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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백신? 이젠 치료제?

이제 코로나 시대가 끝나가는가 싶다. 오미크론이 세계를 한 번 휩쓸고 지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고 싶다. 그런데 새로운 변이 바이러스가 출현할 수도 있고, 코로나 19가 풍토병으로 남을 수도 있다고 한다.

이 시점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백신접종 완료 후에도 새로운 변이를 계속 걱정해야 할까? 치료약을 개발하는데 왜 이렇게 긴 시간이 걸리는가? 다음 번 코로나가 또 올 것인가? 온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먼저 백신 접종을 완료해도 새로운 변이인 오미크론에 걸릴 수 있는 이유를 살펴보자. 화이저(Pfizer), 아스트라제네카(AstraZeneca) 등 세계적인 제약회사들이 만든 백신들은 모두 바이러스의 표면에 있는 막 단백질 즉 ‘스파이크’ 단백질을 타겟으로 개발되었다. 이 스파이크 단백질은 이름 그대로 삐죽삐죽 튀어나온 형태를 가지고 있어서, 인체의 세포 표면에 있는 다른 단백질과 결합한다. 이를 통해 바이러스가 세포 안으로 침입하는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입체 모델. 표면의 스파이크(돌기, 붉은색) 단백질을 호흡기 세포에 결합시켜 침투한다./미 CDC

백신 접종을 완료해도 오미크론에 감영되는 이유도 이 스파이크 단백질의 변이에 있다. 스파이크 단백질에 변이가 생기면 준비되었던 면역세포와 항체가 무력화 되는 것이다. 물론 스파이크 단백질이 완전히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백신접종은 감염 확률도 낮추고, 중증으로 가는 것도 예방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백신 개발이 어려웠던 경우가 있었다.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AIDS)을 일으키는 HIV, 독감을 일으키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그 사례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끊임없는 변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변이을 통해 면역 체계를 피해가기 때문에, 백신접종으로 코로나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없다. 이들은 아마도 풍토병과 계절병의 원인 제공자로 인류와 계속 같이 할 동반자(?)로 봐야 한다.

다시 말하면 백신으로는 충분한 예방이 불가능하다. 코로나의 경우 변이 종이 지속적으로 나타날 것이고, 새로운 동물 유래 바이러스가 다시 인간을 감염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럼 우리의 해법은 무엇인가?

가장 성공 가능성이 높은 해법은 바로 HIV의 경우에서 찾을 수 있다. 한때는 걸리면 바로 사망으로 이어지던 ‘에이즈’는 이제 관리가 가능한 만성질환으로 간주된다. 관리의 방법도 당뇨나 고혈압과 유사하게 치료제를 장기 복용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HIV는 막 단백질 외에도 다양하고 독특한 단백질을 만들어 숙주 세포 내에서 새로운 바이러스를 생산한다. 이 중 효소 기능을 가진 단백질을 대상으로 억제제가 다수 개발되었다. 일반적으로 효소 단백질은 막 단백질에 비하면 변이에 취약하다. 즉 변이가 효소의 기능을 망가뜨려 바이러스의 복제와 생성 과정이 저해되는 것이다. 때문에 변이를 통해 억제제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쉽지 않다.

막 단백질의 변이는 겉모습만 바꾸는 성형 수술 같아 변이가 바이러스의 복제와 생성에 미치는 영향이 적다. 오히려 앞에서 밝힌 대로 면역체계를 피해가는 장점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반면 효소 단백질의 변이는 생존에 필수적인 장기를 이식하는 것과 같아 변이가 어렵고 변이가 어려우면 약의 효과를 피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런 효소 단백질의 특성을 이용하여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었다.

특히 여러 종의 약을 병용하여, 여러 효소 단백질을 동시에 억제하면 간혹 생기는 변이를 통해 내성이 생기는 것도 효과적으로 방지할 수 있다. 바이러스에게도 동시에 생기는 여러 변이는 지나친 부담인 것이다. 심장, 폐, 간, 신장 이식 수술을 한번에 받는 것이 견디기 힘들지 않겠는가? 이렇게 여러 약을 동시에 쓰는 것을 칵테일 요법이라고 한다. 여러가지의 술, 과즙, 색소 등을 섞어 만드는 혼성주를 통칭하는 칵테일에서 유래된 용어이다.

다시 코로나 19로 돌아가 보자. 풍토병으로 자리잡을, 변이에 능한 이 바이러스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결국은 HIV의 경우와 같이 치료제가 답이 될 것이다. 팬데믹 시작과 함께 여러 제약회사에서 약 개발이 시작되었고 임상에서 쓰이는 약이 이미 다수 나온 상태다. 다만 백신보다 늦은 등장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관심을 끌고 있지 못했던 것뿐이다.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화이자(Pfizer)사의 팍스로비드는 실은 기적적으로 빨리 출시된 약이다. 일반적으로 임상 시험을 포함해 치료제 하나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10년 이상의 기간이 필요하다. 다행히 화이자는 이미 치료제 후보 물질을 가지고 있었다. 2003년 전세계를 공포에 빠트렸던 사스 바이러스를 대상으로 개발되었던 다수의 후보 물질이다. 사스 바이러스도 코로나 바이러스의 일종이기 때문에 후보 물질 중 하나였던 팍스로비드가 효과를 보이는 것이다. 

‘팍스로비드’ 는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효소 단백질을 억제할 수 있다. 이는 에이즈의 치료제와 같은 원리이다. 많은 과학자들은 코로나 19가 팍스로비드에 내성을 보이지 못할 것으로 예상한다. 즉 타겟 단백질의 변이는 코로나 19의 복제 기능을 억제해 바이러스 부하를 현저히 떨어트리기 때문이다. 설사 변이를 통해 팍스로비드에 내성이 생긴다 하더라도 계속 개발되고 있는 여러 약의 칵테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에볼라와 인플루엔자, 그리고 코로나 20을 포함한 모든 바이러스 질병을 같은 논리와 작전으로 접근하여 해결할 수도 있다. 그런 세상이 오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자연을 통제하겠다는 인간의 오만은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올 수도 있다. 그래서 조심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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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4년 4월 12일,십자군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다.

십자군전쟁은 11세기 말부터 약 2세기에 걸친 종교전쟁이었다. 카톨릭 교도가 이슬람에게서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초기에는 본래의 목적, 예루살렘의 지배권을 두고 카톨릭 진영과 이슬람 진영은 치열한 각축을 벌였다.

초반의 숭고한 대의는 시간이 흐르면서 변질됐다. 장거리 원정대를 보내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고, 비용을 부담하는 세력이 원정의 성격을 결정했다.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십자군의 4차 원정이 특히 그러했다.

1201년 이집트를 공략할 4차 십자군 원정부대 3만여 명을 모집하고, 베네치아가 준비한 500척의 선박으로 이동하는 계획이 수립됐다. 베네치아가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했던 무역도시였기 때문에 이른바 물주역할을 했다. 그런데 예상인원의 3분의 1만이 베네치아에 모였고,이들은 베네치아에 약속한 비용을 낼 능력이 없었다. 베네치아는 대신 헝가리의 항구도시 차라를 공격할 것을 요구했고, 십자군은 성공했다. 교황은 같은 카톨릭을 공격한 십자군 모두를 파문했다.

마침 권력투쟁 중이었던 비잔틴(동로마) 황제는 용병으로 십자군을 불러들였다. 허나 제국의 내분으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그러자 십자군은 바로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고, 도시에 대한 약탈과 살육이 사흘 동안 이어졌다. 이때 약탈된 재산은 십자군과 베네치아가 나누어 챙겼다. 베네치아는 원정의 결과로 경쟁도시인 제노바를 제치고 지중해 무역의 주도권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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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러]지정학 전도사, 팀 마셜

30여 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한 외교 전문가이자 국제 문제 전문 저널리스트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 터키 특파원과 외교부 출입기자, 영국 스카이뉴스 채널에서 외교 관련 기사 편집을 맡았으며, 그 전에는 영국 BBC와 LBC/IRN 라디오에서 일했다.

발칸 전쟁과 코소보 내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 리비아와 이집트 등을 휩쓴 ‘아랍의 봄’ 혁명의 현장에서 보도를 했으며, 1991년 걸프 전쟁 때 스카이뉴스 특파원으로서 ‘여섯 시간 연속 생방송’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금까지 취재를 위해 방문한 나라만 40개국이다.

《타임스》, 《선데이 타임스》, 《가디언》, 《인디펜던트》, 《데일리 텔레그래프》 등 여러 신문에 글을 썼으며, 저널리스트와 정치인, 시사 전문가들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TheWhatandtheWhy.com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그의 블로그 ‘포린 매터스Foreign Matters’는 우수 정치 저술에 주는 상인 오웰상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이자 미국, 영국, 독일, 한국 등 20여 개국에서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은 《지리의 힘》은 세계사를 결정한 주요 요소 중 하나인 지정학을 바탕으로 경제 전쟁, 세계의 분열, 영유권 분쟁, 빈부 격차 등을 살펴보며 지리에 대한 핵심적인 통찰력을 제시했다.

그가 이번에는 ‘깃발’에 눈길을 돌린다. 수천 년 동안 깃발은 인류의 꿈과 희망을 상징했다.

사람들은 깃발을 흔들고, 태우고, 들고 행진하며 자신의 감정을 투여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건다.

이 책은 9.11테러 이후 세계무역센터 폐허 위에 성조기를 꽂은 미국, 그 성조기를 저주하고 화형시키는 중동, ‘심판의 날’을 위해 옥상에서 수백 개의 검은 깃발을 날린 IS, 해양 약탈의 역사가 담긴 해적 깃발,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으로 깃발조차 만들지 않았던 중국, 전 세계적인 스포츠인 월드컵의 축구공에 자신들 국기를 새기지 말라며 항의한 사우디 등 110여 개 깃발에 담긴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추적한다.

이 책은 단순히 깃발에 담긴 상징만 살펴보지 않는다.

천 조각 하나가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시각적으로 사로잡아 한 나라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열정을 발동시키며, 깊이 존경하게 만들고, 공동체를 통합시킬 수 있는지 이야기한다.

나아가 깃발에 담긴 갖가지 사례들로 적나라한 인간의 열망, 권력 다툼의 민낯까지 드러낸다. 이제 슬픔, 용기, 영웅주의, 반항을 불러일으키는 상징, 집단적인 인내와 노력의 혼합체인 이 깃발들을 반갑게 맞이할 때다.

저서소개_지리의 힘2

전 세계 30개국 출간, 150만부 판매

뉴욕 타임스, 선데이 타임스, 슈피겔 베스트셀러인 <지리의 힘> 제2탄

세상은 정신없이 돌아가지만 지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지리는 우리의 발목을 잡기도, 우리 편이 돼주기도 한다.

우리의 수많은 선택은 우리가 서 있는 곳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지리적 요인은 지금도 이 세계를 요동치게 만든다.

이념은 스쳐 지나가도 지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그동안 세상은 정신없이 돌아가면서 엄청난 속도로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지리는 그 어떤 변동도 없이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미국과 소련이 세계를 이끌어가던 20세기 중반의 냉전체제가 종식되면서 이념 전쟁도 종식되는 등 급격한 변화를 겪었지만 지리는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다.

즉, “이념은 스쳐 지나가도 지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한 나라나 국제 정세에는 개개의 지도자들의 성향과 이념, 기술 말고도 여러 요인들이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그 영향은 일시적이다.

하지만 세대가 바뀌어도 힌두쿠시 산맥과 히말라야 산맥이 만들어낸 물리적 장애물, 우기에서 비롯된 난관들, 천연자원이나 식량 자원에 대한 제한적인 접근 등은 피할 수가 없다. 결국 이념은 스쳐 지나가도 지리적 요소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대로 남는다.

모든 나라의 이야기는 그 <위치>에서 시작된다

전편인 『지리의 힘』과 마찬가지로 이번 책 또한 산, 강, 바다 등을 조망하고 지정학적 현실에 대한 이해를 구체화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지리는 인간이 할 수 있거나 할 수 없는 것을 제한하는 주요한 요소다. 물론 정치인들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지리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한다. 현재와 미래에 사람들이 내리는 결정은 그들의 물리적 배경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어느 나라든 그들의 이야기는 이웃 나라들, 바닷길, 천연자원 등과 관련된 그 〈위치〉에서 시작된다.

미국과 소련의 양대 강국 시대에서 벗어나 새로운 열강들이 등장하는 21세기

미국과 소련이 전 세계를 지배했던 냉전시대는 이제 아득한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 우리는 새롭게 등장하는 열강들이 서로 대립하는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수많은 주연 배우들은 물론 단역 배우들까지도 서로 밀치며 중앙 무대로 들어서기 위해 혈투를 벌인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대기권 위의 달과 그 너머까지에 대해서도 권리를 주장하는 나라들이 등장하면서 지정

학적 드라마는 지구 영역 바깥으로까지 튀어 나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미래를 구성할 힘을 가진 또 다른 선수들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저 멀리 남쪽 끝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시작해 우리 머리 위 저 높은 곳 우주까지

전작이 러시아, 중국, 미국, 유럽, 중동, 아프리카, 인도와 파키스탄, 일본과 한국, 라틴 아메리카, 북극 등 지정학적 거대 블록에 초점을 맞추면서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면, 이번 책에서는 다극화 체제로 전환된 세계에서 광범위한 파급력을 몰고 올 지역들을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 특히 현재 지정학적 갈등을 겪고 있는 지역에서 21세기에 발생한 사건과 분쟁들을 다루고 있다.

세계화, 반세계화, 코로나19, 테크놀로지와 기후변화 등은 하나같이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이 책에서도 주요 주제로 다루고 있다. 이들 요소들이 지리와 합쳐지면서 우리 시대의 분쟁과 갈등은 아직도 끊이질 않고 있다.

지리적 요인은 지금도 이 세계를 요동치게 만든다

중동 지역에서는 광활한 요새인 이란과 그 숙적인 사우디아라비아가 페르시아만을 마주한 채 맞서고 있다.

태평양 남쪽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가 우리 시대 최강국인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자리매김하려고 애쓰고 있다.

지중해에서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리스와 터키 간의 뿌리 깊은 갈등이 당장 내일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보인다.

이집트 농부들은 아직도 에티오피아에 물을 의존하고 있다. 아테네 북부에 있는 산은 여전히 유럽과의 교역에 발목을 잡고 있다. 사람들이 현안에 대해 투표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리가 숙명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겠으나 중요한 것은 분명하다.

제국들은 부상했다가 쓰러진다. 동맹들은 손을 잡았다가 놓기도 한다.

히틀러가 꿈꾸던 천년 제국은 고작 10년을 웃돌았다. 따라서 다가오는 시대에 어떤 식으로 〈힘의 균형〉이 바뀔지 정확히 예측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경제적, 지정학적 공룡들이 여전히 국제 정세를 부여잡고 뒤흔들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 EU의 각 나라들, 또 인도처럼 급속히 성장하는 경제 강국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보다 작은 나라들이라고 간과할 수는 없다. 지정학은 동맹을 끌어들이며, 끊임없이 요동치는 현 세계 질서에서 강대국들은 반대편 못지않게 그들 편에 설 약소국들이 필요하다.

지리는 <양날의 검>이다. 지리는 적이자 동맹이 될 수 있다.

지리적 위치와 면적이 강점인 동시에 약점이 되는 <오스트레일리아>,

종교를 앞세워 전 세계와 기싸움을 하며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신의 과업을 수행하는 <이란>,

석유로 부를 쌓았지만 석유시대의 종말을 대비해야 하는 <사우디아라비아>,

통합 왕국을 이루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지만 지리 때문에 유럽에 대한 소속감이 덜한 <영국>,

고대부터 현재까지 지정학적 화약고가 되어왔던 <그리스>,

오스만 제국의 부활을 꿈꾸지만 이웃 나라들과 끊임없이 충돌하며 민주주의로 가려다 이슬람 사회로 방향을 틀고 있는 <터키>,

그래도 지리가 최고의 동맹이자 성공의 한 축을 맡고 있는 <에티오피아>,

한번도 지리가 그들 편에 선 적이 없는 <스페인>,

그리고 향후 최첨단 무기들의 격전장이 될 위험이 있는 <우주>.

이들 지역 모두는 지리가 적이 되는 곳이고, 지리가 가장 가까운 동맹이 될 수 있는 지역이다.

30여 개의 지도와 함께 살펴보는 세계 주요 지역의 지정학적 현실

특히 저자는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30여 개의 지도를 통해 경제 전쟁, 세계의 분열, 영유권 분쟁, 해상 항로를 두고 벌이는 탐욕과 경쟁 등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지도와 함께 현재의 지정학적 갈등의 원인을 살펴보면서 결국 모든 것은 <지리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세계사를 결정한 주요 요소 중 하나인 지리에 대한 핵심적인 통찰력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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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4월 10일, 핑퐁외교의 시작

1950년 한국전쟁 이후, 20여년간 미국과 중국은적대관계를 지속했다. 닉슨 대통령(1969~1974년)이 취임하면서, 미국은 중국과 대화 채널을 만들고자 했다. 1971년 일본 나고야 세계탁구 선수권대회가 끝나고, 중국은 그 대회에 참석한 미국선수단15명과 기자 4명을 공식 초청했다. 이 친선경기로 두 나라는 우호적인 접근을 시작했고, 그 해 7월 미국의 헨리 키신저가 베이징을 극비리에 방문했다. 72년 2월 닉슨대통령이 베이징 방문하여, 미국과 중국은 ‘상하이 코뮈니케’를 발표했다. 그러나 두나라의 공식수교는 1979년 1월로 미루어졌다. 1978년 등소평이 복권되고, 카터대통령이 대만과의 단교를 수용한 이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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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브리너의 여름 추억, 노비나를 아시나요?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고 난 뒤, 러시아는 4년 동안 내전으로 대격변을 겪었다. 1922년 10월 붉은 군대가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하자, 말하자면 반혁명세력이었던 백계 러시아인들은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 초 한반도는 백계 러시아인들의 피난처였다.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상하이, 일본, 샌프란시스코 등지로 다시 떠났다. 그 중 일부는 한반도에 남아 정착하였다.이들은 식민지 조선의 ‘경성’과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에 작지만 흥미있는 러시아 공동체를 만들었다.

특히 ‘노비나’라 불리는 함경북도의 백계러시아인은 ‘얀코프스키’ 일가는 주을에 정착하였다. 미하일-유리-발레리 3대에 걸친 얀코프스키 일가의 디아스포라 삶이 시작되는 곳이다. 발레리 얀콥프스키의 가족사는 1945년 10월호「내셔널지오그래픽」에 ‘한반도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냥꾼’ 이라는 특집 기사로 실린 적이 있다. 그 만큼 얀코프스키 일가는 호랑이 사냥군으로 유명했다.

‘얀포크스키’ 일가는 폴란드계 러시아인이었다. 러시아가 폴란드를 지배하던 1863년 무렵 모스크바 근처 대학을 다녔던 미하일 얀코프스키는 폴란드 독립투쟁에 가담했다가 시베리아로 유배당했다. 1868년 사면을 받은 미하일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하고, 러시아와 중국 국경을 가르는 아무르강을 오르내리며 국경 무역을 시작했다. 이와 함께 말 사육농장을 운영하여 큰돈을 벌었다. 미국까지 유학해 말 목축과 농장운영법을 배워온 유리 얀코프스키 덕분이었다. 사슴 사육을 시작해 녹용을 채취했고, 인삼 재배까지 했다. 1917년 무렵 얀코프스키 일가의 재산은 요즈음 가격으로 2000만 달러(200억원) 정도였다고 한다.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 세력들은 마침내까지 블라디보스톡까지 진군하였다. 자본가 세력으로 낙인 찍힌 얀코프스키 일가는 1922년 60명의 가족과 친척, 농장 일꾼들과 함께 야반도주해서 찾아간 곳이 청진이었다. 얀코프스키 일가는 다시 맨손으로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의 상황을 3대손인 발레리 얀코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재벌로 통했던 우리 가족들은 하루아침에 거지 신세가 됐지요. 하지만 낙담하지 않았어요.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당시 하르빈으로 망명해 자리를 잡은 러시아 출신 자본가들을 찾아가 신용 대출을 요청했어요. 그들이 흔쾌하게 대출해 줘 그 돈으로 청진에서 기반을 잡았습니다”(월간조선)

조선에서 얀코프스키 일가를 다시 세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얀코프스키 일가는 일본인과 사업을 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1926년 무렵 2대인 ‘유리’는 일본군에 식량을 제공하는 계약을 체결했고, 이를 통해 재기할 수 있었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과 먼 친척인 (율 브리너의 아버지) 보리스 브리너에게 돈을 더 빌려 주을에 가옥과 대지를 구입했다.

얀코프스키 가족은 1928년 동해안의 주을온천으로 이사 갔다. 그의 아버지는 주을온천 주변에 큰 별장을 지었다. 청진에서 남쪽 50km 떨어진 해안가였다. 이곳에 온 가족이 살 수 있는 별장과 성당 등 부대시설을 만들었다. 다차에서 러시아에서 받았던 것처럼 가정교사를 두고 모든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얀코프스키 일가는 그곳에 ‘노비나’라는 이름을 붙였다. 노비나는 폴란드 국가 휘장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노비나는 1926년에서 1945년까지 19년 동안 유지되었다. ‘메밀꽃 필무렵’의 작가 이효석도 당시의 노비나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온천에서 삼마정쯤 들어간 산골은 망명해 있는 외국 사람의 부락 ‘노비나’ 촌이라는 것인데, 여름이 되면 그 부락이 피서지로 변해서 도회에 있는 외국인들이 한동안 모여들곤 했다’

그 시기에 얀코프스키 일가는 농장, 가축 사육, 사냥, 휴양지로 돈을 벌었다. 이곳 휴양지에 대한 뉴스가 아시아는 물론 유럽까지 널리 퍼졌다. 중국·일본·한국 등에 사는 외국인들이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찾았다. 2세대인 유리 얀코프스키는 처음으로 한국에서 사파리 프로그램까지 개발했다고 한다. 당시 스페인·중국·미국·일본 등에서 사냥꾼들이 몰려왔다.

전시체제로 들어섰던 1930년대 말에도 얀코프스키는 노비나 근처의 해안가에 또 다른 휴양지를 지을 수 있었다. 그 휴양지는 ‘루코모리예’라고 이름을 붙였다. 일본인들은 그것을 ‘류켄’으로 불렀다고 한다. 노비나와 루코모리예는 1930년대 내내 조선과 하얼빈, 북경, 상하이에서 온 백계 러시아인들의 휴양지가 되었다.

디아스포라 러시아인들은 교회당, 극장, 묘지까지 갖추고 있는 이여름 휴양지를 ‘진정한 러시아적인 보금자리’로 여겼다. 세월이 꽤 흐른 뒤에도 백계 러시아인들은 노비나를 ‘낙원’과 ‘동화의 세계’로 기억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서머 코리안 보이’라고 불렸던 율 브리너였다. 율 브리너 집안은 얀코프스키일가와 친척의 연이 있어, 하얼삔에 살던 율 브리너는 여름이면 노비나를 방문하곤 했다.

태평양 전쟁은 노비아와 얀코프스키일가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렸다. 1945년 8월에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자, 3대인 발레리 얀코프스키는 살아남기 위해 소련 군대에 자원 입대했다. 일본 경찰·관리·헌병을 심문하고 재판할때 통역업무를 담당했다. 그러나 1946년 1월, ‘국제 자본가의 앞잡이’와 ‘일본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유형에 보내졌다. 스탈린 사후 복권되어 마침내 블라디보스톡에 정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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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스봄이 재즈를?

벌써 10년전인 2012년, 변화무쌍한 격동의 한 세기를 살았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9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던 1917년에 태어났고, 오리지널 딕시랜드 재즈 밴드는 1917년에 최초의 재즈 녹음을 남겼다.

홉스봄은 강렬한 기억에 남은 10대 시절의 두 가지 일화를 말했다. 1933년 독일 공산당의 집회에 참여해 구호를 외치고 노래한 뒤 “무아지경에 빠진 채” 집으로 돌아왔던 일, 이후 런던으로 이주해 가진 돈을 모두 털어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재즈공연을 본 뒤 새벽녘까지 걸어서 집으로 돌아온 일이다. 첫사랑을 느낄 만한 열여섯 일곱 무렵에 재즈가 첫사랑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고…

나치가 권력을 잡을 무렵인 1933년, 그는 그렇게 재즈와 만났다. “내 인생의 3분의 2를 나는 재즈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끈끈한 교감을 나누며 살았다.”고 회고했다.  그재즈에 대한 홉스봄의 애정은 비평가로 그를 이끌었다. 그는 1950년대 중반부터 ‘프랜시스 뉴턴’이라는 필명으로 본격적인 재즈 비평을 시작, 그 글들을 모은 책 <재즈 동네>를 남겼다. 《재즈,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음악》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출간을 허락한 유일한 재즈 책이다

홉스봄은 편견없이 지적인 방식으로 재즈에 대해 ‘왜?’라고 물은 거의 최초의 인물이다. 이책에서 그는 역사 속에서 이름 없이 사라져가던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비범한 음악’ 재즈를 만들어 냈는지를, 그리고 재즈가 하층민들의 음악에서 교양인들의 음악으로 올라서며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는 인류사에 드물게 나타난 음악 가장 낮은 곳(‘평범한 사람들’ 흑인 노예의 음악)에서 가장 높은 곳(‘비범한 음악’ 엘리트의 음악)까지 이른 재즈의 역사적·사회적 의미와 오늘날 재즈가 맞고 있는 위기를 우리에게 일러준다.

홉스봄은 듀크 엘링턴의 평전에 대한 서평 형식을 빌려, 엘링턴이 20세기 예술가들 중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은 인물”인 동시에 “상당히 호감이 가지 않는 인물”로 묘사한다. 엘링턴은 밴드 단원들의 악상을 가로챘고 가족에겐 냉정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테크닉은 뛰어나지 않았고 악보를 읽는 것도 힘들어했다. 지적이지 않았고 다른 이의 음악을 듣지도 않았다. 이런저런 인간적인 결점에도 불구하고 엘링턴은 여전히 ‘위대한 예술가’였다. 엘링턴은 “서로 다른 사운드와 음색을 혼합시킴에 있어서 자연스럽고도 새로운 매혹”을 일으키고, “화음을 불협화음의 끝자락까지 밀어붙이는 미감”을 가졌고, 이를 곡으로 표현했다. 엘링턴의 밴드에는 유명한 연주자가 없었으나 엘링턴은 오히려 그들의 소리를 개성있게 조합해냈다.

재즈는 19세기 후반 20세기 초 미국 뉴올리언스의 흑인문화에서 자생적으로 나타나 소수자의 하위문화로 성장했다.  홉스봄은 미국에서 재즈는 뉴딜 급진주의와 좌파 운동과의 강한 연대 아래 성장했다고 본다. 정치적 좌파가 민속적 기반을 가지는 보통 사람들의 음악이자, 저항과 시위에 어울리는 재즈를 받아들여다는 것이다. 1950년대에 놀라울 만큼 확장세를 보이며 재즈의 황금시대가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1960년대 비틀즈의 성공이 세상을 뒤덮자, 미국의 재즈는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블루스라는 같은 음악적 뿌리에서 나온 로큰롤이 젊은 층에게 인기를 얻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재즈는 나이든 사람의 음악처럼 되었다.  홉스봄이 보기에, 로큰롤은 재즈와 달리 결코 소수자의 음악이 아니었고, 전체 세대의 음악이었다.  점차 미국의 재즈는 회고적으로 변화해 갔다. 

반면 유럽에는 적지만 안정적인 재즈팬이 생겨 방황하는 미국 재즈의 거장들을 오랜 시간 지켜냈다. 유럽의 재즈 수용사는 흥미롭다. 미국의 재즈는 대서양을 건너 지식인 계급을 위한 감상 음악이자 노동계급을 위한 혁명적인 사교춤 음악으로 자리잡는다. 홉스봄은 특히 유럽에서의 재즈가 민중에 뿌리를 내렸다는 점에 주목한다. 음악잡지 ‘멜로디 메이커’는 이렇게 표현했다. “이 음악(재즈)은 연주장 1층의 1등석뿐만이 아니라 꼭대기 층 맨 뒷좌석까지도 매료시킨다. 재즈에서는 좌석 등급의 구분이 없다.”

1990년대 초 홉스봄은 암울한 재즈의 미래를 슬퍼한다. 그는 재즈가 “클래식 음악의 또 다른 종류라는, 구제받을 길 없는 음악으로 변모”하고 있지는 않은지 회의하기도 한다. 소수자의 음악 재즈의 네트워크는 이제 다 해지고 끊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며… 그래도 그는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치지 않는다. 끝까지 마르크스주의였던 그답게 재즈에 대해서도 희망을 놓치지 않는다. “재즈의 잠재력이 고갈되었다고 생각하기에는 아직 때가 너무 이르다. 게다가 그냥 재즈를 들으면서 재즈 스스로가 자신의 미래를 헤쳐 나가도록 내버려 둔다고 한들 무엇이 잘못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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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의 멘토, 신수정

신수정은 KT의 Enterprise 부문장을 맡고 있다.공학과 경영학을 전공하였고 글로벌 기업, 창업, 벤처, 중견기업, 삼성, SK 등 다양한 기업들을 거치며 일, 리더십, 경영 역량을 쌓았다.

인간을 이해하는 데 관심이 많아 다양한 코칭, 심리, 자기계발 코스를 수료하였다. 삶, 일, 경영과 리더십에 대한 통찰을 나누어 사람들에게 파워와 자유를 주고 한계를 뛰어넘는 비범한 성과를 만들도록 돕는 선한 영향력을 추구하는 것을 삶의 미션으로 삼는다. Inspiring coach이자 Leader로 스스로의 역할을 정의한다. 트위터에 이어 페이스북에서 일과 삶에 대한 글로 많은 팔로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현재도 포스트 하나마다 1,000개 이상의 좋아요와 100개 이상의 공유가 이루어지고 있

<일의 격>은 페이스북에서 일과 삶에 대한 경험과 통찰로 수많은 직업인들에게 공감과 열광적 지지를 받으며 ‘선한 영향력’을 실천하는 KT 신수정 부사장의 글을 엮은 책이다. 오랜 시간 축적해온 다양한 현장 경험과 수 천권에 달하는 독서의 흔적으로 채워져 있다. 성장, 성공, 성숙이라는 세 가지 핵심 주제를 바탕으로 개인과 조직, 그리고 우리들의 삶을 더 가치있게 변화시킬 수 있는 실천적 해법을 제시한다.

일을 하다보면, 삶을 살다보면 어렵고 힘든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누군가에게 그 마음을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와 힘이 되곤합니다. 우리는 평소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함께 웃고 떠들며 대화하는 수많은 관계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누군가로부터 위로와 용기의 말을 듣고 싶은 순간, 의외로 속내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한 사람이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책을 찾습니다. 차마 말 못했지만 내 마음을 알아주는 한 사람, 한번 듣지 못했지만 나에게 용기내라고 이야기해주는 한 사람, 정말 필요했지만 그동안 요구하지 못했던 공감을 보내주는 한 사람, 그 사람 대신 우리는 책을 들춰봅니다.

단순히 눈물을 닦아주고 마음을 다독이는, 막연한 위로와 응원 대신 지금 흘리고 있는 땀과 눈물의 본질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스스로의 삶과 마음의 주인이 될 수 있는 방법과 지혜, 그리고 용기를 나눌 것입니다.

작가는 ‘선한 영향력’으로 조금이라도 더 살기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말합니다. 출판사는 ‘선한 영향력’이 당신의 일과 삶에 닿을 수 있도록 더 노력하고 싶습니다. 만약 누군가 이 글을 보게된다면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말 잘 찾아오셨습니다” 이 책이 당신의 일과 삶을 위한 작은 보탬이 될 수 있길 진심을 담아 소망합니다.<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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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4월4일, 마틴루터킹 암살되다.

1968년 4월 4일 오후 6시 직후, 마틴 루터킹은 멤피스에 있는 모텔의 2층 발코니에 서 있던 중 총에 맞아 사망했다.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범인은 탈출한 죄수 제임스 레이로 지목되어, 1969년 3월 99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킹의 가족은 그레이가 진범이라는 FBI의 조사 결과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동안 FBI가 킹과 그의 주변을 감시하고, 전화를 도청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FBI는 그가 바람을 피우는 소리가 담긴 테이프를 보내 대중에게 폭로하겠다고 위협했다. 암살 소식이 퍼지자 미국 전역의 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멤피스와 워싱턴 DC 에 주 방위군이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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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혜련, 우아한 루저의 나라

처음부터 ‘우아한 루저’란 제목에 끌렸다. 원문 ‘게으른뱅이’를 ‘루저’로 의역했다고 하니, 번역자 고혜련 교수의 ‘감’은 역사적이며 문학적이다.

고혜련 교수는 현재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한국사를 강의하고 있다. 2017년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연구년을 보내면서, 도서관의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자료들을 발굴해 이 책을 완성했다. 그녀는 도서관 구석에서 크노헨하우어의 강연문 ‘코레아(Korea)’ 전문을 처음 발견한 두근거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고혜련 교수가 발견해낸 사료들이 귀중하다. 3인의 여행기 뿐만 아니라, 그녀는 한국 관련한 의미있는 유럽 신문들의 기사를 많이 발굴했다. 예를 들면 ‘대한제국 사절단의 항변'(배를리너-폴크스 짜이퉁 1907년 7월 27일 자 기사)이 대표적 예다. 고종이 헤이그밀사를 보냈지만, 그들은 만국평화회의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런데 기자협회의 도움으로 이위종이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는’ 멋진 프랑스어 연설을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당시 중국에 지사를 두었던 독일 신문들의 한국관련 기사를 찾아내, 우리가 알지 못했던 많은 역사적 사실을 발굴했다.

고혜련 교수의 북토크를 듣고, 한국사도 지금보다 더 세계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어로 기록된 한국관련 자료들, 영어, 독일어 뿐만 아니라 중국, 프랑스,러시사 등의 기록까지 더 찾았으면 한다. 단지 기록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다양한 시각도 있는 그대로 알았으면 한다. 비록 그게 불편할지라도. 이제 우리는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할 수 있지 않을까?!

한국사가 세계화된다면, 고혜련 교수의 바램대로 뷔르츠부르크대학의 한국관도 제대로 그리고 멋지게 만들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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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홍타이지와 중 시진핑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3월 15일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했다.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최근 공산당 일부 원로들(party elders), 즉 정치적 담론에서 여전히 발언권을 가진 몇몇 퇴직 지도자들이 기존의 권력승계 시스템을 깨려는 시진핑의 욕망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들 가운데 주룽지(朱鎔基·94) 전 총리도 포함돼 있다.”
   
코로나 사태이후, 부동산 버블과 테크기업의 해고 등 중국의 경제상황은 만만치 않습니다. 중국 정치판도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더구나 미국과 중국이 정면 충돌하고 있습니다. 무역분쟁, 코로나 책임론에 이어 무력충돌까지 배제할 수 없습니다. 패권은 공유할 수 있는 권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진핑은 계획대로 장기집권을 할 수 있을까요? 앞으로 중국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청 태종 홍타이지와 중국 시진핑 주석은 어떤 맥락을 공유할까요?

특히 덩샤오핑의 유산아래 공산주의와 시장 경제를 축으로 빠르게 성장한 중국에 시진핑이라는 리더가 출현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나아가 시진핑의 중국이 미국을 넘어서기 위해 어떤 제국주의 상을 제시할지를 분석해야 합니다.

책방은 시진핑의 중국을 역사에서 배우기 위해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구범진) ‘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장한식) ‘거대한 코끼리,중국의 진실'(임영묵) 등 세 권을 텍스트로 삼았습니다.

세 권의 책은 각기 다른 소재와 시각을 담고 있지만 제국으로서 중국과 제국 리더십을 다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1.홍타이지가 청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병자호란를 직접 설계했고, 심지어 원정대를 직접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병자호란은 홍타이지에 의한, 홍타이지를 위한 홍타이지의 전쟁이었다.(구범진)

2.조선의 인조와 서인 정권이 국제 정치 질서의 변화에 대한 무지로 인해 청을 자극하는 사건을 일으킨 것이 병자호란의 원인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하지만 청의 시각에서 보면 조선 정벌은 홍타이지의 정해진 목표였으며, 조선의 움직임을 전쟁 명분으로 삼았다.(구범진)

3.홍타이지는 만주보다 100배가 더 큰 명나라를 정복하고 대청제국을 건설한 것은 현대 중국의 대국 굴기와 유사한 측면을 갖고 있다. 청이 최고 속도의 전쟁 수행능력을, 중국은 최고 속도의 생산 능력을 굴기의 핵심 경쟁력으로 삼고 있다.(장한식)

4.홍타이지는 1632년 남면독좌를 도입하면서 누르하치의 집단지도체제를 폐지했다. 시진핑은 부패척결을 명분으로 정치적 라이벌들을 차근차근 솎아낸 시진핑은 마침내 집단지도체제를 무력화하고 1인체제를 구축하였다. 이어서 임기제한 마저 철폐하면서 사실상 황위(皇位)에 올랐다. (장한식)

5. 21세기가 되자 덩샤오핑 체제(선부론, 집단지도체제, 도광양회)가 영원히 지속될 수 없음이 서서히 드러났다. 시진핑은 덩샤오핑 체제가 만들어낸 엄청난 성공이 만들어낸 반대급부(정치적 자유에 대한 요구, 분배에 대한 요구, 단축 성장의 피로감 등)을 해결하기 위해 선택됐다.(임영묵)

6.시진핑은 중국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중국 패권을 위해 일대일로를 설계했다. 일대일로는 한계에 몰린 국영기업의 공급 과잉을 해결해줄 투자처를 찾기 위한 계획이었다. 또 지정학적 딜레마를 해결할 초거대 사업이자 중국의 아킬레스건인 소프트파워의 약세를 보완할 수 있는 묘수로 선택됐다.(임영묵)

7.’전쟁이 필연적이었던 것은 아테네의 부상과 그에 따른 스파르타의 두려움 때문이었다.’(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기존 강대국이 안정된 국제적 질서를 제공하면 그 우산 속에서 새로운 강대국이 등장한다. 신흥국은 기존 패권국이 자국을 주저 앉힐 것으로 생각하고 국제질서에서 인정받고자 활동한다. 이 긴장이 폭발해 전쟁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임영묵)

8.거대한 코끼리와 공존하는 법을 가장 먼저 깨우쳐야 할 주체는 바로 한국이다. 가장 필요한 것은 거대한 코끼리인 중국을 각자의 시각에서 만져본 장님들의 활발한 대화다. 그래야만 집단사고의 함정을 피하고, 편견에서 자유로운 객관적인 모습의 중국을 재구성할 수 있다.(임영묵)

9.시진핑을 권력욕에 찌든 독재자로 묘사하는 것이나, 중국의 경제 팽창을 조롱하는 것은 우리에게 전혀 이득이 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본 중국 시스템의 작동 기제와 동학이지, 감정적 조롱이 아니다.(임영묵)

10.병자호란으로부터 무려 4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우리는 참담한 패전과 치욕의 역사를 되새기며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에 대한 평가와 단죄를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비극의 반복을 막기 위한 교훈 찾기에 주력하면서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맥락은 종종 무시된다.(구범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