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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마음도 누워가는 사찰, 현통사

– 창호지 넘어 들리는 폭포소리와 바람소리가 마음을 차분하게

– 자연에 내려놓는 각자의 고민들

– 도심 속 자연이 주는 영감으로 예술가들 자주 찾아

민경인 조선비즈 인턴기자 mycitystory.korea@gmail.com

“제월당 안에서 달을 바라보면 처마에 가려 달이 보이지 않습니다. 달을 보기 위해 고개를 비스듬하게 해야 비로소 달을 볼 수 있어서 月(월)을 눕혀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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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통사의 제원당, 현판의 적힌 月(월)자가 누워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현통사의 위치와 역사를 새겨놓은 비석에는 ‘한강을 굽어보며 수 백리를 연이어 뻗쳐 내리는 삼각산 정기는 이곳의 백사골에 이르렀고 세검정을 싸고 도는 맑은 물줄기를 따라 오르면 넓적한 바위 위에 삼각산 현통사라 새긴 일조문이 울뚝 솟아있다’라고 쓰여 있다. 현통사는 세검정초등학교에서 동쪽으로 500m 정도 떨어져 있어 도보로 10분이면 찾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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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는 현통사는 자연의 소리만 들릴 뿐 고요했다. 기자가 예정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지만 사찰의 주지인 부암 스님은 미리 다과를 준비하고 묵주를 돌리고 있었다.

비가 내려 수량이 많아진 폭포 소리와 사찰의 창호지 넘어 들려오는 빗소리가 들뜬 마음을 진정시켜 줬다.

현통사는 고려시대부터 현재 자리를 지켜왔다. 이 사찰은 조선시대까지 ‘장의사’라 불렸다. 이후 한국 전쟁으로 사찰이 소실되고 1958년 이름을 보문사로 변경했다. 1967년 재건 작업이 시작돼 1971년에 이르러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이후 1987년 사찰명을 ‘현통사’로 변경했다.

현통사의 역사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사찰에 남아있는 사료(史料)와 스님들로부터 전해진 내용으로 현통사의 역사를 정리했다. 약 500평 부지에 건물들이 오밀 조밀 모여있는 현통사에는 주지 스님 한 분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주지 스님은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차를 마시며 자연을 즐깁니다”며 “현통사는 근처에 폭포가 있는 서울에서 보기 힘든 사찰입니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도심을 떠나 현통사에서 스스로 마음의 위안을 찾거나 희망을 기도하기도 한다. 그는 “매년 대입 수능일이 다가오면 학부모들이 사찰을 많이 찾습니다”라며 “수능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면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라는 말을 실감하곤 하죠”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 같은 학부모들의 정성을 보면 스스로 마음이 경건해집니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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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 스님을 만난 현통사의 제월당은 사랑채와 같은 곳이다. 이곳에서 손님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신발을 벗고 제월당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라 독특한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제월당 현판 속 月(월)은 오른쪽으로 누워있다.

현통사 제월당霽月堂의 月자가 옆으로, 누워 있다 계곡 물소리에 쓸린 것인지 물 흐르는 방향으로 올려 붙은 달, 물에 비친 달도 현통사 옆에선 떠내려 갈 듯하다

비 오는 날 숲의 모든 소리는, 물소리 뒤에 숨는다

<조용미, 소리의 거처 中>

이처럼 문 앞부터 재치를 느낄 수 있는 제월당은 산의 경치를 감상하며 ‘힐링’하기 안성맞춤인 공간이다. 그는 “제월당에 앉아서 밖을 바라보면 늘 시 한편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라며 “출가 전 연애편지도 많이 썼는데 상대방이 늘 감동했지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이 같은 매력 때문에 화가·서예가·시인들이 현통사를 자주 찾습니다”라며 “도심 속의 자연이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듯 합니다”고 말했다.

또 주지 스님은 “요즘 젊은 사람들이 고민이 많은 것 같아요”라며 “주로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지인보다 스님인 저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편이 안심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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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월당 내 ‘금강경 병풍’, 금강경 병풍은 동방대학원대학교 이영철 교수가 금으로 직접 글을 썼다.

때론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민을 털어놓는 것은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것이다.

또 대문을 활짝 열어 놓은 현통사는 차(茶)를 마시며 마음을 정화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주지스님은 “예로부터 술을 즐기는 나라는 망하고 차를 먹는 나라는 흥한다고 했습니다”며 “사찰을 찾은 사람들에게 자연과 차를 통해 삶의 여유와 사색을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요즘 서울의 대도심에 지친 사람들이 서울 구석 구석을 다니며 자신만의 공간을 찾고 있다. 현통사는 지친 도시민들에게 충분한 치유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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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씻고 결의를 다진곳, 세검정

전효진 조선비즈 인턴기자 mycitystory.korea@gmail.com

-세검정, 인조반정 당시 칼을 씻으며 태평성대를 기원했던 곳

-차일암, 실록 완성한 후 세초연을 벌였던 연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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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초, 흑백의 역사 속에 갇혀 있던 세검정 터는 수묵 담채화에 색을 입히듯 오색 단풍으로 물들었다.

종로구 신영동 168번지에 자리한 팔각 정자 위로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이 곳은 백사골 계곡이 북한산 계곡과 만나 홍제천을 이루며 흐르는 중간 지점으로 서울 특별시 기념물 제 4호 ‘세검정’이 있다. 미끄러질 듯 맨질맨질한 바위 위에 세워진 세검정 앞으로는 홍제천의 시원한 물줄기가 흐르며 그 운치를 더했다. 과거부터 맑은 물이 흐르기로 유명한 곳이다.

1960년대 만해도 동네 아낙들은 세검정 터로 나와 토닥토닥 방망이 질을 하며 묵은 빨래를 했다. 물장구 치던 아이들도 몇 번의 자맥질 끝에 꾀죄죄한 몸 때를 벗겼다. 시원한 개울 물 소리와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은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자연의 선물이었다.

하지만 현재 정자의 모습은 과거 조선 숙종(1674~1720) 때 처음 지어질 당시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현재 모습은 1941년 종이 공장의 화재로 소실된 이후 겸재 정선의 <세검정도>를 보고 1977년 재복원됐다.

겸재 정선의 그림을 보면 세검정 주변으로 돌 담장이 있다. 또 주변의 굵고 시원스럽게 흐르는 천으로 내려가 발도 담글 수 있는 받침 돌도 있다. 하지만 현재는 그 앞으로 신작로가 생기며 개울로 내려 갈 수 있는 시설물이 없어지고 비탈 진 바위만 있을 뿐이다.

신작로가 들어서면서 과거의 운치는 거의 사라졌다. 인근 주민들 중 “깨끗하고 예쁜 곳이지만 눈에 안 띄어 문화 유산인지 몰랐다”는 의견도 있었다.

과거의 화려함은 각종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자연의 경치가 좋았던 과거에 이곳은 문인들이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즐겨보며 머리를 식히고 마음가짐을 새로이 했던 곳이었다.

◆세검정, 인조반정 당시 칼을 씻으며 결의를 다진 곳

최근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개봉 한 달 만에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 중이다. 이 영화는 왕조 실록과 승정원 일기에서도 사라진 조선 왕조 15일 간의 일을 상상력을 동원해 제작하며 광해군을 재해석했다.

15대 임금 광해군은 재위 기간 동안 국방력을 강화하고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 국가 정비에 힘 썼던 왕이었다. 하지만 반대파인 서인 세력을 흡수하지 못했다. 결국 광해군 15년(1623) 서인 세력은 광해군 폐위 문제를 논하고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구시대를 마감하고 새 시대를 연 서인은 이 곳 정자로 왔다. 흐르는 홍제천 맑은 물에 피 묻은 칼을 씻으며 마음을 새로이 했다. 그들은 이 정자를 세검(洗劍)이라 칭했고 세검정은 새 시대의 영광을 찬미하는 상징이 되기도 했다.

◆차일암, 실록을 완성한 후 세초하던 곳

인왕산을 앞에 두고 북악산을 뒤로하여 경치 좋은 세검정은 ‘차일암’ 위에 세워졌다.

‘차일암’이란 이름은 왕조의 실록을 편찬한 후에 그 원고가 되는 사초를 바위 위에서 차일(천막)을 치고 씻어버린 일에서 유래했다.

실록은 당시 시대 상을 기록한 자료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만 볼 수 있을 뿐 국왕도 보지 못했던 실록은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사초를 바탕으로 쓰였다.

일단 실록 편찬이 끝나면 글쓴이인 사관의 신변을 보장하고자 사초를 차일암 위에서 흐르는 물에 씻었다. 그 후 편찬에 참여한 사람들의 노고를 달래기 위해 이 곳에서 세초연을 벌였다. 문인들이 즐겨 찾던 세검정 일대는 정기적으로 세초연을 벌이던 연회장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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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3대 명승, 백석동천을 가다

 

정용창 조선비즈 인턴기자 mycitystory.korea@gmail.com

◆속세를 벗어나는 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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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부암동의 현통사를 지나면 포장된 길이 사라지고 흙바닥이 답사객을 반긴다. 경사는 그리 심하지 않지만, 본격적으로 숲길이 시작된다는 신호다. 흙길이지만 정비가 잘 돼있어 산책을 즐기는데 불편함은 없다. 길게 자란 나무들이 햇빛을 적당히 가려 줘 더욱 쾌적하다.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을 즐기며 걷다 보면, 어느덧 길이 조금씩 넓어지며 백석동천(白石洞天)의 ‘백사실 별서(別墅: 오늘날의 별장을 의미) 터’에 도착한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경치 좋은 곳을 발견하면 ‘OO洞天’이라 이름짓고 그 아름다움을 즐겼다. 동천(洞天)이라는 단어에는 ‘하늘과 맞닿은 곳,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의미도 있는 만큼 단순히 보기 좋은 것만이 아니라 ‘속세와 떨어진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백석동천 역시 서울 안에 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청정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과거에도 명승지로 이름난 곳은 사대부들이 별장을 짓고 피세(避世)공간으로 활용했다. 백석동천도 예외는 아니다. 원래 이 곳에도 사대부의 별장이 들어서 있었으나 건물은 모두 유실되고 과거 별장의 흔적만 남아있다. 어떤 이가 세속에서 벗어나 풍류를 즐기려 했는지 지금은 알 수 없다. 그저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의 호와 계곡의 지명이 일치한다는 점, 이항복이 어린시절을 근처 평창동에서 보냈다는 점 등을 미루어 이 곳이 이항복의 별장이 아니었을까 짐작하고 있다.

◆옛 사람과 같은 풍경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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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서울의 별서는 지방과 달리 온전한 살림집의 형태를 띄고 있으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정자를 포함하고 있다. 백석동천 역시 정자와 살림집이 분리된 형태를 가졌다. 서울시 동명연혁고에 따르면 1860년대에 600여 평 규모의 별장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랑채 터와 일부 담장의 흔적, 정자 터 뿐이다.

옛 별장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멋진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점은 아쉽지만,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백석동천은 그 풍광만으로도 명승 제 36호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남아있는 사랑채 터에 올라오면 집 터의 위치는 주변 지형보다 조금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아 있는 기단석 위에 사랑채가 올라가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집 주인은 창을 여는 것만으로 연못을 비롯한 주변 경관을 한 눈에 담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시야 확보를 위해서인지 집 터와 연못 주변에는 나무들이 듬성듬성 심어져 있다. 나무들이 적당한 그늘을 만들고, 탁 트인 시야는 마음까지 시원하게 뚫어주지만, 선선한 가을 날씨에는 조금 춥게 느껴지는 점이 아쉽다. 안채가 함께 들어선 공간이었음을 감안해도 빈 공간이 지나치게 넓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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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집 주인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집 아래쪽의 연못에 마련된 정자 터로 가면 집에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경치가 드러난다. 집 터에서 내려다 볼 때에는 적어 보였던 나무들이지만, 연못가에 내려온 산보객을 햇빛으로부터 지켜주기에는 충분하다. 가까이에서 본 연못은 생각했던 것보다 넓었다. 낙엽으로 덮인 부분이 많아 아쉬웠지만, 이 또한 가을에만 즐길 수 있는 풍경이다. 만약 정자에 앉아있는 것도 갑갑하다면, 정자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석상(石床 : 돌 평상)을 찾으면 된다. 혼자 앉아 즐기기에는 조금 넓고, 친구 한 명을 불러 바둑을 두거나 술잔을 기울이며 즐기기에 딱 좋다.

◆ 이어지는 길, 탈출은 끝나지 않았다.

별장 터를 벗어나면 계곡을 왼편에 끼고 길이 이어진다. 이 계곡은 서울 시내에서 유일하게 도룡뇽과 맹꽁이가 사는 곳이다. 아쉽게도 날이 추워지고 수량이 적어 도룡뇽을 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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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걷다보면 솟대가 등장한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돌 하나씩 더 올리고 짧게 소원을 빈다. 옛날 마을 어귀에서 장승과 함께 수호신 역할을 담당했지만 어느 새 장승보다도 만나기 힘들어졌다. 솟대 밑둥은 사람들이 쌓은 돌탑에 둘러싸여 있다. 마을의 수호신과 소원을 비는 돌탑은 제법 어울리는 한 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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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에 새겨진 ‘白石洞川’ 이 동천의 시작을 알린다. 사실 현통사를 지나오는 길은 일반적인 답사 코스와는 반대 방향이다. 그러나 백사실 입구 쪽 주택가에는 급경사가 많아 본격적인 경치를 즐기기도 전에 지칠 수 있다.

삼십분 정도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다시 주택가가 나온다. 작은 일탈을 즐기기에는 조금 부족한 듯하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주택가는 산을 끼고 이어지고 있으며, 주변 풍경에 한껏 어울리는 주택과 가게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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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군자의 먹향이 배어있는 집

서리나 조선비즈 인턴기자 mycitystory.kore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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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 가지 뒤 뒤뜰 바위에 자리잡은 석파랑의 분위기가 고즈넉하다.

서울 미술관을 지나 상명대 방면으로 길을 따라 10분쯤 걸어가면 석파랑(石坡廊)이라는 현판이 눈에 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붉은 감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감나무가 손님을 맞는다. 150년 나이에 걸맞게 듬직하고 풍성한 모습이다. 그 뒤에 보이는 나무 계단을 따라 오르면 단아한 자태의 석파랑이 있다.

석파랑은 대원군 별장인 석파정(石坡亭)에 딸려 있던 별당이다. 사랑채에 속해 있던 이 건물은 1958년 서예가 소전 손재형(孫在馨) 선생이 집을 지으며 뒤뜰 바위 위로 옮겨왔다. 현재 복원 된 석파정에서 파손이 심했던 네 채 중 하나다.

동북향의 기역(ㄱ)자 구조로 된 집은 대청방을 가운데 두고 왼쪽에 큰 방, 오른쪽에 건넌방이 있다. 큰 방이 흥선대원군의 거처였고 건넌방은 손님 맞이용이었다고 한다. 대청방은 대원군이 사군자의 난초를 그릴 때 머물렀던 곳이다. 이 집의 특징 중 하나는 둥근 창문이다. 큰 방 측벽에 반원형, 건넌 방 벽면에 동그란 창문이 달렸다. 조선 말기 중국 청나라 건축의 영향을 받은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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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파랑에서 내려다 본 정원 모습. 붉은 감나무와 노란 은행나무가 조화롭다

이 집은 1994년 9월부터 한국궁중요리점으로 운영되고 있다. 개인 소유 식당이지만 석파랑이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돼 일반인이 자유롭게 들어가 둘러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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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섭, 추억이 깃든 서울미술관

서리나 조선비즈 인턴기자 mycitystory.kore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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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미술관 전경

서울미술관은 석파정을 소유한 석파문화원이 올해 8월 개관한 곳이다. 유니온약품그룹 안병광 회장이 운영하는 곳으로 지상 3층 규모의 미술관 전시 공간은 1653㎡ (약 500평) 에 이른다. 국내 사립 미술관 중 삼성미술관 리움 다음으로 크다.

미술 애호가로 알려진 안 회장은 이중섭 작품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처음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이중섭의 대표작 ‘황소’였기 때문이다. 1983년 제약회사 영업 사원이었던 그는 갑자기 비가 와 명동의 한 액자 가게 처마로 피했다. 그때 자꾸 눈길이 가는 그림 한 점이 있었다. 가게에 들어가 값을 물었더니 당시 가격으로 1만원이라고 했다. 주머니에 9000원밖에 없어 흥정 끝에 7000원에 그림을 받아 나왔다. 물론 당시 그가 산 물건은 그림이 아닌 복제 프린트물이었다.

이후 그림의 멋을 알게 된 안 회장은 ‘황소’ 진품을 비롯해 회화 100여점을 모은 수집가가 됐다. 2007년 사옥을 짓기 위해 사들인 석파정 터에 유형문화재로 등록된 건물이 있어 미술관밖에 짓지 못하게 되자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벌여 석파정을 단장했다. 더불어 미술관을 신축해 전체 4만 3000㎡(약 1만 3000평) 일대를 서울미술관 이름으로 개장했다.

개관기념전은 안병광 회장이 처음으로 그림과 인연을 맺게 해 준 이중섭 작품이 중심이다. ‘둥섭, 르네상스로 가세!-이중섭과 르네상스 다방의 화가들’이 전시 제목이다. 여기서 ‘둥섭’은 이중섭의 서북식 발음이다. 안 회장 개인 소유의 이중섭 작품 36점과 같은 시기 활동했던 한묵, 박고석, 이봉상, 손응성의 작품까지 총 75점의 근대 작품이 전시된다. 이대원, 천경자, 백남준 등의 대작을 볼 수 있는 상설전도 인상 깊다.

미술관 직원 강현우씨(28)는 “평일 300-400명, 주말 700-800명의 관람객들이 꾸준히 방문하고 있다”며 “가족과 친구끼리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입장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며, 입장료는 어른 9000원, 초중고생 5000원, 어린이 1000원이다. 매주 월요일 휴관, 개관전은 11월21일까지. (02)395-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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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의 별장, 석파정의 가을

서리나 조선비즈 인턴기자 mycitystory.kore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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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소나무와 붉은 단풍이 어우러진 석파정(石坡亭) 전경

‘물을 품고 구름이 발을 치는 집 (巢水雲簾菴 소수운렴암)’. 조선 중기 학자 권상하가 이 곳을 이르는 말이었다. 인왕산 단풍이 그림같이 펼쳐지고 골짜기부터 흘러 내려오는 맑은 계곡과 투명하게 파란 가을 하늘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 석파정(石坡亭)을 두고 하는 말이다. 복 받은 이 집 주인은 조선 말기 세도를 떨치던 흥선대원군이다. 그는 인왕산 기슭 너럭바위에 단단히 자리 잡은 이 집을 별장으로 사용했다.

삼삼오오 모여든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늠름한 위용의 소나무다. 석파정으로 나들이 나왔다는 최원희(60·서울시 압구정) 씨는 “웅장한 느낌의 소나무가 이 집의 역사를 대변하는 것 같다” 며 한동안 그 앞에 머물렀다. 200여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노송은 높이 5m, 그늘의 넓이 만도 67㎡에 이른다. 1968년 서울특별시 지정 보호수 60호로 지정된 반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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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채와 사랑채 사이 항아리가 옛 집의 정겨움을 돋운다

현재 석파정에 남아 있는 건물은 안채와 별채, 사랑채 총 세 채다. 7채 중 네 곳은 소실됐고 개인이 터를 인수하며 남은 건물을 보수했다. 오른 편에 난 중문으로 들어서면 미음(ㅁ)자 모양의 안채가 있다. 그 뒤에 줄지어 선 커다란 항아리들이 집의 정취를 돋운다. 안채 오른쪽 높은 곳에는 별채가 있고 위쪽에는 기역(ㄱ)자 모양의 사랑채가 자리 잡았다. 건물의 앉음새가 주위 풍광과 어우러져 절경을 빚어낸다.

건물에서 나와 산으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면 돌다리 옆으로 앙증맞은 붉은색 중국식 정자가 나온다. 단풍이 숨겨놓은 보물을 발견한 듯 반갑다. 그 위로 골짜기가 흐르고 길이 이어져 산책 코스로도 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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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집은 원래 대원군의 소유가 아니었다. 원래 주인은 조선 말기 최대 권력 가문 안동 김씨의 김흥근(金興根)이었다고 한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대원군이 김흥근에게 이 별장을 자신에게 팔 것을 요구했지만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아들 고종과 이 곳을 다녀간 뒤 차지했다고 나온다. 임금이 묵고 간 곳에 신하가 살 수 없다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나무 뒤쪽 바위에 새겨진 ‘三溪洞(삼계종)’ 글자는 원래 소유자인 영의정 김흥근이 살 때 이 곳을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로 불렀기 때문이다. 대원군의 욕심이 지나친 듯 싶지만 둘러보면 그렇게 해서라도 갖고 싶었던 그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된다.

지인의 추천으로 친구 6명과 석파정을 찾은 홍상희(44, 경기도 안산시)씨는 “이런 곳에 살아보고 싶다” 며 “갑자기 대원군이 부러워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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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암동, 도시 속 풍성한 가을 정취를 선물하는 곳

김범수 조선비즈 인턴기자 mycitystory.korea@gmail.com

현대 도시에 살면서 피로를 모르는 사람이 몇명이나 있을까. 언제나 도시를 벗어나 일상에서 잠시 탈출하고 싶지만 막상 그러기는 쉽지 않다. 그런 이들을 위해 서울을 벗어나지 않고도 잠시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있다. 종로구 부암동이다.

석파정과 세검정, 현통사, 백사실터, 백석동천을 들러 창의문을 통과해 윤동주 시인을 만나고, 청와대를 거쳐 경복궁 길을 따라 내려왔다. 부암동의 가을을 즐기고 역사적 볼거리를 길어 올린다. 유명 드라마 촬영지인 카페골목은 부암동에서 즐길 수 있는 또 다른 보너스다.

부암동은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와 버스 정류장 앞에서 1711번, 7212번을 타면 갈 수 있다. 자하문터널을 지나 자하문터널입구 정류장에 내리면 된다.

자하문(紫霞門) 터널은 청운동과 부암동을 잇는 터널이다. 예부터 청운동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자하문고개 혹은 창의문고개라 했다. 고개에 자하문이 있어 그리 이름 붙여졌다. 창의문을 속칭 자하문이라 부른 것은 창의문이 자핫골인 지금의 청운동에 있기 때문이다.

정류장에 내리면 부암동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정류장 건너편으로 서울미술관이 보인다. 서울미술관을 통해 뒷편으로 들어가면 석파정에 이를 수 있다. 서울미술관과 석파정을 둘러 본 후 길을 따라 상명대가 있는 방향으로 걷는다.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걷기에 운치있다. 길을 걷다 주유소를 지나면 검은 기와가 얹어진 예스런 집 한 채가 나온다. 석파랑이다. 정원의 아기자기한 멋을 즐기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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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파랑을 지나면 삼거리가 나온다. 상명대를 바라본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길을 건넌다. 세검정으로 가는 길 맞은 편에는 조계종 소림사가 있다. 경내의 탑과 범종이 가을의 정취와 만나 도시 속 작은 절의 편안함이 머물러 있다.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릴 때 쯤, 세검정이 평평한 바위와 함께 운치를 드러낸다. 세검정 일대와 우체국을 지나 오른편으로 들어가면 백사실계곡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보인다. 이 길을 통해서 백사실 계곡으로 들어가다보면 현통사가 보인다.

물흐르는 소리와 자그마한 절이 어우러진 곳, 현통사를 지나면 백사실계곡의 물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백사실터를 만날 수 있다. 백사실터를 지나 백석동천을 알리는 바위를 지난다. 백석동천을 지나면 부암동의 아기자기한 주택이 반긴다. 조금만 내려가면 커피프린세스 촬영지인 산모퉁이 까페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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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실터의 단풍

북악산을 바라보며 내려오면 곧 창의문이 나온다. 창의문을 둘러본 후 길을 건너면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문학관이 있다. 그대로 언덕을 넘어 길을 따라 내려오면 청와대와 청와대 사랑채를 볼 수 있다. 청와대를 기준으로 좌측 길을 따라 경복궁 뒷길을 걷는다. 노랗게 물든 단풍을 감상하며 삼청동으로 내려온다. 이번 코스의 종착지다.

각 코스의 감상 포인트 및 여러 정보들이 이번 부암동 탐방기에 깊이있고 맛있게 담겨있다. 풍성한 가을을 맛보는 기회가 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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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으로 떠나는 아프리카 여행 ‘마르케시 나이트’

– 모로코 대사관 수석 주방장 출신이 만드는 음식

– 이베리아계, 유태계 등 다양한 문화의 영향을 받은 모로코 음식

– 한국의 뚝배기와 비슷한 조리 기구 ‘타진(Tagine)’

김기준 조선비즈 인턴기자 mycitystory.kore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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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이는 식당 간판 불빛을 따라 계단을 올라가면 이국적인 코끼리 조각상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2층 문을 열고 가게에 들어서자 붉은 조명과 실크 커튼으로 꾸며진 내부 인테리어가 히잡(아랍권 여성들이 쓰는 이슬람식 머리수건)을 떠올리게 했다. 식탁에는 색다른 모습의 음식이 차려져 있고 다른 한편엔 느긋하게 시샤(물담배)를 즐기는 아랍인 남성이 앉아있었다. 이색적인 아프리카 음식과 여유로운 그들의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이곳은 마르케시 나이트(Marakech Night Restaurant)다.

◆ 모로코 대사관 수석 주방장의 ‘마라케시 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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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케시 나이트는 이태원역 3번 출구에서 엔틱 가구거리 방향으로 5분정도 걸어가면 나오는 기업은행 맞은 편 건물 2층에 위치해 있다. 레스토랑 대표 겸 요리사인 리티 무스타파 (Mostafa Rhiti) (44) 씨는 “2002년 주한 모로코대사관 수석 주방장으로 일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게됐다”다며 “2006년부터 지금까지 6년째 가족들과 함께 식당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의 부인과 아들이 함께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2002년 대사관에서 일하며 이태원에서 거주했던 무스타파씨는 “당시에는 모로코 음식과 문화에 대해 사람들의 인식이 배타적이었다. 하지만 2006년을 기점으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외국 문화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레스토랑을 열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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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케시 나이트의 대표 겸 요리사 리티 무스타파

지금은 손님의 60% 이상이 한국인일 만큼 마라케시 나이트의 인기는 내국인들 사이에서도 높다. 무스타파씨는 성공 비결을 “옛날엔 전통 모로코식 메뉴가 훨씬 다양했었는데 지금은 한국인이 좋아하는 음식을 위주로 메뉴를 바꾸고 취향에 맞게 오일 사용을 줄였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서 수입해온 재료를 써봤지만 맛이 떨어져 직접 모로코에서 가져온다고 했다. 한남동에 사는 김명준(29)씨는 이 식당의 단골이라며 “처음에는 샤프란(향신료의 일종), 고수향이 어색했지만 지금은 없어서 못 먹을 지경”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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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케시 나이트의 인기메뉴 레몬치킨 타진

한국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음식은 ‘레몬치킨 타진’이다. 타진(Tagine)은 한국의 뚝배기와 유사한 모로코의 전통 조리기구다. 물이 귀한 아프리카 모로코에서는 점토 찰흙으로 만든 원뿔 모양의 냄비에 소량의 물과 식재료의 수분만으로 음식을 조리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무스타파씨는 모로코의 음식문화에 대해 “음식 재료의 차이는 있지만 조리기구, 조리방식, 바닥에 앉아서 먹는 음식문화 등 비슷한 부분이 많다”고 설명했다.

◆ 다양한 문화의 영향을 받은 모로코 음식

모로코는 동쪽으로는 알제리, 남쪽으로는 모리타니, 서쪽과 북쪽으로는 대서양과 접하고 있는 아프리카 서북쪽에 있는 나라다. 지브롤터 해협(대서양과 지중해 사이의 해협)을 건너 20분만 가면 스페인이고, 과거 프랑스의 지배를 받기도 한 모로코는 다양한 국가와 문화의 영향을 받아 풍성한 음식문화를 갖고 있다.

무스타파씨는 “모로코 음식은 세계 5대 요리에 들 만큼 서양에서는 인기가 높다”며 “한국에서는 아직 이태리, 프랑스 음식에 비해 낮은 인지도가 안타깝다”고 말했다. 또 “쿠스쿠스(세몰리나 밀로 만든 곡식)의 경우 재료는 모두 같지만 모로코 지방마다 시간이나 재료 조합이 달라 다양한 맛과 레시피를 지니고 있다”며 맛도 있고 영양도 고려한 모로코 음식을 한국에 많이 알리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태원이란 어떤 곳이냐고 묻는 질문에 그는 “모든 외국인들이 이태원을 통해 한국을 느끼고 이해한다. 그래서 이태원은 ‘한국의 심장’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한국을 두 번째 고향으로 생각한다.모든 외국인들이 한국에 대한 좋을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한국의 심장인 이태원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고 마지막 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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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젊음과 50대의 연륜이 깃든 정장, 테일러블

– 27세 곽호빈 테일러블 대표와 대통령 옷 만든 57세 윤춘국 기술 이사의 만남

– 영화 ‘부당거래’, ‘도둑들’ 의상 제작

조선비즈 인턴기자 허미연 mycitystory.korea@gmail.com

이태원 제일기획에서 한남동주민센터 방향으로 내려가는 골목길, 흰 색과 파란색으로 깔끔하게 칠한 가게가 시선을 끌고 쇼윈도에 걸린 멋스러운 정장이 발길을 붙잡는다. 바로 2007년 처음 문을 연 맞춤 정장 숍 ‘테일러블 블루라벨(Tailorable for blue label)’이다.

지난 25일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 남성이 옷을 주문하기 위해 치수를 재고 있었다. 매장 안쪽에는 아틀리에(작업실)가 보였다. 다른 옷 가게에서는 본 적이 없는 공간이다. 아틀리에가 상징하듯 테일러블 옷들의 대부분 공정은 손바느질로 이뤄지며, 이 모든 봉제 과정에 30년 이상 경력을 지닌 장인들이 참여하고 있다. 곽호빈 테일러블 대표(27)는 “저희처럼 매장 안에 아틀리에가 있는 가게는 거의 없다”며 “다른 가게들과는 포맷부터 많은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곳을 찾는 손님들은 대사관 사람들부터 해외, 지방에서 오는 사람들까지 다양하다. 테일러블 관계자는 “프랑스 모델이 온 적이 있다”며 “그 모델이 프랑스에서도 이곳처럼 옷을 자신의 몸에 딱 맞춰 사 입기란 쉽지 않다고 하면서 매우 만족해 했다”고 했다. 또 “한 손님은 해외로 이민을 갔는데도 저희 옷을 원한다며 연락이 와서 해외 배송을 해주기도 했다”고 했다.

10평 남짓에서 시작한 테일러블은 약 5~6년이 지난 지금 많은 발전을 이뤘다. 영화 관계자의 제안으로 영화 ‘부당거래’, ‘도둑들’의 의상을 테일러블이 직접 맡기도 했으며, 작년 5월에는 ‘테일러블 와인라벨’이라는 명칭으로 청담동 매장도 열었다.

◆ 30년 재단 경력 윤춘국 기술이사

“사회에서 은퇴할 나이에 젊은 사람들이 손을 내민 거죠.”

테일러블의 마스터테일러 윤춘국(57)씨는 ‘테일러블에서 일하게 된 계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윤 씨는 “일반 회사에서는 은퇴할 나이라고 할 때, 청년들이 나를 찾았다”며 “젊은이들과 나이 많은 기술 원로들이 함께 일하게 된 거니까 극과 극의 만남 아니냐”며 반문 했다. 이에 대해 곽호빈 대표는 “좋은 맞춤복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 30년 이상 현장에서 옷을 만든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누나들 속에서 자란 윤 씨는 이른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게 되면서 학업을 포기하고 취업을 택해야 했다. 그는 열 일곱 나이에 북창동의 한 양복점에 들어가 재단 일을 시작했다. 1992년부터 2009년까지 18년 간 서울 소공동 체스타필드 양복점에서 재단실장으로 일했으며 올해 8월 테일러블 블루라벨에 기술이사로 영입됐다.

이명박·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수많은 정·재계 인사들의 옷도 그의 손을 거쳤다. 윤 씨는 “소공동에 있을 때부터 대한민국에 유명한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았다”며 “모 기업 회장님은 15년 째, 또 다른 분은 20년 넘게 나한테서 옷을 맞추고 있을 만큼 꾸준히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손님들도 많다”고 했다. 그만큼 윤 씨에 대한 신뢰가 두텁게 쌓였다는 의미인 셈. 그는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점도 이 직업의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윤 씨에게 ‘테일러블’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주로 중·장년층 정장을 만들어온 그가 20대~40대가 선호하는 젊은 스타일의 정장을 재단하게 되면서 그는 가장 먼저 자신부터 바꿨다.

윤 씨는 자신의 옷을 가리키며 “나도 젊은 사람들처럼 옷을 몸에 타이트하게 입는다”며 “젊은 사람들의 트렌드를 따라가면서 나도 많이 배울 수 있고 젊어지는 기분도 들어 기쁘다”고 했다. 그는 “열린 마음으로 변화하는 패션 경향을 읽어내려고 노력한다”고 덧붙였다. 또 ‘체력적으로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윤 씨는 “늦은 시간까지 일해도 스트레스를 안 받는다”며 “과거 소공동에서 일할 때보다 늦게 퇴근하지만 즐겁다”고 말했다.

지금 그의 꿈을 무엇일까. 그는 “건강을 유지하면서 최대한 오래해야죠”라며 “곽호빈 사장이 잘 되기를 바랄 뿐”이라고 했다. “젊은 사람들이 잘 되어가는 것을 보니 참 좋다”며 “이들이 잘 되도록 열심히 해주는 것, 그게 내 꿈”이라고 했다.

◆ “맞춤 정장의 가치 알리고 싶어” , 20대 곽호빈 블루라벨 대표

“좀 더 잘 만든 옷이란 어떤 것인지 탐구하면서 맞춤 정장의 가치를 깨달았다.”

곽호빈 테일러블 대표(27)는 “원래 패션 디자이너를 꿈꿨다”며 “고민하고 탐구하면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장인들이 손 바느질해 만들어진 옷이 잘 만들어진 옷이라는 것을 알게 돼 맞춤복의 매력에 빠져들게 됐다” 고 했다. 그는 “맞춤 정장의 가치와 매력을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일을 시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1986년 12월에 태어난 20대 청년 곽호빈 대표. 젊은 나이에 시작한 사업이기 때문에 시행착오도 있지 않았을까. “그는 지금도 시행착오를 겪고 있고, 경험을 통해 부딪쳐보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며 “많은 경험을 쌓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곽 대표와의 인터뷰에서 맞춤 정장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에게 패션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패션과 정장은 또 다르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정장은 어떻게 하면 몸매의 단점을 감출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자연스러우면서도 품위를 지킬 수 있는지 연구해 만드는 옷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더욱 멋지고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는 옷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정장은 사회성을 띄는 옷”이라며 “그저 멋있기만 한 옷이 패션이라면, 정장은 상황과 장소, 드레스 코드에 맞춰 입는 하나의 사회적인 약속이기도 하다”고 했다. 그는 “단순히 멋이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 사회적인 관계, 격식과 품위까지 고려해 입는 문화가 더욱 풍부해졌으면 한다”고 했다.

곽 대표는 앞으로 계획에 대해 “사업적인 확장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맞춤복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그 가치를 알리는 데 더 노력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사람들이 결혼할 때 비싼 해외 명품 브랜드 기성복을 많이 구입하는데, 오히려 맞춤복이 기성복보다 질이나 완성도 면에서 더 강점이 있다”며 “이를 잘 모르거나, 옷을 디자인하고 만드는 사람들을 ‘양복쟁이’라고 비하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인식을 바뀔 수 있도록 맞춤 정장이 갖는 가치와 매력을 많은 사람들에 전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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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의 변신, 영어를 배우며 즐기는 파티장

전효진 조선비즈 인턴기자mycitystory.kore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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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6일 할로윈 파티 입장을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

매주 금요일 이태원 해밀턴 호텔 뒤 클럽 거리는 곳곳에서 화려한 조명과 고막을 찌르는 기계 음으로 가득 찬다. 사람들은 저마다 북적이는 거리를 돌며 ‘불금!’을 외친다. 금요일 밤은 불태워 늦게까지 놀아도 된다는 뜻이다.

클럽에 입장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이재현씨(30)는 이태원 클럽 문화에 대해 “청담동의 고급스러움과 홍대의 젊음이 적절하게 섞여있다”고 설명했다.

10월 마지막 주 금요일(26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할로윈 데이를 앞둔 만큼 클럽 거리 인테리어와 사람들의 복장은 평소와 달랐다. 마녀 고깔 모자를 쓰기도 하고 만화에 나오는 복장을 입는 등 스타일에 신경 쓴 사람들로 북적였다.

서양의 할로윈 데이는 10월 31일로 죽은 영혼이 다시 살아나 출몰하는 날을 뜻한다. 귀신들을 놀라게 하기 위해 사람들은 유령이나 괴물 복장을 하거나 실제 혈흔으로 얼굴을 분장하기도 한다. 서울 속 ‘작은 지구촌’ 이태원도 할로윈 데이를 맞이하여 축제 준비로 한창이었다.

비가 온다는 예보로 이태원 지역 전체 할로윈 파티는 취소됐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태원 클럽에서는 자체적으로 할로윈 파티를 열었다. 개별 홍보전으로 이어지다보니 전문 파티 프로모션 업체가 행사를 주관하게 되고 그 비용은 고스란히 입장료 상승으로 이어졌다. 이태원 클럽은 할로윈 데이를 비롯, 여러 파티를 개최하며 테이블 예약가나 양주 가격을 높여 이윤 창출의 찬스로 활용했다.

이태원 역 1번 출구로 나와 KFC 골목으로 걸어 올라가다 보면 클럽 네이키드가 나온다. 할로윈 데이 축제를 준비하는 다른 클럽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파티를 개최하는 중이었다. 일단 입장료가 5000원이다. 다른 곳에 비해 4분의 1 수준이었다. 또 바로 옆의 비원(B1NE) 클럽과 비교했을 때 입장하는 손님의 국적이 다양했다. 클럽 네이키드 앞에는 영어, 불어, 스페인어 등 다국적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보다 많았고 복장도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났다. 해골 분장부터 마법사, 요정까지 외국에서만 보던 할로윈 파티의 모습이었다.

클럽 안에서는 친목 도모를 위한 파티가 이어지고 있었다. 한국인과 외국인이 거의 비슷한 비율로 있었다. 다음 카페 ‘나의 외국인 친구들’과 ‘프렌즈인코리아’가 주최하는 이번 ‘외국 친구와 함께하는 파티’ 는 이미 매주 이태원과 홍대, 강남에서 꾸준히 개최된 전통 있는 파티였다. 2004년부터 시작된 이 파티는 자연스럽게 외국어를 하며 친구를 만들고 싶은 한국인과 한국 문화를 이해하고 싶은 국내 거주 외국인들 사이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 교류 파티로 자리 잡아왔다.

요정 분장을 한 미국에서 온 첼시(25)는 파티에 대해 “페이스 북을 통해 알았다”며 “ 주위의 다른 클럽보다 사람들이 분장도 잘하고 대화가 많아 흥겹다. 미국 파티 문화와 흡사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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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외국인 친구와 영어로 놀아라’ 저자이자 프렌즈인코리아 대표인 김명호씨(31)는 “가볍게 맥주를 마시면서 다양한 문화 출신의 사람들과 새롭게 친구를 만드는 건전한 파티 문화를 정착 시키고 싶다”며 “사람 대 사람으로서 서로의 문화와 언어를 교류하고 만남이 이루어지는 자리”라 말했다.

김대표와 개인적인 친분으로 정기적인 파티를 개최하게 됐다는 크리스 클럽 네이키드 대표(38)는 “퇴폐적인 클럽 보다는 대화가 있는 건전한 파티 문화를 만들고 싶었다”며 “대화를 나누는데 불편함을 최소화 하기 위해 음악도 적당히 튼다”고 말했다. 클럽 음악이 크지 않아서 돌아간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주최 측은 대의를 선택했다.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의 볼륨을 유지했다.

“친구를 사귀러 오는 파티기 때문에 일회성 클럽 문화와는 다르다. 추가적인 정기 모임도 있고 동아리 같다” 대학생 박민지씨(23)의 말이다. ‘외국 친구와 함께하는 파티’ 에 처음 와봤다는 최용식씨(28)도 “단순히 마시고 노는 것보다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열린 느낌”이라고 파티의 첫 인상을 전했다.

한 파티 관계자는 “ 한국 사람들은 클럽 하면 소위 ‘작업을 거는 곳’이라며 좋지 않게 보지만 이 곳은 말을 자연스럽게 먼저 건내는 문화라서 그런 걱정을 전혀 할 필요가 없다”며 “ 파티를 통해 살아있는 영어를 배우고 외국 사람들은 한국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장”이라고 말했다.

조성욱 파티 관계자(30)는 “처음 참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지속적인 친목 도모를 위해 오는 사람도 많다” 며 “단발성이고 정신없는 클럽 문화가 아니라 소통이 있는 파티 문화를 선도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