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의 별장, 석파정의 가을

서리나 조선비즈 인턴기자 mycitystory.korea@gmail.com

G3xdEOiriA7iBn5XWrvBoPEZ1KUIqi3-05rrfILvA7GaHmOL1k-Rpd788bAEPdvlBTh3ddcKNaQtudyapFZle5gfXZHZ9b9O3o4ggmaEf4qxbdD_OnU
▲푸른 소나무와 붉은 단풍이 어우러진 석파정(石坡亭) 전경

‘물을 품고 구름이 발을 치는 집 (巢水雲簾菴 소수운렴암)’. 조선 중기 학자 권상하가 이 곳을 이르는 말이었다. 인왕산 단풍이 그림같이 펼쳐지고 골짜기부터 흘러 내려오는 맑은 계곡과 투명하게 파란 가을 하늘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 석파정(石坡亭)을 두고 하는 말이다. 복 받은 이 집 주인은 조선 말기 세도를 떨치던 흥선대원군이다. 그는 인왕산 기슭 너럭바위에 단단히 자리 잡은 이 집을 별장으로 사용했다.

삼삼오오 모여든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늠름한 위용의 소나무다. 석파정으로 나들이 나왔다는 최원희(60·서울시 압구정) 씨는 “웅장한 느낌의 소나무가 이 집의 역사를 대변하는 것 같다” 며 한동안 그 앞에 머물렀다. 200여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노송은 높이 5m, 그늘의 넓이 만도 67㎡에 이른다. 1968년 서울특별시 지정 보호수 60호로 지정된 반송이다.

w-3Vq_nKaBYLTRL9Z8xFoQNXzkVhGDf1cbghwLxUM3XM0cbGjqY7b911ejXR4TyQDr21oAB6veEa6knsMtCx08PhWoNgU2XvbbYKwCxjkV1Qk3mwjZ0
▲ 안채와 사랑채 사이 항아리가 옛 집의 정겨움을 돋운다

현재 석파정에 남아 있는 건물은 안채와 별채, 사랑채 총 세 채다. 7채 중 네 곳은 소실됐고 개인이 터를 인수하며 남은 건물을 보수했다. 오른 편에 난 중문으로 들어서면 미음(ㅁ)자 모양의 안채가 있다. 그 뒤에 줄지어 선 커다란 항아리들이 집의 정취를 돋운다. 안채 오른쪽 높은 곳에는 별채가 있고 위쪽에는 기역(ㄱ)자 모양의 사랑채가 자리 잡았다. 건물의 앉음새가 주위 풍광과 어우러져 절경을 빚어낸다.

건물에서 나와 산으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면 돌다리 옆으로 앙증맞은 붉은색 중국식 정자가 나온다. 단풍이 숨겨놓은 보물을 발견한 듯 반갑다. 그 위로 골짜기가 흐르고 길이 이어져 산책 코스로도 적당하다.

mNDBsbgJ0KhD7tqXDFTvEFpN4MCBrWm5Xf526yCKRec1OLIHENQ_gkWJzFKIJwCoQq-5SJ2p58mJIx690vzcFb0uPfNSErm3YgwBOlCBO2P584iDzfd3

사실 이 집은 원래 대원군의 소유가 아니었다. 원래 주인은 조선 말기 최대 권력 가문 안동 김씨의 김흥근(金興根)이었다고 한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대원군이 김흥근에게 이 별장을 자신에게 팔 것을 요구했지만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아들 고종과 이 곳을 다녀간 뒤 차지했다고 나온다. 임금이 묵고 간 곳에 신하가 살 수 없다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나무 뒤쪽 바위에 새겨진 ‘三溪洞(삼계종)’ 글자는 원래 소유자인 영의정 김흥근이 살 때 이 곳을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로 불렀기 때문이다. 대원군의 욕심이 지나친 듯 싶지만 둘러보면 그렇게 해서라도 갖고 싶었던 그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된다.

지인의 추천으로 친구 6명과 석파정을 찾은 홍상희(44, 경기도 안산시)씨는 “이런 곳에 살아보고 싶다” 며 “갑자기 대원군이 부러워진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