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주 설경동은 1901년 평안북도 출신으로 어린 시절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잠시 다니다 한국으로 귀국해 삼광운송점, 삼광상회를 세워 곡물과 해산물을 위탁 판매하며 사업을 시작했다. 1936년 동해수산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해 수산물을 가공, 판매하며 사업을 확장했다.
해방 후에는 남한으로 내려와 무역회사인 대한산업을 세웠고, 원동흥업을 세워 부동산 업계에도 진출해 돈을 쓸어담았다. 사업이 성공궤도에 오르자 수원에 성냥공장을 인수해 국내 성냥업계 1위로 올려놨다.
하지만 6‧25전쟁이 발발하며 모아둔 재산을 대부분 잃고 만다. 설경동은 이에 굴하지 않고 1953년 남은 재산으로 대한방직주식회사를 설립해 다시금 도전했다. 당시 정부가 정책적으로 방직업을 밀어주면서 짧은 시간에 대한방직은 번창했다.
설경동은 이 시기 자유당 재정부장을 지내며 1955년 귀속재산이던 조선전선 안양공장을 불하받아 대한전선을 세웠고 1년 후 대동제당도 설립했다. 당대 핵심 사업인 방직업, 제당업을 영위하며 재벌 반열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자유당 재정부장을 역임한 그는 이를 피해갈 순 없었다. 부정축재자로 몰려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게 되고 부동산도 일부 몰수당했다.
이후 설경동은 1972년까지 대한전선과 대한제당(옛 대동제당)에 집중했다. 1969년 가전사업 진출을 시작으로 1972년 오리온전기를 인수해 전자산업에 진출했다. 정부 전선 사업에도 참여했으며, 가전제품 인기에 힘입어 대한전선은 금성사(현 LG전자)와 가전제품 업계 1, 2위를 다툴 정도로 성장했다.
1972년 건강이 악화된 설경동은 그룹 주축인 대한전선과 대한제당을 셋째 설원량 회장에게 맡겼다. 사실상 후계자로 지정한 것이다. 1974년 설경동 창업주가 사망하면서 대한전선그룹은 본격적인 2세 경영으로 들어갔다.
사업보국’과 창업주 인송 설경동 회장(1956년-1978년)
1946년 대한산업(주), 1953년 대한방직(주), 1955년 대한전선(주)를 설립
1953년 방직공장을 인수해서 대한방적주식회사 설립
1956년 7월, 대동제당 설립, 1969년에는 대한제당(주)로상호변경
1954년 대동증권을 설립했고, 같은 해 대한전선을 불하받았다.
1979년 대한제당은 일일 생산 1,000톤 규모로, 전 공정 자동화 설비를 갖춘 인천 제당 -공장과, 세계 최고 수준의 원당 창고를 준공
– 1981년 설탕 생산 연 100만 톤 달성 수출 1억불 탑을 수상
– 인천 사료공장을 준공해 사료사업에도 진출
– 1983년에는 국내 업계 최초로 사료 판매 연 100만 톤 달성 – 인천제당과 사료공장 준공,품질 경쟁력 확보
20세기가 시작되지만, 미국은 해밀턴이 제안한 은행을 감독하고 최후의 대부자 역할을 하는 중앙은행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미국경제는 성장하고 은행도 늘었습니다. 1896년에서 1906년 십년동안 평균적으로 5퍼센트 성장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은행의 수도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1907년 미국에는 인구 4천명당 1개, 2만 2천개의 은행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지역 은행이나 국영 대부업체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옵션 말고도 대도시의 투자자들이 선호하는 다른 곳, 즉 신탁 회사가 있었습니다. 1890년대 초 등장한신탁회사는 채권과 주식 투자를 하다가, 결국 예금을 받기까지 합니다. 신탁 회사는 요컨대 다양한 역할을 포함하는 은행이 되었습니다. 일반 은행과 비교했을 때 그들은 더 위험한 자산에 투자했지만, 규제의 사각지대에 있었습니다. 은행은 자산의 25%를 현금으로 보유해야 하는 반면 신탁회사는 최소 5% 의무만 있었습니다. 은행보다 더 높은 이자를 지불하면서, 1907년까지 10년 동안 거의 250% 성장하여 거의 국립 은행만큼 커졌습니다.
이 은행같지만 규제없는 신탁 회사는 1907년 금융위기에 중심에 있습니다. 주범중의 주범이 니커보커신탁입니다. 구리광산업자인 아우구스투스 에인세와 얼음제조업자인 찰스 모스가 동업하여 만든 신탁회사입니다. 니커보커 신탁의 예금은 1897년 1000만 달러에서 1907년 6000만 달러 이상으로 급증합니다.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신탁이 되었습니다.
니커보커 신탁은 더 크게 사업을 키우기 위해 구리회사인 유나이티드 코퍼 주식을 대량 매집했다가 주가가 폭락하는 바람에 큰 손실은 봅니다. 구리회사의 주식으로 시장을 독점하기 위해 그들의 은행에서 막대한 금액을 빌리고 횡령합니다. 그런데 경제는 1907년에 약간 둔화되기 시작하여 금속을 포함한 원자재 가격이 하락합니다. 구리의 가격도 구리회사의 주가도 하락합니다. 주식 가격이 하락하면서 하인즈와 모스는는 막대한 레버리지로 인해 큰 손실을 입게됩니다.
이로 인해 대출에도 문제가 발생하고, 결국 니커보거는 큰 손실을 촉발했습니다. 이에 투자자들은 자금회수를 요구하여, 뱅크런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됩니다. 은행의 자금상황에 대해 소문이 퍼지자, 예금자들은 현금을 요구하며 거리에 줄을 섰습니다. 이는 차례차레 다른 신탁회사들 까지 옮겨갑니다. 임박한 붕괴를 감지한 주에서는 일단 비상 휴일을 선언했습니다. 일종의 금융 전염병에 휘말렸다는 소식이 나오자, 예금자들은 현금을 요구하며 거리에 줄을 섰습니다. 니커보거는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800만 달러를 지불했지만 불가항력이었습니다. 결국 일부 요구 사항을 거부해야 했고 다른 신탁으로 불이 옮겨졌습니다. 신탁회사인 아메메리카, 링컨 트러스 등도 뱅크런이 시작됩니다. 일부 뉴요커들은 한 신탁에서 다른 신탁으로 현금을 옮겼습니다. 금융 시스템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미국인들은 집에 현금을 비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주가가 폭락하자 뉴욕증권래소는 유나이티드 코퍼의 거래를 중지시켰다. 유나이티드 코퍼에 몰빵 투자한 니커보커신탁에는 투자자들이 몰려 들어 투자자금을 회수했고, 이 신탁회사는 이틀만에 파산위기에 몰렸습니다.
공황이 확산되고 금리가 125%까지 치솟자, 1907년 10월 JP 모건이 구제자로 등장합니다. 모건은 우선 현금을 마련합니다. 현금을 2,500만 달러의 구제 자금이 합의될 때까지 전체 뉴욕 은행 커뮤니티를 자신의 도서관에 가두었습니다. 붕괴는 막았지만 그 정도 현금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견고한 경제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자금 부족을 초래했고, 경제도 침체되었습니다. 모건은 ‘한계를 정해놓고 대응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합니다. 신탁회사 사장들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모건 본사로 몰려들었지만, 실사를 통해 살릴 수 있는 기업과 문을 닫아야 할 기업을 구분합니다. 그 기준에 따라 현금결제를 요구하는 어음에 대해 지급보증합니다. 그가 구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구제자금을 모을 수 있는 재력만이 아니라 그가 가진 권위 혹은 믿음 때문입니다. 물론 그는 사업가이기 때문에 공짜는 없습니다. 모건이 지배하고 있는 US스틸은 일종의 전리품으로 테네시 석탄·철강·철도 회사(TC&I)를 인수합니다.
모건이 주도한 거시적인 구제안도 있지만, 보통사람들은 특정경제상황에 맞우어 만들어내는 해결책이 늘 있습니다. 부족한 법정화폐의 대안이 곧 등장합니다. 곧 달러지폐의 대체품으로 은행의 수표와 소액 차용증이 현장에서 법정화페처럼 사용됩니다. 이 민간 부문 긴급 현금의 총 가치는 모건 구제 금융보다 훨씬 큰 약 5억 달러였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편법이었지만, 1909년까지 미국 경제는 다시 성장했습니다.
문제는 현금부족이었기때문에 처음 구제안은 공식 긴급자금 5억 달러를 공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뿐만 미국의 화폐가 작동하는 방식을 논의할 위원회(국가 통화 위원회)를 설립하기로 했습니다. 4년 동안 시스템을 재구성하는 최선의 방법에 대한 전 세계의 증거를 조사했습니다. 최후의 수단으로 적절한 대출 기관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결과 1913년 12월에 미국의 세 번째 중앙은행을 설립한 연방준비법이 제정되었습니다. 해밀턴은 결국 뒤늦게 길을 찾았습니다.
알리는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고, 같은 해 10월 프로 복싱 데뷔전에서 치르며 6라운드 만에 승리했다. 알리는 이슬람교로 개종한 후 1964년에 이름을 무하마드 알리로 바꿨다. 베트남 전쟁 중 알리는 미군 입대를 거부해, 1967년 징병 기피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3년 동안 권투 선수 자격이 금지되었다. 그는 항소 중인 1970년 10월 링으로 돌아와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1971년 3월에 알리는 ‘ 세기의 싸움 ‘에서 조 프레이저와 싸워 프로 복싱에서 첫 패배를 당했다. 1971년 6월, 미국 대법원은 병역 기피 혐의로 알리의 유죄 판결을 뒤집었다. 1974년 1월, 뉴욕에서 열린 재시합에서 알리는 프레이저를 12라운드에 이겼다. 같은 해 10월, 알리는 조지 포먼을 누르고, 헤비급 챔피언 벨트를 되찾았다. 1978년 2월 15일 라스베거스에서 알리는 스핑크스에게 패배했지만, 17개월 후에 다시 타이틀을 되찾았다.
1979년 6월, 알리는 은퇴를 발표했지만, 1980년 10월 다시 링으로 돌아와 헤비급 챔피언에 패했다. 그는 1981년 56승 5패 37KO를 기록하고 링을 떠났다. 1984년에 그가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알려졌다. 알리는 2016년 6월에 사망했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쏠 수있었던” 알리는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유일한 복싱한 선수이다.
온-오프 서점 서가를 둘러보면 독서와 메모기법을 다룬 책이 꽤 많다. 스테디셀러로 자리를 잡은 책도 있고, 신간도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왜 그럴까? 독서론 테마의 경우 독서를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은 욕구가 사회 저변에 늘 깔려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다수가 독서가 당장 돈벌이나 출세에 도움을 주지 못할지라도 독서를 통해 변화의 계기를 마련하고 싶어 한다.
메모론은 독서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아날로그 시절 메모론은 대체로 수첩이나 메모카드를 중심으로 할 일, 일정, 스쳐지나가는 아이디어 등을 효과적으로 기록하고 관리하는 류가 대세였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이런 유형의 메모론 대신 독서 메모론이 인기를 끌고 있다. 책 내용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 또는 책을 어떻게 깊게 즐길 수 있는지를 소개하는 메모론이 서점에 많이 등장한다. 디지털 시대의 독성을 해독하기 위한 아날로그적 감성의 복귀가 아닌가 싶다.
2020년에 읽은 도서 목록 중에서 신정철의 ‘메모 독서법’ ‘메모 습관의 힘’과 아사다 스구루의 ‘한 줄 정리의 힘’이 독서 및 메모 테마에서 돋보였다.
신정철과 아사다는 공통적으로 메모와 요약, 그리고 독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각자 특유의 방식을 소개한다. 신정절의 메모 및 요약 기법을 먼저 소개한다.
신정철은 필사를 메모의 기본으로 삼고, 책의 여백에 추가 정보를 기입하는 것으로 보조로 삼는다. 신정철의 요약 기법의 기본은 나를 위한 서평 쓰기다. 책을 다 읽으면 자기 자신을 독자로 생각하고 서평을 작성하는 것이다. 뇌에 입력한 내용을 객관화하여 뇌 밖으로 출력하는 절차인 셈이다.
▲신정철의 ‘메모 습관의 힘’과 ‘메모 독서법’
신정철은 이런 나를 위한 서평 기법을 바탕으로 남을 위한 글쓰기로 나아갔다. 그는 서평을 블로그 등에 공개하기 전에 가상의 독자가 어떤 문제를 궁금해할지, 어떤 것을 친숙해하는지를 자신에 질문을 던지고 그것에 답하는 방식으로 서평을 썼다고 한다.
▲아사다 스구루의 ‘한 줄 정리의 힘’
신정철의 책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마인드맵 활용법이다. 그는 메모와 요약을 합친 기법으로 마인드맵을 활용한다. 예를 들어 독서 모임에서 발제할 경우 책 내용은 마인드맵으로 요약하고, 그 마인드맵을 모임에 가져가서 발표하는데 사용한다. 즉, 마인드맵은 메모와 요약을 동시에 실행하는 역할을 한다.
다음 아사다의 기법을 살펴보자.
아사다의 메모 기법의 기본은 ‘1 sheet frame works’이’라는 형식이다. 종이 한 장 (A4용지 기준)에 칸을 만들어 책을 읽는 목적(Purpose)를 먼저 적는다. 이어 책을 읽으면서 중요한 키워드를 칸에 기입한다. 마지막 작업은 키워드를 보면서 20자로 책의 핵심을 요약하는 20자 쓰기다.
▲아사다 스구루가 고안한 20자 요약용 한 장짜리 프레임 워크
아사다 요약 법의 특징은 20자로 요약하는 것이다. 사실, 아무리 두꺼운 책이라도 책의 세세한 내용을 모두 장기 메모리에 저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핵심 내용을 20자로 요약해서 언제 어디서든지 활용할 수 있으면 그 책을 제대로 읽은 것이다.
아사다도 신정철처럼 독서로 습득한 지식을 자신의 언어로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지 못하면 아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아사다의 출력 방법은 세 가지 질문을 상정하여 스스로 답하면서 종이 한 장에 요약하는 것이다. 즉, 왜 읽었나?(Why) 무엇을 알거나 얻었나?(What)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How)에 대한 답변을 마련해야 만 다른 사람에게 쉽고 명확하게 책 내용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사다의 출력 요약 방법에 따라 ‘한 줄 정리의 힘’ 파트II를 정리한 사례
신정철과 아사다의 메모 및 요약 기법은 외형에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지향하는 바는 서로 흡사하다.
첫째, 책을 읽을 때 (또는 지식을 습득할 때) 눈으로 읽지 말고, 손으로 읽으라는 것이다. 즉, 펜을 들고 종이에 메모하면서, 읽으라는 것이다.
둘째, 가상의 독자를 상정하고 그 독자에게 쉽게 설명할 수 있도록 핵심을 잘 요약해 두라는 것이다.
셋째, 요약을 하되, 기존 지식과 또 다른 지식과 연결점을 적극적으로 생각하면서 요약을 하라는 것이다.
프랑스 마르세유의 교도소에서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튀니지 이민자가 단두대에서 처형된 마지막 사람이었다. 단두대는 의사이자 혁명가인 길로틴이 모든 사형 선고를 “기계 수단”으로 집행하는 법을 통과시킨 후 시작되었다. 이른바 목을 자르는 기계는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일찍이 사용되었고, 길로틴과 그의 지지자들은 이러한 장치를 교수형이나 총살이나 다른 방법의 처형보다 더 인도적인 것으로 여겼다. 프랑스 참수 기계가 제작되어 시체에 대해 테스트 되었고, 1792년 4월 25일 노상강도가 프랑스 혁명에서 이 방법으로 처형된 최초의 사람이었다. 길로틴의 이름을 따서 곧 “단두대(길로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혁명 기간 동안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포함하여 10,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단두대로 머리를 잃었다. 단두대 사용은 19세기와 20세기 프랑스에서 계속되었으며 단두대에 의한 마지막 처형은 1977년에 이루어졌다. 1981년 9월 프랑스는 사형을 전면 금지하여 단두대는 영원히 사라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뉴질랜드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APEC) 정상회담에 참석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클린턴 미국 대통령, 오부치 일본 총리는 사상 첫 3국 정상회담을 열고 대북한 정책을 집중적으로 조율했다. 그 이전인 1998년 10월 8일 김대중-오부치 선언이 있었다. 과거사 인식을 포함해 ‘21세기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토대로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가자는 것이 기본취지였다. 한국 내 일본 대중문화 개방과 학생 유학 교류 등이 포함됐다. 1998년 양국의 합의는 한미일 첫 3국 정상회담을 이끌어냈다. 3나라 정상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대한 강력한 경고와 함께 관계개선을 희망하는 발표문을 냈다. 3국 정상들은 북한이 한반도 항구적인 평화정착의 길에 나선다면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고 공동발표문을 통해서 밝혔다.
화창한 화요일 오전 8시 46분경 , 20,000갤런의 제트 연료를 실은 아메리칸 항공의 보잉 767기가 뉴욕 세계 무역센터 북쪽 타워에 충돌했다. 첫 번째 비행기가 충돌한 지 17분 후, 두 번째 보잉 767기가 나타나 남쪽 타워와 충돌했다. 두 번의 충돌로 인해 주변 건물과 거리에 대규모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세계 무역 센터가 거대한 먼지와 연기 속에 무너지면서 최악의 재앙이 발생했다. 시속 200마일이 넘는 바람과 대형 화재를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된 초고층 건물이 엄청난 열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다. 세계 무역 센터와 그 인근에서 343명의 소방관을 포함해 거의 3,000명이 사망했다. 붕괴 당시 세계 무역 센터 타워에 있던 사람 중 6명만이 살아남았다. 한편 수 백만 명의 시민이 뉴욕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공포에 질려 지켜보는 있는 동안, 아메리칸 항공 77편은 오전 9시 37분에 워싱턴 DC 시내 상공을 돌다가 국방부 군 본부 서쪽에 충돌했다. 여객기에 탑승한 64명을 포함해 모두 125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국방부에서 사망했다.
사우디 출신 오사마 빈 라덴 이 이끄는 ‘알카에다 ‘조직이 배후에 있었다. 그들은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 , 걸프 전쟁 개입 , 중동에서 지속적인 군사 주둔에 대한 보복 조치였다. 테러리스트 중 일부는 미국에 1년 이상 거주했고, 미국의 상업 비행 학교에서 비행 수업을 받기도 했다. 또 다른 대원들은 9월 11일 이전 몇 달에 걸쳐 미국으로 들어왔다. 19명의 테러범들은 동부 해안 3개 공항의 보안 검색대를 통해 쉽게 상자 절단기와 칼을 밀반입하고 캘리포니아 행 비행기 4편에 탑승했다. 장거리 대륙 횡단 여행을 위해 연료를 가득 채운 항공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륙 직 후 테러리스트들은 비행기 4대를 지휘하고 조종권을 빼앗아 일반 여객기를 마치 유도 미사일처럼 이용해 뉴욕을 습격했다. 9월 11일 이후, 세계는 달라졌다.
1971년 10월 11일,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노래 중 하나인 존 레논의 “Imagine”이 발매되었다. 존 레논은 비틀즈의 멤버였을 때 이 곡을 쓰기 시작했다. 당시 밴드는 전례 없는 인기를 얻었지만, 존 레논은 새로운 현실에 대처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이 노래의 이상주의적이고 유토피아적인 가사는 레논의 아내이자 개념 예술가인 오노 요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나중에 “가사와 컨셉” 이 오노의 시집인 ” 자몽 에서 바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고 , 오노 요코는 2017년에 공식적으로 공동 작문 크레딧을 받았다.
비틀즈가 해체된 지 1년이 조금 넘은 뒤, 레논은 프로듀서 필 스펙터와 함께 자신과 오노의 시골 별장에서 단일 세션으로 “이매진”을 녹음했다. “Give Peace a Chance”, “Power to the People”, “Happy Xmas (War is Over)” 등 그 시대에 발매된 레논의 다른 곡들과는 달리, 이 노래에는 노골적인 정치적 메시지가 담겨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을 상상하라/모든 세계를 공유하라”와 같은 대사는 더욱더 유토피아적 비전을 노래했다. 레논의 솔로 앨범 중 상업적으로나 음악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앨범이 되었다. 2006년부터 뉴욕시의 새해 전야에 연주됐고 , 2012년 런던 올림픽 폐막식과 2018년 평창 올림픽 개막식에도 연주되었다. ” 리버풀의 존 레논 국제공항은 “Above us, only sky”라는 노래 가사를 모토로 사용하고 있다.