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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1책]송길영의 호명사회,작아지는 조직,커지는 사람

‘시대 예보:호명사회’ 저자 송길영은 빅데이터 수집과 분석 전문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송작가는 소셜미디어와 커뮤니티에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데이터를 분석해 수면아래 움직임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수년전 송작가는 자신의 직업을 ‘마인드 마이너 Mind Miner’로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빅데이터를 분석하면 사람의 진짜 마음을 읽을 수 있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는 빅데이터 분석력에 뛰어난 글과 말솜씨를 더해 메가트렌드 전문가로 다시 발돋움하였습니다. 2023년에 펴낸 ‘시대 예보’ 핵개인의 시대’에서 책 제목에 시대 예보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날씨를 예보하듯이 앞으로 닥칠 미래를 예보하겠다는 의미를 그런 표현에 담은 것입니다.

호명사회는 핵개인의 시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핵개인의 시대란 조직보다 개인이 삶의 주체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송작가는 핵개인의 시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각 개인이 자신의 이름으로 삶의 통제권을 행사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보합니다.

호명사회는 연세대 모종린 교수의 ‘크리에이터 소사이어티’와 비슷한 시대관을 갖고 있습니다. 개인이 자신의 이름으로 독립적으로 먹고 사는 방식중의 하나가 크리에이터입니다. 핵개인과 크리에이터는 글로벌 플랫폼을 무대로 삼아 삶의 통제권을 스스로 행사하고 서로 연대하고 협력한다는 측면에서도 두 책은 같은 지향점을 갖고 있습니다.

호명사회에서 ‘작아지는 조직, 커지는 사람’편을 골라서 10줄로 요약했습니다.

1.충TV와 김선태

충주시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충TV의 구독자 수는 지자체 채널로 한국 1위를 넘어, 운영자의 설명에 따르면 아시아에서도 가장 많은 숫자라 합니다. 2019년 시작한 ‘충TV’ 채널에는 5년 남짓한 기간 동안 300개에 육박하는 동영상이 올라왔고, 총 3억 회에 가까운 조회수를 기록했습니다.

눈에 띄는 것은 충주시 홍보맨 ‘김선태 주무관’의 이름입니다. 많은 기사와 유튜브 동영상은 기관의 성취를 설명하며 지방자치단체장을 거론하기보다 운영자인 ‘김선태 주무관’의 공을 언급합니다.

2.조직이 아니고 개인의 성과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개인의 성과라는 면을 넘어서 그것을 바라보고 수용하는 시민들의 태도 변화입니다. 지방자치단체의 공무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일 것이라는 온라인의 댓글에 많은 ‘좋아요’ 버튼이 눌리고, 김선태 주무관의 노력과 성과를 존중과 인정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이들이 이전보다 늘어났습니다.

김선태 주무관은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7년 만에 9급에서 6급으로 고속 승진을 하였습니다. 많은 젊은 세대는 ‘노력하고 성과를 낸 사람을 인정하자’고 고속승진을 긍정적으로 수용합니다.

조직과 소속에 개인의 이름이 가려지는 일이 당연했던 지난 시대의 관점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현상입니다.

3.선 업로드 후 보고

김선태 주무관은 보수적인 공직 사회에서 ‘윗선의 결재’가 창의력 구현에 가장 큰 어려움임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충주시 채널은 ‘선(先)업로드, 후(後)보고’라는 무(無)결재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김 주무관은 이와 같은 시스템이 충주시 유튜브 채널의 성공 요인이라고 설명합니다. 충

4.김선태 활약의 영향력

김선태 주무관이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경험을 전달하며 이제 새로운 씨앗이 뿌려지고 있습니다. 한국철도공사와 양산시를 비롯한 많은 공공기관이 그가 깬 금기에 화답하며 창의적인 콘텐츠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일을 맡고 있는 담당자들 역시 세상의 주목을 받으며 기관과 소속의 명칭뿐 아니라 만든 사람들의 이름에 집중하는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반응에 고무된 이들은 더욱 창의적인 콘텐츠를 기획하며 스스로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5.유동화와 극소화

그간 우리 사회의 조직이 지닌 빙산과 같은 완고함에 이제 균열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유동화와 극소화가 조직은 더 작아지고 개인은 더 커지도록 사회를 이끌고 있으며, 이제 조직의 이름이 있던 자리에 개인의 이름이 대체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복수의 직업을 동시에 가지거나 은퇴를 미루며 생업을 이어가는 이들의 숫자가 가파르게 증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조직을 넘어 나의 업을 만들어야 한다는 개인의 각성을 이끌어 내게 됩니다.

6.개인의 연결

그리고 극소화는 모든 것을 혼자 할 수 있을 만큼 기술의 발전 속도가 빨라지고 연결성이 조밀해지며 타인에게 부탁할 필요가 줄어드는 것, 즉 조직의 규모가 작아지는 현상입니다. 매일 같이 새로운 발견과 발명이 우리의 눈을 유혹할 만큼 기술의 발전 속도가 빨라지고 있습니다.

DTP(DeskTop Publishing, 탁상출판) 시스템의 개발로 형성된 1인 출판사 같은 것이 그 직접적인 예시였고, 혼자서 미디어 회사를 운영하는 예제까지 더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직의 극소화는 조직을 1인 기업까지 축소시킬 수 있고 몇몇 창작 업종을 넘어선 영역으로까지 그 범주가 확장되고 있습니다.

7.직급 삭제 흐름

이미 한국의 조직은 이러한 시스템을 준비해 오고 있었습니다. 직급으로 서로를 부르던 계층적 사고를 없애기 위해 직급을 단일화하고 호칭으로 ‘프로’나 ‘매니저’를 채택한 기업들이 늘어난 것입니다.

호칭에서 경직된 사고가 시작된다고 생각한 기업들은 ‘님’이라 부르거나 영어 이름, 닉네임으로 서로를 부르는 문화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도들 역시 수직적 위계는 없애려 하나 기존의 집단적 사고의 전제는 남겨놓은 것이었습니다.

8.공유와 협의

각자 전문성을 가진 이들이 자신의 결과를 만들어내고 다른 이들과 대등한 협력을 해나갈 수 있다면 업무 지시와 결재는 각각 공유와 협의라는 말로 대체될 수 있습니다.

‘결재’라 불리는 상급자로부터의 업무 승인 절차 역시 일부 조직에서는 자율과 책임이라는 규범을 중심으로 해체하려는 도전적 시도에 나섰습니다.

9.이름을 걸고 하는 것

다시 말해 각자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가 이름을 걸고 하는 것이 우월하기 때문에 조직은 이러한 대등함과 호명의 시스템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다시 찾은 이들은 그 이름을 알리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맹렬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이름을 갖고 조직을 떠나 독립하라는 메시지가 아닌 조직에서도 열심히 한다면 자기 이름을 드높일 수 있다는 선언으로서, 조직의 생명력을 더욱 건강하게 지속시킬 방법이 됩니다

10.’이름’을 주목하자

세상은 이미 조금씩 그렇게 변하고 있습니다. 수장의 이름만 알려졌던 수많은 조직에서 뾰족한 성과를 내는 구성원의 이름을 부르고 인지할 수 있게 된 수많은 사례가 그 변화의 조짐을 설명합니다.

김선태 주무관의 사례와 같이 가장 보수적이라고 여겨졌던 공무원 사회에서마저 나타난 그 조짐은 다른 조직을 자극하여 균열을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혼종이라 여겨졌던 이들이 시간을 돌이켜 보면 선구자였던 경우를 우리는 여러 차례 경험했습니다. 작아지는 조직과 커지는 사람의 역학 관계와 곳곳에서 눈에 띄는 ‘이름’들을 주목해서 살펴봐야 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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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1책]위임의 기술, 나의 업무대응은 건강한가?

‘위임의 기술’(저자 김진영)은 눈에 띄는 제목입니다. 어떤 조직이든지 위임은 정말 중요한 이슈이기 때문입니다. 위임을 적절하게 잘 활용하면 일하는 사람이 주인 의식을 갖고 일할 수 있습니다. 또 자기 주도적으로 일을 하면서 실무를 빠른 시간에 익힐 수 있습니다.

반면 위임하는 리더입장에서 위임은 늘 불안한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혹시 내 의도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일을 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또 나의 눈을 가리지 않을지 우려하기도 합니다.

실제 리더가 일을 수행하다 보면 위임을 통해 성과를 거두기도 하고, 위임 관리를 잘못해 마감을 맞추지 못하거나 윗선 보고에서 혼이 나기도 합니다.

따라서 리더는 위임을 적절히 잘 활용하는 기술이 있다면 정말 배우고 싶어할 것입니다.

위임의 기술에서 발췌독서한 대목은 나의 업무 대응 건강한가 편입니다. 저자가 제시한 10개의 질문에 대해 예스와 노로 답변을 해보고,몇개 정답을 맞췄는지를 체크해보세요.

10개의 질문은 리더가 일할 때 겪는 위임관련 모든 문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셀프 진단을 한 다음에는 문제를 해소하는 것이 결국 위임의 기술입니다.

나의 업무대응 건강한가? 셀프 체크 방법

업무 대응(소통) 수준을 간단하게 진단하는 항목 10개에 대해 ‘YES’와 ‘NO’로 답하세요.

진단 항목

① 업무 결과에 명확한 상(像)이 그려지지 않을 경우 본인 상태를 직원에게 솔직하게 얘기한다.

② 업무 지시는 담당자별로 일을 바로 배분하면서 시작한다.

③ 특정 직원에게 업무가 몰리는 현상이 지속된다.

④ 상사에게 급한 업무 지시를 받았을 때 직원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처리하곤 한다.

⑤ 회의 시 나의 발언은 전체 발언 시간 대비 50%가 넘는다.

⑥ 주요 업무가 종료되면 구성원과 리뷰 시간을 갖는다.

⑦ 직원이 수행할 업무를 상사인 내가 처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⑧ 내가 위임한 업무를 중간중간 확인하는 습관이 있다.

⑨ 교정이나 보완이 필요한 직원을 향한 피드백에 어려움을 느낀다.

⑩ 권한이 위임된 경우 업무를 수행한 직원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정답

① YES ② NO ③ NO ④ NO ⑤ NO

⑥ YES ⑦ NO ⑧ YES ⑨ NO ⑩ NO

권장되는 답을 8개 이상 맞췄다면 업무 소통이 원활하고 효율적인 수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5~7개는 업무 소통이 중간 수준입니다.

4개 이하라면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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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1책]대화의 힘, 대화할 때 뇌에서 벌어지는 일 편

찰스 두히그의 ‘습관의 힘’은 세계 출판 시장에서 습관 테마 붐을 일으켰습니다. 뉴욕타임스 기자 출신 두히그는 저널리스트답게 습관 분야 논문을 폭넓게 인용하면서 스타벅스 하워드 슐츠 회장, 알코아 폴 오닐 회장 등 여러 명을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습관 테마를 폭넓게 다뤘습니다.

특히 미군, 타깃, 스타벅스, 음반사 등 여러 조직이 습관 이론을 인력관리과 마케팅에 어떻게 활용하는가를 비중있게 다뤘습니다.

습관의 힘은 전 세계 자기계발서 독자들에게 습관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만들고 습관에 관한 한 최고의 책으로 손꼽히며 21세기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습관 바꾸기 붐을 일으킨 두히그 이번에는 ‘대화의 힘’을 들고 나왔습니다. 이 책의 원 제목은 ‘슈퍼 커뮤니케이터 Super Communicator’입니다. 두히그는 아주 뛰어난 커뮤니케이터 공통점을 찾아내고 아울러 뇌과학 성과를 바탕으로 대화 스킬 비법을 소개합니다.

사람이 언어를 통해 대화할 때 뇌에서 일어나는 메커니즘을 분석한 장을 골라서 읽었습니다.

1.대화할 때 뇌에서 일어나는 일은?

슈퍼 커뮤니케이터가 어떻게 저 일들을 해내는지 알아보려면 먼저 대화를 할 때 우리 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봐야 한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유형이 다른 대화 중에 정신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연구했고, 그 결과 대화의 성격에 따라 각기 다른 신경망과 뇌의 부위가 활성화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이 하는 대부분의 대화는 크게 다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2.3가지 유형의 대화

실용적인 의사 결정을 위한 대화, 감정을 나누는 대화, 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대화로 정리되는 이 세 가지 유형의 대화는 각각 다음 질문으로 가장 잘 요약할 수 있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어떤 기분인가?

우린 누구인가?

각 대화는 서로 다른 유형의 마인드셋과 정신의 처리 과정에 따라 결정된다. 예를 들어 구체적인 선택의 문제를 논의하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를 대화하고 있을 때와 감정에 관한 얘기, 즉 ‘어떤 기분인가?’의 대화일 때는 뇌의 서로 다른 부위가 활성화된다.

이때 정신이 대화 상대의 뇌와 일치하지 않으면 서로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끼게 된다.

3.의사결정 마인드셋

첫 번째 마인드셋, 즉 의사 결정 마인드셋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의 대화와 직결된다. 이 마인드셋은 선택하거나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또는 계획을 검토할 때처럼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할 때 활발해진다. “이제부터 샘의 성적을 어떻게 올려야 할까?”라고 말할 때는 뇌의 전두엽 통제 네트워크, 즉 사고와 행동의 명령 중추가 활성화된다.

상대방이 한 말을 평가하려면 일련의 결정을, 그것도 무의식적으로 내리는 한편 그 이면의 동기나 욕구까지 파악해야 한다.

“이 대화가 진지한 것인가, 아니면 장난스러운 것인가?” “상대에게 해결책을 제시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듣고만 있어야 할까?” 이렇듯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의 대화는 미래를 생각하고, 선택지를 협상하고, 지적인 생각을 토론하고, 이 대화에서 각자 진짜 이야기하고 싶은 것, 즉 대화의 목표와 그것을 논의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데 필수적이다.

4.감정적 마인드셋

두 번째 마인드셋인 감정적 마인드셋은 ‘어떤 기분인가?’를 나누는 대화에서 나타나며, 뇌에서 측좌핵, 편도체, 해마 같은 신경 구조를 활용한다. 재밌는 얘기를 하거나 배우자와 말다툼할 때, 또는 대화 중에 자부심이 샘솟거나 슬픔이 북받칠 때가 바로 감정적 마인드셋이 작동 중인 때이다. 친구가 직장 상사에 대해 불평할 때 그가 원하는 것은 충고가 아니라 공감이라는 걸 아는 것도 마인드셋이 ‘어떤 기분인가?’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5.사회적 마인드셋

세 번째 대화 마인드셋인 사회적 마인드셋은 사람들 간의 관계를 논의할 때, 즉 자신이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자기가 자신을 어떻게 판단하는지에 관해, 그리고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에 관해 이야기할 때 나타난다. 이것이 ‘우린 누구인가?’의 대화이다.

예를 들어 직장 내 정치를 두고 뒷담화하거나 상대와 함께 아는 지인이 있는지 물어볼 때, 또는 종교나 집안 배경, 그 밖의 정체성이 자기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설명할 때 우리는 뇌의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를 사용한다.

이 네트워크는 신경과학자 매슈 리버먼Matthew Lieberman이 쓴 것처럼 “타인에 관해, 자신에 관해, 자신과 타인의 관계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학술지 「휴먼 네이처Human Nature」에 실린 1997년 논문에서는 대화의 70퍼센트가 사회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밝혔다. 그런 대화 중에는 사회적 마인드셋이 우리가 듣는 방식과 말하는 내용을 지속적으로 형성한다.

6.3가지 마인드셋의 얽힘

이 세 유형의 대화와 각각에 대응하는 마인드셋이 서로 깊이 얽혀 있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종종 한 대화에서 세 가지 유형을 모두 사용하곤 한다. 대화가 진행되면서 마인드셋이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예를 들어 친구가 직장 문제로 조언을 구하면서 시작된 대화가(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그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내용(어떤 기분인가?)으로 이어지고, 마지막엔 다른 사람들이 이 문제를 알게 되었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를 얘기하며(우린 누구인가?) 끝이 난다.

소통상의 오해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유형의 대화에 참여할 때 발생한다. 상대가 감정을 말하는데 나는 현실을 말하면 두 사람은 본질적으로 다른 인지 언어를 사용하는 셈이다.

예를 들어 퇴근하고 집에 가서 배우자에게 상사를 욕했는데(“부장님 때문에 돌아버리겠어!”) 상대가 실질적인 방책을 들이민다면(“점심을 한번 대접하면 어때?”) 상대와의 연결이 아닌 충돌이 일어나기 쉬운 게 그래서이다(“지금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게 아니잖아! 그냥 내 심정을 좀 알아달라고”).

7.동기화 능력

슈퍼 커뮤니케이터는 서로 소통하는 방식이 일치하게 격려함으로써 동기화를 유도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일례로 심리학자들이 기혼 부부를 조사했더니 가장 행복한 부부는 서로의 대화 방식을 맞춰가고 있었다.

저명한 심리학 교수 존 가트먼John Gottman은 「저널 오브 커뮤니케이션Journal of Communication」에 “결혼 생활에서 배우자와 친밀감을 유지하는 기본 메커니즘은 대칭이다”라고 썼다.

8.행복한 부부의 대화법

행복한 부부는 “화자의 관점이나 말의 내용이 아니라 화자의 정서 상태에 맞추어 소통한다”. 그들은 서로 질문을 많이 하고30 상대가 말한 것을 반복하고 긴장을 푸는 농담을 하고 함께 진지해진다.

지금부터 배우자와의 대화가 다툼으로 번지는 순간이 오면 이렇게 슬쩍 물어보자. “지금 당신은 기분을 말하고 싶어? 아니면 우리가 함께 결정을 내려야 하는 거야? 아니면 혹시 내가 모르는 다른 문제가 있어?”

9.매칭 원리

소통이 연결과 일치에서 온다는 가장 기본적인 이 사실은 ‘매칭 원리Matching principle’로 정리되었다. 효과적인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상대와의 이야기가 어떤 종류의 대화인지 인지한 다음 서로 맞춰야 한다는 내용이다. 만약 상대가 아주 기본적인 수준에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면 함께 감정을 표현한다.

상대가 결정을 내리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면 그 내용에 함께 초점을 맞춰라. 상대가 사회적 파장에 신경 쓰고 있다면 거기에 같이 몰두하라.

10.상대방에 맞춘다는 것

상대와 맞춘다는 것이 단순한 모방이 아님을 유의해야 한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우리는 상대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원하며, 그들이 누구인지 온전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 다음에는 어떤 식으로 자신을 공유해야 상대와 맞출 수 있을지를 알아야 한다. 서로 일치하고 연결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의미 있는 대화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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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1책]크리에이터 소사이어티, 윌리엄 모리스 편

모종린 교수는 한국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일찌감치 미국 유학길에 올라 코넬대학과 스탠퍼드를 졸업한 국제파 학자입니다. 그의 주 무대 역시 영어로 강의하는 연세대 국제대학원입니다.

그런데 모교수는 어느날 백팩을 메고 한국의 골목길 탐험을 시작합니다. 이 탐험을 계기로 ‘골목길 자본론’을 발간하면서 자신을 ‘골목길 경제학자’로 변신시킵니다.

산업혁명이후 도시화란 낡은 동네를 싹 허물고, 그 자리에 고층 빌딩과 규격화된 주거시설, 쇼핑시설을 세우는 것을 뜻합니다. 꼬불꼬불한 골목길과 쓰러질 듯 낡은 낮은 건물은 혁신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먹고 살만해진 사람들은 사라진 옛 동네를 그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테면 광화문과 종로사이 길고 좁은 골목 양쪽에 늘어서 있던 피마골이 종로 재개발로 인해 사라지자, 생선구이 냄새 가득했던 골목길 풍경을 그리워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렸습니다.

모교수는 서울 시내에 남아 있는 골목길부터 시작해 전국 방방곡곡 골목을 찾아 다니며, 골목길에 숨어 있는 재미와 혁신성을 찾아냅니다. 그는 한 발 나아가 골목이 단순한 레트로 상품이 아니라, 로컬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혁신 플랫폼이라고 주장합니다.

모교수는 새 책 ‘크리에이터 소사이어티’에서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크리에이터가 만들어내는 삶의 풍요로움과 역동성을 소개합니다. 블로그에서 출발해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다양한 디지털 플랫폼을 무대로 삼아 화수분처럼 등장하는 크리에이터가 기존 경제를 어떻게 바꾸는가를 분석합니다.

그는 대기업과 같은 조직에서 독립하여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콘텐츠화하여 먹고사는 크리에이터의 사상적 뿌리를 영국 19세기 사상가인 윌리엄 모리스에서 찾습니다.

모리스는 영국의 산업화 흐름을 비판하면서 손과 노동을 통해 인간성을 찾자는 미술공예(Art and Craft)운동을 창시하였습니다.(서울에도 영국의 모리스와 미술공예운동과 연결된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이 스토리를 다른 글을 통해 소개하겠습니다.)

모교수의 새 책에서 윌리엄 모리스편을 골라서 읽고 10줄로 요약하였습니다.

윌리엄 모리스와 크리에이터주의의 기원 편

1.크리에이터 경제의 본질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고 흔히 말한다. 크리에이터 경제도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크리에이터 경제의 지향점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크리에이터 경제의 본질은 아름다움을 만드는 일이다.

크리에이터에게 “왜 이 직업을 선택했나요?”라고 물으면 다양한 대답이 나온다.

키워드가 많지만 이를 몇 단어로 정리하면 ‘아름다움, 의미, 재미의 창조와 융합’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줄여야 한다면 ‘개인의 창조와 느슨한 연대’, 또는 ‘아름다움을 만드는 일’로 압축할 수 있다.

2.19세기 미술공예(Art and Craft) 운동

윌리엄 모리스는 존 러스킨과 함께 19세기 미술공예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문학, 평론, 공예, 디자인,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르네상스맨이지만, 한국에서는 현대 디자인의 아버지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19세기 자본주의와 기계문명에 비판적이었던 모리스는 예술을 “인간이 노동하며 느끼는 즐거움의 표현”이라고 정의하며 예술적 노동으로 인간성과 아름다운 삶이 복원되기를 원했다.

예술적 노동을 실천하기 위해 그가 설립한 디자인 기업과 출판사가 현대 디자인 산업, 더 나아가 크리에이터 경제의 시작이다.

모리스가 부활시키기 위해 노력한 중세 수공예의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노동은 1970년대 이후 물질적 풍요가 가져온 탈물질주의와 기술의 발전으로 다시금 현실 세계에서 가능해졌다.

3.현대 크리에이터는 윌리엄 모리스의 후예

현대의 크리에이터는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창조적인 일을 하고 느슨한 연대를 통해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중세 수공예와 다른 점은 다양하고 개성 있는 콘텐츠를 찾는 소비자가 늘어났고 크리에이터와 소비자, 크리에이터와 크리에이터를 연결하는 플랫폼 기술이 발전해 많은 사람이 크리에이터 경제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여러모로 현대 크리에이터는 윌리엄 모리스의 후예다.

4.바우하우스의 철학

윌리엄 모리스에서 시작된 현대 크리에이터주의는 20세기 초 독일 건축 학교 바우하우스의 모던 디자인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학교에서 배운 학생들은 미니멀리즘과 기능주의 및 현대 디자인의 원칙을 적용해 건축·제품 디자인 분야에서 혁신적 작품을 창작했다.

바우하우스의 철학은 예술과 공예, 기술과 예술을 결합해 실용적이고 아름다운 디자인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 전통은 현대건축을 넘어 산업디자인에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애플의 디자인 철학을 주도한 조너선 아이브는 산업디자이너 디터 람스와 그가 이끌었던 브라운BRAUN 가전회사, 그리고 바우하우스 운동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여러 차례 고백했다.

람스의 ‘최소한의 디자인’ 철학, 브라운 제품의 기능적 명료성, 바우하우스의 기능과 예술의 조화가 아이브의 애플 제품과 애플 환경 디자인에 근본적 영감을 제공한 것이다. 기능적 우수성과 미적 아름다움의 조화를 추구한 아이브의 작업은 기술과 예술을 효과적으로 통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5.현대 크리에이터주의 흐름

현대 크리에이터주의는 1960~1970년대 반문화 운동과 DIY 문화, 1980~1990년대 메이커 운동의 확산 등을 거치며 개인 창작자의 역량을 강화했다. 20세기 초 주택 개조 트렌드로 시작한 DIY 문화는 반문화 운동과 결합해 지속 가능한 건축, 메이커 활동, 라이프스타일의 상징으로 부상했다.

1968년 자연 공동체에 거주하는 히피들을 위한 생활 지침서로 출간한 잡지 〈전 지구 카탈로그The Whole Earth Catalog〉가 DIY 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6.제인 제이콥스 영향

크리에이터 친화적 도시에 대한 논의의 출발점에는 제인 제이콥스가 있다. 제이콥스는 20세기 중반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이라는 저서를 통해 당시 대두되던 모더니즘 도시계획을 비판하고 인간 중심의 도시를 옹호했다. 그는 가로수길의 활력, 복합 용도의 중요성, 오래된 건물의 가치 등 도시 다양성의 의의를 역설했다.

6.1 뉴 어바니즘 운동

창의적 개인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교류와 영감의 기회가 풍부한 도시 환경이 필수적임을 시사한 것이다. 제이콥스의 논의는 이후 뉴 어바니즘 운동으로 이어졌다. 뉴 어버니즘은 전통적 근린생활권의 부활, 보행친화적 설계, 공공 공간 활성화 등을 목표로 했다. 이는 휴먼 스케일을 척도로 하는 도시 공간이 창의적 삶과 커뮤니티 형성에 유리한 토양이 된다는 인식에서 비롯됐다.

6.2 대도시의 힙스터 문화와 결합

1990년대의 뉴 어바니즘, 도시재생, 대안 문화는 2000년대 중반 대도시의 힙스터 문화와 결합해 현대 도시의 창업 문화 그리고 오프라인 크리에이터 문화의 모태가 됐다. 서울도 마찬가지지만 뉴욕, 도쿄, 런던 등 세계적 대도시에는 공간 창업에 도전하는 많은 힙스터들이 모여든다.

특정 장소가 갑자기 인기를 끄는 ‘핫 플레이스 현상’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미국 도시에서 시작된 원·구도심 회귀 현상이 도시 문화에 대한 수요를 키운 것이다. 6.3 오프라인 크리에이터의 장벽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오프라인 크리에이터는 건축 디자인·커뮤니티·문화 콘텐츠 기술을 바탕으로 개인 수요와 기호에 맞는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고 큐레이팅한다.

오프라인에서 크리에이터가 부딪치는 장벽은 부동산 가격과 임대료다. 도심 지역의 인기가 오르자 오프라인 크리에이터가 접근할 수 있는 도심 공간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7.온라인 크리에이터주의

1990년대 인터넷 기술의 발달로 크리에이터주의는 온라인에서 꽃피기 시작했다. 케빈 켈리가 제시한 ‘1,000명의 진정한 팬’ 이론은 개별 창작자가 소수의 열성 팬을 기반으로도 생계를 꾸릴 수 있음을 시사했다.

이는 크리스 앤더슨이 설파한 롱테일 시장(매출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상위 20% 제품을 제외한, 매출 순위에서 긴 꼬리에 해당하는 하위 80%의 시장)의 지형과 맞물려 크리에이터 경제의 비전을 제시했다.

2000년대 초반 소셜 미디어의 등장은 크리에이터의 부상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일반인도 콘텐츠를 손쉽게 제작·유통할 수 있게 되면서 1인 창작 시대가 열린 것이다. 특히 2005년 유튜브의 등장은 크리에이터 문화에 혁명을 일으켰다.

8.벤처 투자자 리 진 Li Jin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이 벤처 투자자 리 진이다. 그는 기존의 고용 중심 경제에서 개인의 재능과 창의성에 기반한 크리에이터 경제로의 전환을 예견했다.

리 진에 따르면, 크리에이터 경제에서는 개인이 자신만의 브랜드를 구축하고, 팬들과 직접 소통하며, 다양한 플랫폼을 오가면서 부가가치를 창출하게 된다.

이는 기업에 고용되어 일하는 전통적 노동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리 진의 통찰은 크리에이터 중심 경제의 미래상을 제시하며 크리에이터주의 담론을 한층 풍성하게 만들었다.

탈산업화의 물결은 창의성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문화적, 기술적, 방법론적 기반을 형성함으로써 크리에이터주의 발전의 토양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크리에이터주의는 탈산업 시대의 정신을 반영하며, 동시에 그 시대를 이끄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9.소수의 슈퍼스타 편중 현상

콘텐츠 크리에이터의 수와 콘텐츠의 양이 급증함에 따라 관객들이 소수의 슈퍼스타에게만 관심을 보인다는 비판도 있다. 플랫폼 기술이 여전히 일부 인기 크리에이터가 지배하는 불평등한 문화산업 구조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개인 크리에이터를 중심으로 한 플랫폼 경제 혁신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9.1 정부기업이 필요할 수도

콘텐츠 산업 내부에서도 플랫폼 간 경쟁이 격화함에 따라 크리에이터에게 더 많은 수익을 배분하는 플랫폼이 나오기 시작했다. 구독자가 지불하는 가입비의 90%를 크리에이터에게 지불하는 뉴스레터 플랫폼 서브스택을 필두로 게이머 플랫폼 트위치, 문화 콘텐츠 플랫폼 패트리온도 크리에이터 수익 배분율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시장에서의 경쟁을 통해 수익 구조를 크리에이터에게 더 유리하게 바꿀 수 있을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시장 원리를 넘어선 기술 개발과 정부 개입이 필요할지 모른다.

9.2 크리에이터 경제의 민주화

리 진은 탈중앙화와 비영리 플랫폼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블록체인 기술과 플랫폼 크리에이터 콘텐츠의 다양성을 증진시키는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리 진의 주장은 크리에이터 경제의 민주화와 ‘중산층middle class’ 크리에이터 육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는 크리에이터 경제를 보다 포괄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플랫폼 기업이 취해야 할 10가지 구체적인 전략을 제시한다.

9.3 중산층 크리에이터의 육성

오프라인과 온라인 통합을 통한 중산층 크리에이터의 육성을 시도해볼 수 있다. 크리에이터주의의 역사를 보면, 새로운 크리에이터 경제의 시대정신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통합임을 알 수 있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오프라인의 창의 산업과 온라인 플랫폼의 연계를 가속화했다.

예컨대 공예품이나 예술작품을 온라인에서 홍보하고 판매하는 일이 일상화됐다. 현재 크리에이터 문화는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경계가 무너지는 통합 국면을 맞고 있다. 메타버스와 같이 가상과 현실을 잇는 플랫폼이 크리에이터들의 활동 무대로 주목받고 있다.

10.온라인·오프라인·도시 플랫폼을 유기적으로 통합

크리에이터 경제의 온·오프라인 통합 추세는 3대 축 전략으로 요약될 수 있다. 온라인·오프라인·도시 플랫폼을 유기적으로 통합해 콘텐츠의 다양성과 크리에이터의 독립성을 극대화하는 전략이다.

현대 크리에이터 경제를 이끌어온 일련의 지적 전통과 역사적 맥락은 현대 크리에이터주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각을 제공한다.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발달한 온라인과 오프라인 크리에이터주의는 크리에이터 경제의 지적 기반을 마련했고, 기술 사회를 인간 중심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향후 크리에이터주의는 디지털 유토피아주의까지 계속 확장될 것이다. 디지털과 물리적 공간의 통합이 이러한 확장의 새로운 프런티어이며, 이를 위해 온라인·오프라인·도시 플랫폼의 3대 축 통합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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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1책]슬로우워크, 유사생산성의 흥망 편

칼 뉴포트는 MIT에서 컴퓨터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조지타운대학교 컴퓨터공학과 교수입니다. 자신의 전공분야 연구를 하면서 《뉴욕타임스》, 《뉴요커》, 《와이어드》 등에 글을 기고하는 저널리스트이기도 합니다.

뉴포트는 딥 워크, 디지털 미니멀리즘, 하이브 마인드 등 여러권을 썼는데 그의 주된 관심사는 생산성입니다. 하이브 마인드에서는 이메일이 직장안에서 남발되면서 본래의 일에 집중못하고 이메일 송수신에 매달리는 직장 문화를 날카롭게 밝혔습니다. 딥 워크는 어떻게 해야 몰입하여 생산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인가를 다뤘습니다.

뉴포트는 팬데믹을 통해 재택근무과 보편화되는 가운데 직장인들이 이른바 소진(번 아웃) 현상에 시달리는 것을 관찰하면서 ‘슬로우 워크’라는 개념을 고안했습니다.

뉴포트의 슬로우 워크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일을 줄이자

둘째, 일을 자연스러운 리듬에 따라 천천히 하자

셋째, 일의 퀄리티를 높이자

뉴포트의 새 책(슬로우 워크)에서 ‘유사 생산성의 흥망’편을 골라서 10줄로 요약했습니다. 유사생산성이란 지식 노동자의 생산성을 측정할 때 농공업과 달리 수치화가 어렵기에 일하는 티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일의 실체와 상관없이 이메일이나 슬랙을 주고 받거나, 미팅이라 회의를 갖고 문서를 만드는 행위가 생산성의 척도가 됩니다. 따라서 지식 노동자는 일하는 티를 많이 내서 생산성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뉴포트의 분석을 접하고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이 속한 회사를 한번 둘러보세요. 일하는 티 내느라 근무 시간만 때우고 있지 않은지.

1.더 많은 시간을 일해라

CBS 방송국, 금요일 오후 3시 30분인데도 사무실 자리 중 4분의 3이 비어 있었다. 불만에 가득 찬 문베스사장은 이른 퇴근을 책망하는 과격한 메모를 직원들에게 보냈다.

메모는 ‘우리 방송사 시청률은 3위입니다. 금요일 3시 30분이면 ABC와 NBC 직원들은 아직 일하고 있을 시간입니다. 향후 이런 근무 태만은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이 일화는 20세기 지식산업 부문이 생산성을 고려하게 된 여러 방식을 보여주는 식상한 일례다. ‘일’이란 뭐가 됐든 직원이 사무실에서 하는 것이다. 일은 적게 할 때보다 많이 할 때 더 좋은 결과를 낳는다. 관리자의 업무는 직원이 ‘충분히’ 일하도록 감독하는 것이다.

가장 성공한 기업에는 가장 열심히 일하는 직원이 있다.

2.지식노동자의 생산성이란?

700여 명의 지식 노동자에게 “귀하가 속한 특정 전문 분야에서는 ‘생산성’ 및 ‘생산적’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합니까?”라고 질문했다.

이 질문에 업무 ‘유형’을 그냥 열거한 답변이 가장 많았다. 달성해야 할 구체적인 목표나 일을 잘했는지 못했는지 판가름할 수 있는 성과 척도를 제시한 답변은 아예 없었다.

모두가 생산성 용어에 온갖 불만을 품어왔건만, 지식 노동자들은 ‘생산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정의조차 합의해서 내놓은 적이 없었다.

2.1 피터 드러커

1999년 피터 드러커는 지식 노동자 생산성이라는 논문에서 “지식 노동자의 생산성을 다루는 연구는 이제 막 시작됐다”라고 공표했다. 하지만 드러커 조차 생산적인 일을 뒷받침할 ‘법한’ 요인들을 지적하고 있을 뿐, 측정할 구체적 특성이나 개선해야 할 과정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2.2 토머스 대븐포트

‘핵심 인재 경영법’저자 토머스 대븐포트는 이렇게 말했다.

“지식 노동자의 생산성은 좀처럼 측정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측정하는 경우에도 학자의 연구 성과를 논문의 질이 아니라 편수로 측정하는 등 정말 어처구니없는 방식으로 하죠. 지금도 여전히 꽤 초기 단계입니다”라고 설명했다. 대븐포트가 집필하거나 편집한 책은 총 25권중에서 ‘핵심인재 경영법’이 가장 적게 팔렸다.

2.3 표준 정의 부재

지식 노동만큼 규모가 큰 경제 부문에 생산성을 규정하는 유용한 표준 정의가 없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 밖에 거의 모든 경제 분야에서 생산성은 명확하게 정의된 개념일 뿐만 아니라 업무를 진행하는 방식의 중심이 되곤 한다.

3.생산성의 뿌리, 농업과 공업

농업에서 생산성의 의미는 단순하다. 토지 구획당 생산성은 토지에서 생산되는 식량의 양으로 측정할 수 있다. 이런 투입량 대비 산출량 비율은 농부가 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 수단을 탐색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일종의 나침반 역할을 한다.

3.1 공업 생산성

공장 소유주는 시급당 자동차 생산량에 관심을 기울인다. 공장 소유주는 생산공정을 연속 흐름 조립라인으로 바꿔서 지표를 개선할 수 있다. 이러한 예에서 생산되는 산출물의 유형은 다양하지만 방법을 바꾸도록 촉진하는 힘은 한결같이 ‘생산성’이다.

3.2 부상과 탈진 상쇄

이처럼 측정 가능한 개선을 중시하다 보면 당연히 인적 비용이 발생한다. 조립라인에서 실행하는 작업은 반복적이고 지루하며, 모든 동작에서 효율성을 강요하면 부상과 탈진을 부르는 상황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부문에서 놀라운 경제성장을 일으킨 생산성의 위력은 이런 염려들을 대부분 덮어버렸다

4.지식노동의 생산성, 양인가 질인가?

지식 노동자들은 복잡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업무량과 씨름해야 할 때가 많다. 회사 웹사이트에 올릴 추천글을 모으고 오피스 파티를 준비하는 동시에 고객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인사 담당자가 이메일로 보낸 이해상충 성명서도 수정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산출량을 콕 집어 추적해야 할지 명확하지 않다. 예를 들어 작년에 내가 당신보다 학술 논문을 더 많이 발표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어쩌면 당신이 시간을 많이 잡아먹지만 중요한 업무인 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정말로 내가 생산성이 더 높은 직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

5.지식 노동자, 감독 지휘하기 어렵다

지식산업 부문에서 업무 조직화 및 실행에 따르는 결정은 대체로 직원 개개인이 스스로 내려야 한다. 직원이 사용하는 소프트웨어를 기업이 통일하는 경우는 있지만 작업을 할당, 관리, 조직, 협력, 최종 실행하는 시스템은 대개 개인이 각자 알아서 짜기 마련이다.

피터 드러커는 1967년에 발표한 명저 ‘자기경영노트’에서 “지식 노동자는 가까이에서 낱낱이 감독할 수 없다. 그저 도울 수 있을 뿐이다. 나아갈 방향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6.지식노동에 도입된 유사생산성

유사생산성(pseudo-productivity)는 실제 생산 노력을 어림잡아 측정하는 주요 수단으로 눈에 보이는 활동을 이용하는 방식을 뜻한다.

‘생산성’을 정의하라는 물음에 독자들이 그토록 혼란스러워했던 까닭은 이 철학의 모호함에 있다.

이는 손쉽게 설명할 수 있는 정식 시스템이 아니다. 오히려 일종의 분위기, 즉 바쁘게 돌아가는 움직임으로 유지되는 의미 있는 활동이라는 포괄적인 기류에 가깝다.

7.컴퓨터와 네트워크, 유사생산성에 혼란 초래

1990년대 사무실에 네트워크 컴퓨터가 도입되면서 유사생산성의 지속가능성이 나락에 떨어졌다. 활동이 생산성을 가늠하는 대용물인 환경에서 최소한의 노력으로 바쁘다는 신호를 눈에 띄게 보낼 수 있는 이메일이나 슬랙 같은 도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평균적인 지식 노동자는 끊임없이 전자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최대한 빠르고 정신없이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데 점점 더 많은 일과 시간을 쓰게 됐다.

7.1 모바일 환경

노트북과 스마트폰이라는 형태로 휴대용 컴퓨터와 통신수단이 등장하면서 이런 경향은 한층 더 악화일로를 걸었다. 근면함을 증명하라는 요구가 근무시간을 넘어서서 퇴근 후 저녁시간이나 아이가 축구 시합을 하는 주말에까지 미치게 됐다.

7.2 소진 증후군 유발

컴퓨터와 네트워크는 여러모로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하지만 유사생산성과 결합해 과부하와 주의 산만에 시달리는 감각을 지나치게 자극한 결과, 우리를 괴로운 소진 증후군 위기와 정면충돌하는 경로로 내몰았다.

7.3 일하는 티 내기

마이라라는 가상 비서는 자신이 여러 지식 노동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알게 된 사실을 요약해 독자적인 관점을 제시했다. 마이라는 “고객들은 무척 바쁘지만 하고 싶거나 해야 할 일을 감당하기가 너무 벅차서 우선순위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아요. 그래서 무턱대고 일을 많이 하려고 애쓰면서 그런 식으로 발전해나가기를 바라곤 합니다”라고 말했다.

8.소진 증후군 현상 일반화

맥킨지 앤드 컴퍼니와 비영리단체 린인이 공동으로 지식산업 부문에 종사하는 북미 지역 종업원 6만 5,0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자주’ 혹은 ‘거의 항상’ 소진 증후군을 경험한다고 응답한 사람의 수가 크게 증가했다.

갤럽 여론조사에서는 미국 노동자들이 전 세계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집단에 속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스티브라는 전략 기획자는 “소진 증후군이 정말로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관심을 기울이고 싶은 일이 있어도 그 밖에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은 까닭에 그 일을 제대로 하면서 열정과 온전한 주의, 창의력을 쏟을 여력이 없어지거든요”라고 말했다.

9.유사생산성 재평가 필요

이처럼 음울한 현실에 완전히 굴복하기에 앞서 유사생산성이 과연 불가피한 개념인지 재평가해볼 필요가 있다. CBS 일화는 고군분투하던 방송국이 전세를 역전시켜 결국 시청률 꼴찌에서 1위로 올라서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는 희망찬 결말로 끝났다.

하지만 이런 전세 역전이 일어난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레슬리 문베스가 직원들에게 요구한 노동시간 연장은 시청률 상승과는 거의 무관했을 가능성이 높다.

10.CBS의 실적이 호전된 경위

앤서니 자이커가 기획한 ‘CSI’프로그램이 2000년 가을에 첫 방송이 나가자마자 히트를 치면서 시청률이 급증했다. 문베스가 직원들에게 더 많이 일하라고 압박함으로써 방송국을 살리고자 했다. 하지만 결국 방송국을 되살린 것은 앤서니 자이커라는 ‘CSI’시리즈 기획자가 3년 넘게 기울인 집요한 노력덕분이었다.

첨단 기술을 도입해 요구를 멈추지 않는 유사생산성과 비교하면 ‘느리다’고 할 법한 속도에서 나오는 그 마법은 장기간에 걸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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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원 노소영]최종현의 혜안?,노태우의 도움?

최종현의 순수한 혜안인가, 노태우 정부와의 교감인가?

최종현이 제2이동통신사업 진출을 계획하고 준비한 시점은 공교롭게도 아들 최태원이 노소영과 사귀기 시작해 결혼에 이르는 시점과 중첩된다.

1960년생 최태원은 신일고-고려대를 졸업하고 1983년 미국 시카고대 경제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1989년까지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1961년생 노소영 역시 윌리엄앤메리대를 거쳐 1985년 시카고대 경제학과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두 사람은 1985년 가을무렵 시카고대학 한국유학생 모임에서 만나 서로 사귀기 시작하였고, 1988년 9월 13일 청와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노소영의 아버지 노태우대통령은 1987년 12월 대선에서 당선, 1988년 2월부터 1992년 2월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SK측 설명에 따르면 최종현은 선견지명을 갖고 1985년부터 선경아메리카를 통해 미래 사업을 구상하고 인재를 모았다. 그러다가 목정래라는 한국계 컨설턴트를 만나 미국내 통신사업 흐름에 대해 조언을 듣고 1989년 이동통신사업 진출을 위해 통신사업체 지분투자, 통신사업체 선경직원 파견하여 현장경험 이수 등 사전 작업을 치밀하게 준비하였다.

그러면서 이동통신사업 진출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마침 1990년 노태우정부가 통신사업을 경쟁체제로 바꾸려는 정책을 발표하자, 미리 준비하고 있던 팀을 제2이동통신 진출용 업체로 전환하였다.

이런 치밀한 준비의 힘으로 1991년 정부의 2이동통신 선정에 응모하여 압도적인 점수차로 업체로 선정되었다.

이 프레임에 따르면 SK의 통신사업 진출은 최종현의 뛰어난 리더십과 목정래의 실무적 능력이 만들어낸 것이다. 아들 최태원과 조카 표문수는 실무자로 참여하였다.

사돈 노태우 대통령가 이끄는 정부의 도움을 전혀 받을 필요가 없고, 오히려 사돈기업이라는 평판으로 인해 손해를 봤다는 것이다.

반면 최태원과 노소영의 만남에서 결혼이 중첩되는 시기는 통신산업 구조 조정 정책 키를 쥐고 있는 노태우 대통령 집권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최종현-목정래의 뛰어난 혜안과 치밀한 준비만으로 통신산업 진출을 설명하는 것은 무리다.

첫째, 목정래는 경영정보시스템을 전공하였고 회계사출신으로 최종현에게 첨단 경영정보시스템 구축하는 일을 도왔다. 자신의 전공분야가 아닌 이동통신사업 컨설팅을 수행했다는 것은 전공분야를 엄격히 따지는 미국 컨설팅업계 관행에 맞지 않다.

둘째, 목정래는 적어도 1988년까지 이동통신 사업 기획을 구체적으로 수행하지 않았다. 이동통신사업 기획을 하기 시작한 시점은 1989년 중반부터다. 이 시점은 노태우정부가 출범하고 이어 최태원-노소영 결혼(1988년 9월)이후 시점이다.

이런 점은 노태우 정부의 통신산업 전체 그림에 대한 정보를 직간접적으로 획득한 후에 이동통신사업 진출을 구체적으로 준비했을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이다.

셋째, SK의 이동통신사업 진출 준비는 1989년 중반부터 그해 말까지 짧은 기간동안 숨가쁘게 진행되었다. 미국의 중소형 통신관련 업체에 투자하는 등 이동통신 관련 정보를 캐거나 실적을 쌓기 위한 프로젝트를 1990년까지 집중적으로 수행했다.

넷째, 이혼소송 2심 판결문에 따르면 1990년~1991년 사이 최종현은 청와대에서 이동통신 기술 시범회를 개최하였다. 미국에서 이동통신 사업 정보획득과 크레딧을 쌓고 나서 국내 최고 의사결정권자를 대상으로 기술 시범 행사를 개최한 셈이다.

이 시점은 최태원이 노소영과 결혼하고 나서 이동통신사업 기획팀에서 핵심 역할을 하고 있던 시점이다.

즉, 최태원은 1988년 9월 결혼하고 1989년 가을 시카고대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미주 경영기획실에 입사해 목정래 밑에서 이동통신사업 기획에 핵심역할을 수행하였다.

최종현-목정래의 움직임과 최태원-노소영의 동선이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정확하게 이동통신사업을 향해 같은 길을 향해 걷고 있었다.

최태원과 노소영은 부부로서 한 침대에서 자면서 목정래밑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대화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노소영 역시 최태원이 무슨 일을 하고 있고,무엇에 꽂혀 있는지를 부모와 공유하지 않았다는 것도 상식에 어긋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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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원 노소영]SK텔레콤 탄생과 목정래

최종현은 1980년대 초 유공을 인수하면서 중견그룹에서 10대 재벌 그룹으로 부상하였다. 최종현 회장은 당시 정주영,이병철 등 1세대 재벌 총수에 비해 나이가 어리고 또 미국 유학파로 새로운 메가트렌드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장학재단을 만들어 미국 유학생을 적극 지원한 것도 최종현의 그런 면모를 잘 보여준다. 민등산 조림 사업도 수십년을 내다보려는 그의 성향을 반영한 프로젝트였다.

최종현은 늘 미국 등 해외 흐름을 주시하면서 선경의 ‘미래 구상’에 몰두했다. 평소 해외 미디어를 늘 가까이 하고 또 그룹 간부나 대학 교수들을 모아놓고 토론하며 자문을 구하는 것을 즐겼다.

최종현은 국내 두뇌의 자문에 만족하지 않고 미국 컨설팅회사와 계약을 맺고 해외 두뇌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았다. 그때 그가 선택한 회사가 미국 굴지의 회계법인이자 경영 컨설팅회사인 ‘딜로이트 & 투치’였다.

그는 1984년에 미국에 설립한 ‘미국 경영기획실(SK USA)’를 딜로이트에 고객으로 등록했다. 딜로이트에서 선경 프로젝트 담당으로 배정한 컨설턴트가 목정래였다. 운동권 출신인 목정래는 1971년 제적을 당하고 군복무를 마치고 1977년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대학에서 금융학과 경영정보시스템(MIS)을 공부했다.

목정래는 졸업후 딜로이트에 입사해 컨설팅 업무를 하면서 미국 공인회계사 자격을 따기도 했다. 그는 선경이 어떤 그룹인지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한국인이라는 인연으로 선경 아메리카 컨설팅 업무를 맡아 최종현과 인연을 맺었다.

목정래는 경영정보시스템 전공자로서 당시 미국 기업에서 유행을 했던 시스템통합 흐름에 밝았다. 그룹내 전산시스템을 통합해 인사, 재무, 재고 등을 통합 관리하는 경영정보시스템을 구축하려는 흐름이었다.

최종현회장이 목정래에게 요청한 프로젝트는 선경그룹 경영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목정래는 1985년 선경 아메리카에 MIS를 설치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최종현과 목정래가 가장 집중한 프로젝트는 경영정보시스템 구축이 명확하다. 이후 이동통신사업 진출을 기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은 성공한 프로젝트에 대한 사후 해석격 설명이 대부분이다.

끊임없이 미래 먹거리를 찾는 최종현에게 목정래가 첫번째 글로벌 인재를 선경아메리카에 확보할 것을 제안하고 실행했다는 것이다.

목정래의 증언에 따르면 ‘선경’이라는 이름으로 월스트리트저널에 구인 광고를 내자 응모자가 없었다. 편법으로 딜로이트의 이름으로 모집 광고를 내면서 ‘딜로이트’라는 이름 밑에 작은 글씨로 ‘for Sunkyung’이라는 문구를 삽입했다.

목정래는 그때 이미 선경 아메리카의 MIS 설치 작업을 마치고 딜로이트로 원대복귀 해 있었다. 그러자 지원자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는 딜로이트 사무실에서 지원자들을 인터뷰하고, 그 결과를 서울에 있는 최종현에게 알렸다.

마케팅과 회계, 인사 분야의 사원 10여 명을 뽑았다. 모두 미국인이었다. 그들 밑에 조수로 재미 한국인을 한 명씩 더 뽑았다. 그들 인력을 거느리고 신규사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현재 선경그룹이 한국에서 하고 있는 사업을 어느 정도 확장할 수 있는지, 조사하는 작업부터 했다. 동시에 선경에 맞는 신규사업을 발굴하는 프로젝트를 딜로이트에 맡겼다.

두번째 단계는 최종현회장은 미국 금융산업을 조사하면서 금융산업 진출을 원했으나 목정래가 미국 통신산업 흐름을 설명하면서 이동통신사업 진출을 조언했다는 설명이다.

이어 최종현은 1988년 이동통신사업 진출을 결심하고 실무적 준비를 목정래를 시켜 미국에서 미리 준비하도록 했다는 것이다.(선경 아메리카에 텔레커뮤니케이션 팀을 발족시켰다)

목정래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이동통신사업의 장점은 설비투자가 유선통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겁니다. 게다가 교환기 대신 컴퓨터로 처리할 수도 있어 확장이 용이합니다. 또 이동통신을 하게 되면 유공처럼 울산의 석유화학단지에 정유탑을 많이 세울 필요도 없습니다.

또 재고가 없어도 되고 외상매출금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화를 쓰던 사람이 요금을 안 내면 갑갑해서라도 한 달 후엔 돈을 내게 됩니다. 그러니까 투자 대비 자금회수율이 높고, 외상매출금 걱정을 안 해도 되고, 재고로 썩힐 필요 없으니 얼마나 좋은 사업입니까.”

에스케이측이 최종현의 이동통신사업 사전 준비 증거로 제시한 사례는 다음과 같다.

첫째, 1988년 테네시 RSA에 지분투자했다.

둘째, 1989년 10월 뉴저지에 유크로닉스를 설립하였다.

셋째, 1989년 시카고 US셀룰러사에 100만달러를 투자하였다.

목정래는 US셀룰러사 투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시 선경에는 이동통신 전문가가 한 명도 없었다. 다만 앞날에 대비해 유공 전산팀을 분사해 정보통신회사를 만들긴 했지만, 그것은 SI(시스템 통합)전문 팀일 뿐 이동통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도 수준이 매우 낮은, 초보적인 SI팀이었다. 따라서 선경이 이동통신사업을 해야 한다면 그 분야의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때 마침 시카고에 ‘US셀룰러’라는 이동통신회사가 생겼다. 주사업자는 베이비 벨인 아메리테크였고, US셀룰러는 B밴드를 사용하는 지역사업자였다. 후발 사업자였기에 벨 회사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수익성은 높았다. 마침 그 회사가 투자자를 모으고 있었다.”

목정래의 US셀룰러사 투자 조건은 선경 직원들을 훈련시켜 달라는 것이었다.월급을 받지 않는 대신 6개월 내지 1년 동안 작업 현장에서 실무를 익힐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목정래에 따르면 마케팅 분야에 5명, RF 분야에 3명 등 10명을 US셀룰러사에 보냈고, 점차 50여 명까지 늘어났다. 테네시 등지에서 기지국을 설치하는 작업에도 참여시켜 현장 경험을 쌓았다.

1989년 목정래가 최종현의 요청으로 이동통신 진출 사전 준비작업을 하고 있는 사이

국내에서는 체신부가 통신사업 구조조정안를 만들기 위해 물밑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최종현은 1989년말 선경그룹 각 사에서 전문가 한 명씩을 차출해 전담팀을 구성했다.

이어 최종현은 1990년초에 목정래를 한국으로 불러들여 이동통신회사의 본격적인 설립 을 위한 전담팀을 꾸리도록 지시했다.

이어 노소영과 결혼하고 선경아메리카에 근무하던 최태원을 불러들이고, 경영기획실에서 근무하던 고종조카 표문수를 합류시켰다.

1990년 5월 목정래의 지휘아래 최태원 팀장, 표문수 팀장 등 50여 명의 직원으로 이동통신 전담팀을 구성했다.

이 조직이 결국 선경텔레콤(대한텔레콤→SK C&C→SK주식회사로 사명 변경)의 근간을 이루며 SK텔레콤 등 SK그룹 지주사 역할을 한다. 이 조직은 1단계에서 대한텔레콤 이름으로 제2이동통신 수주준에 뛰어들었고, 사업권 반납후에는 SK그룹의 SI회사로 변신하여 오늘날 에스케이주식회사로 확대 발전한다.

국내 통신정책은 1990년 4월을 기점으로 대 전환을 맞는다.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제주도 해저케이블 기념식에서 통신시장 경쟁체제를 도입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즉 유선전화, 무선호출,데이터 송수신, 이동통신 등 4개 통신 산업 분야에 경쟁체제를 도입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는 기존 사업자외에 다른 사업자에게 사업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다.

이어 체신부는 7월 9일 통신사업구조조정안을 발표하여 노태우 대통령의 선언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하였다.

1990년 한 해 내내 이동통신사업 진출 전담팀을 내부에서 비밀리에 꾸렸던 최종현은

1991년 4월 전담팀을 선경텔레콤이라는 법인으로 출범시켰다. 제2사업자 선정에 참여하겠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선경텔레콤 명목상 사장은 손길승(선경그룹 경영기획실장)이 맡았지만 실제 일은 목정래가 총괄이라는 타이틀로 수행했다. 최태원은 기획팀장, 표문수는 대외협력팀장, 이방형은 마케팅팀장 역할을 하였다.

선경텔레콤이 다른 업체들을 끌어들여 컨소시엄을 구성하면서 ‘대한텔레콤’으로 이름을 바꿨다. 출범 당시의 직원이 200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를 자랑했다.

선경은 미국의 GTE, 영국의 보다폰, 홍콩의 허치슨 등을 끌어들여 국제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영국의 이동통신회사인 보다폰은 1980년대 후반에 전 세계적인 시장망을 갖추고 있었다. 허치슨의 총수 이가성은 그 무렵 중국에서 이동통신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경쟁사였던 포철은 미국의 이동통신회사인 팩텔과 손잡았다. 포철은 한 때 대통령 노태우의 사돈인 선경을 컨소시엄에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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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원 노소영]SKT뿌리, 목정래의 MIS 프로젝트

최종현이 제2이동통신사업 진출을 계획하고 준비한 시점은 공교롭게도 아들 최태원이 노소영과 사귀기 시작해 결혼에 이르는 시점과 중첩된다.

최종현은 1980년대 초 유공을 인수하면서 중견그룹에서 10대 재벌 그룹으로 부상하였다. 최종현 회장은 당시 정주영,이병철 등 1세대 재벌 총수에 비해 나이가 어리고 또 미국 유학파로 새로운 메가트렌드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장학재단을 만들어 미국 유학생을 적극 지원한 것도 최종현의 그런 면모를 잘 보여준다. 민등산 조림 사업도 수십년을 내다보려는 그의 성향을 반영한 프로젝트였다.

최종현은 늘 미국 등 해외 흐름을 주시하면서 선경의 ‘미래 구상’에 몰두했다. 평소 해외 미디어를 늘 가까이 하고 또 그룹 간부나 대학 교수들을 모아놓고 토론하며 자문을 구하는 것을 즐겼다.

최종현은 국내 두뇌의 자문에 만족하지 않고 미국 컨설팅회사와 계약을 맺고 해외 두뇌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았다. 그때 그가 선택한 회사가 미국 굴지의 회계법인이자 경영 컨설팅회사인 ‘딜로이트 & 투치’였다. 

그는 1981년에 뉴욕에 설립한  ‘선경 아메리카’를 딜로이트에 고객으로 등록했다. 딜로이트에서 선경 프로젝트 담당으로 배정한 컨설턴트가 목정래였다. 운동권 출신인 목정래는 1971년 제적을 당하고 군복무를 마치고 1977년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대학에서 금융학과 경영정보시스템(MIS)을 공부했다. 

목정래는 졸업후 딜로이트에 입사해 컨설팅 업무를 하면서 미국 공인회계사 자격을 따기도 했다. 그는 선경이 어떤 그룹인지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한국인이라는 인연으로 선경 아메리카 컨설팅 업무를 맡아 최종현과 인연을 맺었다.

목정래는 경영정보시스템 전공자로서 당시 미국 기업에서 유행을 했던 시스템통합 흐름에 밝았다. 그룹내 전산시스템을 통합해 인사, 재무, 재고 등을 통합 관리하는 경영정보시스템을 구축하려는 흐름이었다.

최종현회장이 목정래에게 요청한 프로젝트는 선경그룹 경영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목정래는 1985년 선경 아메리카에 MIS를 설치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최종현과 목정래가 가장 집중한 프로젝트는 경영정보시스템 구축이 명확하다. 이후 이동통신사업 진출을 기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은 성공한 프로젝트에 대한 사후 해석격 설명이 대부분이다.

끊임없이 미래 먹거리를 찾는 최종현에게 목정래가 첫번째 글로벌 인재를 선경아메리카에 확보할 것을 제안하고 실행했다는 것이다. 

‘선경’이라는 이름으로 월스트리트저널에 구인 광고를 내자 응모자가 없었다. 편법으로 딜로이트의 이름으로 모집 광고를 내면서 ‘딜로이트’라는 이름 밑에 작은 글씨로 ‘for Sunkyung’이라는 문구를 삽입했다. 

목정래는 그때 이미 선경 아메리카의 MIS 설치 작업을 마치고 딜로이트로 원대복귀 해 있었다. 그러자 지원자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는 딜로이트 사무실에서 지원자들을 인터뷰하고, 그 결과를 서울에 있는 최종현에게 알렸다.

 마케팅과 회계, 인사 분야의 사원 10여 명을 뽑았다. 모두 미국인이었다. 그들 밑에 조수로 재미 한국인을 한 명씩 더 뽑았다. 그들 인력을 거느리고 신규사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현재 선경그룹이 한국에서 하고 있는 사업을 어느 정도 확장할 수 있는지, 조사하는 작업부터 했다. 동시에 선경에 맞는 신규사업을 발굴하는 프로젝트를 딜로이트에 맡겼다.

두번째 단계는 최종현회장은 미국 금융산업을 조사하면서 금융산업 진출을 원했으나 목정래가 미국 통신산업 흐름을 설명하면서 이동통신사업 진출을 조언했다는 설명이다. 

이어 최종현이 이동통신사업 진출을 결심하고 실무적 준비를 목정래를 시켜 미국에서 미리 준비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목정래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이동통신사업의 장점은 설비투자가 유선통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겁니다. 게다가 교환기 대신 컴퓨터로 처리할 수도 있어 확장이 용이합니다. 또 이동통신을 하게 되면 유공처럼 울산의 석유화학단지에 정유탑을 많이 세울 필요도 없습니다. 또 재고가 없어도 되고 외상매출금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화를 쓰던 사람이 요금을 안 내면 갑갑해서라도 한 달 후엔 돈을 내게 됩니다. 그러니까 투자 대비 자금회수율이 높고, 외상매출금 걱정을 안 해도 되고, 재고로 썩힐 필요 없으니 얼마나 좋은 사업입니까.”

 당시 선경에는 이동통신 전문가가 한 명도 없었다. 다만 앞날에 대비해 유공 전산팀을 분사해 정보통신회사를 만들긴 했지만, 그것은 SI(시스템 통합)전문 팀일 뿐 이동통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도 수준이 매우 낮은, 초보적인 SI팀이었다. 따라서 선경이 이동통신사업을 해야 한다면 그 분야의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때 마침 시카고에 ‘US셀룰러’라는 이동통신회사가 생겼다. 주사업자는 베이비 벨인 아메리테크였고, US셀룰러는 B밴드를 사용하는 지역사업자였다. 후발 사업자였기에 벨 회사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수익성은 높았다. 마침 그 회사가 투자자를 모으고 있었다.

  목정래는 그 회사에 선경 직원들을 훈련시켜 달라는 조건으로 100만 달러를 투자했다. 월급을 받지 않는 대신 6개월 내지 1년 동안 작업 현장에서 실무를 익힐 수 있었다. 그 회사 사장이 딜로이트 고객이어서 어려운 부탁을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첫해에 마케팅 분야에 5명, RF 분야에 3명 등 10명을 심을 수 있었다. 훈련요원은 해가 갈수록 늘어나 50여 명이 되었다. 미국에서 채용한 직원만으로는 숫자가 부족해 한국에서 차출한 대리급 직원을 파견해 기술을 쌓기도 했다. 테네시 등지에서 기지국을 설치하는 작업에도 참여했으므로 기술 습득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80년대 말에는 독자적으로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출 수 있었다.

 이동통신사업에 경쟁을 도입하다

  1989년 말 최종현이 미국에 있는 목정래를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선경그룹이 이동통신 전담팀을 구성하겠다며 총책을 맡아 달라 부탁했다. 그 무렵 체신부는 통신사업 구조조정안을 만드느라 야단법석이었다. 머지않은 장래에 한국의 이동통신시장이 요동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선경그룹은 각 사에서 전문가 한 명씩을 차출해 전담팀을 구성했다. 목정래는 한국으로 날아가 그들과 워크숍을 갖고 그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하지만 그는 그때까지도 딜로이트 사원으로 남아 있었다.

  이동통신회사의 본격적인 설립 작업은 이듬해인 1990년부터 시작되었다. 그 해 초 최종현이 미국에 있는 목정래에게 전담팀을 재구성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직도 딜로이트 소속이었지만, 목정래는 군말 없이 한국으로 날아왔다. 미국에 남아 있는 최태원을 불러들이고, 경영기획실에서 번역 일을 맡고 있는 표문수를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그 해 5월 50여 명의 직원으로 이동통신 전담팀을 재구성했다. 그 무렵 포철이 이동통신사업에 참여한답시고 미국의 이동통신회사인 팩텔과 손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경의 오랜 내공의 역사를 알 리 없는 포철은 대통령 노태우의 사돈인 선경을 컨소시엄에 끌어들이려고 열심히 손짓했다.

  선경은 포철과 손잡는 대신 미국의 GTE, 영국의 보다폰, 홍콩의 허치슨 등을 끌어들여 국제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영국의 이동통신회사인 보다폰은 그들 나름의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1980년대 후반에 전 세계적인 시장망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동통신회사 가운데는 가장 슬림한 형태로 운영하며 많은 이익을 내고 있었다. 협력 파트너로서는 그만이었다. 또한 허치슨의 총수 이가성은 그 무렵 중국에서 이동통신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중국 진출을 꿈꾼다면 최적의 파트너라 할 수 있었다. 당시는 우리나라가 중국과 수교하기 전이어서 중국에 직접 진출할 수도 없었고, 중국 파트너와 손잡을 방법도 달리 없었다.

  그처럼 착실히 실력을 쌓고 있는데, 반가운 뉴스가 날아왔다. 1990년 7월 체신부가 통신사업 구조조정계획을 발표했다. 골자는 이동통신사업 분야에도 경쟁을 도입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한국이동통신(주)이 독점하고 있는 이동통신사업에 제2사업자를 허용해 한국이동통신과 경쟁을 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가 열리고 있었다.

  1991년 4월 선경그룹은 제2사업자 선정에 대비하기 위해 ‘선경텔레콤’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미주 경영기획실에 남아 있는 핵심 멤버들을 불러들여 사업계획서 작성 팀을 구성했다. 그때 최태원을 기획팀장, 표문수를 대외협력팀장, 이방형을 마케팅팀장에 앉히고, 목정래는 뚜렷한 직함 없이 ‘총괄’이라는 애매한 이름으로 사령탑 역할을 맡았다. 운동권 학생으로 반정부 활동을 벌였던, 자유인다운 면모가 엿보이는 대목이라 하겠다.

  선경텔레콤이 다른 업체들을 끌어들여 컨소시엄을 구성하면서 ‘대한텔레콤’으로 이름을 바꿨다. 출범 당시의 직원이 200명이나 되었으니 급조된 다른 회사의 컨소시엄과는 규모부터 달랐다. 선경그룹 경영기획실장 손길승이 사장 자리를 맡았으나 1주일에 한 번 얼굴만 내밀었을 뿐, 모든 일은 목정래가 도맡아 끌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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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원 노소영]목정래와 SK텔레콤 역사(1)

2022년 7월 16일 서울 아산병원에서 목정래 전 SK텔레콤 부사장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팬데믹 영향으로 인해 조카 모희숙씨 등 소수의 친지들만 고인의 마지막 길을 같이 했다. 목정래 부사장의 자녀들은 모두 미국 국적으로 미국에 거주하고 있었다.

목정래 부사장의 부음을 접한 정보통신계 인사들도 소수였다. 그는 자녀들을 미국에 두고 강원도 용평에서 전원생활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집 지붕에 생긴 벌집을 처리하다 불의의 사고를 당해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목정래 부사장과 친분이 있는 정보통신계 인사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깊이 애도하면서 오늘날 SK텔레콤의 탄생의 숨은 주역이었던 그와의 인연을 떠올렸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정보통신부에서 근무하면서 목정래 부사장이 SK텔레콤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최종현회장 시대가 가고 최태원 시대가 열리면서 목정래부사장의 존재는 SK텔레콤뿐만 아니라 SK 그룹내에서 잊혀졌다. 목부사장의 성격도 나서서 존재감을 뽐내려고 하지 않고, 조용히 초야에 묻혀기를 원했기에 더욱 그러했다.

목정래라는 인물을 다시 소환한 것은 최태원 회장과 노소영 나비 관장간 이혼소송과 그에 따른 판결이다. 특히 2심에서 재판부가 노소영관장의 부친 노태우전대통령이 SK텔레콤 출범과 성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점을 인정하여 1조3천억원에 이르는 자산을 노관장에게 주도록 판결함으로써 SK텔레콤의 탄생 과정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가 새삼 조명을 받고 있다.

재산분할에서 핵심 쟁점은 현재 SK그룹의 지주사인 SK주식회사에 대한 최태원회장의 지분이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는가다.

이에 대한 최태원회장 노소영관장측 주장은 전혀 다르다.

최회장쪽은 최태원회장의 SK주식회사 지분과 그룹 총수 지위는 최종현 회장이 생전에 설계한 큰 그림과 사촌간 협약이라는 집안 문화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노소영쪽은 최회장의 지분은 노태우 대통령의 비자금(300억원)과 눈에 보이지 않는 대통령의 영향력에 뿌리를 두고 있고, 결혼후 최회장의 그룹총수 경영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재산분할에 대해 최회장은 자신의 지분은 아버지(최종현)가 만들어준 것이고, 그룹 총수지위는 사촌들이 밀어준 것이라고 주장해야 결혼후 회사 성장 분을 분할에서 제외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노소영쪽은 최회장 지분의 뿌리인 대한텔레콤 지분은 노태우대통령의 비자금이 시드머니 역할을 했고, 이어 결혼후 그룹총수 부인으로 내조하였기에 성장분은 공동 재산이라고 주장해야 최회장 재산을 분할 받을 수 있다.

SK텔레콤 탄생의 실무 지휘자였던 목정래는 최종현회장 생존시 늘 독대하면서 크고 작은 궂은 일을 처리했다. 따라서 목정래 부사장이 생존해 있다면 이혼소송의 핵심 쟁점에 대해 가장 정확히 증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통신산업 역사 현장을 생생하게 경험했던 다수의 인사들은 SK텔레콤 탄생이 한 두개의 프레임으로 분석하기에는 굉장히 복합적이며 다층 구조성격을 띠었다고 증언한다.

이를테면 노태우전대통령이 사돈 최종현회장을 위해 이동통신사업을 그냥 줬다는 프레임은 모든 것을 쉽게 설명할 수 있지만, 실제 SK텔레콤이 국내 1위 사업자가 되는 복잡한 과정을 설명하는데 너무 제한적이다.

또 그렇다고 최종현회장의 미래를 보는 눈이 섬유 화학그룹이었던 SK 그룹을 이동통신과 반도체 기업으로 키웠다는 프레임 역시 현실의 복잡한 요소를 제거해버린 단순한 서사에 불과하다.

먼저 최종현회장과 목정래의 만남에서 SK텔레콤 탄생 비화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보자.

최종현은 1980년대 중반부터 섬유 화학 중심의 선경그룹을 키우기 위해 새로운 트렌드를 찾는데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미국 유학 경험으로 인해 글로벌 컨설팅 회사를 활용하는 것을 중시하였는데, 핵심 파트너는 미국계 딜로이트투치였다.

최회장은 신사업 발굴 실행조직으로 1986년 미국에 SK 지사(미주 경영기획실)를 뉴욕에 설립하였다. (최태원회장은 1985년 미국 시카고대를 다니면서 노소영과 사귀고 있었다.)

그는 야심차게 미국 지사를 설립과정에서 딜로이트 투지에 컨설팅을 의뢰했는데, 딜로이트는 한국계인 목정래를 SK 담당으로 배정하었다. 최회장은 미국 딜로이트투치에 근무하던 30대 목정래를 만나 그의 능력을 높이 샀다.

목정래는 진주고를 졸업하고 연세대 법과에 70년에 입학하였다. 그는 71년 유신체제 반대 학생운동 리더 역할을 하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제적당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경영학으로 전공을 바꿔 졸업하고 딜로이트투치에 입사해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목정래의 전문 분야는 MIS(경영정보시스템)구축이었다.

이후 목정래는 뛰어난 영어실력과 미국 컨설팅업계내 네트워크를 활용하면서 최회장의 미래구상을 뒷받침하는 두뇌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의 또다른 임무는 최태원의 유학생활과 미국 생활을 뒷바라지하는 일이었다. 최태원은 졸업후 1988년 9월 13일 노소영과 결혼식을 올린 뒤 노소영과 함께 뉴욕에서 목정래부사장 밑에서 1990년 12월까지 경영수업을 받았다.

SK그룹은 이동통신진출에 대해 최종현 회장이 혜안을 갖고 목정래를 통해 미국내 이동통신사업 동향을 조사하거나 소규모 투자를 통해 경험을 축적하는 등 정부 특혜와 상관없이 치밀하게 준비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실제 과정을 보면 다른 해석을 낳을 수 있다.

최종현회장이 목정래씨를 통해 구현하려고 했던 실제 프로젝트는 선경그룹의 경영정보시스템을 최첨단으로 구축하는 것이었다. 당시 세계 굴지의 기업들은 첨단 경영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경쟁을 벌였고, 최회장은 이런 흐름을 굉장히 부러워했다.

목정래부사장의 전문 분야 역시 경영정보시스템 구축이었기에, 그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최회장에게 보고하면서 선경그룹 경영정보시스템 구축을 지휘하였다.

여기서 최회장이 경영정보시스템 구축에 힘을 쏟는 기간(1986년~1988년)에 미국 산업계에서 일어난 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1984년 AT&T가 지배하던 통신 독점체제가 깨지고, 경쟁체제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통신산업이 부상하였다. 최회장과 목정래는 이런 흐름을 예의주시하면서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분서하였다.

두번째 주목할 것은 미국 통신산업계 변화에 영향을 받은 국내 통신산업 정책의 변화였다. 정보통신부(구 체신부)는 한국통신공사중심 통신 사업 독점이 깨고 데이콤 등 새로운 통신업체를 육성하는 정책을 도입하였다. 유선통신 시장 독점 구조는 깨졌고,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한 이동통신은 여전히 한국통신의 자회사인 이동통신이 독점하고 있었다.

묘하게 미국과 한국 통신산업 정책이 대 전환을 이루는 시점에 아들 최태원이 강력한 차기 대통령후보였던 노태우의 딸 노소영과 유학중 연애를 통해 대통령과 1988년 사돈 관계를 맺는 일이 일어났다. 실제 노태우는 대통령이 되어 88년부터 92년까지 5년동안 청와대를 지켰다.

최회장은 미국과 한국 통신정책 변화와 대통령집안과 사돈이 된 것을 계기로 목정래를 통해 신사업 개척과 아들 그룹 승계라는 두 마리토끼 잡기를 구상하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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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언론사 생성형 AI대응 전략 토론회

한국언론진흥재단은 2023년 11월 9일 엘레나 페로티 세계신문협회 미디어정책및 홍보 수석이사를 초빙해 ‘AI와 뉴스산업 혁신’을 테마로 조찬 강연회를 가졌다. 페로티 이사는 세계신문협회에서 미디어 정책과 홍보를 담당하면서 세계 각국의 언론 관련 단체와 협력하고 소통하는 일을 맡고 있다.

페로티는 강연에서 생성형AI의 학습에서 뉴스 콘텐츠가 핵심이므로 꼭 제 값을 받아야 하며 이를 위해 전세계 언론계는 빅데크를 대상으로 집단 행동을 하면서 함께 협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페로티 이사의 강연을 소재로 회원들이 12월 22일 토론회를 가졌다.

언론사 생성형 AI 수용 대세

2022년 11월 오픈AI가 챗GPT3를 발표하면서 순식간에 생성형AI가 언론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101개 언론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50%는 이미 생성형AI를 사용하고 있고 70%는 빠른 시간안에 생성형 AI가 뉴스룸에서 유용한 도구가 될 것이라고 답했다. 이에 비해 20%만 생성형AI 사용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는데 그쳤다.

응답한 언론사는 생성형 AI를 콘텐츠 요약, 교열, 기초자료 조사, 업무흐름 자동화 등에 활용하여 기자들이 더 창의적인 일에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언론계는 생성형 AI에 대해 폭넓은 낙관론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회의론도 존재한다. 언론사들은 오정보, 정보의 정확성, 데이터 프라이버시, 규제 등을 우려하고 있다.

생성형 AI 규제 추세와 현황

2023년 5월 오픈 AI의 샘 앨트먼 사장이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생성형 AI를 사용할 경우 대중을 상대로 출시하기 전에 위험성을 걸러내기 위한 사전 테스트를 실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챗GPT3출시 이후 2023년 8월 중국은 24개 항목을 담은 가이드라인을 발표함으로써 AI를 규제하는 최초의 국가가 됐다. 가이드라인에는 검열에 가까운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올해 9월 AI 안전포럼이 미국 의회에서 열렸는데 샘 올트먼, 마크 저크버거, 일론 머스크 등 참여자들은 규제에는 동의했지만 누가 규제하고 어떻게 규제하느냐는 문제에는 합의하지 못했다. 미 바이든 정부는 10월 31일 행정명령을 미국 정부의 모든 기관이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AI의 사용과 개발에 힘써야 한다고 규정하는 행정명령을 발포했다.

또 일본 히로시마에 모인 G7은 일본의 주도로 AI개발 원칙, 개인정보보호 등 11개 항목의 가이드라인에 합의했다. 11월 1일 영국 블레츨리파크에서 열린 AI안전 정상회의에 참석한 국가는 AI의 리스크를 함께 평가하자는 선언문을 채택했다. 차기 회의는 2024년 한국에서 개최될 것이다.

유럽연합도 리스크를 수용불가, 고위험, 제한적 또는 최소 등 등급별로 분류하고 저작권법을 지키면서 모델을 학습시키는 법안을 마련했다. 또 법을 어길 경우 3천만 유로 또는 매출액의 6%까지 벌금을 매길 수 있도록 했다.

언론계 생성형AI 활용 현황과 이슈

런던정경대학의 조사에 따르면 언론계에서 뉴스 수집, 뉴스 제작, 뉴스 배포에 AI를 폭넓게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블룸버그GPT는 금융콘텐츠에, 런던타임즈 제임스는 사용자의 행태 분석에, 로이터의 링스 인사이트는 탐사형 저널리즘 맥락적 정보 제공을 하는데 활용되고 있다.

뉴스 수집의 경우 데이터 수집, 자동번역, 텍스트 추출, 요약, 데이터분류 등에 활용하고 있다. 뉴스 제작 프로세스에서는 사실확인, 팩트체킹, 교정, 헤드라인 뽑기, 이미지 생성 등에 활용하고 있다. 뉴스 배포에서는 개인화 뉴스제공, 매체별 콘텐츠 최적화, 텍스트 오디오 전환, 검색최적화 등에 AI를 활용하고 있다. 어떤 매체는 미국식 영어가 아닌 영국식 영어 규칙이 있어서 특정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규제하는데 AI를 활용한다.

언론사는 이런 AI활용을 통해 기자들이 반복적이거나 기계적인 일에서 벗어나 창의적인 일에 몰두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생성형 AI의 기자직업 위협

AI는 언론인의 생계에 위협을 줄 수 있다. 올 6월 미국 매체인 인사이더의 파업은 뉴스 업계에서 최장기 파업이었다. 이 파업이 끝나고 나서 노조는 만약에 생성형 AI를 뉴스에 활용할 경우 노조가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 작가 조합(WGAW)은 146일에 걸쳐 파업하면서 할리우드 영화제작과 TV 프로그램 제작에 영향을 미쳤다. 시위에 등장한 한 피켓에는 “작가들은 연극 ‘R.U.R’에서부터 AI 위험성을 경고해 왔다”고 적혀있다. (‘R.U.R’은 체코작가 카렐 차페크가 1920년에 발표한 희곡으로 로봇을 최초로 다뤘다)

독일 빌트지는 올해 200명을 해고했는데

마티아스 되프너 악셀 스프링거 CEO는 “AI가 정보를 수집하는데 사람도 곧 더 나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호주 뉴스코프의 경우 4명의 로컬 데이터팀이 매주 3천개의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AI의 사용시 허위정보 리스크, 편향적 정보 리스크가 발생하고, 사람이 생성한 것과 AI가 생성한 콘텐츠를 구분하기 어렵다. 나아가 언론인의 신뢰도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점으로 인하여 다른 기회가 있다. 즉, 우수한 저널리즘이 더욱 중요하고 가치가 올라갈 것이다. 스타 저널리스트의 가치도 커질 것이다.

생성형 AI에 대한 사람의 감독

생성형 AI 활용과 관련 윤리적 가이드라인을 가지고 있는 뉴스룸이 많지 않다. 올 9월에 옥스퍼드대 조사 결과 200개 중 52개만 가이드라인 가진 것으로 나타났는데 기본적으로 내용이 유사하다.

또 경영진이 언론인들이 AI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정한 것으로 공통적 사각지대도 있다. 예를 들어 가이드라인 위반에 대한 단속으로서 벌금이나 벌칙을 마련하지는 않았다.

아웃풋에 대한 감독은 있지만 알고리즘에 대한 감독은 제한적이며 외부협업자들과 관련된 부분이 없다. AI사용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있다면 소스에 대해서도 가이드라인이 있어야 하는데 부족하다.

영국 가디언은 3개월 동안 편집, 기술, 법률 등 뉴스 제작의 여러 부서가 참여한 워킹그룹에서 마련했는데 사람이 감독하는 것은 필수적이라고 규정했다. 생성형 AI도구를 사용할 경우 보다 양질의 저널리즘이 가능할 때 사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시니어 에디터가 생성형 AI가 만든 결과물을 승인했을 때만 사용해야 한다. 또 생성형 AI사용을 대중에게 반드시 알려야 한다. 대규모의 데이터세트를 검색하거나 마케팅을 위한 아이디어 창출, 비즈니스 프로세스 단축 등에 활용하면 반드시 승인받아서 투명하고 공정하게 사용하고 이를 알려야 한다.

AP의 가이드라인은 정확하고 공정한 정보를 공유하는 책임은 언론인이 가지고 있다고 규정한다. 또 이 정보에 의구심이 있다면 이 정보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규정한다. 챗GPT를 이용해 동영상, 사진,오디오 등을 변경해서 안되며, 또 소스 데이터를 AI에 탑재하거나 민감정보를 AI에 제공하면 안 된다고 규정했다.

AI 시스템은 발행인들에 의해 승인되어야 하고, 승인된 콘텐츠만을 사용해야 하고 기록을 제대로 남겨야 한다. 어떠한 목적으로 어디에 사용되고 승인받았는지를 기록으로 남기고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마리아 레사가 국경없는 기자회와 함께 주도한 AI 저널리즘 파리 헌장에는 발행인들의 관점이 반영된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핵심적인 아이디어는 뉴스룸에 AI 사용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는 것이다. 아주 성공적이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AI가 규제해야 하는 것으로 인지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저작권에 대한 정당한 요구

37개의 웹사이트가 CNN,뉴욕타임스, 로이터 뉴스를 재료삼아 새로운 뉴스를 작성하는 것으로 적발됐다. 이들 사이트가 광고수익을 얻어도 출처인 언론사에 배분해주지 않는다. 언론사는 이렇게 사용된 줄 몰랐을 것이고 79%가 표절탐지기로도 찾아낼 수 없다.

챗GPT4를 사용해서 뉴욕타임스를 인용한 것인지 모르게 검색엔진 최적화되도록 쓰라고 하면 AI기 생성 한 기사인지 모르게 작성해준다. 구글의 AI 학습용 데이터인 C4 데이터세트를 분석하면 뉴욕타임스(4위) 가디언지(6위), 포브스(8위)순으로 언론사의 콘텐츠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더 이상 생성형 AI의 학습에 데이터를 제공하지 않는다. 또 뉴욕타임스도 AI의 웹크롤링을 막고 있다.

현재 챗GPT, 바드 등 7개의 LLM(Large Language Model)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데,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돈과 양질의 콘텐츠에 대한 접근이 필요하다. 이들이 절실하게 원하는, 양질의 학습용 콘텐츠는 바로 미디어가 생산하고 있다.

미국의 FTC에서는 올 7월 오픈 AI에 대해 불공정한 데이터 사용여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AI 기업들은 이런 소송을 예상하고 있었다. 오픈AI는 소송이 진행되면 데이터를 사용하지 못할 것을 우려해 AP와 계약을 체결했다. 특히 영어가 아닌 언어로 발행되는 뉴스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만큼 희소성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콘텐츠가 LLM에 인풋으로 사용되면 돈을 받아야 하는데 너무 적은 돈을 받고 계약을 맺으면 안 된다. 이전에 너무 적은 돈을 받고 콘텐츠를 테크 기업이 제공했던 실수를 반복하면 안 된다.

생성형AI회사는 자신들이 필요하는 콘텐츠에 대해 돈을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오픈 AI경우 출범 7개월만에 회사가치가 뉴스코프사의 2배를 넘어섰고, 오픈AI지분 49%를 보유중인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사상 최초로 4조달러짜리 회사가 되었다.

언론사가 할 일을 다음과 같다.페이월이라는 유료화도 AI의 크롤러로부터 완전히 콘텐츠를 보호하지 못하므로 집단 행동과 집단 협상이 필요하다. 또 미디어의 웹사이트 이용약관에 자사 데이터가 AI 트레이닝에 사용되지 못하도록 규정해야 한다.

AI를 잘 활용할 수 있는 인력을 훈련시켜야 하고, AI 관련 가이드라인를 채택해야 한다. 외부 협력과 국제적인 연대를 해야 한다. 여러 AI 관련 각종 국제 모임에 참여하는 등 노력이 필요하다.

질의응답시간

페로티 이사는 강연후 질의응답시간을 갖고 생성형 AI활용할 경우 사람의 역할에 대한 청중의 질문에 “웹사이트에 컨텐츠를 올릴 때 꼭 사람이 콘텐츠를 검토하고 나서 출고해야 한다. 이는 사람이 항상 읽고 편집하고 검토한다는 뜻”이라고 답변했다.

또 뉴스미디어가 LLM에 양질의 콘텐츠를 제공하지 않으면 편향되거나 허위정보를 학습하고 결국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미디어의 사회적 책임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존재 자체가 위험하므로 세상을 구해야 할 임무가 있는 건 아니다”라고 답변했다.

페로티 이사는 “한 언론사가 무료로 제공한다고 하고 나머지가 제공하지 않는다하면 챗GPT는 한 언론사에서 콘텐츠를 가져오면 되므로 충분하다고 판단할 것”이라면서 “언론계 집단행동이나 단결이 없으면 기술기업이 콘텐츠를 쉽게 활용할 수 있다. 꼭 콘텐츠의 가치를 인정받고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페로티이사의 강연은 생성형AI 최신 동향 정보를 충실하게 공유해주고 또 언론계의 현실적인 대처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한국 언론계가 깊이 새겨 듣고 바로 실행에 옮겨야 할 대목이 많다. 예를 들어 생성형AI를 저널리즘에 접목하는데 필요한 가이드라인을 빠른 시간안에 만들고 또 빅테크 기업을 대상으로 저작권 협상을 하기 위해 언론계가 똘똘 뭉쳐 단일 협상창구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개별 언론사입장에서 생성형AI의 급부상은 그리 반갑지 않다. 설사 공동 협상을 통해 저작권료를 받는다고 해도 각 언론사의 경영 상황을 극적으로 호전시킬 정도의 의미있는 금액이 아닐 것이다. 더욱이 생성형AI가 모든 언론사의 기본 도구가 되면 차별성이 퇴색되고 결국 새로운 수익은 없고 비용만 추가할 것이다. 오픈AI가 천문학적 돈으로 개발한 챗GPT를 저렴한 가격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시장을 장악하면 결국 돈벌이에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페로티 이사가 강연에서 스타 저널리즘의 가치가 상승할 것이라는 전망한 대목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찾을 수 있다. 스타 저널리즘을 실현하려면 먼저 숙련 인력과 미숙련 인력이 혼재한 한국식 뉴스룸 인력구조를 확 바꿔야 한다. 아울러 스타 저널리스트에 대한 보상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