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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지정학


팬데믹 시대에 가치가 급상승한 기업중 하나가 대만의 TSMC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급습하면서 세계 반도체 부족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현상입니다.

재택 근무 등 언택트 활동이 급증하면서 컴퓨터, 서버 등 각종 디지털 기기 수요가 치솟았습니다. 그러자 디지털 기기속 핵심 부품인 반도체 공급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반도체 부족 사태는 자동차 업계를 강타했습니다. 자동차에 반도체를 공급하던 업체들이 단가가 더 비싼 디지털 기기 부품생산에 비중을 두면서 자동차용 반도체 품귀현상이 벌어진 것입니다.

TSMC는 반도체 생태계중에서 다른 회사가 설계한 반도체 칩을 대신 만들어주는 위탁 생산업체입니다. 이런 형태 반도체 업체를 파운드리(Foundry)라고 부르며, TSMC가 시스템반도체 파운드리 시장의 70%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팬데믹 이전까지 사실 TSMC는 메모리 분야 1위 삼성, 비 메모리 분야 1위인 인텔에 비해 가치가 낮은 기업으로 인식됐습니다. 자체 반도체 설계 기술을 갖고 있지 않고 다른 업체가 설계한 칩을 만들어주는 역할이라는 평가때문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퀄컴이나 AMD처럼 생산시설 없이 설계만을 하는 팹리스 기업뿐만 아니라, 애플, 구글 등 비반도체 기업까지 직접 반도체를 설계하기 시작하면서 파운드리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상황에서 반도체 수요가 치솟자 파운드리의 역할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미국 바이든 정부는 애플, 퀄컴 등 주요 미국 기업의 핵심 반도체가 대만과 한국에서 생산되는 점을 우려하고 미국내 파운드리 투자를 장려하기 시작합니다. TSMC는 일본과 미국 등에 파운드리 공장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반도체 산업은 단순히 비즈니스적 판단만이 아니라 국제정치의 맥락에서도 살펴봐야 하는 분야가 되었습니다. 미국과 중국, 글로벌 지정학적 위험에 얽힌 대만의 TSMC(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를 향후 행보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리스 창은 ‘반도체 산업 진흥에 도움을 달라’는 대만 정부의 요청을 받아 1985년 귀국했습니다. 1987년 대만공업기술연구원장 ‘모리스 창’은 대만 정부와 외국인 투자자가 출자한 2억2000만달러 자본금으로 TSMC를 설립하고 최근까지 이끌었습니다. 이병철-이건희-이재용으로 이어지는 한국 반도체 산업 리더를 합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만의 신생 반도체 산업을 개발하는 책임을 맡은 모리스 창은 계약에 따라 일하는 아웃소싱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앞으로 글로벌 기업이 비용절감을 위해 아웃소싱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회사의 설계 요구를 반영한 칩을 만드는 회사를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TSMC가 시작되었을 때 대략 20~30개의 팹리스 회사가 존재했습니다. 오늘날 그들은 셀 수 없이 많아졌습니다. TSMC는 회사가 칩 설계를 전문으로 하고 제조를 아웃소싱할 수 있도록 하는 이와같은 팹리스 혁명을 가능하게 만들고 주도한 기업입니다.

표준화 될 수 없는 특정기업에 필요한 반도체도 대규모의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테크기업에게 아웃소싱은 합리적 대안입니다. 서로 다른 칩설계라도, 공통의 공정과 규모의 경제가 있기에 파운더리도 역시 합리적 선택입니다. 다만 이를 위해 매우 공격적인 투자가 필요합니다. 대만정부가 투자한 TSMC와 미국 테크기업 출신 모리스 창의 만남은 환상적 조합이었습니다. 2005년 CEO 자리를 넘겨줬던 모리스 창은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다시 복귀합니다. 그가 있었기에 경쟁 업체들이 생산 라인을 폐쇄할 때 과감하게 설비투자를 늘리고 자산을 활성화할 수 있었습니다.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의 글로벌 반도체 사업부 부사장 재임시, 모리스 창은 공격적인 칩 가격정책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처음에는 경쟁자를 제압하고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기 위해 이익을 희생합니다. 시장지배력을 얻게 된 후,가격을 인상하여 지배적 공급자로서 이익을 거두었습니다. 당시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지만 이 전략은 이제 업계 전반에 걸쳐 표준이 되었습니다. 

TSMC 영업이익의 상당부문을 기술 개발과 설비에 투자합니다. 후발 업체가 따라오기 힘들 정도로 거액을 투자합니다. 최근 반도체시장의 변화에 대응하여 TSMC는 미국 애리조나, 일본 이바라키현 등 대만 외 지역에 공장과 연구시설 등에 공격적인 투자를 진행 중입니다. TSMC가 처음 해외에 짓는 첨단 반도체 공장입니다.

최근 모리스 창은 각국의 반도체 현지화 보조금 지원을 언급하면서 “과거에는 글로벌화와 자유무역이 전 세계를 발전시켰지만, 오늘날 세계는 평등하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대만 과학기술협회 20주년 행사) 실제로 대만, 한국은 이제 정치군사적으로 안전하지 않으므로 미국에 반도체 생산시설을 두어야 하고, 미국기업에 보조금을 주자는 제안까지도 있습니다.

“1980년대에 미국은 전 세계 반도체 제조의 40%를 차지했지만 지금은 17%로 줄어들었습니다. 미국은 현재 하락 반전을 희망하고 있지만 현지 생산은 불완전한 반도체 공급망과 더 높은 생산 비용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투자되는 공급망 구축 비용과 납세의 대가는 상당할 것”이라며 비판적입니다. 그는 더 많은 투자와 보조금이 필요할 것이며 결국 납세자들에게 부담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최근 TSMC는 이례적으로 경제나 국제관계 분야의 인재를 채용하고 있다. ‘지정학적 및 경제적 변화가 IC 산업 공급망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기 위해서입니다. TSMC가 글로벌 지정학적 리스크를 심각한 도전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리스 창은 더 이상 완전 경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미국 진출이 TSMC의 유일한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TSMC가 대만에서 주요 사업을 운영하는 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모리스 창은 누구인가?

격동의 어린 시절

1931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Chang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중국의 격변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Chang의 가족은 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및 뒤이은 내전이라는 세 가지 다른 전쟁 동안 진격하는 군대를 피해야 했습니다.

“저는 1941년에 10살이 되었습니다. 그 해에 일어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물론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었습니다.”라고 Chang은 회상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내가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던 홍콩을 공격했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 이전의 기억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이후의 내 삶의 기억은 매우 선명하고 생생합니다.”

비즈니스에 눈뜨다

모리스 창이 미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그의 부친이 IBM 주식 몇 주를 선물했는데, 그는 이때부터 미국 기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주식을 보유하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주가 동향을 지켜보게 된 것이다. 당시 그의 수중에는 IBM 주식밖에 없었으나 이때부터 하루라도 IBM 주가 동향을 주시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모리스 창은 자신이 날카로운 비즈니스 감각을 키운 것은 아버지가 선물한 IBM주식 몇 주 덕분이었다고 회고한다.

인생 롤 모델

살아가면서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TSMC의 수장 모리스 창에게 평생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누구일까? 모리스 창 자신이 여러 차례 언급한 TI 이사장 패트릭 유진 해거티다. 40여 년 전, 해거티는 TI에서 ‘혁신’, ‘성실’, ‘고객을 왕으로 모신다’는 기업문화를 구축하여 오늘날까지 이를 지속해왔다.

혁신과 성실은 모리스 창이 소중히 받드는 TSMC의 경영이념이기도 하다. 고객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모리스 창은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고객을 위해서라면 TSMC는 섶을 지고 불길로 뛰어들 수도 있다.”해커티는 고객의 목소리를 매우 중시하며 내부 승진때도 큰 고객의 의견을 반영했다. 모리스 창은 “ 이부분은 나도 배워서 TSMC 인사 이동이 있을 때 고객의 의견을 참고한다”고 말했다.

브리지 게임으로 쌓은 우정

모리스 창은 카드 게임 브리지 게임 매니아로 잘 알려져 있다.1985년, 대만으로 돌아와 공업연구원장을 맡게 되면서 모리스 창은 대만 브리지 게임계와 더 자주 접촉했다. 황광휘의 소개로 그는 당시 USI 회장 장즈젠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관계는 브리지 게임으로 시작되었으나 모리스 창의 창업과정에서 진정한 우정으로 발전했다. 장즈젠이 모리스 창에게 부족한 자금을 늘 지원해줬다.

기업경영에 있어 모리스 창은 인정의 요소를 개입시키지 않았으며 부하 직원의 실수에는 냉혹한 태도로 따끔하게 질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즈젠과 브리지 게임으로 이어진 12년 우정은 한편으론 중국 전통 가치관 속 보은 정신을 보여준다. 이는 오랫동안 성공한 기업가로 살아온 모리스 창의 이미지에 부드러운 면모를 더해준다.

​​빈틈없는 준비

2006년 모리스 창은 부인 장수펀과 대만을 대표하여 베트남에서 열리는 APEC 비공식 정상회담에 참가했다. 그의 행보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고, 단 이틀의 짧은 일정을 위해 그는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는 양복 안주머니에 늘 수표책 두께의 수첩을 넣고 다니면서 사람들과 대화할 때 중요한 대목이 나오면 신중하게 기록해두곤 했다.

진정은 통한다

2002년 10월. 부인 장수펀의 설득으로 모리스 창은 사진작가 커시제의 카메라 앞에 섰다. 커시제는 창의 멋진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담배를 한 모금 권했다. 깊은 생각에 잠긴 그는 담배 연기에 둘러싸였고, 사색은 연기와 함께 허공으로 올라갔다. 한 모금 더 깊이 들이 마셨다가 뿜어내니 짙은 연기가 서서히 분출되며 자욱한 안개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저 이를 정말 잘 나타내는 장면이네요!” 한쪽에서 장수펀이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근엄한 가면을 벗어던지고 사진작가 커시제의 렌즈 앞에서 모리스 창 부부는 진실한 면모를 드러내며 영원히 남을 순간을 기록했다.

궁함 속에서 진리를 찾다

“나는 최근 번역에 큰 관심이 생겨서 중국어와 영어의 의미 차이를 늘 연구한답니다.” 모리스 창의 이 한 마디에 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기자들은 그의 취재에 준비할 목록을 하나 더 추가했다. 모리스 창의 산업과 경영에 관한 취재 외에 영중사전까지 준비해서 그의 ‘영어 수업’ 진도를 따라가야 했기 때문이다.

겉과 속이 같은 사람

“제 남편은 성실함을 중요시하며 개인적으로 이익을 취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장수펀은 TSMC의 수첩 몇 권을 가져다 집안에 뒀다. 지인들에게 선물할 요량이었다. 모리스 창은 장수펀에서 TSMC에 돈은 냈냐고 물었다. 부인에게도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라고 요구한 것이다.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는 모리스 창은 두 후계자 류더인, 웨이저자에게도 식사 대접을 따로 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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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를 위하여

정조는 1800년 6월, 48세라는 다소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독살이 아니라 종기로 인한 자연사라고 한다. 정조이후 시작된 19세기는 혼돈의 시기였다. 세익스피어 작품같은 그의 삶과 죽음, 고난했던 우리 역사였기에 정조는 그야말로 핫아이템이다.

정조를 가리켜 흔히 ‘미완의 개혁군주’라고 부른다. 그는 그야말로 ‘밥 먹을 겨를도 없이’ 부지런히 국정에 매달렸고, 꿈틀거리는 변화의 시대를 열어제쳤다.

그동안 나랏일을 외면했던 사람들은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왔다. 서얼과 아전은 신분 제약을 벗어나 규장각이나 장용영에 발탁되기 위해 애썼다. 비록 세계사 흐름에서 비켜간 변방이었지만, 청을 통해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동아시아 무역에도 참여했다.

정조는 즉위 후 영조의 탕평 이념을 계승하고, 왕권 강화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왕이라는 절대적 존재 아래 각 당파가 경쟁·협력하는 정치체제를 염원하였다. 그는 자신과 학문, 정치를 함께할 인재 양성을 위해 규장각을 성립했다. 오로지 왕을 위한 친위부대 장용영도 만들었다. 당파와 신분, 지역을 초월해 인재를 등용했다. 남인이었던 정약용, 서얼이었던 이덕무 등을 등용해 개혁정치를 이끌었다.

정조는 1791년 1월 마침내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을 혁파하고, 그를 한문과 한글로 써서 큰 길거리와 네 성문에 내걸었다. 조선 초, 도성안팍 10리 내의 상업권을 보장한 금난전권은 국역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졌다. 조선후기 상업이 발전하면서, 18세기 후반에는 금난전권을 획득하기 위해 거의 대부분의 상인이 권세가나 각 관청과 결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전상인들은 집권 정치 세력인 노론 계열의 특권 가문과 연결돼 있어 그 고리를 차단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1795년은 겉으로 볼 때 태평성대 그 자체였다. 혜경궁의 회갑 잔치을 위해 ‘8일간의 수원 행차’ 동안 정조는 노인들을 대접하고, 백성들의 고충을 처리했다. 3월에는 창덕궁 후원 잔치에 신하를 초대해 친인척을 멀리하고 어진 인재들을 가까이 하는 정치를 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1796년, 정조의 상징 화성이 완성됨과 동시에 사도제자도 마침내 공식적으로 복권되었다.

그런데 재위의 끝무렵, 정조는 자신이 후원했던 신하의 지원도 받지 못하는 고립무원의 처지였다. 말년에 그는 “아무리 고심해도 정치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말하거나 “나 혼자서 천 칸을 다 지키는 격”이라고 개탄하곤 했다. 개혁을 통해 도입된 새로운 질서는 자리 잡지 못했고, 신하들은 함께 하지 못했다.

마침내 노론의 신하들은 천주교 문제를 들고 나왔다. 정약용 등 국왕 지지세력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것이다. 천주교 문제라는 뜨거운 감자가 다시 거론되자, 정국은 급격하게 사학인 천주교 성토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개혁을 주도하던 남인의 영수 채제공의 후계자였던 이가환과 정약용은 물론이고, 정조까지 공격의 대상으로 몰리게 되었다.

이에 정조는 이가환과 정약용을 지방으로 내려보냈다. 그들이 떠난 후, 그에게는 사람이 없었다. 얼마 안 있어 채제공도 “조정의 온갖 일이 재작년보다 작년이 못하고, 작년보다 올해가 더 나빠지고 있다”면서 물러가 버렸다. 그러자 노론과 소론은 기다렸다는 듯 그 공백을 자기들 사람으로 채웠다. 남인의 소외는 곧 왕의 고립을 의미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조는 왕세자인 순조의 세자빈 간택에 들어갔다. 정조가 선택한 인물은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 순조(1790∼1834)가 왕위에 오르고, 그녀는 순원왕후가 되었다. 영조의 비 정순왕후는 1801년 신유박해라는 천주교 탄압을 주도했다. 소수의 가문이 권력을 휘두르는 세도정치 60여년이 시작됐다. 세도정치는 안동 김씨 외에도 풍양 조씨, 여흥 민씨, 반남 박씨 등 서울 양반의 연합정권이라고 볼 수있다. 이후 조선의 왕은 누구도 정조처럼 강력한 왕권을 얻지 못했다.

역사학계는 권력 독점의 세도정치는 탕평정치의 한계가 구조화된 것이라고 말한다. 탕평정치와 세도정치는 분절된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정조 이후’는 엄청난 사건이 아니다. 19세기 세도정치도 조선이라는 왕조국가가 그 생명을 다해가면서 밟아나간 과정일 뿐이다.

이제 궁금한 것은 대항해시대 이후 조선의 한반도의 지정학적 조건이다. 그리고 발전은 내재적이 아니라 오히려 열려야 가능하다. 그 각도에서 다시 역사를 보다면 어떨까?

마지막으로, 애쓰다 지친 정조를 위하여 이제 편히 쉬라고 말하고 싶다.

수원 화성행궁 옆의 화령전에 있는 정조 어진. [연합뉴스 자료사진]
수원 화성행궁 옆의 화령전에 있는 정조 어진. [연합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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믹서기로 밝힌 유전자의 정체

20세기 초반까지 생명체의 유전 정보를 담고 있는 물질은 단백질이라고 생각했다. 단백질은 종류도 많고 생물체에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니 수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다고 여겨졌다. 단백질은 수백 개의 아미노산이 반복적으로 이어진 중합체 즉 폴리머이다. 아미노산은 20종이 있기 때문에 20의 수백 승에 달하는 다양한 단백질이 존재할 수 있다. 단백질 별로 아미노산의 서열에 따라 독특하고 복잡한 구조를 이룰 수도 있다.

이에 반해  DNA나 RNA 같은 핵산은 말 그대로 세포핵 속에 있는 산성의 물질일뿐이다. DNA는 4종의 핵산으로 구성된 간단한 중합체(폴리모)였다. 구조와 기능도 알려진 바가 없었기에 유전 현상에 관여할 것으로 상상되지 않았다.

다윈이후 현대의 유전학의 역사는 단백질이 아니라 DNA가 유전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밝혀가는 역사였다.

시작은 1928년 영국의 그리피스 박사였다. 그는 폐렴연쇄상구균의 병원성 특성이 형질전환하여 비병원성 박테리아로 전달됨을 보여주었다. 1944년 미국의 애버리 박사는 DNA가 형질전환의 원인 물질이라고 발표했다. 병원성 물질이 단백질이 아니라 DNA를 분해하는 효소에 의해서만 파괴된다는 실험 결과에 근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절대 다수의 과학자들은 DNA가 유전적 정보를 담고 있는 물질이라 믿지 않았다.

그러나 후속연구들은 점점 DNA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미국의 앨프리드 허시와 마사 체이스의 실험은 인상적이다. 그들은 박테리아를 감염시키는 바이러스를 이용해 유전적 정보를 담고 있는 물질은 ‘단백질’이 아니고 ‘DNA’라는 것을 입증하였다. 실제로 바이러스 단백질은 박테리아 표면에 붙어있기만 했다. 감염 후 일정 시간이 지난 뒤 믹서기를 이용해 강제로 박테리아와 분리시켜도 후손 바이러스가 생성되는데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1952년에 발표된 허시와 체이스의 실험은 믹서기 또는 블렌더 실험으로도 알려져 있다.

1953년에 왓슨과 크릭은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제시하였다. 유전적 정보를 담고 있는 물질은 단백질이 아니고 핵산 특히 DNA라는 것이 마침내 밝혀진 것이다. 이로써 현대 유전학이 시작되었다.

믹서기 실험 이후

허시 박사는 1969년 노벨상을 수상한다. 허시 박사는 자신의 노벨 수상 연설에서 마사 체이스의 기여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사 체이스연구원은 1964년에 이르러서야 박사학위를 마칠 수 있었다. 그녀는 이후 여러 어려움을 겪었으며 끝내 과학자로서의 경력은 단절되고 말았다. 말년에는 단기 기억 고정을 못하게 되는 뇌질환을 앓다가 2003년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현대 생물학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 실험 중 하나였던 믹서기 실험의 두 주인공이 이후 걷게 된 길에 너무나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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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3월 27일,한국프로야구 KBO의 시작

1982년에 열린 프로야구 원년 시즌에는 팀당 80경기씩 240경기가 열렸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시구와 함께 시작된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MBC 청룡이 삼성라이온즈를 11:7로 이겼다. 원년 우승팀은 OB베어즈가 차지했다. OB의 박철순이 22연승을 거두고, MBC의 백인천이 4할 타율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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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자 성공 리더, 앨버트 불라

앨버트 불라는 그리스 테살로니키에서 태어났으며, 아리스토텔레스 대학교에서 수의학을 전공하고 같은 대학에서 생식생명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3년 화이자 그리스의 테크니컬 디렉터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 후 화이자 이노베이티브헬스 그룹의 사장, 글로벌 백신·항암제와 컨슈머헬스케어 사업부 사장을 포함해 주요 임원직을 거쳐 2018년 COO, 2019년 1월 화이자의 CEO가 되었다

뉴욕시 주요 기업 CEO로 구성된 비영리단체 파트너십 뉴욕의 집행위원, 미국제약협회 및 다국적 제약회사 캐탈리스트와 미국 국제비즈니스위원회 등의 이사겸직하고 있으며, 기업인 협의체인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과 비즈니스협의회의 회원이다. 2020년 투자전문지 《인스티튜셔널 인베스트》 ‘제약부문 최고의 CEO’, 2021년 《인사이더》 ‘가장 혁신적인 CEO’, 《크레인 뉴욕비즈니스》 명예의 전당, CNN 비즈니스 ‘올해의 CEO’에 선정되었다.

대서양위원회 ‘우수 비즈니스 리더십상Distinguished Business Leadership Award’, 양심의 호소 재단 ‘양심의 호소상the Appeal of Conscience Award’, 제네시스 파운데이션 ‘제네시스상Genesis Prize’ 등을 수상했다

저서 소개_ 문샷 :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화이자의 대담한 전략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화이자가 이뤄낸 문샷의 복잡한 과정, 즉 최초의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하고 연구하며, 출시하는 동안 거쳐야 했던 과정을 본다면 누구도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019년 코로나19의 등장으로 전 세계는 혼란에 빠졌다. 20세기 초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독감 이후,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국가와 도시가 감염병으로 봉쇄되는 일이 다가올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전례 없는 위기상황에서 세계를 구원한 것은 강대국도, 강력한 지도자도 아닌 한 기업, 코로나19 백신을 최초로 만들어낸 화이자였다.

백신은 수년에 걸쳐 개발되고, 상용화되기까지는 최소 5년 이상의 기간이 필요하다. 백신을 만들기로 결심한 지 단 9개월 만에 개발에서 생산까지 성공해낸 화이자 내부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까? 미국 대선을 앞둔 그들이 돌파해야 할 국내외의 관문은 무엇이었을까?

2022년 3월 전 세계 15개국 동시 출간하는 《문샷(Moonshot) :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화이자의 대담한 전략》은 세계 최초의 mRNA 백신이자 최초의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해낸 화이자(Pfizer)가 9개월에 걸쳐 이뤄낸 도전과 혁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능성의 한계를 뛰어넘은 9개월의 대장정이었다. 팬데믹의 최전선에서 백신 개발의 모든 과정을 진두지휘한 앨버트 불라(Albert Bourla) 화이자 CEO가 음모와 불신의 아이콘에서 신뢰와 혁신의 기업으로 인정받게 된다. 세계 최정상 제약회사의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2019년 12월 31일, 중국 당국은 WHO에 우한시의 소규모 환자 집단에서 폐렴과 유사한 증상을 일으키는 불가사의한 바이러스가 검출되었다고 보고했다.

이 신종 바이러스의 정체는 SARS-CoV-2로 빠른 속도로 무시무시한 팬데믹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채 1년이 되지 않은 2020년 12월 8일, 영국 코번트리 대학병원에서 90세의 마거릿 키넌 여사가 화이자와 바이오엔테크가 공동 개발한 백신을 접종받는다. 지난 100년에 걸쳐 가장 치명적인 감염병인 코로나19를 막기 위한 최초의 mRNA 백신이었다.

화이자의 코로나19 백신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을까?

‘시간은 곧 생명’이라는 이념 아래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든 화이자의 ‘문샷’에는 위기상황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혁신적인 조직과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람들, 그리고 이들을 이끌어가는 CEO 앨버트 불라의 리더십이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단 9개월 만에 이루어졌다.

‘문샷’은 1949년 인류의 달 탐사를 위해 시작된 도전이었지만, 화이자에게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혁신적인 프로젝트가 되었다.

화이자의 문샷을 통해 탄생한 코로나19 백신은 10년간 축적해온 과학적 지식을 9개월 만에 통합하고, 다른 많은 과학 분야에서 파급 효과를 내면서 지구상의 생명체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책은 화이자가 팬데믹 속에서 만들어 낸 도전과 혁신의 기록이다.

‘광속 프로젝트(Project Lightspeed)’라는 이름 아래 불가능한 일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기까지에는 생명을 최우선으로 하는 가치가 있었다. 화이자의 문샷―마주했던 도전과 깨달은 교훈, 그리고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했던 핵심 가치―을 통해 우리는 자신만의 혁신 혹은 미래의 문샷을 만들어나가는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다”

음모와 불신의 제약회사에서

연구 중심의 과학 혁신기업으로 탈바꿈한 핵심 전략

앨버트 불라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부모님 밑에서 자란 그리스계 미국 이민자로, 2019년 1월 미국의 대형 제약회사 화이자의 CEO로 임명된다.

이 책은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전 세계에 확산되기 시작한 2020년부터 2021년 초까지를 배경으로 앨버트 불라와 화이자가 정치적·사회적 압박과 위기를 견디며 어떻게 가장 최초로 효과적이고 안전한 코로나 백신 개발에 성공했는지 그 과정을 면밀하게 담아내고 있다.

앨버트 불라는 CEO 2년차에 수십억 달러의 손실을 감수하고 백신 개발을 결정한다. 고정관념을 벗어난 연구와 한계를 뛰어넘는 창의적인 개발 과정 속에서 화이자는 바이오엔테크와의 공동연구 끝에 세계 최초로 백신 개발에 성공한다.

그 중심에는 지휘계통을 단순화하고 의사결정 단계를 합리화하며 직접 프로젝트 관리자로 활약한 앨버트 불라의 리더십과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압박에서 벗어나 창의성을 발현해낸 직원들이 있었다.

성공이 불투명한 사업에 수십억 달러의 예산을 쏟아부은 백신 개발은 2019년 CEO에 취임하면서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구어놓았던 ‘환자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혁신’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었다.

화이자는 발기부전 치료제 비아그라와 영양제 센트룸 등을 생산하는 주요 사업 부문을 정비하고, 향후 10년을 연구 개발을 중심으로 한 과학 혁신기업으로서의 방향을 선택했다. 이를 위해 기업의 문화를 바꾸고 투자를 전면 재배치했고, 이 모든 것이 코로나19 감염병이 시작되기 전에 준비되었다.

■ “왜 mRNA 백신인가?”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 선택을 한 CEO

위기의 순간에는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최단 시간 내에 가장 효과적인 백신을 개발하기로 결정했을 때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가령 모더나의 경우라면 코로나19 백신의 개발 여부가 중요하지, 어떤 기술을 사용할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2장 분명한 것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전례 없는 감염병으로 국가와 도시, 경제가 붕괴되자 모두가 치료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치료법과 더불어 감염을 막고 팬데믹을 종식시킬 수 있는 백신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화이자는 오랜 시간 쌓아온 연구 기술력을 바탕으로 성공적인 백신을 생산하고 있었고, 백신 개발을 위해 아데노바이러스, 재조합단백질, 접합 등 여러 가지 기술 플랫폼을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기술은 mRNA였다. mRNA 기술은 잠재력은 무성하지만 완성되기까지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한 미완의 플랫폼이었다.

기존의 백신이 감염성이 없는 병원체의 일부를 통해 몸속 면역 체계를 가동한다면, mRNA 백신은 실제 병원체 없이 몸이 스스로 백신을 만들도록 가르친다.

유망하지만 입증되지 않은 기술에 회사의 사활을 걸기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mRNA 방식은 사용 가능한 모든 기술보다 해결책을 찾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화이자는 이미 2018년 효과적인 독감 백신 개발을 위해 독일의 바이오엔테크(BioNTech)와 mRNA 기술 제휴를 맺고 있었고,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연구 개발에 착수한다.

모든 개발비와 상용화에 따른 이익을 50대 50으로 나누기로 합의했지만, 화이자는 개발비 전액을 먼저 부담하기로 했다. 프로젝트가 실패할 경우 모든 손실은 화이자의 몫이었다.

세계 최초로 mRNA 백신을 개발한 화이자에는 다음과 같은 전략이 있었다.

1. 시간이 곧 생명이다

2. 더 크게, 더 창의적으로 사고하라

3. 지휘계통을 단순화하라

4. 의사결정을 합리화하라

5.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라

■ “화이자는 어떻게 게임체인저가 되었나”

국제사회와 정치가들의 백신을 둘러싼 물밑 전쟁

화이자 CEO가 직접 전하는 비하인드 스토리

백신이 투표일 이전에 승인된다면 혹자는 이것을 백악관의 정치적 압력의 결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반면 투표가 끝나고 백신이 승인된다면 바이든 캠프의 정치적 압력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두 경우 모두 백신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얻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고, 공중보건에 추가적인 악재가 될 수 있었다.― <11장 신뢰의 과학>

백신의 개발 과정은 끊임없는 전쟁이었다. 바이러스와의 사투는 물론, 세계 최초로 mRNA 백신 상용화를 위한 생산 문제와 전 세계로 백신을 보내는 공급 문제, 환자들의 팔에 접종되기 위한 기술 등의 현실적인 문제와 강대국들이 펼치는 보이지 않는 백신 전쟁이 존재했다.

전 세계에 백신을 분배하기까지 국제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쟁이 있었다.

미국 대선을 앞둔 시기, 연구결과 발표에 따라 선거의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는 상황이 펼쳐진다. 트럼프 행정부와 바이든 캠프 사이에 놓인 화이자는 외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정치적인 문제를 하나하나 돌파한다.

백신의 확보는 국가의 안보와 직결되는 문제다. 앨버트 불라는 세계 각국 정상의 전화를 직접 받으면서 방위비 조달법(DPA)에 따라 백신을 미국 외 지역에 수출할 수 없었던 생산지 수출 규제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미국 내 정치 상황과 국제사회, 평등한 백신의 분배를 위해 싸우는 과정 속에서 조직을 더 창의적으로 발전시켜나가면서 세계 각국의 정상과 직접 소통하며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앨버트 불라의 리더십을 만날 수 있다.

■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더 크게, 더 창의적으로 돌파하라

《문샷: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화이자의 대담한 전략》은 코로나19라는 전례 없는 위기 속에서 탄생한 화이자의 혁신을 보여준다.

2020년 3월, 앨버트 불라는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수십억 달러의 손실을 감수하고 새로운 방식인 mRNA 기술을 이용한 코로나19 백신 개발을 결정한다. 그가 화이자 CEO가 된 지 고작 2년차였다.

고정관념을 벗어난 연구, 한계를 뛰어넘는 창의적인 개발 과정, 그리고 기업문화와 의사결정 단계의 파격적인 재정비…. ‘광속 프로젝트’라고 명명한 ‘미션 파서블(Mission Possible)’은 말 그대로 빛의 속도로 모든 과정이 진행되었고, 모든 것을 이루어냈다.

앨버트 불라는 직접 프로젝트 관리자로 활약하며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혁신을 보여주었고, 이 모든 과정을 통해 화이자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전 세계 백신 선호도 1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CEO, 미국 정부와 담배회사 함께 신뢰도 최하위였던 제약회사에서 애플과 구글에 이어 가장 존경받는 기업 4위에 오른 화이자의 ‘문샷’을 통해 우리는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고, 자신의 사고를 재정비하며 신뢰를 보여주는 새로운 혁신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 역시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만의 문샷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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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땅, 용산을 그리다…

(한성전도1799, 영남대학교 박물관소장)
조선시대에 기록된 옛 지도를 보면, 인왕산 무악재로부터 뻗은 산 자락 끝에서 옛 용산의 지명을 확인할 수 있다.
임오군란(1882년) 이후 일본군이 남산아래 주둔했고, 러일전쟁이후 영구병영이 만들어졌다.
1948년년 미군이 주둔하면서, 이곳을 “캠프서빙고 (Camp Seobinggo)”라고 명명하였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청(NARA) 소장
 
1960년대 후암동 복개공사( 서울기록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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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루스 원통과 키루스대왕

유엔본부에 전시된 사이러스 실린더(Cyrus Cylinder)를 아시나요? 실리더는 발견된 고대 유물 중 가장 유명한 아이콘 중의 하나입니다. 기원전 6세기에 만들어진 실린더는 일반적으로 다원주의와 관용을 일깨운 “최초의 인권 선언”으로 간주되며, 유엔본부에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1879년 바빌론에서 발굴된 원기둥은 BC 539년 페르시아 키루스 대왕이 바빌론을 함락시킨 후, 승리의 역사를 바빌론의 설형 문자로 기록한 것입니다. 페르시아 통치의 시작을 기념하고, 키루스가 어떻게 신전을 복원하고, 추방된 민족을 다시 귀국하게 했는지를 기록했습니다.

대영제국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소위 ‘키로스의 점토판’은 피정복민의 학살을 금지하는 등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을 내용으로 담고 있습니다. 왕은 바빌론으로 무혈입성하면서 ‘평화를 원하기에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노예제도를 금하노라’ 라고 선포했습니다. 이 내용이 당시의 문자로 새겨져 있으며 1879년 이라크 바빌론 폐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키루스 대왕은 아키메네스조의 왕이 된 후, 주변국을 차례로 정복하여 페르시아를 세계제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유능한 전술가였을 뿐만 아니라, 고결한 성품의 지배자였다고 알려졌습니다. 관대하며 자비심이 많아, 정복한 영토를 하나의 종교와 이념으로 가두려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국교는 조로아스터교였으나 각 민족의 종교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피지배민족들에게 관용 정책을 베풀고, 토착세력이 지역 후계자가 되도록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키로스 대왕에 대한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키루스 대왕이 바빌로니아를 공략하여 유다 왕국을 점령했을 때, 바빌론에 포로가 되어 있던 유대인들을 해방시켰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구약성서 ‘이사야서’에는 키루스를 고레스 왕으로 표기하고 목자이며 야훼께서 기름 부은 자로 찬양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키루스 대왕은 사망 후에도 페르시아의 적이었던 그리스인들 까지 그의 업적을 인정합니다. 키루스 대왕이 죽은 지 150여 년이 지난 후, 그리스 작가 크세노폰은 이렇게 썼습니다. “그는 신하들을 존경하고 마치 그들이 자신의 자녀인 것처럼 보살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키루스를 아버지처럼 존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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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베니오프, 세일즈포스

1999년에 설립된 세일즈포스는 CRM를 클라우드 형태로 서비스하는 IT기업입니다.  오라클사의 임원이었던 마크 베니오프(Marc Benioff)가 샌프란시스코의 작은 임대 아파트에서 창업해, 처음으로 본격적인 SaaS (Software_as_a_Service) 서비스를 제공한 기업입니다. 클라우드 시대 돈을 긁어들이는 선두 업체중의 하나이며,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세일즈포스는 어떻게 보아도 사업을 잘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에 좋은 일을 했습니다. 그는 세일즈포스가 얼마나 성장하든지 간에, 제품의 1%, 자본의 1%, 그리고 직원 업무 시간의 1%를 비영리단체와 자선단체에 기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20년이 지나 세일즈포스의 1-1-1 기업 자선활동 프로그램은 이미 거의 3억 달러의 보조금과 400만 시간의 직원 자원봉사 시간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마크 베니오프는 세일즈포스의 성공스토리 또는 창업자의 영웅적 성공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업의 사회 책임과 공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기업이 채택하는 원칙의 힘에 따라 성공이 달려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단순히 좋은 사람들을 고용하고 제품을 배달하는 것 이상의 것, 가치를 지키는 문화를 만드는 능력에 따라 성공이 좌우될 것이라 합니다. 성별, 인종, 피부색, 그 밖의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다른 모든 사람들만큼 발전할 수 있도록 똑같은 기회를 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마침내, 그는 비즈니스를 넘어 정치의 영역까지 나아갑니다. 그가 그런 결정하기 까지의 과정을 정리해봅니다.

1.2015년 인디애나 주의회가 종교자유회복법을 통과시켰다. 표면적으로 종교적 신념에 따른 행동을 처벌하지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는 종교관에 따라 성소수자 고객을 차별해도 처벌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2.나는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대공성을 거뒀다. 신뢰, 고객 성공, 혁신이란 세가지 기본 가치에 따라 우리가 만들어온 긍정적이고 목적의식이 뚜렷한 문화가 자랑스러웠다. 이 법이 끔찍하게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성소수자 직원을 차별하는 이 법에 어떻게 대응할 지 몰랐다. 기술기업의 CEO였지 정치인이 아니었다.

3.직원들은 CEO에게 이법에 맞서 싸우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고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요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낯선 땅에 홀로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4.나는 134자 성명서를 트위터에 올렸다.우리는 종교자법에 때한 우리 직원과 고객의 분노에 근거에 인디애나 투자를 대폭 줄일 수 밖에 없다.

5.나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나는 한낱 개인일뿐이고 세일즈포스는 일개 회사일 뿐이었다. 내가 대놓고 드러낸 내 협박을 책임질 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6.나의 오랜 멘토 콜린 파월조차 나의 태도때문에 회사가 원치 않는 조사를 받게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나무 위로 높이 오를 수록 조심하게. 자네 뒷모습이 드러날 걸세.” 일부 정치인들은 민주적 절차를 붕괴시키려고 경제적 협박도 마다하지 않는 악당기업이라고 불렀다. 몇몇 주주와 고객들은 우리 주식을 팔거나 우리 소프트웨어를 폐기했다.

7.인디애나 펜스 주지사는 “우리에게 인식의 문제가 있었다”라고 인정하고 사업주들이 종교자유법을 성적 성향에 근거해 차별할 명분으로 삼을 수 없다고 명시한 개정안에 서명했다.

8.나는 전 계층의직원들이 결집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그것은 회사의 길과 CEO로서 나의 역할에 중요한 분기점으로 다가왔다. 직원들은 근본적으로 나를 시험했다. 내가 결과에 상관없이 기꺼이 원칙에 입각하는 알야야 했다. 그들은 보호받고 있다고 느끼며 마음껏 자신의 본성대로 일할 수 있었다.

9.과거에 양심은 회사의 대차대조표에서 기타로 분류하는 무엇이었다. 하지만 더이상 그렇지 않다. 미래에는 가치가 가치를 창출한다는 개념을 수용하기 전에는 어떤 비즈니스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10.세일즈포스 소프트웨어를 완전히 익히고 회사안에서 실행하는 법을 배우는 전문가를 트레일블레이저로 부르기로 했다. 그들은 배우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며 탐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혁신을 갈망하며 문제해결을 즐기고 사회에 돌려주는 걸 좋아한다.

용기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이야기임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는 등록된 공화당원에서 무소속으로 전향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대의에 대한 그의 견해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내부 혼란이나 외부 저항에 대한 설명 없이 당연한 것으로 간략하게 제시됩니다. 그는 일상적인 기업 운영에서 물러나기로 한 2018년의 결정에 대해 설명하지 않고, 자신의 최고 경영자 직위를 동료와 공유하기로 한 결정에 대한 배경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베니오프의  진보적 행동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가 실천하는 가치 뒤에 숨겨진 동기, 그 마음의 심연까지 이야기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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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줄서평]제국영국을 만든 해적왕

스티븐 존슨이 영국의 전설적 해적인 헨리 에브리(Henry Avery, 1659~?) 소재로 ‘인류 모두의 적’이란 책을 출간했습니다. 과학저널리스트인 존슨은 ‘탁월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가’, ‘감염 도시’ 등 과학지식을 활용하여 숨어 있는 맥락과 의미를 재미있게 빚어내는 솜씨를 발휘하여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번에는 보물선 한 척을 약탈한 해적왕 헨리 에브리가
어떻게 근대사의 향방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이야기합니다.

17세기 홍해와 카리브해를 주름잡은 해적선 팬시호의 선장 헨리 에브리는 1695년 무굴제국의 메카 순례선인 건스웨이를 공격했습니다. 해적의 역사에서 단일 사건으론 최대 약탈로 기억되는 사건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메카 순례길에 올랐던 왕실 여인들을 대상으로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무굴 아우랑제브 황제는 격노했고, 그 분노는 동인도회사와 영국으로 향해, 황제는 하루아침에 영국과의 무역을 중단시켰습니다.

의도치 않은 한 해적의 약탈로 인해 무굴제국와 분쟁에 휩싸인 영국 동인도회사와 정부는 에브리에게 당대 최고액의 현상금을 걸고 인간 사냥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영국 정부가 에브리의 머리에 가격표를 붙이고 본격적으로 인간 사냥을 시작한 때는 헨리 에브리가 수라트를 떠난지 10개월이 지난 뒤였습니다. 그의 해적들은 평생 먹고살고도 남을 몫을 분배고 이미 뿔뿔이 흩어져, 숱한 풍문을 남긴 채 종적을 감췄습니다.

헨리 에브리의 드라마틱한 스토리는 다양한 사람에 의해 다양한 시각으로 각색되면서 인구에 회자되었습니다. 스티븐 존슨은 어쩌면 뻔한 해적 이야기에 자신만의 관점을 덧붙여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시도합니다. 곧, 해적왕이 자신도 모르게 대영제국 시대를 여는 방아쇠를 당겼다고 봅니다. 존슨은 이런 관점 아래 마치 추리 소설을 쓰듯이 대항해 시대의 역사 속을 파집고 들어갑니다.

무굴제국과의 무역으로 큰 이익을 보고 있던 동인도회사와 영국은 재빨리 사태 수습에 나섰습니다. 먼저 영국 정부는 에브리 일당을 ‘인류 모두의 적’으로 규정하고 막대한 현상금을 걸어 공개 수배했습니다. 에브리 한 사람의 목에 걸린 현상금만 해도 500파운드,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1억 3500만 원에 달하는 금액으로, 그 시대에 매우 파격적인 금액이었습니다. 최초의 ‘1억 현상금’이 공표되자 전 세계의 현상 수배범 사냥꾼들이 에브리 한 사람을 찾아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해적왕이 ‘인류 최초의 국제 현상수배범’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한편 동인도회사는 자신들이 직접 해적을 격퇴시키겠다고 황제에게 약속했습니다. 그러면서 바다를 지키는 ‘황제의 군인’이 되겠다며 법적 권한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해득실을 따져본 황제는 결국 이 제안을 승인했습니다. 이로써 동인도회사는 처음으로 인도 지역에서 합법적으로 법을 집행하는 권한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얻은 권력은 점점 범위가 넓어져 훗날 동인도회사와 대영제국이 인도 전체를 지배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에브리가 저지른 범죄가 근대사를 지배한 대영제국의 탄생에 불씨가 된 것입니다.

에브리의 약탈 사건과 관련해 영국의 핵심 관계자들은 각자의 역할이 어디까지인지를 정확히 몰랐습니다. 해적, 기업, 국가라는 뚜렷히 구분되는 세 범주가 있었지만 각 범주가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끝나는 누구도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었습니다. 헨리 에브리의 행동이 야기한 세계적인 위기는 결국 이런 근원적 혼란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혼란은 어떤 우연적인 사건에 의해 해결되기도 합니다. 한 명의 해적과 그의 도전, 무굴제국의 막대한 부, 영국의 제국주의적 야심, 타지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동인도회사의 절박함, 점점 중요해졌던 세계 무역망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우연히도 해적왕 헨리 에브리가 이 무역망 앞으로 어떻게 흘러가야 할지를 정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헨리 에브리가 그날 황제의 보물선을 약탈하지 않았다면, 대영제국은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존슨은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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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년 3월 20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설립

1600년 영국이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인도/동남아시아 무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자 네덜란드도 동인도 회사를 설립했다.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이면서 최초의 다국적 기업이었다. 17세기에는 포르투칼과 영국을 넘어서, 세계 최대의 무역회사로 성장하였다. 개신교로 선교활동을 하지 않은 네덜란드는 일본 무역을 사실상 독점하면서, 당시 은을 안정적으로 수입할 수 있었다. 또한 자바 등 인도네시아를 점령하여 약탈적 가격으로 향신료를 수입할 수 있었다. 은화와 상품을 기반으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중계무역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 동인도 회사와 경쟁에서 점차 패하고, 신대륙에서도 향료와 설탕이 수입되자, 사실상 파산상태에 이르게 되어 1798년 해산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