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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나치협력자 추모

2020년 1월 1일 키에프에서 수백 명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횃불 행진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독일편이 되어 싸운 스테판 반데라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우크라이나 반군의 지도자였던 반데라는 나치 독일과 함께 소련 군대와 싸우면서 수천 명의 유대인과 폴란드인 등을 살해했다고 알려졌다.

우크라이나 국경 근처에 러시아가 군대를 집결하는 상황에서, 우익의 안드리 타라센코 대표는 스테판 반데라를 기억하고 추모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데라의 지지자들은 아돌프 히틀러가 우크라이나에 독립을 부여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소련군에 맞서 나치의 편에 섰다고 한다. 반데라와 다른 협력자들에 대한 존경의 표현은 2014년 우크라이나 혁명 이후 그 위상이 높아졌다.

2022년 1월 1일 토요일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열린 집회에서 횃불과 스테판 반데라의 초상화를 들고 있다. (AP Photo/Efrem Lukatsky)

우크라이나 총리, 장관, 키예프 네오나치 콘서트 참석

우크라이나의 올렉시 혼차룩 총리와 옥사나 콜리아다 보훈처 장관은 2019년 10월 네오나치 밴드의 콘서트에 참석했다. 10월 13일 우크라이나 수도에서 열린 ‘베테랑 스트롱(Veterans Strong)’ 콘서트는 극우 C14 운동의 고위 멤버인 안드리 메드베드코가 주관하고, 홀로코스트 부정 노래를 레퍼토리에 포함되었다.  C14는 반유대주의 스보보다(Svoboda) 정당에서 파생된 극단주의 정당으로, 이 정당의 지도자인 Yevhen Karas는 러시아인, 유대인 및 폴란드인을 적으로 나열했다.

올렉시 혼차루크 우크라이나 총리는 “행사를 마련한 참전용사들의 문제라고”하고 “콘서트 자체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서방 단체 들은 아르센 아바코프 내무장관과 같은 우크라이나 고위 관리들이 네오나치 아조프 운동과 같은 폭력적인 극우 단체와 연계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명백히 반유대주의 정당은 대부분 의회에서 배제된 반면, 민족주의 민병대와 조직은 대부분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성장하도록 허용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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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빌리의 노래

힐빌리는 스코틀랜드에서 북아이랜드로 이주했다가, 다시 미국 애팔래치아 산맥 산골 지역에 정착한 사람들을 뜻한다. 미국의 백인 빈곤층(Poor White)를 상징하는 용어다. 미국인에게 힐빌리는 도시생활을 거부하고 낙후 지역에 살면서 독립을 추구하는 백인 이미지와 가난하고 무식하고 완고한 ‘꼴통 백인’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한다.

스스로를 힐빌리로 자처하는 밴스는 그 러스트벨트에 속하는 오하이오의 철강 도시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곳은 일자리와 희망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사라져가는 동네였다. 밴스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모르는 사람이나 다름없는 남자와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 뻔한 여자에게서 버림받은 자식’으로 태어나고 자랐다. 엄마는 거의 밴스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약물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약물 중독에 빠져 끊임없이 정신적·신체적 폭력을 휘둘렀던 엄마와 돈 때문에 양육권을 버린 아빠, 엄마 곁을 스쳐간 수많은 아버지 후보자들 때문에 어린 밴스는 늘 불안과 우울에 시달려야 했다.친척들까지 포함해도 집안에서 대학에 진학한 사람은 거의 없다. 통계적으로 그들의 미래는 비참하다. 운이 좋으면 수급자 신세를 면하는 정도고 운이 나쁘면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다.

밴스는 기억 저편의 과거를 고통스럽고 처절했던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다. ‘무엇을 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것 같은 느낌’에 대해서, 나아가 무관심 속에 숨겨졌던 사회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그는 상처로 고통 받고 있는 힐빌리들의 문화를 적나라하게 폭로한 배신자로 불릴 위험을 각오해야 했다.

밴스는 그가 ‘힐빌리 문화’로부터 천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벗어나는 과정을 그린다. 그것은 외손주 남매를 키워준 할머니가 집안의 버팀목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제정신이 아닌 엄마를 떠나 할모라 부른 할머니의 곁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그의 친구들이 ‘학습된 무기력’에 빠져 일찌감치 미래를 포기해버린 반면, 밴스는 매일매일 공부하라는 할모때문에 포기하지 않았다. 해병대에 자원한 것은 그의 인생을 바꾼 커다란 분기점이었다. 그는 해병대 생활을 통해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목표의식을 갖게 됐고, 노력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다. 마침내 오하이오 주립대학을 마친 후에는 예일대 로스쿨에 입학할 수 있었다.

얼핏 보기에 가난과 역경을 딛고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성공기 같다. 그런데 실제 내용은 백인 빈곤층을 오랜 세월동안 관찰한 것을 날 것 그대로 기록한 인류학 조사 보고서같다. 힐빌리들은 1930년대 대공황을 겪기는 했지만 1970년대 까지는 그런대로 먹고 살만했던 것 같다. 정착초기에는 광산에서 일하면서 가족을 부양했고, 공황이후 철강, 자동차 산업 중심 도시로 이주해서 생계를 꾸렸다.

그런 힐비리의 세상이 바뀐 것은 미국내 제조업의 쇠락때문이다. 미국 제철업이 일본, 한국 등 새로운 국가에 밀리면서 일자리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정부 보조를 받는 실직자들이 미들타운에서 크게 늘었다. 밴스의 할머니는 백인 빈곤층중 평생 일하지 않으면서 푸드스탬프로 고기와 술을 사먹고, 마약에 빠진 이웃들을 경멸했고, 자신의 세금을 그런 곳에 쓰는 정부를 힐난했다. 밴스 역시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이른바 ‘복지의 여왕’에게 반감을 갖기 시작했다. 힐빌리는 육체노동에 종사했기에 오랜동안 민주당을 지지했다. 하지만 일자리가 줄어들고 동시에 복지에 연명하는 빈곤층의 증가를 보면서 공화당 지지로 돌아섰다. 공화당의 이념을 지지하기 보다 민주당에 대한 실망이 정치노선 선회의 원인이었다.

힐빌리는 특히 오바마와 같이 도회풍의 민주당 지도자와 자신들의 일치시키지 못했다. 완전히 다른 세계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한다고 위선을 떠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밴스는 할머니의 정치적 이중성을 힐빌리의 ‘리얼리티’라고 본다. 즉 할머니는 제철소가 문을 닫고 일자리가 없어지는 현상에 대해 정부가 책임을 있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국가가 세금을 일하지 않는 자에게 사용하면서 사회를 망치고 있다고 정부를 비난한다.

미국의 백인이 다 같은 백인이 아니다. 우연하게 산골에 정착한 백인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다른 동네 이야기처럼 여기면서 150여년을 살았고, 21세기에도 여전히 희망없는 고통의 삶을 살고 있다. 지식인들이 복지 제도 논쟁에 집중하는 동안 문화적으로 소외된 집단들은 정책과 비전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좌절감과 분노를 배설할 통로로 정치를 소비하고 있다. 자연스럽게도 최하층 백인들이 분노하면서 뭉쳐서 도널드 트럼프를 세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가족과 복지, 일자리와 교육, 정치와 문화, 이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 속에서 개인과 사회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고,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그는 묻고 있다.

힐빌리들이 겪는 불운한 인생에 이들의 책임이 얼마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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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연구를 개척한 한영우 선생님을 그리며…

한영우 선생님은 올해 향년 85세로 별세했습니다. 그는 1967년 서울대 교수로 임명되어, 2003년 은퇴후에 오히려 더 활발히 저술을 했습니다. 정도전부터 시작한 그의 인간탐구는 허균과 서경덕까지 계속됩니다. 그는 학문의 화두가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대 거의 모든 국사학전공자의 화두이기도 했습니다. 한 선생님은 특히 조선에 집중된 식민사관을 실증적연구로 새로 쓰고자 했습니다. 예를 들면 과거 급제자 만오천명을 분석해, 조선은 소수 가문이 독점한 폐쇄적 사회가 아니었음을 밝힙니다. 조선시대 과거는 출세의 사다리로 작동했습니다. 그는 유신 체제시절 발행된 국정교과서 집필에 참여한 경험에 기반해,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국정 역사교과서’에 대해 우려와 반대의 뜻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오래된 옛시절, 한선생님은 저의 석사논문의 지도교수였습니다. 경제사에 관심이 있었고, 재벌의 역사에 관해 석사논문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 현대사를 전공한 교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선생님이 흔괘히 지도교수가 되어주셨습니다. 매우 뒤늦게 ‘선생님, 고맙습니다’ 맘속으로 이야기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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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1) 청와대앞 무궁화동산

무궁화 동산에 들어서 첫번째 장소가 궁정동 안가가 있던 자리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무궁화동산에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비밀이 하나 숨어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돌아가신 장소가 은밀하게 표시되어 있는 것이다. 무궁화동산 서쪽 출입구로 들어서면 낮은 자연석 성곽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끊어진 곳이 보인다. 그 앞에는 가지가 멋있게 굽은 소나무가 한 그루 있다. 바로 이곳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된 곳이다. 이런 표시를 해놓을 생각을 한 사람은, 무궁화동산 조경사업을 맡았던 이승률(李承律) 반도환경개발 회장이었다. 이 회장의 회고에 의하면 초록색으로 칠해진 4번이 시해장소이다.

다음을 클릭하시면 반도환경개발 회장의 회고를 읽을 수 있습니다.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609100041

그 다음은 청음 김상헌 시비 앞에 섰다. 병자호란 때 싸우자고 한 원칙론자 김상헌(척화斥和)과 항복하자고 한 최명길(주화主和) 이야기는 유명하다. “항복서를 쓰는 사람이 있다면 찢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며 찢어진 항복서를 주웠다는 최명길 이야기가 가슴에 닿았다. “끓는 물도 얼음도 다 같은 물이요.”라는 말로 나라를 향한 두 사람의 마음을 표현했다. 두 사람이 청 파병을 반대한 이야기이며 둘 다 청나라 옥에 갇혔을 때 서로 진심을 확인했다고 한다.

주자학과 양명학의 학문 성격이 두 사람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주자학은 현실에서 대의 명분과 당위를 말하는 원칙론이고 양명학은 현실 상황과 주체가 합치되는 실리론이라 하겠다. 최명길 스승 신흠(申欽, 1566~1628)은 주역에 능통하여 불변하는 원칙보다는 변화하는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최명길은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되돌아 온 환향녀에 대한 차별에 반대했다. 개인 잘못이 아닌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 환향녀를 내치면 안 된다고 했다. 예(禮)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라 용납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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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HM, 영원히 기억될 기억상실증 환자

                                          

헨리 몰레이슨(1926년~2008년)은 뇌전증 치료를 위해 측두엽 절제술을 받은 후, 새로운 기억 형성을 못하게 된 환자이다. 신분을 감추기 위해 HM이라는 약자로만 불려졌던 그는 50여년에 걸쳐 기억 형성에 관한 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사후에도 뇌 조직과 기능에 대한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헨리는 뇌전증 환자로, 발작 증상은 9살 때 자전거 사고로 머리에 충격을 받은 후 시작되었다.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16살 때는 하루에 10차례 이상 양쪽 뇌 모두 심한 대발작을 겪게 되었다. 당시 쓰였던 가장 강한 약인 항경련제가 듣지 않자 그는 무엇이든 시도해 볼 수밖에 없었다.

헨리는 27세에 최후의 수단으로 수술을 받게 되었다. 집도의 윌리암 스코빌은 이미 정신병 환자 뇌의 일부를 제거해본 경험이 많은 의사였다. 수술의 위험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측두엽의 일부를 제거하면 헨리의 끔직한 발작이 멈출 것이라 희망하였다. 그러나 수술 이후 발작뿐만 아니라 기억력도 사라지게 되었다.

심리학자 브렌다 밀너는 포괄적인 신경심리학 검사를 했다. 헨리는 몇 초에 걸친 단기 기억에는 문제가 없었고, 수술전에 일어났던 일에 대한 기억도 잘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헨리는 새로운 정보와 경험을 기억의 일부로 저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밀너 박사가 헨리를 매일 만날 때 마다 헨리는 처음 만나는 것처럼 인사하였다. 식사를 마친지 30분 후에 다시 권하면 그는 처음인 것처럼 식사를 하였다. 결국 헨리가 그때까지 기록된 것 중 가장 완결한 형태의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헨리는 소수의 연구자들에게만 위치가 알려진 채, 수십 년 동안 코네티커트 주의 빅포드 건강관리센터에서 살았다. 브렌다 밀너 박사의 제자인 수잔 콜킨에 의하면 헨리는 상냥한 사람이었고 늘 협조적이었다고 한다. 자기가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으나, 본인에 대해 연구자들이 알아낸 것이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것에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2008년 사망 후 헨리의 뇌를 보존하는 계획에 따라 그의 사체는 샌디에고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의 뇌 관측 연구소로 옮겨졌고, 뇌는 적출되어 스캔 된 후 2401개의 종잇장처럼 얇은 조각으로 절편 되었다. 53시간에 걸쳐 힘들게 이루어진 절편과정은 인터넷에서 실시간으로 전달되어 40만 명이 보았다. 이로부터 만들어 진 자료들은 개별 뉴런 차원까지 보여주는 자세한 디지털 지도를 만드는데 활용되었고 전 세계의 연구자에게 2014년 공개되었다.

같은 해 샌디에고 뇌 관측 연구소의 아네시의 팀은 처음으로 헨리의 뇌 내 손상을 3차원적으로 재현해 냈다. 측두엽 내 해마 조직의 앞부분은 흡입 과정을 통해 양쪽 다 제거 되었으나 뒷부분은 온전했었다. 또한 대뇌피질과 피질하부 뇌 조직에서부터 해마로 연결되는 통로의 역할을 하는 후각피질이 거의 전부 사라졌다는 것을 밝혀졌다. 헨리의 편도체가 수술용 메스로 완전히 제거 된 것도 확인하였다.

헨리의 수술을 이루어졌던 시기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기억은 대뇌피질 전체에 분산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헨리의 뇌에 관한 연구는 측두엽 특히 해마와 편도체가 기억 형성과 저장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생전에 그리고 사후에 헨리는 12,000건의 논문에서 거론되었고, 100건 이상의 심리학과 신경과학 연구과제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기억 형성에 대해 많은 새로운 이해를 가져다 주었다.

헨리는 까다로운 기술인 경영묘사를 배울 수 있었다. 경영묘사는 특정 모양을 거울에 비친 자기 손을 보며 그리는 어색한 작업이다. 물론 기억은 전혀 남지는 않았다. 헨리 몰레이슨의 기술이 향상하는 모습을 통해 그의 절차기억체계, 예를 들면 우리가 자전거를 탈 때 동원하는 유형의 기억은 온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자기 집의 설계를 자세히 그림으로 재현할 수 있었다.

연구자들은 헨리가 또한 통증에 대한 내성이 강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헨리의 통증 내성은 편도체가 없어진 것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편도체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기억하는 역할을 한다. 통증 지각은 과거 경험에 대한 기억이 많은 부분 기여하는 심리적 요소가 있다는 것을 역시 헨리로부터 알게 된 것이다.

그림. 측두엽 내 해마(하늘색)의 위치 (출처: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Hippocampus#/media/File:Gray739-emphasizing-hippocampus.png) By Henry Vandyke Carter – Henry Gray (1918) Anatomy of the Human Body (See “Book” section below)Bartleby.com: Gray’s Anatomy, Plate 739,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907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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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3월13일, 알렉산드르 2세 암살됨

그는 로마노프 왕조의 12번째 군주로 1855년 즉위하여, 농노제 페지(1861년) 등 근대화 정책을 실행했다. 또한 1860년 제2차 아편 전쟁을 중재한 대가로 연해주를 얻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건설했다. 1879년 혁명을 원하는 인민의지당원들이 알렉산드르2세를 암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알렉산드르 2세가 죽임을 당한 바로 그 날, 입법 위원회를 만들겠다는 선언문(소위 Loris-Melikov 헌법)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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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줄서평]미셸 자우너,H마트에서 울다

『H마트에서 울다』저자 미셸 자우너는 인디 팝 밴드 재패니즈 브렉퍼스트의 보컬이자 기타리스트이다. 한국계 미국인이란 경계에서 성장해가는 그녀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출간 즉시 미국 서점가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 책은, 2021년 뉴욕 타임스, NPR 같은 유수의 언론매체와 아마존 등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고 버락 오바마 추천도서에 꼽히기도 했다.

“우리 엄마만 왜 이래?”

여느 미국 엄마들과는 다른 자신의 한국인 엄마를 이해할 수 없던 딸은 뮤지션의 길을 걸으며 엄마와 점점 더 멀어지고 독립된 삶을 살아갔다. 그런데 그녀가 25세 때, 엄마는 급작스레 암에 걸리고 투병 끝에 죽음에 이르고 만다. 그 후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마저 희미해져 가던 어느 날, 장보기 위해 드른 한인 마트에서 엄마와의 추억이 불현듯 쏟아진다.

엄마 생각에 눈물부터 나오는 곳, H마트에서 미셸 자우너는 장을 보며 엄마를 향한 추억과 그리움의 글을 쓴다.그「H마트에서 울다」가 『뉴요커』에 실리자마자 수많은 독자의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H마트는 미국에서 아시아 식재료를 전문으로 파는 대형 식료품 할인점으로, H는 ‘한아름’의 줄임말이다. ‘두 팔로 감싸안을 만큼의 크기’라는 의미처럼 그곳에는 만두피, 김, 뻥튀기, 죠리퐁, 갖가지 밑반찬 등 없는 한국 먹거리가 없다. 미국 14개 주 70여 곳에 있는 H마트는 그러므로 한국계 미국인에게 ‘고향의 맛’을 찾게 해주는 보물창고와도 같다.

2층 식당가에는 뚝배기에 찌개가 담겨 나오고 떡볶이를 파는 한국 음식 전문점과 탕수육, 짬뽕, 볶음밥과 짜장면을 파는 한국식 중국 음식점이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추억과 사연을 안고 이곳을 찾는다. 엄마를 잃고 찾아간 그곳에서, 자우너는 딸과 함께 해물짬뽕을 먹는 할머니를 보고 울컥한다. H마트에서, 엄마는 어디에나 있다.

비빔밥에 고추장 많이 넣지 말라던 엄마의 잔소리도, 달콤한 짱구 과자를 손가락에 끼고 흔들던 엄마의 모습도, 엄마와 내가 조금씩 베어물던 동그란 뻥튀기의 추억도 이곳에선 생생하기만 하다. 그렇게 H마트에서 자우너는 엄마가 미각에 강렬하게 새긴 맛을 되찾으며 위안을 얻고 회복해나간다.

지독한 잔소리꾼인 엄마가 사랑을 전하는 방법

누구보다 애틋한 모녀였지만 깊은 사랑은 때론 애증이 된다. 한 살짜리 아기를 데리고 한국인이라곤 찾을 수 없던 미국 오리건주 유진으로 이민 온 엄마는 딸을 엄하게 키운다. 어린 자우너가 보기에 미국인 엄마들은 자식에게 스스로 결정할 자유를 주고 자존감을 지켜주기 위해 애쓰는 듯했지만, 자신의 엄마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딸을 최상의 버전으로 만드는 데 잔소리를 아끼지 않을 뿐이었다. 딸의 외모, 화장, 옷차림, 공부 등 사사건건 간섭을 하는 엄마. 다치기라도 하면 엄마는 불같이 화를 내며 흉터 걱정부터 했다. 꺼이꺼이 흐느끼는 자신을 위로해주기는커녕 “울긴 왜 울어. 네 엄마가 죽은 것도 아닌데”라며 다그쳤다. 자우너는 엄마의 그런 엄하고 매정한 말들이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말 대신 음식으로 사랑을 보여주었다. 생일날에는 미역국을 끓여주고, 테라스에서 뜨거운 철판 위에 두툼한 삼겹살을 굽고 삼겹살 쌈을 만들어주었다. 자우너가 간장게장을 쪽쪽 빨아먹거나 산낙지를 초고추장에 푹 찍어 입에 넣을 때면 엄마는 감탄했다. “넌 진짜 한국 사람이야.”

이제 엄마를 겨우 이해할 것 같은데, 덜컥 찾아온 엄마의 암 투병

운명은 이해하기 힘들다. 작가가 비로소 엄마를 이해하기 시작한 스물다섯 살에, 엄마도 조금씩 예술가의 길을 걷는 딸을 응원하기 시작하던 그때, 건강하던 엄마에게 암 진단이 내려진다. 작가는 절박한 마음에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는 심정으로 매일같이 엄마가 복용하는 약과 먹은 음식을 기록하고, 머리숱도 거의 사라지고 몸집도 줄어든 엄마에게 한국 음식을 해주려 한다.

살아생전 엄마를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 사랑하던 남자친구와 결혼식도 올리기로 한다. 엄마는 딸의 결혼식을 보려는 듯 기적적으로 그 순간까지 버텨준다. 하지만 운명을 피할 순 없었다. 다만 엄마가 해주던 음식의 기억만은 생생히 남았다. 이제 엄마는 없지만 자우너는 인터넷과 유튜브를 찾아보며 된장찌개, 잣죽, 김치를 직접 만들어 먹는다. 엄마의 한국 음식을 통해 엄마를 향한 그리움을 달래며 회복해간다.

상실과 회복, 그리고 사랑의 노래

작가는 어릴 적에 엄마가 2년에 한 번씩 자신을 데리고 간 한국으로 신혼여행을 떠나, 마치 엄마가 자신에게 한국 문화에 대해 알려준 것처럼 남편을 데리고 한국을 경험한다. 생일날 이모가 끓여준 미역국을 먹고, 엄마와 못다 한 추억을 친척들과 공유하며 슬픔을 받아들이고 그로부터 회복하며 점차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나간다.

이 책은 한 예술가의 성장담으로 읽기에도 모자람이 없다. 자우너는 음악과 처음 사랑에 빠진 풋풋한 시절을 생생하게 기록한다. 수많은 젊은 예술가가 겪는 시련, 이를테면 부모의 극심한 반대, 생활고, 기약 없는 미래로 불안에 떨던 경험도 솔직하게 들려준다. 미국이란 나라에서 아시아계 혼혈인 여성 예술가라는 겹겹의 소수자로 살아가면서 맞닥뜨린 또다른 종류의 좌절과 혼란에 대해서도이야기한다.

미셸 자우너의 밴드는?

밴드 '재패니즈 브렉퍼스트' 공연 모습. © Mike Ferdinande

미셸 자우너는 슈게이징 스타일 음악을 하는 인디 팝 밴드 “재패니즈 브렉퍼스트”의 가수이자 기타리스트다. 2016년 1집 〈저승사자Psychopomp〉로 데뷔했으며, 2017년 2집 〈다른 행성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소리Soft Sounds from Another Planet〉는 『롤링스톤』 올해의 앨범 50에 선정됐다.2021년 3집 〈주빌리Jubilee〉가 빌보드 2021 상반기 최고 앨범 50에 선정되며 전 세계 주요 음원 차트에서 상위권에 올랐다. 북미, 유럽, 아시아 등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활발히 투어 공연을 하고 있다.이끄는 밴드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는 2021 그래미 시상식에서 ‘베스트 뉴 아티스트’ 부문과 ‘베스트 얼터너티브 앨범’ 부문 후보에 올랐다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는 그래미 어워드 후보에 두 번 올랐으며, 『H마트에서 울다』는 뉴욕 타임스에서 29주 이상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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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텔러]박물관 큐레이터, 최선주

한국미술사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석사, 전남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본 나라국립박물관 객원연구원, 국립춘천박물관장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그간 <고려사경 변상도의 세계, 부처 그리고 마음>과 <창령사 터 오백나한, 당신의 마음을 닮은 얼굴> 등 크고 작은 전시를 기획했다.

최근작 : <박물관 큐레이터로 살다>,<한국문화와 유물유적 (워크북 포함)>,<불교조각>

저서소개_박물관 큐레이터로 살다

큐레이터들은 시간을 만지는 사람들이자 시간을 잇는 사람들이다. 손때 묻은 유물을 다루면서 그 가치를 찾고 유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을 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말없이 일하는 사람들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 박물관 110년의 역사 중에서 전환기라 할 수 있는 1990년 이후부터 현재 까지 국립박물관 큐레이터로 일하면서 경험한 소회를 다루고 있다.

지은이는 불교조각을 전공한 큐레이터로서 국립중앙박물관 불교조각실 전시에 얽힌 이야기. 또 영월 창령사 터 오백나한상을 비롯하여 수많은 특별전을 기획하면서 보람 있었던 일과 숨겨진 박물관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고, 그와 관련된 사진들을 전시도록을 보는 것처럼 정리하였다.

박물관에는 유물과 그 유물이 지나온 시간들, 그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의미들을 잊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하는 큐레이터들이 있다.

이 책이 박물관 도처에 스며있는 큐레이터들의 땀과 열정을 느끼고, 아울러 큐레이터를 꿈꾸는 사람들과 박물관을 사랑하고 즐겨 찾는 관람객들에게, 그리고 박물관에 선뜻 들어서지 못하는 분들에게도 박물관이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지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박물관에는 유물이 지나온 오랜 시간들과 그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작가는 30여 년 동안 국립박물관 큐레이터로서 일해 왔다. 그사이 새 국립중앙박물관 건립과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사업 등 박물관 역사에 기념비적인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도 가졌다.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 초대 어린이박물관 팀장, 국립춘천박물관장,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을 거쳐 국립경주박물관장까지, 감사하게도 한 사람의 큐레이터가 겪기에 과분할 정도로 많은 일을 지나왔다. 큐레이터로 살기 시작한 지 7년째 되던 2000년, 용산 새 국립중앙박물관 건립현장에 파견되어 2005년 박물관 개관까지 전 공정에 참여했다. 건물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황량한 벌판에 혼자 서 있는 것 같았다.

안전모를 쓰고 현장을 누비며 새 박물관을 완성하면서도 미래의 박물관이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걱정도 됐다. 독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세계 유수 박물관을 견학하였고, 그렇게 얻은 정보를 새 국립중앙박물관에 적용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을 때마다 텅 빈 전시실을 채우기 위해 고민했던 젊은 날의 모습과 관람객이 가득 찬 지금의 모습이 겹쳐져 가슴이 뭉클하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건립추진단에서는 아직 풋내 나는 큐레이터로서 국립박물관의 미래를 꿈꿨다면, 2009년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 팀장을 맡게 되면서는 박물관의 과거를 돌아보게 되었다. 전국 600여 개 공·사립대학박물관·미술관과 함께 공동사업을 추진하며 박물관을 거쳐 간 많은 큐레이터 선배들을 만났고, 그들이 겪은 박물관 에피소드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때의 경험은 큐레이터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남기고, 전하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했다. 그리고 큐레이터로서의 시간에 막을 내리는 지금, 작가는 이제야 그 바람을 이루고자 한다. 박물관에는 유물과 그 유물이 지나온 시간들, 그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의미들을 잊지 않고,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하는 큐레이터들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큐레이터는 시간을 만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 박물관 110년의 역사 중에서 전환기라 할 수 있는 1990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큐레이터로 일하면서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다루었다.

특히 불교 조각사를 전공한 큐레이터로서 불상 연구와 국립중앙박물관 불교조각실 전시에 얽힌 이야기, 또 가장 기억에 남은 영월 창령사 터 오백나한상을 비롯하여 최근 국립경주박물관이 기획한 <고대 한국의 외래계 문물> 특별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특별전과 함께 하면서 느낀 소감을 함께 나누고자 했다. 그리고 국립박물관 큐레이터로 일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과 숨겨진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았다.

이 책이 큐레이터를 꿈꾸는 사람들과 박물관을 사랑하고 즐겨 찾는 관람객들에게, 그리고 박물관에 선뜻 들어서지 못하는 분들에게도 박물관이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지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Posted in기업과 경영

반도체제국 TSMC


팬데믹 시대에 가치가 급상승한 기업중 하나가 대만의 TSMC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급습하면서 세계 반도체 부족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현상입니다.

재택 근무 등 언택트 활동이 급증하면서 컴퓨터, 서버 등 각종 디지털 기기 수요가 치솟았습니다. 그러자 디지털 기기속 핵심 부품인 반도체 공급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반도체 부족 사태는 자동차 업계를 강타했습니다. 자동차에 반도체를 공급하던 업체들이 단가가 더 비싼 디지털 기기 부품생산에 비중을 두면서 자동차용 반도체 품귀현상이 벌어진 것입니다.

TSMC는 반도체 생태계중에서 다른 회사가 설계한 반도체 칩을 대신 만들어주는 위탁 생산업체입니다. 이런 형태 반도체 업체를 파운드리(Foundry)라고 부르며, TSMC가 시스템반도체 파운드리 시장의 70%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팬데믹 이전까지 사실 TSMC는 메모리 분야 1위 삼성, 비 메모리 분야 1위인 인텔에 비해 가치가 낮은 기업으로 인식됐습니다. 자체 반도체 설계 기술을 갖고 있지 않고 다른 업체가 설계한 칩을 만들어주는 역할이라는 평가때문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퀄컴이나 AMD처럼 생산시설 없이 설계만을 하는 팹리스 기업뿐만 아니라, 애플, 구글 등 비반도체 기업까지 직접 반도체를 설계하기 시작하면서 파운드리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상황에서 반도체 수요가 치솟자 파운드리의 역할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미국 바이든 정부는 애플, 퀄컴 등 주요 미국 기업의 핵심 반도체가 대만과 한국에서 생산되는 점을 우려하고 미국내 파운드리 투자를 장려하기 시작합니다. TSMC는 일본과 미국 등에 파운드리 공장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반도체 산업은 단순히 비즈니스적 판단만이 아니라 국제정치의 맥락에서도 살펴봐야 하는 분야가 되었습니다. 미국과 중국, 글로벌 지정학적 위험에 얽힌 대만의 TSMC(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를 향후 행보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리스 창은 ‘반도체 산업 진흥에 도움을 달라’는 대만 정부의 요청을 받아 1985년 귀국했습니다. 1987년 대만공업기술연구원장 ‘모리스 창’은 대만 정부와 외국인 투자자가 출자한 2억2000만달러 자본금으로 TSMC를 설립하고 최근까지 이끌었습니다. 이병철-이건희-이재용으로 이어지는 한국 반도체 산업 리더를 합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만의 신생 반도체 산업을 개발하는 책임을 맡은 모리스 창은 계약에 따라 일하는 아웃소싱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앞으로 글로벌 기업이 비용절감을 위해 아웃소싱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회사의 설계 요구를 반영한 칩을 만드는 회사를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TSMC가 시작되었을 때 대략 20~30개의 팹리스 회사가 존재했습니다. 오늘날 그들은 셀 수 없이 많아졌습니다. TSMC는 회사가 칩 설계를 전문으로 하고 제조를 아웃소싱할 수 있도록 하는 이와같은 팹리스 혁명을 가능하게 만들고 주도한 기업입니다.

표준화 될 수 없는 특정기업에 필요한 반도체도 대규모의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테크기업에게 아웃소싱은 합리적 대안입니다. 서로 다른 칩설계라도, 공통의 공정과 규모의 경제가 있기에 파운더리도 역시 합리적 선택입니다. 다만 이를 위해 매우 공격적인 투자가 필요합니다. 대만정부가 투자한 TSMC와 미국 테크기업 출신 모리스 창의 만남은 환상적 조합이었습니다. 2005년 CEO 자리를 넘겨줬던 모리스 창은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다시 복귀합니다. 그가 있었기에 경쟁 업체들이 생산 라인을 폐쇄할 때 과감하게 설비투자를 늘리고 자산을 활성화할 수 있었습니다.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의 글로벌 반도체 사업부 부사장 재임시, 모리스 창은 공격적인 칩 가격정책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처음에는 경쟁자를 제압하고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기 위해 이익을 희생합니다. 시장지배력을 얻게 된 후,가격을 인상하여 지배적 공급자로서 이익을 거두었습니다. 당시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지만 이 전략은 이제 업계 전반에 걸쳐 표준이 되었습니다. 

TSMC 영업이익의 상당부문을 기술 개발과 설비에 투자합니다. 후발 업체가 따라오기 힘들 정도로 거액을 투자합니다. 최근 반도체시장의 변화에 대응하여 TSMC는 미국 애리조나, 일본 이바라키현 등 대만 외 지역에 공장과 연구시설 등에 공격적인 투자를 진행 중입니다. TSMC가 처음 해외에 짓는 첨단 반도체 공장입니다.

최근 모리스 창은 각국의 반도체 현지화 보조금 지원을 언급하면서 “과거에는 글로벌화와 자유무역이 전 세계를 발전시켰지만, 오늘날 세계는 평등하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대만 과학기술협회 20주년 행사) 실제로 대만, 한국은 이제 정치군사적으로 안전하지 않으므로 미국에 반도체 생산시설을 두어야 하고, 미국기업에 보조금을 주자는 제안까지도 있습니다.

“1980년대에 미국은 전 세계 반도체 제조의 40%를 차지했지만 지금은 17%로 줄어들었습니다. 미국은 현재 하락 반전을 희망하고 있지만 현지 생산은 불완전한 반도체 공급망과 더 높은 생산 비용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투자되는 공급망 구축 비용과 납세의 대가는 상당할 것”이라며 비판적입니다. 그는 더 많은 투자와 보조금이 필요할 것이며 결국 납세자들에게 부담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최근 TSMC는 이례적으로 경제나 국제관계 분야의 인재를 채용하고 있다. ‘지정학적 및 경제적 변화가 IC 산업 공급망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기 위해서입니다. TSMC가 글로벌 지정학적 리스크를 심각한 도전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리스 창은 더 이상 완전 경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미국 진출이 TSMC의 유일한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TSMC가 대만에서 주요 사업을 운영하는 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모리스 창은 누구인가?

격동의 어린 시절

1931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Chang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중국의 격변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Chang의 가족은 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및 뒤이은 내전이라는 세 가지 다른 전쟁 동안 진격하는 군대를 피해야 했습니다.

“저는 1941년에 10살이 되었습니다. 그 해에 일어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물론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었습니다.”라고 Chang은 회상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내가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던 홍콩을 공격했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 이전의 기억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이후의 내 삶의 기억은 매우 선명하고 생생합니다.”

비즈니스에 눈뜨다

모리스 창이 미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그의 부친이 IBM 주식 몇 주를 선물했는데, 그는 이때부터 미국 기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주식을 보유하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주가 동향을 지켜보게 된 것이다. 당시 그의 수중에는 IBM 주식밖에 없었으나 이때부터 하루라도 IBM 주가 동향을 주시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모리스 창은 자신이 날카로운 비즈니스 감각을 키운 것은 아버지가 선물한 IBM주식 몇 주 덕분이었다고 회고한다.

인생 롤 모델

살아가면서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TSMC의 수장 모리스 창에게 평생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누구일까? 모리스 창 자신이 여러 차례 언급한 TI 이사장 패트릭 유진 해거티다. 40여 년 전, 해거티는 TI에서 ‘혁신’, ‘성실’, ‘고객을 왕으로 모신다’는 기업문화를 구축하여 오늘날까지 이를 지속해왔다.

혁신과 성실은 모리스 창이 소중히 받드는 TSMC의 경영이념이기도 하다. 고객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모리스 창은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고객을 위해서라면 TSMC는 섶을 지고 불길로 뛰어들 수도 있다.”해커티는 고객의 목소리를 매우 중시하며 내부 승진때도 큰 고객의 의견을 반영했다. 모리스 창은 “ 이부분은 나도 배워서 TSMC 인사 이동이 있을 때 고객의 의견을 참고한다”고 말했다.

브리지 게임으로 쌓은 우정

모리스 창은 카드 게임 브리지 게임 매니아로 잘 알려져 있다.1985년, 대만으로 돌아와 공업연구원장을 맡게 되면서 모리스 창은 대만 브리지 게임계와 더 자주 접촉했다. 황광휘의 소개로 그는 당시 USI 회장 장즈젠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관계는 브리지 게임으로 시작되었으나 모리스 창의 창업과정에서 진정한 우정으로 발전했다. 장즈젠이 모리스 창에게 부족한 자금을 늘 지원해줬다.

기업경영에 있어 모리스 창은 인정의 요소를 개입시키지 않았으며 부하 직원의 실수에는 냉혹한 태도로 따끔하게 질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즈젠과 브리지 게임으로 이어진 12년 우정은 한편으론 중국 전통 가치관 속 보은 정신을 보여준다. 이는 오랫동안 성공한 기업가로 살아온 모리스 창의 이미지에 부드러운 면모를 더해준다.

​​빈틈없는 준비

2006년 모리스 창은 부인 장수펀과 대만을 대표하여 베트남에서 열리는 APEC 비공식 정상회담에 참가했다. 그의 행보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고, 단 이틀의 짧은 일정을 위해 그는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는 양복 안주머니에 늘 수표책 두께의 수첩을 넣고 다니면서 사람들과 대화할 때 중요한 대목이 나오면 신중하게 기록해두곤 했다.

진정은 통한다

2002년 10월. 부인 장수펀의 설득으로 모리스 창은 사진작가 커시제의 카메라 앞에 섰다. 커시제는 창의 멋진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담배를 한 모금 권했다. 깊은 생각에 잠긴 그는 담배 연기에 둘러싸였고, 사색은 연기와 함께 허공으로 올라갔다. 한 모금 더 깊이 들이 마셨다가 뿜어내니 짙은 연기가 서서히 분출되며 자욱한 안개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저 이를 정말 잘 나타내는 장면이네요!” 한쪽에서 장수펀이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근엄한 가면을 벗어던지고 사진작가 커시제의 렌즈 앞에서 모리스 창 부부는 진실한 면모를 드러내며 영원히 남을 순간을 기록했다.

궁함 속에서 진리를 찾다

“나는 최근 번역에 큰 관심이 생겨서 중국어와 영어의 의미 차이를 늘 연구한답니다.” 모리스 창의 이 한 마디에 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기자들은 그의 취재에 준비할 목록을 하나 더 추가했다. 모리스 창의 산업과 경영에 관한 취재 외에 영중사전까지 준비해서 그의 ‘영어 수업’ 진도를 따라가야 했기 때문이다.

겉과 속이 같은 사람

“제 남편은 성실함을 중요시하며 개인적으로 이익을 취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장수펀은 TSMC의 수첩 몇 권을 가져다 집안에 뒀다. 지인들에게 선물할 요량이었다. 모리스 창은 장수펀에서 TSMC에 돈은 냈냐고 물었다. 부인에게도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라고 요구한 것이다.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는 모리스 창은 두 후계자 류더인, 웨이저자에게도 식사 대접을 따로 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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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텔러]한중일 음식사 연구, 주영하

음식을 문화와 인문학, 역사학의 시선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음식인문학자. 한국 음식의 역사와 문화는 물론, 음식의 역사와 문화가 지닌 세계사적 맥락을 살피는 연구를 하고 있다. 마산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화인류학을 공부했다.

1998년 중국 중앙민족대학교 민족학·사회학 대학원에서 문화인류학(민족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민속학 담당 교수로 재직 중이며, 장서각 관장을 맡고 있다.

2007~2008년 일본 가고시마대학교 심층문화학과, 2017~2018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 아시아학과에서 방문교수로 지냈다.

《음식전쟁 문화전쟁》, 《차폰 잔폰 짬뽕》, 《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 《음식 인문학》, 《식탁 위의 한국사》, 《장수한 영조의 식생활》, 《밥상을 차리다》, 《한국인, 무엇을 먹고 살았나》(공저),

《조선 지식인이 읽은 요리책》(공저), 《음식 구술사》(공저), 《한국인은 왜 이렇게 먹을까?》, 《조선의 미식가들》, 《백년식사》 등을 쓰고, 《중국 음식 문화사》를 우리말로 옮겼다.

‘식탁 위의 글로벌 히스토리’ 시리즈(총 10권)를 감수하고 한국어판 특집글을 썼으며, 《옥스퍼드 음식의 역사》를 감수하고 해제했다.

최근작 : <두 가지 스타일의 한국 결혼식>,<음식을 공부합니다>,<백년식사>

저서소개_음식을 공부합니다

음식에 진심이어서

음식 이야기를 듣고, 말하고, 쓰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음식인문학자 주영하의 음식 공부 노하우 대방출!

방대하고 다양한 자료를 치밀하게 분석해 가장 신뢰할 만한 음식문화사를 들려주는 음식인문학자 주영하 교수. 35년간 음식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면서 터득한 ‘음식 공부’ 노하우를 아낌없이 독자들과 나누고자 이 책을 썼다. 하나의 공부법에 가장 적절한 음식 한 가지를 사례로 들어 12가지 ‘음식 공부법’을 쉽고 맛깔나게 전달한다.

라면의 기원지로 알려진 란저우에는 ‘라몐’이 없다? 아이스크림은 축산물? 가을 전어가 아니라 입하 전어? 전국적으로 설날에 떡국을 먹은 건 최근의 일? 조선시대 잡채에는 당면이 없다? 냉면은 겨울 음식? 상식을 깨는 질문과 음식의 역사를 찾아가는 흥미로운 여정으로 음식을 ‘먹는’ 즐거움 못지않은 음식을 ‘아는’ 기쁨을 선사한다.

불고기와 야키니쿠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고 싶다면!―음식 ‘공부법’을 알려주는 최초의 책

프랑스 법률가이자 미식 평론가인 장 앙텔므 브리야사바랭은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라며 개인의 음식 경험과 취향을 통해 그의 삶을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현대인에게 음식은 생존을 위한 수단을 넘어선 지 오래다.

함께 혹은 혼자 먹는 일을 즐기고, 나아가 음식으로 자신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서 음식에 진심인 이들에게 음식 이야기는 단순한 흥밋거리 이상이다.

단순히 흥미로운 음식 이야기 듣는 것을 넘어 근거 없는 ‘썰’과 ‘만들어진 전통’을 가려내고, 믿을 수 있는 음식 이야기를 찾는 독자라면 이 책을 펼쳐보길 권한다.

이 책은 35년차 음식인문학자의 공부 비법을 아낌없이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 주영하 교수는 오래된 요리책, 고문서, 그림, 근현대 신문과 잡지 등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음식의 역사와 문화를 다뤄왔고, 음식인문학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장본인이다(저자의 음식 공부가 믿을 만한 것인지 궁금하다면, ‘부록: 나의 음식 공부 이력서’를 먼저 살펴보아도 좋다).

이미 다양한 음식인문학 책으로 독자와 만나왔지만, 이번에는 한 상 가득 음식을 차려주는 것을 넘어 음식 만드는 주방을 공개한다. 오랜 세월 갈고닦은 그의 공부법을 온전히 공유하기 위함이다.

오류가 걸러지지 않은 음식 역사를 다루는 예능 프로그램에서부터 근거를 알 수 없는 웹사이트의 온갖 음식 글, 각기 다른 음식 칼럼니스트의 주장까지 넘치는 정보 속에서 제대로 된 음식 이야기를 찾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유용한 공부 기술을 제공한다.

몇 년 전, 한 음식 칼럼니스트의 주장에서 비롯된 불고기와 야키니쿠 논쟁처럼 음식의 역사를 둘러싼 이야기에서 자기만의 목소리를 가질 수 있는 비법을 전수하는 것이다.

‘아는’ 음식의 ‘모르는’ 역사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드립니다

―식탁에서의 스몰토크부터 진지한 학문적 탐구까지

쓰임새 있는 음식 역사 공부법

전어는 가을 음식, 냉면은 여름 음식일까? 설날 음식 하면 떡국, 비빔밥 하면 전주비빔밥일까? 아이스크림의 역사는 얼음에서부터, 양념 배추김치의 등장은 고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우리가 상식처럼 알고 있는 음식의 기원, 역사, 문화가 정말 사실인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주영하 교수는 음식 공부 초심자도 따라갈 수 있도록 오래된 요리책, 근현대 신문과 잡지, 고문서 등 자료를 찾고, 읽고, 해석하는 법을 상세하게 알려준다.

나아가 음식 역사를 밝히는 데 놓쳐서는 안 될 핵심적인 질문 12가지를 공개한다. 음식인문학에 대한 전문 연구자가 많지 않은 현실에서 12가지 ‘음식 역사 공부법’은 진지한 학문적 탐구를 하는 이들에게도 유용한 지식이다.

특히 이 책은 음식인문학이 궁금했지만 너무 많은 주석과 조금은 길고 어려운 글에 책장을 덮었던 독자들에게 권한다. 짧고 친절하게 독자들에게 다가서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주영하 교수의 책을 즐겨 읽던 독자들에게는 음식 역사 공부법을 체계적으로 전달한다는 데에 이 책의 미덕이 있다.

12가지 음식에 12가지 공부법을 담았다

―라면, 아이스크림, 막걸리, 불고기, 두부, 냉면, 배추김치,

잡채, 전어, 떡국, 비빔밥, 짜장면으로 하는 음식 공부

여기서는 맛보기로 이 책에서 다루는 몇 가지 음식 공부법을 소개한다.

가을에는 전어, 설날에는 떡국처럼 오래전부터 즐겼을 것 같은 음식도 그 역사를 쫓아보면 아닌 경우가 있다. 산업화로 즐겨 먹는 때가 바뀔 수 있고, 명절 음식이라도 전국적으로 균질 음식이 된 것은 최근일 수 있어서이다.

조선시대만 해도 어획 방식의 차이로 가을 전어가 아닌 입하 전어를 즐겼다. 조선시대에는 입하 즈음 어살을 설치한 어장에서 썰물 때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생선을 주어 담아 어획했다면, 어업의 산업화로 먼 바다로 나가 대량 어획을 하게 되면서 가을 전어를 즐기게 된 것이다.

산업화와 산업 음식을 살피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사실이다. 한편, 지금은 설날 음식 하면 무조건 떡국을 떠올리지만, 조선시대 이옥의 글이나 조극선의 일기를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7세기 이후 서울 사대부가에서 설날 명절 음식으로 밀만두나 메밀만두를 대신해 떡국을 먹기 시작했고, 이를 모방한 지방 사대부가에서도 떡국을 먹었지만 일부에 그쳤고, 떡국이 전국적으로 명절음식이 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인 1970년대이다.

아이스크림의 역사는 얼음에서부터, 양념 배추김치의 등장은 고추의 유입만 살피면 될까? 가령 아이스크림의 역사에서 얼음에 주목해 얼음 저장고의 역사나 처음으로 얼음을 먹은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곤 하는데,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점이 있다.

바로 해당 음식의 식품학적 정의를 따지는 일이다. 《식품공전》에 따르면 아이스크림은 밀크에서 나온 축산물의 한 종류이다. 즉 아이스크림류의 핵심 원료는 원유나 유가공품이고, 크림이 아이스크림의 주인인 셈이다. 한편, 시대별로 변하는 품종을 살피는 것도 음식의 역사에서는 아주 중요하다.

대표적인 것으로 양념 배추김치를 들 수 있다. 고추라는 양념도 중요하지만, 양념 배추김치가 밥상에 오르게 된 것은 배추의 품종 개량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속이 차지 않은 비결구배추가 주를 이루었을 때는 양념을 거의 하지 않은 백김치나 배추지를 요리했고 배추김치보다 무김치를 더 즐겨 먹었다. 하지만 18세기 청나라와 교류하면서 품종 개량된 반결구배추가 들어왔고, 이후 화교를 통해 결구배추가 전해지면서 양념 배추김치는 우리 밥상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라면의 기원지로 알려진 란저우에는 ‘라몐’이라는 음식이 없다. 그곳에서 ‘라몐’은 국수를 만드는 방법이지 특정 음식이 아닌 것이다.

음식의 이름에 현혹되지 않고 음식 이름의 내력을 따져야 하는 이유다. 또, 제조 과정의 핵심을 정리해보면 그 음식이 ’발견된 음식‘인지, ’발명된 음식‘인지 알 수 있다. 와인은 발견된 음식, 막걸리는 발명된 음식인데, 이로써 음식의 기원에 대한 논쟁에 답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오래된 문헌 기록을 의심하는 일, 식재로 확보 가능 시기를 파악하는 일, 특정 시기에 유행한 요리법을 모아보는 일, 기원지와 유행지를 구분하는 일 등 음식의 역사를 공부하는 데 핵심적인 노하우를 알차게 담았다.

주영하 교수에게 음식이란 무엇인가?

“저에게 음식은 공부입니다. 국내나 해외 어디를 가도 음식은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입니다. 지역의 시장은 주민들이 즐겨 찾는 식재료의 공부방입니다.

그들이 즐겨 가는 음식점은 지역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파악할 수 있는 박물관입니다. 역사적 문헌에서 만나는 음식은 한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생각과 행위를 이해할 수 있는 타임머신입니다. 그래서 저에게 음식은 세상살이의 지혜를 알려주는 보물입니다.<출판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