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한국전쟁 이후, 20여년간 미국과 중국은적대관계를 지속했다. 닉슨 대통령(1969~1974년)이 취임하면서, 미국은 중국과 대화 채널을 만들고자 했다. 1971년 일본 나고야 세계탁구 선수권대회가 끝나고, 중국은 그 대회에 참석한 미국선수단15명과 기자 4명을 공식 초청했다. 이 친선경기로 두 나라는 우호적인 접근을 시작했고, 그 해 7월 미국의 헨리 키신저가 베이징을 극비리에 방문했다. 72년 2월 닉슨대통령이 베이징 방문하여, 미국과 중국은 ‘상하이 코뮈니케’를 발표했다. 그러나 두나라의 공식수교는 1979년 1월로 미루어졌다. 1978년 등소평이 복권되고, 카터대통령이 대만과의 단교를 수용한 이후이다.
율브리너의 여름 추억, 노비나를 아시나요?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고 난 뒤, 러시아는 4년 동안 내전으로 대격변을 겪었다. 1922년 10월 붉은 군대가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하자, 말하자면 반혁명세력이었던 백계 러시아인들은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 초 한반도는 백계 러시아인들의 피난처였다.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상하이, 일본, 샌프란시스코 등지로 다시 떠났다. 그 중 일부는 한반도에 남아 정착하였다.이들은 식민지 조선의 ‘경성’과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에 작지만 흥미있는 러시아 공동체를 만들었다.
특히 ‘노비나’라 불리는 함경북도의 백계러시아인은 ‘얀코프스키’ 일가는 주을에 정착하였다. 미하일-유리-발레리 3대에 걸친 얀코프스키 일가의 디아스포라 삶이 시작되는 곳이다. 발레리 얀콥프스키의 가족사는 1945년 10월호「내셔널지오그래픽」에 ‘한반도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냥꾼’ 이라는 특집 기사로 실린 적이 있다. 그 만큼 얀코프스키 일가는 호랑이 사냥군으로 유명했다.
‘얀포크스키’ 일가는 폴란드계 러시아인이었다. 러시아가 폴란드를 지배하던 1863년 무렵 모스크바 근처 대학을 다녔던 미하일 얀코프스키는 폴란드 독립투쟁에 가담했다가 시베리아로 유배당했다. 1868년 사면을 받은 미하일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하고, 러시아와 중국 국경을 가르는 아무르강을 오르내리며 국경 무역을 시작했다. 이와 함께 말 사육농장을 운영하여 큰돈을 벌었다. 미국까지 유학해 말 목축과 농장운영법을 배워온 유리 얀코프스키 덕분이었다. 사슴 사육을 시작해 녹용을 채취했고, 인삼 재배까지 했다. 1917년 무렵 얀코프스키 일가의 재산은 요즈음 가격으로 2000만 달러(200억원) 정도였다고 한다.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 세력들은 마침내까지 블라디보스톡까지 진군하였다. 자본가 세력으로 낙인 찍힌 얀코프스키 일가는 1922년 60명의 가족과 친척, 농장 일꾼들과 함께 야반도주해서 찾아간 곳이 청진이었다. 얀코프스키 일가는 다시 맨손으로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의 상황을 3대손인 발레리 얀코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재벌로 통했던 우리 가족들은 하루아침에 거지 신세가 됐지요. 하지만 낙담하지 않았어요.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당시 하르빈으로 망명해 자리를 잡은 러시아 출신 자본가들을 찾아가 신용 대출을 요청했어요. 그들이 흔쾌하게 대출해 줘 그 돈으로 청진에서 기반을 잡았습니다”(월간조선)
조선에서 얀코프스키 일가를 다시 세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얀코프스키 일가는 일본인과 사업을 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1926년 무렵 2대인 ‘유리’는 일본군에 식량을 제공하는 계약을 체결했고, 이를 통해 재기할 수 있었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과 먼 친척인 (율 브리너의 아버지) 보리스 브리너에게 돈을 더 빌려 주을에 가옥과 대지를 구입했다.
얀코프스키 가족은 1928년 동해안의 주을온천으로 이사 갔다. 그의 아버지는 주을온천 주변에 큰 별장을 지었다. 청진에서 남쪽 50km 떨어진 해안가였다. 이곳에 온 가족이 살 수 있는 별장과 성당 등 부대시설을 만들었다. 다차에서 러시아에서 받았던 것처럼 가정교사를 두고 모든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얀코프스키 일가는 그곳에 ‘노비나’라는 이름을 붙였다. 노비나는 폴란드 국가 휘장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노비나는 1926년에서 1945년까지 19년 동안 유지되었다. ‘메밀꽃 필무렵’의 작가 이효석도 당시의 노비나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온천에서 삼마정쯤 들어간 산골은 망명해 있는 외국 사람의 부락 ‘노비나’ 촌이라는 것인데, 여름이 되면 그 부락이 피서지로 변해서 도회에 있는 외국인들이 한동안 모여들곤 했다’
그 시기에 얀코프스키 일가는 농장, 가축 사육, 사냥, 휴양지로 돈을 벌었다. 이곳 휴양지에 대한 뉴스가 아시아는 물론 유럽까지 널리 퍼졌다. 중국·일본·한국 등에 사는 외국인들이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찾았다. 2세대인 유리 얀코프스키는 처음으로 한국에서 사파리 프로그램까지 개발했다고 한다. 당시 스페인·중국·미국·일본 등에서 사냥꾼들이 몰려왔다.
전시체제로 들어섰던 1930년대 말에도 얀코프스키는 노비나 근처의 해안가에 또 다른 휴양지를 지을 수 있었다. 그 휴양지는 ‘루코모리예’라고 이름을 붙였다. 일본인들은 그것을 ‘류켄’으로 불렀다고 한다. 노비나와 루코모리예는 1930년대 내내 조선과 하얼빈, 북경, 상하이에서 온 백계 러시아인들의 휴양지가 되었다.
디아스포라 러시아인들은 교회당, 극장, 묘지까지 갖추고 있는 이여름 휴양지를 ‘진정한 러시아적인 보금자리’로 여겼다. 세월이 꽤 흐른 뒤에도 백계 러시아인들은 노비나를 ‘낙원’과 ‘동화의 세계’로 기억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서머 코리안 보이’라고 불렸던 율 브리너였다. 율 브리너 집안은 얀코프스키일가와 친척의 연이 있어, 하얼삔에 살던 율 브리너는 여름이면 노비나를 방문하곤 했다.
태평양 전쟁은 노비아와 얀코프스키일가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렸다. 1945년 8월에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자, 3대인 발레리 얀코프스키는 살아남기 위해 소련 군대에 자원 입대했다. 일본 경찰·관리·헌병을 심문하고 재판할때 통역업무를 담당했다. 그러나 1946년 1월, ‘국제 자본가의 앞잡이’와 ‘일본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유형에 보내졌다. 스탈린 사후 복권되어 마침내 블라디보스톡에 정주하였다.
홉스봄이 재즈를?
벌써 10년전인 2012년, 변화무쌍한 격동의 한 세기를 살았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9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던 1917년에 태어났고, 오리지널 딕시랜드 재즈 밴드는 1917년에 최초의 재즈 녹음을 남겼다.
홉스봄은 강렬한 기억에 남은 10대 시절의 두 가지 일화를 말했다. 1933년 독일 공산당의 집회에 참여해 구호를 외치고 노래한 뒤 “무아지경에 빠진 채” 집으로 돌아왔던 일, 이후 런던으로 이주해 가진 돈을 모두 털어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재즈공연을 본 뒤 새벽녘까지 걸어서 집으로 돌아온 일이다. 첫사랑을 느낄 만한 열여섯 일곱 무렵에 재즈가 첫사랑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고…
나치가 권력을 잡을 무렵인 1933년, 그는 그렇게 재즈와 만났다. “내 인생의 3분의 2를 나는 재즈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끈끈한 교감을 나누며 살았다.”고 회고했다. 그재즈에 대한 홉스봄의 애정은 비평가로 그를 이끌었다. 그는 1950년대 중반부터 ‘프랜시스 뉴턴’이라는 필명으로 본격적인 재즈 비평을 시작, 그 글들을 모은 책 <재즈 동네>를 남겼다. 《재즈,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음악》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출간을 허락한 유일한 재즈 책이다
홉스봄은 편견없이 지적인 방식으로 재즈에 대해 ‘왜?’라고 물은 거의 최초의 인물이다. 이책에서 그는 역사 속에서 이름 없이 사라져가던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비범한 음악’ 재즈를 만들어 냈는지를, 그리고 재즈가 하층민들의 음악에서 교양인들의 음악으로 올라서며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는 인류사에 드물게 나타난 음악 가장 낮은 곳(‘평범한 사람들’ 흑인 노예의 음악)에서 가장 높은 곳(‘비범한 음악’ 엘리트의 음악)까지 이른 재즈의 역사적·사회적 의미와 오늘날 재즈가 맞고 있는 위기를 우리에게 일러준다.
홉스봄은 듀크 엘링턴의 평전에 대한 서평 형식을 빌려, 엘링턴이 20세기 예술가들 중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은 인물”인 동시에 “상당히 호감이 가지 않는 인물”로 묘사한다. 엘링턴은 밴드 단원들의 악상을 가로챘고 가족에겐 냉정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테크닉은 뛰어나지 않았고 악보를 읽는 것도 힘들어했다. 지적이지 않았고 다른 이의 음악을 듣지도 않았다. 이런저런 인간적인 결점에도 불구하고 엘링턴은 여전히 ‘위대한 예술가’였다. 엘링턴은 “서로 다른 사운드와 음색을 혼합시킴에 있어서 자연스럽고도 새로운 매혹”을 일으키고, “화음을 불협화음의 끝자락까지 밀어붙이는 미감”을 가졌고, 이를 곡으로 표현했다. 엘링턴의 밴드에는 유명한 연주자가 없었으나 엘링턴은 오히려 그들의 소리를 개성있게 조합해냈다.
재즈는 19세기 후반 20세기 초 미국 뉴올리언스의 흑인문화에서 자생적으로 나타나 소수자의 하위문화로 성장했다. 홉스봄은 미국에서 재즈는 뉴딜 급진주의와 좌파 운동과의 강한 연대 아래 성장했다고 본다. 정치적 좌파가 민속적 기반을 가지는 보통 사람들의 음악이자, 저항과 시위에 어울리는 재즈를 받아들여다는 것이다. 1950년대에 놀라울 만큼 확장세를 보이며 재즈의 황금시대가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1960년대 비틀즈의 성공이 세상을 뒤덮자, 미국의 재즈는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블루스라는 같은 음악적 뿌리에서 나온 로큰롤이 젊은 층에게 인기를 얻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재즈는 나이든 사람의 음악처럼 되었다. 홉스봄이 보기에, 로큰롤은 재즈와 달리 결코 소수자의 음악이 아니었고, 전체 세대의 음악이었다. 점차 미국의 재즈는 회고적으로 변화해 갔다.
반면 유럽에는 적지만 안정적인 재즈팬이 생겨 방황하는 미국 재즈의 거장들을 오랜 시간 지켜냈다. 유럽의 재즈 수용사는 흥미롭다. 미국의 재즈는 대서양을 건너 지식인 계급을 위한 감상 음악이자 노동계급을 위한 혁명적인 사교춤 음악으로 자리잡는다. 홉스봄은 특히 유럽에서의 재즈가 민중에 뿌리를 내렸다는 점에 주목한다. 음악잡지 ‘멜로디 메이커’는 이렇게 표현했다. “이 음악(재즈)은 연주장 1층의 1등석뿐만이 아니라 꼭대기 층 맨 뒷좌석까지도 매료시킨다. 재즈에서는 좌석 등급의 구분이 없다.”
1990년대 초 홉스봄은 암울한 재즈의 미래를 슬퍼한다. 그는 재즈가 “클래식 음악의 또 다른 종류라는, 구제받을 길 없는 음악으로 변모”하고 있지는 않은지 회의하기도 한다. 소수자의 음악 재즈의 네트워크는 이제 다 해지고 끊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며… 그래도 그는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치지 않는다. 끝까지 마르크스주의였던 그답게 재즈에 대해서도 희망을 놓치지 않는다. “재즈의 잠재력이 고갈되었다고 생각하기에는 아직 때가 너무 이르다. 게다가 그냥 재즈를 들으면서 재즈 스스로가 자신의 미래를 헤쳐 나가도록 내버려 둔다고 한들 무엇이 잘못이겠는가?”
일터의 멘토, 신수정
신수정은 KT의 Enterprise 부문장을 맡고 있다.공학과 경영학을 전공하였고 글로벌 기업, 창업, 벤처, 중견기업, 삼성, SK 등 다양한 기업들을 거치며 일, 리더십, 경영 역량을 쌓았다.
인간을 이해하는 데 관심이 많아 다양한 코칭, 심리, 자기계발 코스를 수료하였다. 삶, 일, 경영과 리더십에 대한 통찰을 나누어 사람들에게 파워와 자유를 주고 한계를 뛰어넘는 비범한 성과를 만들도록 돕는 선한 영향력을 추구하는 것을 삶의 미션으로 삼는다. Inspiring coach이자 Leader로 스스로의 역할을 정의한다. 트위터에 이어 페이스북에서 일과 삶에 대한 글로 많은 팔로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현재도 포스트 하나마다 1,000개 이상의 좋아요와 100개 이상의 공유가 이루어지고 있
<일의 격>은 페이스북에서 일과 삶에 대한 경험과 통찰로 수많은 직업인들에게 공감과 열광적 지지를 받으며 ‘선한 영향력’을 실천하는 KT 신수정 부사장의 글을 엮은 책이다. 오랜 시간 축적해온 다양한 현장 경험과 수 천권에 달하는 독서의 흔적으로 채워져 있다. 성장, 성공, 성숙이라는 세 가지 핵심 주제를 바탕으로 개인과 조직, 그리고 우리들의 삶을 더 가치있게 변화시킬 수 있는 실천적 해법을 제시한다.
일을 하다보면, 삶을 살다보면 어렵고 힘든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누군가에게 그 마음을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와 힘이 되곤합니다. 우리는 평소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함께 웃고 떠들며 대화하는 수많은 관계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누군가로부터 위로와 용기의 말을 듣고 싶은 순간, 의외로 속내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한 사람이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책을 찾습니다. 차마 말 못했지만 내 마음을 알아주는 한 사람, 한번 듣지 못했지만 나에게 용기내라고 이야기해주는 한 사람, 정말 필요했지만 그동안 요구하지 못했던 공감을 보내주는 한 사람, 그 사람 대신 우리는 책을 들춰봅니다.
단순히 눈물을 닦아주고 마음을 다독이는, 막연한 위로와 응원 대신 지금 흘리고 있는 땀과 눈물의 본질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스스로의 삶과 마음의 주인이 될 수 있는 방법과 지혜, 그리고 용기를 나눌 것입니다.
작가는 ‘선한 영향력’으로 조금이라도 더 살기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말합니다. 출판사는 ‘선한 영향력’이 당신의 일과 삶에 닿을 수 있도록 더 노력하고 싶습니다. 만약 누군가 이 글을 보게된다면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말 잘 찾아오셨습니다” 이 책이 당신의 일과 삶을 위한 작은 보탬이 될 수 있길 진심을 담아 소망합니다.<출판사 제공>
1968년 4월4일, 마틴루터킹 암살되다.
1968년 4월 4일 오후 6시 직후, 마틴 루터킹은 멤피스에 있는 모텔의 2층 발코니에 서 있던 중 총에 맞아 사망했다.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범인은 탈출한 죄수 제임스 레이로 지목되어, 1969년 3월 99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킹의 가족은 그레이가 진범이라는 FBI의 조사 결과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동안 FBI가 킹과 그의 주변을 감시하고, 전화를 도청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FBI는 그가 바람을 피우는 소리가 담긴 테이프를 보내 대중에게 폭로하겠다고 위협했다. 암살 소식이 퍼지자 미국 전역의 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멤피스와 워싱턴 DC 에 주 방위군이 배치되었다.
고혜련, 우아한 루저의 나라
처음부터 ‘우아한 루저’란 제목에 끌렸다. 원문 ‘게으른뱅이’를 ‘루저’로 의역했다고 하니, 번역자 고혜련 교수의 ‘감’은 역사적이며 문학적이다.
고혜련 교수는 현재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한국사를 강의하고 있다. 2017년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연구년을 보내면서, 도서관의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자료들을 발굴해 이 책을 완성했다. 그녀는 도서관 구석에서 크노헨하우어의 강연문 ‘코레아(Korea)’ 전문을 처음 발견한 두근거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고혜련 교수가 발견해낸 사료들이 귀중하다. 3인의 여행기 뿐만 아니라, 그녀는 한국 관련한 의미있는 유럽 신문들의 기사를 많이 발굴했다. 예를 들면 ‘대한제국 사절단의 항변'(배를리너-폴크스 짜이퉁 1907년 7월 27일 자 기사)이 대표적 예다. 고종이 헤이그밀사를 보냈지만, 그들은 만국평화회의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런데 기자협회의 도움으로 이위종이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는’ 멋진 프랑스어 연설을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당시 중국에 지사를 두었던 독일 신문들의 한국관련 기사를 찾아내, 우리가 알지 못했던 많은 역사적 사실을 발굴했다.
고혜련 교수의 북토크를 듣고, 한국사도 지금보다 더 세계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어로 기록된 한국관련 자료들, 영어, 독일어 뿐만 아니라 중국, 프랑스,러시사 등의 기록까지 더 찾았으면 한다. 단지 기록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다양한 시각도 있는 그대로 알았으면 한다. 비록 그게 불편할지라도. 이제 우리는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할 수 있지 않을까?!
한국사가 세계화된다면, 고혜련 교수의 바램대로 뷔르츠부르크대학의 한국관도 제대로 그리고 멋지게 만들어질 것이다.
청 홍타이지와 중 시진핑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3월 15일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했다.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최근 공산당 일부 원로들(party elders), 즉 정치적 담론에서 여전히 발언권을 가진 몇몇 퇴직 지도자들이 기존의 권력승계 시스템을 깨려는 시진핑의 욕망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들 가운데 주룽지(朱鎔基·94) 전 총리도 포함돼 있다.”
코로나 사태이후, 부동산 버블과 테크기업의 해고 등 중국의 경제상황은 만만치 않습니다. 중국 정치판도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더구나 미국과 중국이 정면 충돌하고 있습니다. 무역분쟁, 코로나 책임론에 이어 무력충돌까지 배제할 수 없습니다. 패권은 공유할 수 있는 권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진핑은 계획대로 장기집권을 할 수 있을까요? 앞으로 중국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청 태종 홍타이지와 중국 시진핑 주석은 어떤 맥락을 공유할까요?
특히 덩샤오핑의 유산아래 공산주의와 시장 경제를 축으로 빠르게 성장한 중국에 시진핑이라는 리더가 출현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나아가 시진핑의 중국이 미국을 넘어서기 위해 어떤 제국주의 상을 제시할지를 분석해야 합니다.
책방은 시진핑의 중국을 역사에서 배우기 위해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구범진) ‘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장한식) ‘거대한 코끼리,중국의 진실'(임영묵) 등 세 권을 텍스트로 삼았습니다.
세 권의 책은 각기 다른 소재와 시각을 담고 있지만 제국으로서 중국과 제국 리더십을 다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1.홍타이지가 청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병자호란를 직접 설계했고, 심지어 원정대를 직접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병자호란은 홍타이지에 의한, 홍타이지를 위한 홍타이지의 전쟁이었다.(구범진)
2.조선의 인조와 서인 정권이 국제 정치 질서의 변화에 대한 무지로 인해 청을 자극하는 사건을 일으킨 것이 병자호란의 원인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하지만 청의 시각에서 보면 조선 정벌은 홍타이지의 정해진 목표였으며, 조선의 움직임을 전쟁 명분으로 삼았다.(구범진)
3.홍타이지는 만주보다 100배가 더 큰 명나라를 정복하고 대청제국을 건설한 것은 현대 중국의 대국 굴기와 유사한 측면을 갖고 있다. 청이 최고 속도의 전쟁 수행능력을, 중국은 최고 속도의 생산 능력을 굴기의 핵심 경쟁력으로 삼고 있다.(장한식)
4.홍타이지는 1632년 남면독좌를 도입하면서 누르하치의 집단지도체제를 폐지했다. 시진핑은 부패척결을 명분으로 정치적 라이벌들을 차근차근 솎아낸 시진핑은 마침내 집단지도체제를 무력화하고 1인체제를 구축하였다. 이어서 임기제한 마저 철폐하면서 사실상 황위(皇位)에 올랐다. (장한식)
5. 21세기가 되자 덩샤오핑 체제(선부론, 집단지도체제, 도광양회)가 영원히 지속될 수 없음이 서서히 드러났다. 시진핑은 덩샤오핑 체제가 만들어낸 엄청난 성공이 만들어낸 반대급부(정치적 자유에 대한 요구, 분배에 대한 요구, 단축 성장의 피로감 등)을 해결하기 위해 선택됐다.(임영묵)
6.시진핑은 중국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중국 패권을 위해 일대일로를 설계했다. 일대일로는 한계에 몰린 국영기업의 공급 과잉을 해결해줄 투자처를 찾기 위한 계획이었다. 또 지정학적 딜레마를 해결할 초거대 사업이자 중국의 아킬레스건인 소프트파워의 약세를 보완할 수 있는 묘수로 선택됐다.(임영묵)
7.’전쟁이 필연적이었던 것은 아테네의 부상과 그에 따른 스파르타의 두려움 때문이었다.’(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기존 강대국이 안정된 국제적 질서를 제공하면 그 우산 속에서 새로운 강대국이 등장한다. 신흥국은 기존 패권국이 자국을 주저 앉힐 것으로 생각하고 국제질서에서 인정받고자 활동한다. 이 긴장이 폭발해 전쟁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임영묵)
8.거대한 코끼리와 공존하는 법을 가장 먼저 깨우쳐야 할 주체는 바로 한국이다. 가장 필요한 것은 거대한 코끼리인 중국을 각자의 시각에서 만져본 장님들의 활발한 대화다. 그래야만 집단사고의 함정을 피하고, 편견에서 자유로운 객관적인 모습의 중국을 재구성할 수 있다.(임영묵)
9.시진핑을 권력욕에 찌든 독재자로 묘사하는 것이나, 중국의 경제 팽창을 조롱하는 것은 우리에게 전혀 이득이 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본 중국 시스템의 작동 기제와 동학이지, 감정적 조롱이 아니다.(임영묵)
10.병자호란으로부터 무려 4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우리는 참담한 패전과 치욕의 역사를 되새기며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에 대한 평가와 단죄를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비극의 반복을 막기 위한 교훈 찾기에 주력하면서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맥락은 종종 무시된다.(구범진)
반도체 지정학
팬데믹 시대에 가치가 급상승한 기업중 하나가 대만의 TSMC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급습하면서 세계 반도체 부족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현상입니다.
재택 근무 등 언택트 활동이 급증하면서 컴퓨터, 서버 등 각종 디지털 기기 수요가 치솟았습니다. 그러자 디지털 기기속 핵심 부품인 반도체 공급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반도체 부족 사태는 자동차 업계를 강타했습니다. 자동차에 반도체를 공급하던 업체들이 단가가 더 비싼 디지털 기기 부품생산에 비중을 두면서 자동차용 반도체 품귀현상이 벌어진 것입니다.
TSMC는 반도체 생태계중에서 다른 회사가 설계한 반도체 칩을 대신 만들어주는 위탁 생산업체입니다. 이런 형태 반도체 업체를 파운드리(Foundry)라고 부르며, TSMC가 시스템반도체 파운드리 시장의 70%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팬데믹 이전까지 사실 TSMC는 메모리 분야 1위 삼성, 비 메모리 분야 1위인 인텔에 비해 가치가 낮은 기업으로 인식됐습니다. 자체 반도체 설계 기술을 갖고 있지 않고 다른 업체가 설계한 칩을 만들어주는 역할이라는 평가때문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퀄컴이나 AMD처럼 생산시설 없이 설계만을 하는 팹리스 기업뿐만 아니라, 애플, 구글 등 비반도체 기업까지 직접 반도체를 설계하기 시작하면서 파운드리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상황에서 반도체 수요가 치솟자 파운드리의 역할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미국 바이든 정부는 애플, 퀄컴 등 주요 미국 기업의 핵심 반도체가 대만과 한국에서 생산되는 점을 우려하고 미국내 파운드리 투자를 장려하기 시작합니다. TSMC는 일본과 미국 등에 파운드리 공장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반도체 산업은 단순히 비즈니스적 판단만이 아니라 국제정치의 맥락에서도 살펴봐야 하는 분야가 되었습니다. 미국과 중국, 글로벌 지정학적 위험에 얽힌 대만의 TSMC(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를 향후 행보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리스 창은 ‘반도체 산업 진흥에 도움을 달라’는 대만 정부의 요청을 받아 1985년 귀국했습니다. 1987년 대만공업기술연구원장 ‘모리스 창’은 대만 정부와 외국인 투자자가 출자한 2억2000만달러 자본금으로 TSMC를 설립하고 최근까지 이끌었습니다. 이병철-이건희-이재용으로 이어지는 한국 반도체 산업 리더를 합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만의 신생 반도체 산업을 개발하는 책임을 맡은 모리스 창은 계약에 따라 일하는 아웃소싱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앞으로 글로벌 기업이 비용절감을 위해 아웃소싱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회사의 설계 요구를 반영한 칩을 만드는 회사를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TSMC가 시작되었을 때 대략 20~30개의 팹리스 회사가 존재했습니다. 오늘날 그들은 셀 수 없이 많아졌습니다. TSMC는 회사가 칩 설계를 전문으로 하고 제조를 아웃소싱할 수 있도록 하는 이와같은 팹리스 혁명을 가능하게 만들고 주도한 기업입니다.
표준화 될 수 없는 특정기업에 필요한 반도체도 대규모의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테크기업에게 아웃소싱은 합리적 대안입니다. 서로 다른 칩설계라도, 공통의 공정과 규모의 경제가 있기에 파운더리도 역시 합리적 선택입니다. 다만 이를 위해 매우 공격적인 투자가 필요합니다. 대만정부가 투자한 TSMC와 미국 테크기업 출신 모리스 창의 만남은 환상적 조합이었습니다. 2005년 CEO 자리를 넘겨줬던 모리스 창은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다시 복귀합니다. 그가 있었기에 경쟁 업체들이 생산 라인을 폐쇄할 때 과감하게 설비투자를 늘리고 자산을 활성화할 수 있었습니다.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의 글로벌 반도체 사업부 부사장 재임시, 모리스 창은 공격적인 칩 가격정책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처음에는 경쟁자를 제압하고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기 위해 이익을 희생합니다. 시장지배력을 얻게 된 후,가격을 인상하여 지배적 공급자로서 이익을 거두었습니다. 당시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지만 이 전략은 이제 업계 전반에 걸쳐 표준이 되었습니다.
TSMC 영업이익의 상당부문을 기술 개발과 설비에 투자합니다. 후발 업체가 따라오기 힘들 정도로 거액을 투자합니다. 최근 반도체시장의 변화에 대응하여 TSMC는 미국 애리조나, 일본 이바라키현 등 대만 외 지역에 공장과 연구시설 등에 공격적인 투자를 진행 중입니다. TSMC가 처음 해외에 짓는 첨단 반도체 공장입니다.
최근 모리스 창은 각국의 반도체 현지화 보조금 지원을 언급하면서 “과거에는 글로벌화와 자유무역이 전 세계를 발전시켰지만, 오늘날 세계는 평등하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대만 과학기술협회 20주년 행사) 실제로 대만, 한국은 이제 정치군사적으로 안전하지 않으므로 미국에 반도체 생산시설을 두어야 하고, 미국기업에 보조금을 주자는 제안까지도 있습니다.
“1980년대에 미국은 전 세계 반도체 제조의 40%를 차지했지만 지금은 17%로 줄어들었습니다. 미국은 현재 하락 반전을 희망하고 있지만 현지 생산은 불완전한 반도체 공급망과 더 높은 생산 비용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투자되는 공급망 구축 비용과 납세의 대가는 상당할 것”이라며 비판적입니다. 그는 더 많은 투자와 보조금이 필요할 것이며 결국 납세자들에게 부담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최근 TSMC는 이례적으로 경제나 국제관계 분야의 인재를 채용하고 있다. ‘지정학적 및 경제적 변화가 IC 산업 공급망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기 위해서입니다. TSMC가 글로벌 지정학적 리스크를 심각한 도전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리스 창은 더 이상 완전 경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미국 진출이 TSMC의 유일한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TSMC가 대만에서 주요 사업을 운영하는 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모리스 창은 누구인가?
격동의 어린 시절
1931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Chang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중국의 격변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Chang의 가족은 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및 뒤이은 내전이라는 세 가지 다른 전쟁 동안 진격하는 군대를 피해야 했습니다.
“저는 1941년에 10살이 되었습니다. 그 해에 일어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물론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었습니다.”라고 Chang은 회상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내가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던 홍콩을 공격했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 이전의 기억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이후의 내 삶의 기억은 매우 선명하고 생생합니다.”
비즈니스에 눈뜨다
모리스 창이 미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그의 부친이 IBM 주식 몇 주를 선물했는데, 그는 이때부터 미국 기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주식을 보유하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주가 동향을 지켜보게 된 것이다. 당시 그의 수중에는 IBM 주식밖에 없었으나 이때부터 하루라도 IBM 주가 동향을 주시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모리스 창은 자신이 날카로운 비즈니스 감각을 키운 것은 아버지가 선물한 IBM주식 몇 주 덕분이었다고 회고한다.
인생 롤 모델
살아가면서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TSMC의 수장 모리스 창에게 평생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누구일까? 모리스 창 자신이 여러 차례 언급한 TI 이사장 패트릭 유진 해거티다. 40여 년 전, 해거티는 TI에서 ‘혁신’, ‘성실’, ‘고객을 왕으로 모신다’는 기업문화를 구축하여 오늘날까지 이를 지속해왔다.
혁신과 성실은 모리스 창이 소중히 받드는 TSMC의 경영이념이기도 하다. 고객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모리스 창은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고객을 위해서라면 TSMC는 섶을 지고 불길로 뛰어들 수도 있다.”해커티는 고객의 목소리를 매우 중시하며 내부 승진때도 큰 고객의 의견을 반영했다. 모리스 창은 “ 이부분은 나도 배워서 TSMC 인사 이동이 있을 때 고객의 의견을 참고한다”고 말했다.
브리지 게임으로 쌓은 우정
모리스 창은 카드 게임 브리지 게임 매니아로 잘 알려져 있다.1985년, 대만으로 돌아와 공업연구원장을 맡게 되면서 모리스 창은 대만 브리지 게임계와 더 자주 접촉했다. 황광휘의 소개로 그는 당시 USI 회장 장즈젠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관계는 브리지 게임으로 시작되었으나 모리스 창의 창업과정에서 진정한 우정으로 발전했다. 장즈젠이 모리스 창에게 부족한 자금을 늘 지원해줬다.
기업경영에 있어 모리스 창은 인정의 요소를 개입시키지 않았으며 부하 직원의 실수에는 냉혹한 태도로 따끔하게 질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즈젠과 브리지 게임으로 이어진 12년 우정은 한편으론 중국 전통 가치관 속 보은 정신을 보여준다. 이는 오랫동안 성공한 기업가로 살아온 모리스 창의 이미지에 부드러운 면모를 더해준다.
빈틈없는 준비
2006년 모리스 창은 부인 장수펀과 대만을 대표하여 베트남에서 열리는 APEC 비공식 정상회담에 참가했다. 그의 행보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고, 단 이틀의 짧은 일정을 위해 그는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는 양복 안주머니에 늘 수표책 두께의 수첩을 넣고 다니면서 사람들과 대화할 때 중요한 대목이 나오면 신중하게 기록해두곤 했다.
진정은 통한다
2002년 10월. 부인 장수펀의 설득으로 모리스 창은 사진작가 커시제의 카메라 앞에 섰다. 커시제는 창의 멋진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담배를 한 모금 권했다. 깊은 생각에 잠긴 그는 담배 연기에 둘러싸였고, 사색은 연기와 함께 허공으로 올라갔다. 한 모금 더 깊이 들이 마셨다가 뿜어내니 짙은 연기가 서서히 분출되며 자욱한 안개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저 이를 정말 잘 나타내는 장면이네요!” 한쪽에서 장수펀이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근엄한 가면을 벗어던지고 사진작가 커시제의 렌즈 앞에서 모리스 창 부부는 진실한 면모를 드러내며 영원히 남을 순간을 기록했다.
궁함 속에서 진리를 찾다
“나는 최근 번역에 큰 관심이 생겨서 중국어와 영어의 의미 차이를 늘 연구한답니다.” 모리스 창의 이 한 마디에 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기자들은 그의 취재에 준비할 목록을 하나 더 추가했다. 모리스 창의 산업과 경영에 관한 취재 외에 영중사전까지 준비해서 그의 ‘영어 수업’ 진도를 따라가야 했기 때문이다.
겉과 속이 같은 사람
“제 남편은 성실함을 중요시하며 개인적으로 이익을 취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장수펀은 TSMC의 수첩 몇 권을 가져다 집안에 뒀다. 지인들에게 선물할 요량이었다. 모리스 창은 장수펀에서 TSMC에 돈은 냈냐고 물었다. 부인에게도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라고 요구한 것이다.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는 모리스 창은 두 후계자 류더인, 웨이저자에게도 식사 대접을 따로 한 적이 없었다.
정조를 위하여
정조는 1800년 6월, 48세라는 다소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독살이 아니라 종기로 인한 자연사라고 한다. 정조이후 시작된 19세기는 혼돈의 시기였다. 세익스피어 작품같은 그의 삶과 죽음, 고난했던 우리 역사였기에 정조는 그야말로 핫아이템이다.
정조를 가리켜 흔히 ‘미완의 개혁군주’라고 부른다. 그는 그야말로 ‘밥 먹을 겨를도 없이’ 부지런히 국정에 매달렸고, 꿈틀거리는 변화의 시대를 열어제쳤다.
그동안 나랏일을 외면했던 사람들은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왔다. 서얼과 아전은 신분 제약을 벗어나 규장각이나 장용영에 발탁되기 위해 애썼다. 비록 세계사 흐름에서 비켜간 변방이었지만, 청을 통해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동아시아 무역에도 참여했다.
정조는 즉위 후 영조의 탕평 이념을 계승하고, 왕권 강화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왕이라는 절대적 존재 아래 각 당파가 경쟁·협력하는 정치체제를 염원하였다. 그는 자신과 학문, 정치를 함께할 인재 양성을 위해 규장각을 성립했다. 오로지 왕을 위한 친위부대 장용영도 만들었다. 당파와 신분, 지역을 초월해 인재를 등용했다. 남인이었던 정약용, 서얼이었던 이덕무 등을 등용해 개혁정치를 이끌었다.
정조는 1791년 1월 마침내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을 혁파하고, 그를 한문과 한글로 써서 큰 길거리와 네 성문에 내걸었다. 조선 초, 도성안팍 10리 내의 상업권을 보장한 금난전권은 국역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졌다. 조선후기 상업이 발전하면서, 18세기 후반에는 금난전권을 획득하기 위해 거의 대부분의 상인이 권세가나 각 관청과 결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전상인들은 집권 정치 세력인 노론 계열의 특권 가문과 연결돼 있어 그 고리를 차단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1795년은 겉으로 볼 때 태평성대 그 자체였다. 혜경궁의 회갑 잔치을 위해 ‘8일간의 수원 행차’ 동안 정조는 노인들을 대접하고, 백성들의 고충을 처리했다. 3월에는 창덕궁 후원 잔치에 신하를 초대해 친인척을 멀리하고 어진 인재들을 가까이 하는 정치를 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1796년, 정조의 상징 화성이 완성됨과 동시에 사도제자도 마침내 공식적으로 복권되었다.
그런데 재위의 끝무렵, 정조는 자신이 후원했던 신하의 지원도 받지 못하는 고립무원의 처지였다. 말년에 그는 “아무리 고심해도 정치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말하거나 “나 혼자서 천 칸을 다 지키는 격”이라고 개탄하곤 했다. 개혁을 통해 도입된 새로운 질서는 자리 잡지 못했고, 신하들은 함께 하지 못했다.
마침내 노론의 신하들은 천주교 문제를 들고 나왔다. 정약용 등 국왕 지지세력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것이다. 천주교 문제라는 뜨거운 감자가 다시 거론되자, 정국은 급격하게 사학인 천주교 성토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개혁을 주도하던 남인의 영수 채제공의 후계자였던 이가환과 정약용은 물론이고, 정조까지 공격의 대상으로 몰리게 되었다.
이에 정조는 이가환과 정약용을 지방으로 내려보냈다. 그들이 떠난 후, 그에게는 사람이 없었다. 얼마 안 있어 채제공도 “조정의 온갖 일이 재작년보다 작년이 못하고, 작년보다 올해가 더 나빠지고 있다”면서 물러가 버렸다. 그러자 노론과 소론은 기다렸다는 듯 그 공백을 자기들 사람으로 채웠다. 남인의 소외는 곧 왕의 고립을 의미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조는 왕세자인 순조의 세자빈 간택에 들어갔다. 정조가 선택한 인물은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 순조(1790∼1834)가 왕위에 오르고, 그녀는 순원왕후가 되었다. 영조의 비 정순왕후는 1801년 신유박해라는 천주교 탄압을 주도했다. 소수의 가문이 권력을 휘두르는 세도정치 60여년이 시작됐다. 세도정치는 안동 김씨 외에도 풍양 조씨, 여흥 민씨, 반남 박씨 등 서울 양반의 연합정권이라고 볼 수있다. 이후 조선의 왕은 누구도 정조처럼 강력한 왕권을 얻지 못했다.
역사학계는 권력 독점의 세도정치는 탕평정치의 한계가 구조화된 것이라고 말한다. 탕평정치와 세도정치는 분절된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정조 이후’는 엄청난 사건이 아니다. 19세기 세도정치도 조선이라는 왕조국가가 그 생명을 다해가면서 밟아나간 과정일 뿐이다.
이제 궁금한 것은 대항해시대 이후 조선의 한반도의 지정학적 조건이다. 그리고 발전은 내재적이 아니라 오히려 열려야 가능하다. 그 각도에서 다시 역사를 보다면 어떨까?
마지막으로, 애쓰다 지친 정조를 위하여 이제 편히 쉬라고 말하고 싶다.
![수원 화성행궁 옆의 화령전에 있는 정조 어진. [연합뉴스 자료사진]](https://i2.wp.com/img9.yna.co.kr/photo/cms/2015/01/27/01/C0A8CA3C0000014B2A02BA8C00016C7A_P4.jpeg?w=780&ssl=1)
믹서기로 밝힌 유전자의 정체
20세기 초반까지 생명체의 유전 정보를 담고 있는 물질은 단백질이라고 생각했다. 단백질은 종류도 많고 생물체에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니 수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다고 여겨졌다. 단백질은 수백 개의 아미노산이 반복적으로 이어진 중합체 즉 폴리머이다. 아미노산은 20종이 있기 때문에 20의 수백 승에 달하는 다양한 단백질이 존재할 수 있다. 단백질 별로 아미노산의 서열에 따라 독특하고 복잡한 구조를 이룰 수도 있다.
이에 반해 DNA나 RNA 같은 핵산은 말 그대로 세포핵 속에 있는 산성의 물질일뿐이다. DNA는 4종의 핵산으로 구성된 간단한 중합체(폴리모)였다. 구조와 기능도 알려진 바가 없었기에 유전 현상에 관여할 것으로 상상되지 않았다.
다윈이후 현대의 유전학의 역사는 단백질이 아니라 DNA가 유전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밝혀가는 역사였다.
시작은 1928년 영국의 그리피스 박사였다. 그는 폐렴연쇄상구균의 병원성 특성이 형질전환하여 비병원성 박테리아로 전달됨을 보여주었다. 1944년 미국의 애버리 박사는 DNA가 형질전환의 원인 물질이라고 발표했다. 병원성 물질이 단백질이 아니라 DNA를 분해하는 효소에 의해서만 파괴된다는 실험 결과에 근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절대 다수의 과학자들은 DNA가 유전적 정보를 담고 있는 물질이라 믿지 않았다.
그러나 후속연구들은 점점 DNA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미국의 앨프리드 허시와 마사 체이스의 실험은 인상적이다. 그들은 박테리아를 감염시키는 바이러스를 이용해 유전적 정보를 담고 있는 물질은 ‘단백질’이 아니고 ‘DNA’라는 것을 입증하였다. 실제로 바이러스 단백질은 박테리아 표면에 붙어있기만 했다. 감염 후 일정 시간이 지난 뒤 믹서기를 이용해 강제로 박테리아와 분리시켜도 후손 바이러스가 생성되는데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1952년에 발표된 허시와 체이스의 실험은 믹서기 또는 블렌더 실험으로도 알려져 있다.
1953년에 왓슨과 크릭은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제시하였다. 유전적 정보를 담고 있는 물질은 단백질이 아니고 핵산 특히 DNA라는 것이 마침내 밝혀진 것이다. 이로써 현대 유전학이 시작되었다.
믹서기 실험 이후
허시 박사는 1969년 노벨상을 수상한다. 허시 박사는 자신의 노벨 수상 연설에서 마사 체이스의 기여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사 체이스연구원은 1964년에 이르러서야 박사학위를 마칠 수 있었다. 그녀는 이후 여러 어려움을 겪었으며 끝내 과학자로서의 경력은 단절되고 말았다. 말년에는 단기 기억 고정을 못하게 되는 뇌질환을 앓다가 2003년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현대 생물학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 실험 중 하나였던 믹서기 실험의 두 주인공이 이후 걷게 된 길에 너무나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