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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쉬와 세계대전

오늘날과 비슷한 초코릿제품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군인들을 위한 초콜릿 배급에서 시작되었습니다.미군도 그 뒤를 따랐고, 전쟁이 끝난 후 돌아온 군인들은 초콜릿이나 캔디바로 불리는 단것들을 전파합니다. 1920년대 내내 이런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수천 명의 소규모 지역 제과업체가 등장합니다. 냉장과 운송 문제는 전국적인 유통의 장벽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지역 브랜드가 각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밀턴 허쉬(1857년~1945년)는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전시된 독일인 리먼의 초콜릿 제조기계를 보고, 초콜릿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캐러맬 사업을 하던 허쉬는 캐러멜에 초콜릿 코팅을 할 수 있는 기계를 구매합니다. 허쉬는 덴버의 가게에서 일하며 신선한 우유와 바닐라와 설탕으로 캐러맬은 만드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렇지만 밀크 초코릿을 만드는 것은 캐러맬과 달랐습니다. 그는 실패를 계속 했습니다.  핵심은 초코릿에 액체인 우유를 넣어야 하는데, 초콜릿은 고체여야합니다. 마침내 탈지우유를 설탕과 잘 섞어 엿처럼 만들수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밀크 초코릿이 ‘허쉬 코코아’입니다.

제조의 난제를 풀어냈지만, 그래도 그의 진정한 경쟁력은 대량생산의 성공입니다. 대량생산의 경쟁력은 무엇보다 가격에서 나옵니다. 당시 원가에서 제일 비싼 것은 카카오였고, 허쉬는 우유와 설탕의 비중을 높여 가격을 낮추어습니다. 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재료 확보, 전국 적 유통망을 만들어냅니다. 1899년에 허쉬는 초콜릿 대량 생산을 위한 최초의 공정을 개발했습니다. 이듬해 그는 유럽의 쓴 초콜릿 맛을 선호하지 않는 미국인의 입맛에 맞춘 밀크 초콜릿 캔디바를 선보였습니다. 

이후 1900년대에 출시된 ‘허쉬초콜릿’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밀크초콜릿은 그 풍미와 질감, 달콤함까지 기존의 초콜릿과는 비교불가였습니다. 무엇보다 보통사람이 살 수 있는 가격이었습니다. 허쉬는 이 과자에 “Great American Chocolate Bar”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이제 초코릿은 부자들만 즐길 수 있는 사치품이 아니라, 대중들이일상적으로 즐길 수 있는 제품이 되었습니다. 마치 포드자동차 처럼, 식품산업에서도 진정한 미국적 생산방식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 곧 닥친 대공황은 초콜릿 골드러시를 늦추었습니다. 빠른 에너지와 저렴한 칼로리가 필요했던 시대에, 캔디바가 패스트푸드가 되었습니다. 독립적인 지역 제과업체도 사업을 접거나, 더 큰 제조업체에 인수되었습니다. 그래도 허쉬만은 살아남을 수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 발발하면서 식량난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군대는 대형제조사에게 초콜릿 배급을 의뢰하여 지역 캔디바 붐을 종식시켰습니다. 군대는 칼로리뿐만 아니라 각성도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1937년 미 육군은 허쉬에 바형태의 초코릿” 을 주문합니다. 요구사항은 “4온스의 무게, 높은 에너지, 고온에 녹지않아야 하며, 삶은 감자보다 맛이 조금 더 좋아야”한다.  

허쉬는 귀리 가루 등을 조합하여 초콜릿 바를 마치 벽돌처럼 만들었습니다. 고온에 견딜 수 있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초코릿바는 매우 단단했고, 칼로 조각내어야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허쉬는 30억 개 이상의 배급 바를 제조했습니다. 2차대전 중 유럽과 아시아에 주둔한 미국PX에서 허쉬바를 팔았습니다. 허쉬 초코릿은도 세계적 인 브랜드로 성장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조, 운송 및 냉장 기술이 발전합니다. 이제 지역에 있는 제과업체는 더욱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사들여 전국 배급망을 제공하게 됩니다. 오늘날 미국에 남아있는 “빅 쓰리” 초콜릿브랜드는 허쉬, M&M을 만드는 마즈, 네슬레가 시장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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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4월 14일, 아카데미 첫 생중계

1969년 4월 14일, 제41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전 세계에 최초로 생중계됩니다. 37개국에서 아마데미 시상식을 시청했습니다.

30여년 만에 여우주연상도 처음으로 공동수상합니다. “겨울의 사자 “에서 아키텐의 엘레노어 역을 맡은 캐서린 헵번과 “퍼니 걸” 에서 데뷔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에게 돌아갔습니다.두 여배우는 각각 3,030표를 받았습니다. 주요 오스카 부문에서 처음으로 정확한 동점이었습니다. 또 다시 받을 거라고는 생각치 못한 헵번은 시상식에 불참했습니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퍼니걸의 오프닝대사 독무대에서 “안녕, 멋져”로 수상소감을 말하며, 금빛 오스카를 수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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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롱과 시진핑

지난 몇 달 동안 5명의 유럽 지도자들이 베이징에 방문했습니다. ‘전략적 자율성’을 주장한 마크롱 대통령은 떠들석하게 주목받았지만, 대부분의 유럽의 지도자들은 경제적 이익을 기대했습니다. 그렇지만 기대만 못했고, 말의 잔치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유럽과 중국의 밀착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불과 몇년전만 해도 유럽과 중국사이는 훨씬 냉랭했습니다. 책 ‘프랑스와 중국의 위험한 관계’는 프랑스의 국방, 정치, 경제, 기술, 사회 각 분야에 중국이 어떻게 침투해 들어와, 국가 주권을 잠식하고 있는지를 밝힙니다. 중국 공산당이 서방 각국에서 벌이고 있는 다양한 일들을 고발합니다. 사이버 공격, 간첩 활동, 전략적 기업 인수 등…

중국의 과격한 행동주의로 인해, 프랑스와 유럽에서 중국을 향한 비판적인 입장이 더 우세해었습니다. 2019년 3월, 유럽연합(EU) 정책위원회는 중국을 “체제 경쟁자”로 규정합니다. 중국에 대한 새로운 외교정책을 강구했으며, 마크롱 대통령은 중국을 상대로 무역 문제에 관해 더 강력한 상호주의를 내세우면서 더욱 강경한 입장을 내세웠습니다.  

미중 패권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우크라니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국가의 역학관계가 유럽에서도 드라마틱하게 변합니다. 시진핑은 당장 유럽과 물꼬라도 터야만 했습니다. 유럽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중국의 역할을 기대해보지만, 중국이 러시아의 입장을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유럽은 지역 패권국인 중국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더구나 일부 유럽지도자들은 그러한 세계 질서가 유럽에 더 유리할 수도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베이징과 러시아의 상호 작용이 결국 중국-EU 관계의 미래를 결정할 것입니다. 마크롱 대통령은 전략적 자율성을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유럽 스스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전략적 자율성은 허구일 뿐입니다.

중국과 유럽 간의 정치적 레토릭에도 불구하고, 우선 순위는 ‘경제’ 일 수 밖에 없습니다. 2020년 중국은 EU의 주요 상품 무역 파트너로서 미국을 추월했습니다. 마크롱은 “프랑스는 중국과 상업적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에어버스, 일렉트릭트 드 프랑스, ​​로레알 등 프랑스 기업의 임원 60명 이상으로 구성된 비즈니스 대표단을 동반했습니다. 중국과 더 많은 협력을 모색하며 로비를 하고 있지만, 그래서 마크롱의 정치전략적 자율성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미국은 더 이상 도전받지 않는 1인자가 아닌 상황에 적응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중국은 도전받지 않은 1인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EU의 큰 도전은 다극 세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웅변적이지 않은 실용적인 방식을 찾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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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의 유대인기업

한때 전설적인 상인가문 ‘사순’은 진정한 세계 최초의 다국적 기업입니다.  19세기 중반에 그들은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상인제국이었습니다. 그들은최초의 다국적 기업이었고, 그들의 몰락은 영원한 부를 꿈구는 이에게는 경종입니다.

서순과 커두리 두 가문은 모두 바그다드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사순 가문은 오래전부터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자였고, 수세기 동안 왕의 수석 재무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스만제국의 공격으로 이라크 맘루크 왕조가 그만 멸망합니다. 1829년 어느 어두운 밤, 도시 최고의 부자인 데이비드 사순은 허리에 돈띠를 두르고, 망토에 진주를 수놓은 채 목숨을 걸고 바그다드를 도망칩니다.

1832년에 40세가 된 데이비드 사순은 봄베이에 자리를 잡습니다. 봄베이는 말하자면 사업을 위한 발판이었습니다. 데이비드 사순은 가난한 바그다드 유대인 가정의 유망한 젊은이들을 모아 봄베이의 사순 학교에 파견해 훈련시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아들 네명을 모두 보낸 사순의 먼 친척인 커두리집안이었습니다. 산업 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었고, 봄베이는 상인제국의 영국식 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전성기에 있던 대영제국에 기대어, 데이비드 사순은 영국의 면직업에 참여해 크게 성공합니다.

동인도 회사의 아편 독점이 폐지되자, 데이비드 사순은 아편사업을 위해 중국으로 향합니다. 아편사업이 이끌어낸 붐은 역설적이게도 마치 금광처럼 상하이로 장사꾼을 불러드립니다. 이들은 영국 식민지인 홍콩과 개방된 항구인 상하이에 자리를 잡습니다. 사순은 인도 면화와 함께 중국 차를 영국으로 수출했고, 아편거래를 하면서 크게 돈을 벌었습니다.  미국의 내전으로 면화수출이 어려워지자, 사순은 사업적 인도면화를 더 비싼 가격으로 수출할 수 있었습니다. 사순집안은 새로운 전신기술을 채택하고, 운송 및 보험 분야로 다양화합니다. “은과 금, 비단, 고무와 향신료, 아편과 면화, 양모와 밀” 등 바다나 육지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이 Sassoon & Co.의 마크를 달았다고 합니다.

1864년에 데이비드 사순이 사망한 후 형제간 경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야심만만한 둘째 아들 엘리아스는 독자적으로 요코하마에서 런던에 이르는 진정한 글로벌 기업을 만들었습니다. 엘리아스는 인도 아편, 향신료, 면화, 중국비단 및 차를 거래했습니다. 또한 신흥 도시로 몰려드는 중국인과 외국인 이민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부동산에 투자했습니다. 홍콩에서 사순가문은 당연히 금융사업을 시작합니다. 오늘날 까지 남아있는 홍콩&상하이 은행을 설립합니다.

반면 엘리 커두리에게는 사순가와 같은 배경이 없었습니다.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카두리는 사순이 인도에 세운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뒤, 홍콩의 회사에서 일을 시작합니다. 엘리커두리는 고무회사 투자로 백만장자가 되었고, 사업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나중에 엘리는 그의 두 아들과 합류하여 부와 영향력에서 사순과 경쟁합니다. 커두리는 홍콩에 전력회사를 세웠고, 장개석이 결혼식을 올린 마제스틱 호텔을 만들었습니다.

다양한 요인이 있겠지만, 상하이가 ‘중국의 뉴욕’으로 변신하며 금융, 상업, 산업의 중심지가 된 데는 이들 유대인 기업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1938년 무렵 나치의 탄압을 피해 유대인 난민이 상하이에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유대인 난민 수는 2만명 가까이로 늘어났습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 그들은 게토에 수용됩니다

 당시 상하이의 경제적 지배권력은 유대인이었고, 상하이의 중심은 외국인 거주지인 국제 조계였습니다. 그래서 상하이는 근대화의 상징인 자유로운 국제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서순과 커두리가 서로 경쟁하며 상하이에 기업가 정신을 불어넣고, 화려하며 세련된 건물을 지어 뉴욕못지 않은 스카이라인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전쟁으로 면화 경기는 침체됩니다. 전쟁이 끝나자 처음에는 일본의 침략이, 그 다음 내전에서는 마오쩌둥이 승리합니다. 이제 공산당 정권은 커두리가와 서순가 사업체를 상대로 가차 없는 인수 작업에 착수합니다. 그들은 커두리가의 상하이가스회사와 같이 도시 운영을 위해 필요한 회사들을 인수합니다. 그다음 사유 재산을 몰수하고, 외국 기업들로부터 최대한 자금을 끌어냅니다.

두 가문은 1949년 중국 공산당 집권 이후 서로 다른 정치적 선택을 합니다. 맞는다. 두 가문 모두 상하이에서는 잃을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재산은 몰수되었고 빅터사순은 중국을 저주하고 바하마로 은퇴했습니다. 대조적으로 카두리는 홍콩에서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로렌스의 ‘권력’은 상하이를 떠나 구룡 근처에 세운 산업가들을 피해 달아난 섬유 공장을 해고했고, 홍콩의 전후 호황을 촉발했습니다.커두리 가문은 홍콩에서 살아남아 페닌슐라 호텔 체인과 홍콩 최대 전력회사인 CLP 홀딩스를 경영하는 등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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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1987년 4월 13일 호헌조치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후, 직선제 개헌을 막기 위한 전두환 정권의 조치의 시작이다. 비밀해제된 외교문서에 의하면 전두환은 레이건에게 친서를 보내 호헌조치의 불가피함을 주장했지만, 계엄령를 막기 위해 미국이 적극 개입했다. 뿐만 아니라 4·13 호헌 조치는 6월항쟁으로 나가는 길을 열었다. 그래서 4·13 호헌 조치는 전두환의 자살골을 혹은 치명적 실수로 평가되기도 한다. 국민적 저항과 미국의 압박까지 강해지자 전두환 정권과 민정당 노태우 대표는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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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4월 12일, 가가린 우주여행

1961년 4월 12일, 소련 우주인 유리 알렉세예비치 가가린이 우주선 보스톡 1호 를 타고 우주로 여행한 최초의 인간이 되었습니다. 비행 중에 27세의 시험 조종사인 그는 행성 궤도를 도는 최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보스톡 1호는 최대 고도 187마일에서 지구 궤도를 돌았고 전적으로 자동 제어 시스템에 의해 안내되었습니다. 

우주에서 1시간 48분 동안 가가린이 한 유일한 진술은 “비행은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나는 건강하다.”

그의 역사적인 업적이 발표된 후 매력적이고 겸손한 가가린은 순식간에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레닌 훈장을 받았고 소련 의 영웅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소련 전역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고 그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거리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최초의 인간을 우주에 보낸 소련의 우주 프로그램의 승리는 1961년 5월에 첫 우주 비행을 계획했던 미국에 큰 타격이었습니다. 이후 미국은 우주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1969년 아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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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키와 마이클 조던

영화 에어는 1984년 마이클 조던이 나이키와 계약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때 나이키도 마이클 조던도 모두 최고는 아니었습니다. 그 해 드래프트에서 조던은 3번째로 지명받았고, 나이키의 시장점율은 17%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농구화 시장도 컨버스와 아디다스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마이클 조던도 본래는 아디다스 마니아였가도 합니다.

그런데, 나이키는 마이클 조던과 계약합니다. 루키에게 25만 달러, 제품판매 로열티(5%), 벤츠의 자동차를 약속합니다. 조던은 아디다스에게도 25만 달러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합니다. 시장점유율 50%이상을 차지했던 컨버스는 10만 달러만를 제시했습니다. 나이키만이 스포츠맨 조단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챘고 베팅했습니. ‘큰 경기에서 결정적인 슛을 성공하는’ 조던의 위대함을…

나이키는 첫 출발에서부터 스포츠 그 자체였습니다. 설립자인 필 나이트와 빌 바우어만은 1957년 오레건 대학에서 육상 선수와 코치로 만났습니다. 그 인연으로 다시 만나 운동화를 수입판매하는 ‘블루리본 스포츠’라는 회사를 설립합니다. 주로 일본의 오니츠카 타이거사의 런닝화를 판매합니다. 1971년 협력관계가 틀어지면서, 나이키로 재탄생합니다. 나이키의 로고 ‘스우시’를 채용한 코르테즈 라는 런닝화를 출시하면서 나이키의 역사를 시작합니다.

나이키의 본질은 마케팅입니다. 그런데 나이키의 마케팅은 제품이나 기술을 홍보하지 않습니다. 나이키는 대신 ‘위대한 운동선수’를 내세웁니다. 위대한 선수를 통해, 나이키가 무엇을 하는 회사인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립니다. 초창기인 1973년부터 나이키는 오레건 대학 육상선수인 스티브 프리폰테인을 첫 후원 선수로 선정합니다. 그는 중장거리 7종목을 휩쓸면서 스타덤에 오른 미국 육상의 마지막 ‘백인’ 스타였습니다.

나이키의 마케팅을 가장 잘 보여주는 광고 캠페인이 “Just Do It” 시리즈입니다. 1988년 시작된 이 캠페인은 위대한 운동선수에 존경, 운동에 대한 순수한 열정, 스포츠의 경이로운 순간을 보여줍니다. 나이키의 본질이 바로 스포츠이라는 것, 그 스포츠의 희로애락을 보여주며 자연스럽게 팬덤을 만들어 냅니다. 나이키를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아이돌 처럼 스포츠 선수에 열광하게 만듭니다.

스포츠맨이 만든 회사 나이키는 위대한 스포츠선수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스포츠 선수의 위대함은 단지 체력이나 기술이 아닙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해내는, 또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스토리를 만들고 관중을 열광케하는 스타입니다. 마이클 조던, 타이거 우즈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발굴한 것이 나이키의 저력입니다. 흉내낼 수 있지만 따라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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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4년 4월 11일, 나폴레옹 추방

1814년 4월 11일, 프랑스의 황제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 지도자 중 한 명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왕좌를 물러나고 엘바 섬으로 추방됩니다. 퐁텐블로 조약 황제자리에는 물러나지만, 엘바섬의 대공의 지위와 연금 200만달러 받는 조건이었습니다.

1812년 러시아가 영국과 동맹을 계획하고 있다고 생각한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침공합니다. 결국 프랑스 군대는 모스크바에서 퇴각하고, 유럽의 연합하여 나폴레옹에 대항합니다.  1814년에 위기에 몰리자 나폴레옹은 황제의 지위를 포기합니다. 1815년 3월, 그는 파리로 돌아와 황제 칭호인 나폴레옹 1세를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1815년 6월 피비린내 나는 워털루 전투에서 패합니다.  나폴레옹의 패배는 프랑스의 유럽 지배가 끝났다는 신호였습니다. 그는 두 번째로 퇴위하고 대서양의 외딴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추방되어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는 1821년 5월 5 일 52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그가 독살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위암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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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4월10일, 중국과 미국의 핑퐁 외교

1949년 공산주의 혁명 이후 중화인민공화국과 미국의 관계는 냉전상태 였습니다. 무역금수 조치, 외교적 침묵이 두나라의 관계를 상징했습니다. 한국전쟁 후 20년이 넘도록 공식적인 미국 대표단은 중화인민 공화국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1971년, 양국은 서로 대화를 시작합니다. 중소분쟁을 겪던 마오 주석은 미국과의 관계가 러시아에 대한 억지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한편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중국 개방을 행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 

1971년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가 기회가 되었습니다. 중국과 미국 선수팀이 선물을 서로 교환한 것을 계기로, 마오주석은 미국팀을 초청했습니다. 닉슨 대통령은 나중에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중국 이니셔티브가 탁구팀의 형태로 결실을 맺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죽의 장막을 넘은 미국 팀은 열흘 동안 광저우, 베이징, 상하이를 여행하며 탁구 경기에 참여합니다. 중국선수는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단지 경기만이 아니라 외교채널를 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베이징 인민대회당 행사에서 저우어라이는 “미국과 중국 국민 관계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선언합니다. 미국 선수들이 저우언라이를 만난 같은 날인 4월 14일, 닉슨 대통령은 미국이 중국에 대한 여행 금지와 무역 금수 조치를 완화한다고 발표합니다. 그 해 7월 미국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베이징을 비밀리에 방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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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바오로 2세, 카톨릭의 현대화

1978년 교황에 임명된 요한 바오르 2세(1920~2005)는 최초의 슬라브계 교황입니다. 455년 동안 교황은 언제나 이탈리아 출신인 것을 감안하면, 독특한 배경을 가진 그가 교황에 올라다는 것 자체가 어떤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배출된 266명의 교황 중, 가장 인기있는 교황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의 장례식에 200만 명의 사람들이 바티칸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는 역사상 가장 큰 장례식 중 하나라고 합니다. 세상을 떠난 지 이십년이 지난 지금도 교황에 대한 관심은 그대로 입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그의 시대적 역할 때문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920년 폴란드 바도비체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크라쿠프’ 소재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과 문학을 공부했고, 극단에서 공연하는 평범한 젊은이였습니다. 제 2차 세계 대전 중 나치가 대학을 폐쇄해, 그는 채석장과 화학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합니다. 1941년 그는 가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었습니다. 나치 전쟁의 참혹함, 스탈린의 공포정치와 종교탄압, 위성국가 폴란드의 서러움 모두를 그는 겪어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신학을 공부해, 1946년에 사제가 되고, 1958년에 주교가 되고, 1967년에는 추기경이 됩니다.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 그의 인생에 아마 가장 중요한 모멘텀은 1962년에 2차바티칸 공의회(바티칸 II)에 폴란드 대표로 참석한 것입니다.

당시 교황 요한 23세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바티칸 공의회를 네차례 소집합니다. 바티칸 II의 모토는 ‘현대화’ 또는 ‘업데이트’의 의미를 지닌 ‘아조르나멘토’입니다. 바티칸 II는 변화하는 세상에 발맞추어, 카톨릭 교회도 변모할 것라는 선언입니다. 이런 개혁 정신에 따라 3년간 진행된 공의회는 열띤 토론을 거쳐, 혁신적인 결과물을 내놓습니다.

여기 지금'(here and now)에 초점을 맞추고, 오늘 이 세상이 변화하는 물결에 발맞추어, 복음도 변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제 라틴어만을 사용했던 전통을 버리고 자국어를 사용할 수 있게 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서로 싸우고 분열된 교회를 ‘이단’이 아닌 ‘형제’라 생각합니다. 평신도도 교회에서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기회의 문을 열었습니다.

요한 바로르 2세는 이미 사제시절, 현재 교회의 문제점과 변화를 주장하는 일련의 논설을 발표했습니다. 그 덕분에 성직자로서 그의 전성기가 시작됩니다. 그의 메세지는 분명했습니다. 카톨릭 교회는 전통을 단지 보수하는 수구세력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변화하는 개혁세력이다. 카톨릭 교회의 현대화를 위해, 그는 이미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부지런했고, 게다가 무대체질입니다. 그는 전세계 129개국 방문한 ‘날아다니는 성좌’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명사와 동사로 이뤄진 쉬운 메세지로 대중을 휘어잡았습니다.대학 때 연극을 했던 그는 무대 체질이었습니다. 한국을 방문할 때도 비행기에서 내려 땅바닥에 입맞춤 하는 등 극적인 효과를 연출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행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카톨릭교회가 저지른 죄를 참회하고 용서를 청합니다.‘선교’를 빌미로 묵인한 곳곳의 원주민 학살, 오래전 저지른 십자군 전쟁과 종교전쟁, 이단재판과 마녀사냥, 갈릴레오 사건과 금서목록 같은 죄과들도 고백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끌어안고 ‘죄의 고백과 용서의 청원’이라는 특별예식을 거행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슬람교도들과의 만남을 시도했을 뿐 아니라 이들을 ‘형제’로 불렀습니다. 1986년 요한 바오로 2세는 로마에 있는 유대인 교회를 방문했고, 기독교 각 종파들을 초대해 만납니다. 1981년 5월에 터키인 청년에 총을 맞고 2년후, 감옥에 있던 청년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눕니다.

  유다교, 이슬람교 지도자와 만남을 갖고 있는 요한 바오로 2세.

요한 바오르 2세는 가톨릭교회가 새로운 시대와 대화하며, 시대의 필요에 맞추어 ‘공동선’을 추구한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알렸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카톨릭 교회의 현대화 메세지는 대중에게 극적으로 전달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996년부터 파킨슨병, 만성 무릎관절염, 여러 합병증 등으로 10년 이상 시달리다 2005년에 선종합니다. 그에게도 넘지 못한 오점은 남아있습니다. 그는 추기경 시절 폴란드 교단에서 발생한 아동 성 학대 사건을 알고도 이를 은폐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