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in히스토리텔러

[히스토리텔러] 이승렬

근대시민의 형성과 대한민국

저자 이승렬은 한국 근대사를 다시 쓰고 있다. 한국 사회가 걸어온 근대화 과정에 관한 통설을 뒤집어 놓았다. 이 책은 식민주의와 민족주의라는 ‘풍경’을 넘어, 자유주의와 의회주의라는 ‘눈’을 통해 한국 근대사를 재조명한다. 그의 남다른 역사해석으로 교과서의 역사서술이 다시 쓰여질 수도 있다.

한국 근대사는 식민지, 분단, 전쟁이라는 난관을 넘어왔고, 한국 사람의 자존감은 무너져갔다. ‘조선의 정체성’은 과장되었고, 성공한 ‘일본의 근대화’와 비교되었다. 자본주의와 근대화는 오로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서만 가능했다고 쇄뇌되었다.

혹독한 식민의 경험때문에 항일무장투쟁을 신성시하는 민족주의에 기댈 수밖에 없었고, 스스로 해방을 쟁취하지 못했기에 외세와 친일파 때문이라고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국전쟁 이후 스스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역사를 만들어온 한국 사람은 이제 뭔가 다른 역사서술이필요했다. ‘근대시민의 형성과 대한민국’가 반가운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대한민국의 주류로 ‘타협적인 온건한 민족주의’세력에 주목한다. 그들이 타협과 통합을 통해 3·1운동을 주도했고, 분단국가 대한민국 발전의 토대를 놓았다고 해석한다. 비타협적 급진주의적 민족주의가 오히려 뜻과 다른 결과를 가져왔고, 온건주의가 사회의 진보를 이끌었다고 한다. 이것이 한국근대사의 숨겨진 사실이라고…

개항이후 관료제로부터 자유로운 호남지역의 진취적 지주는 온건한 민족주의를 주장했다. 조선왕조의 엘리트인 기호지역의 관료적 지주들이 식민지 지배체제 내로 편입될 때, 호남지역 지주들이 실질적으로 한국의 근대화를 담당하는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독립적인 부르주아지로 성장했다.

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은 국제질서의 변동에 유의하면서 독립을 준비했고, 현실은 그들이 희망대로 진행되었다. 그들은 전체주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의회주의와 공화주의를 견지했다.

이러 시민적 민족주의는 제헌헌법 그리고 농지개혁에서 잠재력을 발휘했다. 온건한 민족주의 정당인 한민당은 모스크바삼상회의 합의를 기반으로 통일국가를 수립하려고 했다. 또한 이승만정권이 독재에 대항하는 반독재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반면 신탁통치를 거부하고 미소공위를 실질적으로 파탄시키면서 당장의 독립을 외친 급진적 민족주의는 분열과 분단의 길, 나아가 전쟁의 길을 열었다.

[저자소개]

이승렬은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시민의 역사교육을 위한 강연 및 교재 편찬을 기획했다. 주요 연구 주제는 한말과 일제시기 부르주아지 형성과 관련된 사회경제와 식민정책이었다. 저서로는 근대 이행의 상인적 기원을 검토한 <제국과 상인>(2007)이 있고, 주요 논문으로는 <강제병합 100년과 성장의 공공성>(2010) 외 다수가 있다.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대림대학교 교수 등으로 활동했다.

북토크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84602469

Posted in히스토리텔러

흐루세프스키, 우크라이나 민족을 만들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우크라이나가 독립국가가 된 후, 우크라이나 지폐에 그려진 인물이 있다. 미하일로 흐푸세프스키(1866년~1934년)가 그다. 그는《우크라이나-루스의 역사》《삽화로 보는 우크라이나의 역사》등의 역사책을 집필한 역사가이자, 1917년 볼세비키 혁명당시 우크라이나 중앙라다의 의장이었던 정치인이었다.

19세기는 민족주의의 시대였다. 특히 동유럽지역에서 민족의식과 민족담론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제국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국가를 만들거나 문화적 자율성을 갖는 것은 당연한 시대과제처럼 여겨졌다.

이런 질풍노도의 시기엔 민족들의 욕구가 민족주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가 민족을 만들기도 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우크라이나는 어떤 민족이 될 지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갈림길에 있었다.

본래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은 폴란드 지배 시기 폴란드와 타타르 사이의 변경지대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를 일부 지식인들이 19세기 전반부터 민족을 칭하는 말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폴란드 지배 하에서는 종교가 집단적 정체성의 잣대였다. 비잔티움 정교와 로마 가톨릭으로 두 민족은 구분되었다. 한편으론 적지 않은 우크라이나 엘리트층 구성원은 카톨릭으로 개종하면서 폴란드에 동화되어 가기도 했다.

그 반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을 때에는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의 구분이 쉽지 않았다.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의 종교적 공통성,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의 유사성, 공통의 국가적 기원론을 뒷받침해 준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제국이 지배하던 시기, 러이사의 공식입장은 대러시아인, 소러시아인, 백러시아(벨라루스) 세개의 집단이 하나의 공동체라고 말해졌다. 이는 17세기 후반 모스크바 대공국이 동부 우크라이나를 차지하면서 성직자들이 만든 역사서술이었다.

흐루셰프스키가 [우크라이나의 역사]란 책을 쓸 때는 아직 ‘우크라이나’라고 불리는 나라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흐루셰프스키는 우크라이나 민족이 역사적으로 형성된 독자적 정체성을 가지며, 특정한 영토적 범위를 가지는 독자적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서로 구분되는 민족이라고 보았다. 키예프 국가의 법제 및 문화는 우크라이나/루스 민족의 창조물이다. 반면 블라디미르 대공국/모스크바 대공국과 그 법제 및 문화는 대러시아 민족의 창조물로 보았다.

그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공유했던 문어체인 교회의 슬라브어 대신 근대 우크라이나 민중의 구어를 중시함으로써 러시아와의 언어적 공통성을 희석하고자 했다. 러시아 지배 하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는 언어 민족주의적 성격을 강조할 수 밖에 없었다.

1917년 러시아의 2월 혁명으로 흐루셰프스키는 새로운 기회를 맞았다. 그는 키예프에서 3월 초 결성된 중앙라다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하였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즉각적인 독립선언은 그의 역사해석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땅에는 두개의 우크라이나가 서로 다투게 되었다. 흐루셰프스키가 주도하는 키예프 중심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과 노동자 병사 농민 소비에트가 주도하는 하르키프 중심의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정부가 양립했다.

1918년 초 볼셰비키 군대가 키예프로 들어와 도시를 장악하였다. 흐루셰프스키는 볼셰비키가 민족문제에서 옛 제정 러시아 정부와 다를 바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소비에트 정부에 반대했다. 그리고 중앙라다 정부는 독일군의 개입을 스스로 요청했다. 당시 그의 행보는 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볼세비키는 전향적으로 민족을 품게 되었다. 레닌은 민족의 자치가 가능하게 설계된 연방제를 제안했다. 민족공화국들로 구성되고, 그 안에 자치공화국과 자치주가 포함된 체계, 곧 1922년 세워진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 연방이다. 그 연방의 15개 공화국의 하나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였다. 우크라이나를 연방공화국으로 편성했으며 우크라이나의 언어적 문화적 독자성을 존중하고 장려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흐루셰프스키는 우크라이나인에 의한, 우크라이나인을 위한, 우크라이나인의 역사를 서술했다. ‘우크라이나 민족’을 만들어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역사서술로 우크라이나인의 테두리가 만들어졌고, 그가 만든 테두리가 곧 오늘날의 우크라이나를 이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소련시기에 우크라이나 분리주의의 근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의심때문에, 당국의 불신을 받았던 흐루셰프스키였다. 소련 해체 후 독립한 우크라이나에서 건국의 공로자로 여겨지고 있다.

*참고문헌: 러시아연구 제24권 제 2호. 후루셰프스키의 [우크라이나의 역사]와 우크라이나 정체성

.

Posted in종합

한국 3월대선,1920년 미국대선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지난 4년 동안 시달린 전쟁과 전염병이 크게 영향을 미친 선거였다.

1차 세계 대전으로 10만명, 스페인독감으로 65만명의 미국인이 사망했다. 시카고 등 도시에서의 폭동, 육가공업이나 철강산업의 파업, 무정부주의자의 폭탄 테러가 전쟁 후 미국 도시를 뒤흔들었다.

수정헌법 19조에 의해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할 800만표 여성 유권자들이 선거의 새로운 변수였다.

민주당 현직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인기가 없었다. 그가 국제연맹의 설립을 주장했지만,정작 ‘군사적 개입이 필요할 때 의회가 평가할 권한을 보장하는’ 공화당의 수정안을 거부했다. 미국이 국제연맹의 설립을 제안했으나,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미국역사에서 우드로 윌슨만큼 압도적 거부와 반대에 부닥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평해진다.

백악관을 되찾기 위해 공화당은 워렌 G. 하딩 상원의원을 선택했다. 스윙 스테이트인 오하이오 주 출신의 신문 발행인 하딩은 미국인들이 갈망하는 정치적 위안을 전달할 수 있는 안전한 선택이었다.

하딩은 ‘정상으로의 복귀(A return to normalcy)’를 캠페인 슬로건으로 채택했다. 하딩은 ‘정상’에 대한 자신의 열망은 시계를 되돌리고 싶은 열망이 아니라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질서를 의미한다고 했다. 과도하지 않은 정상적인 절차, 자연스러운 방식을 의미한다고 했다.

하딩은 ‘프론트 포치 캠페인’으로 백악관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수많은 방문객들이 하딩의 집에 찾아와 베란다 주변에 모여서 후보자의 연설을 들었다. 그들은 하딩과 함께 찍은 사진을 고향 신문에 보내 하딩을 선거캠페인을 도왔다.

마침내 하딩은 선거인단과 대중 투표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아, 미국의 29대 대통령이 되었다. 선거인단에서 4 대 1에 가까운 압도적인 차이로 민주당 후보 콕스를 이겼다. 선거의 득표율은 60.3% 대 34.1%로, 1920년 이후 현재까지도 깨지 못한 기록이 되었다.

하딩은 1923년 미국 횡단 여행을 하던 중 샌프란시스코의 한 호텔에서 5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의 재임기간에 일어난 다양한 스캔들로 인해, 하딩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다. 코로나와 러시아의 전쟁개시로 어지러운 이때, 3월의 대선과 그 이후가 궁금해진다.

Posted in종합

[스토리텔러]전방위 지식인, 이어령

193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이화여대 석좌교수,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장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로 30여 년간 재직했고, 『조선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등 여러 신문의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월간 『문학사상』의 주간으로 편집을 이끌었다.

서울 올림픽 개폐회식과 식전 문화행사, 대전 엑스포의 문화행사 리사이클관을 주도했으며 초대 문화부장관을 지냈다. 1980년 객원 연구원으로 초빙되어 일본 동경대학에서 연구했으며, 1989년에는 일본 국제일본문화연구소의 객원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중앙일보』 상임고문, 한중일 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대표 저서로 『지성에서 영성으로』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 『생명이 자본이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지향의 일본인』 『디지로그』 『젊음의 탄생』 『짧은 이야기, 긴 생각』 『언어로 세운 집』 등이 있고, 소설 『장군의 수염』 『환각의 다리』와 시집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를 펴냈으며, 희곡과 시나리오 「기적을 파는 백화점」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 「사자와의 경주」 등을 집필했다.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 이어령이, 딸 이민아 목사가 세상을 떠난 후 가슴속에만 묻어놓았던 아버지의 못다 한 이야기를 담아 딸에게 보내는 영혼의 편지글이다

저서소개_마지막 수업

죽음을 옆에 둔 스승과 마주 앉은 열여섯 번의 화요일,

이어령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지난 2019년 가을, “이번이 내 마지막 인터뷰가 될 거예요”라는 말이 담긴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이어령 마지막 인터뷰’ 기사가 나가고, 많은 사람들이 “이어령 선생님의 메시지에 반응했다.”

“마이 라이프는 기프트였다”라고 밝히며 탄생의 신비로부터 죽음을 돌아보던 스승의 메시지는 7천여 개 이상의 댓글이 달리며 큰 화제를 모았고, 이러한 반응에 힘입어 김지수 기자는 “이어령 선생의 마지막 이야기를 담은 더 깊은 라스트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다. (책의 마지막 챕터로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이어령 마지막 인터뷰’ 전문이 수록되었다.)

“가을 단풍, 겨울 산, 봄의 매화, 그리고 여름 신록의 시간에 이르기까지” 1년에 걸쳐 진행된 열여섯 번의 인터뷰에서 스승은 새로 사귄 ‘죽음’이란 벗을 소개하며, “남아 있는 세대를 위해” “각혈하듯” 자신이 가진 모든 지혜를 쏟아낸다.

“때때로 선생의 몸은 불시에 안 좋아져” 인터뷰를 취소해야 할 때도 있었지만, 그는 “매주 화요일” “죽어가는 스승 곁에서 삶의 진실을 듣고 싶어 하는 독자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내놓는다. 스승은 이 책을 읽을 제자들에게 자신의 지혜를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 여러 번에 걸친 첨삭과 수정을 거치며 자신의 “유언”처럼 남을 이 책을 완성했다.

“나는 이제부터 자네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하네. 이 모든 것은 내가 죽음과 죽기 살기로 팔씨름을 하며 깨달은 것들이야. 이해하겠나? 어둠의 팔뚝을 넘어뜨리고 받은 전리품 같은 것이지.”

_「다시, 라스트 인터뷰」에서

“이 책은 죽음 혹은 삶을 묻는

애잔한 질문에 대한 아름다운 답이다.”

삶과 죽음 속 사랑, 용서, 종교, 과학, 꿈, 돈 등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며 펼쳐지는 이어령과 김지수의 대화는 오랜 시간 죽음을 마주한 채 살아온 스승이기에 전할 수 있는 지혜들로 가득하다.

그는 “재앙이 아닌 삶의 수용으로서 아름답고 불가피한 죽음에 대해 배우고 싶어” 하는 제자의 물음에 은유와 비유로 가득한 답을 내놓으며, “죽음이 생의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무엇보다 스승은 내게 죽음이 생의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어 했다. 정오의 분수 속에, 한낮의 정적 속에, 시끄러운 운동장과 텅 빈 교실 사이, 매미 떼의 울음이 끊긴 그 순간…… 우리는 제각자의 예민한 살갗으로 생과 사의 엷은 막을 통과하고 있다고. 그는 음습하고 쾌쾌한 죽음을 한여름의 태양 아래로 가져와 빛으로 일광욕을 시켜주었다.”

_「프롤로그」에서

또한, 스승은 “유언의 레토릭”으로 가득한 수많은 이야기를 통해 “왜 케이스 바이 케이스에 진실이 있는지, 왜 인생은 파노라마가 아닌 한 커트인지, 왜 인간은 타인에 의해 바뀔 수 없는지” 등을 설명하며, 한평생 “평화롭기보다 지혜롭기를 선택”했던 자신이 발견한 삶의 진리에 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나 절대로 안 죽는다.

언제나 네가 필요할 때 네 곁에서 글 쓰고 말할 거야.”

자기만의 길을 찾아 떠난 이들에게

스승이 전하는 담담한 위로

스승 이어령은 우리에게 자신의 죽음이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내 육체가 사라져도 내 말과 생각이 남아” 있으니 “그만큼 더 오래 사는 셈”이라고……. 글을 쓰고 말하는 것이 자신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그는 “보통 사람은 죽음이 끝이지만” 작가에게는 “죽음에 대해 쓰는” 다음이 있다며, 현재 자신에게 벌어진 “모든 일을 아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털어놓는다.

스승은 “죽음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 “생사를 건네주는 사람”이라고 한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모리 교수’가 그랬듯, 스승 이어령은 “자기만의 무늬”를 찾아 헤매는 이들을 위해 자신의 “마지막 지혜 부스러기”까지 이 책에 담는다. 제자들이 “길을 헤맬”지라도 “너만의 이야기로 존재”하길 바라는 이런 스승과 함께라면 어쩌면 우리는 “이 불가해한 생을 좀 덜 외롭게 건널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을 써내려가는 지금까지 나는 이 책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다만 이 책이 아름답고 고독한 생애를 살았던 스승이 당신의 가슴에 안기는 마지막 꽃 한 송이로 기억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_「작별인사」에서

Posted in서촌소식

서촌에서 만난 이어령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어령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서울 올림픽으로 그를 알게 되었다. 한 소년이 굴렁쇠를 굴리며 사선으로 경기장을 지나는 장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 때 그 소년은 미래를 향해 달렸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 어느 늦은 오후 서촌의 책방에서 우연히 다시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의 책 ‘젊음의 탄생’을 책방에서 보았다. 젊음의 시절은 이미 지나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왠지 제목에 끌려 집어들었다.

알라딘: 젊음의 탄생

그리고 목차를 훑어 보았다. 뜨고 날고, 묻고 느끼고, 헤매고 찾고, 섞고 버무리고, 앎에서 삶으로, 나의 별은 너의 별

고리타분하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인생은 빈칸 메우기의 퍼즐이고, 배움은 새로운 젊음을 낳는다 했다. 그리고 젊은이여, 세렌디피티를 잡아라고 외친 듯했다.

불현듯 나는 서촌이란 우연을 잡아버렸다. 인생의 빈칸을 영화로 채우기로 했다. 서촌 역사책방 건너편에 ‘글로리아 필름’으로 자리를 잡았다. 자주 책방을 들락거리며 배우며 새롭게 젊어지고 있다.

Posted in기업과 경영

독창적 투자기법연구, 최성락

최성락은 참 독특하다. 한마디로 ‘잡지형 인간’이다.

『말하지 않는 한국사』,『한국이 중국을 선택한다면』,『규제의 역설』,『한국은 자본주의 사회인가』,『나는 카지노에서 투자를 배웠다』이 밖에도 그가 쓴 수많은 책은 한 사람이 썼다고 생각하기 힘든 리스트가 있다.

경영학과 행정학 두 개의 박사 학위를 가졌기에 자본주의나 규제 관련 책은 쓸 만도 하다. 그런데 역사와 외교정책에 관한 책은 좀 뜻밖이다. 게다가 점잖은 교수가 카지노에 출입하면서 투자의 원칙과 방법을 배웠다는 책은 일부 독자들이 보면 뜨악할 수도 있다.

지난 봄, 최교수와 책바보로 소문난 언론인 한 분, 그리고 편집자가 식사 자리를 가졌다. 저자가 밥값 낼 일이 있다면서 계산을 치렀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학교를 그만두게 다고 한다. 비트코인과 미국 주식에 투자한 게 대박 났다고 한다.

학교를 회사라 부르는 그는 그 덕에 적성에 맞지 않는 교수직을 떠나 전업 투자와 연구에 몰두하겠다고 한다. 개인연구소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소위 말하는 파이어족이 된 것이다.이 일화를 책으로 쓰겠다던 그는 가을에 원고를 보내왔다.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투자 경험과 철학을 순박하게 풀어 쓴 것이다. 투자에 관한 생각이 다른 분은 불편하게 볼 수도 있다. 반면 가치투자에 공감할 이들은 성공한 투자가의 경험에서 소중한 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이력을 소개하자면, 서울대학교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박사 학위,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양미래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하다 2021년 연구와 투자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퇴직했다

저서소개_50억 벌어 교수직도 던진, 최성락 투자법

“투자자는 급락할 때보다 급등할 때 가장 괴롭다”

매도의 유혹을 뿌리쳐라!

파이어족이 된 최성락 교수의 투자법

전작 『나는 카지노에서 투자를 배웠다』로 대중의 이목을 이끈 최성락 교수가 신간 『50억 벌어 교수직도 던진 최성락 투자법』으로 돌아왔다. 점잖은 대학 교수가 카지노에 출입하면서 투자의 원칙과 방법을 배웠다는 것만으로도 파격적인데, 이번에는 한층 더 솔직담백하고 강력해졌다.

아예 대학 교수직을 던지고 파이어족이 된 것이다. 순자산 20억, 하지만 그 재산이 모조리 부동산에 묶여 있었던 저자는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과 강의 준비에 염증을 느꼈다. 남들은 20억이나 있으면서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당장 팔 수도 없는 집을 제외하면 쓸 수 있는 현금 자산이 없었다.

서울 소재 대학의 정교수 임용을 앞두고 있었지만 강의는 영 체질에 맞지 않았고, 원하지 않는 분야의 연구 논문은 끝도 없이 쏟아졌다. 그런 최 교수의 유일한 취미라고는 틈날 때마다 대형 서점에 가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그는 경제경영 매대에 있는 무수히 많은 투자 원칙과 파이어족 경험담을 탐독했다.

하지만 평범한 월급쟁이와 다를 바 없는 대학 교수가 지금 가진 자산 이상의 수익을 얻을 길은 마땅히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불과 3년 만에 순자산 50억을 달성한다.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기술이나 방법이 있었던 게 아니다. 그저 쏟아지는 주식 투자책을 읽으면서 자기 자신을 “평범한 월급쟁이”가 아닌 “워런 버핏과 다를 바 없는 투자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비트코인과 주식 투자에 앞서 아예 사고방식을 통째로 바꿔버린 것이다. 투자의 ‘비법’이 아닌 ‘과정’을 빠짐없이 기록한 이 책은 너무 평범해서 놓치고 있었던 투자자들의 특급 비밀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제 더는 원하지 않는 일을 하지 않고, 완벽한 경제적 자유를 얻게 된 최 교수는 책 한 권으로 부자가 되고, 인생이 180도 달라질 수는 없다고 말한다. 자기 스스로 30년 차 주린이라 말할 만큼 주식 시장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투자 여정의 동반자쯤으로 두고 자신이 지난 30년간 겪은 주식의 세계를 제3자의 시선에서 들여다볼 것을 제안한다. 책에는 도박판보다 순진하고, 알고 보면 명확한 주식 세계의 이야기가 빠짐없이 담겨 있다. 끝으로 최 교수는 헬조선이라 불리는 현실 앞에서 자본주의를 부정만 하는 이들에게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아는 방법은 파이어족이 되는 것이라고, 이는 누구나 시도할 수 있고 반드시 달성할 수 있는 일임을 강조한다.

직장에서의 성공 대신 퇴사를 택한 대학교수의 소심하지만 정확한 투자법을 따라가다 보면 당신의 투자 여정은 결코 외롭거나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전 세계에 한정판으로 나온 상품

모두가 원하는 가상 화폐계의 에르메스

한국의 투자자들이 복음처럼 되뇌는 말이 있다. “좋은 주식 오래 들고 있기” 그렇다면 좋은 주식은 무엇이고, 언제 어떻게 매입해야 하는 걸까.

대학교 때 처음 주식을 시작한 저자는 주식의 세계에 대해 단언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그런 그의 눈앞에 반드시 오를 투자 상품이 나타났으니, 바로 테슬라 창업주 일론 머스크도 구매한다는 ‘비트코인’이다. 문과 출신인 저자는 컴퓨터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문외한이고, 코인의 기반이 되는 암호 기술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다들 블록체인이 미래를 바꿀 기술이라는데 여전히 그 이유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비트코인에 투자한 명확한 이유가 있으니, 바로 비트코인 공급량이 2,100만 개로 고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비트코인은 따로 관리자가 없기 때문에 고정된 숫자가 변화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이렇듯 공급이 고정된 상품은 수요만 따라주면 그 가치가 천정부지로 솟는다.

이를 두고 최 교수는 비트코인 투자는 상위 1%의 미술품 투자와도 같다고 말한다. 실제로 미술품의 아우라를 아는 이는 극히 드물다. 그런데도 미술품의 경매가가 일반인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치솟은 이유는, 그 작품의 가치에 있는 게 아닌 작품의 희소성과 사람들의 소유욕에 있다.

최 교수는 이런 비트코인의 속성을 알고 일찍이 비트코인이 최소 천만 원에서 1억도 가능하다고 파악했다. 하지만 그는 명확한 투자 상품 앞에서도 절대 고수익 고위험을 추구하지 않는다. 투자에서 수익보다 중요한 건 돈을 잃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투자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가 두 번의 폭등기였다고 담담하게 고백한다.

비트코인을 가만히 들고만 있어도 가격이 오를 게 빤한데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돈 앞에서 마음을 다잡기란 쉽지 않다. 실제로 최 교수는 2014년에 50만 원에 산 비트코인을 1,850만 원에 팔기도 했다. 이는 수치로만 보면 명백히 대성공이었지만, 그때 그의 마음은 지옥과 다름없었다. 이처럼 투자란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을 속이는 게임, 그리고 내 마음이 아닌 주가 그래프만을 보고 묵묵히 걸어가는 마라톤과도 같았다.

세상의 모든 부자는 경제위기와 함께 등장했다

그리고 나는 미국 주식에 미래를 걸었다

‘아, 이게 정말 있을 수 있는 일이었구나.’ 저자는 3년 사이에 10억 원을 훌쩍 넘은 주식 포트폴리오를 보고 운때가 맞았다고 말한다.

그것 말고는 이렇듯 명확하게 성장한 투자 포트폴리오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팬데믹과 함께 주식 시장은 요동쳤고, 반드시 오를 거라고만 예상했던 비트코인도 급등과 급락의 폭을 보면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이때, 그의 시선을 이끈 게 있으니 바로 미국 주식 시장이다.

그가 지금까지도 꾸준히 수익을 얻은 주식 상품 중 하나는 전 세계 OTT 서비스 시장을 장악한 넷플릭스였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사용하는 플랫폼이지만 당시만 해도 넷플릭스가 뭐하는 회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그저 기업의 성장률이 일정하고 안정적이었으며 자신의 주식 포트폴리오 겹치는 분야가 없었다.

최 교수는 투자를 하기에 앞서 해당 기업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해당 사업의 전문가나 관계자가 아닌데 그 기업의 속속들이 아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좋은 기업이라고 해서 주식시장의 전망이 밝은 건 아님을 강조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과, 디자인 혁신을 이뤄낸 애플도 막상 기업 분석을 해보면 전년 대비 매출이 상승하지는 않았다. 그는 무조건 삼성전자의 주식을 사면된다고 하는 인식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자신만의 기준 없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장에서 다른 사람의 말만 듣고 주식을 사고파는 건 투기이지, 투자가 아니다. 몇 해 전만 해도 모든 주식 책에서 반드시 오를 거라 했던 중국 주식들을 이제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말 바꾸는 게 손바닥 뒤집기보다 간단하다 해서 이를 비판하려 드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최 교수는 경제적 자유를 얻고 파이어족이 된 이후에야 자본주의 사회가 자본가를 위한 사회였음을 몸소 깨달았음을 고백한다.

돈이 돈을 부르는 사회, 부가 대물림되는 사회.

이를 비난하기만 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그 세계에 총을 메고 들어가 파이어족이 될 것인가. 선택은 본인의 몫이다. 그리고 이 책에는 그 모든 과정이 담겨 있다.

Posted in히스토리텔러

푸틴, 러시아 역사를 소환하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12월, 동독 드레스덴에 파견되있던 젊은 KGB 장교 푸틴은 성난 군중이 곳곳을 습격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동독 비밀 경찰의 사무실 뿐만 아니라 내부 성역인 KGB까지 진입하려고 했다. 푸틴은 민감한 정보를 지키기 위해 모스크바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모스크바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그는 밖에 나가 건물 안으로 들어오면, 총을 쏘겠다고 소리쳤다. 총도 쏠 사람도 마땅치 않았는데… 그의 허세에 군중은 사라졌고, KGB의 파일은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그리고 1991년, 소비에트연방은 순식간에 해체되었다. 푸틴은 가장 한심하고 굴욕적인 방식으로 무너지는 조국을 지켜보았다. 그는 인터뷰에서 “나는 더 이상 그 나라가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다른 무언가가 일어나길 원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1990년대 빠르게 승진하면서 푸틴은 영향력 있는 인물로 부상했다. 1991년 푸틴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부시장이 되었고. 1996년에는 옐친 대통령의 크렘린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러시아가 얼마나 약해졌는지 권력의 핵심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1998년, 빌 클린턴 미대통령은 ‘세르비아를 공습’을 옐친에게 통보했다. 옐친의 의견은 들을 필요조차 없었다.

푸틴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러시아가 세계 강대국 3위로 강등될 수 있는 실질적인 위험에 직면했다”고 경고하고, “일류국가”로 남기 위해 단결할 것을 촉구했다. 이를 위해 푸틴은 역사에 눈을 돌렸다. 

가까운 과거는 모순되고 고통스럽고 피투성이였지만, 푸틴은 러시아 국민을 향해 “자신들의 역사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위대한 애국전쟁,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는 새로운 러시아를 위한 일종의 건국 신화가 되었다.  

푸틴은 자신을 새 국가와 동의어로 만들었다. 나아가 국가 내러티브와 개인 이미지를 연계해 히스토리를 만들고 있다.

2016년 모스크바의 크렘린궁 바로 옆에 키에프 공국의 영웅 블라디미르 대공의 동상이 세워졌다. 푸틴 대통령은 제막식에서 “블라디미르 대공이 받아들인 기독교는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국민의 공통된 정신적 원천”이라고 했다.

마침 그의 이름은 ‘블라디미르’였다.

Posted in기업과 경영

조원경,빅테크 트렌드

세계경제포럼(2020)이 아시아 최초, 세계 9번째 제조혁신 도시로 선정한 대한민국 산업 메카 울산의 경제부시장이다.

오랫동안 기획재정부에서 근무하면서 한국의 미래 경제 생태계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해온 저자는 디지털 제조혁신과 그린 에너지, 바이오 산업으로 일대 전환을 맞고 있는 울산에서 해답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모빌리티 혁명, 수소경제, 부유식 해상풍력, 동북아 에너지 허브, 만 명 게놈 프로젝트 등 다양한 혁신기술 발전을 지원하며 미래 먹거리 사업을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지은 책으로는 『명작의 경제』, 『법정에 선 경제학자들』, 『식탁 위의 경제학자들』, 『경제적 청춘』, 『한 권으로 읽는 디지털 혁명 4.0』, 『나를 사랑하는 시간들』, 『부의 비밀 병기, IF』, 『넥스트 킬러앱』, 『넥스트 그린 레볼루션』 등이 있다.

최근작 : <앞으로 10년 빅테크 수업>,<넥스트 그린 레볼루션>,<넥스트 킬러앱>

저서소개_앞으로 10년 빅테크 수업

“10년 후 미래, 당신은 얼마나 준비돼 있는가?”

메타버스, NFT, AI, 구독경제, 우주개발, 양자컴퓨터, 바이오테크…

다음 시대를 이끌 혁신기술의 개념부터 대표 기업 사례와 투자 전망까지

변화의 속도가 빨라진 요즘, 이를 따라잡기란 쉽지 않다. 뉴스만 켜면 새로운 기술에 대한 정보가 쏟아져나온다.

메타버스와 NFT, 디즈니플러스 상륙, 민간 우주선 발사, mRNA 백신 등 기존에 없던 혁신기술을 기반으로 한 소식들은 우리의 삶에 맞닿아 있음에도 여전히 모호하게만 들린다.

그래서 한 권에 우리가 꼭 알아야 할 4가지 기술의 개념과 사례, 전망까지 명확하게 정리한 이 책의 등장이 반갑다.

이 책은 미래를 바꿀 4가지 혁신기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데이터 과학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 머리로는 이해해도 피부로는 와닿지 않는 기술 개념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례와 관점이 필요하다. 책에는 기술을 선도하는 유명 해외 기업의 사례뿐 아니라 국제 경쟁력을 갖추어가는 중인 여러 국내 기업 사례도 대거 등장한다.

또한 앞으로의 경제 생태계가 어떻게 바뀔지에 대한 거시적인 전망과 분석도 놓치지 않았다. 왜 전 세계의 수많은 기업가들이 혁신기술을 움켜쥐려 하는지, 쇠락의 길을 걷던 기업이 시대의 흐름을 어떻게 이용해 부활하게 되었는지, 앞으로 경제 질서는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도 담겨 있다.

사회의 축이 바뀌는 과정 속에서 10년 후 미래의 모습을 예측하며, 변화에 올라타기 위해 각자 준비해야 할 것들을 찾아나가보자.

“10년 후 세상은 혁신기술로 부자가 된 사람과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으로 나뉠 것이다!”

진화하는 기술과 인간의 상상력이 합쳐져 세상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지고 있다. 또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기존의 질서는 예상보다 더욱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몰아치는 변화의 파도 위에 올라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느냐, 그 속에 빠져 허우적대느냐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저자는 울산의 경제부시장으로서 각 명사를 만나고 미래 정책들을 검토하며 변화할 미래 사회의 모습에 대한 정보를 누구보다 정확하고 빠르게 이 책에 담았다.

메가테크의 개념과 발전 과정, 미래 전망부터

일과 투자의 미래까지 모두 담긴 단 한 권의 책

책에서는 먼저 혁신기술의 기원과 의미를 알아본 뒤, 현재 이 분야가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 관련 기업들의 사례를 짚고 넘어간다.

이후 이 기술이 미래를 어떻게 바꿔놓을지 성장성과 리스크를 알아본다. 마지막으로 구체적으로 우리가 대비해야 할 일과 투자의 미래를 고민한다.

새롭게 생길 직업과 사라질 직업에는 무엇이 있는지, 업무 환경은 어떻게 바뀌는지 알아보고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또한 매년 규모가 확대되는 시장과 성장성이 높은 기업에는 어느 곳이 있는지 투자의 방향 또한 짚어준다.

기술 너머를 살아갈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빅4 테크’

1. AI 메타버스와 NFT(AI Metaverse & Non-Fungible Token)

메타버스란 현실세계와 같은 사회·경제·문화 활동이 이뤄지는 3차원 가상세계를 말한다. 그 안에서 우리는 AI와 내가 합쳐진, ‘디지털 미’라는 나의 분신이자 가장 가까운 비서와 함께 살아가게 될 것이다.

가상세계가 점차 확대되어감에 따라 고유성과 희소성이 있는 NFT의 가치는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 가상세계 속의 사회·경제·문화 활동이 어떤 트렌드와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메타버스가 자리를 잡아 가는 단계에서 발생하는 법적인 쟁점과 앞으로의 전망까지 알아본다.

2. 구독경제와 블록체인(Subscription Economy & Block Chain)

콘텐츠뿐 아니라 다양한 물건까지 구독 형태로 받는 구독경제 시대가 열렸다. 이제는 구독이 신문이나 잡지, 영상을 넘어 와인과 홈트레이닝, 심지어 주거에까지 스며들었다. 단순히 상품이나 서비스를 일회적으로 제공해서는 선두 기업이 되기 어려운 시대가 열렸다.

정기적으로 비용을 지불하는 구독경제 하에서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하는 가상화폐 결제 시스템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어떠한 기업이 구독자들의 공감을 얻고 편의성을 제공하며 지속적으로 수익을 창출해나갈 수 있을지, 구독경제 속 게임 체인저들의 모습을 살펴본다.

3. 우주개발과 양자컴퓨터(Space Exploration & Quantum Computer)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와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의 접점은 세계 1, 2위를 다투는 부자라는 것 외에 한 가지 더 있다. 우주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는 라이벌이라는 것이다.

베이조스는 달, 머스크는 화성을 목표로 민간 우주선 개발과 우주여행 상용화를 위해 나아가고 있다. 여기서 핵심 역할을 해줄 장치가 양자컴퓨터이다.

양자컴퓨터는 기존 컴퓨터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작업을 처리하는 첨단 컴퓨터로, 우주를 분석하여 인간의 활동 영역을 지구에서 우주로 넓히는 도구가 되고 있다. 세계의 부호들이 저마다 우주에 깃발을 꽂기 위해 경쟁하는 가운데, 국내 우주산업은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도 함께 짚어본다.

4. 바이오테크와 유전자 가위(Bio Technology & Gene Scissor)

코로나19로 인해 바이오테크는 우리에게 한층 더 의미있게 다가오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노벨상을 받은 유전자 가위 기술이 앞으로의 바이오 산업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유전자 가위를 통해 인간은 질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교정하는 ‘신의 영역’까지 넘보고 있다. 의사 없는 의료 시장이 점차 확대되며 누구나 집에서 전문적인 의료 서비스를 받는 시대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노화와 질병이 사라진 미래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미시간 주립대학교에서 파이낸스 석사, 연세대학교에서 공학박사를 취득했다.

1990년 행정고시에 합격한 이후로 줄곧 기획재정부에서 일했다. 2005년 중남미 빈곤 감축과 경제·사회 개발을 위한 미주개발 은행 가입 협상, 2009년 한-EU FTA 서비스 협상, G20 국제금융 체제 실무그룹 공동의장 등 굵직한 국제 협상 테이블에서 주요 역할을 하며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힘과 기업에 대한 식견을 보여주었다.

Posted in히스토리텔러

민태기 “판타 레이(Panta rhei)” – 모든 것은 흐른다.

2021년은 우리나라의 로켓 과학 기술의 역사에서 전환점이 된 해라고 할 수 있다. 5월 로켓 기술의 개발에서 유리 천장 역할을 해 온 한미 미사일 사거리 지침이 종료되었다. 10월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저궤도 실용 위성 발사용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가 거의 성공적으로 발사되었다. 2022년에는 2차, 3차 시험 발사가 예정되어 있어, 발사와 위성체의 궤도 안착 모두 성공을 기대하고 있다.

그런 로켓 과학과 기술의 핵심에는 유체 역학이 있다. 유체 역학은 이공대 학생들의 필수 과목이지만, 공학 꿈나무들을 좌절로 이끄는 과목으로 악명이 높다. 대중적인 과학이야기가 인기를 끄는 요즘에도 유체 역학을 주제로 한 책이나 방송 등의 콘텐츠가 부족한 것에는 유체 역학이 가진 난해함이 한몫한다.

그 난해함에 도전한 [판타레이:혁명과 낭만의 유체과학사]가 발간되었다. 책의 저자 민태기박사는 자동차 터보 엔진 기술을 개발하고, 누리호에 국내 순수 기술로 개발한 터보 펌프를 납품한 과학자이다. 그는 또한 잘 알려지지 않은 과학이야기를 찾아 수백가지 과학역사 메모를 한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그 지식을 바탕으로 《조선일보》에 「사이언스스토리」라는 칼럼을 연재하면서 과학과 사람의 조화를 꿈꾸고 있다.

민소장은 마치 서로 분절된 것처럼 보이는 개별 과학을 꿰뚫는 하나의 연결 고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 ‘잃어버린 고리’를 ‘판타 레이’라는 개념에서 찾는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과학사와 기술사는 사실 유체 역학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다. 플라톤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을 ‘판타 레이’로 기술했다. 모든 만물은 지속적으로 흐르는 강물 속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고,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끝없는 변화 자체이다. 우리 환경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끝없이 변화하는 지속적 프로세스 속에 존재한다.

  • 왜 우리는 전자의 이동을 전기의 흐름이라고 부르게 되었을까?
  • 왜 경제학자들은 돈의 움직임을 화폐 유동성이라고 부르고 나비에와 스토크스라는 유체 역학자가 개발한 유체 방정식으로 문제를 풀고 있을까?
  • 왜 뉴턴과 라이프니츠는 다투게 되었을까? 왜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만들게 되었을까? 왜 양자 역학의 슈뢰딩거 방정식은 파동 방정식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일까?

이런 질문들은 최초의 전자기학 발견자들과 경제학자들, 그리고 수많은 과학자와 수학자들이 유체 역학 연구자였다는 것을 짐작케한다. 그는 단순히 과학사의 잃어버린 연결 고리인 유체 역학의 역사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유체 역학에 관한 과학 지식을 친절히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대 물리학자들의 생생한 사고와 탐구 과정을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다. 과학은 자연 현상에 대한 부분적인 해석이 아니라 인간 사회 전체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사회와 격리된 어느 한 천재의 고독한 상상력으로 탄생한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았던 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이 낳은 필연적 결과다. 예술가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그 시대와 삶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듯, 과학자들이 살았던 시대와 그들의 삶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변화하고 움직이는 모든 것을 유체 현상으로 이해한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은 유체역학을 통해 서로 연결된다. 서로 아무 상관 없는 줄 알았던 음악 사조, 정치적 사건, 유행하던 사교계 풍습 등이 과학적 발견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된다. 역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모여 살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과학 역시 괴짜 천재들이 외딴 섬에서 홀로 발전시켜 온 것이 아니었다. 과학이든 예술이든 정치사상이든 사람들의 모든 ‘생각’은 치열한 상호 교류 속에서 서로를 변화시키며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간다.

Posted in서촌소식

강병인’글씨의 힘’

한글 멋글씨를 창안한 강병인 작가

강병인은 1998년부터 서예에 디자인의 표현방식을 접목한 멋글씨, 영어로는 캘리그래피Calligraphy 분야를 개척해 왔다.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던 강병인은 1990년대초 일본을 방문했을 때, 붓글씨의 다양한 쓰임새를 보고 디자인과 서예의 융합에 눈을 떴다.

강병인은 디자인회사를 접고, 한글의 원리를 탐구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는 서예와 디자인을 결합한 그의 작업을 ‘멋글씨’라고 개념화했다. 멋글씨는 서예의 순 우리말로 멋만 추구하는 글씨가 아니라 전통서예를 바탕으로 글이 가진 뜻과 소리를 글씨로 적극 표현한다는 말이다. 멋글씨는 한글만이 가진 강점을 모두 살리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강병인은 이러한 멋글씨 분야를 서예의 현대적인 재해석으로서 순수 현대 한글서예를 추구하고, 서예의 응용으로서 디자인에 쓰이는 글씨, 즉 디자인 캘리그래피를 대중에게 계속 선보였다.

강병인의 작품은 모두 한글 제자원리를 창작의 근원으로 삼고 있다. 보이지 않는 소리를 보이게 하고, 보이지 않는 뜻을 보이게 하는 글씨로 한글 꼴의 다양성과 아름다움을 구현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의 대표작중 하나인 ‘참이슬’의 경우 ‘슬’의 ‘ㅅ’은 여성의 머리갈래를 연상하게 하는 등 젊고 역동적인 느낌을 글씨에 담고자 했다.

참이슬, 의형제, 대왕세종, 엄마가 뿔났다, 정도전, 미생, 화요, 열라면, 아침햇살, 제일제면소 등 강병인의 대표작은 멋글씨 철학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대중은 열라면 캘러그래피를 보면 열라면의 매운 맛을 머리에 떠올리고, 화요술이 마시고 싶을 때 병에 새겨진 화요 글씨를 떠올리곤 한다.

그의 글씨가 디자인에 미친 공로가 인정되어 2012년 대한민국 디자인대상 은탑산업훈장을 수훈했다.

강병인은 상업적 캘러그래피에 머무르지 않고 문학과의 만남도 추구했다. 문정희 시인의 시를 읽고 시의 느낌을 담은 작품을 만들었다.(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강병인 작가 역사책방 아카이빙

5Q 인터뷰_문정희 정호승 시를 캘러그래피로 표현한 책을 출간하고 역사책방과 인터뷰하다

한글 원리를 활용한 작품 세계를 테마로 온라인 북토크를 하다

강병인작가의 저서

독립운동가의 시와 말씀을 글씨로 보다〈나의 독립〉_강병인 지음/글꽃/2021

미래그림책142〈한글꽃이 피었습니다〉_강병인 글.글씨/미래아이/2018

강병인의 캘리그래피 이야기〈글씨 하나 피었네〉_강병인 지음/글꽃/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