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in종합

1762년 7월 9일, 예카테리나 권력을 잡다

러시아 황제 표트르 3세의 부인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군대를 동원하여 남편를 페위합니다. 그리고 러시아의 유일한 통치자인 예카테리나 2세를 스스로 선포합니다. 그녀는 34년 동안 왕위에 머물며 표트트대제와 함께 예카테리나 대제의 반열에 오릅니다.

예카테리나 대제는 표트르 대제와 마찬가지로 국가를 서구화하고 강한 러시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예카테리나 치하에서 러시아의 국경은 서쪽과 남쪽으로 확장되어 오스만제국의 영토, 크림, 폴란드 대부분을 포함했습니다. 

Posted in회원 칼럼

디지털 신 글로벌 전략 ⑦ – 디지털 공간 설계 기초 1

필자는 그동안 6편의 연재글을 일주일 단위로 게재하였는데, 이는 50여년간의 다양한 디지털 변화를 ‘디지털 공간’이라는 핵심 단어로 살펴보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물리 공간이 보다 강하고 지속 가능한 공간이 되는 방안을 모색하는, 여하간 멈출 수 없는 작업이다.

사실 ‘디지털 공간’을 살펴보는 일보다도 먼저 ‘디지털’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일이 더 선행작업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디지털론”이라는 작업은 내가 틈틈이 다루기는 하겠지만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미시 세계에서의 ‘양자적’ 현상이 ‘디지털적’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거시 세계에서의 ‘디지털적’ 현상을 ‘양자적’ 현상으로 치환하여 세상의 이치와 변화를 설명할 수 있을까? 다른 누군가도 이런 궁금증을 계속 풀어주기를 희망한다.

삶과 사회와 세계와 우주를 늘 생각하는 인간의 사고 습성은 ⒜ 한편으로는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와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of Ephesus), ⒝ 다른 한편으로는 환원주의(Reductionism, 還元主義)와 전일주의(Holism, 全一主義)로 대비되는 양 극단의 가운데 어느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다. 물론 지금은 철학에서조차 논변의 가치가 희박해지고 있는 ⒞ 심신일원론(mindbody monism, 心身一元論)과 심신이원론(mindbody dualism, 心身二元論)도 인류의 사고 습성을 지배하던 것이었다.

나도 개인적인 사고습성으로서 이런 3가지의 대립적 논변이외에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theory of relativity, 相對性理論),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 不確定性原理) 그리고 쿠르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Gödel’s incompleteness theorem, 不完全性定理)를 나의 3위 일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3가지의 과학이론은 나의 물리 세계를 설명하는 근본적 지침이다.

나는 삶과 죽음 또는 신과 인간에 관한 논변도 이 3위 일체에 기대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이제 현대의 철학 논증도 사변적 논변 외에도 지금까지의 인간이 축적한 과학기술에 기초하지 않는 논증은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다.

철학의 기원이라는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은 다 알다시피 오늘날의 철학과 과학이 분리되기 전 하나의 학적 체계이었다. 동양의 사변은 처음부터 혼융, 융합, 태극이라는 개념으로 설파되고 전승되어 왔지만, 세상의 변혁을 가져오는 ‘과학’으로서의 학문의 축적은 약하지 않았던가.

상기의 사고 습성이 오랜 세월을 거쳐 전술한 인류의 위대한 과학이론을 낳았다. 3위 일체의 과학이론이다. 앞으로도 새로운 거대 과학이론을 계속 낳을 것인가? 아직도 미지의 것들을 파헤치는 인류의 작업은 어디에서 새로운 결실을 맺을까? 상기의 3가지의 사고 습성과 3위 일체의 과학이론은 디지털 공간에서는 어떤 의미를 낳을 것인가? 아니면 디지털 공간에 오직 적용되는, 기존과 다른 새로운 과학이론을 낳을 것인가?

관련하여 아래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소속 이순석 박사의 “디지털건축가의 소명” 145번째의 글인데 나의 글 4편까지의 글을 읽고 남긴 리뷰이다. 디지털 공간 설계의 기초를 논하는 작업에 참고가 되기를 바란다.

최근 IT기자클럽에 게재된 ‘디지털 신 글로벌 전략’이란 아티클을 발견한다. 처음 접한 이후로 머리 속에서 떠나 않아 새 글을 기다리며 수시로 IT기자클럽을 찾게 된다. 짧은 글이지만 결코 작은 글이 아니다. “디지털 공간론”이라는 거대담론이자 근미래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1편, 2편, 3편까지 우리나라의 디지털전략의 실효성에 문제제기를 쪽집게 같이 짚어내며, 기존 전략의 한계가 결국은 새로운 공간 창출이라는 판짜기의 부재에 있음을 깔끔하게 정리한 후, 4편에 이르러, 새로운 공간에 대한 정의를 시작한다.

우리가 흔히 전체를 정의할 때 사용하는 기본요소라는 개념을 탈피하여 기존의 물질세계와는 또다른 물질세계를 정의하기 위하여 보다 일반화된 용어를 차용한다. 이른바 원리다. 제1원리는 비트의 독립공간이다. 제2의 원리는 그 공간 속의 ‘나비’라는 존재다. 제3의 원리는 자율 운행이다. 새로운 물질세계인 디지털공간의 3요소의 정의인 셈이다. 비트 공간, 나비 존재, 자율 운행 등이다.

디지털공간에 대한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정의다. 멋지다. 이제 다음 편이 더욱 기다려진다. ‘디지털 공간’에 대한 대부분의 어설픈 접근은 ‘플랫폼’으로 통칭되지만, 그 플랫폼이 어떻게 생성되고 유지되고 성숙하고 퇴조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apple, amazon, alphabet을 필두로 하는 다수의 플랫폼 기업들을 열심히 흉내내기를 하지만 아무런 실효성이 없다. 공간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플랫폼전략은 돈만 버리는 결과가 예고된 재앙이나 다름없다.

디지털공간은 기존의 물질세계를 설명하는 물리법칙들이 더욱 일반화되어 적용되는 공간이다. 일반상대성이론을 일반화 할 수 있어야 하고, 불확정성의 원리를 더욱 일반화 할 수 있어야 하고, 불완전성의 원리를 또한 확장해야만 하는 공간이다. 그런 새로운 물리법칙을 토대로 새로운 세상을 설계하는 것은 디지털건축가들의 소명일수 밖에 없다. 그 전에 물리법칙에 대한 정확하고도 완전한 이해의 선결이 필요하다.

대전광역시에는 이 법칙들에 대해서 먼저 말해줘야 하겠다.

이순석 박사의 리뷰는 나의 글에 대한 과찬의 글이지만 그의 글은 디지털론과 디지털 공간론에 대한 나의 생각의 일단을 잘 정리한 글이고 나의 후속 글에 대해 더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든다. 이 인용 글은 그의 깊은 사색의 결과이기 때문에 그의 후속 글도 기대된다.

나는 이미 앞에서 디지털 공간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인 관점 전환을 요구하였던 바 그런 관점 전환과 관련한 그동안의 철학적 사유의 흔적을 좀 더 살펴본다.

“(언어학이란) 모든 언어에서 영원하고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힘을 찾아보며, 역사의 모든 독특한 현상을 포괄할 수 있는 일반법칙을 추출해 내는 것이다.” 소쉬르가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주장하였던 말이다. 소쉬르는 언어활동의 보편적 문제를 다루기 위해선 개별 언어 간의 비교 또는 역사적 변화 과정을 탐구하는 데 그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소쉬르에게 언어는 다른 학문의 연구대상과 다르게 이미 존재하고 있는 대상이 아니며 관점에 의해서 창조되는 실체라고 생각했다. (중략) 소쉬르의 언어학에 대한 인식론적 전환은 세계에 대해 기존과 전혀 다른 시각을 제시하는 ‘구조주의’로 발전했다.

소쉬르는 구조적 관점에서 개별 언어가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독립적이며 구체적인 대상의 본질을 추구하는 기존 경험주의나 실증주의의 태도를 거부하며 관계의 망 속에서 분절된 대상의 의미를 찾는 구조주의로 발전하게 됐다.

앞서 여러 편의 나의 글에서 언급한 디지털 공간론의 3가지 ‘원리’는 소쉬르의 말에 언급된 언어 공간의 ‘관점에 의해 창조되는 실체’로서의 언어에 공리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처럼 ‘공리’에 비유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소쉬르의 아이디어는 전통적인 사고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사상인데, 이는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의 철학사상과 맥락을 공유하는 점은 없는가? 또한 칸트가 제시한 인식대상과 인식주체와의 관계 전복을 통한 코페르니쿠스적인 인식 전환과 맥락이 닿아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이런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은 내가 앞에서 계속 말하는 ‘디지털 공간’에 대한 또 다른 코페르니쿠스적인 인식 전환을 토대로 물리적 공간에서도 자유로운 디지털 공간의 궁극적 실체는 무엇일까? 그 “것”에 대한 탐색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대학신문≫에서도 깊게 언급한 소쉬르의 아이디어를 디지털 공간론에서도 흡수하려는 것이다.

앞서 말한 디지털론에서 말하는 ‘양자적’ 디지털 현상과 디지털 공간에서 말하는 ‘인위적’ 디지털 현상은 아직은 그 맥락을 같이 하는 점을 찾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 글은 이순석 박사의 기대에는 아직 미치지 못한다. 그럼 인간은 ‘인공적 디지털론’으로 무엇을 얻으려는 것일까?

이 글에서는 논변의 도약을 어쩔 수 없이 저질러야 하겠다. ‘인공적 디지털’은 ‘데이터’라는 것이다. 생물로 하면 DNA라고 할 수도 있고, 혈액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상론은 나중으로 미룬다. 이렇게 설정하고 나면 ‘디지털 공간론’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디지털 공간론’을 ‘데이터 공간론’으로 좁혀볼 필요는 없다.

데이터 공간론에 관한 약간의 논변은 나의 제5편의 글에도 남아 있다. 나의 데이터 공간론을 포괄하는 디지털 공간론에는 그리하여 소쉬르에서 비롯된 ‘구조주의’뿐만이 아니라, ’기능주의’, ’자연주의’, ‘물리주의’라는 인문학적 접근방법이 교호적으로 적용될 여지가 제법 많다. 이런 학문 사조의 실제적 의미를 나중에 다시 상론할 기회를 가질 수도 있지만, 이들 사조의 앞에 공통적으로 수식 가능한 말은 바로 ‘방법론적’ 또는 ‘방편론적’이라는 단어인데 이 글의 실제적 목적 때문에 더욱 더 그런 입장이 요구된다.

‘디지털 정보’인 ‘데이터’는 왜 출현했을까? ‘아날로그’는 어떤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일까? 디지털 정보기술은 왜 출현했을까? 과연 인간은 왜 전통적인 아날로그, circuit 방식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기술에서 새로운 디지털, packet 방식으로 정보를 전송하는 기술로의 전환을 꾀하는가? 그냥 정보전송방식의 단순한 변화인가? 아니면 거기에 인간의 어떤 욕망이, 아니면 물리 공간에서의 어떤 한계를 극복하려는 욕망이 잠재되어 있는가?

대한민국에서는 1994년부터 인터넷이 민간에 개방되었다. 1990년 대 중반의 미국의 인터넷고속도로(information highway) 프로젝트가 국가적 과제로 부상할 때, 대한민국에서도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사업이 국가적 최우선 과제로 추진되었다.

국가의 영토는 좁지만 인터넷 공간은 무한한 것이니 사이버 영토(cyber territory)를 선점해야 한다는 프로파간다(propaganda)가 우렁찼고 기세가 드높았다. 1990년 대 말부터는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라는 구호도 등장했다. (동 구호의 제목에 부제목 ‘인터넷 코리아 시대의 개척자들’을 붙여 ‘한국IT기자클럽’은 2016년 책을 발간했다.)

2000년대 초에는 인터넷 버블(bubble)을 야기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네티즌(netizen)이 되었고 웹서핑(web surfing)으로 늘 여가를 즐겼다. 2010년대에 들어서기 직전에 애플의 아이폰(iPhone)이 등장하면서 인터넷 기술트렌드는 새로운 도약을 하였고 수많은 글로벌 자본은 모바일 비즈니스로 집중되었다.

PC 웹(pc web)을 날아오르는 모바일 앱(mobile app)의 시대가 10년 정도를 풍미했다. 모바일 버블(bubble)은 없었다. 이를 지탱한 인터넷 비즈니스 철학은 네트워크 중립성(network neutrality)였다. 모바일 비즈니스는 날개를 달았다. 그러는 과정에 수많은 인터넷 공간 프로젝트 – 포털, e커머스, SNS, 플랫폼, OS 등 – 출현으로 디지털 공간은 풍부해졌다.

이제는 그 공간이 블록체인 공간으로 오르다가 메타버스로 갈아타는 중이다. 또한 블록체인 토대 위에 메타버스 공간이어야 한다는 주장도 강하다.

대한민국에서 ‘인터넷에서의 무한영토확장 만큼은 앞장서자’라고 하면서 지나온 시간은 드디어 디지털 공간’성’을 획득하는 인터넷의 역사적 전개와 발전을 이루었다. 애플을 추격하던 삼성전자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우뚝섰다. 반도체와 스마트폰이 밀어올린 세계적 성취였다. 세계 100대 시총 기업 리스트에는 대한민국 기업으로는 오직 삼성전자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제4차 산업혁명의 질풍노도 한 가운데에서 일본은 침몰하고 있는가? 대한민국은 디지털 강국을 향한 보다 강력한 운행을 하고 있는가? 우리의 ‘디지털’ 공간 건설 도전은 그 웅대한 꿈은 이루지 못하고, 결국 한반도에 갇혀, 그것도 5,000만 인구를 가진 한반도의 남쪽에 갇혀 서로 오직 ‘물리’ 공간을 차지하려는 각축전을 벌였던 것은 아니었던가?

진실로 정보화는 앞섰고, 특히 국세행정과 민원행정과 복지행정의 정보화는 대단한 성과를 거양했고, 서울시의 정보화는 국제적으로 칭송받았다. 그렇다면 그 성과가 지식사회 또는 지식기반사회에 걸맞는 정보화였던가? 정저지와(井底之蛙)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되지 않는가? 작금의 화두인 디지털 플랫폼 정부는 과연 제대로 설계될 것인가?

전세계 인터넷 사용자가 40억명을 돌파하였지만 대한민국에서 창출한 디지털 공간 중에 세계적인 공간으로 우뚝 선 게 없지 않은가? 이것도 오호통재라! 이러한 문제 의식은 바로 내가 ‘디지털 공간 설계’의 능력 부족이라는 근본적 원인을 살펴보게 만든다.

왜 있는 그대로의 정보를 그대로 담아 전송하는 (아날로그) 방식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정보를 분절하고 다시 합하여 전송하는 (디지털) 방식으로 전환하는가? 왜 인간의 것들만 전송하는 communication이 인간의 것들을 넘어서는 무수한 사물들의 것들을 전송하는 communication으로 전환하는가? 이것은 제4차 산업혁명과 어떻게 결합하고 있는가?

제4차 산업혁명이란 무엇인가? AI, 플랫폼, 사물인터넷, 3D프린터, 드론, 자율주행차, 비행(자율)자동차, 자동화공장, 기계와 기계의 소통, 가상현실, 탈중앙화와 블록체인, 주문생산, 기계학습, 원격조종, 원격치료, 로봇, 양자컴퓨터, 나노산업, 신재료공학, 스마트시티와 신도시공학, 공유경제 등은 제4차 산업혁명의 다양한 응용과 적용의 모습을 보여준다.

도대체 제4차 산업혁명으로 통칭되는 변화에서 ‘디지털 공간’은 왜 새로운 산업혁명의 동인이자 결과물로 부각되고 있는가? 아래위로 좌우로 다채롭고 수많은 디지털 공간들을 추구하는 제4차 산업혁명의 과정에서 과연 인간의 의미는 어떻게 취급되고 모색되는가?

나는 종종 ‘디지털 기술’이 ‘바이오 기술’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는 생각을 한다. 공통의 개념은 바로 재현(representation)이다. 맥락에 따라서는 복원 또는 표상으로도 사용되는 개념이지만 재현은 철학적 인문학적으로 가장 다의적인 개념 중의 하나이고 기저에는 환원주의가 섞여있다. 재현은 기독교철학이 지배하는 중세 기간 내내 신의 구현을 대표하는 개념이었고, 근대의 인간 주체의 철학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모든 것을 재창조하는 의미를 지닌 개념이었다.

그럼 ‘디지털’이 횡행하는 현대에는 인간은 무엇을 재현하려는 욕망으로 가득찼는가? 특히 물리공간과 인간으로부터 독립된 디지털 공간은 무엇을 재현하려 하고, 그 재현의 가장 근본 요소는 무엇인가? 소위 메타버스는 어떤 유형의 디지털 공간인가? 《디지털 공간 설계의 기초 요소》를 이제야 본격적으로 거론할 수 있게 되었다. 통신의 역사이든 인터넷의 역사이든, 기술 중심의 설명이든 심리적 SF 공간적 설명이든 기존의 그 어떤 방식의 접근방법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논변들의 궤와는 다르게 나는 이렇게 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것이다.

전편까지의 6편의 연재글에서 자세히 설명한 디지털 공간론과 그 3가지 원리를 바탕에 놓고 이제 《디지털 공간 설계 기초》를 어찌 논하는 것이 좋을까? 바로 앞에서 던진 여러가지 질문들, 특히 디지털 공간에서의 인간의 의미 변화 또는 디지털 공간을 통한 재현의 추구 이유 등을 묻는 질문들에 대한 답변의 단서를 제시하는 일이기도 하다.

디지털 공간론의 관점에서 디지털 공간에 접속되는 모든 단말디바이스는, 그것이 스마트폰이든, 스마트워치든. 노트북이든, PC든 아니면 IoT 단말 디바이스든, 연결 자동차(connected vehicles)든, 원격의료기기든, 기상관측위성이든, 우주망원경이든 그리고 그 단말디바이스 내에 설치된 HW로서의 기기든 SW로서의 앱이든 전부 센서라는 선언을 할 수 있겠다.

따라서 모든 디지털 공간은 2015년 제4차 산업혁명의 선언과 함께, 5G 이동통신의 등장에 의해 유무선의 통신네트워크가 All-IP로 전환함과 함께 전통적인 인간 중심의 communication의 시대를 넘어 그야말로 모든 것의 communication의 시대로 전환하기 시작했다고 선언을 할 수 있겠다.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스마트폰에는 이미지 센서, 터치 센서, 마이크로폰, GPS, 모션 센서, 지자기(geomagnetic) 센서, 조도 센서, 지문 센서, 심박수 센서 등 약 20~30개 이상의 센서가 탑재되고 있다.

자동차에는 약 30여종 200여개의 센서가 사용되고 있다. 최근 자동차의 미래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는 CASE(Connected, Autonomous, Shared, Electric)와 같은 트렌드는 센서의 사용을 증대시키고 있다. 내연기관 자동차도 파워트레인에서부터 섀시, 안전, 편의장치, 배기장치, 텔레매틱스와 같은 다양한 곳에 센서를 폭넓게 사용하고 있다. 현재 자동차에 사용되고 있는 센서로는 위치 센서, 속도 센서, 압력 센서, 관성 센서, 산소 센서, 온도 센서, 질소산화물 센서, 이미지 센서 등이 주로 사용되고 있다.

무수한 센서의 사용은 다른 무수한 센서의 사용을 불가피하게 만들고 있다. 센서는 데이터가 들고나가는 장치다. 센서라는 장치에서도 HW에 불가결한 SW, 나아가 SW-defined HW 시대에는 HW와 SW의 디커플링(decoupling)도 기술경쟁력의 요소가 되고 있다는 것을 읽어내야 한다. 디지털 공간은 데이터를 존재의 근거이자 에너지로 삼는 센서 네트워크 나아가 센서 공간이라는 본질적인 속성을 가진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단말디바이스를 통해 데이터의 무한한 추출과 공급을 본질적 속성으로 하는 디지털 공간 시대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신 글로벌 전략’으로서의 ‘디지털 공간 설계’는 이 지점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어떤 제품과 서비스라 하더라도 가능한한 ‘디지털 공간’에 연결되어야 하고, 그 제품과 서비스에다가 ‘디지털 공간’이 동시에 제공되어야 하고, 데이터는 ‘디지털 공간’의 에너지로 취급되어야 하고, 데이터를 지배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앞의 글들에서 제시한 디지털 ‘신뢰’ 공간에 관한 여러가지의 과제들의 해법을 구체적으로 모색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도 센서의 타깃이 되고, 인간 자체가 센서가 되는 ‘데이터 생산물로서 인간’도 ‘디지털 공간’에서 이제 서서히 물화(Reification, 物化)되고 있는 시대로 돌입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IoT (Internet of Things)에서 인간도 예외가 아니었고 바로 thing이었구나! All-IP로 전환한 5G 네트워크도 인간의 communication을 위한 위한 것이 아니라 B2B 또는 thing-to-thing 교신을 위한 것이었구나! 제4차 산업혁명의 과정에서 피를 흘리는 일은 없어도 인간은 디지털화를 통해 스스로를 완전한 존재를 추구하면서도 스스로 물화(Reification, 物化)를 자초하는 모순을 야기하고 있는 것이구나! 아니면 번영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는 세계인과 세계의 것을 아우르는 디지털 공간도, IoT라는 이름으로 디지털 공간물을 연결하여 담는 디지털 공간도 제대로 만들어본 적이 있는가? OCF (Open Connectivity Foundation)이든 Matter (formerly Project Connected Home over IP – CHIP)이든 이들 표준화 포럼에서의 좌장 활동을 국내 대기업의 임원이 해본들 그 표준의 함의도 모르고, 그 표준에 의한 비즈니스 생태계 전략과 그것의 실행 계획도 제대로 세우지 않고, 이를 디지털 공간이라는 전략적 범주로 확장하지 않는 것을 어찌 지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MSF (Metaverse Standards Forum)에서는 어떤 지적을 받게 될 것인가? 이렇게 이 글 ≪디지털 공간 설계 기초 (1)≫을 마무리 한다.

(2022년 7월 5일)

/디지털신뢰공간 아키텍트 황철증 디지털신뢰공간연구소 소장

서울대 법대(학사) 및 행정대학원(석사), 미국 콜럼비아 법대 (석사), 고려대 정경대학원(박사)을 졸업했습니다.

행정고시 29회로 1986년 중앙공무원교육원과 아시안게임조직위원회에서 단기 훈련을 거친 후 정보통신부에서 공직을 시작하였습니다.

BH, 국무총리실, 국정원(사이버안전센터), NIA 등에서도 근무를 한 바 있으나 주로 정보통신부에서 잔뼈가 굵었습니다. 방송통신위원회를 끝으로 26년간의 공직을 마친 후 사회의 한 구석에서 꼼지락 거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온갖 분야의 독서와 사색으로 삶을 붙들고 있으면서, 일찌기 담당한 인터넷 정책에 관한 주제에도 여전히 많은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소위 디지털(인터넷) 아키텍처와 디지털(인터넷) 철학자로 스스로를 부르며 현대의 기술문명 역사의 흐름을 조망하는 것을 즐깁니다.

한편으로 이병주 소설가, 박이문 철학자, 최제우 동학창시자, 리처드 도킨스 진화생물학자, 움베르토 에코 기호학자 등 훌륭한 학자와 문인에게 지적 의식을 의탁하고 사는 자입니다.

이번 연재글의 게재로 IT기자클럽의 디지털문명 칼럼니스트로 소박한 의무를 시작하는 셈입니다.

연락처는 newdhjj@gmail.com

Posted in종합

[스토리텔러]마이너 필링스 저자, 캐시 박 홍

1976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미국의 이민 금지가 풀린 직후인 1965년 펜실베이니아주 이리(Erie) 외곽으로 이민했다가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나무 한 그루 없이 온통 공사장인 로스앤젤레스의 신개발 지역에서 유년을 보낸 그는, 집 안에서 한국어로 말했기 때문에 입학할 때까지 영어를 거의 몰랐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에 겪은 ‘이질적 언어 환경, 이중 언어’는 역설적으로 ‘영어를 두드리게’ 만들고, ‘갈등하는 의식에 가장 근접한’ 그만의 어휘소 목록을 쌓게 한 동력이 되었다.애초에는 미술 작업에 더 관심이 있었지만 진보적인 성향의 예술 대학으로 유명한 오벌린 대학교에 입학한 뒤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후 아이오와 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시작을 이어가면서 예술 비평 활동을 병행한다.

첫 시집 『몸을 번역하기』(Translating Mo’um, 2002)로 푸시카트상을 수상했고, 두 번째 시집 『댄스 댄스 레볼루션』(Dance Dance Revolution, 2008)이 에이드리언 리치의 심사로 바너드 여성 시인상을 수상했다. 이어 시집 『제국의 엔진』(Engine Empire, 2012)을 출간했다.

윈덤캠벨문학상, 구겐하임 펠로십, 국립예술기금 펠로십을 수상했고, 『뉴욕 타임스』, 『파리 리뷰』, 『맥스위니스』, 『보스턴 리뷰』 등 여러 매체에 시를 발표한다. 『뉴 리퍼블릭』에서 시 담당 편집자로 일하며, 럿거스 대학교 뉴어크캠퍼스 예술대학원 석사과정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20년 봄에 출간한 『마이너 필링스』 영어판은 『뉴욕 타임스』 논픽션 분야 베스트셀러뿐 아니라 각종 유력지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퓰리처상 파이널리스트, 앤드루 카네기상 우수상 후보에 올랐으며, 전미도서비평가협회(자서전 부문)을 수상했다

저서소개_마이너 필링스

“지금 가장 영향력 있는 한국계 미국 작가

캐시 박 홍의 자전적 에세이”

차별받는다고 느끼는 건 내 피해망상일까?

캐시 박 홍은 한국계 미국 이민자 2세대로, 미국에서 나고 자라 교육받고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캐시는 어느 순간 문학인으로서 자꾸만 좌절당하고 삭제당하는 현실이 ‘작품이 부족해서가 아닌 것 같다’는 의심을 품게 된다. 아시아인으로서 살아온 경험을 시로 쓰면 “또 인종 얘기”냐며 혹평받고, 자본주의, 세계화, 환경처럼 ‘진짜 중요한 얘기’를 다루면 그건 ‘비백인’에겐 어울리지 않는 소재라며 다시금 ‘인종 이야기’를 하라고 권유받는 모순적인 현실이 선명해진 것이다.

의심은 분석으로, 분석은 분노로, 분노는 제자리 찾기로 이어지는데, 이 책은 바로 그 첫 결과물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보이지 않는 차별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그는 ‘나는 누구일까?’라는 물음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이 작업이 간단치가 않다. 그는 자신의 평생뿐만 아니라 수백 년의 역사에 묻혀 있던 사건을 파고 들어야 한다.

“왜 이래야만 하지? 내가 속한 사회에 나를 설명하기 위해, 나는 왜 이토록 어려운 길을 택해야만 하지?”

나는 왜, 백인이 아니란 말인가

캐시는 이민 1세대가 미국에서 겪는 고통은 인종차별보단 고향을 떠나왔다는 뿌리 뽑힘에 있다고 생각한다. 애당초 자신을 한국인이라 여기기 때문에 한인 타운을 제2의 고향쯤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2세대는 다르다. 미국에서 나고 영어를 쓰며 자라 교육받고 일하는 미국인이지만, 어느 누구도 미국인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데에서 고통이 시작된다. 1세대는 차별의 이유가 ‘미국인이 아니어서’에 있다고 여겼다면, 2세대는 ‘백인이 아니어서’임을 너무나 뼈저리게 감각한 세대다. 이 책은 말하자면, 영화 「미나리」 속 이민 2세대, 바로 ‘데이비드’의 이야기이다.

나를 만들어온 ‘감정들’ 파헤치기

아시아인이어서, 여성이어서 당한 차별의 감정들을 결산하다

‘마이너 필링스’(minor feelings)는 직역하면 사소한 감정이겠지만, ‘마이너리티’의 사회적 맥락과 깊게 체결돼 있으니 ‘소수적 감정’으로 옮길 수 있다. 어쩌면 ‘소수자’로 분리되고 지목된 사람들이 안고 사는 불안과 짜증, 수치심과 우울감은, 음악용어를 빌리자면 단조(minor)의 감정이기도 하다. 캐시는 이 책을 일곱 개 장으로 쪼개고 글을 조각내 썼다. 통으로 쓰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주제 사라구마의 『눈 먼 자들의 도시』처럼 눈을 감아도 백색의 시선이 끈질기게 달라붙는 미국 사회에서 캐시가 아시아인 여성으로 살아온 시간은 일관되고 정연하게 서술될 수 없는 것이었다. 외면, 삭제, 침묵, 공허한 낙관이 뒤엉킨 인종차별은 한 개인의 삶 깊숙이 들어와 “놀랍도록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며, 삶의 모든 순간을 지배하는 ‘감정들’로 박혀 든다.

두려움, 슬픔, 수치심, 강박, 무기력, 짜증의 ‘마이너한 감정들’은 개인의 평정을 무너뜨리고 끝없이 좌절하게 한다. 그것이 마침내 외부로 표출되면 적대, 배은망덕, 시샘, 공격성으로 해석되어 급기야 백인들은 “도가 지나치다”며 캐시의 경험과 감정을 폄하한다.

내가 받은 상처뿐만 아니라

내가 남에게 준 상처에 관해서도 쓸 수 있을까?

백인은 아시아인이 ‘백인의 다음 차례’라면서, 성실하고 근면하며 권리를 내세우거나 욕심 부리지 않는다며 아시아인을 칭찬해왔다, 이민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물론 아시아인이 기업이나 정치, 문학계 최고 자리에 앉는 일은 거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아시아인은 어떤 정체성을 갖게 될까? 어떤 정체성을 인정받을까?

“너희들은 여기 있으면 안 돼, 빨리 나와! 이제는 저것들이 사방에 퍼졌구만.” 동네 공용 수영장에서 노는 아시안 아이들에게 한 백인이 다가와 소리치며 한 말이다. “난 절대 중국인한테는 문 안 잡아줘!” 백인 남성이 쇼핑몰 로비 문에서 황급히 손을 떼며 아이들에게 내뱉은 말이다.

저것 아니면 중국인이다. 코로나 이후엔 바이러스. 백인은 아시아계 개인을 고유하게 대해야 할 필요성을 아예 느끼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아시아인’은 어떤 의미일까? 아시아인들 사이에 퍼져 있는 흑인에 대한 혐오에 대해서는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캐시는 이 혼란을 인정하고 생각하길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일에 대해 내가 어떻게 쓸 수 있을까? 내가 받은 상처뿐만 아니라 내가 남에게 준 상처에 관해서도 쓸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을까? 죄책감은 상대에게 용서를 요구하고 따라서 이기적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내가 속한 사회가 나를 모른 척한다면,

내가 그 사회를 설명해주겠다

캐시는 마지막에 “보편성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다”고 일갈하며 “차단된 상태”에 처한 “비백인”을 호명한다. “과거에 식민 지배를 받았던 자, 조상이 이미 멸망을 겪은 아메리카 원주민 같은 생존자, 서구 제국이 초래한 기후 변화 때문에 악화된 가뭄과 홍수 또는 집단 폭력으로부터 피신한, 현재 멸망을 겪고 있는 이주자와 난민”이다.

무엇이 ‘아니라는’ 이유로 존재의 삭제 또는 축소를 경험하는 수많은 소수자들이 수없다.

“네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라는 질문 앞에 작아지는 여성들,

“하필 설 연휴에 지하철에서 시위를 해가지고”라는 부당한 비난을 당하는 장애 인권 운동가들,

“성소수자 축제를 안 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고민하겠다는 정치인들의 말에서 한순간 공공의 장소에서 추방당한 성소수자들.

그들, 아니 우리 안에서 ‘소수적 감정’이 자라고 있다.

얼마만한 크기일까? 어떤 모양일까? 『마이너 필링스』를 ‘이민자 2세대’의 자전적인 글로만 협소하게 본다면, 우리에게 던지는 이 질문을 놓치고 만다.

지금 이 시대의 변화와 퇴행 모두를 관통하는 개념인 정체성과 교차성, 그리고 감정이 개인과 역사, 개인과 정치, 개인과 문학 사이에서 어떻게 얽히고설키는지 이 책이 보여준다.

마티의 앳(at)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앳 시리즈는 정체성 탐구의 복판을 관통하는 질문 ‘이 세계에서 내 위치는 어디일까’에 답해가는 작업이자, 개인의 몸과 감정을 통해 지배 구조를 재인식하고 비평하는 ‘자기 이론’(AutoTheory)적 시도입니다.

여성/남성, 피억압자/억압자, 빈자/부자, 장애인/비장애인, 성소수자/이성애자 등의 대립항에 갇혀 있지 않으려는 몸부림, 교차하는 정체성의 스펙트럼 속에서 쉬지 않고 움직이는 역동, 그리고 자신의 지식과 경험이 부분적임을 알고 나와 타인의 위치와 연결될 때 종합적인 성찰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신념을 엮고자 합니다.

권력 바깥에 있는 사람들, 침묵의 자리를 거부하는 사람들, 기득권에서 기꺼이 탈주한 사람들과 책이라는 장소에서 함께하고자 합니다.

Posted in강연후기

김재원 ‘세상에서가장짧은한국사’

저자 김재원은 한국에서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에서 시작했습니다.

2022년 현재 박사학위를 가진 많은 전문연구자가 실질적으로 실업상태입니다. 그렇다고 역사가 다른 인문학처럼 아예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분야는 아닙니다. TV에서는 역사예능이나 사극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저자는 한국인들은 언제나 지식에 대해 끝없이 갈망하는 존재, 책으로도 모자라 TV에서도 지식을 찾는다고 진단합니다. 이에 따라 교육자와 예능인이 단단히 결합한 TV라는 시장이 만들어집니다.

저자는 1년 넘게 쪽방에 틀어박혀 육개장 사발면과 김혜자 도시락만 사먹던대학원 석사과정 때를 떠 올립니다. TV만 틀면 예능 프로그램에 ‘역사’가 나오는 바깥세상만 역사학열풍이던 그 시절을….

저자 김재원은 그 현상을 ‘공허한 열광’, ‘허무한 비판이라고 느꼈다고 합니다. 이제 역사학이 진정으로 시장 속에서 ‘유통’되기 위한 방법을 찾고자 했습니다. 엘리트주의에 쩌든, 고고한 척 자존심만 내세우지 말자고 결심합니다. 가난한 비판자가 아니라 직접 생산자로서 역사을 유통하기로 결심합니다.

마침내 기존 역사해석과 결이 다른 [세상에서 가장 짧은 한국사]가 출간되었습니다.

자유로워진 역사, 앞으로 더 자유로워질 역사를 기대하며… 추천드립니다.

김재원 책의 꼭지들을 열렬히 논쟁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생각해봅니다.

Posted in서촌소식

[서촌의 미래] ⑬ “실핏줄 골목길 주민이 살아야 동네가 산다”

소설 ‘영원한 유산’(문학동네)의 심윤경 작가는 서울 종로구 서촌에서만 사십 년을 산 토박이다. 10여 년간 삶이 흘러가는 대로 잠시 서촌을 떠났지만, 연어가 귀소하듯이 서촌으로 회귀했다. 어릴 적 온종일 헤매도 늘 새로운 길과 조우하게 되는 서촌의 촘촘한 골목길은 심 작가에게 마치 실핏줄과도 같은 설렘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유산’에서 심 작가는 과거 친일파 윤덕영의 별장이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한국통일부흥위원단의 청사로 쓰인 ‘벽수산장’을 중심으로 “이념의 밀물과 썰물 속에서 정직과 존엄을 지키려 애썼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등장인물은 허구지만 실제 역사적 배경과 장소를 담은 소설을 통해 서촌을 조명한 심 작가. 그런 그를 5월27일 서촌의 어느 카페에서 마주했다.

Posted in서촌소식

[서촌의 미래] ⑭ “경복궁 후원, 경무대, 청와대 변천의 역사 소개할 공간 조성해야”

서울 종로구 경복궁 인근의 서촌이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중인(中人)으로 붐볐던 지역에 관광객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유동 인구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길가에는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줄이 길게 늘어섰다. 옛 왕의 거처인 경복궁에 이어 최근 전직 대통령들이 머물던 청와대까지 민간에 개방되면서부터 시작된 변화다.

서촌은 1963년 박정희 정부 당시 여러 규제로 쇠퇴했다가 2010년 한옥밀집지구로 지정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던 경험이 있다. 그런 서촌이 청와대와 연계된 새로운 관광 코스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시대의 최고 권력자가 거주했던 경복궁과 청와대 그리고 둘을 잇는 서촌. 8일 아시아경제는 서촌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곳의 사연에 대해 들어봤다.

Posted in강연후기종합

유인선 ‘베트남과 그이웃중국’

유인선 교수의 강연은 우리와 유사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를 재조명했습니다.

베트남 역사의 특징은 북거(北拒)와 남진(南進) 입니다. 곧 북으로 중국의 침입에 저항하면서, 영토를 남쪽으로 확대하는 과정입니다. 베트남은 기원전 2세기 말 한나라에 의해 남월(南越)이 멸망한 후 1000년간 중국 지배를 받았습니다. 독립 후에도 송이 2번, 원이 3번, 명 1번, 청 1번의 침입이 있었습니다. 19세기 말 프랑스 식민지가 될 때까지, 베트남은 중국에 조공을 바치면서도 인도차이나반도의 맹주로 행세합니다.

베트남인은 중국에 대해 뿌리 깊은 대등의식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20세기 사회주의에 혁명를 이루는 과정에서도 중국과는 서로 다른 견해가 있었습니다. 혁명기 호찌민과 하노이 정부는 중국의 원조를 받으면서도 한편으로 서로 어긋나는 긴장의 시간도 제법 있었습니다. 프랑스·미국과의 전쟁 속에서도 두나라는 협력과 갈등을 거듭하며 관계를 지속해왔습니다.

베트남과 우리는 유사한 지정학적 정치적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와는 살짝 다른 베트남의 태도 혹은 외교의 차이가 무엇에서 연유될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또한 베트남에서 사업체를 가지고 계신 참석자는 경제적 혹은 정치적 이슈가 발생했을 때 중국 보다 베트남이 보다 합리적으로 처리한다는 경험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이러한 중국과 베트남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기후차가 아닐까 하는 가설, 프랑스 식민지였기 때문이라는 가설까지 제기되었습니다. 무척이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강연이었습니다.

Posted in서촌소식

[서촌의 미래] ⑫”서촌 관리, 고유 특색·균형개발 조화 이뤄야 “-서울시 안중욱 한옥정책과장

경복궁 서문과 인왕산 사이에 자리한 서촌은 역사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동네다. 골목을 돌아다니다보면 조선시대 문인부터 근대 예술가를 거쳐 현대 작가들의 예술공방까지, 차곡차곡 쌓인 시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서울시는 이러한 서촌만의 특색을 유지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체계적으로 관리해왔다. 서촌 고유의 풍경을 보전하면서도 조화로운 개발을 유도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서촌은 그동안 어떻게 관리돼왔고, 청와대 개방 이후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될까. 지난 25일 안중욱 서울시 한옥정책과장을 만나 서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Posted in회원 칼럼

[디지털 신 글로벌 전략] ⑥ – 디지털 공간론 3가지원리 (2)

ㅡ “미국에서 공부한 경제학자들은 많은데 왜 노벨경제학상을 못 받나?”하는 도발적 질문을 미국 유학파 조순 교수에게 물었다. 그러자 “모범적인 경제에서 모범적인 이론이 나온다. 경제구조가 왜곡되고 경제정책이 교과서에서 벗어나 있는데 어찌 좋은 이론가가 나오기를 바라느냐?”는 식으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 인용문은 더칼럼니스트에 게재된 《하늘 나라에는 고비용 저효율의 문제가 없을까》라는 차현진 한국은행 자문역의 글에 있다. 디지털 공간 설계 이론가가 부족한 이유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고 조순 박사님의 말씀을 새겨보면, 디지털 공간 설계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상품과 서비스의 경쟁력이 약화될 수 밖에 없고, 이는 국가경쟁력의 약화로 이어지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이 연재글의 핵심이다. 과정(過程)의 산업이 가지는 특징이다.

제5편에서 언급한 테슬라(Tesla)의 사례를 염두에 둔다면, 최근 일론 머스크(Elon Musk)가 ‘현대자동차그룹이 잘하고 있다’라는 칭찬은 그다지 유쾌하게 들리지 않는다. 현대자동차그룹과 테슬라와의 경쟁력의 차이는 결국 그들 각각의 디지털 공간 구축 능력의 차이이고 이는 먹느냐 먹히느냐의 기로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말해둔다. 그리고 이 사례만으로도 이 연재글의 목적을 충분히 대변하고도 남는다.

나는 제4편의 글 말미에서 물리 공간의 국가 구성요소로서 ‘영토’, ‘국민’ 그리고 ‘주권’에 대응하는 디지털 공간의 3가지 원리를 ‘소극적’으로 정의를 내렸고, ‘적극적’ 의미에서의 3가지 원리는 5편에서 담지 못하고, 이번 글에서 자세하게 담는다.

디지털 공간(digital space)은 사이버 공간보다는 덜 사용되는 개념이지만, 나는 인터넷 진화의 다양한 변이들에 대한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으로 ‘디지털 공간’을 선택했다. 나는 왜 디지털 공간을 ⑴ 물리 공간으로부터의 독립, ⑵ 인간으로부터의 독립, ⑶ 물리공간과 인간의 지배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주장을 하게 되었는가?

《관점 1 ㅡ 디지털 공간은 물리 공간에 종속되는 것일뿐》

인터넷을 포함하여 디지털 공간에 관한 이슈는 물리 공간에서 발생하는 이슈의 확장판이었다. 즉 디지털 공간 이슈는 어떤 논리 전개에 기초하든 물리 공간의 이슈였고, 물리 공간의 법과 질서의 규범에 의하여 재단되고 판단되는 것으로서, 종속적 변수였지 독립적이거나 선행적 이슈로 취급되지 않았다. 인터넷 윤리 이슈도, AI 윤리 이슈, 규제 이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디지털 공간이 물리 공간과 다르다’라는 관점을 지키려면, 인간은 늘 디지털 공간에 전력(electricity)을 공급해야 하고, 표준(standard)을 만들어 적용하여야 하고, 클릭을 하지 않으면 작동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은 극히 평이하고 평범한 것이다. 더우기 디지털 공간이 국가내 안보시스템과 국가간 안보시스템의 기능성을 확보하는데 핵심적이고, 국제무역금융망에도 기간인프라이며, 글로벌 정보통신망이고, 그외에도 공적 또는 사적 활동에 지대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인데도 이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것은 현실적인 관점에서도 매우 난처한 입장일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디지털 공간의 독립적 특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 관점에서의 이슈 발굴과 문제 해결의 접근 방식은 아마도 결과적으로는 더 많은 문제를 누적적으로 키우지 않았는가 반성할 일이다. 제4차 산업혁명위원회는 바로 이 지점에서 헤매다가 그 역할을 잃었다.

우리가 아날로그와 공업 중심의 산업시대(Industrial Age)가 글로벌 정치경제체제에 남긴 책임을 묻을 수 있다면, 에너지 과잉 소비에 따른 지구존속 임계치의 돌파 가능성 때문이다. 환경오염과 기후변화 대응, 착한 자본주의, 적정기술, 중간 기술, CSR, ESG, RE100, 탈석탄, 탈원전, 재생에너지, 수소경제, 수소/전기자동차 등 다양한 대안 활동이 활발하다.

나는 공업자본주의 더 큰 문제는 “내일의 문제를 야기하는 오늘의 문제 해결” 즉, “오늘의 문제 해결이 내일의 또 다른 문제 야기”라는 문제 말이다. 오늘날의 문명사적 지구 위기는 바로 인류가 이러한 모순과 부조리의 누적을 야기하여 문명체제 위기에 처했는데, 디지털 공간에 관한 지금까지의 접근 방법도 기존의 모순과 부조리에 더 무게를 더하는 위기를 낳지 않을까하는 거시적 염려는 여전하다. 인간에 대한 믿음의 크기가 줄기 때문이다.

물리 공간의 모순과 부조리를 극복하고자 하는 새로운 디지털 공간 설계인 블록체인 공간도 그 독특성과 고유성을 인정하더라도 아직도 에너지 과잉소비를 야기하는 방식이라는 점에 그 취약성이 너무도 큰데, 다양한 디지털 공간 설계 방식은 기존 물리 공간의 문제점을 최소화하지 않으면 그 정당성을 인정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관점 2 ㅡ 디지털 공간 자체가 자율적 운행의 실체일뿐》

윌리엄 깁슨이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를 창안한 소설 “뉴로맨서”와 존 페리 발로우의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은 낭만적 레토릭으로 디지털 공간의 인식을 과잉 확장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디지털 공간에 존재하는 주체를 윌리엄 깁슨은 artificially intelligent being이라고 하고, 존 페리 발로우의 독립선언서에 등장하는 우리(We)는 당연히 ‘사이버 공간인’ 즉 ‘디지털 공간인’을 말하는데, 그는 이를 “our virtual selves”라고도 말했다.’’

AI로 인하여 디지털 공간 스스로 전력(electricity)을 찾아 흡입하고, 스스로 표준(standard)을 만들어가며, 스스로 자동 클릭이라는 자동 기제를 갖추어 스스로 살고 운영되는 특이점(singularity)을 넘어갈 것이라는 SF적인 낭만적 상상력도 디지털 공간론을 비합리적인 실체론으로 만든다.

나는 이런 두가지 관점 전부 디지털 공간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나의 목적과는 그다지 직접적인 주제와 맥락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밝힌다. 이 글에서 ‘디지털 공간’의 독립성은 ‘디지털 공간’ 개념의 다차원적 의미 확보를 위한 도구적, 방편적 개념에 한정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밝힌다.

따라서 윌리엄 깁슨과 존 페리 발로우의 아이디어의 맥락으로 나의 글을 읽는다면 그것은 오해라는 것이다. 그런 관점은 ‘강한 AI’를 넘어 ‘인공 의식’(artificial consciousness)을 상상하는 정도의 공간론으로서, 내가 감당할 수는 없는, 다른 학자들의 전문적인 탐구 영역이 되어야 한다.

내가 이 두 사람을 불러낸 것은, 또 이 글에서 존 페리 발로우의 원형인 윌리엄 깁슨을 이제야 언급하는 것은 “관점의 전환”이라는 인식체계의 전복을 우리 스스로 도모해 보자는 의도였다. 즉 디지털 공간에서 물리 공간을 바라보는 관점 또는 space-land에서 flat-land를 바라보는 관점에 굳건히 버티면서 사실은 디지털 공간 그리고 space-land 자체를 더 잘 파악하려는 의도였다.

그렇다. 나의 글은 국가와 기업을 위한 전략보고서이다.

⒜ 디지털 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한 “디지털 공간 설계 능력” 확보 방안

⒝ “개인정보보호 규제체계에 대한 틀을 재정비”하는 방안

⒞ “글로벌 데이터 플랫폼 회사와 경쟁하는 전략”

이런 제안을 구체화하는 경우 아래와 같은 과제는, 이미 제3편의 말미에서 나열하였던 것인데, 세부적인 방안으로 제안할 것들이다.

ㅡ 디지털 공간의 의인화(personification)는 공간 인식의 방해요인

ㅡ 속성으로서의 연결(connection)과 접속(access)의 의미

ㅡ IoT 디바이스가 아닌 인간이 상시 연결 상태를 유지하는 접속 디바이스의 공간 주체로서의 의미의 재검토

ㅡ 접속이라는 디지털 공간에의 출입이 야기하는 공간 주체의 정체성을 Physical Identity (PID)와 Digital Identity (DID)로 구분 소홀

ㅡ 디지털 공간과 물리 공간에서의 데이터 규범의 혼돈

ㅡ 데이터 공간으로서의 디지털 공간 이해와 디지털 경험 경제 이해 부족

ㅡ 디지털 공간에서의 최소한의 데이터 규범 요구 사항은 “기술적 요소”로서의 신뢰(trust) 구조 설계 소홀, 관련 기술경험과 인력 부족

ㅡ 디지털 공간의 ‘기술 규범’으로서의 신뢰(trust)는 DID의 도용 금지와 방지이고, PID와 DID 연계 접속 도용 금지와 방지를 지원

ㅡ 디지털 공간에 최소한의 신뢰(trust)를 담보하는 기술적 요소를 적용하여 PKI (Public Key Infrastructure) 공간 구축이 급선무

ㅡ PID로서의 생체정보 중 가장 편리한 접속 수단으로서의 성문(聲紋)에 대한 프라이버시와 개인정보보호 설계 시급

ㅡ 프라이버시(privacy)와 개인정보 그리고 관련하여 접속(access)에 영향을 미치는 글로벌 문화적 차이 그리고 결과로서의 정책 차이

ㅡ PID와 DID의 상호 독립된 공간 주체 관계 및 상호 연관된 공간 주체 관계에 대한 이해와 익명성(匿名性)과 실명성(實名性) 재검토

ㅡ PID를 증명하는 유일한 수단은 생체정보이고, 그래서 생체인증이라는 사실상 유일무이한 물리공간의 자기 증명 수단에 대한 새로운 인식

ㅡ 디지털 공간은 DID로서만 구성되어야 하고, 물리 공간의 PID를 디지털 공간의 요소로 여겼던 엄청난 오류를 교정

ㅡ 물리적 자기 증명 수단인 PID는 디지털 공간에 흘러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는 데이터 규범의 도입 검토

ㅡ 따라서 디지털 공간에 붙들려 있는 무수한 PID를 제거해야 하는 Clean Digital Space 구조로의 점진적 변경 필요

ㅡ 디지털 공간에서의 신뢰(trust) 연결을 뒷받침하는 연결 인증 (chain of authentication) 시스템의 결여

ㅡ DID는 디지털 공간에서의 연결 상태에서의 데이터 생산을 하는 모든 디바이스와 장치에 부여되는 ID로서 구성 요소의 핵심

상기의 제안과 검토 과제들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제4편에서 다룬 디지털 공간론 3가지 원리를 ‘적극적 의미’에서 추가 설명을 하려고 한다.

《디지털 공간론 제1원리》

비트(bit)로만 이뤄진 디지털 공간을 물리 공간과는 ‘독립’된 공간으로 인식한다고 하다면, 부닥치는 부담감은 어떻게 디지털 공간을 일의적으로 정의를 내릴 수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Cyberspace, amorphous, supposedly “virtual” world created by links between computers, Internet-enabled devices, servers, routers, and other components of the Internet’s infrastructure. As opposed to the Internet itself, however, cyberspace is the place produced by these links. It exists, in the perspective of some, apart from any particular nation-state.

브리타니카는 이렇게 사이버 공간을 정의한다. 디지털 공간을 일컫는 다양한 명칭들을 구별하고, 이들을 총칭하여 독립된 공간으로 설명하는 일은 브리타니카의 정의도 그런 것처럼 맹인모상격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디지털 공간을 서핑(surfing) 또는 유영(spacewalking)하며 물리 공간과 어떻게 다른 모습인지 살펴볼 일이다. 인간이 우주에 등장하면서 인간이 만든 그 수많은 개념적 공간 중에서 가장 궤를 달리하는 독특한 공간인 디지털 공간의 구조를 상세하게 설명하는 일이 공간 이해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물리적 요소인 네트워크는 ‘수평적’으로 온갖 장비와 장치와 디바이스의 유무선 연결에 의해 구성되고 확장된다. 7가지의 TCP/IP 계층, 4가지의 OSI 계층이라는 기술표준에 의하여 확장된다.

이런 ‘수평적으로’ 확대되고, ‘수직적으로’ 구성되는 양상이 이제는 공간의 모습을 띄는 것이다. 그런데 공간적 컨피규레이션을 구성하는 수많은 장치와 장비와 디바이스에는 고유한 번호 또는 이름이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물리 공간의 주체가 가지는 주민등록번호와 비슷한 것이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까? DNS (Domain Name System), IP 주소, MAC 주소, IMEI 번호, OID (object identifier) 등이 그 예이다. TCP/IP, WiFi, Cellular, ZigBee, Bluetooth, NFC, Lora, Sigfox 등 다양한 기술들도 각각의 기능을 수행한다. 소위 인터넷상에 수많은 프로젝트들은 그들 나름의 디지털 공간을 이루고 그 공간에는 수많은 기술들이 적용된다.

ㅡ IETF (Internet Engineering Task Force)

ㅡ W3C (World Wide Web Consortium)

ㅡ OMA (Open Mobile Alliance)

ㅡ IEEE (Institute of Electrical and Electronic Engineers)

ㅡ ZigBee (ZigBee Alliance) -> CSA (Connectivity Standards Alliance)

ㅡ OCF (Open Connectivity Foundation) ㅡ OASIS (Organiz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tructured Information Standards)

ㅡ OMG (Object Management Group)

ㅡ EPCglobal (Electronic Product Code Global)

이들은 디지털 공간의 기술질서 규범, 소위 표준에 틈새를 메꾸는 일들을 한다. 최근에는 MSF (Metaverse Standards Forum)도 결성되었다.

수많은 표준 기관들은 디지털 공간을 보다 개방적으로 만들면서 공간의 topological configuration을 만들어가는 활동이다. 디지털 공간에 연결되는 모든 것들의 전체의 모양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은 큰 가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인데, 이런 통찰이 없다면 이 연재글을 읽을 만한 유인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3가지를 더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상기의 디지털 공간 전체의 기술규범을 따르지 않는 데이터 이동 또는 커뮤니케이션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나의 디지털 공간을 개방체제를 목표로 설계하는 광범위한 확장을 꿈꾼다면 다양한 분야마다, 기능마다 표준을 따라야 네트워크 효과처럼 가치를 크게 키울 수가 있다. 소위 폐쇄체제를 고집하는 다양한 디지털 공간 설계 욕구는 늘 상존하고 있는 현상이다. 플랫폼 경제 현상으로도 이미 증명되었듯이 공통의 기술 규범은 광범위한 플랫폼 확장에 필수적인 선결 조건이다. 이는 물리 공간에서도 동일한 맥락에서 발생하는 현상이지 않은가?

게다가 폐쇄적 디지털 공간의 설계 ‘부실’은 개방적 디지털 공간과의 연결 고리에서 약한 취약점을 드러내고 이는 개방적 디지털 공간의 건전성과 신뢰성을 위태롭게 만드는 계기를 만든다. 이게 정보보안(information security) 이슈이다. 이런 부조리와 모순의 대안으로 강력하게 대두되는 ‘블록체인 공간’을 도입하는 움직임도 매우 흥미롭다.

둘째, 사실 나의 디지털 공간론은 공간론으로서의 선한 의미와 가치를 발휘하기도 전에 이미 현재의 사이버 공간은 너무도 많이 오염되었고 파괴된 상태이다. 사실 역사와 문명 이래로 인간과 인류가 지구와 우주에 미치는 오염과 파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급기야 화성으로 도망을 가려는 자들마저 나타나고 있으니 얼마나 무책임한 도전인가? 디지털 공간에는 ‘약한 연결고리’가 너무도 많다. 디지털 일리터러시(digital illiteracy)는 이러한 취약성을 더욱 확대하고 있다.

나의 디지털 공간론은 바로 이러한 인간과 인류의 오염으로부터 디지털 공간을 보호하고 살리는 길을 찾는 일이기도 하다. 달리말하면 물리 공간에서의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이라는 현상을 디지털 공간에서는 최소한으로 만드는 일을 하려는 것이다.

물론 과거와 현재도 오픈소스SW 운동(open-source SW movement)이나 카피레프트 운동(copyleft movement)이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블록체인(blockchain) 공간 구축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그 일이 인간적 호소와 인간의 도덕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적 언어로 자동화하고 알고리듬에 의하여 자생적으로 만들어져 디지털 공간 자체가 자율 운행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어쩌면 무모한 도전이 될 수도 있다. 이를 위한 전략적 제안이 바로 디지털 “신뢰”공간 설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셋째, 디지털 공간론이 물리 공간의 대한민국의 경제적 발전 전략의 일환뿐만이 아니라 “디지털 전쟁”의 전략적 수단으로서도 그 논의의 가치가 있음을 파악해야 한다. 세계 제1국 팍스 아메리카나를 연 미국의 세계 전략에서 정보(intelligence)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으나, 디지털 세계에서의 정보 활동은 과거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구글과 애플(Apple)과 아마존(Amazon)과 페이스북(Facebook/Meta)과 마이크로소프트(MS) 그리고 다른 글로벌 회사들은 이미 그들 고유의 디지털 공간을 확장하여왔고, 굳건히 유지하고 있고, 이들의 활동은 미합중국 정보능력 발휘에 커다란 지원군이 된 지 오래다.

인터넷이 등장하고 대중에게 개방되면서 그 정보능력은 급격히 강화되었고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대규모의 정보활동자금이 사용되고 있지 않은가?

2013년 에드워드 스노든(Edward Snowden)과 프리즘(Prism)의 노출이 던지는 시사점은 디지털 공간론이 정보기관뿐만이 아니라,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그룹 그리고 엘지전자처럼 글로벌 활동을 하는 대기업들에게 생존 전략을 새롭게 짜는 방편이라는 점이다. 이를 읽지 못하는 자들에게 “디지털 공간론”과 이에 기초한 “고객 경험론”은 쇠귀에 경읽기에 불과하다.

《디지털 공간론 제2원리》

제4편의 말미에서 디지털 공간론 제2원리로서 ‘인간’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으니 디지털 공간의 다른 주체를 상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디지털 공간을 구성하는 모든 장치들 하나하나가 ‘디지털 공간물’이라고 하자는 것이다. 사실은 이를 “디지털 공간인”이라고 했지만 인간의 냄새를 지우는 것이 낫다. 이런 장치들이 가진 고유한 identifier 또는 number 또는 address 또는 name 들이 바로 digital identity (DID)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디지털 공간의 주체는 바로 이 DID일 뿐인 것이다. 인간은 배제된다. DID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장치에 주어지는 것이다. 물리 공간에서의 인간은 주민등록번호 또는 사회보장번호 또는 운전면허번호 등을 가지지만, DID는 디지털 공간에서의 기술 번호(이름)를 가진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전편의 글에서 주장한, PID와 DID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DID를 이해하는 방식의 하나로 디지털 공간에서 가장 활발한 디지털 공간물로서 나는 감히 인간이 사용하는 단말 디바이스를 별도로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휴대폰(스마트폰), 노트북, 패드, PC, 스마트워치 등이 가장 대표적인 디지털 공간주체인 디지털 공간물이다. 인간의 사회문화적 차이를 살펴보면, 이것들이 디지털 공간에 연결된다. 인간이 디지털 공간에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굳이 연결을 말하자면 인간은 디지털 공간에 접속(access)된다. 무엇이 접속되는가? 바로 PID이다. 즉 단말 디바이스는 DID이다. 접속에 의하여 PID와 DID의 관계가 생긴다. 그런데 PID와 무관한 DID도 무수하다. 그래서 만물지능통신망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이 지점에서 개인정보보호 이슈와 프라이버시 보호 이슈와 관련된다. 다시말하면 “디지털 공간에는 개인정보가 없다.”라는 선언이 가능하다면 PID가 디지털 공간에는 전혀 없다는 말이된다. 그런데 이미 디지털 공간은 개인정보로 범벅이 되어있는데, 어찌 이런 선언을 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은 당연하지만 선언은 앞으로 원칙이 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로 PC가 personal computer로 처음 대중에게 제공될 때 “personal”이라는 표현이 가지는 무거운 함의를 파악해보자. 서구의 화장실 문화는 예를들어 도심지의 레스토랑의 화장실 이용문화를 보면 화장실 공간 자체가 한사람에 의하여 점유되는 개념이고 이는 완벽히 프라이버시를 보장한다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단말디바이스도 여러 사람과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용주체인 인간 한사람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라는 관념이다. 즉 단말디바이스가 ‘디지털 공간물’이고 이는 바로 물리 공간의 사용주체인 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이로써 특별한 지위에 있는 PID와 DID를 구분하며 연결하는 경우를 행성 판도라에서는 “아바타”라고 한 것이다. 디지털 공간에서 개인정보 보호와 프라이버시 보호와 관련되는 이슈는 어떤 사용자인 인간(person)과 결부된 현상인 것이지, 실제 디지털 공간이 만물지능통신망으로 이해하는 경우에는 인간(person)과 관련되지 않은 단말디바이스는 무수하게 많아지고 있는 것이니 이러한 양상을 보면서 디지털 공간론을 이해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최근의 쓰나미 같은 합종연횡의 파란(波瀾)이 디지털 공간에서 발생되고 펼쳐지고 있음을 읽었고 간과될 것을 우려했다. 파란은 아래와 같이 보도되었다. 그리고 나는 제5편의 연재글에서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그룹이 이 흐름에 동반하는 어떠한 일을 하고 있는지 신랄하게 물었다. 지난 5월 5일 Ron Amadeo라는 사람이 보도한 기사이다.

Apple, Google, and Microsoft want to kill the password with “Passkey” standard ㅡ The first Thursday of May is apparently “World Password Day,” and to celebrate Apple, Google, and Microsoft are launching a “joint effort” to kill the password. The major OS vendors want to “expand support for a common passwordless sign-in standard created by the FIDO Alliance and the World Wide Web Consortium.” The standard is being called either a “multi-device FIDO credential” or just a “passkey.” Instead of a long string of characters, this new scheme would have the app or website you’re logging in to push a request to your phone for authentication. From there, you’d need to unlock the phone, authenticate with some kind of pin or biometric, and then you’re on your way. This sounds like a familiar system for anyone with phone-based two-factor authentication set up, but this is a replacement for the password rather than an additional factor.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패스키는 메타버스와 같은 거대 디지털 공간을 향한 도전의 산물이다. 글로벌 메이저 3사가 협력하여 jointly 디지털 공간을 연합한다는, 미합중국처럼 “디지털 합(合)공간”을 창조하겠다는 말이다. 3사의 디지털 공간을 합치는 위력은 얼마나 강력한가?

더 큰 숨은 위력은 무엇일까? 망중립성(network neutrality)을 뛰어넘는 데이터 중립성(data neutrality)을 비수로 숨기고 있는 동안에 유럽연합의 GDPR과 같은 글로벌 개인정보 규제를 회피하거나 극복할 수 있는 획기적 방법을 패스키(Passkey)는 제공할 수 있는 디지털 공간 구조를 만드는 토대가 될 수 있지 않은가? 앞으로 두고 볼일이다. 글로벌 메이저 3사가 패스키(Passkey)를 어떻게 확장하여 사용하는지를…

여기에서 우리가 늘 간과하는 것은 “생체인증”(biometric authentication)의 함축된 의미를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디지털 공간과 생체인증은 바로 PID와 DID의 관계에 관한 이슈로서 디지털 공간 설계의 핵심적인 내용을 함축한다.

그런데 이제 FIDO1, FIDO2가 성숙한 만큼 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고 거의 유일한 필수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직도 생체인증이 얼마나 강력하고 유일할 정도의 ID 그리고 PID일 수 밖에 없는지를 상상해보기 바란다. 결과적으로 이는 디지털 공간에서 인간의 개인정보를 삭제해도(clean out) 되는, 디지털 공간에서 인간의 냄새를 지워도 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이게 핵심적인 함의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디지털 공간의 연결 단말디바이스의 신뢰성을 담보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생체인증 밖에 없는 시대를 글로벌 메이저 3사가 연합하여 열어가고 있다는 소식은 전율을 느끼게 한다. 그들은 디지털 공간 그리고 디지털 “신뢰”공간에 관한 오랜 경험과 기술을 가지고 있다. 이미 거대한 디지털 신뢰공간을 가지고 있다. 무한한 확장이 가능하다. 연합하면 그 위력이 어마어마하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다. 화려한 외장이 아니라 토대로서의 기술에 대한 준비가 탄탄한 것이다. 메타버스(metaverse)를 만들어야 ‘디지털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그 참을 수 없는 예능감이 대한민국의 디지털 산업의 추락을 야기하는 근본 원인인 것이다.

제5편의 말미에서 서술한 다음의 글을 다시 게시하여 음미토록 하면서 디지털 공간론 제2원리에 관한 설명을 일단 멈춘다.

애플, 구글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는 왜 손을 잡았을까? 손 잡은 것이 무엇일까? 그냥 새로운 디지털 기술 하나 더해지는 것일까? 이들의 협력제휴에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그룹이 끼어들 만한 비즈니스 수단과 구조를 가지고 있을까? 이로인하여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그룹은 어떤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될까? 이런 기막힌 협력제휴를 전담할 조직과 인력을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그룹은 갖고 있을까?

위의 기사에서 글로벌 메이저들의 활동과 우리의 활동의 차이를 파악해 내는 일로서도 사실 이 글의 목표는 거의 이뤄지는 셈이다. 그 차이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것이라고, 그것은 글로벌 생태계, 글로벌 플랫폼을 구축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나면 청중들은 다 떠나기 시작할 것이다. 들을 것 없고 다 아는 이야기라고 치부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제 우리는 세계 시장에서 밀려나기 시작하거나 진입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디지털 공간론 제3원리》

드디어 3번째 원리를 남겨두고 있다. 디지털 공간 주권을 어떻게 구성하여 설명할 것인가? 전술한 바와 같이 물리공간과 인간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이슈를 어찌 풀어낼 것인가? 지난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동안 물리 공간의 주권론에 관한 문헌은 부지기수로 많다. 우주에 생명의 발견이 있기 전까지야 지구 주권이라는 말은 성립되기는 어렵지만 그 대신 국가의 주권은 아주 평이한 개념이 되었다. 그런 주권 개념은 확장되어 식량 주권, 에너지 주권, 반도체 주권이라는 개념까지 확대 사용되고 있다. 그럼 디지털 공간 주권은 뭐라고 할 것인가?

당연히 주권의 행사자로서 디지털 공간물의 입장에서 살펴봐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늘 언급한 신뢰라는 개념은 바로 이 지점에서 강력한 권위를 회복하게 된다.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여기서의 신뢰는 인간의 감정과 믿음과는 관련이 없다는 점을 밝힌다. 말하자면 블록체인 공간의 의사결정 알고리즘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야기될 수 있다.

디지털 공간은 거대한 신뢰 공간이고 신뢰 기반의 네트워크 기반의 공간이다. 네트워크 엔지니어들도 이를 기술적으로 구현하는 아이디어 창출에 심혈을 기울여온 주제이다. 글로벌 표준을 따른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신뢰”를 향한 최소한의 엔지니어링의 도덕이자 의무이다. 개방적인 디지털 공간을 위한 최소한의 기술적 규범의 준수는 보다 다채로운 디지털 공간을 창출하는 지름길이 된다.

실제 ‘개방체제로서의’ 디지털 공간은 그렇기에 PKI 공간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고, 그렇게 이해하여야 하고 또 모든 디지털 공간은 이렇게 설계되어야 한다. PKI 공간은 신뢰 연결의 토대가 된다. 디지털 공간에서는 모든 기기들이 서로 인증되어 연결되는 자동화된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거대한 인증체계는 신뢰체계이고 이는 PKI 공간에서 전(全) 공간적으로 작동된다,

따라서 디지털 공간 주권은 다음과 같이 2가지로 나눠 정의될 수 있다.

(1)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모든 디지털 공간에서 연결되는 기기, 장치, 디바이스는 그리고 다양한 디지털 서비스는 정당한(신뢰기반의) 인증체계를 갖추고 있다면 모든 곳에서 모든 시간에 연결되고 접속되는 권리 또는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2)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만약 어떤 기기, 장치, 디바이스가 다른 그것들이 정당한(신뢰기반의) 인증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다면 그것들과의 연결 또는 접속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 또는 권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 인증체계는 애초부터 디폴트로 여겨졌고, 당연하다고 여겨온 것이고, 대한민국에서는 아직도 거의 아무도 이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냥 공기처럼 물처럼 여기고 있는 것같다. 디지털 공간 주권의 인증체계가 디지털 공간의 topological configuration의 기초이다. 그 인증체계는 주민등록증이 될 수도 있고, 여권이 될 수도 있는 것과 비교될 정도로 디지털 공간에서는 필수적인 것이고 더우기 원활한 유통을 보장하는 자동검역·검문소의 역할을 한다.

대한민국은 이런 “개방형 디지털 공간 인증체계”를 가져본 적이 없다. 세계인을 모두 아우르는 플랫폼이라는 디지털 공간도 사실상 운영해본 적도 없다. 다양하고 다채로운 디지털 공간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시스템 반도체(logic chip, AI chip)의 시장점유율을 유의미하게 가져본 적도 없다. 이런 부족과 결핍은 사실상 동일한 것이다. 오호통재라!!!

/디지털신뢰공간 아키텍트 황철증 디지털신뢰공간연구소 소장

서울대 법대(학사) 및 행정대학원(석사), 미국 콜럼비아 법대 (석사), 고려대 정경대학원(박사)을 졸업했습니다.

행정고시 29회로 1986년 중앙공무원교육원과 아시안게임조직위원회에서 단기 훈련을 거친 후 정보통신부에서 공직을 시작하였습니다.

BH, 국무총리실, 국정원(사이버안전센터), NIA 등에서도 근무를 한 바 있으나 주로 정보통신부에서 잔뼈가 굵었습니다. 방송통신위원회를 끝으로 26년간의 공직을 마친 후 사회의 한 구석에서 꼼지락 거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온갖 분야의 독서와 사색으로 삶을 붙들고 있으면서, 일찌기 담당한 인터넷 정책에 관한 주제에도 여전히 많은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소위 디지털(인터넷) 아키텍처와 디지털(인터넷) 철학자로 스스로를 부르며 현대의 기술문명 역사의 흐름을 조망하는 것을 즐깁니다.

한편으로 이병주 소설가, 박이문 철학자, 최제우 동학창시자, 리처드 도킨스 진화생물학자, 움베르토 에코 기호학자 등 훌륭한 학자와 문인에게 지적 의식을 의탁하고 사는 자입니다.

이번 연재글의 게재로 IT기자클럽의 디지털문명 칼럼니스트로 소박한 의무를 시작하는 셈입니다.

연락처는 newdhjj@gmail.com

Posted in오늘의역사종합

1936년 6월 30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출간

1926년 마가렛 미첼은 지병때문에 애틀랜타 저널의 기자 일을 그만 두었습니다. 할일이 없자 마가렛 미첼은 곧 불안해졌고, 두번째 남편이 선물해준 레밍톤 타자기로 미첼은 부모와 친척들, 어린 시절에 만났던 참전용사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소재로 10년 이상 소설 작업하고 있었습니다. 남북전쟁터에서 살아내야했던 팬시 오하라(Pansy O’Hara)라는 애틀랜타 미인의 이야기입니다.

1차대전에으로 약혼자를 잃고, 스페인 독감에 걸린 어머니를 위해 애틀랜타에 돌아오게 된 미셀 그녀 자신의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내가 알고 있는 좋은 사람들, 전쟁과 남부 재건 시절을 버티고 살아남은 그들의 젊은 시절 얘기를 써보기로 마음먹게 되었다’고 합니다.

새 작가를 찾기 위해 남부를 샅샅이 뒤지던 맥밀란 출판사의 편집자는 제목이 ‘내일은 또 다른 날입니다’라는 마가렛 미첼의 소설초고를 건네 받습니다. 미첼의 소설은 전쟁 이전에 빛났으나 사라져버린 남부시대를 그리워합니다. 전쟁 속에서 꿋꿋이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1936년에 소설이 출판될 때, 소설 주인공의 이름은 ‘팬지’는 ‘스칼렛’이 되었고, 작가의 이름은 ‘페기 마쉬’는에서 결혼 전 이름인 ‘마가렛 미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책제목은 더 가슴 아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바뀌었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는 애틀랜타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계속해서 미국과 전 세계에서 수백만 부 판매되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소설 중의 하나가 됩니다. 노예제 묘사에 대해 비판받기도 했지만, 마가렛 미첼은 1937년 풀리처 상을 수상했습니다.

출판될 무렵인 1936년 여름, 영화 프로젝트도 시작됩니다. 할리우드 거물 데이빗 셀즈닉(Selznick)이 영화판권으로 오만달러를 지불하고 제작을 결정했습니다. 제작과정은 고난의 연속있었습니다. 자금이 부족해진 셀즈닉은 MGM에 세계 배급권을 150만 달러에 판매하고, MGM은 남자 주인공이 될 영화배우 크라크 게이블을 빌려줍니다. 우여곡절 끝에 영화는 1939년 12월에 영화가 개봉됩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헐리리우드의 역사가 시작했습니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했을 때, 영화 역사상 최고의 흥행작이기도 합니다.

마가렛 미첼도 1939년 12월 애틀랜타에서 열린 초연에 참석했습니다. 그녀는 애틀랜타의 피치트리 스트리트를 건너던 중 과속 차량에 치여, 10년후인 1949년 사망합니다.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