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뉴포트는 MIT에서 컴퓨터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조지타운대학교 컴퓨터공학과 교수입니다. 자신의 전공분야 연구를 하면서 《뉴욕타임스》, 《뉴요커》, 《와이어드》 등에 글을 기고하는 저널리스트이기도 합니다.
뉴포트는 딥 워크, 디지털 미니멀리즘, 하이브 마인드 등 여러권을 썼는데 그의 주된 관심사는 생산성입니다. 하이브 마인드에서는 이메일이 직장안에서 남발되면서 본래의 일에 집중못하고 이메일 송수신에 매달리는 직장 문화를 날카롭게 밝혔습니다. 딥 워크는 어떻게 해야 몰입하여 생산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인가를 다뤘습니다.
뉴포트는 팬데믹을 통해 재택근무과 보편화되는 가운데 직장인들이 이른바 소진(번 아웃) 현상에 시달리는 것을 관찰하면서 ‘슬로우 워크’라는 개념을 고안했습니다.
뉴포트의 슬로우 워크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일을 줄이자
둘째, 일을 자연스러운 리듬에 따라 천천히 하자
셋째, 일의 퀄리티를 높이자
뉴포트의 새 책(슬로우 워크)에서 ‘유사 생산성의 흥망’편을 골라서 10줄로 요약했습니다. 유사생산성이란 지식 노동자의 생산성을 측정할 때 농공업과 달리 수치화가 어렵기에 일하는 티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일의 실체와 상관없이 이메일이나 슬랙을 주고 받거나, 미팅이라 회의를 갖고 문서를 만드는 행위가 생산성의 척도가 됩니다. 따라서 지식 노동자는 일하는 티를 많이 내서 생산성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뉴포트의 분석을 접하고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이 속한 회사를 한번 둘러보세요. 일하는 티 내느라 근무 시간만 때우고 있지 않은지.
1.더 많은 시간을 일해라
CBS 방송국, 금요일 오후 3시 30분인데도 사무실 자리 중 4분의 3이 비어 있었다. 불만에 가득 찬 문베스사장은 이른 퇴근을 책망하는 과격한 메모를 직원들에게 보냈다.
메모는 ‘우리 방송사 시청률은 3위입니다. 금요일 3시 30분이면 ABC와 NBC 직원들은 아직 일하고 있을 시간입니다. 향후 이런 근무 태만은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이 일화는 20세기 지식산업 부문이 생산성을 고려하게 된 여러 방식을 보여주는 식상한 일례다. ‘일’이란 뭐가 됐든 직원이 사무실에서 하는 것이다. 일은 적게 할 때보다 많이 할 때 더 좋은 결과를 낳는다. 관리자의 업무는 직원이 ‘충분히’ 일하도록 감독하는 것이다.
가장 성공한 기업에는 가장 열심히 일하는 직원이 있다.
2.지식노동자의 생산성이란?
700여 명의 지식 노동자에게 “귀하가 속한 특정 전문 분야에서는 ‘생산성’ 및 ‘생산적’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합니까?”라고 질문했다.
이 질문에 업무 ‘유형’을 그냥 열거한 답변이 가장 많았다. 달성해야 할 구체적인 목표나 일을 잘했는지 못했는지 판가름할 수 있는 성과 척도를 제시한 답변은 아예 없었다.
모두가 생산성 용어에 온갖 불만을 품어왔건만, 지식 노동자들은 ‘생산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정의조차 합의해서 내놓은 적이 없었다.
2.1 피터 드러커
1999년 피터 드러커는 지식 노동자 생산성이라는 논문에서 “지식 노동자의 생산성을 다루는 연구는 이제 막 시작됐다”라고 공표했다. 하지만 드러커 조차 생산적인 일을 뒷받침할 ‘법한’ 요인들을 지적하고 있을 뿐, 측정할 구체적 특성이나 개선해야 할 과정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2.2 토머스 대븐포트
‘핵심 인재 경영법’저자 토머스 대븐포트는 이렇게 말했다.
“지식 노동자의 생산성은 좀처럼 측정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측정하는 경우에도 학자의 연구 성과를 논문의 질이 아니라 편수로 측정하는 등 정말 어처구니없는 방식으로 하죠. 지금도 여전히 꽤 초기 단계입니다”라고 설명했다. 대븐포트가 집필하거나 편집한 책은 총 25권중에서 ‘핵심인재 경영법’이 가장 적게 팔렸다.
2.3 표준 정의 부재
지식 노동만큼 규모가 큰 경제 부문에 생산성을 규정하는 유용한 표준 정의가 없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 밖에 거의 모든 경제 분야에서 생산성은 명확하게 정의된 개념일 뿐만 아니라 업무를 진행하는 방식의 중심이 되곤 한다.
3.생산성의 뿌리, 농업과 공업
농업에서 생산성의 의미는 단순하다. 토지 구획당 생산성은 토지에서 생산되는 식량의 양으로 측정할 수 있다. 이런 투입량 대비 산출량 비율은 농부가 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 수단을 탐색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일종의 나침반 역할을 한다.
3.1 공업 생산성
공장 소유주는 시급당 자동차 생산량에 관심을 기울인다. 공장 소유주는 생산공정을 연속 흐름 조립라인으로 바꿔서 지표를 개선할 수 있다. 이러한 예에서 생산되는 산출물의 유형은 다양하지만 방법을 바꾸도록 촉진하는 힘은 한결같이 ‘생산성’이다.
3.2 부상과 탈진 상쇄
이처럼 측정 가능한 개선을 중시하다 보면 당연히 인적 비용이 발생한다. 조립라인에서 실행하는 작업은 반복적이고 지루하며, 모든 동작에서 효율성을 강요하면 부상과 탈진을 부르는 상황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부문에서 놀라운 경제성장을 일으킨 생산성의 위력은 이런 염려들을 대부분 덮어버렸다
4.지식노동의 생산성, 양인가 질인가?
지식 노동자들은 복잡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업무량과 씨름해야 할 때가 많다. 회사 웹사이트에 올릴 추천글을 모으고 오피스 파티를 준비하는 동시에 고객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인사 담당자가 이메일로 보낸 이해상충 성명서도 수정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산출량을 콕 집어 추적해야 할지 명확하지 않다. 예를 들어 작년에 내가 당신보다 학술 논문을 더 많이 발표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어쩌면 당신이 시간을 많이 잡아먹지만 중요한 업무인 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정말로 내가 생산성이 더 높은 직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
5.지식 노동자, 감독 지휘하기 어렵다
지식산업 부문에서 업무 조직화 및 실행에 따르는 결정은 대체로 직원 개개인이 스스로 내려야 한다. 직원이 사용하는 소프트웨어를 기업이 통일하는 경우는 있지만 작업을 할당, 관리, 조직, 협력, 최종 실행하는 시스템은 대개 개인이 각자 알아서 짜기 마련이다.
피터 드러커는 1967년에 발표한 명저 ‘자기경영노트’에서 “지식 노동자는 가까이에서 낱낱이 감독할 수 없다. 그저 도울 수 있을 뿐이다. 나아갈 방향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6.지식노동에 도입된 유사생산성
유사생산성(pseudo-productivity)는 실제 생산 노력을 어림잡아 측정하는 주요 수단으로 눈에 보이는 활동을 이용하는 방식을 뜻한다.
‘생산성’을 정의하라는 물음에 독자들이 그토록 혼란스러워했던 까닭은 이 철학의 모호함에 있다.
이는 손쉽게 설명할 수 있는 정식 시스템이 아니다. 오히려 일종의 분위기, 즉 바쁘게 돌아가는 움직임으로 유지되는 의미 있는 활동이라는 포괄적인 기류에 가깝다.
7.컴퓨터와 네트워크, 유사생산성에 혼란 초래
1990년대 사무실에 네트워크 컴퓨터가 도입되면서 유사생산성의 지속가능성이 나락에 떨어졌다. 활동이 생산성을 가늠하는 대용물인 환경에서 최소한의 노력으로 바쁘다는 신호를 눈에 띄게 보낼 수 있는 이메일이나 슬랙 같은 도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평균적인 지식 노동자는 끊임없이 전자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최대한 빠르고 정신없이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데 점점 더 많은 일과 시간을 쓰게 됐다.
7.1 모바일 환경
노트북과 스마트폰이라는 형태로 휴대용 컴퓨터와 통신수단이 등장하면서 이런 경향은 한층 더 악화일로를 걸었다. 근면함을 증명하라는 요구가 근무시간을 넘어서서 퇴근 후 저녁시간이나 아이가 축구 시합을 하는 주말에까지 미치게 됐다.
7.2 소진 증후군 유발
컴퓨터와 네트워크는 여러모로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하지만 유사생산성과 결합해 과부하와 주의 산만에 시달리는 감각을 지나치게 자극한 결과, 우리를 괴로운 소진 증후군 위기와 정면충돌하는 경로로 내몰았다.
7.3 일하는 티 내기
마이라라는 가상 비서는 자신이 여러 지식 노동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알게 된 사실을 요약해 독자적인 관점을 제시했다. 마이라는 “고객들은 무척 바쁘지만 하고 싶거나 해야 할 일을 감당하기가 너무 벅차서 우선순위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아요. 그래서 무턱대고 일을 많이 하려고 애쓰면서 그런 식으로 발전해나가기를 바라곤 합니다”라고 말했다.
8.소진 증후군 현상 일반화
맥킨지 앤드 컴퍼니와 비영리단체 린인이 공동으로 지식산업 부문에 종사하는 북미 지역 종업원 6만 5,0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자주’ 혹은 ‘거의 항상’ 소진 증후군을 경험한다고 응답한 사람의 수가 크게 증가했다.
갤럽 여론조사에서는 미국 노동자들이 전 세계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집단에 속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스티브라는 전략 기획자는 “소진 증후군이 정말로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관심을 기울이고 싶은 일이 있어도 그 밖에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은 까닭에 그 일을 제대로 하면서 열정과 온전한 주의, 창의력을 쏟을 여력이 없어지거든요”라고 말했다.
9.유사생산성 재평가 필요
이처럼 음울한 현실에 완전히 굴복하기에 앞서 유사생산성이 과연 불가피한 개념인지 재평가해볼 필요가 있다. CBS 일화는 고군분투하던 방송국이 전세를 역전시켜 결국 시청률 꼴찌에서 1위로 올라서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는 희망찬 결말로 끝났다.
하지만 이런 전세 역전이 일어난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레슬리 문베스가 직원들에게 요구한 노동시간 연장은 시청률 상승과는 거의 무관했을 가능성이 높다.
10.CBS의 실적이 호전된 경위
앤서니 자이커가 기획한 ‘CSI’프로그램이 2000년 가을에 첫 방송이 나가자마자 히트를 치면서 시청률이 급증했다. 문베스가 직원들에게 더 많이 일하라고 압박함으로써 방송국을 살리고자 했다. 하지만 결국 방송국을 되살린 것은 앤서니 자이커라는 ‘CSI’시리즈 기획자가 3년 넘게 기울인 집요한 노력덕분이었다.
첨단 기술을 도입해 요구를 멈추지 않는 유사생산성과 비교하면 ‘느리다’고 할 법한 속도에서 나오는 그 마법은 장기간에 걸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최종현이 제2이동통신사업 진출을 계획하고 준비한 시점은 공교롭게도 아들 최태원이 노소영과 사귀기 시작해 결혼에 이르는 시점과 중첩된다.
1960년생 최태원은 신일고-고려대를 졸업하고 1983년 미국 시카고대 경제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1989년까지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1961년생 노소영 역시 윌리엄앤메리대를 거쳐 1985년 시카고대 경제학과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두 사람은 1985년 가을무렵 시카고대학 한국유학생 모임에서 만나 서로 사귀기 시작하였고, 1988년 9월 13일 청와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노소영의 아버지 노태우대통령은 1987년 12월 대선에서 당선, 1988년 2월부터 1992년 2월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SK측 설명에 따르면 최종현은 선견지명을 갖고 1985년부터 선경아메리카를 통해 미래 사업을 구상하고 인재를 모았다. 그러다가 목정래라는 한국계 컨설턴트를 만나 미국내 통신사업 흐름에 대해 조언을 듣고 1989년 이동통신사업 진출을 위해 통신사업체 지분투자, 통신사업체 선경직원 파견하여 현장경험 이수 등 사전 작업을 치밀하게 준비하였다.
그러면서 이동통신사업 진출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마침 1990년 노태우정부가 통신사업을 경쟁체제로 바꾸려는 정책을 발표하자, 미리 준비하고 있던 팀을 제2이동통신 진출용 업체로 전환하였다.
이런 치밀한 준비의 힘으로 1991년 정부의 2이동통신 선정에 응모하여 압도적인 점수차로 업체로 선정되었다.
이 프레임에 따르면 SK의 통신사업 진출은 최종현의 뛰어난 리더십과 목정래의 실무적 능력이 만들어낸 것이다. 아들 최태원과 조카 표문수는 실무자로 참여하였다.
사돈 노태우 대통령가 이끄는 정부의 도움을 전혀 받을 필요가 없고, 오히려 사돈기업이라는 평판으로 인해 손해를 봤다는 것이다.
반면 최태원과 노소영의 만남에서 결혼이 중첩되는 시기는 통신산업 구조 조정 정책 키를 쥐고 있는 노태우 대통령 집권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최종현-목정래의 뛰어난 혜안과 치밀한 준비만으로 통신산업 진출을 설명하는 것은 무리다.
첫째, 목정래는 경영정보시스템을 전공하였고 회계사출신으로 최종현에게 첨단 경영정보시스템 구축하는 일을 도왔다. 자신의 전공분야가 아닌 이동통신사업 컨설팅을 수행했다는 것은 전공분야를 엄격히 따지는 미국 컨설팅업계 관행에 맞지 않다.
둘째, 목정래는 적어도 1988년까지 이동통신 사업 기획을 구체적으로 수행하지 않았다. 이동통신사업 기획을 하기 시작한 시점은 1989년 중반부터다. 이 시점은 노태우정부가 출범하고 이어 최태원-노소영 결혼(1988년 9월)이후 시점이다.
이런 점은 노태우 정부의 통신산업 전체 그림에 대한 정보를 직간접적으로 획득한 후에 이동통신사업 진출을 구체적으로 준비했을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이다.
셋째, SK의 이동통신사업 진출 준비는 1989년 중반부터 그해 말까지 짧은 기간동안 숨가쁘게 진행되었다. 미국의 중소형 통신관련 업체에 투자하는 등 이동통신 관련 정보를 캐거나 실적을 쌓기 위한 프로젝트를 1990년까지 집중적으로 수행했다.
넷째, 이혼소송 2심 판결문에 따르면 1990년~1991년 사이 최종현은 청와대에서 이동통신 기술 시범회를 개최하였다. 미국에서 이동통신 사업 정보획득과 크레딧을 쌓고 나서 국내 최고 의사결정권자를 대상으로 기술 시범 행사를 개최한 셈이다.
이 시점은 최태원이 노소영과 결혼하고 나서 이동통신사업 기획팀에서 핵심 역할을 하고 있던 시점이다.
즉, 최태원은 1988년 9월 결혼하고 1989년 가을 시카고대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미주 경영기획실에 입사해 목정래 밑에서 이동통신사업 기획에 핵심역할을 수행하였다.
최종현-목정래의 움직임과 최태원-노소영의 동선이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정확하게 이동통신사업을 향해 같은 길을 향해 걷고 있었다.
최태원과 노소영은 부부로서 한 침대에서 자면서 목정래밑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대화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노소영 역시 최태원이 무슨 일을 하고 있고,무엇에 꽂혀 있는지를 부모와 공유하지 않았다는 것도 상식에 어긋난다.
최종현은 1980년대 초 유공을 인수하면서 중견그룹에서 10대 재벌 그룹으로 부상하였다. 최종현 회장은 당시 정주영,이병철 등 1세대 재벌 총수에 비해 나이가 어리고 또 미국 유학파로 새로운 메가트렌드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장학재단을 만들어 미국 유학생을 적극 지원한 것도 최종현의 그런 면모를 잘 보여준다. 민등산 조림 사업도 수십년을 내다보려는 그의 성향을 반영한 프로젝트였다.
최종현은 늘 미국 등 해외 흐름을 주시하면서 선경의 ‘미래 구상’에 몰두했다. 평소 해외 미디어를 늘 가까이 하고 또 그룹 간부나 대학 교수들을 모아놓고 토론하며 자문을 구하는 것을 즐겼다.
최종현은 국내 두뇌의 자문에 만족하지 않고 미국 컨설팅회사와 계약을 맺고 해외 두뇌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았다. 그때 그가 선택한 회사가 미국 굴지의 회계법인이자 경영 컨설팅회사인 ‘딜로이트 & 투치’였다.
그는 1984년에 미국에 설립한 ‘미국 경영기획실(SK USA)’를 딜로이트에 고객으로 등록했다. 딜로이트에서 선경 프로젝트 담당으로 배정한 컨설턴트가 목정래였다. 운동권 출신인 목정래는 1971년 제적을 당하고 군복무를 마치고 1977년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대학에서 금융학과 경영정보시스템(MIS)을 공부했다.
목정래는 졸업후 딜로이트에 입사해 컨설팅 업무를 하면서 미국 공인회계사 자격을 따기도 했다. 그는 선경이 어떤 그룹인지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한국인이라는 인연으로 선경 아메리카 컨설팅 업무를 맡아 최종현과 인연을 맺었다.
목정래는 경영정보시스템 전공자로서 당시 미국 기업에서 유행을 했던 시스템통합 흐름에 밝았다. 그룹내 전산시스템을 통합해 인사, 재무, 재고 등을 통합 관리하는 경영정보시스템을 구축하려는 흐름이었다.
최종현회장이 목정래에게 요청한 프로젝트는 선경그룹 경영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목정래는 1985년 선경 아메리카에 MIS를 설치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최종현과 목정래가 가장 집중한 프로젝트는 경영정보시스템 구축이 명확하다. 이후 이동통신사업 진출을 기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은 성공한 프로젝트에 대한 사후 해석격 설명이 대부분이다.
끊임없이 미래 먹거리를 찾는 최종현에게 목정래가 첫번째 글로벌 인재를 선경아메리카에 확보할 것을 제안하고 실행했다는 것이다.
목정래의 증언에 따르면 ‘선경’이라는 이름으로 월스트리트저널에 구인 광고를 내자 응모자가 없었다. 편법으로 딜로이트의 이름으로 모집 광고를 내면서 ‘딜로이트’라는 이름 밑에 작은 글씨로 ‘for Sunkyung’이라는 문구를 삽입했다.
목정래는 그때 이미 선경 아메리카의 MIS 설치 작업을 마치고 딜로이트로 원대복귀 해 있었다. 그러자 지원자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는 딜로이트 사무실에서 지원자들을 인터뷰하고, 그 결과를 서울에 있는 최종현에게 알렸다.
마케팅과 회계, 인사 분야의 사원 10여 명을 뽑았다. 모두 미국인이었다. 그들 밑에 조수로 재미 한국인을 한 명씩 더 뽑았다. 그들 인력을 거느리고 신규사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현재 선경그룹이 한국에서 하고 있는 사업을 어느 정도 확장할 수 있는지, 조사하는 작업부터 했다. 동시에 선경에 맞는 신규사업을 발굴하는 프로젝트를 딜로이트에 맡겼다.
두번째 단계는 최종현회장은 미국 금융산업을 조사하면서 금융산업 진출을 원했으나 목정래가 미국 통신산업 흐름을 설명하면서 이동통신사업 진출을 조언했다는 설명이다.
이어 최종현은 1988년 이동통신사업 진출을 결심하고 실무적 준비를 목정래를 시켜 미국에서 미리 준비하도록 했다는 것이다.(선경 아메리카에 텔레커뮤니케이션 팀을 발족시켰다)
목정래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이동통신사업의 장점은 설비투자가 유선통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겁니다. 게다가 교환기 대신 컴퓨터로 처리할 수도 있어 확장이 용이합니다. 또 이동통신을 하게 되면 유공처럼 울산의 석유화학단지에 정유탑을 많이 세울 필요도 없습니다.
또 재고가 없어도 되고 외상매출금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화를 쓰던 사람이 요금을 안 내면 갑갑해서라도 한 달 후엔 돈을 내게 됩니다. 그러니까 투자 대비 자금회수율이 높고, 외상매출금 걱정을 안 해도 되고, 재고로 썩힐 필요 없으니 얼마나 좋은 사업입니까.”
에스케이측이 최종현의 이동통신사업 사전 준비 증거로 제시한 사례는 다음과 같다.
첫째, 1988년 테네시 RSA에 지분투자했다.
둘째, 1989년 10월 뉴저지에 유크로닉스를 설립하였다.
셋째, 1989년 시카고 US셀룰러사에 100만달러를 투자하였다.
목정래는 US셀룰러사 투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시 선경에는 이동통신 전문가가 한 명도 없었다. 다만 앞날에 대비해 유공 전산팀을 분사해 정보통신회사를 만들긴 했지만, 그것은 SI(시스템 통합)전문 팀일 뿐 이동통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도 수준이 매우 낮은, 초보적인 SI팀이었다. 따라서 선경이 이동통신사업을 해야 한다면 그 분야의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때 마침 시카고에 ‘US셀룰러’라는 이동통신회사가 생겼다. 주사업자는 베이비 벨인 아메리테크였고, US셀룰러는 B밴드를 사용하는 지역사업자였다. 후발 사업자였기에 벨 회사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수익성은 높았다. 마침 그 회사가 투자자를 모으고 있었다.”
목정래의 US셀룰러사 투자 조건은 선경 직원들을 훈련시켜 달라는 것이었다.월급을 받지 않는 대신 6개월 내지 1년 동안 작업 현장에서 실무를 익힐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목정래에 따르면 마케팅 분야에 5명, RF 분야에 3명 등 10명을 US셀룰러사에 보냈고, 점차 50여 명까지 늘어났다. 테네시 등지에서 기지국을 설치하는 작업에도 참여시켜 현장 경험을 쌓았다.
1989년 목정래가 최종현의 요청으로 이동통신 진출 사전 준비작업을 하고 있는 사이
국내에서는 체신부가 통신사업 구조조정안를 만들기 위해 물밑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최종현은 1989년말 선경그룹 각 사에서 전문가 한 명씩을 차출해 전담팀을 구성했다.
이어 최종현은 1990년초에 목정래를 한국으로 불러들여 이동통신회사의 본격적인 설립 을 위한 전담팀을 꾸리도록 지시했다.
이어 노소영과 결혼하고 선경아메리카에 근무하던 최태원을 불러들이고, 경영기획실에서 근무하던 고종조카 표문수를 합류시켰다.
1990년 5월 목정래의 지휘아래 최태원 팀장, 표문수 팀장 등 50여 명의 직원으로 이동통신 전담팀을 구성했다.
이 조직이 결국 선경텔레콤(대한텔레콤→SK C&C→SK주식회사로 사명 변경)의 근간을 이루며 SK텔레콤 등 SK그룹 지주사 역할을 한다. 이 조직은 1단계에서 대한텔레콤 이름으로 제2이동통신 수주준에 뛰어들었고, 사업권 반납후에는 SK그룹의 SI회사로 변신하여 오늘날 에스케이주식회사로 확대 발전한다.
국내 통신정책은 1990년 4월을 기점으로 대 전환을 맞는다.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제주도 해저케이블 기념식에서 통신시장 경쟁체제를 도입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즉 유선전화, 무선호출,데이터 송수신, 이동통신 등 4개 통신 산업 분야에 경쟁체제를 도입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는 기존 사업자외에 다른 사업자에게 사업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다.
이어 체신부는 7월 9일 통신사업구조조정안을 발표하여 노태우 대통령의 선언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하였다.
1990년 한 해 내내 이동통신사업 진출 전담팀을 내부에서 비밀리에 꾸렸던 최종현은
1991년 4월 전담팀을 선경텔레콤이라는 법인으로 출범시켰다. 제2사업자 선정에 참여하겠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선경텔레콤 명목상 사장은 손길승(선경그룹 경영기획실장)이 맡았지만 실제 일은 목정래가 총괄이라는 타이틀로 수행했다. 최태원은 기획팀장, 표문수는 대외협력팀장, 이방형은 마케팅팀장 역할을 하였다.
선경텔레콤이 다른 업체들을 끌어들여 컨소시엄을 구성하면서 ‘대한텔레콤’으로 이름을 바꿨다. 출범 당시의 직원이 200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를 자랑했다.
선경은 미국의 GTE, 영국의 보다폰, 홍콩의 허치슨 등을 끌어들여 국제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영국의 이동통신회사인 보다폰은 1980년대 후반에 전 세계적인 시장망을 갖추고 있었다. 허치슨의 총수 이가성은 그 무렵 중국에서 이동통신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경쟁사였던 포철은 미국의 이동통신회사인 팩텔과 손잡았다. 포철은 한 때 대통령 노태우의 사돈인 선경을 컨소시엄에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종현이 제2이동통신사업 진출을 계획하고 준비한 시점은 공교롭게도 아들 최태원이 노소영과 사귀기 시작해 결혼에 이르는 시점과 중첩된다.
최종현은 1980년대 초 유공을 인수하면서 중견그룹에서 10대 재벌 그룹으로 부상하였다. 최종현 회장은 당시 정주영,이병철 등 1세대 재벌 총수에 비해 나이가 어리고 또 미국 유학파로 새로운 메가트렌드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장학재단을 만들어 미국 유학생을 적극 지원한 것도 최종현의 그런 면모를 잘 보여준다. 민등산 조림 사업도 수십년을 내다보려는 그의 성향을 반영한 프로젝트였다.
최종현은 늘 미국 등 해외 흐름을 주시하면서 선경의 ‘미래 구상’에 몰두했다. 평소 해외 미디어를 늘 가까이 하고 또 그룹 간부나 대학 교수들을 모아놓고 토론하며 자문을 구하는 것을 즐겼다.
최종현은 국내 두뇌의 자문에 만족하지 않고 미국 컨설팅회사와 계약을 맺고 해외 두뇌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았다. 그때 그가 선택한 회사가 미국 굴지의 회계법인이자 경영 컨설팅회사인 ‘딜로이트 & 투치’였다.
그는 1981년에 뉴욕에 설립한 ‘선경 아메리카’를 딜로이트에 고객으로 등록했다. 딜로이트에서 선경 프로젝트 담당으로 배정한 컨설턴트가 목정래였다. 운동권 출신인 목정래는 1971년 제적을 당하고 군복무를 마치고 1977년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대학에서 금융학과 경영정보시스템(MIS)을 공부했다.
목정래는 졸업후 딜로이트에 입사해 컨설팅 업무를 하면서 미국 공인회계사 자격을 따기도 했다. 그는 선경이 어떤 그룹인지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한국인이라는 인연으로 선경 아메리카 컨설팅 업무를 맡아 최종현과 인연을 맺었다.
목정래는 경영정보시스템 전공자로서 당시 미국 기업에서 유행을 했던 시스템통합 흐름에 밝았다. 그룹내 전산시스템을 통합해 인사, 재무, 재고 등을 통합 관리하는 경영정보시스템을 구축하려는 흐름이었다.
최종현회장이 목정래에게 요청한 프로젝트는 선경그룹 경영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목정래는 1985년 선경 아메리카에 MIS를 설치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최종현과 목정래가 가장 집중한 프로젝트는 경영정보시스템 구축이 명확하다. 이후 이동통신사업 진출을 기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은 성공한 프로젝트에 대한 사후 해석격 설명이 대부분이다.
끊임없이 미래 먹거리를 찾는 최종현에게 목정래가 첫번째 글로벌 인재를 선경아메리카에 확보할 것을 제안하고 실행했다는 것이다.
‘선경’이라는 이름으로 월스트리트저널에 구인 광고를 내자 응모자가 없었다. 편법으로 딜로이트의 이름으로 모집 광고를 내면서 ‘딜로이트’라는 이름 밑에 작은 글씨로 ‘for Sunkyung’이라는 문구를 삽입했다.
목정래는 그때 이미 선경 아메리카의 MIS 설치 작업을 마치고 딜로이트로 원대복귀 해 있었다. 그러자 지원자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는 딜로이트 사무실에서 지원자들을 인터뷰하고, 그 결과를 서울에 있는 최종현에게 알렸다.
마케팅과 회계, 인사 분야의 사원 10여 명을 뽑았다. 모두 미국인이었다. 그들 밑에 조수로 재미 한국인을 한 명씩 더 뽑았다. 그들 인력을 거느리고 신규사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현재 선경그룹이 한국에서 하고 있는 사업을 어느 정도 확장할 수 있는지, 조사하는 작업부터 했다. 동시에 선경에 맞는 신규사업을 발굴하는 프로젝트를 딜로이트에 맡겼다.
두번째 단계는 최종현회장은 미국 금융산업을 조사하면서 금융산업 진출을 원했으나 목정래가 미국 통신산업 흐름을 설명하면서 이동통신사업 진출을 조언했다는 설명이다.
이어 최종현이 이동통신사업 진출을 결심하고 실무적 준비를 목정래를 시켜 미국에서 미리 준비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목정래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이동통신사업의 장점은 설비투자가 유선통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겁니다. 게다가 교환기 대신 컴퓨터로 처리할 수도 있어 확장이 용이합니다. 또 이동통신을 하게 되면 유공처럼 울산의 석유화학단지에 정유탑을 많이 세울 필요도 없습니다. 또 재고가 없어도 되고 외상매출금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화를 쓰던 사람이 요금을 안 내면 갑갑해서라도 한 달 후엔 돈을 내게 됩니다. 그러니까 투자 대비 자금회수율이 높고, 외상매출금 걱정을 안 해도 되고, 재고로 썩힐 필요 없으니 얼마나 좋은 사업입니까.”
당시 선경에는 이동통신 전문가가 한 명도 없었다. 다만 앞날에 대비해 유공 전산팀을 분사해 정보통신회사를 만들긴 했지만, 그것은 SI(시스템 통합)전문 팀일 뿐 이동통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도 수준이 매우 낮은, 초보적인 SI팀이었다. 따라서 선경이 이동통신사업을 해야 한다면 그 분야의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때 마침 시카고에 ‘US셀룰러’라는 이동통신회사가 생겼다. 주사업자는 베이비 벨인 아메리테크였고, US셀룰러는 B밴드를 사용하는 지역사업자였다. 후발 사업자였기에 벨 회사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수익성은 높았다. 마침 그 회사가 투자자를 모으고 있었다.
목정래는 그 회사에 선경 직원들을 훈련시켜 달라는 조건으로 100만 달러를 투자했다. 월급을 받지 않는 대신 6개월 내지 1년 동안 작업 현장에서 실무를 익힐 수 있었다. 그 회사 사장이 딜로이트 고객이어서 어려운 부탁을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첫해에 마케팅 분야에 5명, RF 분야에 3명 등 10명을 심을 수 있었다. 훈련요원은 해가 갈수록 늘어나 50여 명이 되었다. 미국에서 채용한 직원만으로는 숫자가 부족해 한국에서 차출한 대리급 직원을 파견해 기술을 쌓기도 했다. 테네시 등지에서 기지국을 설치하는 작업에도 참여했으므로 기술 습득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80년대 말에는 독자적으로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출 수 있었다.
이동통신사업에 경쟁을 도입하다
1989년 말 최종현이 미국에 있는 목정래를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선경그룹이 이동통신 전담팀을 구성하겠다며 총책을 맡아 달라 부탁했다. 그 무렵 체신부는 통신사업 구조조정안을 만드느라 야단법석이었다. 머지않은 장래에 한국의 이동통신시장이 요동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선경그룹은 각 사에서 전문가 한 명씩을 차출해 전담팀을 구성했다. 목정래는 한국으로 날아가 그들과 워크숍을 갖고 그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하지만 그는 그때까지도 딜로이트 사원으로 남아 있었다.
이동통신회사의 본격적인 설립 작업은 이듬해인 1990년부터 시작되었다. 그 해 초 최종현이 미국에 있는 목정래에게 전담팀을 재구성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직도 딜로이트 소속이었지만, 목정래는 군말 없이 한국으로 날아왔다. 미국에 남아 있는 최태원을 불러들이고, 경영기획실에서 번역 일을 맡고 있는 표문수를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그 해 5월 50여 명의 직원으로 이동통신 전담팀을 재구성했다. 그 무렵 포철이 이동통신사업에 참여한답시고 미국의 이동통신회사인 팩텔과 손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경의 오랜 내공의 역사를 알 리 없는 포철은 대통령 노태우의 사돈인 선경을 컨소시엄에 끌어들이려고 열심히 손짓했다.
선경은 포철과 손잡는 대신 미국의 GTE, 영국의 보다폰, 홍콩의 허치슨 등을 끌어들여 국제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영국의 이동통신회사인 보다폰은 그들 나름의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1980년대 후반에 전 세계적인 시장망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동통신회사 가운데는 가장 슬림한 형태로 운영하며 많은 이익을 내고 있었다. 협력 파트너로서는 그만이었다. 또한 허치슨의 총수 이가성은 그 무렵 중국에서 이동통신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중국 진출을 꿈꾼다면 최적의 파트너라 할 수 있었다. 당시는 우리나라가 중국과 수교하기 전이어서 중국에 직접 진출할 수도 없었고, 중국 파트너와 손잡을 방법도 달리 없었다.
그처럼 착실히 실력을 쌓고 있는데, 반가운 뉴스가 날아왔다. 1990년 7월 체신부가 통신사업 구조조정계획을 발표했다. 골자는 이동통신사업 분야에도 경쟁을 도입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한국이동통신(주)이 독점하고 있는 이동통신사업에 제2사업자를 허용해 한국이동통신과 경쟁을 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가 열리고 있었다.
1991년 4월 선경그룹은 제2사업자 선정에 대비하기 위해 ‘선경텔레콤’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미주 경영기획실에 남아 있는 핵심 멤버들을 불러들여 사업계획서 작성 팀을 구성했다. 그때 최태원을 기획팀장, 표문수를 대외협력팀장, 이방형을 마케팅팀장에 앉히고, 목정래는 뚜렷한 직함 없이 ‘총괄’이라는 애매한 이름으로 사령탑 역할을 맡았다. 운동권 학생으로 반정부 활동을 벌였던, 자유인다운 면모가 엿보이는 대목이라 하겠다.
선경텔레콤이 다른 업체들을 끌어들여 컨소시엄을 구성하면서 ‘대한텔레콤’으로 이름을 바꿨다. 출범 당시의 직원이 200명이나 되었으니 급조된 다른 회사의 컨소시엄과는 규모부터 달랐다. 선경그룹 경영기획실장 손길승이 사장 자리를 맡았으나 1주일에 한 번 얼굴만 내밀었을 뿐, 모든 일은 목정래가 도맡아 끌고 갔다.
2022년 7월 16일 서울 아산병원에서 목정래 전 SK텔레콤 부사장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팬데믹 영향으로 인해 조카 모희숙씨 등 소수의 친지들만 고인의 마지막 길을 같이 했다. 목정래 부사장의 자녀들은 모두 미국 국적으로 미국에 거주하고 있었다.
목정래 부사장의 부음을 접한 정보통신계 인사들도 소수였다. 그는 자녀들을 미국에 두고 강원도 용평에서 전원생활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집 지붕에 생긴 벌집을 처리하다 불의의 사고를 당해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목정래 부사장과 친분이 있는 정보통신계 인사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깊이 애도하면서 오늘날 SK텔레콤의 탄생의 숨은 주역이었던 그와의 인연을 떠올렸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정보통신부에서 근무하면서 목정래 부사장이 SK텔레콤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최종현회장 시대가 가고 최태원 시대가 열리면서 목정래부사장의 존재는 SK텔레콤뿐만 아니라 SK 그룹내에서 잊혀졌다. 목부사장의 성격도 나서서 존재감을 뽐내려고 하지 않고, 조용히 초야에 묻혀기를 원했기에 더욱 그러했다.
목정래라는 인물을 다시 소환한 것은 최태원 회장과 노소영 나비 관장간 이혼소송과 그에 따른 판결이다. 특히 2심에서 재판부가 노소영관장의 부친 노태우전대통령이 SK텔레콤 출범과 성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점을 인정하여 1조3천억원에 이르는 자산을 노관장에게 주도록 판결함으로써 SK텔레콤의 탄생 과정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가 새삼 조명을 받고 있다.
재산분할에서 핵심 쟁점은 현재 SK그룹의 지주사인 SK주식회사에 대한 최태원회장의 지분이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는가다.
이에 대한 최태원회장 노소영관장측 주장은 전혀 다르다.
최회장쪽은 최태원회장의 SK주식회사 지분과 그룹 총수 지위는 최종현 회장이 생전에 설계한 큰 그림과 사촌간 협약이라는 집안 문화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노소영쪽은 최회장의 지분은 노태우 대통령의 비자금(300억원)과 눈에 보이지 않는 대통령의 영향력에 뿌리를 두고 있고, 결혼후 최회장의 그룹총수 경영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재산분할에 대해 최회장은 자신의 지분은 아버지(최종현)가 만들어준 것이고, 그룹 총수지위는 사촌들이 밀어준 것이라고 주장해야 결혼후 회사 성장 분을 분할에서 제외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노소영쪽은 최회장 지분의 뿌리인 대한텔레콤 지분은 노태우대통령의 비자금이 시드머니 역할을 했고, 이어 결혼후 그룹총수 부인으로 내조하였기에 성장분은 공동 재산이라고 주장해야 최회장 재산을 분할 받을 수 있다.
SK텔레콤 탄생의 실무 지휘자였던 목정래는 최종현회장 생존시 늘 독대하면서 크고 작은 궂은 일을 처리했다. 따라서 목정래 부사장이 생존해 있다면 이혼소송의 핵심 쟁점에 대해 가장 정확히 증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통신산업 역사 현장을 생생하게 경험했던 다수의 인사들은 SK텔레콤 탄생이 한 두개의 프레임으로 분석하기에는 굉장히 복합적이며 다층 구조성격을 띠었다고 증언한다.
이를테면 노태우전대통령이 사돈 최종현회장을 위해 이동통신사업을 그냥 줬다는 프레임은 모든 것을 쉽게 설명할 수 있지만, 실제 SK텔레콤이 국내 1위 사업자가 되는 복잡한 과정을 설명하는데 너무 제한적이다.
또 그렇다고 최종현회장의 미래를 보는 눈이 섬유 화학그룹이었던 SK 그룹을 이동통신과 반도체 기업으로 키웠다는 프레임 역시 현실의 복잡한 요소를 제거해버린 단순한 서사에 불과하다.
먼저 최종현회장과 목정래의 만남에서 SK텔레콤 탄생 비화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보자.
최종현은 1980년대 중반부터 섬유 화학 중심의 선경그룹을 키우기 위해 새로운 트렌드를 찾는데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미국 유학 경험으로 인해 글로벌 컨설팅 회사를 활용하는 것을 중시하였는데, 핵심 파트너는 미국계 딜로이트투치였다.
최회장은 신사업 발굴 실행조직으로 1986년 미국에 SK 지사(미주 경영기획실)를 뉴욕에 설립하였다. (최태원회장은 1985년 미국 시카고대를 다니면서 노소영과 사귀고 있었다.)
그는 야심차게 미국 지사를 설립과정에서 딜로이트 투지에 컨설팅을 의뢰했는데, 딜로이트는 한국계인 목정래를 SK 담당으로 배정하었다. 최회장은 미국 딜로이트투치에 근무하던 30대 목정래를 만나 그의 능력을 높이 샀다.
목정래는 진주고를 졸업하고 연세대 법과에 70년에 입학하였다. 그는 71년 유신체제 반대 학생운동 리더 역할을 하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제적당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경영학으로 전공을 바꿔 졸업하고 딜로이트투치에 입사해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목정래의 전문 분야는 MIS(경영정보시스템)구축이었다.
이후 목정래는 뛰어난 영어실력과 미국 컨설팅업계내 네트워크를 활용하면서 최회장의 미래구상을 뒷받침하는 두뇌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의 또다른 임무는 최태원의 유학생활과 미국 생활을 뒷바라지하는 일이었다. 최태원은 졸업후 1988년 9월 13일 노소영과 결혼식을 올린 뒤 노소영과 함께 뉴욕에서 목정래부사장 밑에서 1990년 12월까지 경영수업을 받았다.
SK그룹은 이동통신진출에 대해 최종현 회장이 혜안을 갖고 목정래를 통해 미국내 이동통신사업 동향을 조사하거나 소규모 투자를 통해 경험을 축적하는 등 정부 특혜와 상관없이 치밀하게 준비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실제 과정을 보면 다른 해석을 낳을 수 있다.
최종현회장이 목정래씨를 통해 구현하려고 했던 실제 프로젝트는 선경그룹의 경영정보시스템을 최첨단으로 구축하는 것이었다. 당시 세계 굴지의 기업들은 첨단 경영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경쟁을 벌였고, 최회장은 이런 흐름을 굉장히 부러워했다.
목정래부사장의 전문 분야 역시 경영정보시스템 구축이었기에, 그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최회장에게 보고하면서 선경그룹 경영정보시스템 구축을 지휘하였다.
여기서 최회장이 경영정보시스템 구축에 힘을 쏟는 기간(1986년~1988년)에 미국 산업계에서 일어난 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1984년 AT&T가 지배하던 통신 독점체제가 깨지고, 경쟁체제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통신산업이 부상하였다. 최회장과 목정래는 이런 흐름을 예의주시하면서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분서하였다.
두번째 주목할 것은 미국 통신산업계 변화에 영향을 받은 국내 통신산업 정책의 변화였다. 정보통신부(구 체신부)는 한국통신공사중심 통신 사업 독점이 깨고 데이콤 등 새로운 통신업체를 육성하는 정책을 도입하였다. 유선통신 시장 독점 구조는 깨졌고,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한 이동통신은 여전히 한국통신의 자회사인 이동통신이 독점하고 있었다.
묘하게 미국과 한국 통신산업 정책이 대 전환을 이루는 시점에 아들 최태원이 강력한 차기 대통령후보였던 노태우의 딸 노소영과 유학중 연애를 통해 대통령과 1988년 사돈 관계를 맺는 일이 일어났다. 실제 노태우는 대통령이 되어 88년부터 92년까지 5년동안 청와대를 지켰다.
최회장은 미국과 한국 통신정책 변화와 대통령집안과 사돈이 된 것을 계기로 목정래를 통해 신사업 개척과 아들 그룹 승계라는 두 마리토끼 잡기를 구상하였다.(계속)
한국언론진흥재단은 2023년 11월 9일 엘레나 페로티 세계신문협회 미디어정책및 홍보 수석이사를 초빙해 ‘AI와 뉴스산업 혁신’을 테마로 조찬 강연회를 가졌다. 페로티 이사는 세계신문협회에서 미디어 정책과 홍보를 담당하면서 세계 각국의 언론 관련 단체와 협력하고 소통하는 일을 맡고 있다.
페로티는 강연에서 생성형AI의 학습에서 뉴스 콘텐츠가 핵심이므로 꼭 제 값을 받아야 하며 이를 위해 전세계 언론계는 빅데크를 대상으로 집단 행동을 하면서 함께 협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페로티 이사의 강연을 소재로 회원들이 12월 22일 토론회를 가졌다.
언론사 생성형 AI 수용 대세
2022년 11월 오픈AI가 챗GPT3를 발표하면서 순식간에 생성형AI가 언론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101개 언론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50%는 이미 생성형AI를 사용하고 있고 70%는 빠른 시간안에 생성형 AI가 뉴스룸에서 유용한 도구가 될 것이라고 답했다. 이에 비해 20%만 생성형AI 사용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는데 그쳤다.
응답한 언론사는 생성형 AI를 콘텐츠 요약, 교열, 기초자료 조사, 업무흐름 자동화 등에 활용하여 기자들이 더 창의적인 일에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언론계는 생성형 AI에 대해 폭넓은 낙관론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회의론도 존재한다. 언론사들은 오정보, 정보의 정확성, 데이터 프라이버시, 규제 등을 우려하고 있다.
생성형 AI 규제 추세와 현황
2023년 5월 오픈 AI의 샘 앨트먼 사장이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생성형 AI를 사용할 경우 대중을 상대로 출시하기 전에 위험성을 걸러내기 위한 사전 테스트를 실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챗GPT3출시 이후 2023년 8월 중국은 24개 항목을 담은 가이드라인을 발표함으로써 AI를 규제하는 최초의 국가가 됐다. 가이드라인에는 검열에 가까운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올해 9월 AI 안전포럼이 미국 의회에서 열렸는데 샘 올트먼, 마크 저크버거, 일론 머스크 등 참여자들은 규제에는 동의했지만 누가 규제하고 어떻게 규제하느냐는 문제에는 합의하지 못했다. 미 바이든 정부는 10월 31일 행정명령을 미국 정부의 모든 기관이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AI의 사용과 개발에 힘써야 한다고 규정하는 행정명령을 발포했다.
또 일본 히로시마에 모인 G7은 일본의 주도로 AI개발 원칙, 개인정보보호 등 11개 항목의 가이드라인에 합의했다. 11월 1일 영국 블레츨리파크에서 열린 AI안전 정상회의에 참석한 국가는 AI의 리스크를 함께 평가하자는 선언문을 채택했다. 차기 회의는 2024년 한국에서 개최될 것이다.
유럽연합도 리스크를 수용불가, 고위험, 제한적 또는 최소 등 등급별로 분류하고 저작권법을 지키면서 모델을 학습시키는 법안을 마련했다. 또 법을 어길 경우 3천만 유로 또는 매출액의 6%까지 벌금을 매길 수 있도록 했다.
언론계 생성형AI 활용 현황과 이슈
런던정경대학의 조사에 따르면 언론계에서 뉴스 수집, 뉴스 제작, 뉴스 배포에 AI를 폭넓게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블룸버그GPT는 금융콘텐츠에, 런던타임즈 제임스는 사용자의 행태 분석에, 로이터의 링스 인사이트는 탐사형 저널리즘 맥락적 정보 제공을 하는데 활용되고 있다.
뉴스 수집의 경우 데이터 수집, 자동번역, 텍스트 추출, 요약, 데이터분류 등에 활용하고 있다. 뉴스 제작 프로세스에서는 사실확인, 팩트체킹, 교정, 헤드라인 뽑기, 이미지 생성 등에 활용하고 있다. 뉴스 배포에서는 개인화 뉴스제공, 매체별 콘텐츠 최적화, 텍스트 오디오 전환, 검색최적화 등에 AI를 활용하고 있다. 어떤 매체는 미국식 영어가 아닌 영국식 영어 규칙이 있어서 특정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규제하는데 AI를 활용한다.
언론사는 이런 AI활용을 통해 기자들이 반복적이거나 기계적인 일에서 벗어나 창의적인 일에 몰두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생성형 AI의 기자직업 위협
AI는 언론인의 생계에 위협을 줄 수 있다. 올 6월 미국 매체인 인사이더의 파업은 뉴스 업계에서 최장기 파업이었다. 이 파업이 끝나고 나서 노조는 만약에 생성형 AI를 뉴스에 활용할 경우 노조가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 작가 조합(WGAW)은 146일에 걸쳐 파업하면서 할리우드 영화제작과 TV 프로그램 제작에 영향을 미쳤다. 시위에 등장한 한 피켓에는 “작가들은 연극 ‘R.U.R’에서부터 AI 위험성을 경고해 왔다”고 적혀있다. (‘R.U.R’은 체코작가 카렐 차페크가 1920년에 발표한 희곡으로 로봇을 최초로 다뤘다)
독일 빌트지는 올해 200명을 해고했는데
마티아스 되프너 악셀 스프링거 CEO는 “AI가 정보를 수집하는데 사람도 곧 더 나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호주 뉴스코프의 경우 4명의 로컬 데이터팀이 매주 3천개의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AI의 사용시 허위정보 리스크, 편향적 정보 리스크가 발생하고, 사람이 생성한 것과 AI가 생성한 콘텐츠를 구분하기 어렵다. 나아가 언론인의 신뢰도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점으로 인하여 다른 기회가 있다. 즉, 우수한 저널리즘이 더욱 중요하고 가치가 올라갈 것이다. 스타 저널리스트의 가치도 커질 것이다.
생성형 AI에 대한 사람의 감독
생성형 AI 활용과 관련 윤리적 가이드라인을 가지고 있는 뉴스룸이 많지 않다. 올 9월에 옥스퍼드대 조사 결과 200개 중 52개만 가이드라인 가진 것으로 나타났는데 기본적으로 내용이 유사하다.
또 경영진이 언론인들이 AI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정한 것으로 공통적 사각지대도 있다. 예를 들어 가이드라인 위반에 대한 단속으로서 벌금이나 벌칙을 마련하지는 않았다.
아웃풋에 대한 감독은 있지만 알고리즘에 대한 감독은 제한적이며 외부협업자들과 관련된 부분이 없다. AI사용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있다면 소스에 대해서도 가이드라인이 있어야 하는데 부족하다.
영국 가디언은 3개월 동안 편집, 기술, 법률 등 뉴스 제작의 여러 부서가 참여한 워킹그룹에서 마련했는데 사람이 감독하는 것은 필수적이라고 규정했다. 생성형 AI도구를 사용할 경우 보다 양질의 저널리즘이 가능할 때 사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시니어 에디터가 생성형 AI가 만든 결과물을 승인했을 때만 사용해야 한다. 또 생성형 AI사용을 대중에게 반드시 알려야 한다. 대규모의 데이터세트를 검색하거나 마케팅을 위한 아이디어 창출, 비즈니스 프로세스 단축 등에 활용하면 반드시 승인받아서 투명하고 공정하게 사용하고 이를 알려야 한다.
AP의 가이드라인은 정확하고 공정한 정보를 공유하는 책임은 언론인이 가지고 있다고 규정한다. 또 이 정보에 의구심이 있다면 이 정보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규정한다. 챗GPT를 이용해 동영상, 사진,오디오 등을 변경해서 안되며, 또 소스 데이터를 AI에 탑재하거나 민감정보를 AI에 제공하면 안 된다고 규정했다.
AI 시스템은 발행인들에 의해 승인되어야 하고, 승인된 콘텐츠만을 사용해야 하고 기록을 제대로 남겨야 한다. 어떠한 목적으로 어디에 사용되고 승인받았는지를 기록으로 남기고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마리아 레사가 국경없는 기자회와 함께 주도한 AI 저널리즘 파리 헌장에는 발행인들의 관점이 반영된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핵심적인 아이디어는 뉴스룸에 AI 사용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는 것이다. 아주 성공적이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AI가 규제해야 하는 것으로 인지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저작권에 대한 정당한 요구
37개의 웹사이트가 CNN,뉴욕타임스, 로이터 뉴스를 재료삼아 새로운 뉴스를 작성하는 것으로 적발됐다. 이들 사이트가 광고수익을 얻어도 출처인 언론사에 배분해주지 않는다. 언론사는 이렇게 사용된 줄 몰랐을 것이고 79%가 표절탐지기로도 찾아낼 수 없다.
챗GPT4를 사용해서 뉴욕타임스를 인용한 것인지 모르게 검색엔진 최적화되도록 쓰라고 하면 AI기 생성 한 기사인지 모르게 작성해준다. 구글의 AI 학습용 데이터인 C4 데이터세트를 분석하면 뉴욕타임스(4위) 가디언지(6위), 포브스(8위)순으로 언론사의 콘텐츠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더 이상 생성형 AI의 학습에 데이터를 제공하지 않는다. 또 뉴욕타임스도 AI의 웹크롤링을 막고 있다.
현재 챗GPT, 바드 등 7개의 LLM(Large Language Model)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데,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돈과 양질의 콘텐츠에 대한 접근이 필요하다. 이들이 절실하게 원하는, 양질의 학습용 콘텐츠는 바로 미디어가 생산하고 있다.
미국의 FTC에서는 올 7월 오픈 AI에 대해 불공정한 데이터 사용여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AI 기업들은 이런 소송을 예상하고 있었다. 오픈AI는 소송이 진행되면 데이터를 사용하지 못할 것을 우려해 AP와 계약을 체결했다. 특히 영어가 아닌 언어로 발행되는 뉴스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만큼 희소성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콘텐츠가 LLM에 인풋으로 사용되면 돈을 받아야 하는데 너무 적은 돈을 받고 계약을 맺으면 안 된다. 이전에 너무 적은 돈을 받고 콘텐츠를 테크 기업이 제공했던 실수를 반복하면 안 된다.
생성형AI회사는 자신들이 필요하는 콘텐츠에 대해 돈을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오픈 AI경우 출범 7개월만에 회사가치가 뉴스코프사의 2배를 넘어섰고, 오픈AI지분 49%를 보유중인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사상 최초로 4조달러짜리 회사가 되었다.
언론사가 할 일을 다음과 같다.페이월이라는 유료화도 AI의 크롤러로부터 완전히 콘텐츠를 보호하지 못하므로 집단 행동과 집단 협상이 필요하다. 또 미디어의 웹사이트 이용약관에 자사 데이터가 AI 트레이닝에 사용되지 못하도록 규정해야 한다.
AI를 잘 활용할 수 있는 인력을 훈련시켜야 하고, AI 관련 가이드라인를 채택해야 한다. 외부 협력과 국제적인 연대를 해야 한다. 여러 AI 관련 각종 국제 모임에 참여하는 등 노력이 필요하다.
질의응답시간
페로티 이사는 강연후 질의응답시간을 갖고 생성형 AI활용할 경우 사람의 역할에 대한 청중의 질문에 “웹사이트에 컨텐츠를 올릴 때 꼭 사람이 콘텐츠를 검토하고 나서 출고해야 한다. 이는 사람이 항상 읽고 편집하고 검토한다는 뜻”이라고 답변했다.
또 뉴스미디어가 LLM에 양질의 콘텐츠를 제공하지 않으면 편향되거나 허위정보를 학습하고 결국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미디어의 사회적 책임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존재 자체가 위험하므로 세상을 구해야 할 임무가 있는 건 아니다”라고 답변했다.
페로티 이사는 “한 언론사가 무료로 제공한다고 하고 나머지가 제공하지 않는다하면 챗GPT는 한 언론사에서 콘텐츠를 가져오면 되므로 충분하다고 판단할 것”이라면서 “언론계 집단행동이나 단결이 없으면 기술기업이 콘텐츠를 쉽게 활용할 수 있다. 꼭 콘텐츠의 가치를 인정받고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페로티이사의 강연은 생성형AI 최신 동향 정보를 충실하게 공유해주고 또 언론계의 현실적인 대처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한국 언론계가 깊이 새겨 듣고 바로 실행에 옮겨야 할 대목이 많다. 예를 들어 생성형AI를 저널리즘에 접목하는데 필요한 가이드라인을 빠른 시간안에 만들고 또 빅테크 기업을 대상으로 저작권 협상을 하기 위해 언론계가 똘똘 뭉쳐 단일 협상창구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개별 언론사입장에서 생성형AI의 급부상은 그리 반갑지 않다. 설사 공동 협상을 통해 저작권료를 받는다고 해도 각 언론사의 경영 상황을 극적으로 호전시킬 정도의 의미있는 금액이 아닐 것이다. 더욱이 생성형AI가 모든 언론사의 기본 도구가 되면 차별성이 퇴색되고 결국 새로운 수익은 없고 비용만 추가할 것이다. 오픈AI가 천문학적 돈으로 개발한 챗GPT를 저렴한 가격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시장을 장악하면 결국 돈벌이에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페로티 이사가 강연에서 스타 저널리즘의 가치가 상승할 것이라는 전망한 대목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찾을 수 있다. 스타 저널리즘을 실현하려면 먼저 숙련 인력과 미숙련 인력이 혼재한 한국식 뉴스룸 인력구조를 확 바꿔야 한다. 아울러 스타 저널리스트에 대한 보상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할 것이다.
Platform Intelligence in News (PIN) “Brilliant. Deep, mature and well presented project. This is it: AI done well. Solid, well thought venture of a serious business into dangerous territory. So much to be learned: applause.”
“Russmedia has created a comprehensive integration of AI across its newsroom workflows that is impressive in scale while at the same time being sensitive to editorial responsibilities. The approach was well thought through, thorough and transparent. They have thought about how to future proof their integrations while also bringing staff along for the journey.”
“From value of news content to newsroom transformation to fulfilling business needs, United Daily News Group has shown its competency to make this project a great success with data-driven curation approach reshaping subscription growth.”
“An amazing project connecting people and the city via comprehensive touch points across various media. A testament of how powerful a media platform could be when it’s used in a very creative way!”
BEST INNOVATIVE DIGITAL PRODUCT
News Laundry Media Private Limited, India:
Newslaundry App “Digital audiences are expecting user centric products and experiences that match their current consumption habits at other apps. This is a great case that confirms how important it is to prioritise ’product’ strategies and not only ’pricing’ strategies, when we move to subscription based models.”
“This strategy showcases a combination of creativity, innovation, and tangible results. Not only did it succeed in increasing donations, but it also raised awareness with an impact on public health. Undoubtedly, a success story that stands out in Swedish society.”
”Reclaim Your Brain” from The Guardian is a transformative experience that guides readers toward a healthier relationship with their devices. Like a path unfolding step by step, each edition cleverly connects to the next, enriching the journey towards digital mindfulness. Blending humour with evidence-based advice, this newsletter not only captures attention but empowers readers to control their mobile usage. Behind each issue, there is extensive research and expertise, making complex concepts accessible and applicable day by day.”
“This series is excellent. Each episode tells a compelling story, and they are tightly narrated. The quality of both the video and audio is excellent.”
“The transitions of the illustrations from the most understandable data to the least manageable figures create an attraction towards storytelling that is extremely difficult to achieve.”
“This initiative goes beyond just delivering fact-checked content but shows how fact-checking is done and demonstrates how to use the tools and techniques. The examples used in the videos are real cases from different parts of the world and the explanations given by the journalists are clear and easy-to-follow. This can be a great resource for fact-checkers, trainers and ordinary people who want to learn how to do fact-checking by themselves.”
세계신문협회 총회가 2023년 6월 28일~30일 타이페이에서 열렸습니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뉴스룸에 미치는 영향이 핵심 이슈였습니다. 오디오 포맷의 재발견도 관심을 모았습니다. 행사 핵심 내용을 10줄로 요약하였습니다.
핵심 10줄 요약
1.생성형 인공지능시대
챗GPT가 등장하면서 생성형 거대 인공지능모델이 갑자기 6개월만에 언론계를 덮쳤다. 언론계에게 마지막 기차일수 있다. 이 마지막 기차를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가짜뉴스 생성 가능성, 거대 인공지능엔진에 저작권을 보호받지 못할 가능성, 숨은 비용 등 리스크도 숱하게 존재한다.
뉴스룸에서 간단한 프로세스 대체(예_인터뷰 녹음 자동 텍스트 추출, 이미지 가공, 헤드라인 테스트 등)에 적용하고 있다. 뉴스룸에 적용한 프레임워크(윤리 가이드 등)를 만들어 실행해야할 시점이다.
인공지능시대에 휴먼터치가 확실한 휴먼 메이드가 프리미엄급으로 대접받을 수도 있다.
2.구독모델 성장세 주춤_팬데믹 여파
최근 수년동안 언론산업은 디지털 구독모델을 통해 지속가능한 미디어가 되려고 애쓰고 뉴욕타임스, 파이낸셜타임스, 닛케이 등 구독모델 성공사례가 속속 등장했다.
하지만 코로나사태이후 인플레이션, 금리인상 등으로 인해 생활비가 상승하자, 구독 지출 비용을 줄이려는 흐름이 나오면서 구독모델에 올인하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됐다. 특히 개인이나 가정입장에서 여러 매체를 구독하고 또 넷플릭스, 스포티파이 등 다른 구독모델을 혼재해서 사용하기에 가계에 구독 지출은 큰 부담이 되고 있다.
따라서 무료 기사를 적게 보여주고 바로 구독을 유도하는 하드 페이월을 채택했다가 철회하는 언론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3.광고모델 재주목_구독과 광고모델 통합 트렌드
지난 10여년동안 구독모델이 대세를 이뤘지만, 최근 구독모델에서 획득한 오디어언스 데이터를 바탕으로 광고모델을 개척하려는 시도가 등장하고 있다.
구독모델 주창자이나 최고의 개척자인 뉴욕타임스는 세계 최대 스포츠 매체인 애슬릭를 인수해 경영하면서 구독자를 대상으로 한 광고모델의 가능성을 포착하고 광고프리 유료모델과 광고를 보는 저렴한 모델을 운영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또 고품격 광고모델을 운용하기에 충분한 구독자 데이터를 확보했다고 판단하고 구독중심에서 벗어나 광고모델을 통해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사이트와 앱을 어지럽히고 돈은 안되는 것으로 오랫동안 천대받았던 광고가 재조명을 받고 있는 것이다.
4.멤버십 이코노미
구독모델와 멤버십 모델은 공통분모를 가지면서도 지향점이 다른 모델이다. 둘 다 ID를 생성하고 일정한 금액을 내면 로그인 상태에서 콘텐츠, 게임, 데이터베이스 이용 등 독점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기본 축으로 삼는다.
다른 점은 언론사와 회원간 유대감과 또는 회원끼리 연결성이다. 구독은 일정한 돈을 내고 정기적으로 콘텐츠와 서비스를 제공받기만 하는 것이라면, 멤버십은 미디어에 돈을 후원하고 미디어에 의견을 내거나 회원끼리 커뮤니티 활동을 하는 것을 지향한다.
5.새로운 뉴스 콘텐츠 포맷_스마트 요약 등
기존 디지털 콘텐츠 포맷에서 벗어나 새로운 포맷을 서비스하는 트렌드가 포착됐다. 크게 엑시오스가 제공하는 스마트 요약형, 세마포가 선보인 새로운 뉴스포맷,파이나잇 포맷(finite formats), 오디오 포맷 등 4가지 유형을 들 수 있다.
이중 뉴욕타임스와 블룸버그 출신이 만든 세마포어는 하나의 이슈에 대해 팩트, 기자의 관점, 기자와 다른 관점 등을 구분해서 보여주는 포맷을 제공함으로써 주목을 받고 있다.
파이나잇 포맷은 스마트폰에서 수많은 정보를 접해야 하는 독자의 뉴스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짧은 시간에 뉴스 핵심을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든 포맷과 유저인터페이스를 특징으로 삼는다. 예를 들어 이코노미스트는 에스프레스라는 서비스를 통해 5개의 스토리만을 큐레이션해서 매일 제공한다.
파이나잇 포맷 흐름중 뉴스 소재로 소도쿠, 퀴즈를 제공하여 뉴스를 이용하는 습관을 독자들이 갖도록 하고 뉴스 기사를 읽거나 듣기에 걸리는 시간을 표시해주는 유저 인터페이스가 돋보인다.
6.오디오 포맷의 확산_보이스 노트 저널리즘
로이터 2023년 보고서에 따르면 72%가 기존 구독자를 붙잡고 새로운 구독자를 확보하기 위해 오디오 콘텐츠 투자 계획을 세우고 있다.
비욘드워즈의 오디오 인게이지먼트 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 음악보다 스포큰 워드 오디오 소비가 2%더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 미네소타의 소말리아 이주민 커뮤니터 미디어은 사한 저널은 보이스 노트를 뉴스레터로 발송하고 있다. BBC는 왓츠앱을 활용하여 보이스 노트 형태 뉴스 콘텐츠를 확산시키고 있다. 프랑스의 르몽드는 매일 리딩 목록을 주고 원하는 오디오를 들을 수 있도록 했다.
덴마크의 제트랜드는 유료 뉴스서비스로서 오디오 서비스를 간판 서비스로 활용하고 있다.
최근 오디오 포맷 뉴스서비스는 크게 팟캐스트, 오디오 아티클, 오디오 뉴스레터 등으로 구분된다. 팟캐스트는 MP3파일로 각종 콘텐츠를 제작하여 웹이나 앱에서 제공하는 전통적인 디지털 오디오 서비스다. 오디오 아티클은 기존 텍스트중심 뉴스에 오디오 기능을 붙여 눈으로 읽는 대신 귀로 들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오디오 아티클은 대체로 인공지능 음성 기능(TTS)를 적용하고 있다.
7.닛케이의 디지털 혁신_FT인수 효과
닛케이는 FT를 인수한 후 FT가 축적한 디지털 미디어 전략 노하우를 흡수하여 디지털전환 선두 미디어로 자리 매김을 하였다. 예를 들어 시각화에 큰 혁신이 있었다.
닛케이는 닛케이아시아(영문 뉴스)를 통해 아시아 취재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아시아 지역 뉴스와 데이터베이스 최고 지위를 구축하였다.
닛케이의 스카웃아시아는 뉴스와 같은 비정형 데이터를 정형데이터로 변환시켜주는 인공지능 회사 핸드세이크즈(싱가폴)과 협력하여 아시아지역내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실시간으로 제공하는 서비스를 구축하였다. 현재 100여개의 회사에 M&A, SCM, 기업모니터링 정보를 유료로 제공하고 있다.
8.안티 소셜미디어 플랫폼 트렌드
소셜미디어 등 거대 플랫폼에 콘텐츠를 다 주고 푼 돈만 받았다. 언론은 플랫폼을 무시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것을 모두 줬다. 이제 파트너십을 위해 싸워야 한다.
소셜미디어 플랫폼 등 대형 플랫폼에서 벗어나 작은 독자 플랫폼을 만들어 콘텐츠를 유통하고 광고도 유치하려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다.
인도네시아 IDN미디어는 콘텐츠생산, 콘텐츠유통플랫폼, 광고회사, 영화제작사 등을 생태계로 구성하여 중간규모 자체 플랫폼을 구축하였다. 과거에 페이스북이 광고 수익을 대부분 가져갔다. 그래서 콘텐츠 유통 통제력을 보유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9.Z세대 저널리스트와 Z세대 독자
세대는 두가지 차원에서 언론산업계의 이슈다. 첫째, Z세대가 뉴스룸에서 창의적으로 일하고 저널리즘에 보람을 갖추도록 하는 이슈다. 코로나사태로 인해 제기된 재택근무의 경우 모든 Z세대가 재택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성향에 따라 사무실 근무를, 또는 재택근무를 더 선호할 수 있다.
Z세대가 뉴스를 접하고 이용하도록 하기 위해 틱톡 등 쇼츠를 이용하려는 시도가 있다. 하지만 쇼츠를 통해 뉴스 본래 체험을 갖도록 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다. NYT는 쇼츠 콘텐츠를 만들지 않는다. 대신 젊은세대에게 콘텐츠를 배포할 수 있는 플랫폼을 찾아서 젊은 세대 독자가 NYT를 다시 찾도록 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10.구글의 대 언론 지원 정책 트렌드
언론 자유는 구글에 부담을 주는 것 만으로 해결될 것인가? 언론 자유에 대해 구글이 해결책을 낼 수 없다. 각 사회별로 해결해야 한다. 구글과 같은 단일 회사에 재정지원을 기대지 마라. 다양한 재원을 각 사회별로 스스로 찾아야 한다.
인공지능을 지나치게 위험하게 보는 것은 픽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올바른 질문을 하지 않으면 잘못된 길로 갈 것이다.
스페인은 한국인에게 여행 버킷리스트에서 상단에 오르는 나라입니다. 스페인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은 지인에게 스페인 여행을 추천하기 마련입니다.
음식이 한국인의 입맛에 잘 맞고 또 물가도 서유럽에 비해 쌉니다. 또 지중해 문명, 이슬람문명,카톨릭문명 등 다양한 요소가 곳곳에 섞여 있어 스토리가 풍부한 여행을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피카소, 가우디 등 걸출한 아티스트의 흔적을 만날 수 있기도 합니다.
여행 금언중 하나는 ‘아는 만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 가보는 나라를 여행할 때 흔히 여행가이드북을 구입해 여행전에나 여행하면서 틈틈이 읽습니다. 모바일시대는 스마트폰을 통해 다양한 여행정보를 이용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의 제 맛을 느끼려면 역시 그 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접하는 것입니다. 유튜브의 간략한 소개로 그런 깊이를 대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책의 원 제목은 ‘A Concise History of Spain’ 케임브리지대학 출판부의 약사 시리즈 중 스페인 편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책 저자는 영국이 아니라 미국 학자입니다.
윌리엄 D. 필립스 주니어는 미네소타대학에서 역사학 교수로 활동하며 2001년부터 2008년까지 근세역사센터를 맡아 운영했으며, 현재는 명예교수로 재직중입니다.
칼라 란 필립스도 미네소타대학 비교근세사학 석좌교수를 거쳐 현재 명예교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두 교수는 모두 스페인역사를 연구하면서 함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세계 The Worlds of Christopher Columbus’(1992)를 저술하여 스페인 정부가 주는 제2회 ‘미국 안의 스페인’ 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책은 전문 역사학자가 썼지만 일반 독자도 쉽게 스페인 역사의 전체를 굽어볼 수 있을 정도로 대중성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깊이도 함께 느끼게 하는 역사서입니다. 스페인 여행을 계획하거나 또는 한 두번쯤 다녀오신 분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1장 영토와 옛주민편을 골라서 발췌독서하였습니다. 여행가시기 전에 이 장만 읽어도 여행에서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1장 영토와 옛주민 편
언어
1.라틴어 파생 로망어 계열
이베리아는 늘 다민족, 다종교, 다문화 지역이었다는 점이 이러한 지역적 복잡성의 일부를 이룬다. 반도의 언어들은 대부분 라틴어에서 파생된 소위 로망어로, 수 세기에 걸친 로마의 히스파니아 점령과 통치가 남긴 유산이다.
2.스페인어의 뿌리, 카스티야어
오늘날 이베리아인과 전 세계 스페인어 화자들은 중세 카스티야에서 쓰이던 언어에서 유래한 카스티야어를 가장 많이 사용한다. 스페인인 외에는 대부분 이 언어를 스페인어라고 부른다. 이 언어가 아메리카와 필리핀제도의 스페인제국 지역으로 전해졌고 현재는 중국어와 영어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3.스페인어와 다양한 언어 공존
20세기 중반에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이 스페인어, 즉 카스티야어를 스페인의 유일한 언어로 만들려고 했지만, 언어의 정체성은 이에 굴하지 않았으며 그의 임기 동안 더 많은 인정과 자치를 원하는 지역주의 투쟁의 강력한 구성 요소가 되었다.
반도의 로망어들 가운데 포르투갈어는 포르투갈의 공용어이고, 가까운 사촌 격인 갈리시아어는 지역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국, 출판계에서 사용되며 스페인 서북부에서 부활하고 있다. 카탈루냐어는 수많은 카탈루냐 주민의 모국어로 교육과 대중매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4.카탈루냐어, 프랑스 프로방스어와 연결
카탈루냐어는 프랑스 남부의 중세어인 오크어, 즉 프로방스어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중세 카탈루냐인들은 발렌시아와 발레아레스제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언어를 이곳에 들여왔다. 오늘날 이 지역 언어들은 카탈루냐어와 다소 다르지만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5.바스크어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구어 가장 특이한 언어는 바스크어(에우스케라 Euskerra)다. 이 언어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구어이며, 기원은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무렵 언어가 쇠퇴하자 바스크 지식인들은 바스크어를 다시 사용하고 이전에 미흡했던 문어체를 발전시켰다. 그 후 에우스케라어의 사용은 바스크 민족주의로, 스페인 정부로부터 자치권을 얻기 위한 다양한 모색으로 연결되고 있다.
6.아랍어 영향
아랍어는 8세기에 이슬람 정복자들과 함께 이베리아반도로 유입되어 알안달루스 정치인들의 언어로 자리매김했으며 17세기까지 스페인 곳곳에서 통용되었다. 또한 카스티야어와 반도 내 다른 로망어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으며, 급기야 유럽 전역의 언어에서 ‘대수학algebra’부터 ‘천정zenith, 天頂’에 이르기까지 명사 변형을 가져오기도 했다.
7.히브리어 유산
히브리어는 중세 스페인에서 수백 년간 번영을 누렸던 유대인 공동체의 공용어로, 아랍어 및 로망어들과 영향을 주고받았다. 15세기 말 유대인 추방령이 내려지자 지하로 쫓겨나거나 소멸되다시피 했던 히브리어는 모로코 및 다른 북아프리카 지역과 중동 지역 유대인 공동체의 재건에 힘입어 20세기 중엽부터 스페인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지리
1.이베리아반도 지질학적 특성
북부 산악 고지대의 빙하에서부터 동남부 엘체 인근의 사막에 이르기까지, 반도의 모든 문화는 다양한 지역으로 구성된 지질학적 특성을 근간으로 한다. 이베리아의 산맥들은 수백만 년 전에 형성되었으며, 스페인의 여러 독특한 지역을 구분하고 경계 짓는다.
2.피레네와, 프랑스와 스페인 경계
동북부에서는 3350미터가 넘는 고봉들로 이루어진 피레네산맥이 스페인과 프랑스를 가른다.
3.칸타브리아 산맥, 갈리시아와 카스티야 경계
바스크 지역의 계곡과 낮은 산들은 피레네산맥과 칸타브리아산맥(코르디예라 칸타브리카Cordillera Cantábrica)을 연결하고, 정상의 높이가 해발 2590미터쯤 되는 칸타브리아산맥은 스페인 북부 지역 대부분을 가로질러 뻗어 반도의 내륙과 좁은 해안 지역을 가른다.
칸타브리아산맥 서쪽 끝에는 위압적인 해안 절벽과 산이 많은 내지로 이루어진 아스투리아스 지방이 있다. 스페인의 서북쪽 끝, 갈리시아 해안 지역의 산과 계곡은 아스투리아스의 지형과 비슷하다. 갈리시아의 해안선은 리아스식해안으로, 대서양이 손가락처럼 들쑥날쑥한 해안선을 따라 언덕들 사이의 내륙을 탐사하는 모양새가 생동감은 덜하지만 스칸디나비아의 피오르해안을 닮았다.
4.북메세타
칸타브리아산맥 서쪽 기슭에서 남쪽으로 뻗어 나온 레온산맥은 북北메세타라고 불리는 평균 해발고도 700~800미터의 드넓은 평원으로 이어진다. 평원의 동부는 2280미터에 달하는 고봉들로 이루어진 이베리아산맥(코르디예라 이베리카Cordillera Ibérica)과 접한다.
5.이베리아 산맥
이베리아 산맥 동쪽으로는 아라곤과 카탈루냐, 지중해 연안 발렌시아의 풍요로운 평원에 에브로 하곡河谷이 자리한다. 북메세타의 남쪽 경계는 센트랄산맥(코르디예라 센트랄Cordillera Central), 즉 마드리드 북부와 서쪽의 소모시에라, 과다라마, 그레도스를 아우르는 산맥과 접한다.
6.남메세타
남南메세타는 평균 고도가 610~700미터다. 이베리아반도 전체 면적의 약 36퍼센트를 차지하는 두 메세타 고원은 서로 떨어져 있다. 높고 광대한 이들 고원 때문에 스페인의 평균 해발고도는 670미터에 달하는데, 이는 유럽에서 스위스 다음으로 높고 유럽 평균보다는 두 배나 높은 수치다.
마드리드는 유럽의 수도 가운데 고도가 가장 높아서, 마드리드공항의 해발고도가 610미터쯤 된다.
7.베틱산맥
남메세타의 동쪽 경계는 (북메세타의 동쪽 경계이기도 한) 이베리아산맥과 훨씬 더 험준한 베틱산맥(코르디예라 베티카Cordillera Bética) 사이에 자리하며, 남메세타 및 동남부의 사막과 해안 평원지대를 가른다.
8.시에라모레나 산맥
남메세타의 남쪽 경계는 시에라모레나산맥이다. 시에라모레나산맥의 남쪽과 서쪽, 그러니까 과달키비르 하곡은 넓고 풍요로운 농경지대를 이루며 대서양을 향해 서남쪽으로 뻗어 내려간다. 거기서 더 동쪽으로 그라나다와 다른 남부 산맥들로 이루어진 시에라네바다 산악지대는 1년 내내 눈이 덮여 있어 안달루시아의 더운 평원지대나 해안 지역과는 놀라운 대조를 이룬다.
9.지질학적 특성과 산업
이렇게 험준한 지형 때문에 수백 년 이상 농업에 제약이 있었고, 장거리 수송도 제한되었으며, 항구도시들과 내륙의 도시 및 평야가 단절되어 상업 발달이 억제되었다. 그래서 철도가 출현하기 전까지는 쉽게 옮길 수 있는 상품에 높은 가치가 매겨졌고, 가축처럼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더 가치 있게 여겨졌다.
10.강의 경계 역할
스페인의 주요 강들은 유역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데 일조하며 중요한 역사 발전의 장을 장식했다. 심지어 어떤 역사학자는 주요 하곡들을 지배한 정치 세력의 변화를 좇다보면 중세 스페인사를 가장 잘 이해하게 될 거라고도 했다.
11.에브로강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는 강은 단 하나다. 에브로강은 칸타브리아 산악지대에서 발원해 아라곤의 계곡들을 지나 하류에 삼각주를 만들고 발원지에서 910킬로미터 떨어진 바다에 도달한다. 로마 시대에는 에브로강 유역 암포스타에 큰 항구도시가 있었다.
역사적으로 에브로강은 반도의 중앙부로 이어지는 일련의 경로들의 중추였다. 사라고사는 로마 개국 이래 에브로강을 건너는 내륙의 주요 거점이었으며, 덕분에 도시의 명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12.두에로강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큰 강들 중 최북단에 위치한 두에로강은 시에라데우르비온 산지에서 발원해 구舊카스티야와 포르투갈 북부의 곡물 및 와인 생산지를 지난다. 두에로강(포르투갈어명 도루강)과 계곡은 무슬림의 차지였던 반도의 통치권을 기독교 세력이 간신히 빼앗기 시작한 중세에 알안달루스와 기독교 왕국들 사이 경계가 되었다.
13.타호강 타호강(영어명 타구스강)은 시에라데알바라신 산지에서 발원해 톨레도의 경계가 되는 높은 언덕을 둘러싸고 흐른다. 톨레도는 로마인에 의해 건설된 이후 줄곧 군사 요충지였다. 1085년, 카스티야의 알폰소 6세는 무슬림에게서 톨레도를 탈환하면서 카스티야의 수도를 이베리아반도의 중앙으로 옮기는 중요한 전환기를 마련했다. 중세 왕들이 즐겨 지냈던 톨레도에는 주요 유대인 공동체가 자리잡았다.
14.과디아나강 과디아나강(아랍어명 와디아나강)은 쿠엥카에서 발원해 라만차와 남부 엑스트레마두라를 지나 흐른다. 역사적으로 인구 밀도가 낮은 이들 지역에는 스페인의 유명한 유목 가축인 메리노 양의 겨울 목초지가 있어 13세기 이래 방대한 규모로 최상품 양모를 생산해왔다.
고대와 중세에는 과디아나강의 항행 가능한 구간을 이용하는 선박 수가 상당했다. 강은 메리다 쪽으로 흐르다가 하류에서 포르투갈 풀루두로부에 있는 폭포까지 닿는다.
15.과달키비르강 스페인 최남단의 주요 강인 과달키비르강은 안달루시아 지방의 중앙부를 이루는 비옥한 농업지대를 지나 흐른다. 강과 농지 덕분에 풍요로워진 코르도바는 10세기부터 17세기까지 스페인 내 칼리프국의 수도 역할을 했다. 이슬람 사원을 비롯한 여러 건축물 덕분에 현재 코르도바는 스페인의 주요 문화 관광지가 되었다.
16.세비야 과달키비르강을 지나는 배들은 상류의 코르도바까지 운항할 수 있었다. 오늘날 외양선은 세비야까지만 운항이 가능하다. 세비야는 스페인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때마다 발생했던 곳이다. 헤라클레스가 발견했다는 전설이 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건설한 것으로 보이는 이 도시는 로마인들에게 히스팔리스Hispalis라 불렸으며 나중에 주요 이슬람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기독교 세력은 13세기 레콩키스타를 통해 과달키비르 하곡을 확실히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세비야는 16~17세기에 아메리카의 스페인제국으로 가는 모든 배가 취항하는 공식 항구였고, 그 이래로 지금껏 풍부한 건축 유산을 보유 중이다.
기후
이베리아반도는 기후가 뚜렷이 구분되는 두 지역, 즉 비가 많은 지역과 반 半 건조 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지리학자들이 강우지대라 부르는 습윤 지역은 리스본에서 갈리시아를 지나 북부 해안 대부분과 서부 해안의 북쪽 절반을 아우른다.
1.습윤 지역
이곳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는 온화하며 연중 비가 잦다. 푸른색 산비탈은 곡물을 재배하기 좋은 환경을 보장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갈리시아의 언덕과 계곡, 넘치는 강우량은 몇 세기 동안 곡물 생산에 방해가 되었고, 주민은 바다에 의존해 식량을 수입하고 노동력을 수출해야 했다.
2.반건조 시대
반도의 나머지 반건조지대는 이웃 지중해 지역과 같은 기후대라 해안 지역은 겨울이 온화한 반면 내륙 지역은 조금 더 춥다. 여름은 덥고 건조한 편이지만, 다른 계절은 강우량을 예측하기가 어렵다.
3.편서풍의 영향
편서풍이 북유럽으로 강하게 불면서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온난다습해지는 반면, 지중해 지역은 더 건조해지는 경향이 있다.
한편 북부 기압이 더 높고 아이슬란드 기압대와 아조레스 기압대가 서로 가까워지면, 북풍과 동북풍이 불어 서북 유럽은 추운 날씨가, 지중해 지역은 바람이 강하고 다습한 날씨가 된다.
이주민의 역사
이베리아반도에 인간이 거주한 역사는 환경과 극한의 지형 및 기후 조건이라는 제약을 배경으로 펼쳐졌다. 두 대륙 사이에 자리하며 동시에 두 대양을 가르는 위치는 인간의 접근이 비교적 쉬웠음을 의미한다. 수천 년 이상 이어진 이베리아반도로의 인구 이동은 선사시대와 역사시대 형성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1.초기 유럽인 화석
스페인 북부 시에라데아타푸에르카 산지의 부르고스 동쪽에서는 초기 유럽인의 화석이 아직까지 발견된다. 이들 화석은 최소 78만 년 전의 것으로, (사람속homo에 속하는) 인류의 조상이 어쩌면 100만 년 동안 이베리아반도에 거주했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무척 오래된 인류 화석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꽤나 최근 것에 해당된다. 아프리카 지역에 남아 있는 인류 화석 중 일부는 700만 년도 더 된 것들도 있다. 초기 인류는 아프리카 대륙 동북쪽을 통해 그곳을 떠나기 시작했고 이 물결을 타고 아시아까지 진출했다.
얼마 뒤에는 몇몇 무리가 서유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약 170만 년 전쯤 캅카스 산악지대에 살았던 것이 확실시되며, 약 100만 년 전에는 유럽에 거주했다.
시에라데아타푸에르카 산지 모처의 지반을 깊이 깎아내자 고대 퇴적층들이 드러났다. 결국 광산 채굴은 중단되었고 철로는 1920년대에 폐선되었으며, 동물과 인간만이 그곳에 남았다.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발견은 1976년 그란돌리나Gran Dolina라고 불리는 석회암 동굴에서 발굴된 인간의 턱뼈였다.
이후 고고학 발굴이 급격히 활발해졌고, 1995년에 과학자들은 열한 살 소년의 두개골 일부와 아래턱뼈, 척추뼈를 발견했다.
2.전기 구석기 시대 인류 그란돌리나 근처에서 소위 뼈 구덩이Sima de los Huesos라는 것을 조사했는데, 그곳에서 짐승 뼈와 함께 세계 최대 규모의 고인류 뼈 무더기가 발견되었다. 잘 보존된 도끼머리 한 점과 서른 명 정도 되는 사람의 뼈였다. 이 인골들의 주인은 더 늦은 시기의 인류이며, 아마 그란돌리나의 인골과는 무관할 것이다. 이들은 전기 구석기시대(50만 년에서 10만 년 전)인 약 40만 년 전에 같은 지역에서 활동한 호모하이델베르겐시스Homo heidelbergensis(하이델베르크인)로 확인되었다.
3.네안데르탈인 네안데르탈인은 약 20만 년 전에 도착해 반도 전역에 흩어져 정착했다. 사실 네안데르탈인은 1848년 지브롤터에서 처음으로 뼈가 발견되었지만, 1856년 독일 네안데르탈에서 다른 화석 자료가 발견되면서 나중에야 독립적인 종으로 분류되었다.
과학자들은 한때 네안데르탈인이 3만5000년 전 자취를 감추었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이베리아반도에서 훨씬 더 오랫동안 생존했을지도 모른다. 지브롤터에서 가장 최근에 발견된 네안데르탈인 뼈는 2만4500년 전 것으로 추정된다
4.오리냐크–솔뤼트레인–마들렌
이베리아 최초의 현생 인류는 약 3만5000년 전에 나타나 유럽 전역으로 퍼진 오리냐크 문화의 구성원이었다. 특히 그들은 이주하면서 골각기骨角器나 사슴뿔 도구, 부싯돌 같은 좀더 발달된 기술을 전했다. 가죽과 모피를 꿰매어 옷을 지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이는데, 고고학자들이 유적에서 그런 용도의 바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베리아의 오리냐크인은 약 2만 년 전에 사냥용 활을 가지고 북아프리카에서 온 솔뤼트레인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이어서 약 1만7000년 전 순록을 사냥했던 북유럽의 마들렌 문화가 솔뤼트레 문화를 대체했다. 마지막으로 약 1만 년 전에 마들렌 문화 다음으로 후기 구석기 문화가 자리잡았다.
5.구석기 문화_알타미라 벽화
구석기시대 문화의 고고학 발굴 현장은 수많은 동굴벽화를 포함해 이베리아반도 전역 곳곳에 포진해 있다. 스페인 북부 칸타브리아 해안지대 중심부, 낮은 해안평야의 동굴에서 발견된 알타미라 벽화가 가장 유명할 것이다.
알타미라 동굴의 후기 구석기시대 벽화는 지금까지 발견된 벽화를 통틀어 최고의 전형이며, 그려진 시기는 1만8500~1만4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근처에서 얻은 안료에 동물 지방을 섞어 그린 벽화는 그들이 잡아먹은 동물들(특히 말, 들소, 붉은사슴, 순록)을 여러 자세로 묘사하고 있고, 그중 몇몇은 부상을 입은 모습이다.
사람들이 거주하던 동굴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안쪽에 그려진 것으로 보아 장식용 그림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어쩌면 사냥을 시작하는 젊은이들을 위한 의식과 관련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부족과 사냥감을 정신적·물질적으로 연결하려던 시도를 나타내는지도 모른다. 틀림없이 알타미라 벽화는 인류사를 통틀어 최고最古이자 최초의 사실주의 회화다.
6.신석기 문화
약 8000년 전 신석기인들이 반도로 유입되면서 좀더 발달한 석기(신석기인이라 불린 이유다)를 들여왔지만, 더 중요한 건 이들이 농업과 목축 기술을 전했다는 점이다. 이들이 반도에 발을 들이며 새 무리가 오래된 무리를 몰아냈으며 인구 증가가 가속되었다.
수렵과 채집뿐 아니라 농업이 뒷받침되면서 신석기인들은 더 큰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고, 더욱 안정된 정착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7.청동기 시대
약 3400년 전에는 이베리아반도에 구리 도구가 등장했고, 더불어 구리 채굴과 제련의 증거가 나타났다. 이 시기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고고학 발굴 현장은 스페인 동남부 알메리아 근처의 로스미야레스다. 대부분의 동기시대銅器時代, Copper Age 유적지에는 방어 시설과 공들여 지은 돌무덤들이 있다. 약 2200년 전에는 청동기인이 이베리아에 등장했다. 반도에는 강모래 속 금광상을 비롯해 남부의 구리와 서부의 은 등 광상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8.이베리아인과 켈트
이베리아인은 (아마도 동방에서 기원하여) 북아프리카를 통해 스페인으로 유입되어 지중해 연안을 따라 퍼져 나갔다. 그들은 농업 지식과 채굴 지식, 청동 등 금속을 제련하는 지식을 들여왔다. 대형 석재는 건축에 사용하고 돌덩어리들은 깎아서 석상을 만드는 등 석물을 만들기도 했다.
그중 가장 뛰어난 것은 소위 엘체 부인Dama de Elche이라 불리는 석상이다. 그들은 지중해의 상인들에게서 글쓰기와 동전 주조법을 배우고 그리스어와 페니키아어에서 파생한 알파벳을 이용해 문자를 개발했다. 이베리아어 기록은 현재 돌이나 동전에 새겨진 것 외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8.1 켈트족의 이주
켈트 문화는 여러 차례에 걸쳐 유입되었으며 기원전 9세기~기원전 7세기가 그 정점이었다. 북부에서 온 켈트족은 피레네산맥 서쪽을 거쳐 이베리아반도에 들어온 다음 대서양 연안을 따라 확산되었고, 주로 목축생활을 했다. 청동기시대 말기가 가까워지면서 제철 지식이 켈트족의 정주지 전체로 확산되었다.
8.2히스파니
켈트 문화와 이베리아 문화가 나중에 선주민과 섞여들어, 적어도 반도의 중심부에서는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기록에 남은 복합적인 문화가 만들어졌다. 로마인들은 이 지역 사람들을 히스파니Hispani라고 불렀다. 사회 상류층은 무인 귀족이었고, 그 아래는 자유로운 노동자 계층이었다.
그보다 밑에는 노예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전쟁 포로이거나 지역 지배층의 보호를 받는 대가로 스스로 자유를 포기한 이들이었다.
9.타르테소스
타르테소스는 교역도시로 묘사되지만, 과디아나강과 과달키비르강의 하류를 따라 조성된 지역과 그곳에 정착해 터전을 개발한 정주민을 부르는 이름으로 보는 게 더 적절하다. 타르테소스는 고대 무역의 중심지로 유명해지면서 결국 페니키아의 침입을 받게 되었고, 종국에는 그들에게 정복당했다.
10.페니키아
기원전 800년경, 페니키아인을 시작으로 지중해 상인들이 스페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페니키아인들, 그리고 이후의 그리스인과 카르타고인은 그리스어로 클레루키아clerukia라 불리던 교역소를 연이어 설립했다.
정착지당 1000명가량으로 인구가 비교적 많았던 이 상인들은 지역 공급자들과 교역한 상품을 자기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그들은 주로 은, 구리, 납 등 이베리아에 풍부한 귀금속, 그리고 해산물에 관심이 있었다.
10.1 카디스
통상적으로 페니키아인들은 기원전 1100년에 카디스를 건설해 그곳에서 3000년 넘게 역사를 일구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도시는 그보다 더 나중인 기원전 800년 이후에 건설된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 그렇더라도 카디스는 서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다. 도시의 건설자들은 그곳을 가디르Gadir라 불렀고, 로마인들은 이를 가데스Gades라고 바꿔 불렀다.
10.2 말라카와 오누바
페니키아인은 카디스 외에도 남부 해안의 말라카(말라가)와 오누바(우엘바)를 비롯해 이베리아반도 남쪽에 다른 무역 거점을 세우고 이비사섬에 거류지를 건설했다.
페니키아의 도시들(주로 티레와 비블로스)을 근거지로 둔 중개상들은 이런 거점들에 상주하면서 금과 보석, 그리스 도자기 같은 물건을 거래했다.
이베리아의 페니키아인 거주지는 기원전 6세기 고향 도시가 바빌로니아인에게 정복당하는 동안에도 살아남았다. 그들은 이베리아에서 활동을 이어갔으며 페니키아 출신 카르타고인이 조직한 새로운 무역체계에도 관여했다.
11.그리스인
그리스인은 본토로부터 아주 먼 곳에 식민지를 건설했다(이 과정을 ‘싹틔우기’라 부르기도 했다). 인구 과잉인 그리스 도시국가 주민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해 자녀 도시를 건설했고 그곳에서 본국의 풍습을 공유하고 유지했다.
11.1 그리스 식민지
이 풍습에 따라 아나톨리아의 해안선 전체와 흑해 주변 지역(특히 남부 해안),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남부, 프랑스 남부, 마지막으로 이베리아반도 동부에 걸쳐 그리스 식민지가 세워졌다. 이베리아반도 동부는 특히 주요 거주지에 해당했다. 지중해 서부의 그리스 식민지 대부분은 마살리아(지금의 마르세유)의 큰 정착지로부터 뻗어나왔다.
11.2 엠포리온(카타로니아)
기원전 6세기경 이베리아에 최초의 진정한 그리스 도시를 건설하고 이곳을 엠포리온Emporion이라 불렀다.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뜻의 영단어 엠포리엄emporium이 이 지명과 관련 있는데, 이는 엠포리온이 주로 교역지로서 기능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엠포리온은 이베리아 동부의 그리스 도시국가 중 가장 중요한 곳이 되었다. 로마인들은 이곳을 엠포리아이Emporiae라고 불렀다. 현대 스페인 사람들은 이 지역의 주요 도시를 암푸리아스Ampurias라고 부르며 카탈루냐인은 엠푸리에스Empuries라 부른다.
11.3 포도와 올리브 유입
그리스인과 페니키아인은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 등 수많은 주요 재배식물을 이베리아반도에 들여왔다. 그 이래로 지금까지 이 재배식물들이 이곳에 잘 적응한 덕분에 스페인은 포도주와 올리브유의 주요 산지가 되었다.
11.4 올리브의 나라
올리브나무는 비교적 고온건조한 지역에서 잘 자라는데, 스페인 국토의 3분의 2가 이런 지역에 해당한다. 올리브나무가 잘 자라려면 당연히 비도 약간 와야 하지만 무엇보다 일조량이 풍부하고 겨울에 온화해야 한다.
그래서 여름이 충분히 뜨겁지 않고 연 강우량도 너무 많은 북부와 서북부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다. 오늘날 스페인에서는 기후만 맞으면 거의 전역에서 올리브나무를 기르지만 주요 재배지는 반도의 남부 4분의 1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그곳에 가면 올리브나무만 사방 가득 광대하게 펼쳐진 광경을 볼 수 있다.
11.5 문자의 유입
그리스인과 페니키아인이 이베리아반도에 들여온 것이 또 있다. 바로 문자다. 아마 이베리아인은 페니키아인에게서 알파벳을 배워 자기들 말을 글로 썼을 것이다. 그리스인은 동전 주조법도 들여와(주로 은화를 주조했다) 이베리아인에게 전했다.
12.페키니아 계열 카르타고
카르타고인과 로마인은 갖은 이유로 경쟁했지만, 특히 고대에 크게 번영했던 풍요의 섬 시칠리아의 소유권을 두고 다투었다. 시칠리아는 각지에 밀을 수출하는 지중해 중앙부의 곡창지대였다.
12.1하밀카르 바르카
하밀카르 바르카는 스페인이 카르타고와 로마의 관계에 있어 훌륭한 균형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지배층을 설득했다.
그는 기원전 236년에 사실상 독립적인 군사 지휘권을 가지고 카르타고 군대를 꾸려 스페인에 입성했는데, 아마 스페인 전역을 정복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몇몇 지역의 수장과 일부 도시국가가 바르카의 군에 협력했다.
나머지 지역에서까지 협력을 이끌어내진 못했지만, 그는 군을 통솔하며 얼마간의 성공을 거두었고 주목할 만한 정복지를 연이어 획득했다.
12.2 카르타헤나 건설
하밀카르 바르카는 스페인에 수많은 요새를 세웠고 그중 몇 곳은 도시로 성장했다. 이베리아반도 동남부 끄트머리에 있는 한 소도시가 가장 성공적인 사례였다. 로마인들에게 누에바카르타고Nueva Cartago(새로운 카르타고)라 불렸던 이곳은 오늘날 스페인 사람들에게 카르타헤나라고 불린다.
12.3카르타고와 로마의 갈등
바르카가 스페인으로 들어갔을 당시 그곳에는 통합된 정치 세력이 없었다. 대신 지중해 연안의 여러 그리스 도시 및 교역소와 더불어 다양한 도시국가와 부족 집단이 사실상 서로 단절된 채 반도 전역에 퍼져 살고 있었다.
스페인에 있는 그리스인의 정주지는 고향 도시들뿐 아니라 로마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각각 독립체로 기능했다. 그리스인 정주지의 지도자들은 로마인들과 독자적인 조약을 체결했는데, 기본적으로 공격당할 시 로마군의 보호를 받기로 하고 대가를 지불한다는 내용이었다.
로마는 또 기원전 226년에 카르타고와 조약을 체결하고 에브로강을 경계로 설정하여 강 이북은 로마, 이남은 카르타고의 영향력 아래 두었다.
13.로마
카르타고인이 스페인에서 활동하면서 로마인도 점차 스페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기원전 209년에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 한니발이 에브로강 이남의 도시 사군툼을 공격한 후 상황은 임계점에 이르렀다. 엄밀히 말해 사군툼은 카르타고의 관할이었음에도 도시 지도자들은 로마에 도움을 호소했다.
13.1 한니발의 공격
하지만 한니발이 도시를 포위해버리는 바람에 로마의 손길은 미치지 못했다. 사군툼 사람들은 마지막 한 명까지 자력으로 맞서 싸웠고, 그들의 분투는 역경을 견디고 국가를 위해 희생한 이야기로 스페인 역사에 길이 남았다. 포위가 풀리자마자 로마는 카르타고를 상대로 전면전을 준비했다.
로마가 전쟁 준비를 마칠 무렵 한니발은 스페인에서 이탈리아로 침략을 개시했다. 군대와 코끼리를 이끌고 갈리아로 진입해 겨울의 알프스산맥을 넘은 그는 로마군과의 교전에서 몇 번의 승리를 거두었지만, 결국 승리한 것은 로마였다.
13.2 로마군의 최후 승리
기원전 206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지휘하에 로마군은 카르타고인을 스페인에서 몰아냈다. 그리고 4년 뒤 스키피오의 군대는 카르타고와 인접한 북아프리카 자마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제2차 포에니전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때 거둔 승리로 그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제 로마인들은 카르타고인에게서 빼앗은 스페인 땅을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생성형 AI의 대중화는 직장인의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AI를 잘 다루는 능력을 가진 직장인만이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AI시대 일 잘하는 직장인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 스킬을 갖추고 지속적으로 연마해야 합니다.
첫째, 스스로 성장하고 또 성취하고자는 동기를 갖춰야 합니다.
둘째, 문서 작성 스킬이 좋아야 합니다.
또 조사 보고서, 기획서, 사업 제안서, 회의 자료 등 각종 회사의 서류를 목적에 맞게 잘 작성해야 합니다. 이른바 도큐멘테이션이라는 서류 작성 작업을 잘 해야 합니다.
도큐멘테이션은 글감 구상, 글재료 수집과 정리, 글 구조짜기, 다듬고 고치기 등 글쓰기 기본 요소로 구성됩니다.
셋째, 소통 스킬이 좋아야 합니다.
윗사람의 지시를 정확히 파악하고, 또 윗사람이 기분 나쁘지 않게 잘 설득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소통비용을 유발해서는 안됩니다.
넷째, 팀원, 타부서, 타회사, 파트너와의 협업 스킬이 좋아야 합니다. 리더십도 광범위한 협업스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섯째,세상 변화 흐름을 잘 읽고 관찰해야 합니다. 즉, 트렌드 독해 능력을 갖춰야 하는 것입니다.
5가지 능력을 갖추는, 최고의 방안은 역시 독서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독서력이란 책을 꾸준히 읽고, 독서한 내용을 자신의 일에 활용하는 습관을 뜻합니다.
머리속에 자신만의 책장을 구축해야 합니다.
라틴어 수업 저자 한동일 신부는 머리속 책장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실 언어 공부를 비롯해서 대학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양적으로 늘리는 것이 아니라 ‘틀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학문을 하는 틀이자 인간과 세상을 보는 틀을 세우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향후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고, 그것을 빼서 쓸 수 있도록 지식을 분류해 꽂을 책장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학생들의 머릿속에 ‘책장’을 마련하는 작업은 이 책장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내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성찰로 나아갑니다. 사실 그것이 수업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업 시간에도 여기까지 설명을 하고 중간고사 과제부터 내줍니다. ‘데 메아 비타De mea vita’를 A4 한 장 분량으로 적어내는 것이 과제인데요, ‘데 메아 비타’는 ‘나의 인생에 대하여’라는 뜻입니다.”
1주일에 1권을 읽는 독서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만의 책장은 1~2년만에 구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도서관 서가처럼 책장 틀을 먼저 만들고 매일, 또는 매주 꾸준히 독서하면서 읽은 내용을 책장 분류에 맞게 지식을 보관해 나가야 합니다.
서점에서 독서가의 책을 읽고 부러운 마음에 따라하다가 중단에 그만두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이름난 독서가를 부러워 하거나 따라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만의 속도로 천천히 책장을 채워나가는 기분으로 거북이 마라톤을 하면 됩니다.
믿을만한 독서 가이드를 곁에 둬야 합니다.
어떤 책을 골라서 어떻게 읽어야 할지 막막할 것입니다. 가이드 역할을 해줄 수 있는 독서 멘토 또는 독서 가이드를 곁에 두면 좋습니다. 가장 좋은 독서 가이드는 책을 좋아하는 친한 친구, 선배, 후배, 동료입니다. 지인이 추천해주는 책이 자신에게 딱 맞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유행따라 인기따라 책을 고르는 것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그런 책을 쫒다 보면 책장의 균형이 생기지 않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그저 그런 책이 될 장서만으로 자신의 책장을 채우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