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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론 머스크는?

2021년 타임과 파이내셜타임스는 일론 머스크는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머스크는 3000억불 가진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는 괴짜 천재로 불리며 아웃사이이더처럼 보였다. 그런 머스크가 마침내 주류사회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 되었다.

그동안 머스크는 회사 내 성희롱, 열악한 근무 조건, 인종 문제, 자율주행 사고 등 미국 내에서 질타를 받고 있었다. 2018년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는 머스크를 주가조작 혐의로 조사하고, 2000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했다. 이것 말고도 머스크가 운영하는 회사들은 규제 위반으로 조사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정부의 지원과 보조금을 받은 특혜기업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머스크는 가상화폐나 주식시장에서 경계의 대상이다. 머스크의 트윗에 따라 주가도 현금도 출렁이고 있다.

각종 잡음과 명백한 규칙 위반에도 불구하고 머스크는 꿈을 현실로 만들어냈다. 1980년대 잡지에 실렸던 공상 과학같은 이야기를 그는 현실처럼 꿈꾸었다. 머스크는 자동차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화성을 식민지화하고, 진공 터널에서 달리는 초고속 열차를 만들고, AI를 인간의 두뇌에 통합하고, 태양광 발전과 배터리 산업을 혁명하려한다. 머스크의 시도에 많은 사람이 의구심을 품었다. 그의 회사는 한때 붕괴 직전까지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기차를 상용화했고, 우주로 로켓을 쏘아 올렸다.

그런데, 그가 이제 이른바 재벌이 되려고 한다. 테슬라와 스페이스 X는 이미 각각 1조 달러와 수십억 달러 기업이다. 그 밖에 태양광기업인 솔라시티 등 여러 회사에 투자하고 있다. 머스크는 ‘표현의 자유’를 위해 트위터까지 인수했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의 회사들을 한 사람이 모두 갖는 것은 거의 전례가 없는 일이다. 그가 아무리 천재적이고 유능한 기업가라고 해도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은 재앙이 될 수 있다.

신생 기업은 천재적인 리더십 아래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어 세상을 바꾸곤 한다. 그렇지만 곧이어 고객의 일상적 요구를 해결해야 하는 지루한 관리의 시대가 시작될 수 밖에 없다. 어느 시점에서 모든 회사는 팀 쿡이 필요하다. 특히 머스크의 회사들이 팀 쿡이 가장 필요한 회사이다. 2011년 잡스가 서망하기전 CEO로 임명된 팀쿡은 잡스의 비전도 머스크의 천재성도 없다. 그렇지만 그의 리더십 아래 애플은 두 배 이상의 수익과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일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을 고용하고, 지속적으로 수익성을 유지하고, 결함없는 제품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테슬라가 전기차를 첫번째로 상용화했지만, 이제 후발 주자와 치열한 경쟁을 앞두고 있다. 머스크는 과감한 투자를 할 수 있고, 어려울 땐 공장에서 한달동안 숙식할 수 있다. 그렇지만 머스크가 일상적인 관리를 할 수는 없다. 그는 순식간에 전기차도 트윗도 아닌 또 다른 무엇가로 ‘본능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다. 다행스럽게도 스페이스X에는 팀쿡같은 인물이 있다. 머스크의 담대한 비전을 현실로 만든 대표이자 COO인 그윈 쇼트웰이다. 머스크가 더 많은 팀 쿡과 그윈 쇼트웰을 찾을 수 있어야, 그의 담대한 비전이 수익이 나는 사업이 될 수 있다.

지금 머스크의 관심사는 트위터이다. 그는 트위터를 비공개로 전환하여 약 440억 달러에 인수한다. 주판알을 튕겨 보면(NYT), 머스크는 트위터 인수에 일반적 매수보다 더 많은 현금을 사용하고, 트위터에 130역 달러의 부채를 새로 만들었다. 현금확보를 위해, 테슬라 주식을 팔거나 담보로 제공하므로 테슬라의 가치는 트위터의 가치와 연결된다. 위험스런 투자지만,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차이가 있다면 투자의 목적이다. 그동안 머스크가 꿈같은 미래에 투자했다면, 그는 이번엔 정치적인 ‘표현의 자유’에 투자한다. 그는 블루오션이 아니라 레드오션에서 싸워야 한다. 그가 지불해야하는 10억달러의 위약금이 오히려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다.

 머스크는 정상과 비정상, 현재와 미래, 선과 악의 경계선에 서 있다. 그 경계에서 그는 줄타기 하는 것처럼 보인다. 머스크가 만약에 가까운 미래에 무너진다 해도, 그가 미래를 향해 가졌던 담대한 희망은 여전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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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_태종평전

2022년 5월 30일(음력 5월10일)은 태종 서거 600주년입니다. 박현모 교수는 논쟁적인 인물인 이방원을 ‘태종평전’으로기념합니다. 마침 KBS의 사극 ‘태종 이방원’이 인기를 끌면서, 정치의 계절에 태종도 급부상했습니다.

태종의 훌륭한 점은 위기 극복 능력이라고 합니다. 국가라는 배를 성공적으로 목적지에 도달시키려면 선장이 방향타를 제대로 잡아야 합니다. 정적들의 숱한 공격과 수많은 장애물을 넘어서 그 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태종이 정치 세계에 뛰어든 1388년부터 왕위에 오르는 1400년까지, 12년 동안 수많은 진전과 반전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 피말리는 12년을 한마디로 ‘선발제지(先發制之)’ 로 태종은 이겨냈습니다. 곧, 먼저 나서서 사태를 제압하여, 위험한 순간을 기회로 바꿔 나갔습니다. 정몽주를 척살할 때(1392년 4월), 그리고 두 차례 ‘왕자의 난(1398년 8월, 1400년 1월)’으로 정도전과 이방간을 제거할 때가 바로 그런 사례입니다.

재위 말년에 전격적으로 세자교체를 단행하고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었고, 세종의 정치 멘토로 노후를 보냈습니다. 이는 세종도 못한 일입니다. 세종이후 왕위 계승과정은 소란스러웠습니다.

박교수는 <태종평전>이 끝이 아니라, 이제 태종 공부를 쇠심줄처럼 끈질기게 해볼 작정이라고 합니다. 북토크를 끝내면서 마지막으로 박교수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을 태종이 다스린다면 가장 우선적으로 할 일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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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수’경성의화가들’

저자 황정수가 말하는 ‘경성의 화가’는 그들이 살던 지역적 네트워크를 의미합니다. 마치 몽마르트 언덕에 모인 인상파 화가들 처럼…그들은 서촌이나 북촌에 살면서 서로 밀접하게 교류했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들만의 경향성을 가진 그룹도 만들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근대를 거닐던 경성화가들에 미친 일본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경복고, 중앙고보 등 공립학교에서 근무했던 일본인 미술선생들이 서구적인 미술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도쿄미술학교 출신의 제대로 된 화가이자 미술선생이었습니다.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도 도쿄 미술학교 출신입니다.

이런 움직임들이 모여, 1918년 최초의 근대미술 단체인 서화협회가 결성됩니다. 한국의 동양화가들과 서양화가들이 도무 모여 결성한 단체입니다. 이들은 서화협회전(1921년)을 이끌었고, 마침내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의 출범되었습니다.

황정수 작가의 <경성의 화가들>에는 흥미로운 화가들의 삶과 그림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두 점을 소개합니다.

우선 서촌에 진짜 잠깐 살았던 이중섭의 <벗꽃위의 새>입니다. 널리 알려진 ‘소’ 시리즈 보다 더 좋다는 황작가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동십자각>이란 김용준의 그림입니다. 중앙고보 학생이었던 김용준(1904-1967)이 총독부 공사가 진행되던 1924년 당시 동십자각을 그린 것입니다. 이 작품은 1924년 제3회 조선미술 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을 했습니다. 인촌 김성수가 이 작품을 구매했고, 그 돈으로 김용준은 도쿄미술학교로 유학을 갈 수 있었습니다.

▲ 김용준 ‘동십자각'(좌), 현재의 동십자각(우) ⓒ 황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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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러]파친코 저자, 이민진

한국계 1.5세로서 제2의 제인 오스틴으로 호평을 받고 있는 이민진은 1968년 한국의 서울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 가족 이민으로 뉴욕 퀸즈에 정착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함경남도 원산, 어머니는 부산 출신이다. 그녀는 일곱 살에 미국으로 이민 가 미국인으로 살고 있지만 미국식 이름 대신 한국 이름을 고수하고 있다.

이민진의 아버지는 한국에서 화장품회사 영업사원 출신이었는데 많은 이민자들처럼 전쟁의 공포 탓에 1970년대 중반 이민을 결행했다.

‘쥐가 나오는 방 한 칸짜리 아파트에서 다섯 식구가 살았던’ 가난한 기억을 가진 이민진은 일요일도 없이 일하는 부모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성장했다. 이런 부모님의 희생과 사랑으로 예일대 역사학과와 조지타운대 로스쿨을 졸업한 이민진은 기업변호사로 일하며 한인 이민 사회의 성공 모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16세부터 B형간염 보균자였던 그녀는 간이 나빠져 잘나가던 변호사 일을 그만두고 고교 시절부터 재능을 보였던 글 쓰는 일로 복귀했다.

2004년 단편소설 〈행복의 축Axis of Happiness〉, 〈조국Motherland〉 등을 발표해 작가의 입지를 굳히기 시작했다.

2008년 첫 장편소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Free Food for Millionaires》을 발표, 한국을 비롯하여 11개국에 번역 출판되었으며 전미 편집자들이 뽑은 올해의 책, 미국 픽션 부문 ‘비치상’, 신인작가를 위한 ‘내러티브상’ 등을 수상했다.

미국인으로 살고 있는 이민진의 소설적 뿌리는 이민을 토양으로 뻗어나간다. 일본계 미국인 남편을 만난 것이 자이니치에 대한 호기심을 직접 탐사할 기회를 제공했다. 남편이 2007년 도쿄의 금융회사에 근무하게 된 덕분에 그녀는 일본에서 4년간 살면서 소설 《파친코》의 뼈대를 세웠다.

이민진은 현재 미국 뉴욕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하며 집필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소개_파친코

구상부터 탈고까지 30년이 걸린 대작!

차별받는 이민자의 투쟁적 삶을 일제강점기에서부터

장장 80년에 걸쳐 그려낸 재일 한국인의 가슴 아픈 역사!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자이니치들의

도전과 생존의 역사 《파친코》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이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소설 《파친코》는 내국인이면서 끝내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던 자이니치(재일동포)들의 처절한 생애를 깊이 있는 필체로 담아낸, 작가 이민진의 혼이 담긴 수작이다.

한국계 1.5세인 미국 작가 이민진이 자이니치, 즉 재일동포의 존재를 처음 접한 것은 대학생이었던 1989년, 일본에서 자이니치들을 만났던 개신교 선교사의 강연을 들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상승 욕구가 강한 재미동포들과 달리 많은 자이니치들이 일본의 사회적, 경제적 사다리 아래쪽에서 신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민진은 그때부터 자이니치에 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에서 직접 만난 자이니치들의 복잡하고도 광활한 인생에 겸허해진 이민진은 그때까지 써온 원고를 모두 버리고 책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정체성과 인간의 가치에 관한 작가의 치열한 고민은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부산 영도의 기형아 훈이, 그의 딸 선자, 선자가 일본으로 건너가 낳은 아들 노아와 모자수, 그리고 모자수의 아들인 솔로몬에 이르는, 4대에 걸친 핏줄의 역사를 탄생시켰다.

이민진은 그 치열한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고향과 타향, 개인의 정체성이란 과연 무엇인지 질문한다. 그리고 그 질문은 현란한 문체 대신 행간의 의미를 함축하며 담담하게 풀어나가는 서사에 녹아 전해진다.

발버둥 쳐도 헤어날 수 없는 ‘인생’이라는 이름의 굴레

《파친코》 속의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각자의 한계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고된 삶을 이어나간다.

삶은 모두에게나 고통이지만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들에게는 더더욱 가혹했다. 물론 그들은 조선에서도 평탄한 삶을 보내지는 못했다.

그들은 그저 자식만큼은 자신들보다 나은 대우를 받으며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보통 사람’들이었지만, 시대는 그들의 평범한 소원을 들어줄 만큼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가난한 집의 막내딸 양진은 돈을 받고 언청이에 절름발이인 훈이와 결혼한다.

“여자의 인생은 고생길”이라는 말을 반복하면서도 그러한 인생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양진은 남편 훈이와 함께 하숙집을 운영해나가며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다.

그녀는 온갖 궂은일을 다 하면서 유일한 자식이자 정상인으로 태어난 딸 선자를 묵묵히 키워나간다. 부모의 살뜰한 보살핌과 사랑을 받고 자란 선자는 안타깝게도 엄마 나이 또래의 생선 중매상 한수에게 빠져 결국에는 한수가 유부남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만다.

불행의 나락에 빠진 선자는 목사 이삭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구원을 받게 되고, 둘은 새로운 인생을 위해 이삭의 형 요셉 부부가 사는 일본의 오사카로 향한다.

일본에서 한수의 핏줄인 첫째 노아와 이삭의 핏줄인 둘째 모자수를 낳은 선자는 친정엄마인 양진처럼 여자로서의 인생은 잊어버린 채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삶을 고생스럽게 살아간다.

선자의 형님인 경희는 어쩌면 기구한 삶을 살아가는 양진과 선자보다도 더 힘든 인생을 사는 여자인지도 모른다.

경희는 불임으로 자신의 아이를 갖지 못하지만 남편에게 충실하며 가족들을 살뜰하게 보살핀다. 불의의 사고로 찾아온 불행 앞에서도 그 운명을 탓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수용한다.

《파친코》에 등장하는 세 여성은 강인한 어머니이자 아내의 모습을 보여주며, 한편으로는 남편과 자식에게 헌신하는 전통적인 여성상이라는 굴레가 얼마나 한 여성의 삶을 안쓰럽게 만드는지도 보여준다.

인생이라는 이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비단 이 세 여성들만이 아니다.

선자의 남편인 이삭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굴레에 묶여 있었고 경희의 남편 요셉은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것은 남자라는 자신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선자의 소중한 두 아들인 노아와 모자수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 이름을 가졌음에도 일본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경시당하고 차별받는 삶의 굴레를 짊어지고 살아간다.

다만, 이 두 아이는 그러한 현실을 각자의 가치관에 근거해 다르게 받아들이고 다른 방식으로 풀어나간다. 노아는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환경을 극복하고자 공부에 파고들고, 모자수는 조선계 일본인에 대한 경멸과 괄시에 폭력적으로 대응한다.

그러나 일본 아이들보다 훨씬 뛰어난 성적을 보이고 착실하게 일하여 많은 돈을 벌어도 그들을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시선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자이니치’라는 편견은 두 사람이 아무리 애쓰고 발버둥 쳐도 헤어 나올 수 없는,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하는 굴레였다.

진솔한 서사와 치열한 작가 정신의 승리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이어지는 긴 세월 동안,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온갖 사건을 겪는다. 거기에는 사랑과 배신, 구원과 원망이 있으며 질투와 절망이 있었다.

그리고 인정받고자 하는 발악과 체념,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일어선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뿌듯함이 있었다.

《파친코》에는 작가 자신이 미국에서 이민자로서 겪었던 감정과 성공한 삶을 살기 위해 했던 진솔한 노력이 잘 녹아 있다.

현실감 있고 민감한 이야기를 거시적인 배경과 굵은 플롯 구조로 풀어나간 《파친코》는 그렇기 때문에 대단한 흡입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미국 대표 매체 〈NPR〉은 “생생하고 흡입력 높은 《파친코》는 역사가 지우려고 하는 모습을 풍부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평하며 소설이라 믿기 힘들 만큼 현실적인 면모를 지녔다고 호평했다.

진부한 서사를 거부하고 정체성에 관해 치열하게 고민한 이민진의 작가 정신은 현대적이고 세련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시대를 아우르는 대작 《파친코》를 만들어냈다.

선천적인 이유로 상처 받아야 하는 이들에 대한 분노와 슬픔에서 탄생한 소설 《파친코》는 뼈아픈 시대적 배경 속에서 차별받는 이민자들의 투쟁적 삶의 기록이며 유배와 차별에 관한 작품이다.

정체성에 관한 의문과 끊임없이 마주하면서, 필사적인 투쟁으로 힘겹게 얻은 승리를 통해 깊은 뿌리로 연결되어 하나가 되어가는 이야기 《파친코》.

미리 이 책을 만나보았던 세계의 다른 독자들에게 그러했듯이,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깊은 여운과 만족을 안겨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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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 카슨 ‘침묵의(silent) 봄’

세계 곳곳에서 꿀벌이 집단 실종되고 있습니다. 꿀벌이 집단으로 사라진 정확한 이유는 아직 판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꿀벌이 사라진다는 것은 더 이상 식물의 자연스런 수정도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벌이 아니라 이제 사람이 꽃가루를 옮겨 수정을 해야하는데, 과연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꿀벌이 사라지는 잔인한 봄은 새의 울음이 사라지는 ‘침묵의 봄’을 떠올리게 합니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은 1962년 9월에 출판되었습니다. 생물학자인 카슨은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였던 ‘바다 3부작’으로 이미 알려진 작가였습니다. 그녀의 두번째 책 ‘침묵의 봄’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발견 중 하나”였던 DDT를 용감하게 고발했습니다. 카슨은 새가 울지 않는 미래의 봄날을 예상하여 당시 무분별하게 쓰이던 살충제 DDT의 위험성을 알렸습니다.

그동안 과학계가 이 위험을 전혀 모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3억 달러 규모’로 판매되고 있는 DDT의 위험을 공론화하는 것은 결단이 필요한 일입니다. 개인적으로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녀는 의무감에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유방암과 투병하면서 ‘침묵의 봄’을 집필했습니다.

‘침묵의 봄’은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되어, 2년 만에 100만부 이상 판매되었습니다. 1963년 4월에는 1,500만 명의 시청자가 “레이첼 카슨의 고요한 봄” CBS TV 스페셜을 시청했습니다. 5월에는 케네디 대통령의 과학 자문 위원회가 살충제관련 보고서를 발표해, 살충제 사용을 보다 제한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1970년 환경보호청이 설립되고, 1972년 마침내 DDT를 금지합니다. ‘침묵의 봄’은 전 세계적인 환경운동을 촉발하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당시 DDT는 마법 같은 과학의 성과로 간주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화학회사 입장에서 DDT는 큰돈이 되는 비즈니스였습니다. 카슨이 DDT를 비판하자 화학회사들은 출판사를 고소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카슨을 화학이나 농학을 공부하지 않은 비전문가라고 비판하는 과학자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카슨을 히스테리한 공산주의자라고도 비난했습니다.

출판된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1964년 4월 14일, 카슨은 유방암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카슨 죽이기’는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있습니다. 저개발국에서 DDT를 사용할 수가 없어 말라리아가 창궐했고, 결과적으로 카슨이 수 백만 명의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열대 지역의 많은 저개발 국가에서 DDT는 계속 합법적으로 사용되었고, 지금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DDT가 더 이상 예전처럼 효과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 원인은 모기에게 DDT 내성이 생겼고, 아무리 강한 살충제를 써도 잘 죽지 않는 모기가 창궐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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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정_인도미술

이른바 동양에서 미술이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미술품이 수집되어 미술시장이 만들어지기 전 미술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미술품은 과거에는 종교적 또는 생활에 필요한 그저 필요가 있는 일상품 이었습니다. 이제 동양의 그 일상적 몸짓들을 아름다움으로, 격이 다른 미술품으로 강희정교수가 불러주고 있습니다.

이번 북토크에서는 그 중, 불교가 시작된 인도를 집중적으로 조명했습니다. 서양의 기독교미술에 상응하는 것이 불교미술이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경우 1-2세기부터 힌두교가 불교와 발 맞춰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속의 권력은 사원(스투파)과 탑, 불상같은 종교의 권위를 이용해 주민들을 통합해 갔습니다. 순수하지 않다고,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도의 예술품이 독특한 아름다움을 표현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제대로 느꼈습니다. 특히 푸른 빛의 “비슈반타라 태자 본생도”에 시선이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귀한 푸른 빛, 왠지 모르게 매우 모던한 느낌때문이었습니다. 꼭 베를린 미술관에 가봐야겠다고 맘을 먹었습니다.

비슈반타라 태자 본생도, 키질 38굴 주실 천정, 30x27cm, 7세기, 인도 베를린미술관

인도의 대지의 여신이라 불리는 약시 (야크쉬니)는 풍만하고 요염했습니다. 여신조각은 신체의 비례 따위는 염두에 두지도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꺽인 다리의 관절이 오히려 묘하게 아름다울 뿐입니다. 이 조각도 역시 극도로 자유롭고 추상적입니다. 그래서 고전적이면서도모던하다고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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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4월 24일 부활절 반란이 시작되다.

영국 정부는 1801년 1월 아일랜드를 병합했다. 영국인은 부재지주로 아일랜드 토지를 차지했다. 감자가 전래된 후로 감자농사가 시작되어, 1800~1820년대엔 감자 농사는 주요 산업이 되었다. 상품상의 이유로 럼퍼라는 단일품종의 감자만 키우게 했고, 감자 잎마름병이 번져 아일랜드 들판의 감자가 모두 썩어 버렸다. 대기근으로 인구 6백만명의 아일랜드인 가운데 1백만명이 죽고, 1백만명이 미국은 물론 신대륙으로 이민을 떠났다.

1845~1849년 아일랜드 대기근은 토지와 독립이라는 두가지 이슈를 제기했다. 이후 평화적 자치요구와와 무장봉기가 맞서면서 독립의 길로 한발 한발 다가갔다.

1916년 4월 24일,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 이른바 부활절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더블린의 중앙우체국 본부를 장악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들의 부활절 봉기(Easter Rising)는 영국군의 압도적인 무력에 의해 닷새만에 진압되었다.

그러나, 1921년 아일랜드의 32개 카운티 중 26개 카운티가 아일랜드 자유국을 선언하면서 마침내 독립을 쟁취했고, 1949년에 독립 공화국이 되었다. (다만 북동부 6개 카운티, 곧 북아일랜드는 영국의 일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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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줄서평]팀 마샬의 ‘지리의 힘2’,호주 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왜 침공했고, 무엇을 얻으려고 하나?

이 질문에 역사 정치 경제적 관점에서 다양하게 답할 수 있다. ‘지리의 힘’저자 팀 마샬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지정학적 관점을 제시한다.

러시아 입장에서 ‘신이 우크라이나에 산맥을 펼쳤다면’ 프랑스와 독일의 러시아 침공이 억제됐을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 푸틴은 우크라이나가 EU에 가입하고 나토의 일원이 되면 러시아의 앞마당을 적대 세력에 내주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인류역사에서 모든 전쟁은 구체적인 이익에 의해 촉발되었다. 구체적인 이익의 핵심에는 잠재적 위협 제거와 교역망의 확대가 자리잡고 있다. 즉, 기득권을 적극적으로 지키려고 하거나 더 많은 이익 창출을 위해 전쟁을 하는 것이다.

팀 마샬은 ‘지리의 힘’을 통해 제국의 탄생과 지역 분쟁의 구조와 작동 메카니즘을 지리적 특성을 통해 명쾌하게 설파하였다. ‘지리의 힘2’는 오스트레일리아, 이란, 사우디 아라비아 그리스, 터키, 사헬 등 새로운 지역을 다뤘다. 특히 저궤도, 달 등 우주 공간까지 포함해 지정학적 연구 대상을 확장했다.

10줄요약_오스트레일리아, 지리적 위치와 면적이 강점이자 약점이 된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아무데도 아닌 곳의 한복판에 있다가, 매우 중요한 어딘가가 되더니, 이제는 중심 무대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오스트레일리아의 지정학적 조건

세계에서 6번째로 국토가 넓은 나라다. 사막부터 열대우림 눈덮힌 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후와 지형을 보여준다. 국토 70%는 아웃백(outback)이라고 알려진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다.

처음에 오스트레일리아에 이주한 유럽인들은 해안쪽에 모였는데 동부해안의 중간 지점인 브리즈먼에서 시작해 초승달 형태를 띠고 있다. 시드니, 캔버라, 멜버른을 거쳐 애들레이드로 내려가면서 해안을 빙 두르고 있는 모습이다.

2.해상 방위의 중요성

나라의 면적과 위치는 강점이자 약점이 된다. 외부의 침략에는 안전했지만 정치적 발전은 더딜 수 밖에 없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장거리 교역망이 필요하고 해상항로 지킬 수 있는 강력한 해군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방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외교 정책 국방 문제에 이르렀을 때 이 나라의 출발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된다. 지리적 조건의 제약을 받는 것이다.

3.봉쇄와 차단의 위험에 노출된 지정학적 조건

오스트레일리아의 지리적 조건은 침공하기 어렵게 만든다. 적이 북쪽에서 상륙해도 전체를 장악하기 어렵고, 3천2백킬로미터 떨어진 시드니까지 쳐들어가기도 어렵다.

그런데 봉쇄와 차단에 속수무책이 될 경우가 있다. 대부분의 수출입 상품들이 북쪽의 해협을 드나들고 있어 말라카, 순다, 롬복해협을 봉쇄해 버릴 수 있다. 말라카 해협은 인도양에서 태평양으로 가는 최단거리 노선이다. 이 해협이 봉쇄된다면 오스트레일리아는 순식간에 에너지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방위전략은 북쪽 해협 봉쇄에 대비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원유수송선을 호위할 용도로 전함 잠수함 원거리 해상 초계기를 확보해두고 있다.

4.미국 중심의 우방 전략

오스트레일리아는 해군력에 막대한 비용을 쏟아붓는 것 못지 않게 동맹을 신중하게 고르는 등 외교력에도 힘을 모으고 있다. 이 나라 정부는 누가 해상 주도권을 쥐고 있는가에 늘 촉각을 곤두 세우고 있다.

2차 대전은 영국간 군사 관계에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발발한 것을 기점으로 미국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1943년 15만명의 미국이 오스트레일리아에 배치되었고, 시드니와 퍼스에 미군함이 정박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군사력 일부는 제공하고 미 해군은 국제 해상 항로를 열어두게 하면서 핵우산을 제공하고 있다. 그 대가로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걸프전 이라크 전쟁에 자국의 부대를 파견하였다.

미국은 다윈항에 기지를 설치하고 2천5백명의 해병대를 주둔시켜 오스트레일리아를 수호할 의지가 충분하다는 신호를 주고 있다.

5.중국의 부상

오스트레일리아에게 딜레마다 생겼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북쪽에 위치한 중국이 부상한 것이다. 중국 관광객 140만명이 방문하고 해외 유학생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수출 농산품의 3분1을 사들이고 있다. 철광석, 천연가스, 석탄, 금 등 천영자원의 주요 고객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국의 큰 관심사는 영유권주장과 영향력 확장이어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이해와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6.중국의 남진 전략

중국은 남중국해의 80%가 지리적 역사적으로 자국에 속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 본토에서 1천6백여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바위들에게 시멘트를 쏟아붓고 섬(인공섬)이라 부르며 그 위에 활주로를 건설하고 레이더와 미사일을 배치하고 있다.

중국은 파푸아뉴기니의 다루섬에 대규모 어업단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향후 중군 군함용 항만이 건설될 수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입장에서 언제가 중국의 GDP와 군사비가 미국을 넘어서게 될 경우도 대비해야 한다.

중국의 이런 남중국해 군사행보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중국이 일본부터 필리핀까지 내려가는 제1열도선 밖을 타격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중국의 전략적 목표가)인도네시아 남부와 필리핀까지 포함하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고 있다. 이 범위안에 반다해와 파푸아 뉴기니 해안까지 포함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7.중국의 남태평양 전략

남태평양을 둘러싼 싸움도 시작되었다. 바누아투, 피지 등 태평양에 있는 여러 섬을 대상으로 중국과 원조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은 코로나19사태가 터지자 지원물자를 실은 항공기를 바누아투에 재빨리 보냈다.

중국의 기술력과 힘은 오스트레일리아를 넘어서고 있다. 중국 탄도 미사일의 사정거리 또한 오스트레일리아를 에워싼 바다조차 소용없게 만들어버렸다. 사이버 무기를 갖고 있다면 주요 기반 시설이 사이버 공격을 받으면 전 세계 어느 나라치고 심각한 피해를 입지 않을 나라가 없을 것이다.

8.중국 견제

오스트레일리아는 화웨이를 퇴출시키는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모리슨 총리는 코로나 19 발원지 조사에 전 세계가 참여해주기를 요청했는데 중국은 이를 중국에 대한 공격으로 보았다.이에 중국은 오스트레일리아산 소고기 라벨을 문제삼으며 유통과 수입을 금지했다. 보리와 철광석을 걸고 넘어졌고, 오스트레일리아는 사이버 공격을 받고 배후로 중국을 의심하고 있다.

9.미일 동맹 강화 전략

오스트레일리아는 일본과 합동훈련 상호군사 방문 등 군사협력 관계를 발전시키고 있다. 쿼드는 동맹국 체제라기 보다 미국 인도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등 4개 나라 해군이 태평양에서 협력하는 전략적 협의체라는 측면이 강하다. 늘 해상항로를 열어두고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는데 힘을 합치는 것을 지향한다.

뉴질랜드, 한국 베트남가지 포괄해서 쿼드 플러스라는 구상까지 하고 있다. 한국과 베트남은 중국의 지리적 인접성때문에 조심스럽게 두드려 보고 있는 입장이다.

10.인도-태평양을 하나로 보는 새로운 시각

인도-태평양을 아프리카 동부해안부터 미국 서부해안까지 뻗어 있는 것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구식으로 여겨졌던 이 관점이 세상이 변하면서 다시 뜨고 있다.

서쪽으로 인도양을, 동쪽으로 태평양을 두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는 북쪽으로 중국이라는 거대한 세력을 두고 있다. 베이징과 건설적인 대화를 이끌어가고, 미국과는 방위를 비롯한 여러 고리를 유지하는데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지만 어쨌거나 힘든 경기를 치러야 할 것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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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격변의 1920년대

미국의 20년대는 극적인 사회적, 정치적 변화의 시기였습니다. 처음으로 도시에 사는 인구가 농촌인구 보다 많았습니다. 1920년에서 1929년 사이에 국가의 부가 두 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이러한 경제성장 덕분에 소비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전국적으로 체인점이 설립되었고, 동일한 포맷의 광고가 선전됩니다. 미국 전역에서 같은 물건을 사고,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춤을 추고, 같은 속어까지 사용했습니다. 많은 미국인들은 이 새롭고 도시적이며 때로는 요란한 ‘대중 문화’에 물들어갑니다. 특히 미국 대도시에 사는 소수의 젊은이들에게 1920년대는 그야말로 활활 타오르는 광란의 시기였습니다.

The New Woman

‘광란의 20대’의 상징은 플래퍼(Flapper)입니다. 재즈 시대의 자유분방하고 젊은 여성들과 그들의 문화를 지칭합니다. 젊은 여성들은 단발머리에 짧은 치마를 입었습니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여성스러움을 던져 버렸습니다. 이전 보다 성적으로 더 자유로워 졌습니다. 물론 여전히 일부였지만…

1920년 비준된 수정 헌법 19조에 근거해, 여성은 마침내 투표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모든 여성이 위협 없이 투표권을 완전히 행사할 수 있기까지는 수십 년이 걸렸습니다. 수 백만 명의 여성이 사무직으로 일했고, 스스로 번 돈으로 당당하게 소비할 수 있었습니다. 피임 장치가 만들어졌고, 자녀 수는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세탁기와 진공 청소기와 같은 새로운 가전제품으로 가사 노동에서 일부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매스커뮤니케이션과 소비주의

1920년대 여유가 생긴 미국인들은 기성복이나 전기 냉장고와 같은 가전 제품에 구매했습니다. 특히 그들의 최애 아이템은 라디오였습니다. 미국 최초의 상업 라디오 방송국인 피츠버그의 KDKA는 1920년에 전파를 탔습니다. 3년 후 전국에 500개 이상의 방송국이 생겼습니다. 1920년대 말까지 1,200만 가구가 라디오를 소유했습니다. 사람들은 또한 영화를 즐겼습니다. 미국 인구의 4분의 3이 매주 영화관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1920년대의 가장 중요한 소비재는 자동차였습니다. 1924년 Ford Model T의 가격은 260달러에 불과했습니다. 자동차 금용 덕분에 자동차는 곧 ‘저렴한 사치품’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동차는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1929년 미국인 5명당 1대의 자동차가 도로에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자동차 경제가 탄생했습니다. 주유소, 모텔 같은 기업이 운전자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생겨났습니다.

재즈 시대

자동차는 또한 젊은이들이 원하는 곳으로 가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습니다. 젊은이들은 음악을 즐기고, 춤을 추고 싶어했습니다. 재즈 밴드는 뉴욕, 시카고 등에서 인기리에 연주되었습니다. 라디오 방송국과 축음기 레코드(그 중 1927년에만 1억 대가 판매됨)로 미국 전역애 재즈를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일부 나이든 사람들은 재즈 음악의 ‘저속함’과 ‘악덕’에 반대했습니다. 그래도 젊은 세대의 많은 사람들은 댄스 플로어에서 느끼는 자유를 사랑했습니다.

금지와 갈등의 시대

1920년대, 자유로워지기도 했지만 금지와 갈등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1919년에 비준된 수정 헌법 18조는 ‘술’의 제조 및 판매를 금지했습니다. 1920년 1월 16일 오전 12시에 미국의 모든 술집이 폐쇄되었고, 갱단에 의해 지하화 되었습니다. 시카고 갱단의 알카포네는 수백만 달러 규모의 사업을 장악했습니다. 알 카포네는 천 여명의 총잡이와 시카고 경찰의 절반에게 월급 또는 뇌물을 주었다고 합니다.

1920년대 대규모로 흑인들은 북부나 서부의 대도시로 이주합니다. 흑인들은 자동차, 철강, 조선 및 육류 포장 산업에서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재즈와 블루스 음악, 할렘 르네상스 같은 흑인 문화의 가시성이 높아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정치적 권리와 시민권을 위해 싸웠습니다. 20세기 들어 처음으로, 1928년 시카고에서 흑인인 오스카 드 프리스트가 연방 하원의원으로 선출됩니다. 이에 반감을 가진 백인들은 1920년대에 남부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Ku Klux 클랜(KKK단)’ 에 합류했습니다. ㄱ

이렇듯, 1920년대는 미국의 경제와 삶, 인구구성(Demographic Shifts)이 크게 변화하는 시기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와 가치가 충돌하는 그야말로 격변의 시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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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표 ‘명품의 탄생’

이광표 교수는 익숙한 화가들의 미술사가 아니라 수집(가)의 미술사를 이야기합니다. 수집의 각도에서 보니 더 귀를 쫑끗하게 듣게 됩니다. 뭐랄까 더 역사적이고 현실적입니다.

그저 일상용품에 지나지 않았던 고려청자나 달항아리, 조각보는 어떻게 명품이 되었을까요? 이광표 교수는 누군가가 또는 어떤 사건이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흥미로운 사례가 많지만, 그 중 기업에 남는 것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화가 김환기는 18세기의 그냥 백자를 ‘달항아리’로 불러주었습니다. 그의 그림, 달이 뜬 하늘과 화실에 놓인 달항아리…. 더이상 말이 필요없습니다.

김환기 1957년작 `화실`(99.5x72.5㎝).   [사진 제공 = 서울옥션]

1932년 경주 영묘사 터에서 와당이 발견됐습니다. 연꽃 무늬 와당이 대부분이었는데, ‘여자의 웃는 얼굴’이 발견된 것입니다. 일단 매우 희귀했습니다. 7세기 경에 만들어졌는데도 파격적이고 모던까지 했습니다.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첫눈에 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신라의 미소’라고 부르는 얼굴무늬 수막새 바로 그 와당입니다. 

미술애호가로 유명한 방탄소년단 리더 RM은 ‘이건희 컬렉션’을 전시하는 대구미술관을 방문했습니다. RM은 추상화가 유영국의 1970년대 ‘산’ 연작 앞에서 인증 사진을 남겼습니다. 그 덕분에 개막 한 달 만에 2만명 넘는 관람객이 대구미술관에 다녀갔습니다. RM이 ‘사건’, ‘일’을 만들어냈습니다.

‘명품의 탄생’은 옆에 두고 있다가, 궁금할 때 마다 펼쳐보면 좋을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