(여기엔 노동조합을 의식해 보호무역을 펼치려는 미국의 감춰진 속내도 있었다).

이러한 단서 조항은 민주당의 주요 대선 공약이기도 했지만, 상황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MFN 지위를 갱신해주지 않는다면 중국에 진출한 미국 기업들이 보복당할 우려가 컸고, 다른 한편 중국 정부도 1992~1994년 경제위기를 맞아 수출 지향 성장을 택해 두 국가 모두 상대와의 자유무역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중국 정부가 미국 기업들을 대리 로비스트로 활용하면서 난국을 타개해나갔다. 가령 디트로이트 자동차 회사들은 미중 무역 자유화로부터 입을 혜택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컸다.

중국 정부는 이들 기업을 회유했고, 이로써 미국 기업들은 중국을 대신해 미국 의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다만 의외의 지점이 있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듯 중국에서 제조업을 하고 있는 미국의 신발, 의류 업체들이 대리 로비스트가 된 것이 아니라, AT&T 같은 통신 회사, 휴스 일렉트로닉스 같은 인공위성 제조 회사, 엑슨모빌 같은 에너지 회사, 보잉 같은 항공기 제조업체 등 중국 무역과 아무 관련이 없고 관세 혜택을 직접 받지 않는 기업들이 로비활동에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저자가 자료를 분석해보니, 이 시기 중국 정부는 미국 내 목소리가 큰 기업들로 하여금 백악관과 상하원 의원들에게 ‘중국의 인권 조항과 무역 자유화를 연관시키지 마라’며 전화나 개별 서한을 보내도록 종용했다. 더욱이 이들 기업 중 다수는 대통령과 의회 의원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선거운동 자금 기부자였다.

이를테면 AT&T는 1992년 선거 때 단체 기부자 중 가장 큰 기업 기부자로 200만 달러 이상을 냈다. 휴스 일렉트로닉스도 클린턴의 적극적인 기부자로, CEO가 클린턴 대통령에게 두 통의 직설적인 편지를 보낸 바 있다.

이는 자신들이 선거운동 때 재정 지원을 했으니 MFN 문제를 비롯해 중국에 대한 제재를 재고하라는 요청이었다.

1994년 5월 26일 클린턴은 중국의 인권 개선과 상관없이 MFN 지위를 갱신할 것이라 발표했는데, 이러한 대중국 무역 정책 역전은 노동조합, 인권 옹호자, 인권 개선을 목표로 했던 외교 정책 엘리트, 미국의 노동집약적 산업체의 연합에 대한 비즈니스 연합의 승리였다.

저자에 따르면 중국 국가는 미국 기업들을 대리 로비스트로 적극적으로 모집하고 조정했다. 미국 쪽 자료로는 이 당시 중국이 백악관과 의회에 로비하도록 미국 기업들을 끌어들인 구체적인 단서를 찾기 어렵다.

하지만 몇몇 보고서를 보면 중국 관료들이 어떻게 강압적 수단으로 지시해 미국 기업이 중국을 대신하여 워싱턴에 로비하도록 요구했는지 알 수 있다.

예컨대 중국 관료들은 보잉이 중국에 유리한 정책을 펴도록 로비하는 노력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중국 국영 항공사들이 항공기 주문을 중단하겠노라고 경고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중국 국가와 미국의 정치·경제 엘리트 간의 계속된 상호작용 속에서 중국을 지정학적 경쟁 상대로 보는 미국의 충동은 억제되었다.

2010년 이후 무엇이 미중 관계를 바꾸었나

하지만 미중 무역 자유화의 시대는 저물어갔다. 2008년 경제 대침체 이후 과잉축적의 위기를 맞은 중국 공산당과 국유 기업들은 미국 시장에서 미국을 비롯한 외국 기업들을 공격적으로 압박해 수익성을 회복하려 했다.

세계무대에서 이러한 자본 간 경쟁은 중국 국가로 하여금 아시아와 그 외 지역에서 그 세력권을 개척하도록 유도해 미국과 중국 사이의 지정학적 경쟁을 심화시켰다.

이러한 대립에 직면하자 우호적인 미중 관계를 보장하는 데 앞섰던 미국 기업들은 뒤로 한발 물러섰고, 미중 외교 정책 엘리트들 간의 갈등이 벌어져도 특별히 손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 기업들은 중국 기업들과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도움을 달라며 오히려 정부에 요청하기 시작했다. 중국에 대한 미국 기업들의 이 같은 성향 변화는 2010년경 이후 거의 모든 문제에 걸쳐 미국과 중국 사이에 적대감이 고조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오바마 정부 2기 때 워싱턴의 대중국 정책은 눈에 띄게 방향을 바꿨다. 이때 아시아로의 회귀 정책이 두드러졌고, 중국이 인접국에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에 대응하기 위해 미군은 남중국해에 항공모함과 해군부대를 배치했다.

동시에 오바마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에 박차를 가했다. 오바마 정부는 정중하고 부드러운 레토릭을 사용했으나 미국의 동맹 국가들을 줄 세울 의지를 레토릭 속에 뚜렷이 숨기고 있었다. 두 제국의 충돌은 유럽과 일본의 여타 기업들 간의 자본 간 경쟁도 격화시켰다.

세계 1, 2위 경제 대국으로서 두 나라의 비중을 합치면 GDP에서는 세계 전체의 거의 40퍼센트, 국방비에서는 50퍼센트 이상을 차지해 향후 세계 정치에서 가장 중대한 변화를 야기할 것이며, 21세기에 미래의 세계질서 또는 혼돈을 결정짓게 된다.

하지만 저자는 세계 경제에서 중국이 미국을 추월할 수 있다고 전망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통계 자료들을 근거로 하건대, 중국이 성공적인 경제체인 것은 맞으나 많은 영역에서 미국에 한참 뒤떨어져 있다. 물론 시진핑 체제에 들어서서 중국 공산당의 자신감은 크게 올랐는데, 가령 미국 지도자들을 직접 모욕하도록 외교관들을 풀어준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현재 문제는 좀더 구조적인 것으로,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많은 국유 기업에서 발생한 과잉생산 및 부채 문제가 되풀이되고 있다.

이를 위해 시진핑 정부는 외국 기업과의 더 공격적인 경쟁을 개시했지만, 이는 사실 중국의 불안감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18세기부터의 중국 경제사를 훑으면서 국가의 통제와 불안을 읽어낸다.

미국과 중국 두 나라의 자본 간 경쟁은 늘어날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 앞으로 몇 년간 지정학적 경쟁은 불가피하게 심해질 것이다. 다만 저자는 낙관론을 잃지 않을 근거도 있다고 본다.

비교하건대 지금 두 제국의 대립은 20세기 초 영국과 독일의 경쟁관계와 굉장히 유사한데, 다행인 점은 중국이 점점 군사화되고 공격적으로 변하고 있다 해도 당시의 독일보다는 훨씬 덜 군국주의적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미중 간의 관계는 악화될 게 분명하지만, 직접적인 군사 충돌보다는 WHO, WTO, UN과 같은 글로벌 통치 기구에서의 경쟁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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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만 쓴다, 불륜도, 아니 에르노

자신의 삶을 솔직히 풀어내 많은 독자들의 진심 어린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프랑스 문학의 거장이다.

아니 에르노는 1940년 9월 1일, 노동자에서 소상인이 된 부모를 둔 소박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과 청소년기를 노르망디의 소읍 이브토에서 보냈고 루앙 대학교를 졸업, 초등학교 교사로 시작해 정식 교원과 문학 교수 자격을 획득했다.

자전적인 소설 『빈 장롱Les Armoires vides』(1974)으로 등단했으며, 아버지의 삶과 죽음을 다룬 『남자의 자리La place』(1984)로 르노도상을 수상했다.

2008년에 전후부터 오늘날까지의 현대사를 대형 프레스코화로 완성한 『세월들Les Annees』로 마르그리트 뒤라스상, 프랑수아 모리아크상, 프랑스어상, 텔레그람 독자상을 수상했다.

2011년에 자신이 태어나기 전, 여섯 살의 나이에 죽은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 『다른 딸L’autre fille』을 선보였다.

같은 해에 12개의 자전 소설과 사진, 미발표 일기 등을 수록한 선집 『삶을 쓰다Ecrire la vie』를 갈리마르 총서로 출간하며 생존하는 작가로는 처음으로 이 총서에 편입되었다.

2003년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아니 에르노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202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에르노는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선언으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규정한다.

저서 소개_탐닉

중독과도 같은 사랑 그리고 기다림,

그 시간을 날것으로 담아낸 내면의 기록

『탐닉』은 아니 에르노가 1991년 발표한 소설 『단순한 열정』의 모티프가 된 일기를 모은 책이다.

르노도상을 수상한 유명 작가이자 대학교수였던 아니 에르노가 연하의 외국인 유부남과 나눈 불륜 체험을 적나라하게 기록한 『단순한 열정』을 발표했을 때, 프랑스 평단과 독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책은 그해 최고의 베스트셀러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국내에도 소개되어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라는 소설의 첫 문장이 널리 회자되는 등 오랫동안 사랑받아왔다.

그리고 십 년 뒤인 2001년, 에르노는 『단순한 열정』에서 이야기한 사랑과 기다림의 시간을 날것 상태로 생생히 기록한 일기문을 『탐닉』(원제: Se perdre, 길을 잃다라는 뜻)이라는 책으로 묶어 발표했다.

이 책에는 강렬한 열정과 그것에 유착된 순수함, 아름다움 같은 초월적 가치가 담겨 있으며, 그녀가 기록한 사랑의 자잘한 디테일들은 평범한 일상을 문학의 자리로 승화시킨다.

한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탐닉』은 직접 체험한 것만을 글로 쓸 것이라는 작가의 선언에 충실한 작품이다.

이 소설(?)에 허구는 없다. 그

녀는 S와 만나서 헤어지기까지의 기간인 1988년 9월부터 1990년 4월까지의 일기를 공개한다.

“S…… 이 모든 아름다움”으로 시작되어 “내가 가지고 있는, 위험한 어떤 것을 쓰고자 하는 욕구.

마치 무슨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꼭 들어가야만 하는 지하실의 열린 문 같은”으로 끝나는 그녀의 일기는 S와 그녀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그녀가 살고 싶어하는 동화 같은 이야기에 대한 기록이다.

이 일기를 쓸 당시 에르노는 마흔여덟 살의 이름난 작가였으며, S는 서른다섯 살의 파리 주재 소련 대사관 직원이었다.

그녀는 작가들의 소련 여행을 수행하던 그와 레닌그라드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파리로 돌아와서도 그가 소련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내연의 관계를 이어나간다.

그녀와 사랑을 나눈 S는 근사한 외모밖에는 가진 것이 없는 출세지향적인 나르시시스트이다.

그는 에르노의 작가적 명성에 열광하고, 그녀 또한 명예욕에 가득찬 애인을 위해 대통령과의 만찬과 같은 행사에 기꺼이 참석한다.

그녀는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몸치장에 돈을 아끼지 않으며, 러시아어를 배우고, 소련 대사관에서 주최하는 영화 시사에도 빠짐없이 참석해 애인의 아내와 나란히 앉아 있기도 한다.

에르노는 애인의 아내와 자신이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주부와 창녀”라고 묘사하는데, 이는 일상적 공간에서 그를 사랑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연민의 표현이기도 하고(그와의 만남은 언제나 일방적이다.

그녀는 그에게서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릴 뿐 먼저 걸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동화처럼 살고 싶”은 그녀의 환상이 반영된 표현이기도 하다.

그와 함께하는 매 순간을 열정으로 살고 싶은 그녀의 노력은 자잘한 것들에까지 미친다.

그녀는 “신으로 군림하는 그”를 위해 옷, 음식, 인테리어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성과 열의를 다한다.

그럼에도 열정의 시간은 점점 사그라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자신의 열정이 식어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연하의 애인이 바람을 피울까 조바심을 내고, 그를 소유하고 있는 그의 아내에게 불같은 질투심을 느낀다.

사랑, 그 절절한 고통과 뜨거운 열정

에르노의 일기는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껴보았을 절절한 고통과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하다.

그녀는 글을 씀으로써 그와의 시간이 아로새겨진 몸의 기억을 박제하고, 그럼으로써 “삶을, 혹은 삶에 가까운 무엇을 허무에서 구”해내고, 자기 자신을 지탱하고 구원한다.

그녀가 사랑을 위해 바친 열정에 대한 기록은 일상을 문학의 자리로 승화시킨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걸작품으로 만들고 싶어했으며, 그것을 위해 순간순간을 열정을 다해 살았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에서 아니 에르노는 『단순한 열정』을 발표하고 십 년이 지난 후 일기장을 공개했을까?

단지 『단순한 열정』의 논픽션 판이라면 『탐닉』이 가지는 의미는 그녀의 노출벽이나 만용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이 페이지들 속에 『단순한 열정』에 들어 있지 않은 다른 진실이 내포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정제되지 않고 암울한,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어떤 제물 같은 무엇이. (……) 순간순간 종이 위에 나열해놓은 단어들은 나에게 시간만큼이나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다. 한마디로 그 단어들은 시간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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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10월 18일, 미국 알래스카를 매입하다.

러시아 표트르 대제는 1725년부터 베링을 파견해 알래스카 해안을 탐험한다. 해달, 여우 등이 풍부한 알래스카로 러시아 모피 사냥꾼들이 몰려들었다. 그래도 러시아 정착민은 400명을 넘지 못했다. 해달 인구가 감소하면서 알래스카의 수익성도 사라지자, 크림 전쟁의 패배로 재정이 부족해진 알렉산드르 2세는 미국에 매각을 제안한다.

19세기 중반 미국은 태평양으로 확장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 믿는 ‘명백한 운명’의 시대였다. 알래스카 매입을 주도앴던 국무장관 슈어드(Seward)도 “태평양 연안에서 동양 문명을 만날 운명”을 주장했다. 슈어드는 남북전쟁이 끝난 후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에 매입한다. 

구입 후 30년 동안 알래스카는 주목을 받지 못했다. 유콘에서 대규모 금이 발견된 1896년 이후 골드 러시가 촉발되고, 알래스카는 클론다이크 금광의 관문이 된다. 알래스카의 전략적 중요성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마침내 인식되었다. 알래스카는 1959년 1월 3일에 49번째 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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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폭군과 명군사이’

저자 김순남은 조선왕조실록에 충실함을 매우 강조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강연은 한편의 퍼포먼스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 질문과 대답이 이어지며 흥미로운 강연이 되었다.

세조는 영화 관상에서 슬로우 모션으로 등장하는 수양대군의 강렬한 인상으로 기억된다. 배우 이정재의 멋짐은 그동안 수양대군의 이미지에도 변화를 주었다. 영화 한편이 그럴 수 있다면, 어린시절 읽었던 책은 어떤 이미지를 만들었을까? 조카를 죽인 수양대군은 악몽에 시달리며 잠을 못자는 것으로 그려졌다. 저자 김순남은 수양대군이 인간적으로 괴로워해야만 한다고 여긴 것이라 한다. 그리고 세조 이유가 컴플렉스가 있는 인물인가라는 질문에는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저자는 정치가로 세조를 ‘초월적 절대군주의 꿈’을 가진 목표지향적 혹은 의지적인물로 본다.

그렇다면 쿠데타를 일으킨 태종과 세조의 차이는 무엇일까? 태종이 정치시스템을 만들고자 했다면, 세조는 공적인 시스템 대신 이른바 ‘핵관’정치를 했다. 수차례 반복된 정치적 부침을 겪으면서 세조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권력을 분담할 수 밖에 없었다. 조정에 ‘공신세력’이 득세하면서 태종 때처럼 왕권이 오롯이 서지 못했다. 무엇보다 세종이란 아들을 가진 태종의 행운이 없었다. 의경세자도 예종도 모두 단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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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러]한국인의 인종편견 분석, 정회옥

현재 명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혐오와 차별의 정치학’, ‘소수자 정치론’ 등을 강의하며 청년들과 함께 우리 사회의 인권, 차별, 통합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관련한 주제로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를 비롯해 다수의 책과 논문을 썼다.

또한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 위원, 경실련 정치개혁위원회 위원, 한국정당학회 이사, 한국의회발전연구회 연구편집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그 외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자문위원, 서울특별시 자치구의회의원 선거구획정위원회 위원, KBS 공약검증 자문단, 한국정치학회 이사,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연구기관 평가위원 등을 역임했다.

최근작 : <한 번은 불러보았다>,<아시아인이라는 이유>,<이슈를 통해 본 미국정치>

저서 소개_한번은 불러보았다

‘흑형’은 친근함의 표현일까?

어째서 백인 혼혈은 예능에, 동남아시아인 혼혈은 다큐에 나올까?

한국은 왜 ‘차이나타운이 없는 국가’로 불릴까?

‘K-콘텐츠’에 외국인의 리액션을 기대하는 심리는 무엇일까?

환대를 미덕으로 여기고 정이 많다고 자부하는 우리에게 실은 ‘인종주의자’의 모습이 있다고 밝히는 책. ‘소수자 정치론’을 연구해온 저자 정회옥(명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은 개화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기, 경제성장기, 세계화 시대, K의 시대 등 근현대사의 주요 분기를 거치며 한국만의 ‘특별한’ 인종주의가 만들어져 왔음을 밝힌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인종주의는 없다. 그렇다면 ‘인종주의 청정국’이라는 말일까. 실상은 그 반대다. 우리나라는 차별금지법 등 인종주의에 대한 법적 정의, 행위별 처벌 규정 등이 존재하지 않고, 당연히 관련된 공식 통계도 없다.

가령 누군가를 인종을 근거로 차별해도 ‘인종차별’이 아닌 단순한 ‘모욕’으로 인정될 뿐이다.

‘인종차별 없는 대한민국’이라는 집단 최면을 깨뜨리기 위해, 저자는 그 뿌리 깊은 역사를 파헤친다.

《독립신문》 같은 근대 초기의 신문부터 박정희, 김영삼 등의 대통령 훈화 말씀 그리고 최근의 유튜브 국뽕 채널까지 다양한 문헌과 매체, 인터뷰와 통계를 분석해, ‘한국식 인종주의’의 형성 과정을 추적한 것.

이 땅에서 인종주의는 식민주의, 민족주의, 순혈주의, 반공주의, 발전주의, 우월주의 등 시대별 지배 담론과 얽히고설키며 끈질기게 생명을 연장해 왔다.

‘흑형’, ‘짱깨’, ‘튀기’, ‘똥남아’, ‘개슬람’ 등 우리 모두가 한 번은 불러보았을, 또 들어보았을 수많은 멸칭이 탄생한 배경이다.

과거의 일만도 아니고, 소수의 일탈만도 아닌

바로 지금, 우리 곁의 인종주의 문제를 마주하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200만여 명의 외국인이 산다. 사실상 외국인으로 취급되는 결혼 이주자, 다문화 가족의 자녀 등을 더하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빠른 인구 감소, 노동자의 국제적 이동 등으로 우리는 그들과 더 자주, 더 깊이 만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다양성’은 거부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이고, 인종주의는 넘어야 할 벽이다.

벽을 넘으려면 우선 똑바로 마주 보아야 한다. 한국식 인종주의의 연원을 파헤친 이 책은 그 첫걸음이 될 것이다.

숨겨진 역사,

배제된 존재들

한국 근현대사는 대개 온갖 역경을 헤쳐나온 과정으로 설명된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달성한 산업화’, ‘피로써 쟁취한 민주화’ 등은 그 자체로 우리의 자랑스러운 이력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이력 뒤에 ‘배제의 논리’가 숨어 있다고 설명한다.

한민족이 똘똘 뭉치기 위해서는 강철을 제련하듯 ‘불순물’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개화기에 발행된 《한성순보》 《독립신문》 등 최초의 근대적 매체들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흑형’_개화기에 수입된 반흑인성

“흑인들은 … 동양인보다도 미련하고 흰 인종보다는 매우 천한지라.” 1897년 6월 24일 자 《독립신문》 사설은 흑인을 이렇게 묘사했다(38쪽). 반(反)흑인성이 노골적인데, 당대의 엘리트인 윤치호는 미국 사회의 흑인 차별을 정당한 일이라고까지 주장했다(41쪽).

여기에는 하루빨리 문명화해야 한다는 절박함, 그러려면 나태함이나 미련함 같은 흑인성이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경계심이 깔려 있었다.

수천 년간 다른 인종을 접한 경험 자체가 없던 한국인이 개화기 들어 몇 년 만에 인종주의자가 된 것은, 미국을 근대화의 선생으로 여겼기 때문이다(28~29쪽).

미국이 왜 ‘아름다운 나라[美國]’인지 설명하는 1884년 2월 17일 자 《한성순보》 사설은 숭미주의적 시각을 잘 보여준다(25~26쪽). ‘미제’라는 이유만으로, 인종주의조차 비판 없이 수용했던 것.

이후 근현대사 내내 미국의 대중문화가 대거 유입되며 반흑인성은 인종의 문제에서 피부색의 문제로 확장되었다(127~128쪽). 2019년에는 수단 출신의 이주노동자가 세탁 업체에 채용되었다가 며칠 만에 해고당했다. 해당 업체의 고객사인 어느 호텔에서 피부색이 어두운 사람이 세탁 업무를 맡는 게 싫다고 항의했기 때문이다(125쪽).

‘흑형’이라는, 얼핏 친절하게 느껴지는 호칭 뒤에는 이러한 반흑인성이 숨어 있다. ‘흑인은 예체능에 강하다’는 편견에 기반하는 데다가, (‘황형’, ‘백형’이 없다는 데서) 유독 흑인만을 ‘구분’ 짓는 표현이기도 하다.

실제로 국가인권위원회는 흑형을 ‘모욕형 혐오 표현’으로 규정한다(130쪽). 흑형에 스며든 반흑인성의 오랜 역사를 알게 된 후에도, 이 멸칭을 농담처럼 쓸 수 있을까.

[‘짱깨’_지배당하는 자의 열등감이 촉발한 중국인 혐오]

“조선인은 야만 인종.” “허언함은 조선인의 민족성.” “무능한 망국민.” 일제강점기에 한국인은 ‘야만 인종론’, ‘민족성론’, ‘망국민론’을 교육받으며, 식민주의를 내면화했다(50~54쪽).

한국인의 민족주의는 이에 대한 ‘저항 심리’이자, (일본처럼) 누군가를 지배하고 싶다는 ‘모방 심리’로서 탄생했는데(143쪽), 그 대상으로 눈에 띈 것이 중국인이었다.

계기는 1931년 만주에서 한국인과 중국인 소작농들이 충돌한 ‘완바오산 사건’이었다. 이것이 ‘중국인이 한국인을 핍박한다’는 식으로 와전되어 전해지자, 곧 “갓난아이부터 노인까지 당시 조선에 살던 많은 중국인이 무차별적으로 살해당하는 유례없는 제노사이드(집단 학살)가 벌어졌다.” 그 결과 200여 명의 중국인이 목숨을 잃었다(148~149쪽).

이후 ‘차이나타운이 없는 유일한 나라’로 불릴 정도로, 한국은 법과 제도를 동원해 체계적으로 중국인을 차별해 왔다.

특히 1948년의 ‘외국인에 대한 출입 규제와 외환 규제 조치’, 1950년의 ‘외국인의 창고 폐쇄령’ 등으로 무역업에 종사하는 화교의 경제력을 뺏는 데 집중했다.

1973년에는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 음식점에 중과세를 적용하거나, 쌀밥을 팔지 못하게 하는 등 촘촘한 규제를 가하기도 했다(150~153쪽).

최근의 조선족 혐오 또한 그들이 한국인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논리를 동원한다(154~155쪽).

그러한 역사 속에서 탄생한 멸칭이 ‘짱깨’로, 이는 ‘국민음식’임을 자부하는 짜장면의 별칭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와 수천 년간 관계 맺은 이웃 민족(중국인)이자, 심지어 동포(조선족)인데도 차별하는 이중성을 잘 반영한다.

인종적으로 차이가 없고 역사를 공유하지만, 민족적·문화적 차이와 상충하는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그들을 혐오하는 것. 이는 ‘인종 없는 인종주의’라는 한국식 인종주의의 또 다른 특징이다.

[‘튀기’_한국판 피 한 방울 법칙]

“우리 핏속에 잠복하여 있는 불순한 혼혈을 뽑아내자.” 혼혈인은 1949년 2월 12일 자 《경향신문》 기사처럼 매우 박한 취급을 받았다.

그들은 전혀 환영받지 못할뿐더러, ‘열등한 유전자’라거나 ‘부도덕한 문화의 결과’라는 등 온갖 비난에 시달렸다(160~163쪽).

역사적으로 한반도에 혼혈인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다만 1950년대를 전후로 등장한 혼혈인은 (주로 주한미군인) 흑인이나 백인을 아버지로 두었기에 피부색이나 외모에서 확연히 차이가 났다.

그리고 이는 ‘피’에 대한 한국인의 열등감을 자극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인종마다 피의 성분이 다르고, 이것으로 진화 정도를 알 수 있다는 ‘인종계수 연구’에 천착했다(54~56쪽).

비슷한 시기에 미국은 ‘피 한 방울 법칙’이라 하여, 조상 중에 유색인종이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면 백인이 아니라는 법을 명문화했다(178~180쪽).

이를 근거로 한 흑백 분리는 주한미군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이를 직접 경험하거나, 가까이서 본 한국인은 자연스레 ‘피가 섞이면 안 된다’는 순혈주의를 품게 되었다.

게다가 한국전쟁 탓에 한국인은 반공주의, 즉 ‘내부의 적’을 솎아내는 일에 숙련되었다.

이는 생존의 문제였으니, 실제로 이승만 정권은 강박에 가까운 태도로 혼혈인의 해외 입양을 추진했고, 이후에는 전세기를 동원해 대거 ‘수출’하기까지 했다(163~164쪽).

‘종이 다른 두 동물 사이에서 난 새끼’라는 뜻의 ‘튀기’에는 이처럼 극단적 배제의 역사가 녹아 있다.

해외로 입양된 혼혈인이 잘 살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들을 보면, 당시 한국인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듯싶다(165~167쪽).

그런데도 혼혈인 혐오가 오늘날 다문화 가족 혐오, 결혼 이주자 혐오 등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피 한 방울의 다름조차 인정하지 않는 한국식 인종주의의 특징이 엿보인다.

[‘똥남아’_경제력으로 가른 인종의 귀천]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인다.” 경제성장기인 1968년 반포된 〈국민교육헌장〉의 일부다. ‘민족중흥’, ‘국가 건설’ 등의 표현이 암시하듯, 당시 발전주의는 단 한 명도 빠짐 없이 투입되어야 할 국시(國是)였다(89~91쪽).

뒤이어 세계화 시대의 막을 연 1993년의 대통령 취임사는 “도약하지 않으면 낙오할 것”이라며, 경제성장을 민족 간 경쟁의 차원에서 바라보았다. 이로써 타민족은 무조건 밟고 올라설 대상이 되었다(96~98쪽).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가장 멸시당한 존재가 바로 동남아시아인이다.

한국에서 그들은 가난한 나라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대당하고, 또 ‘외노자(외국인 노동자)’로 불린다. 이 멸칭에는 “가난하면 문화적으로도 미개하고, 인지적으로도 열등할 것”이라고 판단하는, 즉 경제력을 혐오의 근거로 삼는 한국식 인종주의의 특징이 녹아 있다.

가령 한국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백인 교수는 외노자라 하지 않지만(186쪽), 반대로 인도인 교수는 어색해하는 식이다(138쪽).

2019년에는 한국에서 9년째 유학 중인 미얀마인이 동남아시아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불법 체류자 추방하라”라는 막말을 들어야 했다(189~190쪽).

비슷한 멸칭으로 ‘똥남아’가 있다. 가난한 동남아시아인은 더럽기까지 하다는 뜻으로, 차별의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베트남 현지에서 유행하는 한국어 교재 내용을 보면 “함부로 때리면 안 돼요” 등의 표현이 담겨 있다. 경제력으로 인종의 귀천을 가르는 한국식 인종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한, 비슷한 내용의 한국어 교재가 더욱 많아질 것이다(198~199쪽).

[‘개슬람’_이유 없는 혐오]

“모든 테러 분자는 이슬람이다.” 대구에서는 2020년부터 모스크 건축을 둘러싸고 지역 무슬림과 주민 간에 갈등이 벌어지고 있는데, 공사장 근처에 내걸린 현수막 속 문구다.

이처럼 우리는 “이슬람은 곧 사악하고 폭력적인 종교를, 무슬림은 곧 테러리스트를 자동적으로 떠올리는 연상 작용”에 익숙하다(208~210쪽).

사실 무슬림은 우리에게 낯선 존재다. 경제적이든 종교적이든, 충돌이든 협력이든 역사상 교류한 일 자체가 많지 않다.

그런데도 막연한 혐오를 품는 데는 “미국 대중매체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1994년 작 〈트루 라이즈〉부터 2016년 작 〈런던 해즈 폴른〉까지, 저자는 기독교의 이분법적 관점에서 무슬림을 테러리스트로 묘사한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를 살피며, 우리의 무슬림 혐오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추적한다(204~205쪽).

개화기에 서구 열강에서 무비판적으로 인종주의를 받아들였듯이, 오늘날 우리는 무슬림 혐오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 맹목적 혐오는 정치적 탄압을 피해 한국에 온 난민조차 예외로 두지 않는다. 2018년 조국 예멘의 내전을 피해 500여 명의 난민이 제주도를 찾았다.

곧 수많은 언론 매체가 “1인당 138만 원을 가져간다”, “난민으로 위장한 테러리스트다” 같은 확인되지 않은 소식을 보도하기 시작했고, 이는 대중의 ‘이슬라모포비아’를 한껏 자극했다. 물론 이는 이후 대부분 가짜 뉴스로 밝혀졌다(211쪽).

그러한 혐오와 차별을 뿜어내는 멸칭으로 ‘개슬람’이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은 “조선인 머리는 개와 다르지 않다”라며 한국인을 멸시했다.

그때 당한 차별과 모욕을 반세기가 지나 무슬림에게 그대로 퍼붓고 있는 것이다(53쪽). 모르면 알고자 하는 대신 두려워하고 혐오하는 것. 이것이 가장 최신의 한국식 인종주의다.

K의 시대,

그 이후를 그리다

바야흐로 ‘K’의 시대다.

〈오징어 게임〉부터 BTS까지, 한국(Korea)에서 만든 것, 또는 한국인이 국제 무대에서 활약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마치 라벨을 붙이듯 온갖 것에 ‘K’를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made in Korea’가 경쟁력인 시대가 된 셈이다(105~106쪽).

일제강점기 이후 지배당한 수모를 떨쳐내기 위해 한국인은 경제성장에 집착했다.

이 역사적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인은 똘똘 뭉쳐야 했고, 그 과정에서 다른 생각, 다른 존재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그렇다면 경제 규모 세계 10위에 오른 오늘날, 과연 우리는 다양성을 추구하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한국은 오히려 우월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이때 핵심은 “다양한 문화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내 것을 자랑하기에 바쁘다.

유튜브를 가득 채운 ‘국뽕’ 콘텐츠가 대표적인 예다(107쪽).

한국식 인종주의는 피부색과 민족, 경제력과 신앙 등 다양한 차별 기재를 능숙하게, 또 섬세하게 다룬다. 지난 150년의 근현대사를 지나며 이는 ‘마음의 습관’이라 할 정도로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143~144쪽).

저자는 이를 ‘혐오의 회로판’이라고 설명하는데, 어떤 상황에서든 그에 ‘알맞은’ 인종주의가 자동적으로 튀어나오기 때문이다(66, 209쪽).

이처럼 뿌리 깊은 한국식 인종주의의 역사를 뛰어넘기 위해 저자는 ‘시민적 민족주의’를 제시한다. 혈통이나 문화적 유사성, 경제력 등을 기준으로 ‘순수한’ 한국인을 골라낸다면, 과연 몇 명이나 해당될까.

그보다는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살며 역사와 경험을 공유하는 일 자체에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 즉 “정말로 우리는 모두 다 사람”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명제에서 인종주의 논의는 시작되어야 한다.

저자의 육성

다양성이 화두가 된 시대라지만,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를 지나며 수많은 ‘이유’와 ‘맥락’에서 소수자가 만들어지고 낙인찍히는 과정이 되풀이되었다.

이러한 차별과 혐오는 왜 뿌리 뽑히지 않는지 의문을 떨칠 수 없었고, 소수자의 정치 참여를 연구하며 그것이 오랜 역사의 산물임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나에게도 차별과 혐오의 소사(小史)가 있다. 어린 시절 짓궂은 친구들에게 ‘깜순이’, ‘시커먼스’ 등의 별명으로 불렸던 일이다.

그럴 때면 부모님께 나를 왜 이리 까맣게 낳았냐고 대들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렸을 적의 나와 내 친구들은 우리 사회의 ‘친백인성’과 ‘반흑인성’을 그 조그마한 머리와 마음에 이미 체화했던 듯싶다. 이 책이 누구나 언젠가 한 번은 불러보았을, 아무 생각 없이 내뱉었을 그 멸칭들의 행간을 깊이 들여다볼 기회가 되길 바란다.

화석처럼 굳어진 차별과 혐오의 역사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것을 바로 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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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의 날, 1492년 10월 12일 신대륙에 도착하다.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는 스페인에서 3척의 소형 배로 출항했다 1492년 10월 12일 콜럼버스의 함대는 아시아라고 믿었던 바하마제도에 상륙했다.콜롬버스는 그들과의 해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들은 소유한 모든 것을 기꺼이 교환했다 … 그들은 좋은 몸을 가지고 있었다…그들은 훌륭한 종이 될 것이다. … 50명으로 우리는 그들을 모두 정복하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할 수 있다.”

신대륙을 “발견”한지 500여년이 지난 후 매년 10월 두 번째 월요일이 ‘콜럼버스의 날’로 명명되어 미국 연방 공휴일로 지정됩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콜럼버스의 날’ 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