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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정,일의 격

저자 신수정은 산전수전 다겪은 직장인입니다. 전공도 이과 공학과 문과 경영학을 모두 전공했습니다, 글로벌 기업, 창업, 벤처, 중견기업, 삼성, SK 등 조직의 논리가 다른 다양한 기업들을 거쳐습니다. 현재 KT의 Enterprise 부문장을 맡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커리어는 그가 한때 신학을 전공했다는 것입니다. 종교인 보다는 자유를 더 좋았했던 그는 세속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런 그가 세속, 직장인의 세계에서 사제처럼 미션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코칭등 다양한 코스도 듣고 수많은 책도 부지런히 읽습니다. 이제 선한 영향력을 추구하는 것을 삶의 미션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 참석한 모든 사람이 자기 소개를, 현재의 고민을 이야기했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저자는 그에 대해 하나하나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일방적으로 강연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대화를 하는 사람입니다. 일을 하다보면, 삶을 살다보면 어렵고 힘든 순간이 있습니다.  선배 직장인 신수정은 바로 그때 필요한 사람입니다. 직장인 고민상담의 백과사전 같은 그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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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과 잔다르크

잔 다르크가 활약했던 무대는 중세의 백년 전쟁(1337년~1453년)이다. 프랑스와 영국(잉글랜드)은 왕위계승과 영토분쟁으로 백년이상 전쟁을 했다. 부르고뉴 공작의 암살의 배후에 프랑스 왕실이 있다고 판단한 부르고뉴공국은 적국인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대적한다. 수도 파리를 함락한 잉글랜드는 프랑스의 왕위 상속권을 보장받는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위기에 혜성처럼 등장해 프랑스를 구원하는 인물이 바로 잔 다르크다. 잔 다르크의 이력은 역사적 사실과 소문이 뒤섞여서 어디까지가 전설이고 사실인지 명확하지 않은 상황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잔 다르크는 어린 시절 농부인 부모님 밑에서 평범하게 자랐고, 글은 읽지 못했으나 교회를 독실하게 다닌 시골소녀였다. 잔 다르크는 1424년부터 수년에 걸쳐 ‘위기에 빠진 프랑스 왕을 구하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주장하며 이를 ‘천사의 계시’라고 믿게 된다.

샤를 7세는 우여곡절 끝에 그녀를 최전선인 오를레앙에 투입한다. 불과 17세의 잔 다르크는 전장에 출전하자마자 첫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었고 이후 프랑스군은 잔 다르크와 함께 연전연승하며 전쟁의 판도를 바꿨다. 그러나 현대의 역사가들은 잔 다르크가 실제로 전투를 지휘한 것은 아니며, 당시 잉글랜드군이 철수한 것도 꼭 잔 다르크 때문이라기보다는 장기간의 포위로 인한 보급문제로 보는 시각이 많다. 다만 잔 다르크는 전쟁 내내 프랑군의 사기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한 것만큼은 분명하다.

오를레앙 전투의 승리는 프랑스에 엄청난 희망을 가져왔고, 프랑스인들은 잔 다르크를 자연스럽게 신의 계시를 받은 존재로 믿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잔 다르크를 ‘오를레앙의 성녀’로 인정했다. 남녀노소 수많은 프랑스인들이 그녀가 나타나면 달려와서 손이라도 한 번 잡아보려고 노력할 만큼 열렬하게 추종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반면 갑자기 나타난 소녀에게 전쟁에서 패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던 잉글랜드에서는 잔 다르크를 ‘마녀’로 간주했다.

1430년 5월 부르고뉴군와 맞선 잔다르크는 포로로 잡혀 영국에 팔렸다. 1431년 19세의 그녀는 이단 혐의로 교회의 재판을 받고, 화형을 당했다.  그렇지만 잔다르크는 프랑스의 종교적 화신으로 살아남아, 백년 전쟁을 프랑스에 유리하게 바꾸도록 도왔다. 1453년까지 샤를 7세는 1558년 영국이 포기한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전역을 재 정복했다. 1920년 잔 다르크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기독교 성인으로 인정받았다. 그녀의 축일은 5월 30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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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러]부커상 최종후보, 정보라

연세대학교 인문학부를 졸업한 후 미국 예일대학교 러시아동유럽 지역학 석사를 거쳐 인디애나대학교 슬라브어문학과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 중편 「호(狐)」로 제3회 디지털작가상 공모전 모바일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단편소설집『저주토끼』로 2022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다. 옮긴 책으로 『거장과 마르가리타』, 『우리는 아우슈비츠에 있었다』 등이 있다. 현재 환상문학웹진 거 필진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소개_저주 토끼

“정보라는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요소를 활용해 현대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참혹한 공포와 잔혹함을 이야기한다”― 부커 라이브러리

정보라는 한국 호러 SF/판타지 분야의 대표작가이다. 2022년 인터내셔널 부커상 1차 후보가 발표되었을 때 한국 문학계는 몹시 놀랐다. 첫 번째 이유는 사상 최초로 한국 소설이 두 편이나 노미네이트되었기 때문이었으며, 두 번째 이유는 그 두 편 중 하나가 다른 하나에 비해 국내 문학 독자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소설집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기자는 ‘무명의 부커상 후보’라는 단어를 써서 작가를 소개하기도 했다(SF계에서는 ‘어째서 정보라가 무명이냐’라며 탄식을 뱉긴 했으나). 그리고 최종 후보가 발표되었다. 그 ‘무명 아닌 무명’ 작가 정보라의 소설집, 《저주토끼》가 이름을 올렸다. 부커상 심사위원회는 《저주토끼》에 대해 “마법적 사실주의, 호러, SF의 경계를 초월했다”고 했다.

“현대 사회에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매우 현실적인 공포와 잔인함을 다루기 위해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요소들을 사용한다”라고 평했다. 관습과 허식에 얽매이지 않고 오래도록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해 온 정보라의 쓸쓸한 이야기, 잔혹한 유머, ‘정보라’라고 이름 붙일 수밖에 없는 장르의 정수가 《저주토끼》에 있다.

할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대를 이어 저주 용품을 만드는 집안에서 태어난 손자와 그 할아버지의 이야기. 할아버지는 오래 전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친구가 있었다. 할아버지의 친구네 집안은 마을 유지인 술도가. 바른 마음으로 좋은 전통주를 제조해서 팔려고 애쓰는 할아버지 친구네 집안사람들은 그러나 세상 돌아가는 약삭빠른 이치를 깨닫지 못했다. 정부 인사와의 친분, 인물, 접대, 뇌물은 뒷전이고 좋은 술을 만드는 데 전념한 것.

그에 반해 저질 알코올에 물과 감미료를 대충 섞어 “서민들이 선호하는” 술이라고 선전하던 경쟁회사는 급기야 할아버지 친구네 집안의 술에 “공업용 알코올이 들어간다”는 흑색선전을 퍼트리고, “그 술을 마시면 눈이 멀고 불구가 된다”며 비방을 일삼았지만 호소할 방법이 없다. 결국 매출은 떨어지고 공장은 가동을 멈췄으며, 긴 소송 끝에 할아버지 친구네 집안은 몰락하고 만다. 이에 보다 못한 주인공의 할아버지가 ‘저주토끼’를 어여쁘게 만들어 손수 복수에 나서는데….

러시아를 비롯 슬라브어 권의 명작들을 꾸준히 번역해서 소개하고, 보태어 수준 높은 호러 SF/판타지 창작으로 꾸준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정보라 작가의 대표작.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배경과 인물과 사건들이 넘치는 10편의 작품이 아우르는 주제는 복수와 저주. 저자의 풍부한 상상력은 가차 없는 저주로 복수를 대신한다. 세상의 몹쓸 것들은 도무지 뉘우칠 줄 모르고, 우리의 주인공들인 피해자(혹은 등장토끼 혹은 등장로봇)에게 용서란 없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원래 세상은 쓸쓸한 곳이고 모든 존재는 혼자이며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 혹은 복수는 경우에 따라 반드시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필요한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롭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그런 사람들에게, 그렇게 고군분투하는 우리 모두에게 위안이 되고 싶었다고. 그렇게 이 책은 악착 같은 저주와 복수에 관한 이야기이자, 위로에 관한 우화들이다.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은, 용서하지 말자.”

정 작가는 평소 즐기는 취미나 활동을 묻는 질문에 “데모요”라고 답한 적이 있다. 소수자 인권에 관심이 많은 그는 정말 다양한 시위에 참여했다. 이번에 그녀는 연세대를 상대로 퇴직금과 각종 수당 청산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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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의 미래]④ “한국의 샹젤리제 거리 되지 않을까요”-공근혜 갤러리 대표

[아시아경제 이서희 인턴기자] 공근혜 대표는 2005년부터 ‘공근혜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15년 넘게 이어진 ‘전시 인생’은 우연히 찾아왔다. 대학 졸업 후 떠난 프랑스 인턴십 과정에서 파리 최대 화랑인 ‘이 봉 랑베르’에 들렀고, 그곳의 작품 창고에서 마주친 한 사진에 매료돼 미래를 설계하게 됐다.

사진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생동감이 넘치는 작품을 보고 공 대표는 “작품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현재까지도 공 대표와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베르나르 포콩 작가의 ‘사랑의 방’ 시리즈 이야기다. 국내에선 사진 작품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던 시절, 공 대표는 ‘반드시 이 작가를 한국에도 소개하리라’ 결심하고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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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의 미래]③ 황평우 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 “서촌은 서촌…역사와 경제생활 공존하는 ‘에코뮤지엄’ 돼야”


황평우 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서촌이 ‘서울 600년’이라는 정체성을 가장 잘 담고 있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고려 시대 한옥부터 조선, 일제를 지나 현대까지 주택 역사의 맥이 이 곳, 서촌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황 소장은 1990년대부터 서촌의 문화유산에 관심을 갖고 조사에 나서기도 했다. 지난 13일 낮 서촌에서 만난 그는 서촌이 무분별한 개발이 아닌 주민들이 역사 보존과 경제활동을 함께할 수 있는 ‘에코뮤지엄’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촌이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황평우) 나는 서촌이 북촌보다 서울의 600년 고도(古都·옛 마을)의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북촌은 자본이 많이 들어가 한옥들이 굉장히 정형화돼있다면 서촌은 자연스러운 사람들의 삶과 어우러져 부정형성, 즉 곡선이 많이 살아있는 곳이다. 골목골목 조선 초기부터 일제까지 형태가 다른 한옥들의 모습이 남아있기도 하다. 주택의 역사의 흐름에서 한 맥을 차지하고 있는 서촌이야말로 서울 600년의 정체성을 가장 잘 남기고 있다. 기록이 많진 않지만 서촌에는 남경유적 터 같은 고려의 역사, 선사시대 유적지까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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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신 글로벌 전략]①디지털 공간 인식체계의 재검토

현재를 살아가는 장년은 그 어느 과거 세대보다도 인생의 황혼과 가을을 느낄 여유를 박탈 당한 세대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에서 기하급수적 폭발과 확장을 보여준 20세기를 걸어온 우리 세대는 삶을 지키기 위한 것이든 삶을 정리하기 위한 것이든 길고 긴 길을 걷다가 막다른 골목에서 삶을 정리하는 때를 만났던 수많은 세대와는 다르게 21세기의 막다른 골목에서 멈추지 않고 길을 걷고 있다. 아니 길이 아니라 그리고 가로막던 길을 뚫고 들어가 어떤 공간을 만났고 이 공간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인류가 추구하던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감히 말하지만 그 공간은 또한 인간이 지켜야 할 가치와 생명과 재산도 지배한다. 그리고 그 의미도 변경시킨다. 어쩌면 인류 마지막 공간에 우리는 이제야 들어서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을 이름하여 디지털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류는 디지털 공간을 삶의 거주지로 여기기 전에도 긴 역사의 시간을 더듬어 새로운 공간을 끊임없이 추구했다. 우주천체를 탐색했고, 지구를 구성하는 모든 자연의 구성요소의 미립세계도 파악했으며, 이를 추구하는 주체의 의식 속의 의식인 무의식을 탐구했다. 인류는 이런 탐구의 도정에서 명멸한 위대한 과학자의 길을 따라 공간의 확장에 도전하며 인류의 의식 확장에도 노력했다.

왜 인류는 아름다운 지구를 두고서도 새로운 공간을 추구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것일까? 디지털 공간은 이제 인류의 상상력의 마지막 여정이 될 것인가?

디지털 세계를 공간으로 인식하는 것은 공간 자체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고 있다는 코페르니쿠스적인 인식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고, 이는 칸트가 2000여년간의 서양철학의 인식론적 전회를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라고 말한 맥락의 증강된 인식체계의 변화를 우리에게 요구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인식주체와 인식대상과의 관계성의 설정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고 이의 철학적 전개는 앞으로의 지식인들의 커다란 숙제이다.

디지털 공간은 애초에는 미미했다. 인류의 탄생과 진화의 초기에는 생명이 우연 발생했고 단세포에서 다세포 생물로 진화했듯이 디지털 공간도 시간을 먹어치우면서 형체를 갖추며 성장했다. 1969년 시작된 점과 점의 무작위 연결 네트워크가 1990년대 초 정보고속도로로 전환되기 시작하면서 면과 면의 연결을 시작하더니 다시 30년이 흘러 2020년대 초에는 이제 공간으로의 진화를 이루고 나아가 공간과 공간의 연결 또는 흡수합병을 전망하는 시대가 되었다. 초기 디지털 공간의 신인류를 역사는 어떻게 기록할까? 소위 MZ 세대가 신인류의 시작일까?

인터넷 공간(세계), 디지털 공간(세계), 가상 세계(공간)라고 하더니 급기야 메타버스(Metaverse)라는 디지털 공간의 명칭이 탄생했다. 그럼 신인류는 메타즌(Metazen) 또는 메태즌(Metaizen)으로 부를 수 있을까?

디지털 연결이 디지털 공간을 이루는 역사의 길에 나의 인생의 길도 오롯이 겹친다. 그러니 우리의 삶은 역사적이다. 그렇지 않은가? 50여년이 흐른 지금 나의 회고는 심각한 반성에 빠져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디지털 공간의 기초를 너무 부실하게 만들었다는 회한과 그런 잘못에 얼마간의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는 의식이 온 몸을 흔들기도 한다.

우리는 디지털 공간에 무슨 오류를 가하였다는 것인가? 가장 중요한 오류는, 그리고 다른 수많은 오류를 야기한 근본 오류는 디지털 공간에 자유(自由)를 제대로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디지털 공간에 신뢰(信賴)를 구축하지 못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런 근본 오류는 디지털 공간과 물리적 공간을 대등한 독립 공간이라는 인식보다는 전자를 후자의 종속적 지위 또는 수단적 지위로만 인식하였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런 오류는 비록 대한민국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소위 인터넷 아키텍처 그리고 디지털 공간 아키텍처에 구성요소로 자리잡은 많은 글로벌 기술규범에 우리는 너무 무지했고 이를 디지털 공간에 반영하는 노력을 너무 게을리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오해와 실수가 이어졌고 세계적으로 앞선 디지털 인프라를 가졌다는 글로벌 평가에도 불구하고 은밀하고 조용히 그 디지털 산업 경쟁력이 침식되고 있는 것이다.

“전자주민증 도입 논란”, “인터넷실명제 도입 논란”, “공인인증서 폐지 논란”, “마이데이터 사업”은 대한민국 땅에 배회하는 디지털 유령이며, 우리의 새로운 공간 인식이 너무도 부족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의 반성과 대안 모색은 여기에서 출발하여야 하며, 그 귀결은 디지털 신뢰공간의 구축을 통한 대한민국의 “디지털 신 글로벌 전략”이 될 것이다.

/황철증 디지털신뢰공간연구소 소장 newdhjj@gmail.com

서울대 법대(학사) 및 행정대학원(석사), 미국 콜럼비아 법대 (석사), 고려대 정경대학원(박사)을 졸업했습니다.

행정고시 29회로 1986년 중앙공무원교육원과 아시안게임조직위원회에서 단기 훈련을 거친 후 정보통신부에서 공직을 시작하였습니다.

1 BH, 국무총리실, 국정원(사이버안전센터), NIA 등에서도 근무를 한 바 있으나 주로 정보통신부에서 잔뼈가 굵었습니다. 방송통신위원회를 끝으로 26년간의 공직을 마친 후 사회의 한 구석에서 꼼지락 거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온갖 분야의 독서와 사색으로 삶을 붙들고 있으면서, 일찌기 담당한 인터넷 정책에 관한 주제에도 여전히 많은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소위 디지털(인터넷) 아키텍처와 디지털(인터넷) 철학자로 스스로를 부르며 현대의 기술문명 역사의 흐름을 조망하는 것을 즐깁니다.

한편으로 이병주 소설가, 박이문 철학자, 최제우 동학창시자, 리처드 도킨스 진화생물학자, 움베르토 에코 기호학자 등 훌륭한 학자와 문인에게 지적 의식을 의탁하고 사는 자입니다.

이 글의 게재로 IT기자클럽의 디지털문명 칼럼니스트로 소박한 의무를 시작하는 셈입니다.

연락처는 newdhjj@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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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러]언어순례자,도시 탐험가, 로버트 파우저

그는 언어 순례자이자 평생 외국어 학습자다.

1961년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에서 태어났으나 주로 미국 밖에서 살았다. 10대 후반 도쿄에서 머물며 외국어에 관심을 가졌고, 고교 시절 최초로 배운 외국어인 스페인어 성적 장학금으로 멕시코 홈스테이를 했다.

미시간 대학에서 일어일문학을 전공하면서 일본과 한국을 다녀간 뒤 한국과 한국어에 관심을 갖기 시작, 졸업 후 서울대학교 어학연구소(현재 언어교육원)에서 한국어를 본격적으로 익혔다.

미시간 대학원에서 응용언어학을 전공하면서 라틴어와 소멸해가는 북미 선주민 언어를 공부했다.

졸업 후 한국에 돌아와 고려대학교 영어교육과 객원 조교수, 한국과학기술대학(현재 카이스트) 교양영어 초빙 조교수로 있으면서 남산독일문화원에서 독일어를, 『맹자』를 읽으며 한문을, 시조를 읽으며 중세 한국어를 익혔다.

이후 아일랜드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에서 응용언어학 박사 과정 중 프랑스어를 익혔다.

1995년 아시아로 귀환한 그는 일본 리쓰메이칸 대학교, 구마모토 가쿠엔 대학교 경제학부 부교수, 교토 대학교 외국어 교육론 강좌 부교수, 가고시마 대학교 교육센터 교양 한국어 부교수로 일하며 미국인이 일본어로 한국어와 영어를 가르치는 몹시 드문 풍경의 주인공이 되었다.

특히 가고시마 대학교에서는 ‘교양 한국어 과정’을 설립, 한국어를 본격적으로 가르쳤다. 몽골어와 중국어를 배운 것은 이 무렵이다.

2008년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 부교수로 임용된 뒤 서울에 살면서 한옥을 짓기도 하고, 도시 재생 활동을 해나가는 등 한국 문화 전반에 탐닉했다.

2014년 교수직을 그만둔 뒤 2021년 현재 미국에서 지내는 그는 독립학자로 언어학 관련 연구에 매진하는 한편 거의 원어민처럼 구사하는 한국어와 일본어의 유지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는 동시에 에스페란토와 이탈리아어 공부를 시작했고, 스페인어 실력을 되돌리기 위해 분투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외국어 학습담』, 『로버트 파우저의 도시 탐구기』, 『서촌 홀릭』, 『미래시민의 조건』, 『서울의 재발견』(공저), 『Hanok: The Korean House』(공저) 등이 있고, 『한국문학의 이해』Understanding Korean Literature(김흥규 지음)를 영어로 옮겼다.

2012년 한국어 교육 관련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장을 받았고, 『한겨레』, 『시사저널』, 『프레시안』, 『동아일보』, 『한국일보』, 『중앙선데이』, 『넥스트 데일리』, 『코리아헤럴드』, 『코리아타임스』 등에 글을 써왔다.

저서소개_외국어 학습담

“미국인이 한국어로 책을 쓴다고요?

한국말로 강의를 한다고요?

어떻게 하면 외국어를 그렇게 잘할 수 있나요?

외국어를 잘하고 싶은데 따로 방법이 있나요?”

이 책의 저자이자 미국인 백인 남성인 로버트 파우저는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강연은 물론, 언론사의 칼럼을 비롯해 모든 저술 활동은 직접 한국어와 한글로 말하고 쓰고 있다. 이 책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한글로 직접 집필했음은 물론이다.

그는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과 한국어를 만난 뒤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했다.

그 이전에는 일본에서 일본어를 공부하고, 교토 대학교를 비롯한 일본의 여러 대학에서 일본어로 영어와 한국어를 가르쳤다.

미국에서 태어났으나 평생 미국 밖에서 더 많이 살아온 그는 모어인 영어가 아닌 한국어와 일본어로 의사소통을 하며 산 세월이 각각 십수 년이며, 스페인어, 독일어, 중국어, 몽골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를 비롯해 라틴어, 북미 선주민 언어, 중세 한국어에 이어 에스페란토어와 이탈리아어까지 두루 섭렵해온 명실상부 세계 언어순례자다.

이밖에도 그의 외국어 진입의 역사는 다종하고 다양하다.

그런 그에게 외국어를 잘하는 비법을 묻는 질문은 일상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은 바로 이 질문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권에 사는 동안 그 나라와 지역의 언어를 배우고 사용하며 살았다.

그런 그에게 외국어는 삶의 기반이자 터전의 언어였다. 그런 그는 숱하게 받아온 질문 앞에서 이 책을 통해 어떤 답을 내놓았을까.

“외국어를 왜 잘하고 싶은 걸까?

잘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 그 외국어는 과연 스스로 선택한 걸까?”

그는 자신에게 익숙한 질문의 답 대신 독자에게 다른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곧 외국어의 근본적인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자는 제안이다. 전 세계 많은 이들이 처음으로 배우는 외국어는 대개 영어일 것이며, 외국어를 잘하고 싶은 마음은 곧 높은 성적을 받고 싶다는 의미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렇게 시작한 외국어와의 첫 만남과 잘하고 싶은 마음의 방향은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전혀 다른 상황에서 외국어를 만날 때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학창 시절 영어 점수를 잘 받은 사람은 모든 외국어 앞에서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갖기 쉽고, 영어 성적이 신통치 않았던 사람은 새로운 외국어 앞에서 주눅이 들곤 한다.

그러나 이런 자신감과 주눅은 과연 옳은 것일까?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편견과 고착된 현실 앞에서 저자 로버트 파우저는 ‘왜’라는 질문을 통해 우리가 외국어와 만나려는 이유, 외국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해 전면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학교 졸업한 지 수 년, 이제와 새삼 외국어의 세계에 진입하려는 성인들을 위한 책,

‘어제의 내’가 홀연히 나타나 ‘오늘의 나’를 돕는, 성찰을 통해 학습을 가능케하는

외국어 학습에 관한 완전히 새로운 접근

이 책이 염두에 둔 독자는 분명하다. 학교를 졸업한 지 한참 지나 새롭게 외국어를 배우려는 성인들이 바로 이 책의 주인이다.

저자는 다양한 이유로 외국어를 새롭게 시작할 것을 권하고 있는데, 그 이유에는 진학이나 취업, 승진을 목적으로 하는 학습은 들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 책은 외국어 학습의 남다른 노하우 또는 특별한 만능 학습법을 전시하거나 현란한 비법의 전수가 목적일 수 없다.

그보다는 좀 더 개인적이고 사소한 이유만으로도 외국어를 시작할 충분한 동기가 된다는 것, 과거의 어떤 좌절의 경험이 있었을지라도 자신에게 맞는 목표 설정을 통해 즐겁게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을 특히 강조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이 책의 시작을 도쿄에서 홈스테이를 하게 된10대 후반 미국 청소년이 맛본 문화적 충격, 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접한 스페인어로 처음 외국어를 시작하게 된 경험을 첫머리에 올리는 것에서 출발, 자신의 평생 외국어 학습의 전 과정을 고스란히,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즉, 20대 초반 ‘우주의 언어’처럼 느껴졌던 일본어를 독학으로 공부했던 경험, 한국어를 배우며 경험한 교차 언어 학습법의 유용함, 독일어와 중국어를 배우며 좌절했던 기억, 손실의 아픔을 딛고 회복을 위해 노력한 스페인어 독학기는 50대 후반 새로 배우기 시작한 이탈리아어 학습기로 이어져 평생 외국어와 더불어 산 사람의 순례 여정을 고스란히,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어떤 미사여구나 비법의 유혹이 없는 진실하고 리얼한 외국어 학습의 여정에 저절로 동참하게 되는데, 이러한 여정의 동참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즉, 수많은 개인이 외국어를 시작하는 이유, 외국어를 공부하기 위해서 가져야 할 마음과 자세를 깨달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깨우침이야말로 그가 자신의 언어 순례 여정에 초대하는 이유다.

이를 통해 독자가 얻는 것 또한 분명하다. 외국어 공부를 제대로 시작하기 위해 가장 먼저 돌아보고 집중할 대상은 다름아닌 어제의 나이며, 그동안 만나온 외국어와의 관계라는 것.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외국어를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경험한 외국어 학습의 역사를 살피고, 그 시절 그 순간에 어떤 성취와 실패를 경험했는가를 먼저 살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 성찰을 거친다면 외국어와 씨름했던 ‘어제의 나’를 통해 ‘오늘의 내’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외국어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중요한 요지다.

외국어를 배우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가 아닐까,

AI의 발달로 외국어 학습은 더 이상 필요 없는 세상이 아닐까,

외국어를 잘한다는 건 도대체 어느 수준을 의미하는 걸까,

외국어를 둘러싼 매우 흔한, 그러나 명쾌한 답이 없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큰맘을 먹고 외국어를 시작해보려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나이로 인한 고민을 거치게 된다. 또는 힘들게 외국어를 학습하는 이들에게 어쩌면 AI 기술의 진보는 희망일 수 있다.

이밖에도 외국어를 둘러싼 다양한 편견과 고정된 관념은 의외로 견고하고, 그에 대한 답조차 명쾌하지 않다. 저자는 이러한 질문에 자신의 경험과 그동안 숱하게 등장한 언어학계의 수많은 이론을 바탕으로 분명한 어조로 답한다.

아울러 코로나19를 겪으며 전 인류가 외국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인식의 변화 역시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즉, 개인의 경험에 치우친 외국어 학습에 관한 여타의 책과 분명히 다른 이 책만이 가질 수 있는 특장이 여기에 있다.

외국어가 다른 세상을 보게 하는 창이라면, 그에게는 수많은 창이 있다,

영어권부터 유럽 대륙, 아시아와 아프리카까지

그 창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는 외국어 학습을 둘러싼 다양한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한 이미지들을 통해 누리는 보는 즐거움!

영어는 물론 유럽의 여러 언어,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 등을 비롯해 전 세계 문헌과 자료를 자유자재로 찾아 읽는 그에게 언어를 둘러싼 사례와 자료의 검색 범위는 무한정 확장된다.

이를 통해 독자 역시 외국어 학습이 갖는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함의에 대해서 새로운 시선을 획득하게 되는 것은 이 책이 갖는 의미 있는 쓸모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언어의 장벽을 누구보다 가볍게 뛰어넘는 그이기에 가능한 무궁무진한 검색의 영토에서 찾아낸 특별하고 다양한 이미지들은 기존 외국어 학습서에서 느낄 수 없던 보는 즐거움까지 배가시킨다.

여기에 더해 대부분의 한국 독자가 처음 접하는 외국어가 다름아닌 영어라는 사실이 갖는 의미, ‘외국어는 곧 영어’라는 고정된 인식의 형성이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를 살핀 뒤 영어 외에도 다양한 언어의 세계가 우리 곁에 있다는 것,

수많은 언어를 통해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나 크고 넓은 지에 대한 인식의 확장 역시 그가 안내하는 길 위에서 얻을 수 있는 바다. 아울러 코로나19를 겪으며 언어를 둘러싼 전 인류의 고민이 어디로부터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에 대한 고찰 역시 저자 로버트 파우저만이 책에 담을 수 있는 성취다.

미국인, 백인, 남성이라는 주류에 서 있는 로버트 파우저,

언어순례자로 살아온 자신의 존재와 위치에 관한 그다운 자문,

오랜 자문 끝에 외국어 학습의 필요성에 대한 그가 찾은 자답!

코로나19를 겪는 와중에 미국에서는 백인 남성 경찰관에 의해 흑인 시민이 살해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로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거대한 시위가 일어났고, 이는 전 세계적으로 차별에 대한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

당시 미국에서 실시간으로 이 현장을 지켜본 저자는 다시 한 번 스스로의 위치에 대해 고민하며, 영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백인 남성이 어느 곳에서나 쉽게 획득한 환대의 의미에 대해 돌아보기 시작한다.

외국어는 즐거운 것이며 외국어를 통해 더 많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음을 행복하게 여기던 자신의 태도가 어쩌면 선택의 여지 없이 영어를 배워야만 하는 이들의 사정과 동떨어진 것은 아니었는지,

수많은 언어를 섭렵한 자신의 행위가 주류 백인 남성의 입지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게 된 그는 한동안 스스로의 외국어 학습의 의미에 대해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성찰의 기반 위에 이루어진 것으로 외국어 학습을 통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고 있다.

“로버트 파우저 선생님, 정말 대단한 분이시군요!”

출간 전 초고를 본 일본 출판사의 일성, 이미 판권 계약이 진행되다

이 책의 초고가 완성되었을 무렵, 한국의 독자들은 물론 외국어 학습에 관해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일본의 독자들에게도 유의미한 책이 될 것으로 확신한 편집자는 일본에 원고 검토를 의뢰, 판권 계약 여부를 타진했다. 원고를 검토한 뒤 일본 출판사 담당자로부터 받은 메일의 첫 문장은 감탄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곧 국경을 가리지 않고, 21세기 오늘을 사는 수많은 이들이 외국어 학습이라는 동일한 고민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이 책이 가지고 있는 특별하면서도 보편적인 의미와 가치를 방증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서문을 올해 최고의 서문으로 꼽고 싶습니다!”

출간 전 초고를 함께 살펴본 한국출판인회의 SBI 예비 편집자들의 이구동성,

그들에게 감동을 이끌어낸 요인은 무엇일까?

이 책은 한국출판인회의 서울출판예비학교(SBI) 편집자반의 협력 원고로 제공되었다.

편집자를 지망하는 이들이 하나의 원고를 읽고 각자 자신들의 책을 만드는 이 과정은 출판사로서는 출간 예정인 원고에 대한 다양하고 깊이 있는 의견을 듣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 책의 초고를 읽은 예비 편집자들은 이전에 볼 수 없던 외국어에 관한 새로운 접근 방식, 언어의 학습이 갖는 다양한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계기가 되었노라 평했다. 특히 서양인 백인 남성의 남다른 성찰이 담긴 서문에 이르러 원고는 물론 저자의 신뢰도 역시 배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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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베이거스의 역사

라스베이거스는 1846년 멕시코/미국전쟁의 결과로 미국영토가 되었다. 라스베이거스의 시작은 교통요지라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었다. 1904년 골드필드에서 금광이, 앨리에서 은광이, 토노파에서 은광과 동광이 발견되면서 채굴과 수송에 많은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다. 마침내 1905년 LA와 솔트레이크를 연결하는 철도가 개통되면서, 라스베이거스는 중간기착지가 되었다.

1931년 네바다주가 도박을 합법화 하면서 라스베이거스는 변화의 문을 열었다. 이 무렵 후버 댐 건설이 시작되었고,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월급날 도박을 즐기기 위해 라스베이거스까지 약 25마일의 여행을 주저하지않았다. 그러나 2주마다 유입되는 노동자들이 라스베이거스를 도박의 메카로 만들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1930년대 라스베이거스를 만든 전직 경찰

1938년 로스앤젤레스 시장이 불법 도박을 단속하면서, LA의 카지노 인력이 라스베이거스로 근거지를 옮긴다. 대표적인 인물이 LA 경찰 가이 맥아피(Guy McAfee)이다. 그는 도박과 매춘 조직을 운영한 혐의로 기소를 피해 캘리포니아를 탈출했다. 그는 1941년 91번 고속도로 앞에 최초의 호텔/카지노를 개장했고, 그의 카지노 모델은 크게 성공했다. 얼핏 보면 휴가를 즐기며 도박을 할 수 있는 리조트이자, 영화 <벅시>가 묘사한 마피아의 폭력과 돈세탁, 도박과 환락의 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맥아피는 세금를 회피할 수 있는 기발한 방법을 만들어 전파했다. 초기 라스베이거스의 모델을 만든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1950년대 마피아가 만든 라스베이거스

마침내 갱단이 라스베이거스에 모여들게 된다. 라스베가스는 마피아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그들은 다른 도시와 달리 라스베이거스에서 도박으로 합법적인 돈을 벌 수 있었다. 1970년대까지 네바다는 합법적인 카지노 도박이 있는 유일한 주였다.

1950년대에 라스베이거스에서 프랭크 시나트라, 딘 마틴 등 유명인들이 공연을 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된다. 클럽과 리조트는 또한 가장 화려한 쇼걸 공연을 하기 위해 경쟁했다. 누드에 가까운 의상을 입은 쇼걸들이 우뚝 솟은 머리 장식을 하고 동시에 화려한 춤을 추었다. 

유명 인사와 쇼걸 뿐만은 아니었다. 마피아는 관광객을 카지노로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핵 실험 을 이용하기도 했다. 라스베이거스는 네바다 시험장에서 약 65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이른 아침 원자폭탄이 터지기 전날 밤, 리조트에서는 새벽에 눈에 띄는 핵폭발이 있을 때까지 파티를 열었다. 축하 행사에는 특별한 “아토믹 칵테일” 또는 “미스 아토믹 에너지” 미인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기업의 시대에 변신중인 라스베가스

1960년대 중반과 70년대에 라스베이거스 리조트의 소유권이 바뀌기 시작했다. 하워드 휴즈는 1967년 데저트 인(Desert Inn)과 그 밖에 많은 부동산을 구입했다. 네바다주에서도 기업 게임법을 통과시켜 기업이 카지노를 운영할 수 있도록 했다. 이로 인해 마피아가 아니라 정상적인 기업들이 라스베이거스 리조트를 매입하고 운영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1978년부터 애틀랜틱 시티가 첫 카지노를 열면서 라스베가스는 네바다 이외의 지역에서 도박 경쟁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카지노 도박이 미국의 더 많은 지역에서 합법화됨에 따라 기업 리조트는 보다 많은 사람이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오락과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1931년 도박이 합법화된 라스베이거스에서 카지노 자본은 끊임없이 변신 중이다.라스베이거스의 상징이던 카지노 자본은 복합리조트로 거듭나고 있다. 라스베이거스는 더이상 세계 최대의 도박도시가 아니다. 그들은 ‘갬블링’(도박)이란 단어도 ‘게이밍’으로 순화했다. 2022년 그룹 방탄소년단(BTS)도 라스베이거스 도시자체와 콘서트를 연계하는 거대 프로젝트를 진행한바 있다. 라스베이거스가 꿈꾸고 있는 라스베이거스의 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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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5월 24일, 브루클린 다리 개통하다.

브루클린 다리는 뉴욕시의 랜드마크이다. 수많은 영화의 배경이었지만, 특히 ‘원스 어폰어 타임인 아메리카’에서 건물사이로 보이는 부르클린 다리가 최고의 장면이다. 1883년 브루클린 다리의 완공을 축하하기 위해 14톤의 불꽃놀이가 뉴욕의 밤을 밝혔다. ‘세계 8대 불가사의’로 불렸던 이 다리는 뉴욕 과 브루클린를 연결하는 당시 건설된 가장 긴 현수교이다. 브루클린 다리 건설에는 14년이 걸렸고 여러명이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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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손관승의 ‘리더를 위한 하멜 오디세이아’

‘글로 생활자’를 자처하는 손관승 작가가 지난해 11월 ‘리더를 위한 하멜 오디세이아’를 냈다. ‘글로 생활자’는 손작가가 전업 작가를 재치있게 표현한 것이다. 그는 MBC에 기자로 입사하여 베를린 특파원,국제부장 등을 거쳐 iMBC대표를 지낸 저널리스트다.

저널리스트가 은퇴후에 전업작가를 지향하는 것은 흔치 않다. 손작가는 거대 언론사라는 울타리를 떠난 뒤에도 저널리스트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읽고, 쓰고, 말하는 활동을 왕성하게 펼치고 있다.

한국인에게 하멜은 국사 교과서속에 박제되어 있는 인물이다. 정규 교육을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하멜을 ‘하멜 표류기’를 써서 조선을 서양 세계에 최초로 알린 인물로 기억할 것이다. 좀 더 확장하면 박연이라는 네덜란드인이 먼저 조선땅에 흘러들어와 조선에 살다가 제주도에 표류한 하멜 일행을 만났던 사실도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하멜이 어떤 사람인지, 조선에서 보고 듣고 기록한 내용이 실제 어떤 것인지, 어떻게 조선을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는지를 상세하기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더욱이 조선과 하멜의 만남이 세계사 흐름속에서 어느 지점에 속하는지를 가늠하기도 어렵다.

이는 하멜이 남긴 ‘하멜 표류기’를 정독한 사람이 없는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하멜표류기는 하멜이 13년동안 조선에 억류되어 있다가 탈출한 다음에 동인도회사로부터 임금을 받아내기 위해 작성한 경과보고서 성격을 띠고 있어 일반인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손작가는 그런 하멜이 교과서 밖으로 걸어 나와 21세기 한국인에게 말을 걸듯이 생생하면서 입체적 인물로 그려내려고 시도했다. 최근 유행하는 메타버스에 빗대면, 하멜이 살았던 17세기 대항해 시대를 시간과 공간을 씨줄과 날줄로 삼아 메타버스에 입체적으로 구현하려는 듯하다.

하멜은 1630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에 취직하였다. 따라서 암스테르담, 델프트, 레이던 등 네덜란드 주요 도시와 연을 맺었다. 또 바타비아(현재 자카르타), 타이완, 나가사키 등 동인도회사가 장악했던 무역 거점이 그의 생활무대였다.

하멜의 삶을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대항해 시대, 시끌벅적했던 항구 도시 풍경을 만나게 되고 그 도시속에서 살았던 사람과 그들이 즐겼던 문화 예술을 접하게 된다. 손작가는 렘브란트, 페르메이르 등 네덜란드의 유명 작가의 작품과 하멜의 삶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슬쩍 슬쩍 보여준다.

하멜은 또 제주도에서 시작해 한양, 강진, 여수 등 조선의 도시와 마을에서 13년을 생활했기에 하멜의 공간은 조선땅까지 확장되었다. 한국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강진과 여수도 하멜의 삶과 겹쳐 놓으면 새로운 호기심이 발동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강진과 여수를 다시 찾고 싶어지는 것이다.

손작가의 작업 덕분에 하멜 루트는 하나의 그랜드 투어 루트로 재탄생하였다. 예를 들어 암스테르담에서 시작하여 자카르타-제주도-여수-나가사키 순으로 하멜의 궤적을 찾아다니면 대항해 시대 하멜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을 것 같다.

손작가는 또 하멜이라는 일 개인을 네덜란드 황금의 시대와 대항해 시대라는 큰 그림속에 놓음으로써 조선과 하멜의 만남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또렷하게 보여준다. 즉, 동서양이 만나는 새로운 루트인 바닷길이 일본에 이어 조선까지 이어졌던 문명적 대사건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엇보다 손작가는 역경을 이겨낸 탁월한 리더로서 하멜상을 새로 제시한다. 즉 꿈에도 생각하지도 않았던 이국 땅에 발을 디딘 뒤 기약없는 세월을 견디며 마침내 귀향하는 과정에서 21세기 경영자가 배울 점을 꼼꼼하게 찾아낸 것이다. 그래서 손작가는 하멜과 오디세이아를 합쳐 이 책 제목을 정했다.

손작가가 주목한 하멜의 리더십의 근간은 뛰어난 적응력과 소통력이다. 예를 들어 왕실에서 공식적으로 제공되는 쌀만으로 살아가기 힘들어 하멜 일행은 민가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먹을 것과 일상용품을 얻어왔다. 또 하멜 일행은 산에 땔감을 구하러 다니면서 사찰 승려와 어울리는 사교성도 발휘했다.

손작가는 하멜 표류기속에서 하멜이 기근 속에서 먹을 것을 스스로 구하고 또 장사를 통해 필요한 물건을 확보하는 비즈니스 기질을 발휘한 점을 찾아냈다. 또 손작가는 하멜이 여수에서 3년에 걸친 치밀한 준비끝에 탈출에 성공한 점은 불운에 굴하지 않는 리더의 표본이라고 해석했다.

손작가는 그동안 10여권의 책을 냈는데, 2014년에 펴낸 ‘괴테와 함께 한 이탈리아 여행’가 퇴직후에 낸 첫 책이다. 그후 손작가는 ‘그림 형제의 길'(2015년) ‘투아레그 직장인 학교’ (2017년)’me,베를린에서 나를 만났다'(2018년) 등 출간했다.

그가 제시하는 화두는 늘 시대와 호흡하는 것들이다. 직장인의 번아웃과 은퇴이후의 삶을 다루고, 창조적 도시로 거듭난 베를린를 재조명함으로써 성수동의 변신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각을 제시했다. 하멜 스토리를 통해 대항해 시대와 조선을 연결해줬고, 아울러 역경을 딛고 마침내 귀향하는 하멜의 리더십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는 이런 저술 작업을 바탕으로 강연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또 한겨레, 매경 등 여러 언론에 정기 연재물을 게재하고 있다. 퇴직후에 현역 때보다 더 왕성하게 집필과 강연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손작가의 퇴직 이후 삶은 현직 저널리스트에게 롤 모델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그의 작업방식은 전형적인 저널리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은 현역 기자시절 때처럼 아주 작은 단서나 의문에서 출발한다.

하멜 스토리의 경우 ‘한국인중에서 누가 최초로 와인을 마셨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하멜표류기에 하멜 일행이 난파된 배에서 건진 틴타주(붉은 포도주의 일종)를 조선 병사에게 선물했다는 대목을 찾았고, 한발 더 나아가 하멜과 하멜의 시대를 추적하는 방대한 작업으로 이어졌다.

두번째 저널리즘 방식은 현장을 직접 찾아가서 확인하는 현장주의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하멜의 행적을 직접 찾아 다니면서 현장을 확인하고 부속 자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했다.

세번째 저널리즘 방식은 점과 점을 연결하여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연결력이다. 손작가는 하멜 관련 자료를 잘 분해하고 다시 한국인의 관점에서 연결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면을 부각시켰다.

예를 들어 하멜이 살았던 강진에서 청어뼈 문양(Herringbone stone wall)을 한 돌담을 보고, 청어와 네덜란드의 부흥이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를 기술했다. 대항해 시대 청어 가공기술은 네덜란드의 국력과 떼랠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네덜란드인들이 북해 바다에 풍부하지만 쉽게 상하는 청어를 오래 보관할 수 있는 혁신 기술을 찾아내고, 그 덕분에 선박산업,제염산업,금융산업 등 연관 산업을 확 키울 수 있었다. 청어 가공기술 혁신은 나아가 렘브란트, 페르메이르 등 네덜란드의 예술을 활짝 피우는 자양분 역할을 했다. 손작가는 당시 청어 가공기술 혁신은 21세기 첨단 반도체 기술의 역할과 같다고 본다. 손작가의 이런 연결력 덕분에 강진의 돌담은 암스테르담-바타비아-나가사키-제주-강진에 이르는 청어 루트를 완성시키는 의미를 부여받았다.

만약 이 책을 읽고 강진을 방문한다면 청어뼈 문양 돌담을 찾을 것이다. 그 담벼락을 보면서 네덜란드와 청어 스토리를 머리속에서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또 페르메이르가 그린 ‘델프트 풍경’속의 청어잡이 배를 떠올릴 것이다.

손작가는 저널리즘의 엄격한 방식에 머무르지 않고 과감한 상상력을 그의 작업에 덧붙였다. 손작가는 “문헌과 자료는 물론 중요하고 현장 인터뷰도 충실해야 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상상력의 힘이 뒷받침되어야 훌륭한 인문 여행작가로 성장한다”고 밝혔다.

저널리스틱 콘텐츠는 소설과 같은 픽션과 실험과 논증에 기반을 둔 아카데믹 콘텐츠와 확연하게 다른 영역이다. 저널리스틱 콘텐츠는 여러 분야에서 밝히거나 정리한 팩트를 바탕으로 직접 읽고, 보고, 들어서 새로운 의미를 잘 찾아내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지식 생태계에서 저널리스틱 콘텐츠에 대한 수요는 늘 존재하고 또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작가중에서 저널리즘 백그라운드를 지닌 이들이 수두록 하다. 예를 들어 말콤 글래드웰, 토머스 프리드먼, 스티븐 존슨 등 유명 작가들이 그러하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반짝이는 호기심을 갖고 아카데미 영역에서 펴낸 논문을 부지런히 읽으면서 점과 점을 연결해 새로운 키워드를 발굴하는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한다. 또 저술 활동의 부산물로서 강연을 하거나 포럼에서 마더레이터 역할을 하면서 탄탄한 영향력을 구축하고 있다.

물론 저널리스트가 모두 베스트 셀러 작가를 지향할 수는 없다. 특히 한국어 시장이 그리 크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한국에서 전업 작가로 제2의 저널리스트를 꿈꾸기 어렵다.

하지만 손관승 작가는 퇴직후 저술 활동은 40~50대 현역 저널리스트가 벤치 마킹 대상으로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손작가는 저널리즘 특유의 호기심을 갖고 질문하는 직업 습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늘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독서력으로 무장하고 있다. 무엇보다 손작가의 강점은 지식 시장의 고객이 누구이고,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계속해서 캐내려는 자세이다. 이 자세야 말로 손작가가 지치지 않고 새로운 책을 기획하고 실제 결과물로 내는 원동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