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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비밀을 풀어주는 양정무

양정무는 어린 시절, 다락방에서 발견한 백과사전의 삽화에 마음을 빼앗긴 후 미술을 운명이라 믿게 됐다.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교수이다.원시, 고대부터 현대까지 아우르는 미술의 장구한 역사를 인류 문명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저서들을 꾸준히 집필 중에 있다. 유학 시절 도서관보다 박물관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미술관, 박물관 가이드를 가장 재미있게 하는 학생으로 유명세를 탔다.

발가벗은 미술관

미술의 눈으로 보면 역사와 인류가 다시 보인다.

미술과 역사의 안내자 양정무가 고대부터 현대까지 아우르는 미술의 장구한 역사를 이야기한다. 그동안 미술사를 대중화하는 데 노력해온 양정무는 이번에는 오랫동안 미술작품을 마주할 때마다 고민해오던 문제들을 오랫동안 꼽싶어 보고 정면으로 마주한다. 예를 들면 그는 “미술은 왜 끊임없이 과거로 되돌아가려는 속성을 보여주는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고전미술의 신화화 과정을 파헤치고, 미술관에 들어설 때마다 느끼던 무게감이 ‘초상화의 무표정성’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한다.

또한 인간이 “미라는 추상적인 관념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구축했는가” 를 묻는다. 박물관과 시민사회의 함수관계, 화려한 미술 속에 담긴 질병의 그림자 등 미술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문제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과거와 현재, 서구와 한국을 넘나들면서 펼쳐지는 설명은 직관적이어서 부담 없이 따라갈 수 있다.

우리가 아는 고전미술은 사실 ‘짝퉁’이다?

사람들은 흔히 미술이라고 하면 고상하고 우아하며 품위 있는 세계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전미술의 경우 특히 그렇다. 현대미술은 전위적인 성격을 띤 경우가 많아 고전미술처럼 고상한 어떤 것이라고 여기진 않지만 우리 현실이나 일상과는 동떨어진 세계로 인식한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다.

양정무는 그러한 우리의 관성적인 인식에 의문을 제기하며 ‘고전은 없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고전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해 사실상 고전은 허상임을 꼬집으며 첫 물꼬를 트는 것이다. 이어 미술교육 과정에서 흔히 접했던 아그리파 등의 석고상, 데생이라는 특정한 방식의 훈련이 어째서 미술교육의 기본이 되었을까를 묻는다.

결국 특정 시기(기원전 6~4세기), 특정 지역(그리스)의 미술이 서구에서 수천년 동안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어온 역사가 있었음을 알게된다. 다만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진실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고대 그리스 조각을 복제한 로마의 석고상이 그리스의 작품으로 잘못 오해되면서 순백색의 대리석 조각이 이상화되었다. 그리고 백인종의 우수성에 대한 근거로 쓰여지게 된다. 이상적 아름다움의 결정체로 여겨지는 그리스 조각은 군국주의적이고 남성중심적인 문화 속에서 탄생한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런 고전미술이 이런 교육을 통해 우리의 미감을 형성하게 된것이다.

미술은 웃지 않는다? 

그리곤 ‘왜 초상화에는 웃는 얼굴이 드물까?’ 하는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미술과 웃음의 관계를 살펴본다. 결국 각 시대와 문명을 대표하는 표정을 탐구하게 된다. 전통적인 초상화에서 웃는 얼굴이 별로 없는 데에는 기술적인 요인도 있다. 모델이 웃는 표정을 오랜 시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사진과 달리 초상화가 평생 한 장 남길까 말까 한 공식적인 그림이라는 점에서도 환히 웃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역시 시대적인 배경에 따라 각 문명을 대표하는 표정이 있다. 아파이아 신전의 죽어가는 전사상은 가슴에 박힌 창을 손으로 쥐고도 환하게 웃고 있다. 고대 이집트 람세스상,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서산마애삼존상 등 고대 미술에서는 우아한 미소가 자주 보인다.

그러나 ‘크리티오스 소년’ 등 그리스 조각상에서는 미소가 사라진다. 특정한 개인을 연상시키는 것을 경계한 당시 정치적 상황과 맞물린 결과다. 로마 시대까지 이어진 무표정한 초상 조각은 당시 유행한 금욕주의와도 닿아 있다. 시대가 흘러 미술품에 다시 미소가 번진다. 미술사의 대표적인 미소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비롯해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중국 현대미술 작가 유에민쥔의 그림까지 시대를 담은 미소가 있다.

어떤 시대를 특정 시대정신으로 규정하고 나면 꼭 그 틈을 미끄러져나가는 존재들이 있고, 이는 미술에서 더욱 선명하게 포착된다. 신을 중심으로 세계의 의미가 규정되었던 중세에도 인간 본연의 생명력을 뿜어내는 얼굴들이 있었다. 예술을 낳는 것이 사회이기도 하지만, 한 개인이 자신을 담은 하나의 미술작품이기도 하다.

인간을 담는 미술, 미술을 담는 건축

인간은 미술에 자신의 모습을 담는 한편 미술을 위한 집을 만들어주기도 했는데, 바로 미술관과 박물관이다. 사람들이 미술을 어렵고 심각한 것으로 생각하는 데에는 미술관의 분위기도 한몫한다. 심각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관람객들을 내려다보는 초상화들 앞에 서면 절로 경직되고 위축되기 마련이다. 오늘날의 박물관은 고상한 지식의 성채 또는 편안한 휴식의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허나 사실 박물관이 걸어온 길에는 제국주의의 침탈의 역사와 통치의 정당성을 마련하려 했던 국가권력의 욕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는 비단 과거의 일만은 아니다. 프랑스, 영국, 미국, 독일 등 많은 나라들이 여전히 박물관을 통해 국가권력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국가권력이 내세우고 싶은 이미지를 시각화하는 데 박물관을 활용한다. 건축을 통해 드러나는 국가 간의 미묘한 경쟁심, 계층 간의 갈등은 박물관 역시 그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점을 선명히 드러낸다.

팬데믹 시대, 고통이 미술이 되다

전세계가 코로나로 고통받고 있지만, 팬데믹은 인류역사화 함께 했다. 다만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의 경험은 미술 속의 질병과 죽음을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역사속에서도 감염병이 당시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위협하는 일이었고, 그로 인한 변화가 미술 속에서도 당연히 나타났다. 르네상스시대에 발발한 흑사병은 사람들의 일상뿐 아니라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을 뒤바꿔놓았고, 종교적 실천의 양상 및 경제활동까지도 새롭게 규정했다.

안드레아 오르카냐, 〈스트로치 제대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피렌체, 1357

흑사병 직후에 제작된 이 제대화는 대역병의 공포 때문인지 엄격하고 단조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흑사병은 결과적으로 르네상스 문예운동으로 이어진다. 사실 흑사병을 이야기할 때 역설적으로 ‘르네상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흑사병은 결과적으로 유럽인을 엄격한 종교적인 삶에서 벗어나 개성과 이성의 세계에 한 발 더 다가가게 했기 때문이다. 가공할 전염력을 가진 흑사병은 가까운 친지들과 동료들의 관계를 재정립하게 했다. 검게 타들어가며 죽음을 맞이하는 흑사병 환자에게 병자성사를 집행할 신부는 많지 않았다. 어쩌면 흑사병이 가져온 엄청난 죽음을 냉정하게 목격한 유럽인이 다시 역사를 써내려간 결과가 바로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다.

흑사병은 르네상스라는 역사적 반전을 이뤄냈지만, 스페인 독감은 이와는 다른 역사적 결말을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18년 봄부터 1920년까지 미국과 유럽, 그리고 아시아까지 전 세계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걸렸고 최대 5,000만 명이 이 독감으로 사망하게 된다. 우리나라도 당시 일제의 무책임한 대처로 14만 명 가까이 이 독감으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에드바르트 뭉크, 〈스페인 독감에 걸린 자신의 모습〉, 국립미술관, 노르웨이, 1919

어렸을 때부터 병약했던 뭉크는 스페인 독감에 걸렸으나 이겨내고 이후에도 꾸준히 작업에 몰입한다. 스페인 독감은 이렇게 20세기 전반에 가공할 상처를 인류에게 남겼지만, 문학과 예술에서는 그 영향력은 독자적으로 보기보다는 시기적으로 1차 세계대전과 묶이면서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세계로 이어진다. 현대 문화예술 운동에서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세계를 어느 누구도 가볍게 다룰 수는 없을 것이지만, 현실을 떠나 꿈과 판타지 세계를 추구했던 이 문예운동 후에 펼쳐지는 역사는 2차 세계대전이다. 1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독감의 교훈을 냉철히 읽어내지 못한 덕분일까, 곧이어 벌어진 2차 세계대전은 직전의 재앙보다 훨씬 더 많은 사상자를 낸 역사적 대재앙으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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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원_세계사를 바꾼 전염병 13가지

이규원 교수의 강연은 전염병의 완전정복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전염병의 다양한 측면을 매우 꼼꼼이 모두 짚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전염병은 문명 특유의 질병이라고 했습니다. 일정규모 이하의 인구 집단에서는 유행이 지속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도시가 있기에 전염병이 정착하고, 도시 간 이동을 통해 확산됩니다. 문명은 전염병을 낳고, 전염병은 문명을 좌우합니다.

인류의 역사를 바꾼 전염병 중 제일 먼저 꼽히는 것이 3차에 걸친 페스트의 대유행입니다. 페스트는 4∼17세기에 걸쳐 유행이 반복되는데, 특히 3차 시기에 전 세계적으로 8500만명이 사망했습니다. 유럽인구의 1/3∼2/3 사망했습니다. 노동력이 감소되자, 지배계층도 약화되었고, 농노소멸과 기계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새롭게 알게 된 것은 17세기 소빙기가 가져온 전반적 위기란 측면입니다. 소빙기에 일어난 한랭화로 농업생산이 감소되었습니다. 충분히 먹을 수 없게 되자 자연스럽게 면역력이 떨어져 사망하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이 무렵 인간과 물자의 이동이 전염병을 확산시킨다는인식이 생겼습니다. 17세기 말 도시를 봉쇄하는 사례도 생기게 됩니다.

콜레라도 전염병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습니다. BC 300년경 최초의 기록이 보이는 콜레라의 기원은 갠지스강 하류로 추정됩니다. 벵골지방과 갠지스강 삼각주중심의 풍토병이었습니다. 힌두교 성지에서 시작해 1817년 인도에 급속도로 퍼지게 되고, 1850년 전후 유럽에 폭발적으로 유행합니다. 특히 당시 세계 최대 도시 런던의 사례는 흥미롭습니다.

콜레라로 런던은 1866년까지 약 4만명이 사망하게 됩니다. 콜레라의 원인이 ‘미아즈마’(miasma) 곧 시체나 썩은 물질에서 나오는 냄새나는 나쁜 공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의사인 존 스노(John Snow)는 1848년 콜로나가 유행했던 지역를 조사해 ‘감염지도’를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콜레라 환자 대부분이 브로드 가에 있는 펌프에서 물을 마셨다는 결과가 나왔고, 콜레라가 오염된 물을 통해 전파된다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는 브로드 가의 펌프 손잡이를 떼어내어, 오염된 물로 콜레라가 퍼지는 것을 막았습니다. 존 스노는 감염지도를 통해 전염병의 원인을 파악하면서 ‘역학’이라는 새로운 의학 분야를 만들어냈습니다. 한편 에드윈 채드윅 은 1948년 공중보건법을 제정해 영국은 최초의 공중위생 규제국가가 됩니다.

인류의 역사는 감염과 싸우는 방역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감염병은 예측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창과 과거의 낡은 방패와의 싸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방역의 역사는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갔습디니다.

근대 이전 한센병(나병)은 배제와 추방으로만 전파를 막았지만, 14∼17세기 페스트는 검역·격리·봉쇄라는 근대적 방역의 출발점이 됩니다. 18∼19세기 두창(천연두)은 인류가 박멸한 유일한 전염병의 사례를 만들었고, 19∼20세기 콜레라는 역학과 공중위생이라는 근대적 방역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20세기 전반 스페인 독감은 마스크의 착용과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코로나 시대의 전례가 되었습니다.

이규원 교수는 말합니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전염병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위생과 영양의 개선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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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2) 겸재 정선집터(경복고)

예전에 경복고에 들러서 사진까지 찍은 장소다. 그때도 사진을 찍었지만, 겸재 정선 집터라는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대충 보는 게 많다는 증거다. 이번에는 확실히 겸재를 알고자 했다.

겸재는 종로구 청운동 89-9(현재 경복고부근)에서 출생했다. 그의 집은 당시 세력가인 장동 김씨 가문 근처에 있었다. 그 덕분에 겸재는 장동 김씨 가문과 깊은 인연을 쌓았고, 이들의 후원으로 화단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벼슬까지 종2품 벼슬에 오른 ‘성공한’ 화가로 84세에 생을 마쳤자.

정선은 요즘말로 하면 서촌사람이었다. 서촌은 인왕산 아랫마을 이었으며, ‘인왕제색도’는 비 온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인왕산의 실제 모습을 사실적으로 화폭에 실은 명작이다. 겸재가 인왕제색도를 그렸다는 곳이 정독도서관에 기념비로 남아있다.

서울시 50+ 남부캠퍼스 | 겸재 정선을 만나다.

겸재 정선은 진경산수 화가이며 주역에 능통한 학자였다. 상상해서 그리기보다 직접 돌아다니며 탈세속을 즐기는 경향이었다. 그림에는 주역으로 해석할 만한 요소가 많다.

자화상을 돌덩어리에 부조로 표현했다. “독서여가(讀書餘暇)”라는 그림에는 한가로이 툇마루에 비스듬히 앉아 마당의 화초를 바라보는데 뒤쪽으론 책이 수북이 쌓여 있다. 책 읽기 싫다는 의미인지 좀 쉬고 있다는 표현인지 모르겠다. 지금 내 책상 옆에 읽으려 하는 책이 쌓여 있고 먼지만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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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나치협력자 추모

2020년 1월 1일 키에프에서 수백 명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횃불 행진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독일편이 되어 싸운 스테판 반데라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우크라이나 반군의 지도자였던 반데라는 나치 독일과 함께 소련 군대와 싸우면서 수천 명의 유대인과 폴란드인 등을 살해했다고 알려졌다.

우크라이나 국경 근처에 러시아가 군대를 집결하는 상황에서, 우익의 안드리 타라센코 대표는 스테판 반데라를 기억하고 추모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데라의 지지자들은 아돌프 히틀러가 우크라이나에 독립을 부여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소련군에 맞서 나치의 편에 섰다고 한다. 반데라와 다른 협력자들에 대한 존경의 표현은 2014년 우크라이나 혁명 이후 그 위상이 높아졌다.

2022년 1월 1일 토요일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열린 집회에서 횃불과 스테판 반데라의 초상화를 들고 있다. (AP Photo/Efrem Lukatsky)

우크라이나 총리, 장관, 키예프 네오나치 콘서트 참석

우크라이나의 올렉시 혼차룩 총리와 옥사나 콜리아다 보훈처 장관은 2019년 10월 네오나치 밴드의 콘서트에 참석했다. 10월 13일 우크라이나 수도에서 열린 ‘베테랑 스트롱(Veterans Strong)’ 콘서트는 극우 C14 운동의 고위 멤버인 안드리 메드베드코가 주관하고, 홀로코스트 부정 노래를 레퍼토리에 포함되었다.  C14는 반유대주의 스보보다(Svoboda) 정당에서 파생된 극단주의 정당으로, 이 정당의 지도자인 Yevhen Karas는 러시아인, 유대인 및 폴란드인을 적으로 나열했다.

올렉시 혼차루크 우크라이나 총리는 “행사를 마련한 참전용사들의 문제라고”하고 “콘서트 자체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서방 단체 들은 아르센 아바코프 내무장관과 같은 우크라이나 고위 관리들이 네오나치 아조프 운동과 같은 폭력적인 극우 단체와 연계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명백히 반유대주의 정당은 대부분 의회에서 배제된 반면, 민족주의 민병대와 조직은 대부분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성장하도록 허용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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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빌리의 노래

힐빌리는 스코틀랜드에서 북아이랜드로 이주했다가, 다시 미국 애팔래치아 산맥 산골 지역에 정착한 사람들을 뜻한다. 미국의 백인 빈곤층(Poor White)를 상징하는 용어다. 미국인에게 힐빌리는 도시생활을 거부하고 낙후 지역에 살면서 독립을 추구하는 백인 이미지와 가난하고 무식하고 완고한 ‘꼴통 백인’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한다.

스스로를 힐빌리로 자처하는 밴스는 그 러스트벨트에 속하는 오하이오의 철강 도시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곳은 일자리와 희망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사라져가는 동네였다. 밴스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모르는 사람이나 다름없는 남자와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 뻔한 여자에게서 버림받은 자식’으로 태어나고 자랐다. 엄마는 거의 밴스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약물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약물 중독에 빠져 끊임없이 정신적·신체적 폭력을 휘둘렀던 엄마와 돈 때문에 양육권을 버린 아빠, 엄마 곁을 스쳐간 수많은 아버지 후보자들 때문에 어린 밴스는 늘 불안과 우울에 시달려야 했다.친척들까지 포함해도 집안에서 대학에 진학한 사람은 거의 없다. 통계적으로 그들의 미래는 비참하다. 운이 좋으면 수급자 신세를 면하는 정도고 운이 나쁘면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다.

밴스는 기억 저편의 과거를 고통스럽고 처절했던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다. ‘무엇을 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것 같은 느낌’에 대해서, 나아가 무관심 속에 숨겨졌던 사회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그는 상처로 고통 받고 있는 힐빌리들의 문화를 적나라하게 폭로한 배신자로 불릴 위험을 각오해야 했다.

밴스는 그가 ‘힐빌리 문화’로부터 천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벗어나는 과정을 그린다. 그것은 외손주 남매를 키워준 할머니가 집안의 버팀목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제정신이 아닌 엄마를 떠나 할모라 부른 할머니의 곁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그의 친구들이 ‘학습된 무기력’에 빠져 일찌감치 미래를 포기해버린 반면, 밴스는 매일매일 공부하라는 할모때문에 포기하지 않았다. 해병대에 자원한 것은 그의 인생을 바꾼 커다란 분기점이었다. 그는 해병대 생활을 통해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목표의식을 갖게 됐고, 노력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다. 마침내 오하이오 주립대학을 마친 후에는 예일대 로스쿨에 입학할 수 있었다.

얼핏 보기에 가난과 역경을 딛고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성공기 같다. 그런데 실제 내용은 백인 빈곤층을 오랜 세월동안 관찰한 것을 날 것 그대로 기록한 인류학 조사 보고서같다. 힐빌리들은 1930년대 대공황을 겪기는 했지만 1970년대 까지는 그런대로 먹고 살만했던 것 같다. 정착초기에는 광산에서 일하면서 가족을 부양했고, 공황이후 철강, 자동차 산업 중심 도시로 이주해서 생계를 꾸렸다.

그런 힐비리의 세상이 바뀐 것은 미국내 제조업의 쇠락때문이다. 미국 제철업이 일본, 한국 등 새로운 국가에 밀리면서 일자리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정부 보조를 받는 실직자들이 미들타운에서 크게 늘었다. 밴스의 할머니는 백인 빈곤층중 평생 일하지 않으면서 푸드스탬프로 고기와 술을 사먹고, 마약에 빠진 이웃들을 경멸했고, 자신의 세금을 그런 곳에 쓰는 정부를 힐난했다. 밴스 역시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이른바 ‘복지의 여왕’에게 반감을 갖기 시작했다. 힐빌리는 육체노동에 종사했기에 오랜동안 민주당을 지지했다. 하지만 일자리가 줄어들고 동시에 복지에 연명하는 빈곤층의 증가를 보면서 공화당 지지로 돌아섰다. 공화당의 이념을 지지하기 보다 민주당에 대한 실망이 정치노선 선회의 원인이었다.

힐빌리는 특히 오바마와 같이 도회풍의 민주당 지도자와 자신들의 일치시키지 못했다. 완전히 다른 세계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한다고 위선을 떠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밴스는 할머니의 정치적 이중성을 힐빌리의 ‘리얼리티’라고 본다. 즉 할머니는 제철소가 문을 닫고 일자리가 없어지는 현상에 대해 정부가 책임을 있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국가가 세금을 일하지 않는 자에게 사용하면서 사회를 망치고 있다고 정부를 비난한다.

미국의 백인이 다 같은 백인이 아니다. 우연하게 산골에 정착한 백인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다른 동네 이야기처럼 여기면서 150여년을 살았고, 21세기에도 여전히 희망없는 고통의 삶을 살고 있다. 지식인들이 복지 제도 논쟁에 집중하는 동안 문화적으로 소외된 집단들은 정책과 비전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좌절감과 분노를 배설할 통로로 정치를 소비하고 있다. 자연스럽게도 최하층 백인들이 분노하면서 뭉쳐서 도널드 트럼프를 세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가족과 복지, 일자리와 교육, 정치와 문화, 이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 속에서 개인과 사회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고,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그는 묻고 있다.

힐빌리들이 겪는 불운한 인생에 이들의 책임이 얼마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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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연구를 개척한 한영우 선생님을 그리며…

한영우 선생님은 올해 향년 85세로 별세했습니다. 그는 1967년 서울대 교수로 임명되어, 2003년 은퇴후에 오히려 더 활발히 저술을 했습니다. 정도전부터 시작한 그의 인간탐구는 허균과 서경덕까지 계속됩니다. 그는 학문의 화두가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대 거의 모든 국사학전공자의 화두이기도 했습니다. 한 선생님은 특히 조선에 집중된 식민사관을 실증적연구로 새로 쓰고자 했습니다. 예를 들면 과거 급제자 만오천명을 분석해, 조선은 소수 가문이 독점한 폐쇄적 사회가 아니었음을 밝힙니다. 조선시대 과거는 출세의 사다리로 작동했습니다. 그는 유신 체제시절 발행된 국정교과서 집필에 참여한 경험에 기반해,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국정 역사교과서’에 대해 우려와 반대의 뜻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오래된 옛시절, 한선생님은 저의 석사논문의 지도교수였습니다. 경제사에 관심이 있었고, 재벌의 역사에 관해 석사논문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 현대사를 전공한 교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선생님이 흔괘히 지도교수가 되어주셨습니다. 매우 뒤늦게 ‘선생님, 고맙습니다’ 맘속으로 이야기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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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1) 청와대앞 무궁화동산

무궁화 동산에 들어서 첫번째 장소가 궁정동 안가가 있던 자리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무궁화동산에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비밀이 하나 숨어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돌아가신 장소가 은밀하게 표시되어 있는 것이다. 무궁화동산 서쪽 출입구로 들어서면 낮은 자연석 성곽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끊어진 곳이 보인다. 그 앞에는 가지가 멋있게 굽은 소나무가 한 그루 있다. 바로 이곳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된 곳이다. 이런 표시를 해놓을 생각을 한 사람은, 무궁화동산 조경사업을 맡았던 이승률(李承律) 반도환경개발 회장이었다. 이 회장의 회고에 의하면 초록색으로 칠해진 4번이 시해장소이다.

다음을 클릭하시면 반도환경개발 회장의 회고를 읽을 수 있습니다.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609100041

그 다음은 청음 김상헌 시비 앞에 섰다. 병자호란 때 싸우자고 한 원칙론자 김상헌(척화斥和)과 항복하자고 한 최명길(주화主和) 이야기는 유명하다. “항복서를 쓰는 사람이 있다면 찢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며 찢어진 항복서를 주웠다는 최명길 이야기가 가슴에 닿았다. “끓는 물도 얼음도 다 같은 물이요.”라는 말로 나라를 향한 두 사람의 마음을 표현했다. 두 사람이 청 파병을 반대한 이야기이며 둘 다 청나라 옥에 갇혔을 때 서로 진심을 확인했다고 한다.

주자학과 양명학의 학문 성격이 두 사람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주자학은 현실에서 대의 명분과 당위를 말하는 원칙론이고 양명학은 현실 상황과 주체가 합치되는 실리론이라 하겠다. 최명길 스승 신흠(申欽, 1566~1628)은 주역에 능통하여 불변하는 원칙보다는 변화하는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최명길은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되돌아 온 환향녀에 대한 차별에 반대했다. 개인 잘못이 아닌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 환향녀를 내치면 안 된다고 했다. 예(禮)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라 용납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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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HM, 영원히 기억될 기억상실증 환자

                                          

헨리 몰레이슨(1926년~2008년)은 뇌전증 치료를 위해 측두엽 절제술을 받은 후, 새로운 기억 형성을 못하게 된 환자이다. 신분을 감추기 위해 HM이라는 약자로만 불려졌던 그는 50여년에 걸쳐 기억 형성에 관한 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사후에도 뇌 조직과 기능에 대한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헨리는 뇌전증 환자로, 발작 증상은 9살 때 자전거 사고로 머리에 충격을 받은 후 시작되었다.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16살 때는 하루에 10차례 이상 양쪽 뇌 모두 심한 대발작을 겪게 되었다. 당시 쓰였던 가장 강한 약인 항경련제가 듣지 않자 그는 무엇이든 시도해 볼 수밖에 없었다.

헨리는 27세에 최후의 수단으로 수술을 받게 되었다. 집도의 윌리암 스코빌은 이미 정신병 환자 뇌의 일부를 제거해본 경험이 많은 의사였다. 수술의 위험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측두엽의 일부를 제거하면 헨리의 끔직한 발작이 멈출 것이라 희망하였다. 그러나 수술 이후 발작뿐만 아니라 기억력도 사라지게 되었다.

심리학자 브렌다 밀너는 포괄적인 신경심리학 검사를 했다. 헨리는 몇 초에 걸친 단기 기억에는 문제가 없었고, 수술전에 일어났던 일에 대한 기억도 잘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헨리는 새로운 정보와 경험을 기억의 일부로 저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밀너 박사가 헨리를 매일 만날 때 마다 헨리는 처음 만나는 것처럼 인사하였다. 식사를 마친지 30분 후에 다시 권하면 그는 처음인 것처럼 식사를 하였다. 결국 헨리가 그때까지 기록된 것 중 가장 완결한 형태의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헨리는 소수의 연구자들에게만 위치가 알려진 채, 수십 년 동안 코네티커트 주의 빅포드 건강관리센터에서 살았다. 브렌다 밀너 박사의 제자인 수잔 콜킨에 의하면 헨리는 상냥한 사람이었고 늘 협조적이었다고 한다. 자기가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으나, 본인에 대해 연구자들이 알아낸 것이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것에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2008년 사망 후 헨리의 뇌를 보존하는 계획에 따라 그의 사체는 샌디에고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의 뇌 관측 연구소로 옮겨졌고, 뇌는 적출되어 스캔 된 후 2401개의 종잇장처럼 얇은 조각으로 절편 되었다. 53시간에 걸쳐 힘들게 이루어진 절편과정은 인터넷에서 실시간으로 전달되어 40만 명이 보았다. 이로부터 만들어 진 자료들은 개별 뉴런 차원까지 보여주는 자세한 디지털 지도를 만드는데 활용되었고 전 세계의 연구자에게 2014년 공개되었다.

같은 해 샌디에고 뇌 관측 연구소의 아네시의 팀은 처음으로 헨리의 뇌 내 손상을 3차원적으로 재현해 냈다. 측두엽 내 해마 조직의 앞부분은 흡입 과정을 통해 양쪽 다 제거 되었으나 뒷부분은 온전했었다. 또한 대뇌피질과 피질하부 뇌 조직에서부터 해마로 연결되는 통로의 역할을 하는 후각피질이 거의 전부 사라졌다는 것을 밝혀졌다. 헨리의 편도체가 수술용 메스로 완전히 제거 된 것도 확인하였다.

헨리의 수술을 이루어졌던 시기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기억은 대뇌피질 전체에 분산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헨리의 뇌에 관한 연구는 측두엽 특히 해마와 편도체가 기억 형성과 저장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생전에 그리고 사후에 헨리는 12,000건의 논문에서 거론되었고, 100건 이상의 심리학과 신경과학 연구과제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기억 형성에 대해 많은 새로운 이해를 가져다 주었다.

헨리는 까다로운 기술인 경영묘사를 배울 수 있었다. 경영묘사는 특정 모양을 거울에 비친 자기 손을 보며 그리는 어색한 작업이다. 물론 기억은 전혀 남지는 않았다. 헨리 몰레이슨의 기술이 향상하는 모습을 통해 그의 절차기억체계, 예를 들면 우리가 자전거를 탈 때 동원하는 유형의 기억은 온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자기 집의 설계를 자세히 그림으로 재현할 수 있었다.

연구자들은 헨리가 또한 통증에 대한 내성이 강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헨리의 통증 내성은 편도체가 없어진 것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편도체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기억하는 역할을 한다. 통증 지각은 과거 경험에 대한 기억이 많은 부분 기여하는 심리적 요소가 있다는 것을 역시 헨리로부터 알게 된 것이다.

그림. 측두엽 내 해마(하늘색)의 위치 (출처: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Hippocampus#/media/File:Gray739-emphasizing-hippocampus.png) By Henry Vandyke Carter – Henry Gray (1918) Anatomy of the Human Body (See “Book” section below)Bartleby.com: Gray’s Anatomy, Plate 739,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907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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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3월13일, 알렉산드르 2세 암살됨

그는 로마노프 왕조의 12번째 군주로 1855년 즉위하여, 농노제 페지(1861년) 등 근대화 정책을 실행했다. 또한 1860년 제2차 아편 전쟁을 중재한 대가로 연해주를 얻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건설했다. 1879년 혁명을 원하는 인민의지당원들이 알렉산드르2세를 암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알렉산드르 2세가 죽임을 당한 바로 그 날, 입법 위원회를 만들겠다는 선언문(소위 Loris-Melikov 헌법)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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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줄서평]미셸 자우너,H마트에서 울다

『H마트에서 울다』저자 미셸 자우너는 인디 팝 밴드 재패니즈 브렉퍼스트의 보컬이자 기타리스트이다. 한국계 미국인이란 경계에서 성장해가는 그녀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출간 즉시 미국 서점가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 책은, 2021년 뉴욕 타임스, NPR 같은 유수의 언론매체와 아마존 등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고 버락 오바마 추천도서에 꼽히기도 했다.

“우리 엄마만 왜 이래?”

여느 미국 엄마들과는 다른 자신의 한국인 엄마를 이해할 수 없던 딸은 뮤지션의 길을 걸으며 엄마와 점점 더 멀어지고 독립된 삶을 살아갔다. 그런데 그녀가 25세 때, 엄마는 급작스레 암에 걸리고 투병 끝에 죽음에 이르고 만다. 그 후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마저 희미해져 가던 어느 날, 장보기 위해 드른 한인 마트에서 엄마와의 추억이 불현듯 쏟아진다.

엄마 생각에 눈물부터 나오는 곳, H마트에서 미셸 자우너는 장을 보며 엄마를 향한 추억과 그리움의 글을 쓴다.그「H마트에서 울다」가 『뉴요커』에 실리자마자 수많은 독자의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H마트는 미국에서 아시아 식재료를 전문으로 파는 대형 식료품 할인점으로, H는 ‘한아름’의 줄임말이다. ‘두 팔로 감싸안을 만큼의 크기’라는 의미처럼 그곳에는 만두피, 김, 뻥튀기, 죠리퐁, 갖가지 밑반찬 등 없는 한국 먹거리가 없다. 미국 14개 주 70여 곳에 있는 H마트는 그러므로 한국계 미국인에게 ‘고향의 맛’을 찾게 해주는 보물창고와도 같다.

2층 식당가에는 뚝배기에 찌개가 담겨 나오고 떡볶이를 파는 한국 음식 전문점과 탕수육, 짬뽕, 볶음밥과 짜장면을 파는 한국식 중국 음식점이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추억과 사연을 안고 이곳을 찾는다. 엄마를 잃고 찾아간 그곳에서, 자우너는 딸과 함께 해물짬뽕을 먹는 할머니를 보고 울컥한다. H마트에서, 엄마는 어디에나 있다.

비빔밥에 고추장 많이 넣지 말라던 엄마의 잔소리도, 달콤한 짱구 과자를 손가락에 끼고 흔들던 엄마의 모습도, 엄마와 내가 조금씩 베어물던 동그란 뻥튀기의 추억도 이곳에선 생생하기만 하다. 그렇게 H마트에서 자우너는 엄마가 미각에 강렬하게 새긴 맛을 되찾으며 위안을 얻고 회복해나간다.

지독한 잔소리꾼인 엄마가 사랑을 전하는 방법

누구보다 애틋한 모녀였지만 깊은 사랑은 때론 애증이 된다. 한 살짜리 아기를 데리고 한국인이라곤 찾을 수 없던 미국 오리건주 유진으로 이민 온 엄마는 딸을 엄하게 키운다. 어린 자우너가 보기에 미국인 엄마들은 자식에게 스스로 결정할 자유를 주고 자존감을 지켜주기 위해 애쓰는 듯했지만, 자신의 엄마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딸을 최상의 버전으로 만드는 데 잔소리를 아끼지 않을 뿐이었다. 딸의 외모, 화장, 옷차림, 공부 등 사사건건 간섭을 하는 엄마. 다치기라도 하면 엄마는 불같이 화를 내며 흉터 걱정부터 했다. 꺼이꺼이 흐느끼는 자신을 위로해주기는커녕 “울긴 왜 울어. 네 엄마가 죽은 것도 아닌데”라며 다그쳤다. 자우너는 엄마의 그런 엄하고 매정한 말들이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말 대신 음식으로 사랑을 보여주었다. 생일날에는 미역국을 끓여주고, 테라스에서 뜨거운 철판 위에 두툼한 삼겹살을 굽고 삼겹살 쌈을 만들어주었다. 자우너가 간장게장을 쪽쪽 빨아먹거나 산낙지를 초고추장에 푹 찍어 입에 넣을 때면 엄마는 감탄했다. “넌 진짜 한국 사람이야.”

이제 엄마를 겨우 이해할 것 같은데, 덜컥 찾아온 엄마의 암 투병

운명은 이해하기 힘들다. 작가가 비로소 엄마를 이해하기 시작한 스물다섯 살에, 엄마도 조금씩 예술가의 길을 걷는 딸을 응원하기 시작하던 그때, 건강하던 엄마에게 암 진단이 내려진다. 작가는 절박한 마음에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는 심정으로 매일같이 엄마가 복용하는 약과 먹은 음식을 기록하고, 머리숱도 거의 사라지고 몸집도 줄어든 엄마에게 한국 음식을 해주려 한다.

살아생전 엄마를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 사랑하던 남자친구와 결혼식도 올리기로 한다. 엄마는 딸의 결혼식을 보려는 듯 기적적으로 그 순간까지 버텨준다. 하지만 운명을 피할 순 없었다. 다만 엄마가 해주던 음식의 기억만은 생생히 남았다. 이제 엄마는 없지만 자우너는 인터넷과 유튜브를 찾아보며 된장찌개, 잣죽, 김치를 직접 만들어 먹는다. 엄마의 한국 음식을 통해 엄마를 향한 그리움을 달래며 회복해간다.

상실과 회복, 그리고 사랑의 노래

작가는 어릴 적에 엄마가 2년에 한 번씩 자신을 데리고 간 한국으로 신혼여행을 떠나, 마치 엄마가 자신에게 한국 문화에 대해 알려준 것처럼 남편을 데리고 한국을 경험한다. 생일날 이모가 끓여준 미역국을 먹고, 엄마와 못다 한 추억을 친척들과 공유하며 슬픔을 받아들이고 그로부터 회복하며 점차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나간다.

이 책은 한 예술가의 성장담으로 읽기에도 모자람이 없다. 자우너는 음악과 처음 사랑에 빠진 풋풋한 시절을 생생하게 기록한다. 수많은 젊은 예술가가 겪는 시련, 이를테면 부모의 극심한 반대, 생활고, 기약 없는 미래로 불안에 떨던 경험도 솔직하게 들려준다. 미국이란 나라에서 아시아계 혼혈인 여성 예술가라는 겹겹의 소수자로 살아가면서 맞닥뜨린 또다른 종류의 좌절과 혼란에 대해서도이야기한다.

미셸 자우너의 밴드는?

밴드 '재패니즈 브렉퍼스트' 공연 모습. © Mike Ferdinande

미셸 자우너는 슈게이징 스타일 음악을 하는 인디 팝 밴드 “재패니즈 브렉퍼스트”의 가수이자 기타리스트다. 2016년 1집 〈저승사자Psychopomp〉로 데뷔했으며, 2017년 2집 〈다른 행성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소리Soft Sounds from Another Planet〉는 『롤링스톤』 올해의 앨범 50에 선정됐다.2021년 3집 〈주빌리Jubilee〉가 빌보드 2021 상반기 최고 앨범 50에 선정되며 전 세계 주요 음원 차트에서 상위권에 올랐다. 북미, 유럽, 아시아 등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활발히 투어 공연을 하고 있다.이끄는 밴드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는 2021 그래미 시상식에서 ‘베스트 뉴 아티스트’ 부문과 ‘베스트 얼터너티브 앨범’ 부문 후보에 올랐다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는 그래미 어워드 후보에 두 번 올랐으며, 『H마트에서 울다』는 뉴욕 타임스에서 29주 이상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