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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텔러]세종과 정조 연구가, 박현모

1999년 서울대학교에서 ‘정조(正祖)의 정치 사상’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2001년부터 14년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정조와 세종, 정도전과 최명길 등 왕과 재상의 리더십을 연구했다.

2013년부터는 미국의 조지메이슨 대학교, 일본의 ‘교토 포럼’ 등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형 리더십’을 강의했다.

시민 강좌 ‘실록학교’를 운영했다(2019년 기준 2,700여 명 수료). 현재 여주대학교 사회복지상담학과 교수 및 세종리더십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며 대학 교양 과목인 ‘세종 리더십’을 대학생들에게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세종의 적솔력』, 『정조평전』 등이 있고, 『몸의 정치』와 『휴머니즘과 폭력』을 우리말로 옮겼다.

「경국대전의 정치학」,「정약용의 군주론: 정조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국왕의 동선과 정치재량권의 관계에 대한 연구: 정조와 순조」 등 80여 편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저서소개_세종의 직솔력

한글 창제, 과학 발전, 음악·문자·의약 등 거의 전 분야에서 탁월한 성취를 거둔 세종.

그가 남긴 업적은 6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물론 이후 세대들도 누릴 수 있는 자산이 되었다. 그러나 세종도 재위 초기에는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나라 사정 때문에 위기를 맞았다. 《세종실록》에는 위기를 극복하고 태평성대를 이룩한 세종의 고민과 리더십 비결이 그대로 담겨 있다.

저자 박현모(여주대학교 교수, 세종리더십연구소장) 교수는 실록에 박제된 세종을 21세기 인본주의 리더로 다시 살리기 위해 14년간 세종실록 시민강좌, 학술대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책은 7년간의 공을 들인 노작으로, 한국형 리더십의 대표적 표현으로 “적솔력”을 제안한다.

지금은 사람을 존중하며 이끌어야 할 때! 애민을 바탕으로 개혁을 추진하는 솔선수범하는 지도자의 태도 “적솔력”을 새롭게 봐야 하는 이유다.

“한발 앞서 이끌며 실행하라”

지금 필요한 것은 리더의 적솔력(迪率力)이다!

적솔력: 지도자가 앞장서서 끌어가고(迪) 솔선수범하여(率) 성과를 거두는 힘

한국형 리더십을 향한 새로운 모델, 적솔력

세종이 조선을 다스린 약 32년(1418~1450년)의 기간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잘 다스려진 시절로 평가받는다. 훈민정음을 위시하여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적 성과를 거두고, 음악・문자・의약・외교・국방・문화 등 거의 전 분야에서 풍요로운 결실을 거두었다.

역사상 한 군주의 저력이 이토록 화려하게 발휘된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세종은 그저 조선의 4대 왕이 아니었다. 그의 사후 신하들은 그를 기려 “해동의 요순”(海東堯舜)이라 불렀고, 그로부터 130여 년이 지난 뒤 율곡 이이는 “동방의 성주聖主”라고 일컬었다. 또한 후대 임금 성종을 비롯해서 영조와 정조 등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조광조․ 기대승․ 송시열․ 홍양호 등 조선의 대표적인 정치가와 지식인들은 세종을 ‘최고의 군주’로 꼽았다.

22대 왕 정조가 “옛날 임금들은 언제나 《세종실록》에 있는 글귀를 외우시고 그 규례를 쓰곤 하셨다”라고 말한 것에서 보듯이, 세종은 그 이후의 대다수 군신들에게 훌륭한 지도자의 전형이었다.

리더로서 세종의 탁월함은 과연 어디서 온 것일까?

오늘날 모든 조직의 리더들이 던지는 질문, 답을 구하기 위해 늘 스스로 고민하는 문제는 이것이다.

‘리더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리더는 구성원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가?’

세종 전문가 박현모 교수는 《세종실록》 속에서 3개의 사자성어로 정리할 수 있다고 말한다.

① ‘한발 앞서 주도하고’(선발제인 先發制人),

② ‘진실되게 솔선수범하여’(성심적솔 誠心迪率),

③ ‘반드시 실행하라’(군역곽씨君亦郭氏)라는 메시지가 그것이다. 이 3단계의 흐름을 요약하면 ‘적솔력’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적솔력(迪率力)은 “지도자가 앞장서서 끌어가고(迪) 솔선수범하여(率) 힘”을 말하는 것으로, 《세종실록》 속에 나오는 세종의 어록 ‘성심적솔(誠心迪率)’에서 취한 것이다. (《세종실록》26/윤7/25).

박 교수는 적솔력이야말로 ‘리더십’이라는 외래어를 대체할 수 있는 세종식 표현이라 말한다.

‘지도력’이나 ‘영도력’보다 참신하고, 특히 지금과 같은 중차대한 국가와 기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최적의 리더십 덕목이 지도자의 적솔력이라는 것이다.

세종의 한국형 리더십을 가장 잘 압축했을뿐만 아니라 ‘온 백성이 즐겁게 생업에 종사하는 나라’ 즉 ‘생생지락(生生之樂)하는 나라’를 만들자는 세종의 비전을 실천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리더십이 필요한 때

1418년 22세에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나라는 어지러웠다. 우선 왕인 세종에게 인사권과 군사권 등 핵심 왕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모든 정치가 부왕인 태종의 의중대로 움직였다.

계속되는 가뭄으로 백성들은 굶주림을 면치 못했고, 제주도로 곡식을 실어 보낸 배가 난파되었다는 소식이 사고 발생 후 무려 한 달이 지난 뒤에야 들려왔다.

연이어 터지는 고위관리들의 뇌물사건이며 성 추문 사건으로 조정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재위 4년에 부왕이 사망한 뒤에도 어려움은 마찬가지였다.

특히 1425년 12월 기록을 보면, 각종 강력범죄가 속출하고, 강원도와 평안도 등지에 심한 기근이 들어 고향을 떠나 떠도는 사람이 줄을 잇고, 설상가상으로 그보다 한 달 전인 11월에는 태풍까지 휩쓸고 지나갔다. 특히 새로운 화폐제도, 즉 동전법 강행에 대한 백성들의 저항은 세종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책을 통해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살펴보면,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쉽다. 그러나 실지의 일에 당면하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세종실록》 7/12/8)라는 한탄은 그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게 강물을 건너고’[涉艱苦] 있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세종이 다스리던 조선, 특히 세종 집권 초기의 조선은 여러 모로 현재의 우리나라 상황과 비슷하다. 국가라는 거대 조직의 리더였던 세종은 가뭄, 태풍 등의 천재지변과 민심이 들끓는 사건사고에 더해 정치적 수완 발휘에 어려움을 겪었다.

규모의 크고 작음은 있겠지만 지금 우리의 리더들이 처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직의 내실을 기하고 외부환경의 변화에 긴밀하게 대처해야 하며, 경영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도 미래의 리스크를 관리해야 하는 과제들로 리더는 고민한다.

백성은 곧 조직구성원이고 통치는 곧 조직경영이다. 현대의 리더들이 고민하는 모든 영역은 이미 600년 전 세종이라는 탁월한 리더가 고민한 바 있다.

세종의 리더십을 오늘날 우리가 다시 보아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세종이 재위 초기의 암울한 위기 상황을 넘어 나라의 안정화를 이루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안목과 혜안, 민본, 애민이란 바탕 위에 현상보다 본질을 보고, 올바른 질문을 통해 국정과제를 계획하고 실천했던 살아있는 지도자의 모습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과 꼭 해야 하는 것을 거듭해서 고민하고 실천하여 초기 이후 재위 8년부터는 단계적으로 민생경영, 문화국가 건설, 개혁과 개척을 중심으로 나라를 경영했다.

《세종의 적솔력》은 실록 속 사자성어를 통해 리더의 보이지 않는 질문과 생각, 시대를 뛰어넘는 혁신적인 사고와 인간적인 소통방식, 음악과 과학 등 문화창달을 실행한 세종의 노력과 행동을 볼 수 있는 살아있는 교과서다.

세종실록 1만800쪽에서 뽑아내다

오늘의 리더들에게 건네는 세종 말씀

《세종의 적솔력》은 《세종실록》에서 찾을 수 있는 무수한 어록 중에 오늘날 리더들에게 의미 있는 통찰력과 새로운 리더십 교훈을 줄 수 있는 부분을 발췌하여, 52개의 사자성어로 구성한 책이다.

여주대학교 세종리더십연구소장 박현모 교수는 왕으로서의 세종, 리더로서의 세종을 오랫동안 연구해왔으며, 맥락을 모르고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세종어록을 쉽고 풍부하게 전달하는 강연자로 명성이 높다.

지난 7년간 포스코와 삼성경제연구소의 후원으로 대기업 사장단 및 임원진, 각 기업의 CEO, 현직 검사, 대학교수, 정치인, 경영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달에 1회씩 진행해온 세종어록 강의를 바탕으로 52개의 사자성어를 엄선하여 묶었다.

특히 각계각층에서 활동하는 우리나라 리더에게 생각할 거리와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할 수 있는 리더십 화두를 제시했으며, 세종 시대에 활약한 뛰어난 인물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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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시나요? 부암동과 커피프린스를…

“여기가 커피프린스 나왔던 곳입니다.”

경복궁역에서 버스를 타고 자하문 터널 입구에서 내려, 북악산 꼭대기를 향해 한참을 걷다보면  그 옛날 산모퉁이 카페 자리가 있다.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한성이(이선균役)네 집으로 알려진 ‘산모퉁이카페’는 목인박물관장이 수장고와 작업실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2007년 드라마 촬영지로 사용하게 되면서 카페 겸 갤러리로 한때 핫플레이스로 부상했다. 그 후 내이름은 김삼순, 찬란한 유산 등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 유명해지면서, 부암동자체가 관광명소가 되었다.

드라마가 종영한 한참후에도  드라마를 잊지못하는 사람들이 찾아갔다. 산모퉁이 2층 창가는 북악산의 아름다운 경치가 훤히 보이는 곳이었다. 그곳 선반 위에는 전화기 한 대가 놓여있었고, 수화기를 들면 드라마 속 한성이 부르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커피프린스’를 회상했다.

2020년, 그 ‘커피프린스 1호점’이 MBC의 ‘다큐플렉스’를 통해서 다시 돌아왔다. 공유 이선균 윤은혜  채정안 등이 그때 그들의 이야기를 했다. 많은 사람에게 이 작품이 청춘을 기억하게 하는 드라마로 남아있듯, 방송 당시 20대였던 배우들에게도 역시 청춘의 기록이었다.

부암동은 커피프린스 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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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텔러]우크라이나 연구, 구로카와 유지 (黑川祐次)

구로카와 유지 (黑川祐次)소개

1944년 일본 아이치현에서 태어나 도쿄대학 교양학부를 졸업하고, 「코트디부아르의 분쟁과 일본의 대응」으로 니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외무성에 들어가 재在캐나다 몬트리올 총영사, 주駐우크라이나 대사와 몰도바 대사를 겸무했다.

중의원 외무조사실장, 주코트디부아르 대사를 지냈으며, 주베냉·부르키나 파소·니제르·토고 대사를 겸임했고, 니혼대학 국제관계학부 교수 등을 역임했다.

2004년 12월에 실시한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당시, 일본 감시단 단장을 역임했고, 현재 우크라이나 연구회(국제우크라이나학회 일본지부)를 이끌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국제화가 일본의 공공정책에 끼치는 영향: 세계에서 일본 정부의 역할은 어떻게 변화하는가』(2008) 등이 있다

저서 소개_유럽 최후의 대국,우크라이나의 역사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전前 우크라이나 대사이자 니혼대학 국제관계학 교수를 지낸 저자가 쓴 ‘우크라이나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루스 카간국으로부터 키예프 대공국으로 이어진 우크라이나의 복잡하고 긴 역사를 풀어 쓰고, 근대 들어 러시아와 유럽의 틈바구니 속에서 강국들의 침략을 받은 대고난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나아가 우크라이나가 어떻게 타민족의 지배와 그로부터의 독립을 반복하면서 지금과 같은 최대 인구의 국가로 번창할 수 있었는지 그 핵심적인 계기들을 밝히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첫 출발은 루스 카간국으로, 러시아(루스)라는 이름도 원래 여기서 가져다 쓴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12세기까지 모든 견직물을 ‘루스제製’라고 불렀다. 그만큼 이 나라는 농업과 상업, 무역의 중심지였다.

저자는 중장기적으로 우크라이나가 큰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대국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이다. 우크라이나의 면적은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넓고 인구는 5000만 명으로 프랑스에 필적한다.

철광석은 유럽 최대 규모의 산지를 자랑한다. 농업은 세계의 흑토지대의 30퍼센트를 차지해 언젠가 ‘유럽의 곡창’의 지위를 회복할 것이다.

두 번째는 지정학적인 중요성이다.

유럽에서 우크라이나만큼 여러 민족이 거쳐간 곳은 없다. 우크라이나는 서유럽과 러시아, 아시아를 잇는 통로였다.

그런 까닭에 우크라이나는 세계 지도를 다시 쓴 대북방전쟁, 나폴레옹전쟁, 크림전쟁, 두 차례 세계대전의 전장이 되었고 많은 세력이 이 나라를 노렸다. 즉 우크라이나의 향방에 따라 동서 힘의 균형은 달라졌다.

이것은 푸틴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려 하고, 이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강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나라가 없는 나라의 역사

대국으로서 우크라이나는 인구수가 12세기 말경 이미 700만~800만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된다(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인구가 800만 명이었다).

우크라이나는 곡창지대일 뿐 아니라 과학기술의 수준도 높아 구소련의 첨단 기술 중 SS-19, SS-21 등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은 우크라이나에서 제작됐다.

또 고골, 호로비츠, 니진스키, 말레비치와 같은 문화예술계의 대가들을 배출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역사에서 단 하나의 주제를 꼽자면 ‘나라가 없었다’는 점이다. 역사가 수브텔니는 우크라이나사의 핵심이 국가의 틀 없이 민족이 어떻게 살아남았는가에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유럽의 세력 균형 속에서 우크라이나 ‘땅’을 중심으로 우크라이나사를 풀어간다.

이 책은 두텁지 않지만 고대에서 현대 우크라이나의 독립까지 일목요연하게, 중요한 국제관계와 내분의 양상을 모두 제시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우크라이나에 체류했던 외교관으로서 독립국가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면서 러시아와 미국·유럽 간의 관계를 현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고찰해 큰 도움이 된다.

국내에 이렇게 종합적인 우크라이나 통사는 출간된 적이 없어 최근 러시아와의 극도의 긴장관계를 보이고 있는 진정한 이유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 땅을 둘러싼 유럽의 힘겨루기

현재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15세기만 해도 키예프 루스 공국의 지배 아래 있는 비슬라브 부족체의 연합체일 뿐이었다.

오히려 우크라이나 쪽에서는 현재 우크라이나의 근간이 된 키예프 루스 공국의 직계는 바로 자신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역사가 오마셰프스키는 현재 우크라이나 인구 90퍼센트가 거주하는 지역을 지배했던 할리치나-볼린 공국을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1340년대에 볼린과 할리치나는 각각 리투아니아, 폴란드에 병합됨으로써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는 소멸했다.

이후 우크라이나는 세 민족 즉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로 분화됐고 언어도 제각기 사용했다. 다만 이 시기에 ‘가장 우크라이나답다’고 할 수 있는 코사크(준군사적 자치 공동체)가 형성된다.

이후에도 우크라이나 땅은 여러 나라가 노리는 먹잇감이 되었다.

먼저 리투아니아가 한때 볼린, 체르니히우, 키예프 지방, 드네프르강 동안까지 자신의 지배하에 두었다(특이했던 것은 언어와 문화 모두 리투아니아인들이 우크라이나화되었다는 점이다).

그 다음으로 촉수를 뻗은 것은 폴란드였다. 이들은 우크라이나에 자기네 문화를 강제로 심으려 한 점에서 완전히 달랐고, 이는 훗날까지 우크라이나 역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이 지역에서 정치적 힘은 종교와 관계가 깊었다. 키예프 루스 시대에 루스 땅에는 정교가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정교는 두 방향에서 문제가 생겼다.

첫째, 우크라이나 땅이 정치적으로 약해지자 정교의 중심이 키예프를 벗어났고, 모스크바 공국이 융성함에 따라 ‘키예프 부주교좌’를 그곳으로 옮겨갔다. 둘째, 폴란드의 가톨릭이 강성해지자 루스 귀족들이 정교를 떠나 폴란드에 동화돼간 점이다. 그러자 정교와 루스의 언어는 어느덧 하층계급의 것으로 전락했다.

늘 득세하는 것은 러시아였다. 모스크바 공국은 1480년 킵차크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제3의 로마’가 될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다.

모스크바는 루스 땅을 둘러싸고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맞붙으면서 서서히 리투아니아의 영토를 도려내기 시작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1654년 페레야슬라프 보호 협정으로, 이 협정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것도 없다.

러시아사에서 이것은 금자탑으로 평가된다. 반면 우크라이나 역사가들은 이 협정이 당시 지도자 흐멜니츠키가 동맹들과 맺은 보호 약속 중 하나일 뿐이라고 본다.

흐멜니츠키는 모스크바의 고압적인 태도에 환멸을 느껴 스웨덴 등과 동맹하려 했지만, 그 전에 사망해버렸다.

역사적인 사실관계를 검증해볼 때 저자는 우크라이나의 해석이 맞는다고 본다.

우크라이나는 자치를 지키고자 모스크바의 보호를 요청한 것일 뿐이었다. 다만 사후 맥락에서 이 협정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병합되도록 한, 파멸의 첫 걸음임을 부정하기 힘들다. 모스크바는 이 협정 덕에 제국의 길을 밟아간다.

세계대전이 유린한 나라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오스트리아, 폴란드 등 수많은 국가가 탐을 냈던 땅이다. 18세기 말 폴란드가 분할되고 튀르크가 흑해 북안에서 물러난 뒤 일차대전까지 120년간 우크라이나 영토는 80퍼센트가 러시아 제국, 20퍼센트가 오스트리아 제국에 의해 지배된다.

1차대전이 터지자 유럽에서는 우크라이나만큼 심하게 유린당한 땅도 없었다.

전쟁 후에도 사방에서 침투하는 적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북쪽·동쪽은 볼셰비키 적군, 서쪽은 폴란드군, 동남쪽 돈강 방면은 반혁명의 백군, 서남쪽 드네스트르강 방면은 루마니아군, 남부 오데사 방면은 프랑스군이 간섭하고 있었다.

이처럼 1919년과 1920년의 우크라이나는 근대 유럽사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무질서한 내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1922년 소연방이 성립되면서 우크라이나는 70여 년간 연방의 한 부분이 된다. 그런 와중에 1929년 빈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이 결성돼 무력 투쟁을 벌인다. 폴란드로부터의 독립을 목표로 한 이 시도는 그러나 서광도 못 본 채 2차대전으로 빨려 들어간다.

2차대전에서 우크라이나는 인구의 6분의 1인 530만 명을 잃었다. 또 이 시기 소련 전체의 물질적 손해 중 40퍼센트가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했는데 이는 러시아, 독일, 프랑스, 폴란드 각각이 입은 것보다 더 큰 규모였다.

이후 거의 모든 우크라이나인의 거주 지역은 소연방 체제하에 우크라이나 공화국으로 합쳐졌다. 이것은 키예프 루스 붕괴 이후 우크라이나 역사상 첫 통합이었다.

소련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의 독립

1990년 3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의 의회인 ‘최고회의(라다)’의 선거가 이뤄졌다.

소련에서는 각 공화국을 어떻게든 연방의 틀 안에 묶어두고자 고르바초프가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독립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쿠데타 사건이었다.

쿠데타는 러시아 최고회의 의장 옐친의 용감한 저항으로 맥없이 실패한다. 이로써 주도권은 고르바초프에서 옐친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누가 봐도 소련은 지속될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

쿠데타 실패의 여세를 몰아 8월 24일 우크라이나 최고회의는 거의 만장일치로 독립 선언을 채택했고, 훗날 이날은 독립기념일이 된다.

폴란드, 헝가리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즉각 승인했다. 많은 우크라이나 이민자를 끌어안고 있던 캐나다도 신속히 승인했다. 미국은 12월 24일 승인했다.

우크라이나의 독립 선언은 20세기 들어 벌써 여섯 번째였다.

1918년 1월 키예프에서 중앙 라다의 ‘우크라이나 국민공화국’, 그해 11월 리비우에서 ‘서우크라이나 국민공화국’, 1919년 1월 키예프에서 디렉토리아 정부와 서우크라이나 정부가 합병한 ‘우크라이나 국민공화국’, 1939년 3월 후스트에서의 ‘카르파토 우크라이나 공화국’, 1941년 6월 리비우에서 OUN의 우크라이나 독립 선언에 이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전의 독립 선언은 다 오래 못 가거나 상징적인 행위에 불과했다. 반면 이번 독립은 통치능력을 가진 정부가 있고 우크라이나인이 거주하는 거의 전역을 포함하며 국제적으로도 승인된 후에 이뤄진, 영속의 개연성을 지닌 독립이었다.

우크라이나 속 유대인의 역사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살펴볼 때 유대인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다.

중세에 유대인들은 우크라이나에서 도시의 상인, 수공업자가 된 후 농촌에 진출하면서 귀족의 장원 관리인이 되었다.

다시 말해 유대인은 농민이 거둬들인 수익을 영주의 주머니에 넣어주는 역할을 했고, 이는 훗날 이 지역에서 유대인 대학살이 일어나는 간접적인 원인이 된다.

저자는 책에서 유대인의 폴란드·우크라이나 이주에 대해 상세히 다루는데, 그 이유는 18세기 말 폴란드 분할로 훗날 러시아가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대부분을 손에 넣으면서 그 땅의 유대인도 끌어안기 때문이다.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가노비치와 같은 유대인이 우크라이나 태생인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다. 또한 유대인 음악가 오이스트라흐, 밀슈타인, 길렐스, 작가 바벨 등도 이 나라 출신이다.

19세기 말에는 러시아 제국 내에 520만 명의 유대인이 거주했는데 이 중 200만 명이 우크라이나에 살았다. 유대인들은 대부분 도시민이어서 우크라이나 도시 인구의 53퍼센트 이상을 차지했다.

그렇다고 부자는 아니었지만, 가난한 우크라이나인 농민들에게는 유대인이 상인이나 고리대금업자로 비쳐 자신들을 착취하는 인종으로 적대시되기도 했다.

이차대전 때 우크라이나는 독일의 점령 아래 놓인 적이 있다. 이때 나치 독일의 식량과 노동력 공급원이 됐는데, 이 시기 독일은 우크라이나에서 85만~90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크라이나’라는 단어와 민족 자존심

‘우크라이나’라는 단어 자체는 우크라이나인의 자존심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여태껏 러시아사를 바탕으로 한 학설에서 우크라이나는 ‘변경邊境지대’를 뜻해왔다. 하지만 변경이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 봤을 때 그런 것일 뿐 현재는 ‘우크라이나’에 변경이란 뜻은 없고 ‘땅’이나 ‘나라’를 의미하는 단어였다는 설이 지지를 얻고 있다.

그러한 주장의 근거로는 『키예프 연대기』와 『할리치나-볼린 연대기』가 있다. 설령 변경이라는 의미의 단어에서 파생됐다 해도 모스크바 혹은 훗날 러시아 제국의 입장에서 본 변경의 의미는 아니었다. 12~13세기에는 모스크바 지방이 오히려 더 변경에 속했기 때문이다.

16세기에 ‘우크라이나’는 비로소 특정한 땅을 가리키게 된다. 즉 코사크의 대두와 함께 드네프르강 양안으로 펼쳐지는 코사크 지대를 일컫게 된 것이다. 19세기에 러시아 제국이 우크라이나 대부분을 지배하에 두자 ‘우크라이나’는 현재의 우크라이나 땅 전체를 가리키는 단어가 된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 제국은 우크라이나를 ‘소러시아’라 불렀다.

우크라이나는 영어로 Ukraine이고 현재의 국명도 관사 없이 Ukraine으로 쓴다. 관사를 붙여 the Ukraine이 되면 보통명사인 ‘변경지대’에 정관사를 붙여 쉽게 고유명사화한 가벼운 느낌이 들어서인지, 아니면 러시아의 변경지대로 얕보는 어감이 들어서인지 우크라이나 정부와 민족주의자들은 이 표기를 꺼린다.

참고로 우크라이나와 유럽, 미국의 학자가 저술한 우크라이나사는 ‘History of Ukraine’인 데 반해 러시아 관점에서 쓰인 우크라이나사는 ‘History of the Ukraine’로 표기돼 있다.

러시아 제국 내에서는 우크라이나어가 러시아어 방언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따라서 진실하고 고상한 것은 러시아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출판물도 흥미로운 소재는 러시아어로, 지루한 소재는 우크라이나어로 출판되었다. 그러나 1989년에는 ‘우크라이나 언어법’이 제정되었고 우크라이나어가 국어로 채택됐다.<출판사 제공>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88835293

Posted in종합

1979년 2월 17일, 덩샤오핑 베트남에 선전포코를 하다.

 1979년 2월 17일, 덩샤오핑 베트남에 선전포코를 하다. “동맹국 캄보디아 침공과 베트남 내의 중국계 화교 추방”을 이유로 선전포고를 한다.  3월 6일 “베트남에 군사적 징벌 완료”라는 선언과 함께 중국군의 철수를 명령했다. 이후 양국은 1990년 9월 청두에서 비밀 정상회담을 가졌고, 1991년 11월 공식적으로 정상화했다.  마침내 베트남은 중국과의 전쟁에서 실질적으로 승리했다.

이 전쟁은 베트남과 중국의 전쟁사에 일부일뿐이다. 진시황 이후 중국을 통일한 역대 왕조들은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베트남을 침략했다. 이로 인해 1천 년간 식민 지배를 받았던 베트남은 서기 938년에 독립을 쟁취했다. 다시 1천 년간  송나라, 몽골, 명나라, 그리고 청나라와 지속적인 전쟁을 치러야 했다. 베트남의 역사는 중국의 침략에 맞선 투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Posted in기업과 경영

디즈니 CEO 로버트 아이거

월트디즈니컴퍼니 회장.

1951년 뉴욕에서 태어나 1974년 ABC TV 스튜디오에 말단의 제작보조로 입사했다.

ABC스포츠 등에서 활약하며 승진을 거듭해 41세에 ABC 사장으로 취임했다.

1996년 ABC가 디즈니에 인수합병된 후, 디즈니 소유 ABC 그룹 회장으로 디즈니 고위경영진에 합류했다. 1999년부터는 월트디즈니인터내셔널 회장직까지 수행하며 오늘날의 글로벌 디즈니를 위한 청사진을 마련했다.

2005년부터 2020년 연초까지 15년간 CEO로 역임했고, 2012년부터 지금까지 회장으로 재임 중이다. 2019년 〈타임〉 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올해의 경영자’로 선정되었다

저서 소개_디즈니만이 하는 것 The Ride of a Lifetime

픽사, 마블, 스타워즈, 21세기폭스…

이들은 왜 모두 디즈니 은하계로 모여들었나?

디즈니 CEO가 직접 쓴 디즈니의 제국의 비밀

미키 마우스부터 어벤져스까지 전 세계가 사랑하는 콘텐츠, 기술, 창의성의 제국 월트디즈니컴퍼니를 지난 15년간 이끌어온 로버트 아이거 회장이 직접 쓴 최초이자 유일한 책이다.

2005년 마이클 아이즈너의 뒤를 이어 디즈니의 6번째 CEO가 된 그는 픽사, 마블, 루카스필름, 21세기폭스 같은 콘텐츠 거물들을 차례로 디즈니 은하계로 끌어들였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대규모 인수합병을 통해 그야말로 ‘우주 최고의 미디어 제국’을 완성한 것이다.

전통 미디어 기업들의 침몰 속에서 독보적 반전을 이뤄낸 디즈니는 세계 경영의 역사상 가장 극적인 브랜드 부활의 사례로 꼽힌다.

100년 된 브랜드를 지키면서도 새로운 변화를 주도하는 이 놀라운 회사, ‘디즈니만이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비밀을 공개한다.

사상 최고 실적 내며 디즈니의 부활과 도약을 이끈

CEO 밥 아이거가 직접 쓴 최초이자 유일한 책!

시가총액 300조 원, 세계 1위 미디어 그룹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디즈니는 지난해 역대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부터 ‘겨울왕국2’까지 2019년 전 세계 흥행 톱 10 중 7편이 디즈니 작품이었고, 그 7편이 거둔 수익 총액은 11조 원을 훌쩍 넘겼다.

영화뿐만이 아니다. 넷플릭스 대항마로 출시한 디즈니 플러스는 첫날 가입자수 1,000만 명을 돌파했고, 5개월 만에 5,000만을 넘겼다.

디즈니의 훌루, ESPN까지 합치면 넷플릿스의 절반에 가까운 가입자를 놀라운 속도로 확보한 셈이다.

1923년 창업해 100년을 바라보는 노장 기업 디즈니, 이 회사는 대체 어떤 마법을 부리는 걸까? 미키 마우스부터 겨울왕국까지, 픽사, 스타워즈, 어벤져스를 아우르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전 세계가 사랑하는 콘텐츠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비결이 뭘까?

이 책은 월트디즈니컴퍼니를 지난 15년간 이끌어온 로버트 아이거 회장이 직접 쓴 최초이자 유일한 책으로 이미 미국, 일본을 비롯해 전 세계 주요 국가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전통 미디어 기업들의 집단 침몰 속에서 이뤄낸 독보적 반전

세계 경영의 역사상 가장 극적인 브랜드 부활 사례

디즈니가 늘 이렇게 잘해온 것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CEO가 되어 침체의 나락으로 떨어져가던 디즈니를 부활시키고 사상 최고의 실적을 낸 경영자, 바로 로버트 아이거 회장이 그 중심에 있었다.

2005년 마이클 아이즈너의 뒤를 이어 디즈니의 6번째 CEO가 된 그는 픽사, 마블, 루카스필름, 21세기폭스 같은 콘텐츠 거물들을 차례로 디즈니 은하계로 끌어들였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대규모 인수합병을 통해 그야말로 ‘우주 최고의 미디어 제국’을 만든 것이다. 전통 미디어 기업들의 집단 침몰 속에서 독보적 반전을 이뤄낸 디즈니는 세계 경영의 역사상 가장 극적인 브랜드 부활의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밥 아이거는 1951년 뉴욕 롱아일랜드의 노동자 동네에서 나고 자랐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주말에는 늘 피자헛에서 피자를 굽던 평범한 청년은 대학 졸업 후 지역 케이블 방송국에서 기상캐스터로 일하다 우연한 기회에 ABC 방송국에 입사한다.

드라마 제작부의 말단 연출보조였다. 일일연속극 스튜디오의 막내로 수모도 겪고 보람도 느끼며 현장에서 경력을 쌓은 그는, ABC스포츠로 옮겨 승진을 거듭해 41세에 ABC 사장으로 취임한다.

ABC 사장이 된 그는 모두가 반대하던 ‘트윈 픽스’를 밀어붙여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기도 했고, ‘천재소년 두기’, ‘뉴욕경찰 24시’ 등 당시 공중파 방송사들이 감히 도전하지 않은 화제작을 만들어 ABC를 시청률 1위에 올려놓았다.

할리우드 스타일을 전혀 모르는, 뉴욕에서 온 ‘양복쟁이’인 그가 ABC 사장이 되었을 때만 해도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이후 ABC가 디즈니에 인수된 후에도 그는 계속 도전적인 커리어를 쌓아나갔고 결국 디즈니의 CEO가 된다. 이 책은 화려한 겉치장이 넘쳐나는 미디어 업계에서 고결함과 진정성을 중시하는 디즈니만의 조직문화, 혁신전략, 미래 청사진을 어떻게 그려왔는지 밝히고 있다.

전 세계가 사랑하는 콘텐츠는 어떻게 만들어지나?

픽사, 마블, 스타워즈, 21세기폭스…

“디즈니 은하계에는 그가 있었다!”

이 책에서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2020년까지 45년간 20가지 직무, 14명의 직속상사를 만나 경험한 이야기들을 통해 콘텐츠, 미디어 업계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보여준다.

그 생생한 사례로 디즈니가 왜 픽사, 마블, 루카스필름, 21세기폭스 등 사상 유래가 없는 대규모 인수합병을 추진했는지, 그 배경과 거래의 자세한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지난 15년간 올드 미디어가 쇠락하고 모바일이 부상하는 업계의 지각변동 속에서 밥 아이거가 미디어, 엔터테인먼트의 미래를 설계하며 디즈니를 이끌어온 3가지 원칙도 밝혔다.

그가 진두지휘한 역대급 인수합병들이 모두 그 원칙에서 태동했다는 것이다.

제품에 관해서든, 인재에 관해서든 내부적으로 그가 중시한 것은 고결함과 진정성이라는 키워드였다.

밥 아이거는 ‘정치적으로 바람직하거나 상업적으로 바람직한 결정이 아닌, 그냥 올바른 결정’에만 집중했다고 말한다.

다소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인 말로 들리지만, 결국 그의 진정성은 스티브 잡스의 마음을 흔들고, 아이크 펄머터에게 확신을 주었으며, 조지 루카스를 설득했다.

그것이 결국 ‘디즈니만의 하는 것’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이 책에서 훌루, 뱀테크, 디즈니 플러스 등 디즈니의 미래전략까지 허심탄회하게 밝혔다.

스티브 잡스와의 특별한 우정, 아이크 펄머터, 루퍼트 머독 등 미디어 업계의 거인들과 나눈 거래 뒷이야기도 흥미롭다.

“나는 늘 팔려 다녔다.”는 그의 농담처럼, 늘 인수당하는 회사 출신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어쩌면 비주류로 성공한 사상 최초의 CEO인 그 자신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하다.

그는 이 책에서 한결같이 “만약 당신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비즈니스에 몸담고 있다면, 그것을 최고로 위대하게 만들어라.”라고 강조한다.

탁월함excellence과 공정함fairness이 양립할 수 있는 가치임을 증명한 리더십의 모범, 품위 있는 승리를 거머쥔 의사결정의 모범을 보여준다.

이것은 독특한 개성을 가진 여러 회사들을 하나의 은하계로 끌어당겨 각자가 더욱 화려하게 꽃피울 수 있도록 만든 그만의 특별한 노하우다.

이것 역시 ‘디즈니만이 하는 것’의 본질일 것이다. 이 책은 출간 즉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분야)에 올랐고, 스티븐 스필버그, 브렌 브라운 등이 추천했다. <출판사 제공>

관련 책 소개

[10줄서평]로버트 아이거의 ‘디즈니만이 하는 것’

게임회사 넥슨 김정주창업자는 디즈니를 부러워하고 그런 브랜드를 갖고 싶어했습니다.

게임회사는 게이머에게 사랑받지만, 청소년 자녀를 둔 부모와 정치인으로부터 지탄을 받기 싶습니다.

디즈니는 볼거리와 놀거리를 제공하면서 막대한 돈을 벌면서도 나이, 인종, 국경을 넘어 보편적인 사랑을 받습니다.

디즈니의 사랑받는 브랜드는 그저 얻은 것이 아닙니다. 순혈주의를 버리고 픽사,마블,루카스 등 독립브랜드를 과감하게 인수하여 디즈니 DNA와 결합시켰던 도전의 결실입니다.

그 중심에 로버트 아이거라는 탁월한 경영자가 있었습니다. 아이거는 15년동안 디즈니를 이끌었던 경영 경험을 ‘디즈니만이 하는 것’(원제 The Ride of Lifetime)에 담았습니다.

전체 내용중에서 픽사인수 과정에서 벌어졌던 드라머틱한 스토리를 요약했습니다.

10줄요약_9장 디즈니-픽사, 새로운 길을 열다 편

1. (첫 이사회)1주일 전, 나는 톰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픽사를 매입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나?” 처음에 톰은 내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단 스티브가 픽사를 우리에게 넘길 리가 없어요. 설령 넘긴다 하더라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가격표가 붙지는 않을 겁니다. 이사회에서 승인받을 수 있는 금액이 아닐 거란 얘기죠.”

2.(첫 이사회에서)마이클의 초기 10여 년 동안 대성공을 거두었던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언킹’의 캐릭터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토이 스토리’, ‘몬스터 주식회사’, ‘니모를 찾아서’ 등 픽사의 영화 캐릭터들이 탄 마차가 뒤를 이었다. 내가 톰과 딕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 퍼레이드를 보면서 혹시 떠오르는 게 없나요?” 두 사람 다 아무런 눈치도 못 챈 듯했다. “지난 10년 동안에는 디즈니에서 만든 캐릭터가 거의 없군요.” 내가 말했다.

3.“과거에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애니메이션과 관련해 과거의 잘못된 의사결정과 이미 출시된 실망스러운 작품들에 대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미래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합니다. 그런 일을 지금 당장 시작해야만 합니다.” 나는 이어서 “애니메이션의 성패에 회사의 명운이 달렸다.”고 강조했다.

4.내가 말했다. “우리가 픽사를 인수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픽사의 인수는 곧 스티브 잡스를 포함해 존 래시터John Lasseter와 에드 캣멀Ed Catmull이라는 선견지명이 있는 리더들을 디즈니로 영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말했다.

“그들이 계속 픽사를 운영하면서 동시에 디즈니애니메이션도 회생시킬 수 있을 겁니다.”

5.(스티브 잡스에게 전화를 걸어)“두 회사의 미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에요, 디즈니에서 픽사를 인수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나는 수화기를 든 채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가 대답하기 전에 흐르던 잠깐 동안의 침묵이 나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의외의 반응이 돌아왔다. “글쎄요, 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아이디어는 아닌 것 같군요.”

6.(스티브와의 협상테이블에서) “픽사가 디즈니를 구할 것이고 그 후로 모두 행복하게 살게 된다.”

동화의 해피엔딩 문구를 차용한 그 말에 스티브는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화이트보드에 적지는 않았다.

“무슨 의미죠?”

“견실한 장점 한두 가지가 수십 가지 단점보다 강력한 법이지요.”

스티브가 말했다. “자, 이제 무슨 일을 하면 좋을까요?” 스티브는 쟁점의 모든 측면을 살펴볼 때 부정적인 측면이 긍정적인 측면을 상쇄하지 않도록 균등하게 평가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7.픽사 인수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나로서는 그들이 일하는 방식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알아야만 했다.

핵심인물들을 만나보고 싶었고, 진행 중인 프로젝트들에 대해 알고 싶었으며, 그들의 기업문화를 엿보고 싶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느낌은 어떠한가? 계속해서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그들의 방식은 디즈니와 어떻게 다른가?

8.나는 에머리빌에 위치한 픽사를 방문해 에드 캣멀을 비롯한 기술 부문 엔지니어들과 몇 시간을 함께 보냈다.

나는 그들의 재능과 창의적 열정의 수준, 품질에 대한 헌신, 스토리텔링의 독창성, 기술적 진보, 리더십 구조, 열정적인 협업 분위기, 심지어 픽사 본사 건물의 건축양식 등에 감명을 받았다.

창의성이 필요한 비즈니스뿐 아니라 어떤 종류의 비즈니스를 하든 누구나 열망할 만한 기업문화였다.

픽사는 디즈니보다 훨씬 앞서나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디즈니가 독자적으로 성취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9.픽사에 대한 나의 직감은 강력했다. 픽사 인수로 디즈니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픽사 인수는 디즈니애니메이션을 개혁할 뿐 아니라 디즈니 이사회에 스티브 잡스까지 안겨줄 것이다. 그는 분명 기술적 문제에 관한 한 가장 강력한 발언자가 될 것이다.

10.디즈니의 픽사 인수는 태평양 표준시로 2006년 1월 24일 오후 1시 5분에 공식발표되었다. 스티브와 나는 기자회견을 마친 다음 픽사의 동굴 같은 아트리움의 연단에 나란히 섰다. 존과 에드도 우리 옆에 자리했다. 앞에는 거의 1,000명에 달하는 픽사의 임직원들이 서 있었다.

내가 발언하기에 앞서 누군가 룩소 전등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즉흥적으로 임직원들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디즈니의 성을 밝히는 데 그 전등을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룩소 전등은 지금까지 그렇게 사용되고 있다.

Posted in10줄서평

[10줄서평]로버트 아이거의 ‘디즈니만이 하는 것’

게임회사 넥슨 김정주창업자는 디즈니를 부러워하고 그런 브랜드를 갖고 싶어했습니다.

게임회사는 게이머에게 사랑받지만, 청소년 자녀를 둔 부모와 정치인으로부터 지탄을 받기 싶습니다.

디즈니는 볼거리와 놀거리를 제공하면서 막대한 돈을 벌면서도 나이, 인종, 국경을 넘어 보편적인 사랑을 받습니다.

디즈니의 사랑받는 브랜드는 그저 얻은 것이 아닙니다. 순혈주의를 버리고 픽사,마블,루카스 등 독립브랜드를 과감하게 인수하여 디즈니 DNA와 결합시켰던 도전의 결실입니다.

그 중심에 로버트 아이거라는 탁월한 경영자가 있었습니다. 아이거는 15년동안 디즈니를 이끌었던 경영 경험을 ‘디즈니만이 하는 것’(원제 The Ride of Lifetime)에 담았습니다.

전체 내용중에서 픽사인수 과정에서 벌어졌던 드라머틱한 스토리를 요약했습니다.

10줄요약_9장 디즈니-픽사, 새로운 길을 열다 편

1. (첫 이사회)1주일 전, 나는 톰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픽사를 매입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나?” 처음에 톰은 내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단 스티브가 픽사를 우리에게 넘길 리가 없어요. 설령 넘긴다 하더라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가격표가 붙지는 않을 겁니다. 이사회에서 승인받을 수 있는 금액이 아닐 거란 얘기죠.”

2.(첫 이사회에서)마이클의 초기 10여 년 동안 대성공을 거두었던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언킹’의 캐릭터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토이 스토리’, ‘몬스터 주식회사’, ‘니모를 찾아서’ 등 픽사의 영화 캐릭터들이 탄 마차가 뒤를 이었다. 내가 톰과 딕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 퍼레이드를 보면서 혹시 떠오르는 게 없나요?” 두 사람 다 아무런 눈치도 못 챈 듯했다. “지난 10년 동안에는 디즈니에서 만든 캐릭터가 거의 없군요.” 내가 말했다.

3.“과거에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애니메이션과 관련해 과거의 잘못된 의사결정과 이미 출시된 실망스러운 작품들에 대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미래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합니다. 그런 일을 지금 당장 시작해야만 합니다.” 나는 이어서 “애니메이션의 성패에 회사의 명운이 달렸다.”고 강조했다.

4.내가 말했다. “우리가 픽사를 인수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픽사의 인수는 곧 스티브 잡스를 포함해 존 래시터John Lasseter와 에드 캣멀Ed Catmull이라는 선견지명이 있는 리더들을 디즈니로 영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말했다.

“그들이 계속 픽사를 운영하면서 동시에 디즈니애니메이션도 회생시킬 수 있을 겁니다.”

5.(스티브 잡스에게 전화를 걸어)“두 회사의 미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에요, 디즈니에서 픽사를 인수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나는 수화기를 든 채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가 대답하기 전에 흐르던 잠깐 동안의 침묵이 나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의외의 반응이 돌아왔다. “글쎄요, 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아이디어는 아닌 것 같군요.”

6.(스티브와의 협상테이블에서) “픽사가 디즈니를 구할 것이고 그 후로 모두 행복하게 살게 된다.”

동화의 해피엔딩 문구를 차용한 그 말에 스티브는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화이트보드에 적지는 않았다.

“무슨 의미죠?”

“견실한 장점 한두 가지가 수십 가지 단점보다 강력한 법이지요.”

스티브가 말했다. “자, 이제 무슨 일을 하면 좋을까요?” 스티브는 쟁점의 모든 측면을 살펴볼 때 부정적인 측면이 긍정적인 측면을 상쇄하지 않도록 균등하게 평가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7.픽사 인수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나로서는 그들이 일하는 방식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알아야만 했다.

핵심인물들을 만나보고 싶었고, 진행 중인 프로젝트들에 대해 알고 싶었으며, 그들의 기업문화를 엿보고 싶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느낌은 어떠한가? 계속해서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그들의 방식은 디즈니와 어떻게 다른가?

8.나는 에머리빌에 위치한 픽사를 방문해 에드 캣멀을 비롯한 기술 부문 엔지니어들과 몇 시간을 함께 보냈다.

나는 그들의 재능과 창의적 열정의 수준, 품질에 대한 헌신, 스토리텔링의 독창성, 기술적 진보, 리더십 구조, 열정적인 협업 분위기, 심지어 픽사 본사 건물의 건축양식 등에 감명을 받았다.

창의성이 필요한 비즈니스뿐 아니라 어떤 종류의 비즈니스를 하든 누구나 열망할 만한 기업문화였다.

픽사는 디즈니보다 훨씬 앞서나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디즈니가 독자적으로 성취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9.픽사에 대한 나의 직감은 강력했다. 픽사 인수로 디즈니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픽사 인수는 디즈니애니메이션을 개혁할 뿐 아니라 디즈니 이사회에 스티브 잡스까지 안겨줄 것이다. 그는 분명 기술적 문제에 관한 한 가장 강력한 발언자가 될 것이다.

10.디즈니의 픽사 인수는 태평양 표준시로 2006년 1월 24일 오후 1시 5분에 공식발표되었다. 스티브와 나는 기자회견을 마친 다음 픽사의 동굴 같은 아트리움의 연단에 나란히 섰다. 존과 에드도 우리 옆에 자리했다. 앞에는 거의 1,000명에 달하는 픽사의 임직원들이 서 있었다.

내가 발언하기에 앞서 누군가 룩소 전등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즉흥적으로 임직원들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디즈니의 성을 밝히는 데 그 전등을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룩소 전등은 지금까지 그렇게 사용되고 있다.

Posted in히스토리텔러

[히스토리텔러] 한국 근대 연구가 이승렬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시민의 역사교육을 위한 강연 및 교재 편찬을 기획했다.

주요 연구 주제는 한말과 일제시기 부르주아지 형성과 관련된 사회경제와 식민정책이었다.

저서로는 근대 이행의 상인적 기원을 검토한 <제국과 상인>(2007)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강제병합 100년과 성장의 공공성>(2010) 외 다수가 있다.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대림대학교 교수 등으로 활동했다.

최근작 : <근대 시민의 형성과 대한민국>,<제국과 상인>

책소개_근대시민의 형성과 대한민국

역사는, 분열될 때 반동화되었고 통합될 때 진보했다.

“진정한 탐험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여행하는 것”이라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명언에 따르면, ‘진정한 역사 탐험은 새로운 눈을 가질 때 가능할 것’이다.

이 책은 식민주의와 민족주의라는 풍경을 넘어서서 자유주의와 의회주의라는 ‘눈’을 통해 한국근대사를 재조명했다.

한국 근대사는 식민지, 분단, 전쟁이라는 난관을 넘어왔다. 큰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 내부의 사정을 고려한 내재적 시각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국제질서의 변동을 고려한 외재적 관점 역시 중요하다.

양자의 균형이 상실되면 역사이해의 적절한 포인트를 잡기가 어렵다.

근대문명의 이식과 교류하는 관점을 가진 식민주의가 조선의 정체성 혹은 식민지근대성이라는 우상을 만들었다면, 항일무장투쟁을 신성시하는 민족주의는 이상적인 도덕적 기준을 가진 민족주의와 분단의 원인은 외세이고 친일세력이라는 우상을 만들었다.

식민주의는 조선의 정체성을 과장하고, 다양한 근대문명의 수용 루트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로지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이식을 강조한다.

이른바 ‘비타협적 운동’을 전개한 급진적 민족주의는 자신의 헤게모니를 강화하기 위해 국민적 혹은 세력의 분열을 마다하지 않았다.

분단의 고착화와 전쟁의 발발은 민족주의의 분열 때문이었다. 사회주의 이념이 들어오면서 민족주의는 이념적 분열이 일어났고, 점점 더 그 양상은 심각해졌다.

우리 손으로 해방을 쟁취하지 못한 우리는 이러한 불편한 사실을 외면한다. 부분적으로 타협적인 온건한 민족주의는 국제질서를 의식하면서 민족주의의 협력을 모색했지만 결국 내적 또는 외적 장애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타협과 통합을 통해 3·1운동을 주도했고 분단국가 대한민국 발전의 토대를 놓았다.

개항 이후 농업관료제로부터 자유로운 호남지역의 진취적 지주는 온건한 민족주의를 추동했다.

그들은 조선왕조의 엘리트인 기호지역의 관료적 지주들이 식민지 지배체제 내로 편입될 때 실질적으로 한국의 근대화를 담당하는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독립적인 부르주아지로 성장했다.

근대화에 성공해서 제국주의가 된 일본의 상층 지주가 군국주의의 부속물이 되었다면,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의 상층 지주는 영국의 부르주아지와 유사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상층 지주(와 관련된 상업적 농업)의 역할과 관련하여 유럽·중국·일본과의 비교를 통해 한국의 사례가 갖는 의미를 밝혔다.

온건주의를 추동한 또 하나의 힘은 개항 이후 들어온 기독교였다. 고종은 기독교가 들어오는 문을 열었고, 대한제국의 국권이 흔들리는 과정에서 기독교 신자가 증가했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기독교(개신교)가 가장 빠르게 확산된 지역이었다.

자연스럽게 기독교 민족주의는 항일운동의 주요한 구심점이 되었다. 호남의 지주와 기독교 세력은 천도교 세력과 협력하여 3·1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러한 시민적 민족주의는 제헌헌법 그리고 농지개혁에서 다시 잠재력을 발휘했고, 이승만정권이 독재에 대항하는 반독재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이들은 급진적 민족주의자들과 달리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합의된 사항을 이용하면서 통일국가를 수립하려고 했다. 비타협적이었던 급진주의적 민족주의는 반동적 결과를 가져왔다면, 온건주의가 사회의 진보를 이끈 것은 한국근대사의 숨겨진 사실이다.

우리는 갈수록 심화되는 작금의 역사인식의 분열 속에서 두 개의 우상을 옆으로 치우면 실질적으로 한국근대사를 지탱한 감춰진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독자는 한국 역사의 진정한 탐험을 위한 새로운 눈을 발견할 것이다.

이 밖에도 독자들은 이 책에서 우리 역사를 새롭게 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첫째, 유럽·중국·일본과의 비교를 통해 농업관료제와 관료적 상업체제 위에서 운영된 조선왕조의 장기지속의 배경과 원인이다. 낮은 세금과 적은 군사력으로 안정적인 대외관계를 유지하면서 조선왕조는 500년 이상을 유지했다.

둘째, 재조명된 민족운동의 타협 대 비타협의 구도다. 궁극적으로 분리와 독립을 지향하는 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은 국제질서의 변동에 유의하면서 독립을 준비했고, 현실은 그들이 희망대로 진행되었다. 그들은 전체주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의회주의와 공화주의를 견지했다.

셋째, 통일민족국가의 실현에 관한 것이다. 모스크바삼상회의의 합의를 실행한 세력은 이른바 상층 지주가 많았던 온건한 민족주의 정당인 한민당이었다. 신탁통치를 거부하고 미소공위를 실질적으로 파탄시키면서 당장의 독립을 외친 급진적 민족주의는 분열과 분단의 길, 나아가 전쟁의 길을 열었다.

넷째, 사회가 통합될 때 국가와 사회는 발전했고, 분열될 때 반동적 세력이 득세했다. 제헌헌법과 농지개혁에서 구현된 통합적이고 다원적이며 포용적인 제도는 대한민국이 장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였다.

북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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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텔러]법률에서 역사연구로 이석연

이석연 소개

‘여행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다.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와 어떻게 가느냐가 중요하다.’

저자의 여행관이다. 그간 일본 120여회, 중국 40여회를 비롯하여 세계 각처를 여행했다. 단체여행이나 패키지여행은 한 적이 없다.

‘나만의 방식으로 내가 주체가 되는 여행’을 했다. 독서와 여행을 통해 삶을 통찰하고 역사의 교훈을 되짚어 보겠다는 젊은 날의 꿈을 그는 죽는 날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간다’는 그의 삶의 모토다.

1954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중학 졸업 6개월 만에 고졸 학력검정고시에 합격한 후 곧 금산사(심원암)에 들어가 2년간 500여권의 책을 읽었다.

전북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 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행정고시(23회)와 사법시험 (27회)에 합격하고 20여년간 공직에 몸담았다. 그사이 육군 정훈장교로 3년간 전방 철책부대 등에서 군 복무를 했다.

감사원 부정방지대책위원장과 법제처장(제28대)을 역임했고, 경실련 사무총장으로서 시민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자타가 인정하는 독서광(chain-reader)인 그는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책, 인생을 사로잡다>, <여행, 인생을 유혹하다>, <사마천 사기 산책>과 최근에 출간되어 화제가 된 <누구나 인생을 알지만 누구도 인생을 모른다>, <헌법은 상식이다> 등 20여권의 저서를 냈다.

최근작 : <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역사는 앞으로만 나아가지 않는다>,<누구나 인생을 알지만 누구도 인생을 모른다> … 총 28종

책소개_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우리가 알고 있는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역사는 모두 지우자

『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은 『삼국사기』가 기록하지 않은 고구려의 미발굴 역사를 담고 있다.

고구려 최전성기인 광개토왕과 장수왕 시대를 관통하는 새로운 역사이다.

헌법학자 이석연 변호사(前 법제처장)와 역사칼럼리스트 정재수 작가가 공저하였다.

저자는 감히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역사는 모두 지우자.”고 말한다. 기존의 역사상식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말 그대로 새로운 역사의 총람이다.

책은 일제강점기 남당 박창화 선생이 일본 왕실도서관(서릉부)에서 필사해온 『고구려사략』의 방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아울러 삼국사기를 비롯한 기존의 중국과 일본의 관련 사서도 모두 참조 반영하였다. 또한 공저자 이석연은 중국 집안의 광개토태왕릉비를 비롯한 관련 유적지와 유물을 찾아 수차례에 걸쳐 곳곳을 답사하였다.

『고구려사략』은 『삼국사기』가 기록으로만 전한 고구려 역사서 『유기』로 추정되는 문헌이다. 광개토왕기록은 〈국강호태왕기〉와 〈영락대제기〉이며, 장수왕기록은 〈장수대제기〉이다.

『고구려사략』에는 『삼국사기』가 일체 기록하지 않은 《광개토왕릉비》 비문의 8개 정복사업 기록이 모두 나온다. 어느 경우는 비문 기록보다 상세하며 참전 장수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거명한다.

특히 『고구려사략』 문헌 기록과의 비교를 통해 《광개토왕릉비》 비문 글자의 판독 오류를 정정하고 상당수 결자를 복원한다.

장수왕의 경우, 『고구려사략』 기록의 분량은 『삼국사기』의 8배에 달한다. 실로 방대한 역사 기록이다. 특히 『삼국사기』가 중원왕조 조공기록(47회)에 치중한 반면, 『고구려사략』은 주로 래조기록을 적고 있다.

래조는 상대국의 사신이 고구려에 파견되어 공물을 바치는 행위이다. 모두 65회가 나온다. 대상은 중원왕조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백제, 신라, 가야 그리고 멀리 일본열도의 왜도 고구려 장수왕에게 공물을 바친다.

이번에 국내 최초로 ‘태왕차자릉 판석’을 공개한다. 판석은 길림성 집안의 고구려무덤떼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판석 앞면에는 4행 3열로 모두 12자 명문이 새겨 있다.

「願太王次子陵安如川固如岳」이다. 이는 태왕릉 출토 벽돌 측면의 10자 명문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과 직접적으로 비교된다.

‘태왕릉-안여산’ 조합이 ‘태왕차자릉-안여천’으로 대체될 뿐 내용은 동일하다. 특히 판석 명문 글씨체는 벽돌 명문 글씨체와 똑같다.

모두 《광개토왕릉비》의 비문 글씨체인 웅위한 고구려체이다. 태왕차자릉의 주인공인 태왕차자는 『고구려사략』에 명확히 나온다. 광개토왕 담덕(談德)의 동생인 용덕(勇德)이다. 용덕은 장수왕의 실제 생부이다.

태왕차자릉 판석은 장수왕의 출생 비밀을 담고 있는 정체성의 유물이다.

책은 크게 광개토왕과 장수왕 부문으로 나눈다. 정복군주 광개토왕과 수성군주 장수왕이다. 광개토왕은 《광개토왕릉비》의 새로운 해석에 기반한 정복사업과 관련 유물 유적이며, 장수왕은 다양한 외교에 기반한 수성사업과 관련 유물 유적이다.

특히 책은 『고구려사략』의 장례 기록에 근거하여 길림성 집안의 고구려무덤떼 왕릉급 무덤의 주인공들을 모두 특정하고 있다. 이름이 확인된 20여 명의 왕족과 척족 그리고 일부 귀족이 그 대상이다. 참으로 큰 수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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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러]태도에 대하여 임경선

소설과 에세이, 독립출판물을 비롯해 다수의 책을 내며 삶과 인간관계, 일과 사랑에 관한 다양한 글쓰기를 보여준 작가 임경선.

임작가는 〈유희열의 라디오천국〉 ‘캣우먼의 헉소리 상담소’, 한겨레 esc 〈이기적인 상담실〉, 메트로신문 〈캣우먼〉, 네이버 오디오클립 〈개인주의 인생상담〉 등을 통해 15년간 타인의 인생 상담을 하고 있다.

임작가는 또 『가만히 부르는 이름』 『곁에 남아 있는 사람』 등 소설집을 출간했다.

이밖에 『나의 남자』, 『기억해줘』,『어떤 날 그녀들이』, 산문『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다정한 구원』, 『태도에 관하여』,『교토에 다녀왔습니다』 『자유로울 것』, 『어디까지나 개인적인』,『나라는 여자』,『엄마와 연애할 때』등을 썼다.

책소개_태도에 대하여

나는 그사이 뭔가가 변했을까? 개정판 작업을 하느라 《태도에 관하여》를 촘촘히 다시 읽어보니 언뜻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분명히 어떤 부분들에 조금은 더 초연해졌겠지. 나는 내 안에 결코 변하지 않을 것들도, 변해야 마땅한 것들도 양쪽 팔로 같이 안아주며 살고 싶다. -‘들어가는 글’에서

“당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도는 무엇입니까?”

작가 임경선의 대표작 《태도에 관하여》 개정판 출간

2015년 봄 《태도에 관하여》가 출간되고 어느덧 3년여가 지났다. 그 시간 동안 거의 매달 다음 쇄를 찍으며 13만 독자들의 지속적이고 자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작가가 말하는 ‘나를 살아가게 하는 다섯 가지 태도’는 ‘살아가는 방식’과 ‘가치관의 문제’로 고민하던 남녀 모두의 지표가 되어주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우리가 외면하고 있던 ‘나’를 돌아보게 해주었다. 초판 당시 수술을 받고 입원 중에 책을 마무리해야 했던 작가는 이번 개정판 작업에서는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시간을 겪으면서 원고를 촘촘히 다시 읽으며 글을 더하고, 문장을 고쳤다.

책은 이번 개정판을 선보이며 여러 변화를 꾀했다. 먼저, 책 뒷부분에 실렸던 정신과 전문의와의 ‘대담’ 대신 ‘어떤 태도를 가질 때 내가 가장 충만한가’라는 글이 자리했고, 4부 성실함에는 ‘사랑에 성실하다는 것’이, 5부 공정함에는 ‘리더십의 어려움’이 더해져 좀 더 솔직하고 내밀한 작가의 입장과 태도에 대한 이야기가 드러나게 했다.

또한, ‘개정판에 덧붙여 1, 2’에서는 ‘현실 생활에서의 평등’을 읽고 공감한 독자들이 궁금해했을 그로부터 3년 후의 모습이 ‘현실 생활에서의 평등, 그 이후’라는 제목으로 생생히 실렸고, ‘슬픔의 공동체’에서는 가족의 나이 듦과 질병, 죽음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작가의 일상이 자세하면서도 담담히 서술되었다.

출간 당시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표지는 북디자이너 이기준의 작업으로 좀 더 선명한 색감과 형태의 새 옷을 입었다.

3년 사이 작가는, 그리고 책을 읽었던 우리는, 그리고 우리가 안고 있던 태도들은 얼마나 변했을까?

작가는 말한다. “내 안에 결코 변하지 않을 것들도, 변해야 마땅한 것들도 양쪽 팔로 같이 안아주며 살고 싶다”라고. 다시 《태도에 관하여》를 읽는 경험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을, 혹은 변했을 ‘나’의 태도들을 바라보게 해줄 또 하나의 특별한 독서 경험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나를 살아가게 하는 다섯 가지 중요한 가치들

소설과 에세이, 독립출판물을 비롯해 다수의 책을 내며 삶과 인간관계, 일과 사랑에 관한 다양한 글쓰기를 보여준 작가 임경선.

《태도에 관하여》는 〈유희열의 라디오천국〉 ‘캣우먼의 헉소리 상담소’, 한겨레 esc 〈이기적인 상담실〉, 메트로신문 〈캣우먼〉, 네이버 오디오클립 〈개인주의 인생상담〉 등을 통해 15년간 타인의 인생 상담을 해온 작가가, 글과 말을 통해 자신이 전달하고자 했던 인생의 핵심 가치들을 총정리한 에세이다.

작가의 정의에 따르면 《태도에 관하여》에서의 ‘태도(attitude)’는 ‘어떻게’라는 살아가는 방식과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의 문제이자, 그 사람을 가장 그 사람답게 만드는 고유 자산이다.

자발성, 관대함, 정직함, 성실함, 공정함이라는 다섯 가지의 태도의 틀을 통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삶의 문제들을 통찰하고 접근해나가지만, 일방적인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독자들에게 ‘그렇다면 당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태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독자 스스로의 기준을 통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걸어나갈 수 있게 도와주고자 한다.

일은 성실하게, 사랑은 관대하게,

인간관계는 정직하게, 세상과의 관계는 공정하게!

사랑에는 철벽을 치거나 가혹해지고, 일에 관해서는 변명을 허락하고, 인간관계는 타인에게 휩쓸리기만 하고, 세상의 법칙에는 짓눌리고야 마는 현대인들에게, 작가는 ‘사랑은 관대하게, 일은 성실하게, 인간관계는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정직하게, 세상과의 관계는 공정하게’ 할 수 없을까를 고민하며 다섯 가지 태도(자발성, 관대함, 정직함, 성실함, 공정함)의 정의를 재해석하여 말한다.

작가는 ‘노력’을 과소평가하는 작금의 분위기를 우려하면서 ‘지금 이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그 어떤 변화도 이룰 수가 없다’고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걸어나가자’고 ‘건전한 욕심을 잃지 않는 일의 중요성’을 차분히 짚어준다.

또한, ‘기꺼이 상처받자’고 말하며 어떤 사랑이든 사랑 그 자체가 찾아온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사랑이 끝나도 새로운 사랑이 도래할 거라는 믿음이, 타인에 대한 관대함을 낳고, 그 관대함이야말로 결국에는 ‘나’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힘의 밑거름이 된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태도에 관하여》의 다섯 가지 태도는 나를 살아가게도 하지만, 나를 알아가게도 하고, 나를 지켜내기도 한다. 우리가 그 태도들을 마주할 때 어떤 실패 앞에서도 어설픈 위로나 정신 승리를 하지 않는 단단한 사람들이 될 수 있지 않을까.<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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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_바다의 세계사

주경철교수의 바다의 역사가 드디어 완성되었습니다. 15년 전 대항해 시대를 알리면서 근대 바다로 이어진 세계사의 시작을 일깨웠습니다. 15세기 이후 동떨어져 있던 각 문명권들은 바다를 통해 갑자기 소통하기 시작했고, 진정한 세계사가 만들어졌습니다.

이제 ‘바다인류’로 고대 바다의 탐험들을 이야기합니다. 사실 당연한 역사인데 우리가 그저 몰랐을 뿐이지요. 명나라 정화의 군단은 배의 크기와 성능, 배의 척수, 선단의 규모 등 콜럼버스 선단과 비교 불가였습니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대항해시대로 바다의 세계사를 열었습니다.

그 이후 다양한 식물, 동물, 사람이 폭팔적으로 서로 서로 교류했고, 나름의 고유한 정체성을 만들어 내는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글로벌 하면서도 로컬한 문화교류의 특성을 이해해야 문화의 원조논란과 다른 시각에서 세계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경철의 ‘바다 인류’

동아시아의 긴 역사에서 일본은 16세기 까지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중원의 패권은 한족과 북방의 거란, 몽골, 여진의 차지였습니다. 또 지정학적으로 중원의 문명을 한반도를 통해 수입해야 하는 문명 수입국이었습니다.

그런데 16세기이후 이후 조선을 침략하고 대놓고 명 정벌을 공언할 정도로 동아시아의 강자로 우뚝 솟았습니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이런 드라마틱한 힘의 역전이 어떻게 일어났을까?

주경철 서울대교수가 2008년에 발표한 ‘대항해 시대’가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단초를 비로소 제공했습니다.

유럽~아랍~중앙아시아~중국를 연결하는 실크로드가 중심 네트워크일 때는 네트워크의 끝 단에 있는 일본이 제일 불리했습니다.

대서양~인도양~남중국해로 이어지는 바닷길이 열리자 거꾸로 일본은 유럽의 정보를 가장 먼저 수신하는 노드로 바뀌었습니다.

주경철 교수의 새 책 ‘바다 인류’는 선사시대부터 인류의 미래를 바다를 통해 조망합니다. 이 책은 대륙과 농경문화 중심의 역사관이 놓친 나머지 반쪽을 보여줍니다. 8장 이슬람의 바다편을 발췌하여 읽고 10줄로 요약했습니다.

10줄 요약_8장 이슬람의 바다편

1.622년은 인간사회가 처음으로 신의 메시지를 받아들여 새로운 공동체 움마(Ummah)를 형성한 중요한 해이기때문에 이슬람 원년이 되었다.

이슬람권은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 세 대륙에 걸쳐 있고 동서로 길게 뻗어나갔다. 이 광대한 세계는 아라비아,페르시아,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에스파냐 등 다수 문명권으로 구성된 초 문명권이다. 또 중국, 인도, 유럽, 아프리카, 러시아 문명과 마주하고 있다.

2.광대한 이슬람 지역내 물자, 사람, 정보가 낙타 캐러밴 덕분에 유통되었다. 낙타 등에 짐을 실을 수 있는 북아라비아 낙타안장(North Arabia Camel saddle)이라는 신 기술이 200년경에 개발되어 낙타를 이용한 물류시스템이 작동하였다.

3.사막의 배 (낙타 캐러밴) 뿐만 아니라 바다의 배도 주목해야 한다. 이슬람으로 확산으로 인해 지중해-홍해 루트와 인도양 교역 루­트가 연결되었다. 시아파와 수니파 사이의 갈등은 바다에서는 두드리지 않았다.

이슬람권과 인도양 각지에서 널리 사용된 선박은 다우(dhow)선이었다. 지중해에선 삼단 갤리선, 중국에서는 정크선, 인도양에서는 다우선이 대표적인 선박이었다.

4.다우선 의 첫째 특징은 높은 마스트에 거대한 삼각범을 쓴다는 점이다. 둘째 다우선은 못을 사용하지 않고 선체를 섬유, 밧줄 가죽끈 등으로 묶는 방식을 사용했다. (1998년 자바해 벨리퉁섬 근처에서 인양된 벨리퉁 침몰선이 전형적인 다우선) 항해술은 위도를 계산할 수 있는 카말(kamal)이라는 도구를 활용하였다.

선박과 항해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해서 원거리 화물수송을 무리 없이 잘 수행하였다. 다우선으로 멀리 중국까지 항해하였다.

5.소하르, 시라프, 키시, 호르무즈, 아덴, 제다 등 항구가 교역중심지였다. 이중 시라프는 고대와 중세 페르시아의 가장 중요한 항구였다. 물이 깊었고 또 시라즈의 캐러밴 루트와 연결된 지점이어서 10세 말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6.인도양의 아프리카 방면 교역에서 페르시아인들이 활약하였다. 아프리카 동해안의 스와힐리 지역에 종교적, 경제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잔지바르, 킬와 등 여러 지역에서 시라프 도자기, 중국 도자기가 다수 출토되었다.

중요 교역 산물로는 대모, 상아, 철, 금 등이었다. 짐바브웨에서 생산된 금은 소팔라로 이송되어 수출되었다. 12세기에 킬와가 이 항구 통제권을 장악하였다.

스와힐리 지역은 유례없는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14세기는 8세기와 달리 페르시아인이 아니라 아랍인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동남아시아와의 관련성도 커져갔다. 시아파가 거의 사라지고 수니파가 지배하였다.

7.아프리카 교역 상품으로 노예의 비중이 컸다. 이 분야 전문가인 랄프 오스틴은 7~19세기에 아프리카 대륙을 북쪽과 동쪽으로 횡단하는 노예무역의 규모를 1440만명으로 추산하였다.

869년 바그다드와 바스라 사이 지역에서 잔지 노예반란이 발생하여 10년이상 지속돼 이 지역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아바스 왕조 최대 재앙 중 하나다. 또 인도양, 동남아시아,중국에 이르는 거대한 교역 구조의 변화를 가져온 주요 사건이다.

8.인도양에서 활약했던 해적 중 인도계 해적은 바와리지라 불렸다. 해적은 이 지역 사회와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해적 강도 노예약탈 등은 전문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상인과 선원이진지 기회 있을 때마다 언제든지 뛰어드는 모험이었다.

9.페르시아 아랍 상인들이 처음부터 광저우로 간 것은 아니다. 베트남 항구들이 동쪽의 종점이었다. 대중국 교역에서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시라프에서 광저우까지 해로는 약 900킬리미터였다. 다우선박의 우수함,몬순 체제, 지배층의 소비재 수요가 원거리 무역을 가능케 만든 원동력이었다.

10.이슬람권과 중국 사이에는 어떤 상품들이 오갔을까? 벨리퉁 침몰 선은 중국과 자바를 잇는 해로상에서 침몰했는데 동전, 창사에서 생산된 도자기가 주요한 화물이었다. 도자기는 철저히 해외시장 수요에 맞춘 것이었다.

기하학적 문양, 쿠란 글귀 등을 적색, 녹색으로 파놓은 것은 아바스 왕조시장을 겨냥한 것이었다. 도자기 생산에 필요한 코발트 안료는 페르시아에서 수인한 것이었다. 코발트 안료는 페르시아에서 잘 이용되지 못한 반면 중국에 수출되면 완벽한 청색을 구현하는 데 사용됐다. 그야말로 세계화의 시작이라 할 만하다.

저자소개_주경철

근대가 태동하는 순간부터 대항해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바다와 해양 문명을 통한 전지구적 통합의 과정을 밀도 있게 연구해온 서양사학자. 이 책은 그동안의 연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바다의 관점에서 인류 역사의 시작에서부터 다가올 미래까지 살피며, 역사를 통해 인류와 바다의 공존을 모색해보는 시도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와 같은 대학원 서양사학과를 졸업한 후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서울대학교 역사연구소 소장과 중세르네상스연구소 소장, 도시사학회 회장을 지냈다.

그동안 《대항해 시대》, 《문명과 바다》, 《문화로 읽는 세계사》, 《문학으로 역사 읽기, 역사로 문학 읽기》, 《근대 유럽의 형성》, 《히스토리아》, 《히스토리아 노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모험과 교류의 문명사》, 《마녀》, 《일요일의 역사가》, 《그해, 역사가 바뀌다》,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1~3》, 《도시는 기억이다》(공저), 《18세기 도시》(공저), 《어떻게 이상 국가를 만들까?》, 《질문하는 역사》 등을 쓰고,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3》, 《제국의 몰락》, 《유토피아》, 《물의 세계사》(공역), 《지중해: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1》(공역)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