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에 열린 프로야구 원년 시즌에는 팀당 80경기씩 240경기가 열렸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시구와 함께 시작된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MBC 청룡이 삼성라이온즈를 11:7로 이겼다. 원년 우승팀은 OB베어즈가 차지했다. OB의 박철순이 22연승을 거두고, MBC의 백인천이 4할 타율을 기록했다.
화이자 성공 리더, 앨버트 불라
앨버트 불라는 그리스 테살로니키에서 태어났으며, 아리스토텔레스 대학교에서 수의학을 전공하고 같은 대학에서 생식생명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3년 화이자 그리스의 테크니컬 디렉터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 후 화이자 이노베이티브헬스 그룹의 사장, 글로벌 백신·항암제와 컨슈머헬스케어 사업부 사장을 포함해 주요 임원직을 거쳐 2018년 COO, 2019년 1월 화이자의 CEO가 되었다
뉴욕시 주요 기업 CEO로 구성된 비영리단체 파트너십 뉴욕의 집행위원, 미국제약협회 및 다국적 제약회사 캐탈리스트와 미국 국제비즈니스위원회 등의 이사겸직하고 있으며, 기업인 협의체인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과 비즈니스협의회의 회원이다. 2020년 투자전문지 《인스티튜셔널 인베스트》 ‘제약부문 최고의 CEO’, 2021년 《인사이더》 ‘가장 혁신적인 CEO’, 《크레인 뉴욕비즈니스》 명예의 전당, CNN 비즈니스 ‘올해의 CEO’에 선정되었다.
대서양위원회 ‘우수 비즈니스 리더십상Distinguished Business Leadership Award’, 양심의 호소 재단 ‘양심의 호소상the Appeal of Conscience Award’, 제네시스 파운데이션 ‘제네시스상Genesis Prize’ 등을 수상했다
저서 소개_ 문샷 :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화이자의 대담한 전략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화이자가 이뤄낸 문샷의 복잡한 과정, 즉 최초의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하고 연구하며, 출시하는 동안 거쳐야 했던 과정을 본다면 누구도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019년 코로나19의 등장으로 전 세계는 혼란에 빠졌다. 20세기 초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독감 이후,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국가와 도시가 감염병으로 봉쇄되는 일이 다가올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전례 없는 위기상황에서 세계를 구원한 것은 강대국도, 강력한 지도자도 아닌 한 기업, 코로나19 백신을 최초로 만들어낸 화이자였다.
백신은 수년에 걸쳐 개발되고, 상용화되기까지는 최소 5년 이상의 기간이 필요하다. 백신을 만들기로 결심한 지 단 9개월 만에 개발에서 생산까지 성공해낸 화이자 내부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까? 미국 대선을 앞둔 그들이 돌파해야 할 국내외의 관문은 무엇이었을까?
2022년 3월 전 세계 15개국 동시 출간하는 《문샷(Moonshot) :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화이자의 대담한 전략》은 세계 최초의 mRNA 백신이자 최초의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해낸 화이자(Pfizer)가 9개월에 걸쳐 이뤄낸 도전과 혁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능성의 한계를 뛰어넘은 9개월의 대장정이었다. 팬데믹의 최전선에서 백신 개발의 모든 과정을 진두지휘한 앨버트 불라(Albert Bourla) 화이자 CEO가 음모와 불신의 아이콘에서 신뢰와 혁신의 기업으로 인정받게 된다. 세계 최정상 제약회사의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2019년 12월 31일, 중국 당국은 WHO에 우한시의 소규모 환자 집단에서 폐렴과 유사한 증상을 일으키는 불가사의한 바이러스가 검출되었다고 보고했다.
이 신종 바이러스의 정체는 SARS-CoV-2로 빠른 속도로 무시무시한 팬데믹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채 1년이 되지 않은 2020년 12월 8일, 영국 코번트리 대학병원에서 90세의 마거릿 키넌 여사가 화이자와 바이오엔테크가 공동 개발한 백신을 접종받는다. 지난 100년에 걸쳐 가장 치명적인 감염병인 코로나19를 막기 위한 최초의 mRNA 백신이었다.
화이자의 코로나19 백신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을까?
‘시간은 곧 생명’이라는 이념 아래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든 화이자의 ‘문샷’에는 위기상황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혁신적인 조직과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람들, 그리고 이들을 이끌어가는 CEO 앨버트 불라의 리더십이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단 9개월 만에 이루어졌다.
‘문샷’은 1949년 인류의 달 탐사를 위해 시작된 도전이었지만, 화이자에게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혁신적인 프로젝트가 되었다.
화이자의 문샷을 통해 탄생한 코로나19 백신은 10년간 축적해온 과학적 지식을 9개월 만에 통합하고, 다른 많은 과학 분야에서 파급 효과를 내면서 지구상의 생명체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책은 화이자가 팬데믹 속에서 만들어 낸 도전과 혁신의 기록이다.
‘광속 프로젝트(Project Lightspeed)’라는 이름 아래 불가능한 일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기까지에는 생명을 최우선으로 하는 가치가 있었다. 화이자의 문샷―마주했던 도전과 깨달은 교훈, 그리고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했던 핵심 가치―을 통해 우리는 자신만의 혁신 혹은 미래의 문샷을 만들어나가는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다”
음모와 불신의 제약회사에서
연구 중심의 과학 혁신기업으로 탈바꿈한 핵심 전략
앨버트 불라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부모님 밑에서 자란 그리스계 미국 이민자로, 2019년 1월 미국의 대형 제약회사 화이자의 CEO로 임명된다.
이 책은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전 세계에 확산되기 시작한 2020년부터 2021년 초까지를 배경으로 앨버트 불라와 화이자가 정치적·사회적 압박과 위기를 견디며 어떻게 가장 최초로 효과적이고 안전한 코로나 백신 개발에 성공했는지 그 과정을 면밀하게 담아내고 있다.
앨버트 불라는 CEO 2년차에 수십억 달러의 손실을 감수하고 백신 개발을 결정한다. 고정관념을 벗어난 연구와 한계를 뛰어넘는 창의적인 개발 과정 속에서 화이자는 바이오엔테크와의 공동연구 끝에 세계 최초로 백신 개발에 성공한다.
그 중심에는 지휘계통을 단순화하고 의사결정 단계를 합리화하며 직접 프로젝트 관리자로 활약한 앨버트 불라의 리더십과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압박에서 벗어나 창의성을 발현해낸 직원들이 있었다.
성공이 불투명한 사업에 수십억 달러의 예산을 쏟아부은 백신 개발은 2019년 CEO에 취임하면서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구어놓았던 ‘환자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혁신’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었다.
화이자는 발기부전 치료제 비아그라와 영양제 센트룸 등을 생산하는 주요 사업 부문을 정비하고, 향후 10년을 연구 개발을 중심으로 한 과학 혁신기업으로서의 방향을 선택했다. 이를 위해 기업의 문화를 바꾸고 투자를 전면 재배치했고, 이 모든 것이 코로나19 감염병이 시작되기 전에 준비되었다.
■ “왜 mRNA 백신인가?”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 선택을 한 CEO
위기의 순간에는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최단 시간 내에 가장 효과적인 백신을 개발하기로 결정했을 때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가령 모더나의 경우라면 코로나19 백신의 개발 여부가 중요하지, 어떤 기술을 사용할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2장 분명한 것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전례 없는 감염병으로 국가와 도시, 경제가 붕괴되자 모두가 치료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치료법과 더불어 감염을 막고 팬데믹을 종식시킬 수 있는 백신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화이자는 오랜 시간 쌓아온 연구 기술력을 바탕으로 성공적인 백신을 생산하고 있었고, 백신 개발을 위해 아데노바이러스, 재조합단백질, 접합 등 여러 가지 기술 플랫폼을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기술은 mRNA였다. mRNA 기술은 잠재력은 무성하지만 완성되기까지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한 미완의 플랫폼이었다.
기존의 백신이 감염성이 없는 병원체의 일부를 통해 몸속 면역 체계를 가동한다면, mRNA 백신은 실제 병원체 없이 몸이 스스로 백신을 만들도록 가르친다.
유망하지만 입증되지 않은 기술에 회사의 사활을 걸기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mRNA 방식은 사용 가능한 모든 기술보다 해결책을 찾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화이자는 이미 2018년 효과적인 독감 백신 개발을 위해 독일의 바이오엔테크(BioNTech)와 mRNA 기술 제휴를 맺고 있었고,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연구 개발에 착수한다.
모든 개발비와 상용화에 따른 이익을 50대 50으로 나누기로 합의했지만, 화이자는 개발비 전액을 먼저 부담하기로 했다. 프로젝트가 실패할 경우 모든 손실은 화이자의 몫이었다.
세계 최초로 mRNA 백신을 개발한 화이자에는 다음과 같은 전략이 있었다.
1. 시간이 곧 생명이다
2. 더 크게, 더 창의적으로 사고하라
3. 지휘계통을 단순화하라
4. 의사결정을 합리화하라
5.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라
■ “화이자는 어떻게 게임체인저가 되었나”
국제사회와 정치가들의 백신을 둘러싼 물밑 전쟁
화이자 CEO가 직접 전하는 비하인드 스토리
백신이 투표일 이전에 승인된다면 혹자는 이것을 백악관의 정치적 압력의 결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반면 투표가 끝나고 백신이 승인된다면 바이든 캠프의 정치적 압력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두 경우 모두 백신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얻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고, 공중보건에 추가적인 악재가 될 수 있었다.― <11장 신뢰의 과학>
백신의 개발 과정은 끊임없는 전쟁이었다. 바이러스와의 사투는 물론, 세계 최초로 mRNA 백신 상용화를 위한 생산 문제와 전 세계로 백신을 보내는 공급 문제, 환자들의 팔에 접종되기 위한 기술 등의 현실적인 문제와 강대국들이 펼치는 보이지 않는 백신 전쟁이 존재했다.
전 세계에 백신을 분배하기까지 국제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쟁이 있었다.
미국 대선을 앞둔 시기, 연구결과 발표에 따라 선거의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는 상황이 펼쳐진다. 트럼프 행정부와 바이든 캠프 사이에 놓인 화이자는 외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정치적인 문제를 하나하나 돌파한다.
백신의 확보는 국가의 안보와 직결되는 문제다. 앨버트 불라는 세계 각국 정상의 전화를 직접 받으면서 방위비 조달법(DPA)에 따라 백신을 미국 외 지역에 수출할 수 없었던 생산지 수출 규제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미국 내 정치 상황과 국제사회, 평등한 백신의 분배를 위해 싸우는 과정 속에서 조직을 더 창의적으로 발전시켜나가면서 세계 각국의 정상과 직접 소통하며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앨버트 불라의 리더십을 만날 수 있다.
■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더 크게, 더 창의적으로 돌파하라
《문샷: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화이자의 대담한 전략》은 코로나19라는 전례 없는 위기 속에서 탄생한 화이자의 혁신을 보여준다.
2020년 3월, 앨버트 불라는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수십억 달러의 손실을 감수하고 새로운 방식인 mRNA 기술을 이용한 코로나19 백신 개발을 결정한다. 그가 화이자 CEO가 된 지 고작 2년차였다.
고정관념을 벗어난 연구, 한계를 뛰어넘는 창의적인 개발 과정, 그리고 기업문화와 의사결정 단계의 파격적인 재정비…. ‘광속 프로젝트’라고 명명한 ‘미션 파서블(Mission Possible)’은 말 그대로 빛의 속도로 모든 과정이 진행되었고, 모든 것을 이루어냈다.
앨버트 불라는 직접 프로젝트 관리자로 활약하며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혁신을 보여주었고, 이 모든 과정을 통해 화이자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전 세계 백신 선호도 1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CEO, 미국 정부와 담배회사 함께 신뢰도 최하위였던 제약회사에서 애플과 구글에 이어 가장 존경받는 기업 4위에 오른 화이자의 ‘문샷’을 통해 우리는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고, 자신의 사고를 재정비하며 신뢰를 보여주는 새로운 혁신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 역시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만의 문샷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금단의 땅, 용산을 그리다…

조선시대에 기록된 옛 지도를 보면, 인왕산 무악재로부터 뻗은 산 자락 끝에서 옛 용산의 지명을 확인할 수 있다.








키루스 원통과 키루스대왕
유엔본부에 전시된 사이러스 실린더(Cyrus Cylinder)를 아시나요? 실리더는 발견된 고대 유물 중 가장 유명한 아이콘 중의 하나입니다. 기원전 6세기에 만들어진 실린더는 일반적으로 다원주의와 관용을 일깨운 “최초의 인권 선언”으로 간주되며, 유엔본부에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1879년 바빌론에서 발굴된 원기둥은 BC 539년 페르시아 키루스 대왕이 바빌론을 함락시킨 후, 승리의 역사를 바빌론의 설형 문자로 기록한 것입니다. 페르시아 통치의 시작을 기념하고, 키루스가 어떻게 신전을 복원하고, 추방된 민족을 다시 귀국하게 했는지를 기록했습니다.
대영제국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소위 ‘키로스의 점토판’은 피정복민의 학살을 금지하는 등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을 내용으로 담고 있습니다. 왕은 바빌론으로 무혈입성하면서 ‘평화를 원하기에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노예제도를 금하노라’ 라고 선포했습니다. 이 내용이 당시의 문자로 새겨져 있으며 1879년 이라크 바빌론 폐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키루스 대왕은 아키메네스조의 왕이 된 후, 주변국을 차례로 정복하여 페르시아를 세계제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유능한 전술가였을 뿐만 아니라, 고결한 성품의 지배자였다고 알려졌습니다. 관대하며 자비심이 많아, 정복한 영토를 하나의 종교와 이념으로 가두려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국교는 조로아스터교였으나 각 민족의 종교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피지배민족들에게 관용 정책을 베풀고, 토착세력이 지역 후계자가 되도록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키로스 대왕에 대한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키루스 대왕이 바빌로니아를 공략하여 유다 왕국을 점령했을 때, 바빌론에 포로가 되어 있던 유대인들을 해방시켰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구약성서 ‘이사야서’에는 키루스를 고레스 왕으로 표기하고 목자이며 야훼께서 기름 부은 자로 찬양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키루스 대왕은 사망 후에도 페르시아의 적이었던 그리스인들 까지 그의 업적을 인정합니다. 키루스 대왕이 죽은 지 150여 년이 지난 후, 그리스 작가 크세노폰은 이렇게 썼습니다. “그는 신하들을 존경하고 마치 그들이 자신의 자녀인 것처럼 보살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키루스를 아버지처럼 존경했습니다.”
마크 베니오프, 세일즈포스
1999년에 설립된 세일즈포스는 CRM를 클라우드 형태로 서비스하는 IT기업입니다. 오라클사의 임원이었던 마크 베니오프(Marc Benioff)가 샌프란시스코의 작은 임대 아파트에서 창업해, 처음으로 본격적인 SaaS (Software_as_a_Service) 서비스를 제공한 기업입니다. 클라우드 시대 돈을 긁어들이는 선두 업체중의 하나이며,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세일즈포스는 어떻게 보아도 사업을 잘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에 좋은 일을 했습니다. 그는 세일즈포스가 얼마나 성장하든지 간에, 제품의 1%, 자본의 1%, 그리고 직원 업무 시간의 1%를 비영리단체와 자선단체에 기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20년이 지나 세일즈포스의 1-1-1 기업 자선활동 프로그램은 이미 거의 3억 달러의 보조금과 400만 시간의 직원 자원봉사 시간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마크 베니오프는 세일즈포스의 성공스토리 또는 창업자의 영웅적 성공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업의 사회 책임과 공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기업이 채택하는 원칙의 힘에 따라 성공이 달려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단순히 좋은 사람들을 고용하고 제품을 배달하는 것 이상의 것, 가치를 지키는 문화를 만드는 능력에 따라 성공이 좌우될 것이라 합니다. 성별, 인종, 피부색, 그 밖의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다른 모든 사람들만큼 발전할 수 있도록 똑같은 기회를 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마침내, 그는 비즈니스를 넘어 정치의 영역까지 나아갑니다. 그가 그런 결정하기 까지의 과정을 정리해봅니다.
1.2015년 인디애나 주의회가 종교자유회복법을 통과시켰다. 표면적으로 종교적 신념에 따른 행동을 처벌하지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는 종교관에 따라 성소수자 고객을 차별해도 처벌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2.나는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대공성을 거뒀다. 신뢰, 고객 성공, 혁신이란 세가지 기본 가치에 따라 우리가 만들어온 긍정적이고 목적의식이 뚜렷한 문화가 자랑스러웠다. 이 법이 끔찍하게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성소수자 직원을 차별하는 이 법에 어떻게 대응할 지 몰랐다. 기술기업의 CEO였지 정치인이 아니었다.
3.직원들은 CEO에게 이법에 맞서 싸우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고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요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낯선 땅에 홀로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4.나는 134자 성명서를 트위터에 올렸다.우리는 종교자법에 때한 우리 직원과 고객의 분노에 근거에 인디애나 투자를 대폭 줄일 수 밖에 없다.
5.나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나는 한낱 개인일뿐이고 세일즈포스는 일개 회사일 뿐이었다. 내가 대놓고 드러낸 내 협박을 책임질 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6.나의 오랜 멘토 콜린 파월조차 나의 태도때문에 회사가 원치 않는 조사를 받게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나무 위로 높이 오를 수록 조심하게. 자네 뒷모습이 드러날 걸세.” 일부 정치인들은 민주적 절차를 붕괴시키려고 경제적 협박도 마다하지 않는 악당기업이라고 불렀다. 몇몇 주주와 고객들은 우리 주식을 팔거나 우리 소프트웨어를 폐기했다.
7.인디애나 펜스 주지사는 “우리에게 인식의 문제가 있었다”라고 인정하고 사업주들이 종교자유법을 성적 성향에 근거해 차별할 명분으로 삼을 수 없다고 명시한 개정안에 서명했다.
8.나는 전 계층의직원들이 결집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그것은 회사의 길과 CEO로서 나의 역할에 중요한 분기점으로 다가왔다. 직원들은 근본적으로 나를 시험했다. 내가 결과에 상관없이 기꺼이 원칙에 입각하는 알야야 했다. 그들은 보호받고 있다고 느끼며 마음껏 자신의 본성대로 일할 수 있었다.
9.과거에 양심은 회사의 대차대조표에서 기타로 분류하는 무엇이었다. 하지만 더이상 그렇지 않다. 미래에는 가치가 가치를 창출한다는 개념을 수용하기 전에는 어떤 비즈니스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10.세일즈포스 소프트웨어를 완전히 익히고 회사안에서 실행하는 법을 배우는 전문가를 트레일블레이저로 부르기로 했다. 그들은 배우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며 탐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혁신을 갈망하며 문제해결을 즐기고 사회에 돌려주는 걸 좋아한다.
용기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이야기임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는 등록된 공화당원에서 무소속으로 전향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대의에 대한 그의 견해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내부 혼란이나 외부 저항에 대한 설명 없이 당연한 것으로 간략하게 제시됩니다. 그는 일상적인 기업 운영에서 물러나기로 한 2018년의 결정에 대해 설명하지 않고, 자신의 최고 경영자 직위를 동료와 공유하기로 한 결정에 대한 배경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베니오프의 진보적 행동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가 실천하는 가치 뒤에 숨겨진 동기, 그 마음의 심연까지 이야기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10줄서평]제국영국을 만든 해적왕
스티븐 존슨이 영국의 전설적 해적인 헨리 에브리(Henry Avery, 1659~?) 소재로 ‘인류 모두의 적’이란 책을 출간했습니다. 과학저널리스트인 존슨은 ‘탁월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가’, ‘감염 도시’ 등 과학지식을 활용하여 숨어 있는 맥락과 의미를 재미있게 빚어내는 솜씨를 발휘하여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번에는 보물선 한 척을 약탈한 해적왕 헨리 에브리가
어떻게 근대사의 향방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이야기합니다.
17세기 홍해와 카리브해를 주름잡은 해적선 팬시호의 선장 헨리 에브리는 1695년 무굴제국의 메카 순례선인 건스웨이를 공격했습니다. 해적의 역사에서 단일 사건으론 최대 약탈로 기억되는 사건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메카 순례길에 올랐던 왕실 여인들을 대상으로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무굴 아우랑제브 황제는 격노했고, 그 분노는 동인도회사와 영국으로 향해, 황제는 하루아침에 영국과의 무역을 중단시켰습니다.
의도치 않은 한 해적의 약탈로 인해 무굴제국와 분쟁에 휩싸인 영국 동인도회사와 정부는 에브리에게 당대 최고액의 현상금을 걸고 인간 사냥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영국 정부가 에브리의 머리에 가격표를 붙이고 본격적으로 인간 사냥을 시작한 때는 헨리 에브리가 수라트를 떠난지 10개월이 지난 뒤였습니다. 그의 해적들은 평생 먹고살고도 남을 몫을 분배고 이미 뿔뿔이 흩어져, 숱한 풍문을 남긴 채 종적을 감췄습니다.
헨리 에브리의 드라마틱한 스토리는 다양한 사람에 의해 다양한 시각으로 각색되면서 인구에 회자되었습니다. 스티븐 존슨은 어쩌면 뻔한 해적 이야기에 자신만의 관점을 덧붙여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시도합니다. 곧, 해적왕이 자신도 모르게 대영제국 시대를 여는 방아쇠를 당겼다고 봅니다. 존슨은 이런 관점 아래 마치 추리 소설을 쓰듯이 대항해 시대의 역사 속을 파집고 들어갑니다.
무굴제국과의 무역으로 큰 이익을 보고 있던 동인도회사와 영국은 재빨리 사태 수습에 나섰습니다. 먼저 영국 정부는 에브리 일당을 ‘인류 모두의 적’으로 규정하고 막대한 현상금을 걸어 공개 수배했습니다. 에브리 한 사람의 목에 걸린 현상금만 해도 500파운드,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1억 3500만 원에 달하는 금액으로, 그 시대에 매우 파격적인 금액이었습니다. 최초의 ‘1억 현상금’이 공표되자 전 세계의 현상 수배범 사냥꾼들이 에브리 한 사람을 찾아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해적왕이 ‘인류 최초의 국제 현상수배범’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한편 동인도회사는 자신들이 직접 해적을 격퇴시키겠다고 황제에게 약속했습니다. 그러면서 바다를 지키는 ‘황제의 군인’이 되겠다며 법적 권한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해득실을 따져본 황제는 결국 이 제안을 승인했습니다. 이로써 동인도회사는 처음으로 인도 지역에서 합법적으로 법을 집행하는 권한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얻은 권력은 점점 범위가 넓어져 훗날 동인도회사와 대영제국이 인도 전체를 지배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에브리가 저지른 범죄가 근대사를 지배한 대영제국의 탄생에 불씨가 된 것입니다.
에브리의 약탈 사건과 관련해 영국의 핵심 관계자들은 각자의 역할이 어디까지인지를 정확히 몰랐습니다. 해적, 기업, 국가라는 뚜렷히 구분되는 세 범주가 있었지만 각 범주가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끝나는 누구도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었습니다. 헨리 에브리의 행동이 야기한 세계적인 위기는 결국 이런 근원적 혼란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혼란은 어떤 우연적인 사건에 의해 해결되기도 합니다. 한 명의 해적과 그의 도전, 무굴제국의 막대한 부, 영국의 제국주의적 야심, 타지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동인도회사의 절박함, 점점 중요해졌던 세계 무역망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우연히도 해적왕 헨리 에브리가 이 무역망 앞으로 어떻게 흘러가야 할지를 정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헨리 에브리가 그날 황제의 보물선을 약탈하지 않았다면, 대영제국은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존슨은 말합니다.
1602년 3월 20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설립
1600년 영국이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인도/동남아시아 무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자 네덜란드도 동인도 회사를 설립했다.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이면서 최초의 다국적 기업이었다. 17세기에는 포르투칼과 영국을 넘어서, 세계 최대의 무역회사로 성장하였다. 개신교로 선교활동을 하지 않은 네덜란드는 일본 무역을 사실상 독점하면서, 당시 은을 안정적으로 수입할 수 있었다. 또한 자바 등 인도네시아를 점령하여 약탈적 가격으로 향신료를 수입할 수 있었다. 은화와 상품을 기반으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중계무역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 동인도 회사와 경쟁에서 점차 패하고, 신대륙에서도 향료와 설탕이 수입되자, 사실상 파산상태에 이르게 되어 1798년 해산하게 된다.
미술의 비밀을 풀어주는 양정무
양정무는 어린 시절, 다락방에서 발견한 백과사전의 삽화에 마음을 빼앗긴 후 미술을 운명이라 믿게 됐다.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교수이다.원시, 고대부터 현대까지 아우르는 미술의 장구한 역사를 인류 문명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저서들을 꾸준히 집필 중에 있다. 유학 시절 도서관보다 박물관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미술관, 박물관 가이드를 가장 재미있게 하는 학생으로 유명세를 탔다.
발가벗은 미술관
미술의 눈으로 보면 역사와 인류가 다시 보인다.
미술과 역사의 안내자 양정무가 고대부터 현대까지 아우르는 미술의 장구한 역사를 이야기한다. 그동안 미술사를 대중화하는 데 노력해온 양정무는 이번에는 오랫동안 미술작품을 마주할 때마다 고민해오던 문제들을 오랫동안 꼽싶어 보고 정면으로 마주한다. 예를 들면 그는 “미술은 왜 끊임없이 과거로 되돌아가려는 속성을 보여주는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고전미술의 신화화 과정을 파헤치고, 미술관에 들어설 때마다 느끼던 무게감이 ‘초상화의 무표정성’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한다.
또한 인간이 “미라는 추상적인 관념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구축했는가” 를 묻는다. 박물관과 시민사회의 함수관계, 화려한 미술 속에 담긴 질병의 그림자 등 미술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문제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과거와 현재, 서구와 한국을 넘나들면서 펼쳐지는 설명은 직관적이어서 부담 없이 따라갈 수 있다.
우리가 아는 고전미술은 사실 ‘짝퉁’이다?
사람들은 흔히 미술이라고 하면 고상하고 우아하며 품위 있는 세계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전미술의 경우 특히 그렇다. 현대미술은 전위적인 성격을 띤 경우가 많아 고전미술처럼 고상한 어떤 것이라고 여기진 않지만 우리 현실이나 일상과는 동떨어진 세계로 인식한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다.
양정무는 그러한 우리의 관성적인 인식에 의문을 제기하며 ‘고전은 없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고전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해 사실상 고전은 허상임을 꼬집으며 첫 물꼬를 트는 것이다. 이어 미술교육 과정에서 흔히 접했던 아그리파 등의 석고상, 데생이라는 특정한 방식의 훈련이 어째서 미술교육의 기본이 되었을까를 묻는다.
결국 특정 시기(기원전 6~4세기), 특정 지역(그리스)의 미술이 서구에서 수천년 동안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어온 역사가 있었음을 알게된다. 다만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진실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고대 그리스 조각을 복제한 로마의 석고상이 그리스의 작품으로 잘못 오해되면서 순백색의 대리석 조각이 이상화되었다. 그리고 백인종의 우수성에 대한 근거로 쓰여지게 된다. 이상적 아름다움의 결정체로 여겨지는 그리스 조각은 군국주의적이고 남성중심적인 문화 속에서 탄생한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런 고전미술이 이런 교육을 통해 우리의 미감을 형성하게 된것이다.
미술은 웃지 않는다?
그리곤 ‘왜 초상화에는 웃는 얼굴이 드물까?’ 하는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미술과 웃음의 관계를 살펴본다. 결국 각 시대와 문명을 대표하는 표정을 탐구하게 된다. 전통적인 초상화에서 웃는 얼굴이 별로 없는 데에는 기술적인 요인도 있다. 모델이 웃는 표정을 오랜 시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사진과 달리 초상화가 평생 한 장 남길까 말까 한 공식적인 그림이라는 점에서도 환히 웃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역시 시대적인 배경에 따라 각 문명을 대표하는 표정이 있다. 아파이아 신전의 죽어가는 전사상은 가슴에 박힌 창을 손으로 쥐고도 환하게 웃고 있다. 고대 이집트 람세스상,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서산마애삼존상 등 고대 미술에서는 우아한 미소가 자주 보인다.
그러나 ‘크리티오스 소년’ 등 그리스 조각상에서는 미소가 사라진다. 특정한 개인을 연상시키는 것을 경계한 당시 정치적 상황과 맞물린 결과다. 로마 시대까지 이어진 무표정한 초상 조각은 당시 유행한 금욕주의와도 닿아 있다. 시대가 흘러 미술품에 다시 미소가 번진다. 미술사의 대표적인 미소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비롯해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중국 현대미술 작가 유에민쥔의 그림까지 시대를 담은 미소가 있다.
어떤 시대를 특정 시대정신으로 규정하고 나면 꼭 그 틈을 미끄러져나가는 존재들이 있고, 이는 미술에서 더욱 선명하게 포착된다. 신을 중심으로 세계의 의미가 규정되었던 중세에도 인간 본연의 생명력을 뿜어내는 얼굴들이 있었다. 예술을 낳는 것이 사회이기도 하지만, 한 개인이 자신을 담은 하나의 미술작품이기도 하다.
인간을 담는 미술, 미술을 담는 건축
인간은 미술에 자신의 모습을 담는 한편 미술을 위한 집을 만들어주기도 했는데, 바로 미술관과 박물관이다. 사람들이 미술을 어렵고 심각한 것으로 생각하는 데에는 미술관의 분위기도 한몫한다. 심각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관람객들을 내려다보는 초상화들 앞에 서면 절로 경직되고 위축되기 마련이다. 오늘날의 박물관은 고상한 지식의 성채 또는 편안한 휴식의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허나 사실 박물관이 걸어온 길에는 제국주의의 침탈의 역사와 통치의 정당성을 마련하려 했던 국가권력의 욕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는 비단 과거의 일만은 아니다. 프랑스, 영국, 미국, 독일 등 많은 나라들이 여전히 박물관을 통해 국가권력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국가권력이 내세우고 싶은 이미지를 시각화하는 데 박물관을 활용한다. 건축을 통해 드러나는 국가 간의 미묘한 경쟁심, 계층 간의 갈등은 박물관 역시 그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점을 선명히 드러낸다.
팬데믹 시대, 고통이 미술이 되다
전세계가 코로나로 고통받고 있지만, 팬데믹은 인류역사화 함께 했다. 다만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의 경험은 미술 속의 질병과 죽음을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역사속에서도 감염병이 당시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위협하는 일이었고, 그로 인한 변화가 미술 속에서도 당연히 나타났다. 르네상스시대에 발발한 흑사병은 사람들의 일상뿐 아니라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을 뒤바꿔놓았고, 종교적 실천의 양상 및 경제활동까지도 새롭게 규정했다.

흑사병 직후에 제작된 이 제대화는 대역병의 공포 때문인지 엄격하고 단조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흑사병은 결과적으로 르네상스 문예운동으로 이어진다. 사실 흑사병을 이야기할 때 역설적으로 ‘르네상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흑사병은 결과적으로 유럽인을 엄격한 종교적인 삶에서 벗어나 개성과 이성의 세계에 한 발 더 다가가게 했기 때문이다. 가공할 전염력을 가진 흑사병은 가까운 친지들과 동료들의 관계를 재정립하게 했다. 검게 타들어가며 죽음을 맞이하는 흑사병 환자에게 병자성사를 집행할 신부는 많지 않았다. 어쩌면 흑사병이 가져온 엄청난 죽음을 냉정하게 목격한 유럽인이 다시 역사를 써내려간 결과가 바로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다.
흑사병은 르네상스라는 역사적 반전을 이뤄냈지만, 스페인 독감은 이와는 다른 역사적 결말을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18년 봄부터 1920년까지 미국과 유럽, 그리고 아시아까지 전 세계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걸렸고 최대 5,000만 명이 이 독감으로 사망하게 된다. 우리나라도 당시 일제의 무책임한 대처로 14만 명 가까이 이 독감으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병약했던 뭉크는 스페인 독감에 걸렸으나 이겨내고 이후에도 꾸준히 작업에 몰입한다. 스페인 독감은 이렇게 20세기 전반에 가공할 상처를 인류에게 남겼지만, 문학과 예술에서는 그 영향력은 독자적으로 보기보다는 시기적으로 1차 세계대전과 묶이면서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세계로 이어진다. 현대 문화예술 운동에서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세계를 어느 누구도 가볍게 다룰 수는 없을 것이지만, 현실을 떠나 꿈과 판타지 세계를 추구했던 이 문예운동 후에 펼쳐지는 역사는 2차 세계대전이다. 1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독감의 교훈을 냉철히 읽어내지 못한 덕분일까, 곧이어 벌어진 2차 세계대전은 직전의 재앙보다 훨씬 더 많은 사상자를 낸 역사적 대재앙으로 기록된다.
이규원_세계사를 바꾼 전염병 13가지
이규원 교수의 강연은 전염병의 완전정복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전염병의 다양한 측면을 매우 꼼꼼이 모두 짚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전염병은 문명 특유의 질병이라고 했습니다. 일정규모 이하의 인구 집단에서는 유행이 지속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도시가 있기에 전염병이 정착하고, 도시 간 이동을 통해 확산됩니다. 문명은 전염병을 낳고, 전염병은 문명을 좌우합니다.
인류의 역사를 바꾼 전염병 중 제일 먼저 꼽히는 것이 3차에 걸친 페스트의 대유행입니다. 페스트는 4∼17세기에 걸쳐 유행이 반복되는데, 특히 3차 시기에 전 세계적으로 8500만명이 사망했습니다. 유럽인구의 1/3∼2/3 사망했습니다. 노동력이 감소되자, 지배계층도 약화되었고, 농노소멸과 기계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새롭게 알게 된 것은 17세기 소빙기가 가져온 전반적 위기란 측면입니다. 소빙기에 일어난 한랭화로 농업생산이 감소되었습니다. 충분히 먹을 수 없게 되자 자연스럽게 면역력이 떨어져 사망하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이 무렵 인간과 물자의 이동이 전염병을 확산시킨다는인식이 생겼습니다. 17세기 말 도시를 봉쇄하는 사례도 생기게 됩니다.
콜레라도 전염병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습니다. BC 300년경 최초의 기록이 보이는 콜레라의 기원은 갠지스강 하류로 추정됩니다. 벵골지방과 갠지스강 삼각주중심의 풍토병이었습니다. 힌두교 성지에서 시작해 1817년 인도에 급속도로 퍼지게 되고, 1850년 전후 유럽에 폭발적으로 유행합니다. 특히 당시 세계 최대 도시 런던의 사례는 흥미롭습니다.
콜레라로 런던은 1866년까지 약 4만명이 사망하게 됩니다. 콜레라의 원인이 ‘미아즈마’(miasma) 곧 시체나 썩은 물질에서 나오는 냄새나는 나쁜 공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의사인 존 스노(John Snow)는 1848년 콜로나가 유행했던 지역를 조사해 ‘감염지도’를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콜레라 환자 대부분이 브로드 가에 있는 펌프에서 물을 마셨다는 결과가 나왔고, 콜레라가 오염된 물을 통해 전파된다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는 브로드 가의 펌프 손잡이를 떼어내어, 오염된 물로 콜레라가 퍼지는 것을 막았습니다. 존 스노는 감염지도를 통해 전염병의 원인을 파악하면서 ‘역학’이라는 새로운 의학 분야를 만들어냈습니다. 한편 에드윈 채드윅 은 1948년 공중보건법을 제정해 영국은 최초의 공중위생 규제국가가 됩니다.
인류의 역사는 감염과 싸우는 방역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감염병은 예측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창과 과거의 낡은 방패와의 싸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방역의 역사는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갔습디니다.
근대 이전 한센병(나병)은 배제와 추방으로만 전파를 막았지만, 14∼17세기 페스트는 검역·격리·봉쇄라는 근대적 방역의 출발점이 됩니다. 18∼19세기 두창(천연두)은 인류가 박멸한 유일한 전염병의 사례를 만들었고, 19∼20세기 콜레라는 역학과 공중위생이라는 근대적 방역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20세기 전반 스페인 독감은 마스크의 착용과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코로나 시대의 전례가 되었습니다.
이규원 교수는 말합니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전염병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위생과 영양의 개선이라고…
서촌(2) 겸재 정선집터(경복고)
예전에 경복고에 들러서 사진까지 찍은 장소다. 그때도 사진을 찍었지만, 겸재 정선 집터라는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대충 보는 게 많다는 증거다. 이번에는 확실히 겸재를 알고자 했다.
겸재는 종로구 청운동 89-9(현재 경복고부근)에서 출생했다. 그의 집은 당시 세력가인 장동 김씨 가문 근처에 있었다. 그 덕분에 겸재는 장동 김씨 가문과 깊은 인연을 쌓았고, 이들의 후원으로 화단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벼슬까지 종2품 벼슬에 오른 ‘성공한’ 화가로 84세에 생을 마쳤자.
정선은 요즘말로 하면 서촌사람이었다. 서촌은 인왕산 아랫마을 이었으며, ‘인왕제색도’는 비 온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인왕산의 실제 모습을 사실적으로 화폭에 실은 명작이다. 겸재가 인왕제색도를 그렸다는 곳이 정독도서관에 기념비로 남아있다.

겸재 정선은 진경산수 화가이며 주역에 능통한 학자였다. 상상해서 그리기보다 직접 돌아다니며 탈세속을 즐기는 경향이었다. 그림에는 주역으로 해석할 만한 요소가 많다.

자화상을 돌덩어리에 부조로 표현했다. “독서여가(讀書餘暇)”라는 그림에는 한가로이 툇마루에 비스듬히 앉아 마당의 화초를 바라보는데 뒤쪽으론 책이 수북이 쌓여 있다. 책 읽기 싫다는 의미인지 좀 쉬고 있다는 표현인지 모르겠다. 지금 내 책상 옆에 읽으려 하는 책이 쌓여 있고 먼지만 내려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